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닷없는 질문이었다. 거북살스러웠다.
"아, 예."
나는 간단히 대답했다. 내 그림에는 소금창고가 없었다. 그릴까 말까 망설이던 순간이 되짚어졌다. 협궤열차의 공간을 설정하는 데 소금창고가 없어서는 안된다. 더군다나 염전이 있는 이상 당연히 있어야 한다. 나는 소금창고를 좋아했다. 높다란 지붕 아래, 세월에 찌든 낡은 목조 건물은 소금을 저장하기 위한 게 아니라 시간을 저장하기 위한 곳간 같았다. 시간을 어떻게, 왜? 어쨌든 순간이 마지막 휘발되기 전에 갈피 지어 차곡차곡 쟁여 둠으로서 추억을 발효시킨다. 소금창고에는, 기억을 갈무리하듯 시간을 갈무리하는 곡두라도 살고 있다고 믿고 싶었다. 그래서 그 옆을 지나갈 때면 어둠 속에서 지난 일들을 들려주는 두런거림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내 사랑은 어둡고 숨겨진 장소에 깃들여 새로운 숨결을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소금창고 속 소금이었다. (P.255 )
-<깊은 밤, 기린의 말>, 윤후명 '소금창고'-
버려진 소금밭에서
-시인 이가림과 사진 작가 김경옥에게
바다로 뚫린 물길 양편 둔치에
가을엔 듯 노을엔 듯 허벅지까지 붉게 익은 나문재
들이
퍼질러 자리 잡고 앉아 있다.
물길에는 흐린 물이 가다 서다 흐르고
늙어가는 시인 둘과 중년 사진작가 하나가 걷다 서
다 한다.
조심스런 물길 양편 들판 가득
내색 없이 허옇게 쇠고 있는 갈대들,
길이 길에서 놓여났다 어느샌가 다시 잡혀 길이 되
곤 하는
빈 소금 창고 하나 을씨년스럽게 버린 배처럼 떠
있는 나체의 들판,
앞뒤로 뻥 뚫린 노을,
여기저기 잔바람만 나다니다 들키는 이 한데에서
시인들과 들판이 무언가를 주고 받았다.
무엇을?
안저(眼底)까지 환하게 달구던 소금밭의 새하얀 빛
인가,
빛바래기전 세월 어디쯤 소금 빛에 취했던 시인의
모습인가?
물어보려 몸을 돌리면
양쪽 다 고개를 흔든다.
과장 없이 무엇인가 주고받으니 그냥 좋은 거다.
지금은 속없이 소금 냄새만 풍기는 너른 벌판과
오랜 동안 계속 입김 불어내 가벼워진 시인들의 지
금이
그냥 어울리는 거다. (P.58 )
-황동규 詩集, <사는 기쁨>-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