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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파선과 구경꾼 - 항해로서의 삶, 난파로서의 이론 ㅣ NOUVELLE VAGUE 1
한스 블루멘베르크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21년 4월
평점 :
1장 경계 침범으로서의 항해
"두 가지 전제가 무엇보다 먼저 항해와 난파라는 은유법의 의미 부담을 규정한다. 첫 번째는 바다란 인간의 계획이 실행되는 공간을 제한하기 위해 자연에 의해 주어지는 경계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바다를 예측 불가능하고 법칙성을 벗어나 있으며 방향을 정하기 어려운 영역으로 마계화하는 것이다. 기독교 도상학에서까지도 바다는 악이 출몰하는 곳으로, 거기에 바다는 모든 것을 집어삼켜 되가져가는 거친 물질을 대변한다는 식의 그노시스적 가필加筆이 종종 가해지기도 했다. 「요한묵시록」에 기록된 예언에 따르면, 구세주가 세상을 다스릴 때 바다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바다도 없어졌습니다 (21장 2절)]. 표류란 순수한 형태로는 힘들의 변덕의 표현으로, 그것들은 오뒷세우스에서처럼 사람이 귀향을 거부당하고 무정하게 이리저리 떠돌다 결국 난파하도록 만드는데, 그렇게 되면 누구라도 코스모스를 신뢰할 수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품고, 영지주의처럼 정반대로 평가하리라는 것을 예견할 수 있을 것이다."(45)
2장 난파자에게 남겨진 것
"생존자가 바라보는 난파는 최초의 철학적 경험의 상징이다. 스토아 학파의 시조인 키티온 사람 제논은 페니키아에서 자주색 염료를 배에 싣고 돌아오던 중 페이라이에우스항 근처에서 난파당하고 말았는데, 그것을 계기로 철학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는 이 경험을 이렇게 요약한다. 〈내가 난파한 것은 지금 돌이켜보니 나에겐 좋은 항해였던 것이다.〉 [기원전 1세기에 활동한] 비트루비우스는 난파당해 로도스섬 해변으로 밀려 올라간 소크라테스의 제자 아리스티포스[기원전 435~356년, 북아프리카 키레네 출신의 향락가. 인생의 목적은 쾌락이며 그것이 지고선이지만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식견과 극기와 절제가 필요하다고 보았다]는 모래사장에 기하학적 도형이 그려진 것을 보고 근처에 사람이 살고 있음을 알았다고 보고한다. 이 보고는 그것을 돈과 쾌락에 너무 이골이 나서 소크라테스의 다른 제자들로부터 그리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던 이 철학자에게 일종의 개종의 계기가 된 것처럼 기록한다."(54-5)
"설령 난파되더라도 해안으로 헤엄쳐 나올 때 휴대할 수 있는 것으로 여행에 필요한 것을 제한하는 식으로 삶을 꾸려 나가라는 고전적 조언은 소크라테스의 또 다른 제자 안티스테네스[기원전 445~365년경, 덕에 충실한 금욕주의적 삶을 강조했으며, 후대 학자들에 의해 견유학파의 창시자로 간주된다]가 했다고 한다. 몽테뉴는 「고독에 관해」라는 에세이에서 이 말로부터 도덕적 자족을 위해 새로운 요점을 끌어낸다. 〈분명 분별력 있는 사람은 자기를 잃지 않으면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다.〉 난파로부터 구할 수 있는 것으로 입증된 것은 원할 땐 언제든 안에 집어넣을 수 있는 재산Besitz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발견과 자기-전유 과정을 통해 달성 가능한 침착함Selbstbesitz이다." "하지만 이 회의론자에게도 궁극적인 것은 항상 여전히 앞에 있다. 그가 발견한 실체의 견고함에 대한 시험은 단지 삶이 끝날 때만 끝날 뿐이다. 그러므로 〈충돌에 주의하라! 항구에 다다라 난파하는 자들이 얼마든지 있다.〉"(58-60)
"비록 사적 존재는 내면의 위험으로부터의 난파를 모면할 수 있지만 여전히 이 존재를 함께 잡아 찢을 수 있는 국가와 세계의 몰락[침몰]이라는 큰 침몰이 남아 있다. 몽테뉴의 호기심은 국가의 몰락[침몰]이라는 드라마를, 그것의 징후와 형태를 자기 두 눈으로 지켜보았다고 자부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사태를 방지할 수 없는 이상 구경꾼일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에 만족한다. 〈우리는 우리가 듣는 일에 동정이 가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극히 드물게 그러한 비참한 사건을 보고 인생의 고통을 환기시키며 쾌감을 느낀다.〉" "몽테뉴가 즐길 권리를 갖고 있다는 이유로 난파의 구경꾼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자기보존에 성공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의 즐거움─완전히 간악한 것으로 묘사된다─을 옹호한다. 그처럼 거리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덕분에 구경꾼은 안전하게 단단한 해변에 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쓸모없는 특성, 즉 구경꾼으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을 통해 살아남는다."(61-4)
"니체가 항해의 은유법에 가져온 ('실존주의적'이라고 할 만한) 방향전환은 〈······ 당신은 승선했다〉는 말로 파스칼이 발견했던 것이다. 몽테뉴가 항구에 머무는 이미지를 통해 표현한 바 있는 회의론자의 절제는 파스칼 관점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승선했다는 은유법은 삶이란 이미 거친 바다 위에 있으며, 거기에는 행운 아니면 난파 외의 해결책은 존재하지 않으며, 문제 해결을 미루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암시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점에서 니체가 〈유일한 논리적 그리스도인〉으로 평가하는 파스칼은 내기 돈, 즉 무한한 이익을 절대적인 차원으로까지 올리려고 하지 않는 미온적 자기보존이라는 생각을 배제한다. 오직 그렇기 때문에만 이 〈그리스도교의 가장 교훈적인 희생자〉는 니체를 예견할 수 있었는데, 니체는 파스칼을 거의 그대로 되풀이한다. 〈우리는 육지를 떠나 출항했다. 우리는 다리를 건너왔을 뿐만 아니라 우리 뒤의 육지와의 관계를 단절했다! 그러니 우리 배여, 앞을 바라보라! ······ '육지'는 이제 없다!〉"(66-7)
"이 은유의 다음 단계는 우리는 항상 이미 승선해 거친 바다 위에 있을 뿐만 아니라 마치 필연적인 듯 난파당한다는 것이다. 구조된 난파자에는 부동의 대지가 새삼 놀랍게 느껴진다. 꿋꿋이 서 있을 수 있으며, 새로운 인식을 위한 단단한 기반을 마련해주는 것을 밝혀낼 수 있도록 해주는 그것은 과학의 근본적 경험이다. 환상적 변신이나 기적을 믿었던 다른 시대를 생각하면 알 수 있듯이 그것은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역사로부터 떠오르고 있는 인간에게 확고한 대지가 신뢰 가능함은 완전히 새로운 어떤 것이다. 니체는 지복의 경지라고 부르는 것을 〈육지에 닿아, 낡고 확고한 대지 위에 두 발을 딛고 서서 그것이 흔들리지 않는 것에 경탄하는〉 난파자의 행복에 비교한다. 단단한 대지는 구경꾼이 아니라 난파에서 구조된 사람의 장소이다. 대지의 단단함은 그러한 일은 완전히 비개연적이라는 느낌으로부터, 즉 그와 같은 것에 도달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느낌으로부터 전적으로 경험된다."(68, 71)
3장 구경꾼의 미학과 윤리
"대지의 경계를 넘어 바다로 나가는 은유적 사건 및 실제적 사건은 은유적 난파의 위험과 실제적 난파의 위험처럼 서로 겹친다. 인간을 거친 바다로 내모는 것은 동시에 자기의 자연스러운 욕구의 한계를 넘어서도록 내모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간이라는 종족은 공연히 항상 헛되이 애쓰고, 공허한 걱정 속에 세월을 낭비하는 것이다. 인간은 소유의 목적과 한계가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심지어 현실의 쾌락이 어디까지 늘어날 수 있는지를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삶을 조금씩, 조금씩 깊은 바다로 데려간 것과 같은 자극이 또한 전쟁이 거세게 끓어오르도록 충동한다. 항해라는 잘난 체하는 행위를 하기로 결심한 인간은 압도적인 힘에 대한 두려움을 통해 벌을 받는데, 그러한 힘에 우리를 넘겨주고, 그러한 힘을 신의 이미지로 번역하는데, 그러한 힘이 신을 대신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러한 힘을 어르려고 기를 쓰고 애쓰지만 소용없음을 통해 자연의 힘과 맹약을 맺을 수 없음을 즉각 깨닫는다."(85)
"그것과 정반대를 이루는 것이 다음과 같은 계몽주의의 근본 사상 중 하나일 것이다. 즉 난파라는 것은 바람이 완전히 잦아들어 세계의 모든 교역을 불가능하게 만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치러야 할 비용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비유에서 철학에 의해 냉대 받는 정념passiones에 대한 옹호가 표현되고 있다. 요컨대 순수이성이란 잔잔한 파도를, 완전한 사리분별을 갖춘 인간의 부동의 태도를 의미할 것이다. 퐁트넬은 루키아노스[120~195년경]를 모작한 『죽은 자들과의 대화』 중의 한 대화에서 에페수스 신전의 방화범 헤로스트라토스의 입을 빌려 오직 파괴만이 인간에게 영구적으로 이름을 남길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준다는 역설로 파괴를 옹호한다. 〈(···) 들리는 말에 의하면 항해자들은 항해가 불가능한 잔잔한 바다를 극도로 두려워한다고 하지 않소? 또 그러기에 폭풍이 일어도 좋으니 바람이 일기를 바란다고들 하오. 사람에게 정념은 모든 것에 동력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꼭 있어야 하는 바람과 같은 것이오.〉"(85-7)
"하지만 구경꾼 또한 더 이상 현실의 가장자리에 선 현자라는 예외적 실존을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을 추동하는 동시에 위험에 빠뜨리기도 하는 저 정념 중 하나의 주창자가 된다. 구경꾼은 본인이 모험 자체에 휘말리지는 않지만 파멸과 센세이셔널한 사건이 매력에 어찌할 수 없이 빠져든다. 그의 침착함은 지켜보는 자의 그것이 아니라 불타오르는 호기심의 그것이다." "사람들이 그러한 구경거리를 보러 달려가는 것은 호기심에 쫓겨서지만 호기심이란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볼테르는 이 호기심 강한 무리 중 난파당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공개처형이 있을 때 사람들이 창가에 모여드는 것은 악의에서가 아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기는 저런 일을 당하지 않아도 되어 즐겁다고 생각할 때는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둘 중 하나다. 〈자기 처지에 비추어 보아서 아니면 ······ 오로지 호기심에서이다.〉"(94-5)
"갈리아니 신부는 난파와 구경꾼 비유를 다시 한 번 비튼다. 비록 호기심이 볼테르가 말하는 것과 같은 정념이더라도 그것은 어떤 위험으로부터도 안전한, 논쟁의 여지가 없는 입장에 있다는 가정을 그만큼 더 강하게 요구할 것이다. 구경꾼이 바다 위에서 펼쳐지는 운명의 드라마에 매혹당하는 것은 그저 그가 단단한 대지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호기심이란 조금이라도 위험하면 그것으로부터 물러난 후 자기 자신에게나 신경 쓰도록 강요하는 감수성이다. 따라서 갈리아니에 의하면 극장이 인간의 상황을 가장 순수하게 보여준다. 관객에게 안전한 좌석이 지정된 후에야 비로소 눈앞에서 인간이 위험한 일에 휘말리는 연극의 막이 오를 수 있는 것이다." "안전과 행운이 호기심의 조건이며, 호기심은 안전과 행운의 징후이다. 위험은 무대 위에서 연기되며, 안전은 처마 지붕 밑의 안전이다. 해안에서 극장 안으로 옮겨감에 따라 루크레티우스의 구경꾼도 도덕적 차원을 빼앗기고 '심미화'된다."(99-101)
"1792년에 헤르더는 『인간성의 증진을 위한 서한집』의 17번째 서한에서 독일이 이웃 국가들의 혁명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에 대해 총괄하면서 난파와 구경꾼 이미지에 의존한다. 〈우리는 프랑스혁명을 마치 낯선 공해에서 일어난 난파처럼 안전한 해변의 높은 곳에서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악령böser Genius이 무도하게 우리를 바다 속으로 내던지는 것과 같은 짓을 하지 않는 한 말이다.〉 주목할 만한 점은 갈리아니가 만들어낸 난파의 은유법과 극장의 은유법 사이의 관계가 헤르더의 이 텍스트에서도 발견되는 것이다. 현실에서 발생 중인 파국은 동시에 〈위대한 세계사라는 신의 책〉 속에 적혀 있는 교훈극, 국민적 성격 덕분에 이미 특전을 부여받은 구경꾼 앞에서 상연되는 신의 섭리극이다." "보다 깊은 수준에서 난파는 '섭리'에 의해 연출되는 교훈극이다. 구경꾼의 안전은 그를 바다 속으로 내던질 수 있는 악령의 형상에 의해 위협 당한다. ─이 드라마 전체는 '섭리'와 '악령'의 그러한 이원론의 틀 안에서 진행된다."(109-11)
4장 생존술
"1807년의 예나 전장의 시찰자 괴테는, 전황을 호전시킬 수만 있다면 개인적 불행쯤은 기꺼이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속내를 털어놓는 열정적 대화 상대에게 한마디의 호의도 보여주지 않았다. 이 전장의 관찰자는, 역사라는 것은 항상 타인들의 역사이며 또한 그렇게 남아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러한 역사로부터 자기의 역사를 보호하기 위해 고대 시인의 이미지에 호소한다. 루크레티우스는 공포로부터의 인간 해방을 찬양했다. 인간에게 공포를 야기할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자연현상이며, 인간세계의 사건은 오직 자연의 일부로서 이차적으로만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괴테에게 반성의 거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도피처 자체의 거리만 존재한다. 〈······ 난파 순간에 다른 어떤 것을 기대할 수 있단 말입니까!〉 반년 후 괴테는 벌써 자기를 난파의 구경꾼으로 비유할 수 있게 되지만 그것은 오직 자기와 자기의 세계가 겨우 몰락을 모면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121-3, 126)
"헤겔의 경우에 구경꾼 입장은 반성Reflexion에 의해 결정된다. 반성은 구경꾼에게 단순한 위로 이상의 것을 주며, 구경꾼을 〈역사의 다음 광경〉과 화해시킨다. 그리고 최고조로 높아진 반성은 〈겉으로는 불의로 가득 찬 것으로 보이는 현실을 변용시켜 합리적인 것과 화해시킨다.〉 구경꾼이 〈말로 다할 수 없는 비참함에 깊은 동정을 기울이며〉 개인을 역사 속에서 바라보고, 인간의 몰락을 자연의 소행뿐만 아니라 인간의 의지에서 비롯된 일로 바라본다는 것은 이성의 얼마나 대단한 성취인가." "우리가 〈역사란 민족의 행복, 국가의 예지 그리고 개인의 미덕을 희생물로 해온 제물이 바쳐지는 것이라고 생각해〉 거기서 생기는 사건을 모두 단지 수단으로만 간주하려 한다면, 그러한 관점이야말로 역사철학의 모든 금언金言의 마지막에서 이성 입장에 선 구경꾼이 즐길 수 있는 진정한 안심이다. 그것은 입장이라기보다는 〈특수한 비유에서 보편적 비유로의 격상을 가능하게 하는 반성의 길〉이다."(124-5)
"『시와 진실』 15장의 끝부분에서 괴테는 난파의 은유법뿐만 아니라 최초의 경험으로부터의 삶의 거리라는 은유도 모두 넘어선다. 그는 바다 위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마치 일어나지 않은 것과 같다고 쓴다. 괴테는 그것을 위해 바다 위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항적이라는 은유를 떠올린다. 그가 이 은유를 갖고 가리키려고 했던 것은 끝나가고 있던 계몽주의시대가 헛되이 품고 있던 역사적 긍지, 즉 계몽주의의 성과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한 번 발견된 길은 계속 이어지리라는 긍지였다." "괴테에게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항상 역사와 자연의 관계였다. 바다를 항해하는 배가 아무 항적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은 단지 역사와 자연이 다르게 되는 조건에 관한 가장 일반적인 명제에 불과하다. 따라서 바다 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조망될 수도 또 파악될 수도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불가역성이라는 신뢰성 속으로 옮겨질 수도 없다. 진보와 몰락 모두 똑같이 잔잔한 수면만 뒤에 남길 뿐이다."(131-2)
5장 구경꾼, 구경꾼 위치를 잃다
"쇼펜하우어의 관점에서 보면 두 위치Position, 즉 난파자 위치와 관찰자 위치에서 인간주체의 동일성이 완전히 해명된다. 그것을 위해 그는 본인의 체계를 틀로 이용하는데, 그것은 이성은 표상Vorstellung의 표상이라는, 따라서 삶의 직접성으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한 기관이라는 독특한 개념을 골자로 한다. 인간이 본인이 겪는 고통의 구경꾼이 될 수 있는 것은 이성 덕분이다. 인간은 항상 현실과의 갈등에 휘말리지만 그것을 순수하게 관찰하는 입장에 도달한다면 〈삶 전체를 모든 측면에서 조망〉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추상적 삶에서 〈인간은 단순한 방관자이자 관찰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당장에라도 항해의 은유법을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을 조망하는 능력을 갖춘 점에서 이성적 존재인 인간과 [그렇지 않은] 동물의 관계는 〈마치 해도海圖, 나침반 등에 의해 항로를 알고 대양의 그때그때의 위치를 정확하게 아는 선장과 다만 파도와 하늘만 보는 무지한 선원의 관계와 같기〉 때문이다."(135-6)
"주체의 이중적 삶─헤겔의 발명품에 가까운 사고방식─이 가장 순수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숭고함의 감정에서이다. 이 감정은 맹위를 떨치는 자연현상에 직면해 내가 위험해진다는 의식과 나를 고양시킨다는 의식을 하나로 결합시킨다." "자연의 무시무시함으로부터의 그러한 초월론적 거리두기에는 암초 해안으로부터의 거리두기뿐만 아니라 자기의식으로부터의 거리두기도 포함되는데, 이 자기의식에게 이 모든 것은 자기의 표상이 된다.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세계의 광대함을 의식하게 되면〉 〈그러한 거짓된 불가능성에 맞서〉 웬일인지 초월론적 반항심 같은 것이 솟아난다. 이처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세계는 '오직' 우리 표상 속에서만, 그것을 통해서만 존재한다는 반항심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은유법에서 만약 주체가 구경꾼 입장에서 물러나 의지─이것은 주체가 자연의 위험을 마주보게 되는 대신 주체를 위험에 노출시킨다─에 의한 세계의 갈등에 휘말려들게 되면 난파당할 수 있다."(136-8)
"어쨌든 삶으로부터 물러난 관점의 '지혜'를 사랑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가능한 이상 구경꾼이 보는 것은 자기의 과거이다. 하지만 그가 보는 것은 또한 〈암초와 소용돌이로 가득 찬 바다〉인 삶에서 생기는 불가피한 것으로서 미래 속에서 자기 앞에 놓여 있다. 그는 신중하게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피하려고 한다. 비록 〈어떻게 해서든 헤쳐 나가려고 온갖 노력과 수단을〉 쏟아부어 성공한다 해도 오히려 난파가 불가피한 지점에 보다 가까이 가버릴 뿐임을 알지만 말이다." "쇼펜하우어는 삶의 충동과 명상으로의 이행을 하나의 이미지로 표상하기 위해 폭풍 한가운데 있는 선원을 스토아학파 철학자로 만든다. 그가 탄 배는 살아남기 위한Überleben 그리고 삶을 초월하기 위한Über-leben 배가 되어버려 항로나 목적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쇼펜하우어의 작은 배에 탄 선원은 지금 본인이 세계의 구경꾼이 되었거나 되려는 중이어서 더 이상 해변의 구경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140-3)
"역사가가 거리를 둔 구경꾼이 될 수 있도록 해주는 견고한 관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가는 시대를 전체로 조망할 수 있는 관점을 얻을 수 없다. 이제 시대의 특징은 〈영구히 수정을 이어가는 정신〉이다. 사람들은 변화의 종결에 이르렀다고 믿고 또 믿어왔다. 하지만 지금 〈1789년 이후 인류를 사로잡아왔다고 할 수 있는 폭풍이 우리도 계속 앞으로 밀고 나가는〉 것을 깨닫고 있다. 인간사를 계속 움직이며 종종 악천후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더 이상 정념의 바람이 아니다. 파괴하고 동요시키고 난파를 야기하면서 모든 것을 몰고 가는 것은 동일한 폭풍이다. ─〈지구상의 이미 알려진 모든 과거와 대립〉하는 과정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움직임 속에 같이 휩쓸려 들어가는 역사가는 그것의 추진력에 몸을 맡겨서는 안 된다. 그것의 바람은 말할 것도 없고 분명히 그것의 거대한 낙관적 의지에 말이다. 인식의 과제는 그에게 〈어리석은 즐거움이나 두려움으로부터 가능하면 최대한 자유로울 것〉을 요구한다."(149-50)
6장 난파로부터 배 만들기
"로렌첸은 인간적 사유의 방법론적 시작에 대한 물음은 한편으로는 칸트가 전치시킨 이후 공리公理주의적 방법론의 우위에 의해, 다른 한편으로는 언어철학 쪽으로 정향된 해석학에 의해 합리성의 영역의 시야로부터 사라지고 말았다고 주장했다. 딜타이로부터 유래하는 철학의 새로운 직접성은 인식은 삶의 뒤로 돌아갈[진상을 규명할] 수 없다는 명제로부터 의도치 않게 또 다른 명제를, 즉 '삶'이라는 표현 또한 사유에 부과되는 언어적 틀로 드러나는 일군의 우연적 전제를 가리킬 뿐이라는 명제를 만들어냈다. 논리실증주의는 이 물음을 과학적 언어를 정초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문제설정으로 협소화시켰다.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은 〈하나의 이미지 속에서 가장 명료하게 주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에 따르면 통사론적 규칙을 가진 언어란 배이고 우리는 그것을 타고 있다는 이미지가 그것이다. 어떤 항구로도 입항할 수 없다는 조건하에 말이다. 배의 수리나 개조 모두 거친 바다 위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161)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사전에 결정적으로 주어져 있어 우리는 자연언어라는 배를 자발적으로 사용할 수도 또 그것을 버릴 수도 없음을 인정하는 것, 그것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고 해서 그것이 아래 물음을 미리 결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즉 그렇게 해서 요구되는 시작을 방법적으로 충족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우리 자신도 그와 동일한 도구를 사용해야 하는가 물음 말이다. 로렌첸은 자연언어를 〈바다 위에 떠 있는 한 척의 배〉로 표상하면서 그러한 이미지를 계속 사용하지만, 그 상황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에 관한 모든 기원적 물음을 넘어선 곳에 놓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도달 가능한 육지가 하나도 없다면 배는 이미 거친 바다 위에서 만들어진 것이 틀림없다. 우리가 아니라 우리 선조들에 의해.〉" "바다는 분명히 이미 사용된 것과는 다른 목재를 품고 있다. 그것은 도대체 어디에서 와서 새로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을까? 혹시 이전의 난파들에서?"(16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