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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속도
엘리자베스 문 지음, 정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어둠은 빛이 없는 곳이죠. 빛이 아직 도착하지 않는 곳이요. 어둠이 더 빠를 수도 있어요. 항상 먼저 있으니까요."
빛은 특정한 시간을 거쳐 특정한 장소에 도달한다. 어둠은 빛이 도착하는 자리에 이미 머물러 있다. 우리가 빛과 어둠의 속도에 대해 논할 수 있는 것은 빛과 어둠이 모두 '있는 것'이고 '운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둠 역시 특정한 시간을 거쳐 특정한 장소에 도달할 것이다. 빛과 어둠이 본래부터 모든 시공간을 나누어 점유하면서 '존재'했다면, 양자의 속도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우리는 빛의 속도만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빛은 '운동하는 존재'이고 어둠은 '운동하지 않는 존재'로 규정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위의 언명대로 어둠은 본래 있던 것이 아니라, 빛보다 빨리 도달한 것이다.
그러나 이 서술은 어둠이 빛보다 빠르다는 사실을 설득시키지 못한다. 어둠이 빛보다 먼저 특정한 장소에 이르렀다는 사실에 작용하는 변수는 속도만이 아니다. 토끼와 거북이는 동일선상에서 출발할 수도 있지만, 그들이 뜀박질하는 경기장이 바다인지, 육지인지에 따라 결과가 판이하게 달라질 수가 있다. 또한 애초에 출발시점이 완전히 달랐을 수도 있으며, 거북이는 단 한번만 운동하는 존재이고 토끼는 영원히 운동하는 존재일 수도 있다. 이처럼 빛과 어둠의 다른 존재 양상들, 곧 언제, 어디서, 어떻게와 같은 질문이 배제된 채 '인상적으로' 규정되는 위의 서술은 그러므로 감각적인만큼 불완전하다.
문학은 살아왔거나, 살고있거나, 살아가려는 삶의 여러가지 양상들의 반영이다. 아무리 삶의 양상에 충실한 작가라고 해도 언어와 문자 사이에 걸쳐 있는 심연을 온전히 넘어갈 수는 없다. 그가 아무리 삶을 서술하고 서술해도 삶은 지면(紙面) 위에서 온전히 살아나지 않는다. 그것은 종이 밖으로 뛰어 나와 또 다른 삶에 참여할 때 비로소 재생된다. 타인의 사색으로 구성된 문자들 안에서 건져올리는 삶은 빛과 어둠이 뒤섞인 흐릿함을 피할 수 없다. 명료함을 세우지 않는 자는 흐릿함의 감상에 젖는다. 빛보다 빠른 어둠에 잠겨있는 사람은 자신이 그것들의 나머지 양상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