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거포스트, 1663 - 보급판 세트
이언 피어스 지음, 김석희 옮김 / 서해문집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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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작품은 하나씩 맞춰지는 네 화자의 진술을 라쇼몽의 기법으로 직조한 짜임새 있는 추리소설이다. 작가는 여기에 더해 다수의 실존인물들을 등장시켜 그들의 사유를 발화하게 함으로써, 중세와 근대가 교차하는 17세기 잉글랜드 사회의 과도기적 혼돈 상태를 의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소설은 의무적으로 부과되는 검증의 난점을 피하면서도, 자신이 그리고 싶은 인물이나 사회상, 시대적 맥락의 진면목을 전지적 시점에서 충실히 복원할 수 있는 무대이다.

작가는 사적史的 엄밀성의 부담을 덜어낸 자리에 추론과 상상을 더하여 여백을 채우고 있다. 분량의 과다를 감내해야 하는 관문이 남아 있지만 충분히 즐거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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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의 끝 그리폰 북스 18
아서 C. 클라크 지음, 정영목 옮김 / 시공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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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유년기는 미래를 망각한 채 현재를 살아가면서도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 명확하게 그려보는 선명한 태양의 시절이다. 그래서 대개 위태롭고 자주 어긋나며 가끔 주저앉는다.

태양의 아이는 꿈 속에서 곧잘 실현되는 명쾌한 해법이 현실로 공간이동되는 순간, 시시하게 재생되곤 한다는 사실을 점차 알아차린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꿈이 시원찮아서가 아니라 애초에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점차 알아차린다. 꿈과 현실이 교차할 때마다, 보여주려 할수록 보이지 않는 것들이 어느덧 초생달에 매달려 있다.

<유년기의 끝>에서 나온 <라마와의 랑데뷰>는 압도적이고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냉철하다. 우리는 유년기를 지나서 간다. 어린 아이만이 어른으로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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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속도
엘리자베스 문 지음, 정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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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은 빛이 없는 곳이죠. 빛이 아직 도착하지 않는 곳이요. 어둠이 더 빠를 수도 있어요. 항상 먼저 있으니까요."

빛은 특정한 시간을 거쳐 특정한 장소에 도달한다. 어둠은 빛이 도착하는 자리에 이미 머물러 있다. 우리가 빛과 어둠의 속도에 대해 논할 수 있는 것은 빛과 어둠이 모두 '있는 것'이고 '운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둠 역시 특정한 시간을 거쳐 특정한 장소에 도달할 것이다. 빛과 어둠이 본래부터 모든 시공간을 나누어 점유하면서 '존재'했다면, 양자의 속도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우리는 빛의 속도만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빛은 '운동하는 존재'이고 어둠은 '운동하지 않는 존재'로 규정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위의 언명대로 어둠은 본래 있던 것이 아니라, 빛보다 빨리 도달한 것이다.

그러나 이 서술은 어둠이 빛보다 빠르다는 사실을 설득시키지 못한다. 어둠이 빛보다 먼저 특정한 장소에 이르렀다는 사실에 작용하는 변수는 속도만이 아니다. 토끼와 거북이는 동일선상에서 출발할 수도 있지만, 그들이 뜀박질하는 경기장이 바다인지, 육지인지에 따라 결과가 판이하게 달라질 수가 있다. 또한 애초에 출발시점이 완전히 달랐을 수도 있으며, 거북이는 단 한번만 운동하는 존재이고 토끼는 영원히 운동하는 존재일 수도 있다. 이처럼 빛과 어둠의 다른 존재 양상들, 곧 언제, 어디서, 어떻게와 같은 질문이 배제된 채 '인상적으로' 규정되는 위의 서술은 그러므로 감각적인만큼 불완전하다.

문학은 살아왔거나, 살고있거나, 살아가려는 삶의 여러가지 양상들의 반영이다. 아무리 삶의 양상에 충실한 작가라고 해도 언어와 문자 사이에 걸쳐 있는 심연을 온전히 넘어갈 수는 없다. 그가 아무리 삶을 서술하고 서술해도 삶은 지면(紙面) 위에서 온전히 살아나지 않는다. 그것은 종이 밖으로 뛰어 나와 또 다른 삶에 참여할 때 비로소 재생된다. 타인의 사색으로 구성된 문자들 안에서 건져올리는 삶은 빛과 어둠이 뒤섞인 흐릿함을 피할 수 없다. 명료함을 세우지 않는 자는 흐릿함의 감상에 젖는다. 빛보다 빠른 어둠에 잠겨있는 사람은 자신이 그것들의 나머지 양상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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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 천연균과 마르크스에서 찾은 진정한 삶의 가치와 노동의 의미
와타나베 이타루 지음, 정문주 옮김 / 더숲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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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만든다는 것은 주제넘은 소리다. 다만 우리는 사람이 자랄 수 있는 터를 만드는 일에 도전하려 한다. p227

칼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에서 자본주의가 최초로 노동, 토지, 화폐를 상품화한 결과 자연과 인간의 관계가 황폐화되는 역사의 흐름을 자세히 보여준다. 공장에서 생산되는 상품과 달리 자연과 인간은 무한정의 발전(?)과 확장을 지향하는 존재가 아니라 순환의 과정을 통해 균형을 유지하는 존재이다. 봄과 겨울이 순환하고, 파종과 수확이 순환하고, 일과 휴식이 순환하는 순리는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방부처리되어 세계 곳곳으로 팔려 나가는 신세가 되었다.

시골빵집에서 저자가 구운 자본론의 묘미는 거창한 혁명의 구호가 아니라 바로 이 순환 구조의 회복에 있다. 음이 절정에 이르러 양으로 전환되듯이 효모의 발효를 거쳐야 비로소 그윽한 맛을 담은 빵이 만들어진다. 효모는 그 과정에서 기후와 수질, 인간이라는 환경과 상호 작용하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전한다. 인위적으로 양분이 넘쳐나는 배양액이나 숙성을 위한 플라스틱 통, 단백질이 넘쳐나는 유기농산물을 접하면 효모는 발효가 아니라 부패를 진행시킨다.

자본은 불로장생을 원했던 진시황과 같다. 부패를 연기하고, 전가하고, 거부하면서 눈 앞에 보이는 상품가치의 상승만을 추구한다. 밀가루에 자본이라는 효모가 들어가면 빵이 구워져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구워져 나온다. 사람을 위한 이윤 추구가 아니라 자본 자신의 몸집을 불리는 이윤 추구의 메커니즘이 자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육중한 톱니바퀴는 '거대한 전환'을 일으켜, 다른 세상이 있었음을, 그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기억속에서 지워버렸다.

시골빵집 주인은 이윤을 남기려고 하지 않는다. 상품과 노동력의 교환가치를 최대한 높게 유지하여 직원 모두가 '생산수단'을 소유한 소상공인이 되도록 노력한다. 1년에 한 달씩 주어지는 장기 휴가는 발효과정의 정점이다.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그의 노력이 책 한 권에 요약된만큼의 짧은 시간과 조급함이 아니라 긴 인내와 결단 끝에 제련되어 나온 결과라는 사실이다. 그의 이상만을 보며 품평하는 사람은 그의 노력이 여전히 진행혐임을 간과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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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에
에델 릴리언 보이니치 지음, 서대경 옮김 / 아모르문디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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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영원 속에 홀로 존재하기에 침묵 이외의 언어를 알지 못한다>

아서는 피조물의 사랑 앞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신의 평화를 저주한다. 그는 신의 안식을 방해하고자 등에(쇠파리)의 역할을 자처하지만, 신은 영원히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기에 그의 간절한 성가심이 가닿지 않는다.

<사랑과 우정이 회복되지 않는 혁명이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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