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제국사 - 전4권 - 히틀러의 탄생부터 나치 독일의 패망까지
윌리엄 L. 샤이러 지음, 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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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전쟁: 초기 승리와 전환점


제18장 폴란드 함락 


"폴란드 공군은 48시간 사이에 궤멸되었다. 폴란드 육군은 1주일 만에 패배했다. 소련 국경에 남은 한줌의 병력을 제외하고 폴란드 군은 전부 포위되었다. 이제 소련군이 전리품에서 제 몫을 차지하기 위해 도탄에 빠진 이 나라를 쳐들어올 시간이었다." "9월 5일, 몰로토프는 동쪽에서 폴란드를 공격해달라는 나치의 제안에 공식 서면 회답을 보내면서, 나치-소비에트 조약의 비밀조항으로 합의한 폴란드 내 〈경계선〉은 엄밀히 지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소련은, 폴란드가 소멸했고 따라서 폴란드-소비에트 불가침 조약도 소멸했다는 등, 자국의 이익과 더불어 우크라이나인과 벨라루스인 소수집단의 이익까지 보호해야 한다는 등 비열한 핑계를 대면서 기진맥진한 폴란드를 9월 17일부터 짓밟기 시작했다. 9월 18일, 소비에트군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독일군과 만났다. 정확히 21년 전에 신생 볼셰비키 정부가 서방 연합국과의 약속을 저버린 채 독일 육군과 가혹한 단독 강화 조건을 수락한 그 장소였다."(1084-6, 1089)


"폴란드에서 전쟁을 치르고 승리한 쪽은 히틀러였지만, 더 큰 승자는 거의 총 한 발 쏘지 않아도 된 스탈린이었다. 소련은 폴란드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발트 국가들의 목을 조였다. 나아가 우크라이나의 밀과 루마니아의 석유를 과거 어느 때보다도 확고하게 지켜냈다. 독일로서는 향후 겪게 될 수도 있는 영국의 봉쇄를 견뎌내려면 두 가지 모두 절실히 필요한 물자였다. 심지어 스탈린은 히틀러가 원한 폴란드 유전 지역인 보리스와프-드로호비치까지 얻어내는 데 성공했고, 이 지역의 연간 산출량만큼을 독일 측에 판매하는 데 선뜻 동의했다. 왜 히틀러는 소련 측에 그렇게 값비싼 대가를 지불했을까?" "서부에서 버티고 있는 영국과 프랑스를 상대하려면 후방이 안전해야 했다. 히틀러의 이후 발언으로 분명하게 드러날 것처럼, 이것이 스탈린에게 그토록  뼈저린 거래를 허용한 이유였다. 하지만 이제 서부전선으로 주의를 돌리려는 총통은 소비에트 독재자의 가혹한 거래를 결코 잊지 않았다."(1095-6)


제19장 서부의 앉은뱅이 전쟁 


"서부에서는 별 일이 없었다. 총성이 거의 울리지 않았다. 독일의 보통사람들은 그것을 '앉은뱅이 전쟁Sitzkrieg'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서방에서는 곧 '가짜 전쟁phony war'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영국 장군 J. F. C. 풀러의 말마따나 그곳에서는 〈세계 최강의 육군[프랑스군]이 [독일군의] 불과 26개 사단과 대치한 채 돈키호테처럼 용맹한 동맹국 군대가 몰살당하는 동안 강철과 콘크리트 뒤편에 몸을 숨기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독일군은 그것을 뜻밖이라고 여겼을까? 천만에. 육군 참모총장 할더는 독일이 폴란드를 공격할 경우 서부의 상황이 어떠할지를 상세히 분석했다. 그는 프랑스군이 공세에 나설 〈공산은 매우 작다〉라고 생각했다. 프랑스가 〈벨기에의 의사와 상반되게〉 벨기에를 통과하는 경로로 파병할 리 없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할더는 프랑스군이 수세를 유지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폴란드군이 이미 파멸한 9월 7일, 할더는 벌써부터 독일군 사단들을 서부로 이송할 계획을 짜느라 바빴다."(1097)


"그렇다면 어째서 프랑스군은(영국군의 선발 2개 사단은 10월 첫째 주까지 배치되지 않았다) 서부에서 독일 병력에 대해 압도적 우위를 점하면서도, 가믈랭 장군과 프랑스 정부가 문서로 약속해놓은 대로 공격에 나서지 않았던 것일까? 여러 이유가 있었다. 프랑스군 최고사령부, 정부, 국민의 패배주의, 1차대전에서 막대한 피를 흘린 기억과 피할 수만 있다면 그런 살육을 다시는 겪지 않겠다는 결의, 폴란드군이 처참하게 패한 터라 독일군이 곧 우세한 병력을 서부로 투입할 수 있고 따라서 프랑스가 초기에 어떻게 진격하든 무찔러버릴 것이라는 9월 중순의 깨달음, 무장과 공군력에서 독일이 우위에 있다는 두려움 등이 그런 이유였다. 실제로 독일 공업의 심장부인 루르 지역을 전면적으로 폭격했다면 십중팔구 독일군에 재앙이었을 텐데도, 프랑스 정부는 자국 공장들이 보복을 당할 것을 우려하여 영국 공군이 독일 내 표적을 폭격하는 방안에 처음부터 줄기차게 반대했다."(1100-1)


"11월 20일, 히틀러는 전쟁 수행을 위한 지령 제8호를 발령해 〈유리한 기상 조건을 즉시 활용할〉 수 있도록 〈비상대기 상태〉를 유지하라고 명령하고,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분쇄하기 위한 계획을 결정했다. 그런 다음 심약한 자들에게 용기를 불어넣고 대규모 전투의 전야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적당한 긴장감을 주기 위해 11월 23일 정오에 사령관들과 참모본부 장교들을 총리 관저로 소집했다." "여러 면에서 1939년 11월 23일은 하나의 이정표였다. 그날 히틀러는 육군을 상대로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1차대전 기간에 황제 빌헬름 2세를 밀어내고 독일 최고의 군사적 권한뿐 아니라 정치적 권한까지 차지했던 그런 육군을 상대로 말이다. 그날 이래로 오스트리아의 전 상병은 정치적 판단뿐 아니라 군사적 판단에서도 자신이 장군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고, 그런 이유로 그들의 조언을 들으려 하지도 않고 그들의 비판을 허용하지도 않았다─그 결과는 결국 모두에게 재앙이 될 터였다."(1136, 1141)


"1940년 2월 11일, 복잡한 무역협정이 모스크바에서 마침내 타결되었다. 첫해에 독일 측이 받은 것들은 OKW(국방군 최고사령부)의 기록에 따르면 곡물 100만 톤, 밀 50만 톤, 석유 90만 톤, 면직물 10만 톤, 인산염 50만 톤, 상당한 양의 필수 원재료들, 그리고 소련이 만주에서부터 운송해준 대두 100만 톤이었다." "이것이 히틀러가 자존심을 굽힌 채 독일에서는 영 인기 없는 소련의 핀란드 침공을 지지하고, 소비에트 육군과 공군이 발트 삼국에 기지를 세우는 등의 위협(결국 독일이 아니면 어느 나라를 상대로 그런 기지를 사용하겠는가?)을 감수한 한 가지 이유였다. 스탈린은 히틀러가 영국의 봉쇄를 극복하도록 돕고 있었다. 게다가 스탈린은 히틀러에게 하나의 전선에서 전쟁을 치를 기회, 군사력을 서부에 집중하여 프랑스와 영국에 결정타를 날리고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짓밟을 기회까지 제공했다─그 후에 무엇을 할 생각인지는 히틀러가 이미 장군들에게 말한 바 있었다."(1157-8)


제20장 덴마크와 노르웨이 정복 


"독일 해군은 오래전부터 북방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독일은 대양으로 곧장 나갈 수 있는 진출로가 없었으며, 1차대전 당시부터 독일 해군 장교들은 이 지리적 사실을 머리에 새겨두었다. 영국은 셰틀랜드 제도에서 노르웨이 해안까지 폭이 좁은 북해 전역에 대량의 기뢰와 초계정으로 촘촘히 그물을 쳐둠으로써 강력한 독일 해군을 봉쇄하고, 북대서양으로 빠져나가려는 U보트의 시도에 중대한 지장을 주고, 독일 상선의 운행을 막았다. 1차대전 기간에 독일은 영국의 해상 봉쇄로 숨통이 막혔다. 전간기에 수수한 규모의 독일 해군을 지휘한 소수의 장교들은 이 경험과 지리적 사실에 관해 숙고했고, 향후 영국과 어떤 전쟁을 치르든 간에 노르웨이에서 기지를 획득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야만 북해를 가로막는 영국의 봉쇄선을 깨고, 독일의 수상함과 잠수함에 대양으로 통하는 길을 열어주고, 판을 뒤엎어 역으로 영국 제도를 효과적으로 봉쇄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1167-8)


"전쟁의 기류가 바뀔 때까지 거의 4년 동안 일체의 저항을 포기했던 덴마크 국왕과 국민, 온화하고 교양 있고 태평한 사람들은 독일을 좀체 괴롭히지 않았다. 덴마크는 '모범 보호령'으로 알려졌다. 덴마크 군주, 정부, 왕실, 심지어 의회나 언론까지, 처음에는 정복자들로부터 놀라울 정도의 자유를 허가받았다. 덴마크에 거주하는 유대인 7000명마저 박해를 당하지 않았다─한동안은. 그러나 덴마크 국민은, 대다수 피정복 국민들보다 늦게 알아차리긴 했지만, 전황이 악화될수록 점점 더 잔혹해지는 튜턴족 폭군들에게 〈충직한 협력〉을 바치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함을 결국 깨달았다─자존심과 명예를 조금이라도 지키고자 한다면 그럴 수 없었다. 그들 역시 독일이 끝내 승리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 작은 나라 덴마크가 입에 담기도 싫어한 히틀러의 신질서 안에서 속국으로 지내는 것이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러자 저항이 시작되었다."(1212-3)


"노르웨이는 처음부터 저항했다. 그렇지만 1940년 4월 9일 저녁 독일이 수도를 확실히 접수하자 마침내 기운을 끌어올린 크비슬링─1931년부터 1933년까지 국방장관으로 재임한 뒤, 1933년 5월에 국민연합이라는 파시스트 정당을 결성했다. 이는 독일에서 집권한 나치당의 이데올로기와 전술을 차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노르웨이의 비옥한 민주적 토양에서 나치즘은 잘 자라지 못했다─은 라디오 방송국에 들이닥쳐 자신이 새로운 정부의 수반이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노르웨이인 누구든 독일에 대한 저항을 즉시 멈추라고 명령했다. 브로이어는 아직 파악할 수 없었지만─베를린 역시 알지 못했고 심지어 나중에도 이해하지 못했지만─이 반역 행위로 인해 노르웨이의 항복을 유도하려던 독일의 노력은 실패할 운명이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비록 노르웨이 국민에게는 조국이 치욕을 당한 순간이긴 했지만, 크비슬링의 반역 행위는 망연자실해 있던 노르웨이 국민을 결집해 굳세게 저항하도록 했다."(1219-20)


제21장 서부전선 승리 


"제3제국은 북해 연안 저지대에 위치한 작은 두 나라의 중립을 거의 무수히 보장한 바 있었다. 벨기에의 독립과 중립은 1839년에 유럽 5개 열강이 '영구히' 보장했으며, 이 협약은 1914년에 독일이 위반할 때까지 75년에 걸쳐 지켜졌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벨기에를 상대로 결코 무기를 들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히틀러는 집권한 뒤 이 정책을 계속 재확인하고 네덜란드에게도 비슷한 확약을 했다." "1940년 5월 10일, 베를린 주재 벨기에 대사와 네덜란드 공사는 빌헬름슈트라세로 불려가 리벤트로프에게서 영국-프랑스 군대의 임박한 공격으로부터 두 나라의 중립을 보호하기 위해 독일군이 그들의 영토로 진입하고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바로 한 달 전에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상대로 써먹었던 것과 똑같은 비열한 수법이었다. 독일은 공식 최후통첩을 전하며 저항하지 말라고 두 정부에 요구했다. 만약 저항한다면 유혈 사태의 책임은 〈오로지 벨기에 왕실 정부와 네덜란드 왕실 정부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1234-33)


"네덜란드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5일간의 전쟁이었다. 이 짧은 기간에 벨기에군, 프랑스군, 영국 원정군의 운명이 정해지고 말았다." "전투 첫날에 영국 총리직을 넘겨받은 윈스턴 처칠은 아연실색했다. 5월 15일 아침 7시 30분, 프랑스 총리 폴 레노는 처칠에게 전화를 걸어 잠에서 깨우고는 흥분한 목소리로 〈우리는 패배했습니다! 우리는 졌습니다!〉라고 말했다. 처칠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 대大프랑스의 육군이 1주일 만에 패했다고?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지난 전쟁 이후로 밀집한 고속 기갑부대의 급습이 불러온 혁명의 위력을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라고 처칠은 훗날 썼다. 그 혁명을 일으킨 것은 전차부대─서부 방어선에서 가장 약한 위치를 일거에 돌파하기 위해 한 지점에 집결한 전차 7개 사단─였다. 또한 슈투카 급강하폭격기, 그리고 연합군 방어선의 한참 뒤쪽이나 난공불락으로 보이는 요새의 꼭대기에 강하하여 큰 혼란을 일으킨 낙하산부대와 공수부대도 있었다."(1245-6)


"약간 의문이 남긴 하지만, 히틀러가 됭케르크 앞에서 기갑부대를 정지시킨 것은 자신이 〈세계의 한 요인, 균형추〉라고 보았던 영국에 쓰라린 굴욕감을 주지 않음으로써 강화협정을 촉진하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영국과의 강화는 히틀러의 말마따나 독일이 다시 한 번 동쪽으로, 즉 이제는 소련으로 눈길을 돌리는 것을 가능케 하는 강화여야 했을 것이다. 런던은 제3제국의 유럽 대륙 지배를 인정해야 했다. 그다음 몇 달 동안 히틀러는 조만간 그런 강화를 맺을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이 시점에 히틀러는 영국의 국민성을, 그 지도부와 국민이 끝까지 싸워 지켜내겠다고 결심한 세계가 어떠한 것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히틀러와 장군들은 바다에 무지한─이후에도 무지할 터였다─탓에 바다에 이골이 난 영국이 낡아 빠진 작은 항구에서, 독일군 코앞에 있는 노출된 해변에서 30만이 넘는 병력을 철수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1270-1)


"7월 19일 저녁, 영국에 마지막으로 강화를 제안하기 위해 제국의회에 나섰을 때 히틀러는 여전히 〈만약에 필요하면 실행하기로〉의 '만약에'를 의식하고 있었다. 확실히 그날 히틀러는 긴 연설 중에 역사를 거침없이 왜곡하고 처칠 개인을 마구 모욕했다. 하지만 말투는 온건했고, 자국민뿐 아니라 중립국 사람들의 지지까지 얻고 영국 대중에게도 무언가 생각할 거리를 주려는 교묘한 의도를 품고 있었다. 〈나는 다른 여느 나라처럼 영국을 상대로도 그 이성과 양식에 다시 한 번 호소하는 것이 나의 양심에 따른 의무라고 느낍니다. 나는 이렇게 호소할 만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패자로서 호의를 애원하는 것이 아니라 승자로서 이성의 이름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전쟁을 지속해야 할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연설은 독일 국민들에게는 통했으나 영국 국민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7월 22일, 헬리팩스 경은 방송에서 히틀러의 강화 제안을 정식으로 거절했다."(1301-3, 1306)


제22장 바다사자 작전: 영국 침공 좌절 


"괴링의 대규모 공습인 독수리 작전Adlerangriffe은 8월 15일, 영국 공군을 공중에서 몰아냄으로써 침공 개시의 조건 하나를 확보한다는 목표로 시작되었다." "8월 24일부터 9월 6일까지 독일군은 적 전투기 파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일일 평균 1천 대의 항공기를 출격시켰다. 지난 한 달 동안 하루에도 몇 번씩 출격하느라 이미 지친 영국 조종사들이 용맹하게 싸우긴 했지만, 독일군의 수적 우위가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영국 남부의 전투기 전진기지라 할 비행장 5곳이 중대한 피해를 입고 설상가상으로 핵심 통신본부 7곳 중 6곳이 맹폭을 당해 통신체계 전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영국으로서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그런데 이때 괴링이 갑자기 전술상 잘못을 저질렀다. 영국의 전투기 방어 전력이 공중과 지상에서 손실을 입어 오래 버티지 못할 상황이었는데, 독일 공군은 9월 7일 런던을 겨냥한 대대적인 야간 폭격으로 공세를 전환했다. 그 덕에 영국 공군의 전투기들은 위기에서 벗어났다."(1336, 1340-1)


"독일 공군은 런던 대공습의 성공에, 혹은 성공했다는 생각에 고무되어, 얻어맞아 불타는 영국 수도에 대규모 주간 공습을 가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9월 15일 일요일, 2차대전의 결정적인 전투 중 하나가 벌어졌다. 정오 무렵 독일 폭격기 200대와 그보다 3배 많은 호위 전투기가 영불해협 상공에 나타나 런던으로 향했다. 영국 전투기 사령부는 레이더 스크린으로 공격기의 대규모 편대를 살피고 대비 태세를 갖추었다. 독일군은 수도에 접근하기 전에 요격당했다. 항공기 일부는 돌파했으나 대체로 흩어졌고 다른 일부는 폭탄을 투하하기 전에 격추되었다. 이 날의 전투는 독일 공군이 어쨌거나 당분간은 대규모 주간 공습에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사정이 그렇다면 상륙으로 효과를 거둘 가망은 별로 없었다. 괴링의 호언장담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와 육해군 사령관들은 전황을 더 잘 알고 있었고, 결정적인 공중전 이틀 후인 9월 17일에 총통은 바다사자 작전을 무기한 연기했다."(1347-8)


제23장 바르바로사: 소련의 차례 


"지난 몇 달간 베를린과 모스크바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스탈린과 히틀러가 제3자의 뒤통수를 치는 것과 서로의 뒤통수를 치기 시작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히틀러는 소련이 발트 국가들과 루마니아의 두 지방인 베사라비아 및 북부 부코비나를 차지하는 것을 막을 방도가 없었고, 그의 좌절감은 분노를 더욱 키우기만 했다. 독일은 소련의 서진을 저지해야 했는데, 영국의 봉쇄 때문에 더 이상 해로를 통해서는 수입이 불가능한 독일로서는 루마니아의 석유자원에 사활이 걸려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헝가리나 불가리아도 루마니아 영토의 일부를 요구했다." "결국 리벤트로프가 나서서 헝가리 및 루마니아 양측을 을러댔다. 8월 30일, 빈의 벨베데레 궁에서 양측은 추축국의 중재안을 수용했다. 이에 대해 몰로토프는 독일 정부가 사전에 협의해야 한다는 나치-소비에트 조약의 제3조를 위반했고, 〈공동 이익의 문제〉에 관한 독일의 확약과 상충되는 방식으로 소련 측에 〈기정사실〉을 통보하고 있다고 비난했다."(1379-81)


"11월 12일 진행된 양측 회담에서 꼭 짚어야 할 점은, 소비에트 독재자가, 이후에 상반된 주장을 펴긴 했지만, 이때 파시스트 진영에 가담하라는 히틀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다만 베를린이 제안한 것보다 더 비싼 가격을 불렀을 뿐이다." "스탈린이 제안하는 비싼 대가는 히틀러로서는 고려해볼 여지조차 없는 수준이었다. 히틀러는 소련을 유럽에서 배제하려 했지만, 이제 스탈린은 핀란드, 불가리아, 두 해협에 더해 사실상 아라비아와 페르시아의 유전들─평상시 유럽이 사용하는 석유의 대부분을 공급한다─에 대한 통제권까지 요구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인도양을 소련이 '염원'하는 중심지로서 넘겨주고 입을 막으려 했지만, 소련 측은 인도양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점점 더 요구한다. 그는 냉혹한 협박범이다. 독일의 승리는 러시아에 견딜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그러므로 러시아를 되도록 일찍 굴복시켜야 한다.〉 냉혹하고 뛰어난 나치 협박범은 호적수를 만난 셈이었고, 그 깨달음에 격분했다."(1395-6)


"총통이 엉망진창인 하위 파트너를 곤경에서 구해준 곳은 발칸만이 아니었다. 리비아에서 이탈리아군이 괴멸당한 뒤, 히틀러는 내키지 않으면서도 1개 경기갑사단과 약간의 공군 부대를 북아프리카로 파견하는 데 결국 동의했다. 프랑스 전투에서 기갑사단 지휘관으로서 수훈을 세웠던 늠름하고 지략이 풍부한 전차부대 장교 로멜은 영국군이 북아프리카 사막에서 일찍이 접해보지 못한 유형의 장군이었고, 뒤이은 2년간 영국군에 엄청난 곤경을 안겨주었다." "히틀러는 1941년 봄의 승리. 특히 영국을 상대로 거둔 승리로 기고만장했지만, 그것이 영국에 얼마나 심대한 타격이었는지, 그리고 영 제국이 얼마나 절박한 곤경에 내몰렸는지 충분히 알지 못했다. 히틀러가 제국의회에서 연설하던 바로 그날, 처칠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써 이집트와 중동의 상실로 인한 심각한 결과를 알리고 미국의 참전을 호소하고 있었다. 영국 총리는 2차대전을 통틀어 몇 번 경험하지 않은 암담한 기분에 젖어 있었다."(1425-8)


"(히틀러에게는) 소련 파괴가 최우선이었다. 그 밖의 모든 일은 후순위였다. 이제는 알 수 있듯이, 그것은 경악스러운 실책이었다. 당시 1941년 5월 말에 히틀러는 휘하 전력의 일부만 투입해도 영 제국에 강력한 일격을, 어쩌면 치명타를 날릴 수 있었다. 궁지에 몰린 처칠은 이런 현실을 다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5월 4일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메시지에서 처칠은 영국이 이집트와 중동을 잃는다면 설령 미국이 참전한다 해도 전쟁의 지속이 〈힘겹고 길고 암담한 과제가 될 것〉이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이런 전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맹목성을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발칸 전투로 인해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가 몇 주 연기되었고, 그리하여 작전 실행이 위태로워졌기 때문이다. 작전 개시가 연기된 만큼 애초 계획했던 기간보다 더 짧은 기간 내에 소련 정복을 완수해야 했다. 이 작전의 기한, 즉 칼 12세나 나폴레옹을 패배시킨 러시아의 겨울을 변경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1429-30)


제24장 전세 역전 


"개전 초에 제기된 쟁점은 간단하지만 중대했다. 독일의 세 주요 집단군 가운데 가장 강력하고 당시까지 가장 성공을 거둔 보크의 중부집단군이 7월 16일에 도달한 스몰렌스크에서 320킬로미터를 더 진격해 모스크바를 공격해야 하는가? 아니면 히틀러가 지난 12월의 지령 제18호에 명시한 원래 계획대로 북쪽 측면과 남쪽 측면에서 주공을 펴는 방안을 고수해야 하는가? 달리 말하면, 주요 표적을 모스크바로 정할 것인가, 레닌그라드와 우크라이나로 정할 것인가였다. 브라우히치와 할더가 이끌고 보크와 구데리안이 뒷받침하는 육군 최고사령부는 소련의 수도를 향해 총력으로 진격할 것을 주장했다." "〈그 결과는 파탄이었다〉라고 할더는 전한다. 히틀러는 우크라이나의 식량지대와 공업지대에, 그리고 캅카스 산맥 바로 너머에 있는 소련의 유전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또한 레닌그라드를 손에 넣고 북부에서 핀란드군과 합류하기를 원했다. 모스크바는 내버려두어도 괜찮았다."(1474-5)


"히틀러는 브라우히치, 할더, 보크의 끈질긴 주장에 모스크바 진격을 재개한다는 데 마지못해 동의했다. 그러나 너무 늦어버렸다! 가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진창의 시기(라스푸티차Rasputitsa)에 들어선 것이다. 폭설과 영하의 기온도 일찍 찾아왔다." "러시아의 겨울은 끔찍했고 당연히 독일군보다 소련군이 겨울에 더 잘 대비하긴 했지만, 전세 역전을 이끌어낸 주된 요인은 붉은군대의 치열한 전투 자세와 포기하지 않겠다는 불굴의 의지였다. 그 증거로 할더의 일기나 독일 야전사령관들의 보고서는 소련군이 얼마나 격렬하게 공격하고 반격하는지에 대한 놀라움, 독일군이 얼마나 차질을 빚고 손실을 입는지에 대한 좌절감을 끊임없이 표현한다. 나치 장군들은 소련 체제의 압제적인 특성이나 독일군이 첫 타격으로 입힌 재앙적인 손실을 고려할 때, 소련군이 무너지지 않는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프랑스군을 비롯해 다른 많은 군대들이 변명거리가 더 적은데도 맥없이 무너졌던 것과는 딴판이었다."(1479-80, 1485)


"모스크바 진공 작전의 실패의 대가는 엄청났다. 붉은군대를 휘청거리게 만들었으나 쓰러뜨리지는 못했다. 모스크바를 공략하지 못했고, 레닌그라드와 스탈린그라드, 캅카스 지역의 유전도 마찬가지였다. 영국이나 미국과 통하는 소련 북쪽과 남쪽의 생명선도 여전히 열려 있었다. 2년이 넘도록 연전연승하던 히틀러의 군대는 처음으로 우세한 적군에 밀려 퇴각하고 있었다.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실패의 대가는 더 컸다. 할더는 적어도 훗날에 가서 그 대가를 깨달았다. 〈독일 육군의 불패 신화가 깨졌다〉라고 그는 썼다. 독일군은 다음 여름이 왔을 때 소련에서 다시금 승리를 거두었지만, 끝내 불패 신화를 복원할 수 없었다. 따라서 1941년 12월 6일은 제3제국의 짧은 역사에서 또 하나의 전환점이자, 가장 치명적인 전환점 중 하나였다. 당시 히틀러의 권력은 최정점에 올라 있었다. 이제부터는 그가 침략하기로 선택했던 국가들이 반격에 나섬에 따라 그 정점에서 점차 내려올 터였다."(1489-90)


"그 혹독한 겨울에 히틀러는 난타당한 독일군이 모스크바로부터 후퇴하는 것을 저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히틀러는 퇴각을 일체 금했다. 독일 장군들은 히틀러가 굽히지 않은 이 완강한 태도의 공과에 관해, 그 태도가 육군을 완전히 재앙으로부터 구했는지 아니면 불가피한 대규모 손실을 오히려 더 늘렸는지에 관해 오랫동안 논쟁해왔다. 대다수 사령관들은 각자의 위치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을 때 후퇴할 자유가 주어졌다면 많은 인력과 장비를 구하고, 더 나은 위치에서 재정비하고, 더 나아가 반격까지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실제로 적시에 퇴각했다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법한 사단들 전체가 자주 압도적인 공격을 받거나 포위당하여 분쇄되고 말았다. 그런데 훗날 일부 장군들은 독일군의 현지 사수와 전투를 고집한 히틀러의 강철 같은 의지가 아마도 육군이 눈밭에서 완전히 무너지는 결과를 막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그의 전시 최대 업적이라는 것을 마지못해 인정했다."(1493-4)


제25장 미국의 차례 


"히틀러가 일본에 맡긴 역할은 미국의 참전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당분간은 막아내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일본이 싱가포르를 차지하고 인도를 위협할 경우 영국에 심각한 타격이 될 뿐 아니라 미국의 주의를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돌리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독일에서는 히틀러도 다른 누구도 일본 측에 다른 우선순위가 있다는 생각을 아주 늦게까지 떠올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일본이 미국의 태평양 함대를 파괴하여 배후의 안전을 확보할 때까지 소련을 공격하는 방책은 말할 것도 없고 동남아시아에서 영국과 네덜란드를 상대로 대공세를 개시하는 방책까지 주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독일에서는 아무도 하지 않았던 듯하다." "게다가 히틀러는 일본 측에 미국과의 직접 충돌을 피하고 자신의 승리를 가로막고 있는 영국과 소련에 집중하라고 끊임없이 잔소리를 했다. 나치 통치자들은 일본이 미국과의 직접 대결을 가장 우선시할 수도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1522)


"리벤트로프는 11월 28일 히틀러가 주재하는 장시간의 군사회의에 참석한 뒤 저녁에 오시마를 불렀고, 일본 대사가 즉각 도쿄에 타전했듯이 미국을 대하는 독일의 태도가 〈상당히 경직되었다〉는 인상을 풍겼다. 미국을 상대할 준비가 될 때까지 미국의 참전을 막기 위해 가능한 모든 일을 한다는 히틀러의 방침이 곧 폐기될 것처럼 보였다. 리벤트로프는 갑자기 일본 측에 영국뿐 아니라 미국을 상대로도 전쟁할 것을 촉구하고 제3제국의 지원을 약속하기 시작했다." "12월 1일, 긴급 호출을 받고 베를린 대사관으로 부리나케 돌아간 오시마는 조속히 독일과 협정을 체결하라는 새로운 훈령을 받았다." "리벤트로프는 5일 오전 3시에 오시마 대사에게 일본이 요청한 조약, 즉 독일이 일본의 대미국 전쟁에 동참하고 단독강화를 맺지 않는다는 조약의 초안을 건넸다." "히틀러는 일본이 소련까지 떠맡아야 한다고 고집하지 않았다. 만약 히틀러가 계속 고집을 부렸다면, 전쟁의 추이가 달라졌을 것이다."(1528-9, 1531-3, 1536)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오전 7시 30분(현지 시각)에 일본군이 진주만의 미국 태평양 함대를 강습했다는 천만뜻밖의 소식에 베를린은 워싱턴만큼이나 깜짝 놀랐다. 히틀러가 마쓰오카에게 일본의 대미국 전쟁에 독일이 동참할 것이라고 구두로 약속했고 리벤트로프가 오시마 대사에게 또다른 약속을 하긴 했지만, 아직 확약에 서명하기 전이었고 일본 측으로부터 진주만에 대해 한 마디도 들은 바가 없었다." "그럼에도 히틀러가 막강한 적국 명단에 미국을 추가하는 결정을 그렇게 서둘러 내린 이유를 훗날 슈미트 박사는 콕 집어 말했다. 〈나는 위신을 바라는 히틀러가 미국의 선전포고를 예상하고서 선수를 치기를 원한다는 인상을 자주 받았다.〉 나치 통수권자는 12월 11일 제국의회 연설에서 슈미트의 인상이 옳았음을 확인해주었다. 〈우리는 언제나 먼저 타격할 것입니다〉 하고 히틀러는 환호하는 의원들을 향해서 말했다. 〈우리는 언제나 먼저 강타할 것입니다!〉"(1537, 1543)


제26장 대전환점: 1942년 스탈린그라드와 엘 알라메인 


"2월 20일경 발트 해에서 흑해에 이르는 소련군의 공세가 시들해졌고, 3월 말에는 진흙탕 기간이 시작되면서 피투성이의 광대한 전선도 비교적 잠잠해졌다. 양측 모두 기진맥진했다. 부대들이 휴식하며 재정비하는 동안 이제 국방군 최고사령관에 더해 육군 총사령관이기도 한 히틀러는 다가오는 여름의 공세를 계획하느라 바빴다. 전년도의 계획만큼 야심찬 계획은 아니었다. 이제 단일 작전에서 붉은군대 전체를 분쇄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 여름에 그는 전력의 대부분을 남부에 집중 투입해 캅카스의 유전, 도네츠 분지의 공업지대, 쿠반의 밀 생산지를 정복하고 볼가 강변의 스탈린그라드를 차지할 작정이었다." "스탈린 역시 전쟁을 이어가려면 캅카스의 석유가 필요했다. 그런 이유로 스탈린그라드가 중요했다. 독일이 스탈린그라드를 손에 넣을 경우, 소련 측이 유전을 보유한다 해도 카스피 해와 볼가 강을 통해 중부 러시아까지 석유를 운송하는 마지막 주요 수로가 틀어막힐 터였다."(1565-6)


"석유 말고도 히틀러는 얇아진 전열을 보충할 인력이 필요했다. 동계 전투 막바지에 병자를 제외한 총 사상자는 116만 7835명이었는데, 이 정도 손실을 메울 만한 보충병을 구할 수는 없었다." "숱한 대화 덕분에, 독일군 최고사령부가 하계 임무에 투입할 수 있는 '연합'사단을 52개─루마니아 27개, 헝가리 13개, 이탈리아 9개, 슬로바키아 2개, 에스파냐 1개─로 추산했을 정도로 히틀러와 카이텔은 위성국 전체와의 교섭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는 동부전선에서의 추축국 총 병력의 4분의 1에 달했다. 독일군이 주공을 펼칠 남부전선을 증강하는 새로운 41개 사단 중에서 절반은 헝가리군(10개), 이탈리아군(6개), 루마니아군(5개)이었다. 할더와 대다수 장군들은 부드럽게 말해도 전투력이 의문스러운 '외국' 사단을 그렇게 많이 투입하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하지만 자체 인력이 부족했으므로 마지못해 외국의 조력을 받아들였다. 이 결정은 머지않아 재앙이 닥치는 데 일조할 터였다."(1566, 1569)


"1942년 5월 27일, 로멜 장군은 사막에서 공세를 재개했다. 유명한 아프리카 군단(2개 기갑사단, 1개 차량화보병사단)과 8개 이탈리아군 사단(1개 기갑사단 포함)으로 신속하게 타격한 로멜은 곧 영국 사막군을 이집트 국경 쪽으로 밀어냈다." "6월 말에는 알렉산드리아와 나일 강 삼각주에서 100여 킬로미터 떨어진 엘 알라메인에 있었다. 화들짝 놀라 지도를 꼼꼼히 들여다본 연합국은 이제 로멜이 이집트를 정복해 영국군에 치명타를 가하는 것을 막을 방도가 없다고 보았다. 게다가 로멜이 증원군을 얻는다면, 북동쪽으로 쾌속 진군해 중동의 대규모 유전지대를 차지한 뒤, 이미 북쪽에서 캅카스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한 독일군과 그 지역에서 만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때가 2차대전에서 연합국 측에는 가장 암울한 순간 중 하나, 따라서 추축국 측에는 가장 빛나는 순간 중 하나였다. 그러나 전 지구적 전쟁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 히틀러는 아프리카에서 거둔 로멜의 놀라운 승리를 활용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1569-70)


"최고사령관은 영미군이 배후에서 상륙할 경우 크게 위태로워질 로멜의 곤경에도, 스탈린그라드의 제6군 배후에 있는 돈 강 유역에서 소련군의 반격이 임박했다는 최신 정보에도 개의치 않은 채, 11월 7일 점심식사 후에 뮌헨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이튿날 저녁 뮌헨에서 맥주홀 폭동 기념일을 축하하러 모이는 고참 당원들 앞에서 연설할 예정이었다!" "당시 광범한 전선에서 사단과 연대, 심지어 대대 수준까지 지휘할 것을 고집하던 최고사령관이 하필이면 집이 막 무너지려는 순간에 전장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중요하지 않은 정치적 볼일을 보러 갔다는 사실은 무언가 기묘하고 제정신이 아닌 듯한 인상을 준다. 괴링의 전철을 따라 사람이 곪아가고 퇴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때 막강했던 공군이 꾸준히 쇠퇴하고 있음에도 괴링은 자신의 보석과 장난감 기차에 점점 더 집착했고, 길어지고 갈수록 치열해지는 전쟁의 추악한 현실에는 거의 시간을 들이지 않았다."(1587-8)


"엘 알라메인 전투 및 영미군의 북아프리카 상륙과 함께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2차대전의 대전환점이었다. 아시아와의 경계인 볼가 강까지 유럽의 대부분과, 거의 나일 강까지 북아프리카를 휩쓸었던 나치 정복의 힘찬 물결은 이제 퇴조하기 시작했다. 나치군이 전차와 항공기 수천 대로 적군의 대열을 공포에 빠트리고 분쇄했던 대규모 전격전의 시기는 막을 내렸다. 분명 필사적인 국지적 공격이 있었지만─1943년 봄 하르키우와 1944년 크리스마스 시기 아르덴에서─그것은 독일군이 전쟁의 마지막 2년간 엄청난 끈기와 무용으로 수행해야 했던 방어전의 일부였다. 히틀러는 빼앗긴 주도권을 끝내 되찾지 못했다. 이미 1942년 5월 30일 야간에 영국은 비로소 천 대의 항공기로 쾰른을 폭격했고, 그 다사다난했던 여름 동안 다른 독일 도시들도 폭격했다. 스탈린그라드와 엘 알라메인의 독일 군인들처럼 독일 민간인들도 그때까지 자신들의 군대가 타국민에게 가했던 참화를 처음으로 겪게 되었다."(16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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