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소명으로서의 정치 정치+철학 총서 3
막스 베버 지음, 박상훈 옮김, 최장집 해제 / 후마니타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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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9

1장. 국가 11

1. 정치란 무엇인가 11

과거든 현재든 정치적 결사체들이 다루지 않는 업무란 거의 없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즉, 정치적 결사체들(오늘날의 표현으로는 국가이지만, 역사적으로 근대국가 이전의 조직체들까지 포함해)만이 언제나 늘 배타적으로 수행하는 고유 업무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사회학적 관점에서 볼 때, 다른 모든 정치적 결사체와 마찬가지로 근대국가란, 국가만이 하는 고유 업무에 의해서가 아니라 국가만이 가진 특수한 수단을 준거로 정의될 수밖에 없는데, 그 수단이란 곧 물리적 폭력/강권력Gewaltsamkeit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정치’란 국가들 사이에서든 국가 내 집단들 사이에서든, 권력에 관여하고자 하는 분투노력 또는 권력 배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분투노력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정치를 하는 사람은 권력을 추구한다. 그가 추구하는 권력은 다른 어떤 목적(이상적일 수도 있고 혹은 이기적일 수도 있는)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일 수도 있고 아니면 ‘권력 그 자체를 위한 것’um ihrer selbst willen일 수도 있다. 7-8)

# 베버가 말하는 ‘사회학적 관점’이란 이 책을 읽고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당시 국가에 대한 논의는 매우 강한 규범성을 가진 법학에서 주로 다루어졌는데, 그와는 달리 베버는 국가 현상을 실제 있는 그대로의 사회적 행위로 보았고 그것이 갖는 의미와 과정, 결과에 주목했다. 따라서 베버가 국가, 지배, 복종, 권력, 폭력, 데마고그, 카리스마 등의 개념을 사용할 때 대부분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정치적 실재를 가리키기 위한 것이지 좋고 나쁨의 규범적 판단을 전제한 것이 아니다.

2. 권위: 지배의 정당화 15

원론적으로 보면, 어떤 지배자의 권위를 정당화하는 근거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신성화된 관습geheiligten Sitte의 권위다. 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역사를 가로지르는 영속적 존재’ewig Gestrigen로 받아들여지는 권위를 뜻한다. 다음으로 비범한 개인의 천부적 자질Gnadengabe, 즉 카리스마Charisma에 의거한 권위를 들 수 있다. 이는 신의 계시나 영웅주의 혹은 그가 가진 특출한 지도력을 근거로 사람들이 한 개인 지도자에게 완전한 헌신과 신뢰를 보내는 것을 뜻한다. 마지막으로 ‘합법성’Legalität에 의거한 지배가 있다. 이는 제정된 법규의 타당성에 대한 신뢰, 합리적인 절차에 따라 부여된 객관적 ‘권한’Kompetenz, 그리고 법규가 규정하고 있는 의무를 기꺼이 수행한다는 신념에 따른 것으로, 근대적 ‘공무원’Staatdiener을 비롯해 그와 유사한 형태로 권력을 갖게 된 사람들에 의해 행사되는 지배 형태를 가리킨다. 정치에 대한 가장 높은 차원의 표현인 소명Beruf이라는 개념은 바로 '카리스마'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9-10)

3. 행정: 지배의 조직화 19

어떤 경우이든 [지배의 관철을 위해서는] 행정Verwaltung의 지속적 역할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정당한 권력을 갖게 된 통치권자에게 복종의 의무를 지닌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둘째, 필요한 경우 통치자는 물리적 폭력/강권력 행사에 수반되는 인적・물질적 재화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신분제적으로’ 조직된 정치 결사체에서 군주는 자립적 기반을 가진 ‘귀족’Aristokratie의 도움으로 통치하며, 따라서 귀족과 지배를 공유한다. 반면 행정 수단을 직접 통제하는 유형의 통치자는 가내 예속인들 아니면 평민들을 활용하는데, 이들은 무산 계층이며 아무런 사회적 명예도 없다. 이들은 물질적으로도 완전히 통치자에게 예속되어 있으며 어떤 독자적 권력 기반도 없다. 이 유형에는 모든 형태의 가부장적이고 가산제적인 지배와 술탄적 전제정sultanistischer Despotie, 그리고 [근대의] 국가 관료제가 속한다. 고도로 합리화된 형태를 가진 근대국가의 관료제가 특히나 이 유형에 잘 맞는다. 10, 12)

4. 직업으로서의 정치 24

정치를 자신의 직업으로 삼는 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그 하나는 정치를 ‘위해’für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에 ‘의해’von [혹은 정치에 의존해] 사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방식이 결코 서로 배타적인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정신적인 이유에서뿐만 아니라 대개의 경우 물질적인 관심 때문에 일을 한다. 정치를 ‘위해’ 사는 사람도 내적인innerlich 의미에서는 ‘정치에 의존하는 삶’sein Leben daraus을 산다. 그는 자기가 행사하는 권력을 소유하는 것 자체를 즐기거나 아니면 ‘어떤 대의’에 대한 헌신을 통해 자신의 삶에 의미Sinn를 부여함으로써 내적 균형과 자긍심을 함양하기 때문이다. 이런 내적 의미에서 볼 때 대의를 위해 사는 진지한 사람은 곧 이 대의에 ‘의존해’ 산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를 ‘위해’ 산다는 것과 정치에 ‘의존해’ 산다는 것 사이의 구별은 다른 것이 아닌 경제적 측면에 관계된 문제다. 누군가 정치를 ‘위해’ 살 수 있으려면, 일견 사소해 보이는 경제적 조건을 갖춰야 한다. 15)

(경제적 의미에서) 정치에 의존해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전적으로 정치를 위해 사는 사람들에 의해 국가나 정당이 운영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정치 지도층이 ‘금권정치적으로’plutokratische 충원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사적 재산이 없는 정치가가 정치를 통해 자신의 경제적 생계 확보만을 염두에 두고 있을 뿐 ‘대의’에는 전혀 혹은 주된 관심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경험을 통해 우리는, 자산가들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자기 생활의 경제적 ‘안정성’을 그의 인생 설계에서 최우선적으로 고려한다는 것을 안다. 거꾸로 재산이 없고 따라서 기존의 경제체제의 존속을 바라지 않는 집단에 속하는 계층이야말로 ― 물론 이 계층만 전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지만 ― 가장 철저하고 절대적인 정치적 이상주의의 주창자들일 수 있다. 비정상적인 시기, 즉 혁명적 시기에 특히 그러하다. 따라서 재산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정치적 지도층의 길을 열어 주고자 한다면 이들은 보수를 받아야 한다. 16)

5. 직업으로서의 관료 34

근대적 관료층은 장기간의 예비교육을 통해 전문적 훈련을 받은 고급 정신노동자로 발전했다. 이들은 정직성과 청렴성을 강조하는 직업 의식 내지 신분적 명예심ständischen Ehre을 가진 신흥 계급이다. [공무원이라는] 직업 정신이나 신분적 명예심이 없었더라면 필연적으로 이들은 엄청난 부패와 저속한 속물근성의 지배를 받았을 것이다. 그간 국가의 경제적 역할이 지속적으로 증대해 왔고, (특히 사회주의의 흥기와 더불어) 앞으로도 계속 증대할 것임을 고려하면 국가 관료의 부패와 속물근성은 국가 자체의 작동을 멈추게 할 정도로 위험하다. 종신직 직업 공무원이 없었던 미국의 경우 과거에는 대통령 선거 결과에 따라 수십만 명의 관리들을 갈아치우는 약탈 정치가들의 아마추어 행정이 지배했다. 그러나 이런 아마추어 행정은 (1883년의) 공무원 제도 개혁에 의해 이미 오래전에 큰 변화를 겪었다. 이는 순전히 행정을 관리하는 데 있어서의 기술적인 불가피성 때문에 나타난 결과이기도 하다. 18)

6. 정치 주변의 직업 집단들 43

정당이 출현한 이래 서양 정치에서 변호사가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정당정치는 극히 단순화해 말하자면 이해 당사자에 의해 정치가 운영된다는 것을 뜻하는데, 이해 당사자인 고객에게 유리하도록 소송을 이끌어 가는 것, 이것이 곧 숙련된 변호사의 직업적 능력이다. 확실히 그들 변호사의 손에서 논리적으로 취약한 사건(이런 의미에서 ‘나쁜’schlechte 사건)도 결국에는 성공으로 이어진다. 전문적인 용어로는 ‘좋게’gut 처리된다. 그러나 그는 또한 논리적으로 ‘강력한’ 근거를 만들어 이의신청을 할 수 있는,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좋은’ 사건을 ‘유능하게’ 처리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 전문 관료는 데마고그가 아니며 데마고그의 기능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가 데마고그가 되려 한다면 대체로 그는 매우 나쁜 데마고그가 되고 만다. 진정한 관료는 그의 본래적 사명에 비춰 볼 때 정치를 해서는 안 되고 (무엇보다도 비당파적 자세로) 단지 ‘행정’만 해야 한다. 24-5)

정치 지도자의 행동은 관료와는 전혀 다른, 아니 그와는 정반대되는 성격의 책임 원칙을 따른다. 관료의 명예는, 그가 보기엔 잘못된 명령을 그의 이의 제기에도 불구하고 그의 상급자가 고수할 경우, 그 명령자의 책임을 떠맡아 이 명령이 마치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듯이 성심을 다해 정확히 수행할 능력에 기초하고 있다. 관료가 이런 규율을 따르지 않거나 자기 절제를 하지 못한다면 전체 국가기구는 붕괴하고 말 것이다. 이에 반해 정치 지도자, 즉 지도적 역할을 하는 정치가의 명예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전적으로 스스로 책임지는 것에 기초하고 있다. 그는 이 자기 책임을 거부할 수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할 수도 없으며 전가해서도 안 된다. 따라서 타고난 관료인 사람, 도덕적으로 높은 수준의 관료적 품성을 타고난 사람이야말로 나쁜 정치가일 수밖에 없으며, (책임 개념이 가진 정치적 의미를 기준으로 볼 때는) 무책임한 사람이고 그런 의미에서 도덕적으로 저열한 정치가들이다. 25-6)

진정으로 훌륭한 저널리스트의 업적은 어떤 학문적 업적 못지않게 상당한 ‘지적 정신’Geist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특히나 학자와는 전혀 다른 조건, 즉 지시에 따라 즉시 작성되고 또 즉각적인 효과를 갖는 기사를 써야 한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존경할 만한 저널리스트의 책임성 내지 책임감은 학자보다 훨씬 크며 사실 평균적으로 봐도 학자보다 좀 더 높다는 사실은 거의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물론 그 이유는 언론의 무책임한 행태―그리고 그것이 가져온 끔찍한 결과―가 사람들의 뇌리에 계속 들러붙어 있기 때문이다. 저널리스트라는 직업에 수반되는, 다른 직업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유혹들과, 오늘날 저널리스트로서 활동하며 부딪치는 다른 여러 조건들 때문에, 일반 대중은 언론을 경멸스러움과 비겁한 소심함이 뒤범벅된 것으로 간주하기 쉽다. 아울러 현직 저널리스트의 정치적 영향력은 점차 줄어든 반면 자본주의적 언론 재벌의 정치적 영향력은 꾸준히 증대하고 있다. 26-7)

2장. 정당 59

1. 명사 정당 체제 59

처음에는 정당이라는 단어가 순전히 귀족들의 추종자 집단이라는 의미를 가졌다. 영국이 좋은 예이다. 어느 귀족이 어떤 이유에서든 당을 바꾸면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그와 함께 다른 당으로 넘어갔다. [1832년] 선거법 개정 이전까지만 해도 국왕뿐만 아니라 거대 귀족 가문들도 엄청난 수의 지지자들을 고객으로 삼고 있었다. 귀족 정당과 매우 밀접한 연계를 가졌던 이 유명한 시민들의 정당, 즉 명사 정당Honoratiorenparteien은 중간계급들의 영향력 신장과 함께 나란히 발전했다. ‘교양과 재산’Bildung und Besitz을 갖춘 집단의 출현 역시 서양의 전형적인 특징이었는데, 이들은 지적인 인물의 리더십하에서 여러 정당으로 나뉘게 되었다. 계급적 이해나 가문의 전통 혹은 순전히 이데올로기가 이들 정당을 이끌었다. 이 단계에서 정당은 아직 지역적 범위를 가로질러 조직된 상설 결사체가 아니었다. 단지 의회 의원들에 의해 정당으로서의 결속은 유지되었다. 의원 후보의 공천은 지방의 명사 엘리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31)

2. 지도자와 머신이 주도하는 정당 체제 65

명사들의 지배와 의원들의 주도적 역할은 막을 내렸다. 이제는 의회 밖에 있는 ‘전업’ 정치가들이 정당 조직을 손에 넣었다. 외형상 이 모든 것은 광범한 민주화의 효과라 할 수 있다. 당원들이 모여 출마할 공직 후보를 결정하고 (전당대회에 이르기까지) 여러 상급 대의기관에 보낼 대의원을 선출한다. 물론 권력은 조직 안에서 일상적으로 당무를 수행하는 자와, 조직 운영을 위해 재정적으로나 인적으로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자들의 손에 있다. 부유한 후원자들이나 태머니홀Tammany Hall처럼 강력한 정치적 기득 이익을 가진 권력 집단의 지도자가 대표적이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실은 이런 인적 기구human apparatus―흥미롭게도 영어권에서는 이를 ‘머신’Maschine이라고 부른다―혹은 좀 더 정확히 말해 이 기구를 주도적으로 운영하는 자들이, 의회 의원들을 제어할 수 있고 상당 정도 그들에게 자신의 의지를 강요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사실은 정당의 지도자를 선발하는 데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33)

당의 추종자, 특히 당직자와 당 사업가는 그들의 지도자가 승리하면 관직의 형태로든 아니면 다른 식으로든 보상이 돌아올 것을 기대한다. 그들을 움직이는 힘은 진부한 것들로 구성된 한 정당의 추상적 정책 프로그램이 아니다. 그보다는 (확신을 갖고 그래서 헌신하고자 하는) 어떤 한 개인을 위해 일하는 것에서 얻는 만족감이다. 그러나 널리 인정받는 지도자가 없을 때마다 어김없이 역전의 시도가 나타난다. 지도자가 있어도 당 명사들의 허영심과 기득 이익 때문에 온갖 종류의 양보를 하지 않을 수도 없다. 많은 사회민주당 인사들은 사회민주당이 바로 그런 ‘관료제화’Bürokratisierung에 굴복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들 ‘관료’는 강력한 데마고그적 능력을 가진 인물에게는 비교적 쉽게 순응한다. 자신들의 물질적・이념적 이해관계가 결국엔 이 지도자를 통해 확보할 수 있을 당의 권력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도자를 위해 일한다는 것 자체가 내적으로 좀 더 큰 만족감을 주기 때문이다. 34)

3. 영국의 정당 체제: 코커스 시스템 69

영국의 정당 조직은 거의 순전히 지역의 명사들로 이루어졌는데, 1868년 이후 ‘코커스’Caucus 시스템이라는 것이 발전했다. 그 계기는 선거법의 민주화에 의해 촉발되었다. 즉,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민주적인 외양을 갖춘 거대한 기구를 창설해야만 했다. 동시에 각 구역마다 선거 조직을 만들고, 이런 조직을 중단 없이 가동해야 했다. 그 결과 모든 것을 엄격하게 관료화하는 것이 불가피해졌다. 점차 유급 관료가 고용되기 시작했다. 당 정책의 대표자들은 지역의 선거위원회에서 선출되었다. 이 위원회는 유권자의 10퍼센트 정도를 동원할 수 있었다. 위원회를 움직이는 힘은 재정 기여의 책임을 맡은 지역 인사들에게서 나왔다. 이들은 어디서나 풍부한 이권 획득의 기회를 제공하는 지방 정치에 깊은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새롭게 출현한 머신은 더는 의회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되었고, 그 결과 모든 권력은 소수의 손에, 궁극적으로는 당의 정상에 서있는 단 한 사람의 손에 집중되었다. 36)

# 1867년 영국은 오랫동안 논란만 거듭했던 2차 선거법 개혁을 하게 되었고, 이듬해 선거에서 새롭게 투표권을 갖게 된 유권자를 조직하려는 노력이 계속되었다. 이때 조지프 체임벌린과 비국교회 목사인 프랜시스 슈나도스트Francis Schnadhorst는 버밍엄 자유당협회라는 단체를 조직해 선거운동을 했다. 보수당의 벤저민 디즈레일리는 이를 비아냥거리는 의미로 코커스라고 불렀다. 이때의 코커스라는 표현은 보스가 중심이 된 미국의 지방 정당 조직인 머신을 가리킨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사실상의 대중 투표제적 독재자가 의회 위에 군림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지도자는 어떻게 선발되는 것일까? 세계 어디서나 결정적인 기준으로 간주되는 의지력을 논외로 하면, 여기서 가장 중요시되는 것은 당연히 데마고그적 웅변의 힘이다. 현재의 상황을 우리는 ‘대중적 정서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에 기초한 독재’Diktatur, beruhend auf der Ausnutzung der Emotionalität der Massen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영국 의회의 매우 잘 발달된 위원회 체제이다. 그것은 지도부에 가담할 의사가 있는 모든 정치가를 위원회 활동에 합류하도록 강제한다. 위원회 활동을 보고하고 공개적으로 논쟁하는 과정을 통해 모든 중요 각료들은 지난 수십 년간 매우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실무 훈련을 거쳤다. 이는 위원회가 실제로 유능한 지도자들을 선발하고 순전히 선동가이기만 한 사람을 배제하는 그런 교육기관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37-8)

4. 미국의 정당 체제: 엽관 체제와 보스 76

그러나 미국의 정당 조직과 비교하면 영국의 코커스 제도는 약과다. 미국에서 대중 투표제적 ‘머신’이 그렇게 일찍부터 발전했던 이유는, 미국에서 그리고 미국에서만, 대중 직접 투표의 원리로 선출된 대통령이 행정부의 수반이자 (그리고 이 점이 중요한데) 관직 임면권을 가진 최고 책임자이며, ‘삼권분립’에 따라 직무 수행이 의회로부터 독립해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 선거 승리의 보상은 관직에 따른 봉록의 형태를 갖기 쉬웠다. 그 결과는 ‘엽관제’spoils system로서, 그것은 앤드루 잭슨에 의해 체계적으로 활용되어 하나의 원칙으로 자리 잡았다. 승리한 후보의 추종자들에게 모든 연방 관직을 배분하는 시스템인 ‘엽관제’가 작용한다는 것은 오늘날 미국의 정당들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 그것은 경합하는 정당들이 일관된 신념이나 원칙을 전혀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당들은 순전히 그리고 오로지 관직 사냥꾼을 위한 조직이다. 선거 시에는 득표 가능성에 따라 정책 프로그램을 바꾼다. 38)

대중 투표제적 정당 머신에 기초한 이런 엽관 체제와 함께 무대에 등장한 인물이 당 ‘보스’이다. 보스는 자기 부담과 자기 책임 아래 지지 표를 만들어 내는 정치 영역의 자본주의 기업가이다. 당 조직의 운영 자금 대부분을 조달하는 것도 보스다. 보스는 재계의 거물들이 내는 기부금을 직접 수령해 오는 역할을 위해서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전형적인 보스는 지극히 냉정한 사람이다. 그는 사회적 명예를 추구하지 않는다. ‘상류사회’에서 이 ‘프로페셔널’professional은 경멸의 대상이다. 그는 오로지 권력을 추구하는데, 그것은 권력의 재원뿐만 아니라 권력 그 자체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는 막후에서 활동하는데 이것이 영국의 리더와 다른 점이다. 사람들은 그가 공개 석상에서 연설하는 모습을 볼 수 없다. 보스는 어떤 확고한 정치적 [이념 내지] ‘원칙’Prinzipien을 갖고 있지 않다. 그는 어떤 [이념적] 원칙도 갖지 않은 채 단지 무엇으로 표를 끌어 모을까 하는 문제에만 관심이 있다. 39-40)

5. 독일의 정당 체제: 관료 지배 83

지금까지 독일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적인 요인들 중 첫 번째 요인은 의회의 무기력함이다. 그 결과는 지도자적 자질을 가진 어떤 사람도 의회에 긴 시간을 몸담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 번째 요인은―이 두 번째 요인은 첫 번째 요인에 영향을 끼쳤는데―훈련된 전문 관료층이 독일에서는 엄청나게 중요했다는 데 있다. 우리는 세계 최고의 관료를 가졌다. 그 결과는 전문 관료층이 단순히 전문 관료직뿐만 아니라 각료직까지도 추구했다는 것이다. 세 번째 요인은 미국과는 달리 독일에는 정치적 신념을 가진 [이념] 정당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런 정당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두 정당―가톨릭중앙당과 사회민주당―은 소수당이었고, [중앙당은 신교 국가인 독일에서 소수인 가톨릭을 내걸었고, 사회민주당은 노동계급에만 의존하려 했기 때문에] 사실상 소수당일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의 직업정치가들은 권력도 없고 책임도 없이 저급한 명사로서의 역할만 할 수 있었을 뿐이다. 41-2)

6. 전망: 어떻게 할 것인가 87

달리 선택은 없다. ‘머신’에 기반한 지도자 민주주의Führerdemokratie mit ‘Maschine’ 아니면 지도자 없는 민주주의führerlose Demokratie가 있을 뿐이다. 후자는 소명이 없는 ‘직업 정치가’, 지도자의 필수 요건인 내면의 카리스마적 자질이 없는 직업 정치가들의 지배를 뜻한다. 이들의 지배는 당내 반대파들이 보통 ‘도당’Klüngels의 지배라고 부르는 것이다. 대통령이 의회를 통해서가 아니라 국민투표로 선출된다면 지도자에 대한 욕구를 배출할 유일한 안전밸브는 독일 대통령직이 될 것이다. 만약 대중 투표제적인 독재자plebiszitäre Stadtdiktator가 등장할 수만 있다면, 검증된 업무 수행 능력을 가진 지도자가 부각되고 선출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독일의 모든 정당―특히 사회민주당을 포함해―이 보여 주고 있는 지극히 소시민적인 태도로서 지도자에 대한 적대감kleinbürgerliche Führerfeindschaft이다. 이로 인해 향후 정당 조직이 어떻게 될지, 어떤 변화를 겪게 될지를 예측하기는 어렵다. 44)

3장. 정치가 92

1. 정치가에게 필요한 자질 92

정치가에게는 다른 무엇보다도 다음 세 가지 자질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대의에 대한 헌신을 뜻하는] 열정Leidenschaft, [선의를 내세워 변명하지 않고 결과를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의] 책임감Verantwortungsgefühl, 그리고 [사태를 바라는 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능력을 뜻하는] 균형적 현실 감각Augenmaß이 그것이다. 여기서 열정이란 객관적인 의미를 갖는 것으로, ‘대의’ 및 이 대의를 주관하는 신 또는 [인간과 신 사이에 있는 수호신으로서] 데몬Dämon에 대한 열정적 헌신을 가리킨다. 단지 열정을 갖는다는 것만으로는―그것이 제아무리 순수한 것이라 하더라도―정치가가 되기에 충분하지 않다. ‘대의’에 대한 헌신과 함께, 대의에 대한 책임성이 행동을 이끄는 결정적인 길잡이가 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균형적 현실 감각이다. 균형적 현실 감각이란 내적 집중력과 평정 속에서 사물을 받아들이는 능력이자, 달리 말하면 사물과 사람에 대해 거리를 두는 능력을 말한다. 46)

정치가의 인격이라 할 만한 ‘개성적 힘’Persönlichkeit의 ‘강함’Stärke이란 다른 무엇보다도 이상의 자질을 얼마나 잘 갖추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매일 그리고 매 순간 정치가는 자신의 내부로부터 스스로를 위협하는 사소하고도 지극히 인간적인 적과 싸워 이겨야만 하는데, 그것은 바로 허영심Eitelkeit이다. 허영심은 대의에 대한 그 모든 헌신과 자기 자신에 대한 그 모든 거리감을 유지하지 못하게 하는 치명적인 적이다. 허영심은 매우 널리 퍼져 있어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속성이다. 누구도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대학과 학자들의 세계에서 허영심은 일종의 직업병이다. 그러나 학자들의 경우 허영심 때문에 호감을 얻지 못한다 해도 그 때문에 지식을 추구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상대적으로 폐해가 적다. 정치가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허영심은 정치가를 '객관성의 결여'와 (흔히 이것과 동일시되는) '책임성의 결여'라는 두 죄악 가운데 하나 또는 둘 다를 범하도록 유혹하는 아주 강력한 힘이다. 47)

권력을 향한 야심은 정치가가 일을 하기 위해 꼭 필요한 도구이다. 정치가가 권력을 추구하고 또 권력을 활용해서 헌신하고자 하는 그 대의가 어떤 성격을 가져야 하는가는 신념의 문제이다. 그가 헌신할 수 있는 목표는 국가적 대의일 수도 있고, 더 나아가 인류애 전반에 대한 것일 수 있다. 윤리적이거나 문화적인 대의일 수도 있고, 현세적이거나 종교적인 대의일 수도 있다. 그는 ‘진보’Fortschritt에 대한 강한 믿음에 의해 열의를 발휘할 수도 있고, 아니면 냉정하게 판단해 이런 종류의 믿음을 거부할 수도 있다. 어떤 ‘이념/이상’Idee에 헌신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고, 근본적으로 이념에 헌신한다는 그런 발상 자체를 거부하면서 일상의 구체적 목표에 헌신할 수도 있다. 어떤 종류의 것이든 항상 신념Glaube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표면적으로는 아무리 당당한 정치적 성공이라 하더라도 이 성공에는 피조물 특유의 공허함이라는 저주가 드리울 것이다. 이는 부인하려 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48)

2. 대의와 신념 그리고 도덕 97

산상수훈이 의미하는 바는 정확히 전부 아니면 전무에 있다. [「마태복음」 19장 22절에 있는] 한 부유한 청년의 사례에서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라고 말하고 있다. 복음서의 명령은 절대적이고 명백하다. 그것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내놓아라, 모든 것을 무조건’이라고 말한다. [이와 달리] 정치가라면, 만약 그것이 모두에게 적용되는 요구가 아닌 한 그 명령은 부당하고 사회적으로 무의미하다고 응수할 것이다. 과세, 징수, 몰수처럼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강제와 명령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러한 윤리적 명령은 다른 경우에는 적용될 수 없다. [이 세상을 영원한 것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현실도피적] 무우주론적akosmistischen 사랑의 윤리는 “악에 대해 폭력으로 대항하지 말라.”고 말하지만 정치가는 정반대의 격언, 즉 “너는 악에 대해 폭력으로 저항해야만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악의 만연에 대한 책임은 너에게 있다.”라는 명제에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51)

3.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 105

[결과를 묻지 않는 것] 그것이 결정적인 점이다. 윤리적 지향성을 갖는 모든 행위는 근본적으로 서로 다르고 화해하기 어려운 두 원칙을 따른다. 하나는 ‘신념 윤리를 따르는’gesinnungsethisch 원칙이고 다른 하나는 ‘책임 윤리를 따르는’verantwortungsethisch 원칙이다. 책임 윤리를 따르는 사람은 인간이 가진 평균적 결함을 고려한다. 그는 인간의 선의와 완전함을 전제할 어떤 권리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행위의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한에서는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길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에 반해 신념 윤리를 따르는 사람이 ‘책임’을 느끼는 것은, 정의롭지 못한 사회질서에 항의하는 것과 같은 순수한 신념의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하는 일에 대한 것뿐이다. 이 불꽃을 늘 새롭게 되살리는 것만이 그의 행위가 지향하는 목적이다. 그것은 실현 가능성의 관점에서 보면 전적으로 비합리적인 행동이다. 그것은 본받을 만한 모범을 보인다는 가치밖에는 가질 수 없는 행동이다. 52-3)

세상의 그 어떤 윤리도 피해 갈 수 없는 사실은, ‘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많은 경우 우리는 도덕적으로 의심스럽거나 위험한 수단을 택하지 않을 수 없으며, 부작용이 수반될 가능성 또는 개연성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윤리적으로 선한 목적을 갖는다고 해서 그것이 위험한 수단과 부정적 결과를 ‘정당화’해 줄 수 있는 상황은 언제이며, 또 어느 정도 정당화해 줄 수 있는지를 분별해 주는 그 어떤 윤리도 세상에는 없다. 즉 목적에 의한 수단의 정당화라는 이 문제에서 신념 윤리는 좌절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신념 윤리를 따르는 사람은 [모든 것이 우연적으로 보이는 현세에도 신의 의지가 작용한다고 보는] 우주론적 윤리에 기초한 ‘합리주의자’Rationalist이다.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를 조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사 우리가 목적에 의해 수단을 정당화하는 원칙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어떤 목적이 어떤 수단을 정당화하는지를 결정할 수 있는 윤리적 계율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53-4)

4. 정치의 윤리적 문제가 갖는 독특함 110

[고통과 악, 죽음 등의 현상을 신의 존재에 의거해 정당화하려는] 신정론Theodizee이 안고 있었던 가장 오래된 문제는 바로 다음과 같은 질문이었다. 전지전능하면서 동시에 자비롭다고 믿어지는 [신의] 힘이 어떻게, 부당한 고통과 처벌받지 않는 불의 그리고 개선의 여지가 없는 어리석음으로 가득 찬 이 불합리한 세계를 창조할 수 있었는가? 아마도 그 힘이 전지전능하지도 자비롭지도 않을 수 있다. 아니면 전혀 다른 보상과 보복의 원칙으로 우리의 삶을 지배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원칙들이란 형이상학적으로나 해석 가능한 것 혹은 영원히 해석 불가능한 것이다. 바로 이 문제, 즉 세상이 불합리하다는 것에 대한 경험이 결국 모든 종교 발전을 추동한 힘이었다. 가톨릭 윤리는 [청빈, 청결, 순명 같은] 특별한 ‘복음적 권고’consilia evangelica가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피를 흘려서도 안 되고 영리 행위를 해서도 안 되는 수도사 옆에는 믿음이 깊은 기사가 있다. 그리고 그 기사에게는 전쟁과 영리 행위가 허용된다. 55-6)

5. 혁명적 상황에서의 정치 윤리 115

오늘날 전개되고 있는 계급투쟁이라는 맥락에서 내적 보상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추종자들의 증오심을 만족시키는 것, 복수하고자 하는 추종자들의 열망을 충족하는 것, 특히나 그들의 분개를 정당화하는 것, 혹은 일종의 사이비 윤리라 할 만한 자신들의 옳음을 정당화하는 것, 적을 비난하고 그를 이단으로 몰고 싶은 욕구를 충족하는 것이 그것이다. 외적 보상에는 모험, 승리, 전리품, 권력, 봉록이 있다. 지도자의 성공 여부는 전적으로 자신의 인적 기구가 원활하게 작동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의 성공 여부는 자신의 추종자와 그에게 필요한 적위대, 밀정들, 선동가들에게 앞서 지적한 보상을 지속적으로 제공할 가능성에 달려 있다. 그런 동기들―윤리적인 관점에서 보면 매우 저열하고 저속한―을 제어하는 오로지, 지도자 자신의 인물됨과 그가 가진 대의에 대한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이 추종자 가운데 일부를 고무할 수 있는 동안만 가능하다. 그들 모두 혹은 대다수를 그렇게 만들 수는 결코 없겠지만 말이다. 57-8)

어떤 종류의 것이든 정치를 하겠다고 하는 사람, 특히 정치를 직업으로 삼겠다는 사람이면 누구나 정치가 가진 윤리적 역설을 자각하고 있어야 한다. 이 역설들의 중압에 압도되어 스스로를 지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정치가는 모든 폭력/강권력에 잠복해 있는 악마적 힘들과 관계를 맺게 된다. 무우주론적 박애와 자비의 위대한 대가들―이들이 [예수처럼] 나사렛에서 왔든, [성 프란체스코처럼] 아시시에서 왔든 또는 [석가처럼] 인도의 왕궁에서 왔든 상관없이―이 폭력이라는 정치적 수단을 가지고 일한 적은 없다. 그들의 왕국은 ‘현세의 것이 아니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현세에서 활동했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이처럼 자신의 영혼 또는 타인의 영혼을 구제하고자 하는 자는, 이를 정치라는 방법으로 달성하고자 해서는 안 된다. 정치는 그것과는 전혀 다른 과업을 갖고 있는데, 이는 폭력/강권력이라는 수단을 통해서만 완수될 수 있기 때문이다. 58)

신념 윤리를 따르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책임 윤리를 따르는 것이 옳은지 여부, 그리고 언제는 신념 윤리를 따라 행동해야 하고 또 언제는 책임 윤리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분명히 가려서 지시할 수 없다. 그러나 결과에 대한 책임성을 진심으로 그리고 충심으로 느끼며 행동하던 한 성숙한 인간이 어떤 한 지점에 와서 [마르틴 루터가 1521년 보름스의회에 나와 황제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설명한 뒤 최종적으로 말했듯이] “이것이 나의 신념이다. 나는 다른 내가 될 수 없다! [신의 가호를, 아멘!]”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참으로 인간적이며 깊은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내적으로 깨어 있다면 언젠가 우리 자신도 이런 상황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는 서로 절대적 대립 관계가 아니다. 그 둘은 서로에 대해 보완관계에 있으며 이 두 윤리가 결합될 때에야 비로소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가질 수 있는 참다운 인간존재가 만들어질 것이다. 59-60)

결론. 비관적 인간 현실 속의 정치가 122

친애하는 청중 여러분,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10년 후에는 이미 반동의 시대에 접어들었을 거라는 두려운 생각을, 나는 갖지 않을 수 없다. 지금 표면적으로 어느 집단이 승리하든 상관없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은 여름의 만개가 아니라 얼음이 뒤덮이고 어둠과 고난이 가득 찬 극지의 밤이다. 이 밤이 서서히 물러갈 때, 이 봄날의 꽃이 자신들을 위해 화사하게 피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살아남게 될까? 내적으로는 어떤 마음 상태가 되어 있을까? 비분강개해 있을까, 아니면 속물근성에 빠져 세상사와 자신의 직업을 그냥 그대로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이들 자신은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갖고 있다고 믿었겠지만, 그 말의 가장 깊은 내적 의미에서 볼 때 그들은 객관적으로 그리고 실체적으로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갖지 못했다. 이런 사람들은 차라리 소박하고 순수하게 사람들 사이에서 우애나 도모하고 그저 자신의 일상적 임무에 열심히 몰두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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