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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 한국사 : 17세기, 대동의 길 - 조선 3 ㅣ 민음 한국사 3
문중양 외 지음, 강응천 엮음 / 민음사 / 2014년 6월
평점 :
# 명청 교체기 전후의 사건
1. 누르하치의 굴기(1583, 선조 25)
2. 임진왜란(1592)
3. 후금後金 건국(1616, 광해군 8)
4. 후금이 명에 선전포고(1618)
5.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제국 성립 선포, 조선 침략(1636)
6. 명 멸망, 산해관을 통과한 청이 북경을 접수(1644)
"광해군은 크게 세 방향에서 대후금 정책을 펼쳐 나갔다. 먼저 후금의 동향을 파악하고 관련 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조선의 내부 정보가 유출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또 후금에 대해 유연한 자세를 취하면서 그들을 기미(상대를 견제만 할 뿐 직접 지배하지 않는 정책)하려 노력했다."(43) (1618년 누르하치가 이른바 일곱 가지 원한을 내걸고 명에 선전포고한 뒤 무순을 공격해 점령하자 명은 조선에 원병을 요구했다. 명의 원병 요구를 놓고) "광해군은 우선 파병을 요구하는 문서를 보낸 주체가 명의 황제가 아니라 왕가수 등 신하라는 사실부터 문제 삼았다. 황제가 칙서를 내린 것이 아니므로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광해군은 또한 조선의 약한 병력을 보내 봤자 명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내세워 파병을 회피하려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료들은 "조선이 명의 번국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뒤, 조선이 원병을 파견하되 명의 지휘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45-6)
# 명군 총사령관 양호의 질타로 1619년(광해군 11) 1만 5000여 명의 병력 파견 / 심하전투에서 패전
"광해군은 (심하전투를 포함해 일련의 싸얼후 전투에서 명군이 대패한 후의 이른바) '전후 외교'에서도 수완을 발휘했다. 당시 요동 등지의 명군 지휘관들 가운데는 '조선이 고의적으로 항복했다'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광해군은 이 같은 의심을 불식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와 관련해 광해군은 먼저 심하전투에서 전사한 김응하를 현창하는 사업을 벌였다." "김응하 추모를 통해 심하전투 당시 '조선군도 목숨을 바쳐 분전했다'는 것, '조선이 거국적으로 그를 추모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강홍립이 고의적으로 항복했다'고 여기는 명의 의심을 해소하려는 계책이었다." "광해군은 또 명이 조선에서 재차 원병을 동원하려는 것을 차단하는 데 부심했다. 광해군은 후금군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귀환한 도망병들의 견문 내용을 명에 알리는 한편, 조선군이 원정에 동참한 데 원한을 품은 후금이 보복 차원에서 조선을 침략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환기시켰다."(49-50)
"명과 후금의 양단에 걸쳤던 광해군의 대외 정책은 서인이나 남인 신료들로부터 커다란 반발을 샀다. 더욱이 광해군이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폐모살제廢母殺弟'를 자행하고 경덕궁(지금의 경희궁) 건설을 비롯한 토목 사업에 집착하자 민심 또한 이반되었다." "1623년(인조 1) 3월 이 같은 광해군의 '패륜 행위'를 문제 삼아 김류, 이귀 등 서인들이 중심이 되고 광해군의 조카인 능양군(훗날 인조)이 주도한 정변이 일어났다."(57) 명은 "'인조와 새 정권이 명에게 충성을 다해야만 책봉해 준다'는 전제를 달고 있었다. 그나마 책봉을 결정하기까지 2년 이상 시간을 끌었다. 그 시간 동안 명은 '명분'과 '현실'을 놓고 고민한 끝에 '조선의 정변이 불법 찬탈임에도 불구하고 새 정권이 책봉을 간청하면서 오랑캐와 싸우겠다고 다짐하기에 봉전封典의 은혜를 베풀기로 했다'는 명분을 만들어 냈다. 명은 이제 조선에게 기존의 '재조지은'뿐 아니라 '봉전지은'을 베푼 존재로 떠올랐다."(59)
# 폐모살제廢母殺弟 : 서자 출신인 광해군은 즉위 후에 후환을 없애라는 대북파의 요구에 따라 영창대군(선조 말년에 인목대비가 낳은 아들)을 제거하고, 인목대비를 서궁(덕수궁)에 유폐시켰다.
"(누르하치의 여덟째 아들로 칸에 오른) 홍타이지는 1627년(인조 5) 조선을 침략해 당면한 난제들을 돌파하려 한다. 그것이 곧 정묘호란이다. 홍타이지가 정묘호란을 도발한 목적은 복합적이었다. 가장 큰 목적은 '목에 걸린 가시' 모문룡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또 조선을 협박해 생필품의 교역 루트를 확보하는 것도 중요했다. 홍타이지는 조선 침략군의 사령관에 (독립을 꿈꾸던 사촌형) 아민을 임명했다. 그의 능력과 충성심을 시험할 수 있는 절묘한 인선이었다." "1624년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군사력을 소모한 조선군은 후금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후금군은 순식간에 황해도까지 남하하고 인조는 강화도로 파천했다. 후금군도 한계를 안고 있었다. 개전 초기 모문룡을 제거하는 데 실패한 데다 전쟁이 장기화하면 배후에 있는 원숭환의 위협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후금군은 서울로의 진격을 멈추고 조선에게 화의를 제의했다. 우여곡절 끝에 조선과 후금은 화약을 체결했다."(62-3)
"후금과 화약을 맺은 조선은 내부적으로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인조 정권이 후금과 화친한 것은 '명을 배신하고 오랑캐와 화친했으므로 광해군 정권을 타도한다'는 인조반정의 명분을 무색하게 만드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조선을 곤혹스럽게 한 것은 정묘호란 이후에도 명과 후금의 군사적 대결이 지속되는 사실, 그리고 양자의 싸움에서 후금이 계속 명을 이기고 있는 현실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조선이 '부모국' 명, '형제국' 후금과 모두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65) 1633년, 산동 일대에서 반란을 일으킨 명군 지휘관 공유덕과 경중명이 토벌군의 공격을 피해 후금으로 귀순하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조선군이 명의 편을 들고 후금군과 교전까지 벌이자 홍타이지는 격분했다. 정묘호란 이후 어렵사리 유지되던 양국의 화친 관계가 사실상 파탄으로 끝나는 순간이었다."(68)
"(1636년 마침내 제위에 오른) 홍타이지는 '조선 정벌'을 결심하고 그 이유를 하늘에 고하는 의식을 열었다. 홍타이지는 정묘년 맹약 이후 조선이 '저지른 과오'를 나열했다. '도망친 요민들을 명으로 넘긴 것', '명에는 병선을 빌려 주면서 후금에게는 그러지 않은 것', '공유덕 등이 귀순할 때 명을 편들고 후금은 돕지 않은 것', '인조의 유시에서 정묘년 화약은 부득이했으나 이제 대의로써 절교한다고 한 것', '조선인들이 맹약을 어기고 국경을 넘어와 산삼을 캐 간 것' 등을 조선 침략 명분으로 제시했다. 이윽고 12월 9일, 청군은 압록강을 건너 침략을 개시했다. 병자호란이다."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조선 조정이 고립무원의 상태에 처한 사실을 인지한 홍타이지는 항복을 요구했다. 그들이 조선에 제시하는 항복 조건은 갈수록 가혹해졌다." 전란을 타개할 계책이 전무한 것을 깨닫자,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남한산성의 서문을 나와 송파의 삼전도에서 홍타이지에게 항복한다."(71-2)
"병자호란 이후 인조는 권력을 지키기 위해 철저히 청에 순응하는 자세를 취해다. 그는 항복 이후 척화신들을 조정에서 배제하고 최명길 등 주화파 신료를 중용했다. 나아가 '자강을 도모해 청에 대한 복수를 도모하자'는 신료들의 주장에 응답하지 않고, 청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은 신료를 파직시키기도 했다. 1640년(인조 18) 청이 자신의 '충성심'을 떠보기 위해 원손元孫을 입송시키라고 했을 때에도 철저히 순응하는 자세를 보였다." "1643년(인조 21) 순치제順治帝가 즉위한 뒤 청이 소현세자를 조기에 귀국시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입조론 때문에 겁먹었던 인조에게 이제 소현세자는 아들이 아니라 '정적'이자 '경쟁자'로 보였다. 인조는 소현세자를 의심하고 감시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 부자 관계는 파괴되어 갔다. 급기야 1645년 2월, 소현세자가 영구 귀국했을 때 인조의 반응은 싸늘했다. 그리고 소현세자는 급사한다. 곧이어 세자빈인 강빈 역시 역적으로 몰려 사사되는 비극이 일어났다."(81-2)
"임진왜란 직후의 상품유통 경제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이전과는 다른 상황에 처해 있었다. 시전 체제처럼 국가의 통제 아래 있던 교역 체계는 파탄에 이르렀다. 반면 장시처럼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 있던 교역 기구는 계속 성장해 이전과 다른 유통 체제의 형성에 접근하고 있었다." (상품유통 경제의 발전은) "한편으로는 농민층 사이의 경제력 차이를 벌려 농민층 분해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토지에서 쫓겨난 농촌 사회의 유민流民들에게 상업 활동으로 생계를 유지할 기회를 제공했다."(120) "국가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공명첩空名帖(성명란을 비워둔 임명장)을 함부로 찍어 내거나 납속책納粟策(곡물을 바치는 대가로 상이나 벼슬을 주는 정책)을 통해 면천을 남발하는 시책은 신분제의 문란을 가져왔다." "지배층 자신들이 살아남아야 노비도 부릴 수 있다는 논리로 왜군의 목을 베어 오는 천인에게 면천을 약속했다." "전쟁은 많은 것을 파괴하면서 또 많은 것을 가능케 했다."(121)
"(공물을 대납하고 대가를 받는) 방납防納의 메커니즘은 지방의 장시, 도성의 경시京市에서 공물을 사 들이는 행위를 통해 돌아간다. 이 행위의 주체인 방납인은 새로운 유통 구조 속의 상인층으로 등장했다. 방납인을 중심으로 하는 공물 방납의 확대는 한편으로는 불법적인 방납권을 통한 상업자본의 축적을 초래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장시의 확산을 가져오는 요인이 되었다. 나아가 농촌 경제에서 상품유통이 지닌 비중을 증대시켰다." "방납인들에게 경제적 이익은 떨쳐 버리기 어려운 유혹이었다. 당시 방납인으로 활약한 것은 권세가의 하인, 중앙관청의 서리胥吏 등이었다. 이들은 지방에서 바친 공물에 흠집이 있다는 식으로 퇴짜를 놓았다. 그런 다음 다시 준비할 공물을 방납인에게 본래 공물 가격보다 턱없이 높은 가격으로 구해서 바치게 했다. 방납의 폐단은 관청의 유력자와 결탁한 방납인에 의해 저질러졌다. 이에 따라 농민은 본디의 공물 가격에 비해 훨씬 많은 부담을 짊어져야 했다."(126-7)
# 모순을 더해가는 세제
1. 무너지는 조용조租庸調(전세·잡역·공납) 체제 : 대토지 소유자의 이해관계에 맞게 점차 대부분의 토지를 하등전으로 분류하면서 전세 비중 축소, 용조 비중 증가
2. 악순환 고리 : 재정악화 → 증세 정책 시행 → 전세는 그대로인 채 공물 압력만 가중 → 농민의 토지 이탈과 초적으로의 변신 → 세수 감소와 정치·사회적 위기 초래 → 재정 악화
1649년(효종 즉위) "김육이 (1608년 경기도에서 시범적으로 도입된 후 제도와 관련 시설 미비를 핑계로 정체 상태에 있던) 대동법 시행을 주장한 것은 그의 말대로 안민安民의식과도 관련이 있지만 정치적 위기감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그는 나라의 근본이 되는 삼남 지방이 동요하면 나라가 망하게 될 것이라며 이 지역에서 대동법을 시행할 것을 강력하게 촉구했다. 김육의 주장에 반대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이조판서 김집이 대동법 반대 진영의 선두에 나섰다. 김집은 아버지 김장생의 학맥을 이어받아 예학의 태두로 군림하며 문하에 많은 제자를 두고 있었다. 그는 공납제가 국왕에 대한 진상의 의미를 갖는다고 강조하며 공물을 쌀로 일원화하는 대동법 시행에 반대했다. 김육이 이를 반박하자 김상헌, 송시열, 송준길 등이 김육을 공격하며 김집을 두둔하고 나섰다. 이로써 대동법 논의는 김집, 송준길, 송시열 등 산당山黨과 김육, 신면 등 한당漢黨의 분열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137-8)
# 산당 : 향촌의 서원을 중심으로 결집한 세력 / 한당 : 한강 이북 도성에 거주하는 경화사족京華士族 세력
"조선의 사대부들은 이전 유목계 왕조들이 100년을 넘기지 못한 역사를 기억하고 있었다. 따라서 청 또한 100년이 못 갈 것으로 예상했다. 그렇다면 '홀로 남은 유교 문명국' 조선은 다시 밝아질 유교의 보루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식인들은 국내의 여러 질서와 문화를 철저히 유교식으로 정비하며 미래를 맞고자 했다. 정비는 유학에서 시작해 당대의 정치, 사회 등 모든 분야에 미쳤다. 유학, 특히 주자학의 성격부터 달라졌다. 주자학은 새 사회 건설의 이념이 되었다. 예학禮學이 중시되고, 학파에 뿌리를 둔 붕당이 형성되었다. 붕당의 정점에는 이념가인 산림山林이 자리 잡고 있었다. 개인의 일상도 주자학적 예법에 따라 재구축되었다." 예송禮訟 논쟁이 이단 시비로 확대되는 장면은 "조선이 유교의 불씨를 보존해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집단적 책임감을 전제하지 않으면 연출될 수 없었다. 그렇게 조선은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전형적인 주자학 국가로 재탄생하고 있었다."(175)
유교에서 예는 "일상 행동의 기본일 뿐 아니라, 사회·국가·세계 질서의 근본으로 간주되었다." "주자학은 한발 더 나아가 예를 자연적이고 보편적인 질서와 일치시켰다. "예를 행하는 데는 조화가 중요하다禮之用, 和爲貴."라는 <논어>의 구절에 대해 주희는 "예는 천리가 적절하게 행해진 것이고 인간 만사의 의식과 법칙이다天理之節文, 人事之儀則."라고 해석했다. 이로서 예는 천리의 형상물이자 사회 운영의 기준이 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주자학적 예법의 정착을 압박한 외부 요인이었다. 양 난을 겪는 과정에서 국가 기강이 해이해지고 사회 질서가 혼란해졌기 때문이다. 국가와 사회의 재건을 두고 조선 지배층은 이미 정착하고 있던 주자학적 예법을 강화하는 방향을 택했다." "남인 학자 장현광이 "다스림에는 예교禮敎보다 더 앞서는 것이 없고, 학문은 예학보다 더 간절한 것이 없다."라고 한 발언에서는 예로써 사회 질서를 재건해야 한다는 절박함을 볼 수 있다."(195-6)
적장자가 부친을 계승하는 종법 질서가 예법의 기초를 이루고 명분 질서를 고정하게 되면서 "외가의 비중이 약해진 자리는 부계父系 시조를 중심으로 구성된 본관本貫이나 본관 안의 특정 지파가 결속한 문중門中이 차지했다. 문중은 17세기 이후 공고해지기 시작했다. 문중은 시조나 뛰어난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그들의 업적을 기리는 현창 사업 등을 통해 결속력을 다졌다. 또 제사를 위한 토지 등의 명목으로 문중 재산을 형성하고, 종계宗契·종회宗會 등 다양한 모임을 결성해 일종의 사회 조직으로도 기능했다. 향촌에서도 부계 성씨를 중심으로 한 동성 촌락同姓村落이 생겨났다. 본관이나 문중의 구성원들은 정기적으로 족보를 제작해 구성원들이 한 뿌리에서 나왔다는 동본同本 의식을 공유했다." "부계 친족 위주의 질서가 17세기에 대세를 이루게 된 이유는 종법을 중심으로 이완된 사회 질서를 재편하려 한 사회 구성원의 선택 때문이다."(200)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은 이념화된 유교를 택했다. 주자학이 '주의화主義化'한 것이다. 이를 가장 일관성 있게 구축한 사상가는 송시열이었다. 그는 '오늘날은 송이 남쪽으로 내려왔을 때와 같다'고 해 자신의 시공간을 주희의 시공간과 동일시했다. 또 '주자가 조정의 부름에 응했던 것은 복수에 뜻을 두었기 때문'이라고 해 주희를 대학자뿐 아니라 중화 문화의 수호자로도 부각했다."(180) "송시열의 '주자 식으로'와는 다른 경로의 유교 문명을 구상한 지식인도 있었다. 주자학과는 다른 모델을 체계적으로 구상한 대표적인 학자는 유형원이었다. 유형원은 <반계수록>에서 먼 옛날 이상 사회를 건설했다는 성왕聖王의 통치 시스템을 조선의 현실에 맞추어 제시했다. 고대 중국에서 시행되었다는 평등한 토지 제도인 정전법井田法을 근간으로 교육·군사·관료 시스템을 정비하자는 그의 주장은 이념보다는 공공 시스템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주자학보다 더 근본적이었다.(182)
"사대부들이 사용하는 용어가 '복수설치'(復讐雪恥)로부터 '북벌'로 바뀌어 간 것 역시 중화 의식과 관련이 깊다. 복수설치는 의리를 천하에 보여 수치를 씻고 잔존한 남명의 중국 복권을 돕는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북벌은 다르다. '벌伐'이란 말은 천자가 난적亂賊을 토벌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북벌은 남명조차 망했으므로 유일한 정통인 조선이 청을 토벌한다는 의미를 내포했다." "조선이 소중화나 중화로 특별할 수 있는 근거는 '유교 문화의 실현' 때문이었다. 그런데 유교는 보편 정신이자 문화이므로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다. 청, 일본 등도 유교 문화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얼마든지 중화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청이 한족을 지배하는 논리도 그 논리에 근거해 있었다. 명은 민심을 잃어 내분으로 망했고 천명을 얻은 청이 명을 위해 복수했다는 것으로 통치의 정당성을 내세웠다. 게다가 시간이 갈수록 청은 명보다 더 뛰어난 내치로 민생을 안정시키고 있었다."(190)
새로운 국제관계가 안정기로 접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장생에서 송시열로 이어지는 서인 산림은 주자학에서 강조하는 보편 원리를 중시했다. 주자의 <가례>는 의리와 예법의 일반 원칙이었으므로 기본적으로 왕실도 적용 대상이었다. 송시열은 장유長幼라는 보편 원칙 앞에는 왕실도 예외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체이부정(體而不正, 아들이지만 맏이가 아닌)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보편 예법을 왕실에 관철할 것인지 여부는 국왕의 위상과 연동된 민감한 문제였다." "윤휴와 허목으로 대표되는 남인 산림은 생각이 달랐다. 의리와 예법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점에서는 그들도 송시열과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의리를 대변하는 국왕의 특수한 지위를 인정했다." "따라서 윤휴는 모든 신민은, 그가 왕의 어머니일지라도, 군주에 대해 동일한 예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허목은 종통을 이은 군주는 장유長幼의 차례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주장했다."(208-9)
# 예송논쟁
1. 기해예송(1659) : 효종이 승하하자, 인조의 계비이자 효종의 계모인 장렬왕후가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놓고 벌인 논쟁
2. 갑인예송(1674) : 효종비 인선왕후가 승하하자 시어머니인 장렬왕후가 맏며느리에 해당하는 상복을 입을 것인가, 둘째 며느리에 해당하는 상복을 입을 것인가를 놓고 벌인 논쟁
"그러나 환국기를 지나면서 (17세기 주자학의 이상을 주도하던) 산림의 위상은 떨어지기 시작했다. 붕당 사이의 대립과 논쟁이 격화함에 따라 산림이 공론이 아니라 자기 정파의 이해만을 대변한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붕당정치의 대안으로 탕평 정치가 전개되고 국왕이 군사(君師, 국왕이자 사대부의 스승)를 자임하며 성왕을 표방하자, 산림의 위상은 결정적으로 격하되지 않을 수 없었다. 사회의 변화도 산림의 지위가 떨어진 원인이었다. 18세기에 접어들자 도시의 문물이 흥기하고 학문이 전문화되어 갔으며 새로운 학문 풍조도 일어났다. 이런 변화 속에서 향촌에서 유교 경전 위주로 공부를 하던 산림의 사회 인식과 식견은 뒤떨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산림의 정치적 영향력은 영조 대에 현격히 축소되며, 정조 대에는 노골적으로 친왕적 속성을 드러내는 산림도 나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19세기에는 세도 가문의 식객과 같은 인물도 나와 산림은 점차 형식적인 지위로 전락해 간다."(222)
# 주요 환국
1. 경신환국庚申換局(1680) : 종친 복선군과 허적의 서자인 허견이 역모를 꾸몄다는 고변이 올라오자, 숙종이 남인 전체를 정계에서 도태시키고 서인 일색의 정권을 구성한 사건
2. 기사환국己巳換局(1689) : 노론의 영수 송시열이 희빈 장씨의 소생을 원자元子로 정한 숙종의 결정을 비판하다가 서인 대다수가 파직되고 남인이 대거 기용된 사건
3. 갑술환국甲戌換局(1694) : 폐비 민씨를 복위시키려는 음모를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이 서로를 맞고변하자, 숙종이 새로 총애하던 숙원 최씨(영조의 모친)와 가까운 서인의 손을 들어준 사건
4. 신임환국辛壬換局(1721-22) : 신축년(1721)의 환국과 임인년(1722)의 옥사를 합쳐 부른 말. 노론이 경종의 병세를 빌미삼아 왕세제였던 연잉군(영조)의 대리청정을 추진하다가 정권을 잃은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