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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제국사 - 전4권 - 히틀러의 탄생부터 나치 독일의 패망까지
윌리엄 L. 샤이러 지음, 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2023년 8월
평점 :
제3부 전쟁에 이르는 길
제9장 첫 단계: 1934~1937
"1935년 3월 16일 토요일에─히틀러의 기습은 대부분 토요일에 이루어졌다─총리는 국민개병제를 천명하고 평시 육군을 12개 군단 36개 사단(대략 50만 명)으로 편제하는 법을 공포했다. 이로써 베르사유 조약의 군비 제한은 끝이 났다─프랑스와 영국이 행동에 나서지 않는 한. 히틀러의 예상대로 두 나라는 항의하면서도 행동에는 나서지 않았다. 사실 영국 정부는 히틀러에게 아직 자기네 외무장관을 접견할 용의가 있는지 부랴부랴 물어보기까지 했다. 독재자는 정중하게 그럴 용의가 있다고 회답했다. 3월 17일 일요일은 독일에서 환호와 축하의 날이었다. 패전과 치욕의 상징이었던 베르사유의 족쇄를 벗어던진 날이었다. 히틀러와 그의 깡패 같은 통치를 아무리 싫어하는 독일인일지라도 공화국 내내 정부가 감히 시도조차 못해본 일을 총통이 성취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다수 독일인은 국가의 명예를 회복했다고 생각했다. 그 일요일은 전몰장병 추모일이기도 했다."(499-500)
"5월 21일 저녁, 히틀러는 제국의회에서 또 한 차례 '평화' 연설을 했다. 히틀러는 느긋한 태도로 자신감뿐 아니라 관용적이고 유화적인 면모까지 보여주었다. 히틀러는 자신이 바라는 것은 모두를 위한 정의에 기반하는 평화와 이해뿐이라고 확언했다. 전쟁이라는 생각 자체를 거부한다고, 전쟁은 참사인 동시에 무의미하고 무익한 사태라고 말했다." "〈누구든 유럽에서 전쟁의 도화선이 되는 자는 혼란 말고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시대에 서양의 몰락이 아닌 르네상스가 실현될 것이라는 굳은 신념을 품고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위대한 과업에 독일이 불멸의 기여를 할 수도 있다는 것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희망이자 흔들리지 않는 신념입니다.〉 이것은 평화와 이성, 화해를 말하는 달콤한 연설이었으며, 어떤 이유에 근거해서든, 아니 이유야 어찌되었든 평화가 이어지기를 간절히 염원하던 서유럽 민주국가들의 국민과 정부는 이 달콤한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502-5)
"1936년 5월 2일, 이탈리아군은 아비시니아[에티오피아의 옛 이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에 입성했고, 7월 4일에 국제연맹은 정식으로 굴복하고 이탈리아에 대한 제재를 철회했다. 얼마 후 7월 16일에 에스파냐에서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군사 반란을 일으켜 내전이 시작되었다." "이제 프랑스는 세 번째의 비우호적 파시스트 국가와 국경을 맞대게 되었고, 그 결과 우파와 좌파의 대립이 격화되어 서유럽에서 독일의 주요 경쟁국이 약해졌다. 무엇보다 아비시니아 전쟁이 끝난 뒤 이탈리아와 화해하려던 영국과 프랑스는 그럴 수 없게 되었고, 그리하여 무솔리니는 히틀러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총통의 대對에스파냐 정책은 처음부터 기민하고 계산적이고 먼 앞날을 내다본 것이었다. 입수된 독일 문서들을 정독하면 히틀러의 목표 중 하나가 에스파냐 내전을 길게 끌어 서방 민주국가들과 이탈리아를 떼어놓고 무솔리니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이 로마-베를린 추축Axis을 낳았다."(522-4)
제10장 이상하고 불길한 막간: 블롬베르크, 프리치, 노이라트, 샤흐트의 몰락
"1938년 2월 4일, 독일 내각이 소집되었다. 마지막 내각 소집이었다. 어떤 어려움을 겪었든 간에, 이제 히틀러는 육군이든 외무부든 자기 앞길을 가로막는 요소들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난관을 뚫고나갈 터였다. 그날 히틀러가 내각에서 서둘러 통과시킨 뒤 자정 직전에 라디오를 통해 독일 전역과 세계에 발표한 긴급명령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제부터 내가 전군의 지휘권을 직접 넘겨받는다.〉 국가수반으로서 히틀러는 당연히 국방군 최고사령관이기도 했지만, 이제 블롬베르크의 총사령관직까지 넘겨받는 한편 전쟁부를 폐지한다는 것이다. 그 대신 창설하는 조직이 장차 2차대전 동안 익숙해질 국방군 최고사령부Oberkommando der Wehmacht, OKW이며, 육해공 삼군이 여기에 소속된다. 히틀러가 그 최고사령관이고, 그 아래에 '국방군 최고사령부 총장'이라는 거창한 직함을 가진 참모장이 있었다─이 직책은 아첨꾼 카이텔에게 돌아갔는데, 용케도 최후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559)
"1938년 2월 4일은 제3제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 전쟁으로 가는 길의 이정표였다. 이날을 기하여 나치 혁명이 성취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히틀러가 독일의 무장이 충분히 이루어지면 내딛겠다고 오래전부터 별러온 길을 가로막고 있던 보수파의 마지막 세력이 이날 싹 치워졌다." "(경제장관) 샤흐트는 물러났다. (외무장관) 노이라트는 비켜섰다. (국방군 총사령관) 블롬베르크는 동료 장군들의 압력에 굴복해 사임했다. 프리치는 깡패 수법의 음모에 휘말렸음에도 반항하는 시늉도 없이 해임을 받아들였다. 고위 장군 16명도 자신들의 해임─그리고 프리치의 해임─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장교단에서 군사 반란 이야기가 나왔지만, 이야기로 그쳤다. 히틀러가 죽는 날까지 지녔던 프로이센 장교 계층에 대한 경멸감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으로 입증되었다." "외교, 경제, 군사 정책을 한손에 틀어쥐고 국방군을 직접 지휘하게 된 히틀러는 이제 자신의 길을 걷게 되었다."(561-3)
제11장 병합: 오스트리아 강탈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국제연맹은 이 중대한 순간─히틀러가 오스트리아 강제 병합을 시도하는─에 평화로운 인접국에 대한 독일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 아무런 태도도 취하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에는 또다시 정부가 부재했다. 3월 10일 목요일, 카미유 쇼탕 총리와 내각이 사임했다. 괴링이 전화로 빈에 최후통첩을 들이민 3월 11일 금요일 내내 파리에는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독일이 오스트리아 병합을 선포한 3월 13일에야 레옹 블룸이 이끄는 새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렇다면 영국은? 2월 20일, (오스트리아 총리) 슈슈니크가 굴복하고 나서 일주일 후에 앤서니 이든 외무장관이 사임했다. 무솔리니를 계속 회유하려는 체임벌린 총리의 정책에 반대한 것이 사임의 주된 이유였다. 후임은 헬리팩스 경이었다. 이 변화를 베를린에서는 환영했다. 히틀러에게는 즐거운 소식이었다. 그는 영국과 분규를 일으키지 않고 오스트리아로 진격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604-5)
"1938년 3월 11일 밤, 히틀라가 심각하게 걱정한 문제는 이 침공에 대한 무솔리니의 반응뿐이었지만, 베를린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가 어떻게 나올지에 대해서도 얼마간 걱정했다." "괴링은 베를린 주재 체코 공사 보이테흐 마스트니 박사에게 독일군의 오스트리아 진입은 〈집안일에 불과〉하며 히틀러는 프라하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싶어한다고 알렸다. 그 대신 군을 동원하지 않겠다는 체코 측의 확답을 바란다고 했다. 마스트니 박사는 프라하의 외무장관에게 전화를 걸었고, 다시 돌아와 괴링에게 동원은 하지 않을 것이고 체코슬로바키아는 오스트리아 사태에 개입할 의향이 없다고 말했다. 안도한 괴링은 자신의 방금 전 확약을 재확인한 뒤 히틀러의 승인도 얻었다고 덧붙였다." "한편 영국과 프랑스 두 정부의 〈속뜻〉이 그저 말뿐인 항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오스트리아의) 미클라스 대통령은 자이스-잉크바르트를 총리에 임명하고 그의 각료 명단을 수락했다."(607-8)
"총 한 발 쏘지 않은 채, 압도적으로 우세한 군사력을 갖춘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간섭도 받지 않은 채, 히틀러는 제국에 국민 700만 명을 더하고 미래의 계획상 막대한 가치를 지닌 전략적 요충지를 얻었다.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삼면을 군대로 포위했을 뿐 아니라 남동유럽으로 향하는 관문인 빈까지 차지했다. 옛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로서 빈은 오랫동안 중부 및 남동 유럽에서 교통과 통상체제의 중심지로 기능했다. 이 신경중추가 이제 독일의 수중으로 넘어간 것이다. 아마도 히틀러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영국도 프랑스도 자신을 저지하기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의향조차 없음이 다시금 확인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3월 14일 체임벌린은 오스트리아에서의 히틀러의 '기정사실'에 관해 하원에서 연설했다. 〈확실한 사실은 그 무엇도 [오스트리아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을 막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와 여타의 나라들이 무력을 행사할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니까요.〉"(619-20)
제12장 뮌헨에 이르는 길
"1938년 6월 1일, 영국 총리는 일부 비보도를 전제로 영국 기자들 앞에서 발언했고, 이틀 후 《타임스》는 체코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데 일조한 일련의 사설들 중 첫 번째 것을 게재했다. 그 사설은 체코 정부 측에 〈설령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의미할지라도〉 국내 소수집단들의 〈자결권〉을 인정할 것을 촉구했고, 주데텐 주민들과 그 밖의 집단들이 바라는 것을 결정하는 수단으로 국민투표를 처음 제안했다." "6월 8일, 디르크젠 대사는 주데텐 지역의 분리가 주민투표 이후에 이루어지고 〈독일 측이 강제적 조치로 방해하지 않을〉 경우 체임벌린 정부가 관망할 것이라고 빌헬름슈트라세에 알렸다. 이 모든 정보는 분명 히틀러에게 희소식으로 들렸을 것이다. 모스크바에서 들려온 소식도 나쁘지 않았다. 6월 말에 소련 주재 독일 대사 프리드리히-베르너 폰 데어 슐렌부르크 백작은 소련이 〈부르주아 국가〉, 즉 체코슬로바키아를 〈방어하기 위해 출병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라고 베를린에 통지했다."(657-8)
"여름 내내 바르샤바 주재 독일 대사 한스-아돌프 폰 몰트케는 폴란드가 자국의 영토나 영공을 소련의 병력이나 항공기가 통과하도록 허용함으로써 체코슬로바키아를 지원하는 방안을 거절할 심산일 뿐 아니라 폴란드 외무장관 유제프 베츠크가 체코 영토의 한 조각인 테신[폴란드명 치에신] 지역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고 베를린에 보고했다. 베츠크는 그 여름 유럽에 널리 퍼져 있던 치명적인 근시안을 벌써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 근시안은 결국 베츠크의 상상 이상으로 재앙적인 결과를 가져올 터였다." "베를린의 부추김을 받은 폴란드 정부는 9월 21일, 폴란든계 사람들이 상당수 거주하는 테신 지역에서 주민투표를 시행할 것을 체코 정부에 요구하고 병력을 이 지역의 국경으로 이동시켰다. 이튿날 헝가리 정부도 그 뒤를 따랐다. 또한 같은 날인 9월 22일 주데텐 자유군단은 독일 친위대 파견대의 지원을 받아 독일 영토 쪽으로 튀어나온 체코 국경도시 아시Aš와 에거를 점령했다."(660, 679)
"9월 27일 저녁 시점에 히틀러가 알고 있었던 것은 프라하가 저항하고, 파리가 신속히 동원하는 중이고, 런던이 강경하게 나오고, 자국민이 전쟁에 무관심하고, 독일의 주요 장군들이 개전에 단호히 반대하고, 고데스베르크 제안에 담은 최후통첩의 시한이 다음날 오후 2시라는 사실이었다. 히틀러의 서한은 체임벌린의 마음을 흔들어놓도록 절묘하게 계산된 것이었다. 히틀러는 온건한 어조로 자신의 제안이 〈체코슬로바키아의 존립을 위협하는 것〉이라거나 독일군이 분계선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를 부인했다. 그리고 체코 측과 세부사항에 관해 협상하고 〈체코슬로바키아의 나머지 부분을 공식 보장할〉 의향이 있다면서 체코 측이 버티는 까닭은 그저 영국과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유럽 전쟁을 일으키고 싶기 때문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평화를 향한 마지막 희망의 문을 열어두겠다고 했다. 결국 체임벌린은 평화냐 전쟁이냐 하는 문제의 책임을 히틀러가 아닌 (체코 대통령) 베니시에게 지웠다."(702-3)
"9월 30일 오전 1시 직후, 히틀러와 체임벌린, 무솔리니, (프랑스 총리) 달라디에는 차례로 뮌헨 협정에 서명했다. 협정에 따라 독일 육군은 총통이 줄곧 입에 올려온 대로 10월 1일에 체코슬로바키아를 향해 진군을 개시하고 10월 10일까지 주데텐란트 점령을 완료할 수 있게 되었다." "체임벌린은 에스파냐 내전(독일과 이탈리아의 '의용군'이 프랑코 장군 편에 서서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을 끝내기 위해 더욱 협력할 것과 군비 축소, 세계 경제의 발전, 유럽의 정치적 평화, 심지어 소련 문제의 해결까지 함께 추구할 것을 제안하는 등 시무룩한 독일 독재자에게 끝도 없는 장광성을 주절주절 늘어놓은 뒤, 서류 한 장을 호주머니에서 꺼내더니 둘이서 공동으로 서명하여 즉시 공개하자고 말했다. 히틀러는 이 선언서를 읽고 얼른 서명했다. 체임벌린은 크게 만족했다." "런던으로 귀환한 득의만만한 총리는 히틀러와 함께 서명한 선언서를 휘휘 흔들면서 다우닝 가로 몰려든 대규모 군중을 맞았다."(729-32)
"히틀러는 총 한 발 쏘지 않고도 자신이 원하던 것을 얻고 다시금 주목할 만한 정복을 이루어냈다. 나를 포함해 뮌헨 협정 이후 독일에 머물고 있던 그 누구도 당시 독일 국민의 환희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전쟁을 피했다는 데 안도했다. 또한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뿐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를 상대로 무혈 승리를 거두었다는 자긍심에 들떠 있었다. 그 무혈 승리를 히틀러가 불과 6개월 만에 오스트리아와 주데텐란트를 정복하여 주민 1000만 명과 남동유럽을 지배할 길을 여는 방대한 전략적 영토를 제3제국에 보탰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게다가 단 한 명의 독일인도 잃지 않았다! 히틀러는 독일 역사상 보기 드문 천재의 본능으로 중유럽 약소국들의 약점뿐 아니라 서방의 두 주요 민주국가인 영국과 프랑스의 약점까지 간파하여 그들을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였다. 그리고 '정치전政治戰'의 새로운 전략과 기법을 고안하고 구사하여 실제 전쟁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경이로운 성공을 거두었다."(737-8)
제13장 체코슬로바키아의 소멸
"이제 체코슬로바키아 비극의 다음 막이 오르게 되었다. 프라하의 체코 정부가 그 막을 조금 일찍 올린 것은 이 역사 이야기를 가득 채우는 아이러니들 중 하나였다. 1939년 3월 초에 체코 정부는 지독한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독일 정부가 조장한 슬로바키아와 루테니아의 분리주의 운동(루테니아의 경우에는 이 작은 땅을 병합하고자 갈망하던 헝가리 정부도 조장했다)은 이제 진압하지 않으면 체코슬로바키아를 해체시킬 지경이었다. 그럴 경우 히틀러가 프라하를 점령할 게 확실했다. 그렇다고 해서 체코 중앙정부가 분리주의파를 진압할 경우 총통이 그에 따른 혼란을 틈타 역시 프라하로 진격하리라는 것 역시 확실한 일이었다. 체코 정부는 사뭇 주저하고 더는 도발을 견딜 수 없게 된 후에야 비로소 둘째 대안을 선택했다." "베를린에 그토록 굽실거리던 체코 정부의 한 차례 용기 있는 행보─슬로바키아 자치정부를 해산하고 계엄령을 선포한─는 곧 국가를 파멸로 이끌 재앙이 되었다."(769)
"1939년 3월 15일 오전 6시, 독일군은 보헤미아와 모라비아로 쇄도했다. 저항은 없었고, 저녁 무렵 히틀러는 지난 뮌헨 회담 때 체임벌린에게 속아서 빼앗겼다고 생각한 프라하로 의기양양하게 입성할 수 있었다. 베를린을 떠나기 전 그는 독일 국민에게 거창한 성명을 발표하여 자신이 끝장낼 수밖에 없었던 체코 정부의 〈난폭한 만행〉과 〈테러〉에 관한 지겨운 거짓말을 반복한 다음 〈체코슬로바키아는 소멸했습니다!〉라고 자랑스럽게 선언했다." "누구든 《나의 투쟁》을 읽은 사람이라면, 지도를 흘낏 보고 슬로바키아 내 독일군의 새로운 배치를 확인한 사람이라면, 뮌헨 협정 이래 독일의 모종의 외교적 행보를 눈치챈 사람이라면, 또는 지난 12개월간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무혈 정복한 히틀러의 동태에 관해 숙고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총통의 '약소국' 목록에서 어떤 나라가 다음 차례가 될 지 분명하게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체임벌린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제 폴란드의 차례였다."(783, 793)
제14장 폴란드의 차례
"오스트리아와 주데텐란트 무혈 정복을 지켜본 1938년이 저물어갈 무렵, 히틀러는 또다른 정복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정복할 곳은 잔존 체코슬로바키아, 메멜, 그리고 단치히였다. 슈슈니크나 베네시의 콧대를 꺾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이제는 (폴란드 외무장관) 유제프 베츠크의 차례였다." "독일과 국경을 접하는 가운데 길게 보아서 가장 우려스러운 나라는 폴란드였다. 그런데 폴란드만큼 독일의 위험에 둔감한 국가도 없었다. 베르사유 조약의 조항들 중에 회랑지대를 확정하여 폴란드에 바다로 나갈 통로를 열어준─그리고 독일 제국과 동프로이센을 갈라놓은─것만큼 독일인을 분개시킨 조항도 없었다. 옛 한자동맹의 항구 단치히를 독일로부터 분리하여 국제연맹이 감독하되 폴란드가 경제적으로 지배하는 자유도시로 바꿔놓은 조치도 똑같이 독일 여론의 분노를 자아냈다. 약하고 평화로운 바이마르 공화국마저 폴란드에 의한 독일 제국의 절단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798-800)
"1939년 3월 15일 히틀러가 보헤미아와 모라비아를 점령하고 '독립' 슬로바키아를 보호하기 위해 병력을 보냈을 때, 그 비늘은 완전히 벗겨졌다. 그날 아침 폴란드는 이미 북쪽의 포메른과 동프로이센의 국경이 독일 육군에 가로막힌 것처럼 이제 남쪽 슬로바키아 국경도 독일 병력에 가로막혔다. 폴란드의 군사 정세는 하룻밤 사이에 불안정해졌다." "각성한 폴란드 외무장관은 베네시보다 더 단호하게 베를린에 맞설 수 있었는데, 무엇보다 1년 전만 해도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히틀러의 요구를 들어주려고 기를 쓰던 영국 정부가 이제 폴란드와 관련해서는 정반대로 굴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3월 30일 저녁, 케너드는 베츠크에게 독일의 침공에 대비할 상호원조협정에 관한 영국-프랑스 제안을 제시했다. 이튿날인 3월 31일, 체임벌린은 하원에서 폴란드가 공격받아 거기에 저항할 경우 영국과 프랑스가 〈폴란드 정부를 즉시 힘닿는 데까지 지원할 것〉이라는 역사적인 선언을 했다."(803, 811-2)
"7월 23일, 프랑스와 영국은 소련의 제안에 마침내 동의했다. 군 참모 회담을 즉시 개최해 군사협약을 작성함으로써 삼국이 히틀러의 군대에 어떻게 대응할지를 구체적으로 정하자는 제안이었다." "7월의 마지막 주에 모스크바 정치회담은 주로 '간접침략'이라는 말의 정의를 놓고 합의를 보지 못하는 바람에 답보 상태에 빠졌다. 영국과 프랑스가 보기에는 소련이 '간접침략'을 너무 넓게 해석하는 터라 나치의 심각한 위협이 없는 경우에도 핀란드나 발트 국가들에 대한 소비에트의 개입을 정당화하는 데 이 용어가 사용될 가능성이 있었으며, 그런 해석에 적어도 런던은─프랑스는 더 협조할 용의가 있었다─동의하지 않으려 했다." "7월 17일에 영국이 만약 정치협정과 군사협정을 동시에 체결하자는 주장을 소련이 양보하고 (기왕이면) '간접침략'에 대한 영국 측 정의까지 받아들이는 데 동의한다면 그 즉시 참모 회담을 시작하겠다고 제안하며 흥정을 시도했을 때, 몰로토프는 딱 잘라 거절했다."(874-5)
"영국 외무부 기밀문서들을 보면, 8월 초에 체임벌린과 헬리팩스가 소련과의 협정 타결을 거의 포기했으면서도 모스크바에서 참모장교 회담을 지연시키면 독일 독재자가 전쟁을 향해 치명적인 발걸음을 내딛는 것을 향후 4주 동안은 어떻게든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 거의 확실하다. 그런데 그때는 이미 늦은 시점이었다. 히틀러가 선수를 쳤던 것이다." "빌헬름슈트라세에서는 소련의 기존 방침을 뒤집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커지고 있었다. 소련이 중립국이 되고 나면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를 위해 싸우지 않을 것이고, 설령 싸우더라도 독일 측으로서는 폴란드를 재빨리 해치우고 독일 육군이 서쪽을 향해 총력으로 진격할 수 있을 때까지 그들을 서부 방어시설에 묶어두기가 용이할 터였다. 베를린 주재 프랑스 대사대리 자크 타르베 드 생아르두앙은 파리에 이렇게 보고했다. 〈나치 지도부 사이에서 당혹, 주저, 임시변통, 심지어 타협의 경향을 보이던 시기가 새로운 국면으로 넘어갔다.〉"(877-8, 881-2)
제15장 나치–소비에트 조약
"독일은 폴란드를 포함하는 동유럽을 소련과 나눠 가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는 영국과 프랑스로서는 도저히 겨뤄볼 수 없는─설령 할 수 있다 해도 분명 꺼내지 않을─승부수였다." "8월 15일 오후 8시, 슐렌부르크 대사는 몰로토프를 만나 이미 지시받은 대로 리벤트로프의 긴급 전보를 읽어주었다. 이에 대해 독일 정부가 양국 간의 불가침 조약에 관심이 있느냐고 몰로토프는 물었다. 또 소비에트-일본 관계를 개선하고 〈국경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일본에 영향력을 행사할 용의가 있느냐고 물었다─여기서 분쟁은 그해 여름 내내 만주-몽골 국경에서 선전포고도 없이 벌어진 전쟁을 가리켰다. 마지막으로 몰로토프는 발트 국가들을 공동으로 보장하는 방안을 독일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이렇듯 나치-소비에트 불가침 조약을 먼저 제안한 쪽은 소련이었다. 몰로토프의 제안은 바로 히틀러가 원하던 것이었다. 더구나 히틀러가 내놓으려던 그 어떤 제안보다도 더 구체적이고 더 나아간 제안이었다."(896, 906-7)
"그러나 독일 측으로서는 일정 조정을 이루어내야만 했다. 폴란드 침공의 진행표 전체가 그 일정에 달려 있었다. 리벤트로프가 8월 26일이나 27일 이전에 모스크바를 방문하지 못하고 독일 측의 우려대로 소련 측이 좀 더 미적거릴 경우, 9월 1일이라는 목표일을 지킬 수가 없었다. 이 중대한 국면에서 아돌프 히틀러는 직접 스탈린과의 중재에 나섰다. 자존심을 굽힌 채 자신이 그토록 자주, 그토록 오랫동안 비방해온 소비에트 독재자에게 독일 외무장관을 모스크바에서 즉시 접견해달라고 몸소 간청했다." "스탈린의 회답은 8월 21일 오후 10시 30분에 베르크호프의 총통에게 전달되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잠시 후에 독일 라디오의 음악 프로그램이 갑자기 중단되고 다음과 같은 내용을 발표하는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제국 정부와 소비에트 정부는 서로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는 데 동의했다. 제국 외무장관이 교섭 타결을 위해 8월 23일 수요일 모스크바에 도착할 것이다.〉"(916, 919)
"1939년 7월 말에 스탈린은 분명 프랑스와 영국이 구속력 있는 동맹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뿐 아니라 (특히 영국이) 히틀러를 부추겨 동유럽에서 전쟁을 일으키도록 하는 데 있다는 것까지 확신하게 되었다. 스탈린은 과연 프랑스가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의무를 준수했던 것 이상으로 영국이 폴란드에 대한 보장 약속을 지킬 것인지를 몹시 의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전 2년간 서방에서 일어난 모든 일도 그의 의심을 키웠다. 나치의 오스트리아 병합과 체코슬로바키아 점령 이후 또다른 침공을 막기 위해 회의를 열어 계획을 세우자는 소비에트의 제안을 체임벌린이 거절한 일, 소련을 배제시킨 뮌헨 협정에서 체임벌린이 히틀러를 달랜 일, 1939년의 운명적인 여름이 째깍째깍 지나가는 때에 체임벌린이 독일에 맞설 방어동맹을 교섭하면서 자꾸 지체하고 망설인 일 등이 그러했다. 한 가지는 분명했다. 히틀러가 조치를 취할 때마다 머뭇거리고 비틀거리던 영국-프랑스의 외교가 이제 완전히 파탄났다는 점이었다."(943-4)
제16장 평화의 마지막 나날
"괴벨스의 노련한 지도 하에 나치당이 일간지들을 '조정'─이는 자유언론의 파괴를 의미했다─하기 시작한 6년 전부터 독일 시민은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진실을 접할 수 없었다. 히틀러가 원래 폴란드 공격 날짜로 정해두었던 8월 26일 토요일에 괴벨스의 선전 공작은 절정에 이르렀다. 나는 일기에 몇몇 신문의 헤드라인을 적어두었다. 《B.Z.》: 〈폴란드, 극에 달한 혼란─독일인 가족, 피난하다─폴란드군, 독일 국경에 육박!〉 《12시 블라트》: 〈도를 넘는 불장난─독일 여객기 3대, 폴란드군에 격추─회랑지대 독일인 농가 다수, 불길에 휩싸이다!〉 나는 한밤중 방송국으로 가는 길에 《민족의 파수꾼》 일요일판(8월 27일자)을 집어들었다. 1면 상단 전체에 걸쳐 1인치 크기로 헤드라인이 박혀 있었다. 〈폴란드 전역 전쟁열! 150만 동원! 국경 방면으로 계속 병력 수송! 오버슐레지엔 혼란!〉 물론 독일의 동원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독일은 2주 전부터 동원하고 있었다."(978-80)
"1939년 8월 마지막 날의 오후부터 밤까지의 막판에 기진맥진한 외교관들과 극도로 긴장한 채 그 외교관들에게 지시를 내린 상관들의 우왕좌왕하는 행보는 그야말로 아무짝에도 쓸모없었고, 독일 측의 경우에는 순전히 고의적인 기만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8월 31일 오후 12시 30분에, 그러니까 헬리팩스 경이 폴란드 정부에 더 협조적인 태도를 보이라고 촉구하기 전에, 립스키가 리벤트로프를 방문하기 전에, 독일 정부가 폴란드에 대한 '관대한' 제안을 공표하기 전에, 그리고 무솔리니가 중재를 시도하기 전에, 아돌프 히틀러가 최종 결정을 하고 전 세계를 전에 없이 처참한 전쟁으로 밀어넣는 결정적인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8월 31일 정오 직후, 히틀러는 이튿날 새벽 폴란드를 공격하라고 정식 문서로 명령했다. 아직까지 히틀러는 영국과 프랑스가 어떻게 나올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두 나라를 먼저 공격하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두 나라가 적대적 조치를 취한다면 그에 대응할 작정이었다."(1022-5)
제17장 제2차 세계대전 개시
"9월 3일 정오 무렵에 나는 빌헬름슈트라세의 총리 관저 앞에 서 있었다. 그때 갑자기 확성기를 통해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는 소식이 발표되었다. 250명쯤─그 이상은 아니었다─되는 사람들이 그곳에 햇살을 받으며 서 있었다. 모두가 주의 깊게 들었다. 발표가 끝났을 때는 중얼거리는 소리조차 없었다. 그들은 가만히 서 있었다. 망연자실한 채로, 히틀러가 자신들을 세계대전으로 이끌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안식일이었음에도 곧 신문팔이 소년들이 '호외요, 호외요' 하고 외치기 시작했다. 실은 거저 나눠주고 있었다." "독일인처럼 쉽게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에게는 '입증'되었을지 몰라도, 그날만 해도 영국인에 대한 악감정은 생겨나지 않았다. 내가 영국 대사관 앞을 지나갈 때 헨더슨을 위시한 대사관 직원들은 거리 모퉁이에 있는 아들론 호텔로 옮겨가는 중이었고, 경찰관 한 명만이 대사관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는 어슬렁거리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1067-8)
"영국의 참전 소식이 알려진 일요일 오후, 독일의 주요 인사들 중에서 가장 침울해한 사람은 독일 해군 총사령관 에리히 레더 대제독이었다. 그는 전쟁이 너무 일찍, 4~5년이나 먼저 벌어졌다고 보았다. 독일 해군의 Z계획은 1944~45년에 완료되어 영국군에 대적할 만한 규모의 함대를 갖출 터였다. 그러나 당시는 1939년 9월 3일이었으며, 히틀러가 제독의 말을 듣지 않으려 할지라도 레더는 영국을 상대로 효과적인 전쟁을 치를 만한 수상 함정도, 심지어 잠수함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1939년 9월 3일 오후 9시, 히틀러가 베를린을 떠나던 순간에 독일 해군은 공격에 나섰다. 경고도 없이 U-30 잠수함이 헤브리디스 제도에서 서쪽으로 약 320킬로미터 떨어진 해상에서 리버풀을 출발해 몬트리올로 향하던 영국 여객선 애서니아Athenia 호를 어뢰로 격침했다. 승객 1400명 가운데 미국인 28명을 포함해 112명이 목숨을 잃었다. 2차대전이 시작된 것이다."(107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