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제국사 - 전4권 - 히틀러의 탄생부터 나치 독일의 패망까지
윌리엄 L. 샤이러 지음, 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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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부 종말의 시작


제27장 신질서 


"신질서Neuordnung는 나치가 지배하는 유럽에서 독일의 이익을 위해 자원을 착취하고, 주민들을 독일인 지배인종의 노예로 삼고, 〈바람직하지 않은 부류〉─유대인이지만 동방의 숱한 슬라브인, 특히 지식인층까지 포함해─를 절멸시키려는 질서였다. 유대인과 슬라브인은 열등인간Untermenschen이었다. 히틀러가 보기에 그들은 생존할 권리가 없었고, 기껏해야 슬라브인 일부가 독일인 주인의 노예로서 논밭과 광산에서 뼈빠지게 일하는 데 필요할 뿐이었다.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바르샤바 같은 동방의 대도시들을 영원히 지워버릴 뿐 아니라 러시아인과 폴란드인을 비롯한 슬라브인의 문화를 근절하고 그들에게 정식 교육을 허락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동방의 번창하는 공장들을 해체해 독일로 옮기고, 주민들은 독일인을 위해 식량을 생산하도록 농업에만 종사시키고 그들 몫으로는 겨우 목숨을 부지할 만큼의 식량만 지급할 계획이었다. 유럽 자체는 나치 지도부가 말했듯이 〈유대인이 없는〉 곳이 되어야 했다."(1611-2)


"('유대인 절멸'을 의미하는) 〈최종 해결〉이라는 표현은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나치 간부들의 어휘와 문서에서 점점 더 빈번하게 나타났다. 그들은 이 무해해 보이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그것의 실제 의미를 서로에게 일깨우는 고통을 피하려 했던 듯하고, 어쩌면 언젠가 죄증이 되는 문서가 드러나더라도 이 표현으로 자신들의 죄를 얼마간 감출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최종 해결〉을 위한 성과를 가장 많이 거둔 곳은 30개 남짓한 주요 강제수용소가 아니라 절멸수용소Vernichtungslager였다. 가장 크고 가장 유명한 절멸수용소는 네 개의 거대한 가스실과 인접한 소각장을 갖추어 살해 및 매장 능력에서 다른 절멸수용소들─모두 폴란드에 있었던 트레블링카, 베우제츠, 소비보르, 헤움노─에 크게 앞선 아우슈비츠였다. 리가, 빌뉴스, 민스크, 커우너스, 리비우에도 별도의 작은 절멸수용소들이 있었지만, 독가스가 아닌 총격으로 살했다는 점에서 주요 절멸수용소들과 구별되었다."(1655-6, 1661-2)


"절멸수용소의 가스실 자체와 인접한 소각장은 근거리에서 볼 때 전혀 불길한 장소로 보이지 않았다. 그곳의 용도가 무엇인지 밖에서 보고 알아내기란 불가능했다. 그 주변에는 잘 가꾼 잔디밭과 꽃밭이 있었고, 입구의 표지에는 그저 〈목욕실〉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이상한 낌새를 알아채지 못한 유대인들은 모든 수용소의 관례대로 단순히 이를 잡기 위해 목욕을 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감미로운 음악까지 들려주었다! 경음악 악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생존자가 기억하듯이, 수감자들 중에서 〈모두 흰색 블라우스와 감청색 치마를 입은 어리고 예쁜 소녀들〉로 오케스트라를 꾸렸다. 잠시 후 치클론 B가 살포될 가스실로 들어갈 이들을 선별하는 동안, 이 독특한 합주단은 〈유쾌한 과부〉나 〈호프만 이야기〉의 즐거운 곡들을 연주했다. 베토벤의 장중하고 침울한 곡은 전혀 들려주지 않았다. 아우슈비츠에서 죽음의 여정은 빈과 파리의 오페레타 못지않게 명랑하고 쾌활한 분위기 속에 이어졌다."(1665-6)


제28장 무솔리니의 실각 


"한때 북아프리카에서 막강했던 추축국 군대의 잔존 병력을 1943년 5월 초 튀니지에서 생포한 아이젠하워 장군의 영국-미국 군대는 뒤이어 이탈리아 본토를 겨냥할 것이 확실했다. 병든 몸의 무솔리니는 미몽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겁을 먹었다. 패배주의가 이탈리아 국민과 군대 사이에 만연했다." "디노 그란디, 주세페 보타이, 그리고 치아노가 이끄는 파시스트당의 반두체 지도부는 1939년 12월 이래 열리지 않았던 파시즘 대평의회의 소집을 요구했다. 대평회의는 1943년 7월 24일에서 25일에 걸친 밤에 소집되었고, 무솔리니는 독재자가 된 이후 처음으로 국가를 재앙으로 이끈 실책에 대한 맹렬한 비판을 받았다. 대평의회는 19표 대 8표로 민주적 의회를 갖춘 입헌군주정의 복원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가결했다. 또한 군 통수권 전체를 국왕에게 반환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두체는 7월 25일 저녁에 왕궁에 불려갔다가 그 자리에서 총리직 해임을 통보받고 불명예스럽게 실각했다."(1707, 1710)


"1943년 9월 초의 두 사건이 총통의 계획을 발동시켰다. 9월 3일 연합군이 이탈리아 남단에 상륙했고, 9월 8일 이탈리아와 서방 열강의 휴전협정(9월 3일 비밀리에 체결)이 공표되었다. 하루이틀 동안 이탈리아 중부와 남부에서 독일군의 상황은 극히 위태로웠다. 그러나 연합군 사령부는 이탈리아의 동서 해안 거의 어디서나 상륙할 수 있도록 해주는 완전한 제해권을 활용하지도 않았고, 독일 측이 우려한 압도적인 제공권을 활용하지도 않았다." "이탈리아군 사단들을 거의 총 한 발 쏘지 않고 포위하고 무장해제했을 때 독일군은 안도했다. 이것은 독일군이 로마를 쉽게 장악할 수 있고 당분간 나폴리까지 확보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이로써 독일군은 자국을 위해 무기를 생산할 공장들이 있는 북부 공업 지역을 포함해 이탈리아의 3분의 2를 손에 넣었다. 마치 기적처럼 히틀러의 수명은 다시 연장되었다. 그러나 무솔리니가 실각하고 이탈리아가 전쟁에서 이탈하자 히틀러는 속이 아렸다."(1716-9)


"1943년 7월 5일, 히틀러는 소련군을 상대로 이번 전쟁에서 마지막이 될 대규모 공세를 개시했다. 독일 육군의 정예 병력─신형 티거 중전차로 무장한 무려 17개 기갑사단을 포함하는 약 50만 명─이 쿠르스크 서쪽의 넓은 소련군 돌출부로 달려들었다. 히틀러는 이 '성채 작전'으로 소련군의 정예인 100만 병력─저번 겨울에 스탈린그라드와 돈 강에서 독일군을 몰아냈던 바로 그 병력─을 에워싸는 데 더해 돈 강까지, 어쩌면 볼가 강까지 밀어붙인 뒤 남동쪽에서 북진해 모스크바를 함락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결과는 참패였다. 소련군은 공세에 대비하고 있었다. 7월 22일경 기갑전력에서 전차의 절반을 잃은 독일군은 완전히 멈추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전력 우위를 확신한 소련군은 7월 중순 쿠르스크 북쪽 오렐의 독일군 돌출부를 역으로 공격해 금세 전선을 돌파했다. 이것은 2차대전에서 소련군의 첫 번째 하계 공세였으며, 이 순간부터 붉은군대는 끝까지 주도권을 잃지 않았다."(1726)


"1943년에 히틀러의 운세를 꺾고 전세가 역전되었음을 보여주는 두 가지 사건이 더 있었다. 바로 대서양 전투 패배와 독일 본토 상공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격화되는 치열한 공중전이었다. 1942년에 독일 잠수함들은 대부분 영국이나 지중해로 향하던 연합국 선박 625만 톤을 격침했는데, 이는 서방 조선소들의 손실 보충 능력을 한참 상회하는 톤수였다. 그러나 1943년부터 연합군은 기술 개선, 이를테면 장거리 항공기와 항공모함, 그리고 적 잠수함에 발각되기 전에 먼저 적함을 탐지하는 레이더를 장비한 수상함 등에 힘입어 U보트에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 "독일 국민이 현대전의 공포를 실감한 것도 이 기간이었다─각자의 집 문간에서 실감했다. 영국 항공기가 야간에, 미국 항공기가 주간에 투하하는 폭탄이 이제 독일인의 집을, 독일인이 일하는 사무실과 공장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괴벨스가 일기에서 밝혔듯이, 영국과 미국 공군의 폭격으로 가장 크게 손상된 것은 독일의 주택과 국민의 사기였다."(1727-31)


제29장 연합군의 서유럽 침공과 히틀러 살해 시도 


"베를린에서 슈타우펜베르크와 그 동지들은 마침내 계획을 완성했다. 공동 작전의 암호명은 '발퀴레Walküre'였다. 이는 적절한 명칭이었는데, 스칸디나비아-독일 신화에서 발퀴레는 고대 전장의 상공을 맴돌다가 죽어야 할 자들을 고르는, 아름답지만 무서운 처녀들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죽어야 할 인간은 아돌프 히틀러였다. 퍽 아이러니하게도 카나리스 제독은 실각하기 전에 발퀴레 아이디어를 하나의 보안 계획으로, 즉 베를린과 그 밖의 대도시들에서 고되게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 수백만 명이 반란을 일으킬 경우, 국내예비군─신체 건강한 군인들은 거의 모두가 전선에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이 이들 대도시에 대한 치안 조치를 취하도록 한다는 계획으로 꾸며서 히틀러의 승인을 얻어냈다." "그리하여 발퀴레는 군부 음모자들에게 완벽한 위장막, 즉 히틀러를 암살하자마자 국내예비군으로 베를린, 빈, 뮌헨, 쾰른 등지를 장악하기 위한 계획을 대놓고 세울 수 있도록 해주는 위장막이 되었다."(1770-1)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에 성공하자 베를린 음모단은 큰 혼란에 빠졌다. 슈타우펜베르크는 연합군이 1944년에 상륙을 시도하리라 생각하지 않았고, 설령 시도하더라도 실패할 확률이 반반이라고 믿었다. 그는 상륙 실패를 바랐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토록 많은 출혈로 대가를 치른 후라면 미국과 영국 정부가 서부에서 새로운 반나치 정부와 강화를 교섭하는 데 더 열의를 보일 테고 그럴 경우 더 좋은 조건을 얻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베크는 이제 반나치 반란에 성공한다 해도 적군의 독일 점령을 피할 수 없을 테지만, 그래도 전쟁을 끝내 더 이상의 인명 손실과 조국의 파괴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또한 강화를 성사시키면 소련군이 독일을 짓밟고 볼셰비키화하는 사태도 막을 수 있을 터였다. 거사를 통해 나치 독일 외에 〈또다른 독일〉이 있음을 세계에 보여줄 수 있었다. 소련, 프랑스, 이탈리아에서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전선은 당장 행동에 나서도록 음모단을 재촉했다."(1784-5)


"7월 19일 오후, 슈타우펜베르크는 라스텐부르크로 호출되었다. 와해 중인 동부전선에 투입하기 위해 국내예비군 측에서 급히 훈련시키고 있는 새로운 국민척탄병Volksgrenadier 사단들의 상황에 관해 히틀러에게 보고하라는 지시였다. 이튿날 7월 20일 오후 1시에 총통 본부의 첫 일일 회의에서 보고할 예정이었다." "정확히 오후 12시 42분, 폭탄이 터졌다. 슈타우펜베르크는 이후의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가 나중에 말했듯이, 병영은 마치 155밀리 포탄에 직격당한 것처럼 굉음과 함께 연기와 화염을 내뿜으며 박살이 났다. 시체들이 창문 밖으로 튕겨져 나오고 파편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흥분한 슈타우펜베르크는 회의실에 있던 전원이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슈타우펜베르크의 확신과는 반대로, 히틀러는 피살되지 않았다. 브란트 대령이 견고한 참나무 받침대의 바깥쪽으로 서류가방을 옮겨놓은 거의 무의식적인 행동이 히틀러의 목숨을 구했다."(1794, 1801-4)


"오후 9시 직후, 좌절한 음모단은 총통이 늦은 밤에 독일 국민에게 직접 방송할 것이라는 독일방송국의 발표를 듣고서 말문이 턱 막혔다. 몇 분 후 (반란 가담에서 반란 진압으로 돌아선) 레머 소령─이제 대령─에게 운명적인 용무를 맡겼던 베를린 방위군 사령관 하제 장군이 체포되었고, 친위대의 지지를 받는 나치 장군 라이네케가 베를린 내 모든 병력에 대한 지휘권을 넘겨받았으며 이제는 벤틀러슈트라세 기습을 준비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라스텐부르크─거사가 벌어진 히틀러의 '늑대굴'─의 정력적인 대응 조치, 레머를 설득하고 라디오를 활용하겠다는 괴벨스의 기민한 판단, 베를린 친위대의 집결, 벤틀레슈트라세 반란파의 믿기 어려운 혼란과 무대책 등으로 인해 음모단과 한배를 타려던 찰나의, 혹은 이미 한배를 탄 상당수 장교들이 마음을 고쳐먹었다." "반란에 가담하기를 거부하여 처음부터 음모단을 위험에 빠뜨리고 그 결과로 체포된 프롬 장군은 이제 기운을 냈다."(1823-4)


"반란 반대파들은 베크, 회프너, 올브리히트, 슈타우펜베르크, 헤프텐, 메르츠를 프롬의 빈 집무실로 몰아넣었고, 잠시 후 프롬이 권총을 휘두르며 나타났다." "프롬은 음모단을 제거하고 그들의 흔적을 지울 뿐 아니라─비록 음모에 적극 관여하기를 거부했지만 지난 몇 달 동안 음모를 알고서 암살자들을 숨겨주고 그들이 계획을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반란을 진압한 주역으로서 히틀러의 환심을 사기로 금세 마음먹었다. 나치 폭력배들의 세계에서는 너무 늦은 결심이었지만 프롬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프롬은 〈총통의 이름으로〉 〈군사재판〉을 요청했고(그가 요청했다는 증거는 없다) 네 장교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고 알렸다. 〈참모장 메르츠 대령, 올브리히트 장군, 이제 나로서는 이름을 모르는 이 대령[슈타우펜베르크], 그리고 이 중위[헤프텐].〉" "아래의 중정에서 군용차의 등화관제용 덮개가 씌워진 전조등이 희미하게 앞쪽을 비추는 가운데 네 장교는 총살대에 의해 금세 처리되었다."(1825-7)


"반란이 실패한 것은 그저 육군과 민간에서 가장 유능한 사람들 중 일부가 납득할 수 없을 정도로 서툴렀고, 프롬과 클루게의 성격에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고, 고비마다 음모단에 불운이 덮쳤기 때문이 아니다. 반란이 진압된 것은 장성이든 민간인이든 이 대국을 운영한 사람들 거의 모두가, 그리고 제복을 입었든 안 입었든 독일 국민의 대다수가 혁명을 일으킬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전쟁의 비탄과 패전 뒤 외국에 점령당할 암울한 전망에도 불구하고, 사실 그들은 혁명을 원하지 않았다. 스스로 초래한 독일과 유럽의 퇴화를 견뎌내지 못한 국가사회주의를 그들은 여전히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 지지했으며, 여전히 아돌프 히틀러를 국가의 구원자로 보았다. 〈[훗날 구데리안이 씀] 당시 독일 국민 대다수는 여전히 아돌프 히틀러를 믿었고, 만약에 그가 죽었다면 전쟁을 유리하게 종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을 암살자가 제거했다고 확신했을 것이다─이 사실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1850-1)


제6부 제3제국의 몰락


제30장 독일 정복 


"전선 전역에서 미군─북부의 영국군과 캐나다군─은 소모전을 벌여 안 그래도 약해져가는 방어군을 갉아먹고 있었다. 히틀러는 계속 수세를 취해서는 심판의 시간만 늦출 뿐임을 깨달았다. 그의 열에 들뜬 마음속에서 주도권을 되찾기 위한 대담하고 창의적인 계획이 떠올랐다. 타격을 가해 미 제3군과 제1군을 갈라놓고, 안트베르펜까지 진출해 아이젠하워로부터 주요 보급항을 빼앗고, 벨기에-네덜란드 국경을 따라 영국군과 캐나다군을 밀어붙인다는 계획이었다. 히틀러는 그런 공세를 통해 영미군을 완파하여 독일 서부 국경의 위협을 제거하는 동시에 소련군을 다시 상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소련군은 발칸에서는 여전히 진격하고 있었지만 폴란드와 동프로이센에서는 10월부터 비스와 강에 멈춰 있었다. 서부 공세는 지난 1940년에 대규모 돌파를 개시했던 곳이자 독일 정보기관이 파악하기로 미군의 약한 4개 보병사단만이 방어하는 아르덴을 통해 신속하게 감행할 계획이었다."(1863)


"그러나 아르덴에서 약체 4개 사단이 괴멸된 뒤 미 제1군의 흩어진 부대들은 임시변통으로 완강히 저항하여 독일군의 진격을 늦추었고, 돌파된 전선의 북쪽 측면과 남쪽 측면인 몬샤우와 바스토뉴를 단호히 사수하여 히틀러의 군대가 좁은 돌출부를 지나도록 만들었다. 미군의 바스토뉴 방어가 독일군의 운명을 결정했다." "아르덴에서 공세를 지속할 병력도, 알자스에서 공격에 나설 병력도 부족하다는 장군들의 항변에 히틀러는 귀를 닫았다. 〈나는 이 일을 11년간 해왔지만 ··· 모든 것이 완전하게 준비되었다는 보고를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 여러분은 결코 완전하게 준비되지 않는다. 명백히 그렇다.〉 히틀러는 말하고 또 말했다. 거의 온전하게 남아있는 이 회의 속기록의 길이로 판단하건대, 몇 시간 동안 말했다. 〈문제는 ··· 과연 독일에 존속할 의지가 있는가 아니면 파멸할 것인가다. ··· 이 전쟁에서 패한다면 독일 국민은 파멸할 것이다.〉 그런 다음 로마의 역사와 프로이센 7년 전쟁의 역사를 한참 논했다."(1868-70)


"비록 발칸은 빼앗기고 있었지만, 폴란드의 비스와 강과 동프로이센에서 독일군이 10월부터 굳세게 버티는 중이었다. 하지만 얼마나 더?" "히틀러가 동부전선에서 〈지금처럼 강력한 예비 병력을 보유했던 적이 없다〉라고 주장하자 구데리안은 〈동부전선은 카드로 만든 집과 같습니다. 전선의 한 지점이 뚫리면 나머지 전체가 붕괴될 것입니다〉라고 대꾸했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1945년 1월 12일, 이반 코네프의 소련 집단군이 바르샤바 남쪽 비스와 강 상류 바라노프의 교두보에서 빠져나와 슐레지엔으로 향했다. 더 북쪽에서는 주코프 휘하 병력이 바르샤바 북쪽과 남쪽에서 비스와 강을 건너 1월 17일 이 도시를 함락했다. 더 북쪽에서는 소련 2개 군이 동프로이센의 절반을 짓밟고 단치히 만으로 돌격했다. 이것은 2차대전을 통틀어 소련군의 최대 공세였다. 스탈린은 폴란드와 동프로이센에만 기갑전력의 비중이 놀랍도록 높은 180개 사단을 투입했다. 막을 도리가 없었다."(1873-5)


"1월 27일 오후, 주코프의 병력이 베를린에서 160킬로미터 떨어진 오데르 강을 도하한 날, 이제 베를린 총리 관저로 이전했고 전쟁 종결 때까지 장소를 바꾸지 않은 총통 본부에서 흥미로운 대응 조치를 취했다. 25일, 절박한 구데리안은 리벤트로프를 찾아가 나머지 독일군이 동부의 소련군에 집중해서 대적할 수 있도록 당장 서부에서의 휴전을 강구할 것을 촉구했다. 외무장관은 곧장 히틀러에게 일러바쳤고, 총통은 당일 저녁 구데리안을 질책하며 〈대역죄〉를 저질렀다고 힐난했다. 동부의 재앙에 충격을 받은 히틀러, 괴링, 요들은 서방 측에 휴전을 요청할 필요조차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세 사람은 서방 연합국이 볼셰비키 승리의 결과를 우려하여 한달음에 달려올 것이라고 확신했다." "서방을 겨냥한 나치-소비에트 조약의 독일 측 설계자들은 결국 영국군과 미군이 독일군에 합세해 소련 침공군을 물리치지 않는 이유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를 터였다."(1876-7)


"3월 19일, 히틀러는 독일 내 모든 상점뿐 아니라 모든 군사·산업·운송·통신 시설까지 온전한 상태로 적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도록 파괴하라는 일반명령을 내렸다. 그 명령은 〈이에 반하는 모든 지령은 무효다〉라는 단언으로 끝맺었다. 독일을 광대한 황무지로 만들어야 했다." "히틀러는 슈페어에게 이렇게 말했다. 〈전쟁에서 지면 민족도 사라질 것이다. 이 운명은 피할 수 없다. 국민이 가장 원초적으로 존속하기 위해 필요할 법한 기반 따위는 고려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우리 스스로 그런 것들을 파괴해버리는 편이 더 낫다. 이 국가는 약한 국가로 판명날 것이고, 미래는 오로지 강한 동부 국가[소련]의 것일 테니까. 게다가 뛰어난 자들이 살해되었으니 전후에는 열등한 자들만 남을 것이다.〉" "독일 국민이 최종 파국을 면한 것은, 그런 대규모 파괴 활동을 불가능하게 만든 연합군의 신속한 진격 외에도, 슈페어와 다수의 장교들이 히틀러의 명령을 (마침내!) 정면으로 거슬렀기 때문이다."(1885-7)


제31장 신들의 황혼: 제3제국의 마지막 나날 


"히틀러는 몸이 엉망인 데다 소련군이 베를린에 근접하고 서방 연합군이 독일 본토를 장악하여 이제 처참한 최후가 목전에 닥친 상황임에도, 총통은, 그리고 괴벨스를 비롯해 가장 광적인 소수의 추종자들은 마지막 순간에 기적으로 구원받을 것이라는 희망에 끈질기게 매달렸다. 4월 초 날씨 좋은 저녁에 괴벨스는 자리에 앉아 히틀러에게 총통의 애독서 중 하나인 토머스 칼라일의 《프리드리히 대왕의 역사》를 읽어주었다. 괴벨스가 낭독한 장은 7년 전쟁 중 가장 암담했던 시절, 대왕이 진퇴유곡에 빠졌다고 생각해 각료들에게 만약 2월 15일까지 운수가 나아지지 않으면 포기하고 독약을 마시겠다고 말하는 대목이었다. 역사의 이 시기를 고른 것은 확실히 적절했으며 괴벨스는 틀림없이 한껏 극적인 방식으로 낭독했을 것이다. 총통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습니다〉라고 괴벨스는 크로지크에게 말했고, 후자는 이 감동적인 장면을 일기에 적어 우리에게 전해주었다."(1893-4)


"그렇게 영국인이 쓴 책에서 기운을 얻은 두 사람은 힘러의 잡다한 '연구' 부서들에서 서류철에 보관 중이던 두 가지 별자리점 결과를 가져오도록 했다. 하나는 1933년 1월 30일 히틀러가 집권하던 날 작성한 총통의 별자리점이었고, 다른 하나는 1918년 11월 9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탄생일에 어느 이름 모를 점성술사가 작성한 공화국의 별자리점이었다. 괴벨스는 두 통의 놀라운 문서를 재검토한 결과를 크로지크에게 알렸다.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으니, 두 별자리점 모두 1939년에 전쟁 발발, 1941년까지 승리, 뒤이어 일련의 전세 역전, 1945년 초기 몇 달 동안, 특히 4월 초순의 가장 심한 반격을 예상했습니다. 4월 하순에 우리는 일시적인 성공을 거둘 것입니다. 그 후로 8월까지 정체기일 테고 그달에 강화를 맺을 것입니다. 뒤이어 3년은 독일에 힘겨운 시절일 테지만, 1948년부터 독일은 부흥할 것입니다.〉 그로부터 채 1주일도 지나지 않은 4월 12일, 미군이 데사우와 베를린 사이 아우토반에 나타났다."(1894-5)


"4월 29일 새벽에 구술로 작성한 유언장에서 나치사령관은 맨 마지막까지 본인의 성격에 충실했다. 위대한 승리는 본인 덕분이었다. 패배와 최종 실패는 다른 사람들, 그들의 〈불충과 배반〉 때문이었다. 그런 다음 고별사를 읊었다─이 미치광이 천재의 일생에서 기록된 마지막 말이었다. 〈이 전쟁에서 독일 국민의 노력과 희생이 너무도 위대했기에 나는 그것이 무위로 돌아갔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 그렇더라도 독일 국민을 위해 동방 영토를 획득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마지막 문장은 《나의 투쟁》에서 그대로 가져온 것이었다. 독일 국민을 위해 〈동방 영토〉를 획득해야 한다는 집념으로 정계 생활을 시작했던 히틀러는 생의 끝자락에도 그 집념에 매달렸다. 독일인 수백만 명이 죽고, 독일 가옥 수백만 채가 폭격에 무너지고, 심지어 독일 국가마저 파괴되었음에도, 히틀러는 슬라브인에게서 동방 영토를 빼앗는다는 묵표가 (도덕 문제는 제쳐두고라도) 튜턴족의 헛된 꿈이라는 것을 납득하지 못했다."(1931-2)


"1차대전 패전 이후 1918년에 카이저는 달아났고 군주정은 허물어졌으나 국가를 지탱하던 기존의 다른 제도들은 남아 있었고, 국민의 선택을 받은 정부가 그 기능을 이어갔으며, 독일 육군과 참모본부의 중핵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1945년 봄에 제3제국은 그야말로 소멸해버렸다." "아돌프 히틀러의 바보짓─그리고 그를 너무도 맹목적으로, 너무도 열렬하게 추종한 독일인 자신의 바보짓─탓에 그 지경이 되었다. 다만 그해 가을 독일로 돌아간 나는 히틀러에게 분개하는 정서를 거의 느끼지 못했다. 그곳에는 사람들이, 그리고 땅이 있었다. 사람들은 멍한 상태로 피를 흘리고 배를 곯았으며, 겨울이 찾아오자 폭격으로 그들의 집이 된 오두막에서 누더기로 몸을 감싸고 바들바들 떨었다. 히틀러는 다른 수많은 민족들을 말살하려 했고 전쟁에서 패하자 결국 자기네 민족까지 말살하려 했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독일 민족은 말살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3제국은 역사의 일부가 되었다."(1946-7)


맺음말


"뉘르베르크의 피고석에 오른 21명 중 7명은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헤스, 레더, 풍크는 종신형, 슈페어와 시라흐는 20년형, 노이라트는 15년형, 되니츠는 10년형이었다. 나머지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샤흐트와 파펜, 프리체는 석방되었다. 세 사람 모두 독일의 탈나치화 법정에서 무거운 징역형을 선고받긴 했지만, 결국 아주 짧게 복역하는 데 그쳤다. 1946년 10월 16일 오후 1시 11분, 리벤트로프가 뉘른베르크 감옥 처형실에서 교수대에 올라갔고, 짧은 간격으로 카이텔, 칼텐브루너, 로젠베르크, 프랑크, 프리크, 슈트라이허, 자이스-잉크바르크, 자우켈, 요들이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헤르만 괴링은 없었다. 그는 교수형 집행인을 속였다. 감방으로 몰래 들여온 독약 약병을 자기 차례가 오기 두 시간 전에 삼켰다. 총통 아돌프 히틀러, 그리고 후계를 놓고 경쟁한 하인리히 힘러와 마찬가지로, 괴링은 막판에 이승을 떠나는 방법을 선택하는 데 성공했다. 두 사람과 함께 결딴을 낸 그 세상을."(19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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