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은 불상들의 전시가 있었다. 이 전시회의 표제인 '來如哀反多羅'는 신라 향가인 風謠[功德歌]의 한 구절로서, '오다, 서럽더라'의 뜻으로 새겨진다. 당치도 않은 일이지만, 이 이두문자를 의역하면 '이곳에 와서, 같아지려 하다가, 슬픔을 맛보고, 맞서 대들다가, 많은 일을 겪고, 비단처럼 펼쳐지다'로 이해되는데, 그 또한 본래의 뜻과 그리 멀지 않은 듯 하다. 오래전부터,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시들을 같은 제목으로 엮어보고 싶은 은밀한 바람이 있었다
2012년 겨울 이성복/ 시인의 말.
선생 2
종강하던 날 영문과 여학생이 준
사탕 봉지에 카드가 들어 있었다
선생님께서 그토록 열심히
가르쳐 주셨건만, 형편없는
시만 쓰고 졸업하게 되었군요
그래, 그건 정말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좋은 선생님들 밑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공부했지만,
되도 않은 시나 쓰면서
그게 바로 시라고 가르쳐 왔으니
제사 때마다 나 글 잘쓰게 해달라고
빌던 어머니 보시기에도,
지 애비 신문 났다고 무슨 경사
난 줄 아는 자식 놈들 보기에도
나는 부끄러운 시만 써왔으니,
오래도록 영문과 여학생의 말은
귓가를 떠나지 않는다 (P.25 )
이별 없는 세대 2
당신의 눈자위에 어른거리다가 잔잔한 나무가 되렵
니다 바람 부는 들판은 내 앞에 있고 안개 속에서 늙
은 여자 목소리가 들립니다
이제부터 나의 몸체는 흔들립니까? 나라의 가난한
변두리를 떠나지 않고 흔들립니까? 어둠을 확인할 만
큼 애매한 빛 속에서
당신의 눈자위에 어른거리다가 잔잔한 나무가 되렵
니다 순수한 굴절과 不動이 나의 꿈이지만 잠자던 痛
覺들은 깨어났습니다
내가 신음하면 당신은 나를 잊어버릴 테지요 큰 소
리로 당신이 나를 부르기 전에는, 그러나 입안에 溫
氣가 남지 않아요 (P.37 )
돌에 대하여
돌은 제 얼굴을 만질 수 없다 아, 얼마나 답답할까
돌은 제 그림자를 숨길 수 없다 아, 얼마나 난처할까
돌은 제 눈물을 삼킬 수 없다 아, 얼마나 서러울까 전
에는, 전에는 ...... 돌은 더듬거린다 여기는, 여기
는 ...... 돌은 두리번거린다 돌은 부딪쳐도 부서진 줄
을 모르고, 돌은 으스러져도 제 피를 볼 수 없다 (P.106 )
來如哀反多羅 6
헤아릴 수 없는 곳에서
무엇을 헤아리는지 모르면서
끓는 납물 같은 웃음을
눈 속에 감추고서
한낮 땡볕 아스팔트 위를
뿔 없는 소처럼 걸으며
또 길에서 너를 닮은 구름을 주웠다
네가 잃어버린 게 아닌 줄 알면서
생각해보라,
우리가 누구인지,
어디서 헤어져서,
다시 못 만나는지를 (P.13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