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정치저술가인 로베르트 미지크에 의하면, 공통감각(Common Sense: 상식)이란 자연처럼 본능적이고 직관적인 앎의 형태로우리네 머릿속에 들어선 세상을 보는 흔한 방식이며, “철학적, 이론적 성찰의 산물이 시간의 퇴적을 통해 동시대 대다수의 공통된 생각이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그의 저서 좌파의 생각은 어떻게 상식이 되었나는 수많은 좌파적 사상들이 오늘 어느 한 측을 대변하는 이념으로서가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연히 알고 있으며, 지지하는 것이 되었는가를 추적하는 과정이다. 결국 이 추적의 여정을 통해서 세상을 변화시켜보려는 생각의 단초(端初)를 제공하는 것이라 하겠다.

 

 

1. 깨어있는 인간만이 세상을 변화시킨다

 

좌파의 생각을 말하면서 마르크스의 인용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의 사상의 많은 부분들이 오늘 우리들 삶의 양식을 이해하는 기초가 되고 있다. 미지크는 거의 공공재산이 된 마르크스 사상이라고까지 표현하고 있는데, 이를테면 소외’, ‘자본주의 경제 모순과 같은 것들은 좌우를 가리지 않고 사용하는 공통의 언어라 할 수 있다. 그럼 이렇게 모두가 알고 있는 상식이라면 이것을 새삼 되뇌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는 이렇게 답변하고 있다.

 

독창적이고 탁월한 이론을 통해 이전에는 결코 떠올리지 못했던 생각에 도달한다. 생각과 이론은 우리의 머릿속에서 우리가 계속 깨어 있도록 하며, 우리가 타락하고 무뎌지는 것을 막는다. 생각을 통해 인간은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마음을 품고 움직인다.”

 

이제는 공통감각이 된 사상들을 추적하면서, 공통감각은 결코 경직되거나 고정되어있지 않으며, 오히려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것임을 확인하고, 이로써 우리는 우리들의 삶을 조직하고 구성하며, 내면에 이주해 들어오는 것들에 대한 비판과 이해를 통해 더 나은 세상을 상상하고 행동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생각이란 것을 하자는 것이다. 이 생각의 모험 속에서 생각지 못했던 것들을 비로소 생각하는 시간이 되리라는 것이다.

 

선거를 앞둔 시기는 물론 우리 사회의 정치, 언론, 경제 등 지배적 조직들이 뱉어내는 말 들을 보면 과연 생각’, 즉 고뇌와 비판, 충분한 이해를 위한 노력과 사유가 전제된 언어라고 판단하기에 불편한 것들이 지나치게 난무하고 있다. 최근 우리사회에도 생각 없음(無思惟)’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한 반지성과 관련한 관심이 싹트고 있는 지점에서 공통감각이 된 마르크스로부터 시작하여 그람시, 아도르노, 벤야민, 라캉, 샤르트르, 보부아르, 주디스 버틀러, 하버마스, 푸코, 들뢰즈에 이르는 대()사상을 통해 보다 나은 세상을 함께 고민하는 기회가 된다.

 

스스로 생각하는 일을 멈춘 바로 지금의 우리네 정치사회는 조금만 알아보면 간단하게 그 천박성과 거짓이 드러날 주장들이 마구 구사되는 현실임을 목도할 수 있다. 이러한 행위의 목적은 사회나 특정 세력을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복무케 하기 위함이다. 근거가 빈약하거나 전혀 사실과 다른 내용으로 자기주장을 내세우고, 그래서 그것이 사람들에게 선입견을 부여하기만 하면 집단 사이에 벽을 세워 고정된 정체성을 구조화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이 부실한 반지성적 주장에도 불구하고 이를 믿어버리는 생각하지 않는 대중이 있어서이다. 해방이후 70여년이 지난 오늘에까지 수구 세력들은 여전히 빨갱이라는 전형적인 반지성의 용어로 계급과 집단 분열의 책략을 구사하는 것은 하나의 사례가 될 것이다.

 

깨어있지 못한 대중은 이러한 반지성의 권력에 기만당하고 만다. 지금의 우리 현실이 바로 그러하지 않은가? ‘그람시가 말한 헤게모니는 좌파의 용어였지만 이젠 극우 수구세력들이 더욱 악용하는, 아니 거의 대대수의 사람들이 아는 공통감각이지 않은가? 한 사회의 지배적 세계관의 자리를 잡기위한 이 투쟁의 핵심, 정치 투쟁은 사상에 대한 헤게모니, 세상에 대한 자발적인 이해를 차지하기 위한 투쟁이기에 이러한 반지성은 더욱 활개를 친다. 생각하지 않는 대중은 불행과 파탄이 다가서고서야 진실을 알려고 한다. 기차가 떠나고 난 뒤의 그 애처로운 발길의 한심함과 같다.

 

2. 담론 세계의 진실

 

이렇게 맹렬한 지적 정열로 타자를 압도하여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사람들을 보면 이내 그 깊이 없고 천박한 지성을 발견하게 된다. 아마 TV화면에 등장하는 셀 수 없이 많은 토크 프로그램들 중 어느 하나만 아주 잠깐만 보더라도 이내 정말 무지(無知)하기 그지없는 담론을 떠벌이며 아는 체하는 아무런 의미 없는 공허한 소비임을 확인 할 수 있다.

 

이 프로그램들에 등장하는 패널, 즉 담론의 발화자들은 누구인가? 토론되는 해당 분야의 진정한 전문가, 다시 말해서 담론의 내용에 대해 충분한 연구와 자료가 축적된 사람들 간의 토론인가? 그저 교수거나, 변호사거나, 유명 연예인, 부를 축재한 사업가이거나 하면 인생살이 전반에 대한 인정받는 발화자가 되어 전혀 지성적이지 않은 반지성의 지적 열변을 토할 권리를 획득한 것처럼 행동한다. ‘미셸 푸코는 이처럼 특정한 발화자를 선택하는 것은 일종의 권력 행위이며, “말하기는 곧 투쟁이다. 그래서 담론은 권력효과를 만들어낸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이렇게 표방되는 앎(지식)이란 것이 과연 진실이고 진정한 지식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많은 사람들은 그저 즐기고 잠깐 공감하는 것뿐이라고 답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담론은 사회관계 전반을 관통하는 강제되고 강제하는 의미 총체로서 역할을 하기에 선입견을 만들고, 이념간의 집단을 분리하며, 계층을 분할하는 결과를 야기하기도 하며, 이미 권력의 영향을 받는 구조에서 생성된, 차별을 두는 특유의 의사소통인 이 담론의 효과는 부인될 수 없는 것이다. 반지성이 활약하기에 기막히게 좋은 환경이다.

 

푸코가 말한 담론의 속성을 이해하게 되면 마르크스의 한 문장을 연결하게 된다. “사회의 물질 권력을 차지한 지배계급은 동시에 지배적인 정신 권력도 차지한다.” 여기에는 진실이나 진리라는 말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지배적인 사상이나 생각이란 것은 그저 사회적 관계라는 부식토에서 자라난다.”는 것뿐임을 지적하는 일종의 공통감각이다. 이제 우리들은 안다. 그 주류적인 담론들이나 기득권을 가진 수구세력들의 많은 언어들이 가짜, 허위, 거짓이라는 것을.

대중의 지성이 깨어있어야 한다. ‘파농은 말했다. 사회적 맥락에서 주변화 되고 상처받기 쉬운 계층인 서발턴말을 하지 못한다.”. 사회적 약자인 대중인 그들 개인의 어느 누가 말하더라도 중요한 위에 있는 어느 누구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 실제적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권력을 지니지 못한 우리네 대중은 알아야 한다. 그 사회적 진실의 체계를, 그리고 생각해야 한다. 스스로 생각하는 지성을 갖추어야 한다. 그래야 불의와 불합리와 불평등의 세계를 개선할 수 있다.

 

3. 비판, 그리고 개선

 

불평등한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경우가 드물고 이웃이나 동료를 믿지 않는다. ...사회적 소외, 악화된 사회관계, 문화적 계층 하락, 존중의 상실은 불평등이 심한 사회에 만연 한다. ...(중략)... 많은 사람들이 날마다 멸시와 굴욕에 방치되는 사회는 부패한다.”

 

로산나 로산다의문을 품고 살았다.”고 말했다. 세상에 분명한 것은 없다. 네모난 지구는 둥근 지구로 바뀌었다. 진실은 변화한다. 그래서 비판해야 한다. 그저 반대하기가 아니라 객관적인 방식의 해부, 개념에 대한 분석, 전제 근거와 비난에 대한 분석, 숙고와 이해를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것으로서의 비판을. 마치 대선후보자의 토론에서 등장하는 비판은 잘하지만 실제로 어떻게 개선시킬지 대안은 있나?’라고 빈정댈 수 있다. 그러나 비판할 내용을 만들어내는 일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며, 꼭 필요하다. 결코 비판은 부정성만을 지니지 않는다.

 

비판으로 인해 세상은 숨김없고 꾸밈없는 상태에 놓이게 되며, 이로써 사람은 더 나은 세상을 설계할 수 있게 된다. 계몽의 변증법에서 아도르노일단 확고하게 알고 명확하게 규정하면 올바른 것, 더 나은 것을 모아놓은 색인 목록이 된다. 비판의 부정성에는 늘 긍정성이 들어있다.”고 말했다. 맹목적 믿음처럼 세상을 불행하게 하는 것은 없다.

 

오늘날 거의 모든 좌파의 사유는 혁명을 계획하지 않는다.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대중에게 실익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비판의 결과,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점진적이고 끊임없는 개선이 더욱 행동적이고 인간을 위한 길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말하던 프롤레타리아라는 동질적 계급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은 세계에 와있다. 문화적 환경이 매우 다른 여러 하위환경으로 이루어진 다양한 집단의 사회가 되어있다. 이제 이상에 서서히 접근하는 것으로 만족하여야 함을 우리는 안다. 결단코 멈춤은 없는 그러한 개선을 향해서.

 

일찍이 인간의 소외는 인간으로부터 시작된다.”마르크스는 통찰했다. 좌파의 이론이라서 고려할 가치가 없는 말이었던가? 이젠 우리네 공통감각이 되어있는 말이다.

발터 벤야민브레히트를 이렇게 평가했다고 한다. “절대 환상에 빠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숨김없이 신봉한다.”. 현실, 사회관계를 벗어나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무수한 현상들에 깊숙한 비판과 이해, 그리고 사유가 있어야 한다. 반지성적 현실에 대한 자각이 어느 시기보다 필요한 때다. “오직 동의한 사람들만이 세상을 변화시킬 기회를 얻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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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프랑스 비행사의 체험문학을 다시금 손에 들게 된 것은 첫째, 프랑스 문학의 요체는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의 문제'를 핵심테마로 삼고 있다는 박이문선생의 나의 문학, 나의 철학에서의 문장이 던져준 느닷없는 관심의 유발이었고, 둘째는 안주와 타성에 주저앉아 공허함만을 되뇌는 내 정신의 환기에 대한 기대여서라 하겠다. 다만 나의 지리멸렬한 현실을 넘어서려는 데 어떤 자극이 되어준다면 그것으로 족하리라는 지점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이 읽기는 동화할 수 없는 저항감을 내내 내게 안겨주었다. 아마 화석화한 기성의 해석들에 대한 반감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지속하여 내 가치관과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것은 대의(大義)’라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생텍쥐베리의 소설, 야간 비행을 관통하는 일관된 주제로 보였으며, 인간의 대지에서의 상당부분 역시 이에 할애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결국 프랑스문학의 현대 휴머니즘계열에서 그 중간적 지대를 차지하고 있는 소위 행동적 휴머니즘이라 불리며, 위험의 참여라는 행동을 통하여 부조리하고 비극적인 인간의 조건을 정복하고자 하는 일견 영웅주의(Heroism)가 지니는 오만함의 당위였을 것이다.

 

사실 르포(Reportage)기사와 같은 소설, 인간의 대지에서 나는 인간의식의 용기를 북돋아 절망으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한다거나, 인간은 자신의 운명보다 강함을 확인하게 된다는 그런 인간의 초월적 참여와 행동에는 마음이 가지 않았다고 해야겠다. 이보다는 꽤나 즐비한 아름다운 사색의 문장들이 더욱 나를 인식하게 되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살아있음에 대한 감사, 우주의 작은 미립자에 불과함을 비로소 자각하는 그 겸허함, 사람의 마음을 발견했을 때의 그 풍요로움 들이 절로 삶의 기쁨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생텍쥐페리는 자신의 비행기 추락사고 이후 죽음이 스멀스멀 자신의 육체에 스며들려할 때, 깜박 졸았나 보다. 그리곤 이렇게 그 느낌을 술회한다. 사막에서 잠에서 깨었을 때, 밤하늘의 물웅덩이 말고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 그 별들의 호수를 향하여 누워있었기 때문이다. ... 그러나 나는 떨어지지 않았다. 머리끝에서 발꿈치까지 나 자신이 대지에 묶여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 날 문득, “새벽 식사의 향기로운 접시를 만들어주는이 별, 지구에 살아있음을 느낄 때, 그 경외(敬畏)감에 지그시 눈을 감을 때를 기억나게 한다.

 

그리고 이 문장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발견함으로써 자신의 마음이 풍요로워짐을 느낀다. 그리고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서로 얼굴을 마주본다. 이때 사람들의 모습은 서로 비슷하다. 바다의 광활함에 놀라는 해방된 죄인 같은 그 모습이.”

그러나 모두(冒頭)에서의 저항감으로 돌아가야겠다. 어찌 보면 어쭙잖게 요동을 쳐대고 있는 내 윤리의식을 진정할 필요가 있으니까 말이다.

 

1. 생명을 기만하는 오만

 

나는 생텍쥐페리에 반대한다! 인류의 대의(大義)라는 것에 한 인간의 독자성(獨自性)을 희생시키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이 인간을 기만하는 문명이라는 위대성에 대해서. 또한 공리주의적 셈법에 대해서. 이것이 야간 비행인간의 대지가 말하는 요체로만 이해되었으니 말이다. 세평(世評)은 소위 자기 자신을 초월하고 인도적인 대의를 위해 스스로를 내버릴 때 인간은 비로소 위대해진다.’라는 영웅적 행동의 고취, 인간 정신의 존엄성을 길어낸 작품이라고들 말한다. 나는 결코 이 위대함과 대의에 동의하지 못한다. 그것이 야간 비행의 주인공인 항공사 지배인인 리뷔에르이며, 인간의 대지에서 등장하는 생텍쥐페리의 동료 조종사인 기요메가 말하는 그 단정적 문장이라면.

 

소설 속에서의 야간비행이란 1930년대라는 아직은 조악한 비행장치와 관제, 조종이라는 기술적 상황 하에 오직 인간의 육신에 의존하여 사방에서 폭풍이 몰아치는 칠흑 같은 암흑과 즐비한 고봉을 통과하여 우편물을 운송하는 비행을 일컫는다. 따라서 조종사와 무선사 등 탑승자의 죽음이라는 생명의 희생을 전제로 하는 비행이다. 당연히 야간비행이라는 사업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가 높다. 이에 대해 이 사업을 관철시키고 진행시키는 사업지배인인 리뷔에르는 대답한다.

위험을 제거할 완벽한 해결책을 내놓으라고 따지고 들면, .....(중략)...경험이 법을 만들어 줄 겁니다.” 라고.

생명을 담보로 한 시행착오를 반복함으로써, 다시 말하면 야간비행에서 많은 조종사들의 죽음을 통해 비행조종술과 새로운 항공로가 개척되면 안정된 방식을 갖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이 이 소설의 핵심일 것이다. 인류 사회를 위해 개인의 생명은 기꺼이 바쳐져야 하는 것이며, 이것은 또한 인간 본연의 책임이며, 바로 위대한것이라는 주장이다.

 

이와 같은 말은 인간의 대지에서 동일하게 반복된다. 생텍쥐페리는 내가 한 일은, 결단코 어떤 짐승도 일찍이 한 일이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네.”라는 추락사고와 죽음에서 생환한 동료 기요메의 말을 전하면서 그의 행위야말로 칭찬 받아 마땅한 인간으로서 긍지라고 평가한다. 그리고 이것은 인류의 운명에 대해서 조금은 느끼고 있는 책임”, 바로 자기에 대한 책임이라고.

 

그런데, 이 신념, 즉 인류의 미래에 대한 책임, 인류의 진보를 위한 소명의식으로 가득한 리뷔에르란 인물을 들여다보면 자기에 대한 책임을 구성하는 당혹스러운 윤리의식을 발견하게 된다. 소설 속 한 에피소드에서 정시정각의 이륙이라는 강력한 규칙을 세워놓고, 안개가 자욱하든가, 폭풍우가 몰아치는 가와는 상관없이 이를 어기면 해당 조종사의 보상을 삭감하는 자신의 소신은 의지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기상조건의 악화에 따라 회항한 조종사를 다그치면서, 이는 미지의 세계 앞에서 사람을 무력하게 만드는 저 압력을 그 사람을 통해 공격한것이며, 오히려 그를 공포심에 구해준 것이라고 자신의 냉담함의 이면에 이렇게 깊은 의미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그것이다.

 

기상일기가 회복되기를 조바심 나게 기다리도록 한 자신의 규칙, 죽음이라는 위험의 직면을 회피하려는 조종사에게 영웅심을 주입하려는, 마치 조종사들에게 신()으로서 행세하려는 리뷔에르에게서 나는 오만(傲慢)과 무사유(無思惟)의 지성만을 보게 된다. 그에게 인간에 대한 , 생명에 대한 어떤 권한이 주어졌기에 이러한 의지가 가능할까? 나는 어떤 인간도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죽음을 강요하거나, 생명을 기만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닐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설혹 인류의 멸망을 막는 일이라도.

 

2. 전진, 문명의 진보라는 자기기만

 

한편, ‘리뷔에르의 다음과 같은 주장 또한 실로 첨예한 윤리적 문제를 제기하게 한다.

사람의 생명을 값으로 따질 수 없다 해도, 우리는 언제나 인간의 생명보다 더 값나가는 것이 있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중략)...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그 무엇더 영속적인 것, 구해내야 할,.....중요한 것은 오직 전진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즉 인류의 진보라는 대의를 위해 인간 개개인의 생명은 그것의 수단으로 소용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이와는 완전히 대립적인 주장의 문장을 인간의 대지』 「비행기편에서 발견하게 된다.

 

진보에 열광한 나머지.... 공장을 세우고 유정(油井)을 파는 일에 사람들을 종처럼 부렸다. 이런 건설들을 하는 것이 사람들에 봉사하기 위한 것임을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리뷔에르가 자신의 조종사의 죽음을 담보로 한 야간비행 사업이 인류 항공문명의 발전을 위한 위대한사업이며, 여기에 희생되는 조종사들은 인류를 위해 자기 책임을 다하는, 소위 대의를 위한 행동이라는 것과 어떻게 융화할 수 있는 것인가?

 

인간의 대지에서는 분명히 인간을 도구화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야간 비행에서는 리뷔에르를 통하여 인간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어느 지점에선가 중요한 무엇을 빠뜨렸기 때문에 오해하고 있는 것인가? ‘자기 책임이라는 단어 때문인 듯싶다. ‘자기 탓이 아닌 것 앞에서도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며, ‘인류의 운명에 대해서 조금은 느끼고 있는 책임이라고 생텍쥐페리는 말한다. 종처럼 부려지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참여 했으니 다른 것이라는 주장일 것이다. 이런 기만이 어디 있을까?

 

그래서인지 인간의 대지에는 기막힌 맞춤의 문장이 있다. “곡괭이질이 있는 그곳이 반드시 죄인의 일터는 아니다. 행위 속에 추함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죄인들의 일터는 의미 없는 곡괭이질을 하는 거기에...” 그렇다면 종처럼 부려진 사람들이 팠던 유정은 의미 없는 것이고, 우편물을 운송하는 야간비행 사업은 의미 있는 것이라는 말이 된다. 의미는 과연 누가 부여하는 것인가? 유정 파는 사람이?, 조종사가?, 유정 파는 종을 부리는 인간이?, 야간비행 사업의 지배인이?

 

기이하게도 인간의 대지에는 이런 문장도 있다. “인간의 문명은 얇은 도금에 지나지 않는다. 화산이나 새로 생긴 바다 혹은 모래바람이 그것들을 지워버린다.” 또한, “인간이라는 길손이 무슨 까닭으로 꾸며낸 이 정원을 찾는지는 알 수 없다.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시간이라고는 지질학상의 한 시대, 수많은 축복받은 날 중 하루라는 짧은 시간만이 주어진 이 위험한 정원을.”이라고. 초라한 무대 위에서의 자기 연극을 위해 타자를 살해하는 그런 윤리를, 아니 위대한 연극을 위해서 생명을 요구하는 그런 윤리를 나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소설 야간 비행의 마지막 문장, “자기의 크나큰 승리를 지니고 있는 뤼비에르, 승리자 리뷔에르.”는 역겨움, 바로 그것이었다고 고백해야겠다. 이 영웅주의는 1930년대의 유럽에서는 당연히 지지받았을 것이다. 시대가 요구하는 그런 인간상이었으니까. ‘인간의 존엄성이 아니라, ‘인간정신의 존엄성에 머물러 있었으니까. 아마 자기계발류의 책들에서 말하는 사회적 안락에서 스스로 뛰쳐나와 인생의 심오한 진실에 정면으로 대결하는 고행정신’, 자기초월의 용기를 가지라는 것이 뭐 그렇게 잘못된 것이냐고 반론이 제기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용기가 잘 못 된 것이 아니라 용기가 목적이 아니라서, 그것이 순수함을 상실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이렇게 마무리하여야 할 것 같다. 인간과 세계와 사상과 가치의 모순, 이러한 모순은 하나의 월등한 원칙의 도움을 요청한다. 그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경의여야 할 것이라고. 결코 이 인간은 인류가 아닌 독자성으로서의 인간을 말하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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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반지성주의
리처드 호프스태터 지음, 유강은 옮김 / 교유서가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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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지금 한국사회에 필요한 이해이다. 사람들, 혹은 사회를 어떤 한 방향으로 몰아 특정한 집단이나 계급의 이해관계에 복무하게 하는 반지성주의!‘스스로 생각하는 일’을 멈춘 그 편협성과 무사유성을 해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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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과 분노
로런 그로프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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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시각에서 보느냐의 문제. 태양의 위치에서 보면 결국 인류란 추상에 지나지 않는다....

(中略)... 구체적인 것은 한곳에 초점을 맞출 때에야 보인다." - P 69 에서

 

 

소설은 로토와 마틸드, 남편과 아내라는 두 사람의 주된 서술 관점에 의해 '운명''분노', 이렇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서술되고 있다. 그리곤 각 부분은 다시금 반목하는 사건과 의식의 흐름들을 통한 시간의 분열된 서술 구성으로 정말 강렬한 매력을 발산한다. 비교적 단순한 퍼즐이지만 이 맞추기의 과정에서 조금씩 선명해지는 두 사람의 내면적 진실에 이르게 될 때 감당하게 되는 관계라는 것, 나아가 삶이라는 것 전반에 대한 곤혹한 동요를 맞보게 된다. 이를테면 로토의 관점에서 "그녀의 리듬은 그의 뼈에 새겨져 있었다." 이지만, 마틸드는 "자신의 머리를 그의 무릎에 뉘였고, 어린 로토를 밖으로 끄집어내어 어른 로토가 울음을 멈추게 한 것이다."와 같이 남편의 믿음과 아내의 의도된 행위를 짜 맞춤으로써 완성된다. 이 소설의 맛은 바로 이것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로토와 운명

 

태어난 순간부터 하고 싶은 걸 하면 된다는 말을 듣고 자란 사람. 그저 시도만 하면 되는 사람. 시쳇말로 금수저가 로토의 태생이다. 세상은 그리 어둡지 않은 곳, 타자에 대한 분노가 필요 없는 삶. 그래서 그를 바라보는 타자들은 그에게 우호적이며, 매료되고, 그의 주변에 몰려든다. 빛을 발하는 사람. 무수한 여자들이 그의 살갗을 스쳐간다. 하지만 내 육체가 알아보는, 먼저 반응하는 그 아찔한 전율을 동반하는 이성이란 것이 있다. 바로 내 반쪽이라는, '조르주 바타유'의 말로하자면 내 불연속성의 고뇌를 멈추게 해주는 연속성의 대상인 개체, 바로 그이자 그녀라는 확신 말이다. 남자는 그녀를 알아본다. 백금발의 우아한 여자, '마틸드'. 스물 두 살의 나이에 남자는 여자와 결혼한다. 남자는 세상을 얻은 것과 같은 행복과 사랑에 취하지만, 남자의 엄마, 남편의 거대한 생수회사를 상속받은 여자는 아들의 결혼에 냉담하고, 이들의 관계가 지속되는 한 어떠한 재화도 제공되지 않는다. 셰익스피어의 햄릿 배역을 시작으로 연극배우로 성공하기를 기대하지만 그의 기대와 대중의 기대는 사뭇 다르다. 삶은 곤궁하고 아내의 벌이에 의지해 소박한 일상을 지속하지만, 좌절의 심연은 깊어만 진다. 실의 속에서 끄적인 그의 희곡을 읽어 본 아내의 격려는 그를 극작가로서의 삶으로 우뚝 서게 한다. 유명한 극작가로서의 삶은 그에게 삶의 의욕, 사랑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이야기로서의 '운명'은 한 남자의 역사를 이렇게 서술하지만, 소설의 내적 구성은 자못 다채롭다. 로토가 집필한 희곡들이 부분적으로 기술되고 있는데, 이것이 다름 아닌 소설적 암시이며, 진실의 틈을 메워주고 있다는 점이다. 일례로, <디 안티고나드>라는 로토의 희곡 속에 등장하는 '로스' ''의 사랑과 죽음의 이야기는 마치 로토가 마틸드에게 들려주고픈 이야기로 보이고, 로스가 죽어가면서 고에게 남기는 마지막 문장인 "세상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곳이...."라는 구절은 아내 마틸드의 내면적 진실을 꿰뚫어보는 듯한 로토의 시선을 느끼게 해주기도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하게 되면 로토가 아내 마틸드의 내면적 고통을 모르지 않았으리라는 것과 그 고통까지 자기 것으로 하려는 로토의 사랑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아내는 그에게 "뭔가 금지된 것의 짜릿한 느낌"이기도 하며, 매일 새벽이 오기 전 "두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부옇고 어둑한 세계. 그 단어가 뭐였더라? 소슬"한 푸른색 추상화이기도 하고, 자기 어머니에 대한 분노로 "그녀의 손이 떨리는" 은둔해 있는 그 미세한 감정을 예민하게 포착하기도 한다. 명료하게 그 정체를 알지는 못하지만 아내의 고독, 고통, 분노를 충분히 감지하고 있으며, 다만 사랑하는 이를 위해 이러한 자신의 감정을 이해의 차원에서 간직하고 있는 남자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 "그 자신을 구성했던 모든 것이 전복된 차원, 예측 가능한 것이 폭발해버린 차원"에 봉착하게 된다. 너무도 완벽하게 그의 생활을 지배했던 그녀, 완전한 하나, 그리고 눈처럼 순수한 여자, 슬프고 외로운 여자를 만났다는 그의 앎, 그가 아는 세계의 이야기가 완전히 뒤집혀버린다. 소설은 이 이야기의 다른 관점이자 완성된 퍼즐의 짝인 '분노' 속으로 시선을 다급하게 몰아댄다.

 

 

마틸드와 분노

 

당혹스러울 정도의 반전이라고 해야 하나? '오렐리', 왠 프랑스 소녀? 혹독함, 냉담함, 잔인함과 같은 어휘들만 어울리는 어린 소녀 오렐리의 성장기를 쫓는 내내 그녀를 구성하게 될 내면의 성분들을 알게 된다. 네 살의 여자아이에게 씌워진 냉혹한 시선들, 버려진 아이, 음침함과 추함의 세계, 무관심과 고립의 세계, 철저하게 타자로부터 소외된 아이의 저 침잠한 심연이 끝없이 차오르고 올라 거대한 분노로 터져 오르는 것이 보인다. 오렐리의 마틸드로의 변신, "에너지로서의 고통, 갑작스런 분출"이라 외치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코리올레이너스>'볼룸니아'아의 분노, 그것. 이 에너지가 그녀를 명문대학 바사(Vassar)의 입학으로 이끌고, 마틸드는 학비를 위해 '불가능'의 세계, 음울한 음란의 노예를 계약한다. 대학 4년이 종료되는 시점, 그 불가능의 세계에 대한 계약이 끝나는 시간, 속박되고 소외되었던 세계의 껍질을 벗어나 자유와 풍성한 관계가 시작되는 미래, "여자는 자신의 회로를 완성하기 위해, 자신의 스위치를 최대한의 빛을 밝히기 위해 다른 존재를 필요로 한다고" 선언한다.

 

막대한 부의 상속자, 대학 내 모든 여성들의 우상, 연극배우 햄릿의 주인공, 그가 바로 다른 존재이다. 그에게 접근하는 치밀한 계획, 파티석상 저 위의 난간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환한 웃음을 짓는 남자, 그 남자의 시선이 마침내 그녀에게 이르는 순간, 그는 뛰어내려 사람들을 헤치고 그녀의 앞에 우뚝 선다. 이제 두 사람은 결혼한다. 그러나 '운명'의 로토가 말하던 상황이 아니다. 우연으로 가장된 필연, 여자의 계획된 필요에 의해 이루어진 결합이다. 여기서부터 관점은 수없이 교차한다. 로토는 이를 "첫 눈에 반한 사건"이라 부르지만, 마틸드에게 이것은 "섹스 사건"이며, 두 사람 최초의 육체적 관계가 그녀에게는 "아기 사슴을 삼키는 보아뱀"이다. 그러나 여자는 말한다. "부부가 되어 치른 그들의 첫 관계는 너무 빨리 끝났다....(中略)....상관없었다. 분리된 자아들의 경계가 제거되었다." 그래, 그녀는 연속성을 확보했다. 그녀는 더 이상 혼자 아니게 되었다. 아마 이것으로 마틸드는 충분히 삶의 의미를 회복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문장이 막아선다. "그녀는 얼굴을 닦고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빗은 뒤 독한 표정이 사라질 때까지 미소 짓는 연습을 했다....(中略)...." 남자가 말한다. '내 골수까지 사무치도록 당신을 사랑해.' 그러나 여자는 등을 돌린 채 말한다. '나도.' " 남자는 등 돌린 여자를 보지 못한다. 등 돌린 여자의 무심한 사랑의 동의.

 

여자는 남자의 실재와 환상의 간극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녀는 또 말한다. "단 한 번도 그의 말을 바로잡아 주지 않았다. 그가 그런 환상을 간직하며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이유가 뭔가? 그것이 그를 행복하게 하는데. 그를 행복하게 할 수 있다면 그녀는 그것으로 좋았다. 기꺼이!" 다시 퍼즐을 맞추자. '운명'에서 남자는 말한다. "그녀의 중심에 자리한 어두운 채찍. 그녀는 어떻게 그 채찍을 그토록 부드럽게 휘둘러 그를 계속 움직이게 할 수 있었을까." 이 완성된 형태는 그녀가 자신에게 다짐하는 맹세에 있다. "자기 안의 어두운 공간을 그에게 절대 들키지 않겠다고 혼자 맹세했다....(中略)...오로지 그녀의 큰 사랑과 빛만 알게 하겠다고."

 

그런데 그가 먼저 떠나버렸다. 들키지 않으려했던 '그녀의 어두운 공간'이 로토의 삶을 끝내버렸다. 그녀가 결코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던 그것. 말하지 않은 거짓말. 남편이 자신이 선택한 길을 더 잘 걸어가기를 그녀가 바랐다는 사실. 모두에 인용한 소설의 문장처럼 진실은 과연 '어떤 시각에서 보느냐의 문제'이며, '한 곳에 초점을 맞출 때에만 보이는"것일까? 라는 의문이 고개를 쳐든다.

 

작품에는 이와 유사한 물음이 있다. "로토가 그 공포에 귀를 기울였다면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다. 명성도 얻지 못하고 희곡도 쓰지 못했겠지만, 평화, 편안함, 돈은 누렸을 것이다. 화려함은 없었겠지만 자식은 있었을 것이다. 어느 삶이 더 나은가?" 그리곤 "우리가 말할 수는 없다."고 맺는다. 정말 말 할 수 없는 것인가? 나는 이것이 잘못된 질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명성과 부의 편안함의 대비로 한 사람의 삶의 의미를 대체하는 이런 경박한 질문 말이다. 결혼생활이란 이런 것이 아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란 이러한 관점의 대상이 아니라 신뢰와 진실의 대상이 아닐까? 이런 구절도 있다. "거의 눈에 띄지 않는 다정함, 말 없는 친밀함," 이러한 것들이 "그들의 결혼 생활을 이루었다.". 여기에는 무엇이 도도히 흐르고 있는가? 신뢰 아닌가? 그 신뢰의 기반이 무너질 때, 우리도 같이 무너져 내리지 않겠는가? 실제 마틸드와 그가 그녀라고 믿었던 마틸드 사이의 메울 수 없는 간극. 그녀는 볼룸니아처럼 "분노는 제 자양분, 제 저녁 식사입니다. 그걸로 배를 채우다 결국 죽음을 맞겠지요."라고 외치지만, 로토의 자양분, 저녁식사는? 로토는 그녀의 부드러운 채찍과 환상으로 배를 채우라는 것인가? 과연 결국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이기만 한 것일까? 그리고 "결혼이란 거짓말투성이야. 대체로는 친절한 거짓말이지만, 말하지 않는 거짓말이지."라는 말이 진실이 될 수 있을까?

 

소설 속 두 사람의 서술들은 많은 관점의 이야기들로 논쟁할 수 있을 것 같다. 우선은 관점, 결혼의 정의부터, 그리고 '거투르드 스타인'이 자기 반려자를 회고하며 "그녀에 대한 기억을 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발언처럼 마틸드가 살아낸 오직 남편의 행복을 위한 삶의 의미에 대해서, 아내의 말하지 않은 거짓에 대한 로토의 고뇌에 대해서, 로토가 쓰고 마틸드가 가필한 많은 소설 속 희곡들의 해석에 대해서, 그리고 사랑과 연속성에 대해서. 그네들 거실의 석상 뒤에 걸린 푸른색 추상화의 그 소슬한 느낌에 푹 빠져있던 느낌, 여운이 꽤나 오래 지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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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본원적 욕망으로서의 비생산적 소비, 에로티즘과 죽음에 대해서

 


 

오늘의 소비중심주의 문화현상을 일찌감치 ‘에로티즘’과  ‘죽음’이라는 인간 생명체의 근본적 본질의 탐구를 통해 이를 인류의 본원적 가치라고 말하는 전복적 사유로 현대사상의 거대한 뿌리를 제공한 ‘조르쥬 바타이유’는 내 인생관을 그의 위대한 저술 『에로티즘』 전후로 분리하게 했을 만큼 엄청난 영향을 준 사상가라 할 수 있다. 이 한편의 저술을 접함으로써 인간 욕망의 뿌리, 그 과잉의 탐구, 소비의 사회학이라 할 수 있는 『저주의 몫』은 물론, 『에로티즘의 역사』에 이르는 우리 인간과 사회제도를 해석하는 일반경제학과 전형적인 비생산적 소비인 성(性)과 성담론의 행보를 따라가게 되었다고 감히 말 할 수 있다.

 

특히 그의 소비경제학은 현대사회의 비판적 담론가들의 대표자라 할 수 있는 데리다, 푸코, 부르디외, 보드리야르 등에 과시적 소비사회에 대한 탁월한 이론들을 낳게 하는 근간이 되었으며, 오늘의 인간과 세계의 존재조건들을 이해케 하는데 귀중한 인식론적 준거를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낭비, 소모라는 본원적 가치로서의 에로티즘에 이르게 한 사상적 기점이자 근원적 사유를 담고있는 『저주의 몫』은 이후 그의 소설작품이나 예술관, 사상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필수적 저술이다. 바타이유의 모든 사유를 지배하는 관념으로서‘비생산적 소비’라는 개념에 대한 이해는 절대적이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모든 유기체는 에너지(富)의 원천과 본질을 아무 대가없이 베푸는 태양 광선에서 얻으 

며, 이 대가없는 베풂 때문에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받아들이고, 초과분은 체계의 성장에 사용토록 한다. 그런데 만약 이 체계가 어느 순간 그 에너지를 활용하여 성장하는 것이 한계에 이르러 그 초과에너지가 성장에 흡수될 수 없게 되면, 남아도는 에너지는 폭발할 수밖에 없으며, 그래서 어떠한 방식으로든 대가없이 소모되어야만 안정과 균형을 이룰 수 있다. 는 것이라 하겠다.

 

즉 대가없이 소모하는 것, 바로  '비생산적 소비’라는 것으로써, 이는 인류평화, 생존과 유지를 위한 최고의 진리라는 것이다. 물질의 풍부한 생산이 미덕이 아니라 생산에는 전혀 관여치 않는 사치와 소모가 미덕이라는 말이 언뜻 낯선 이야기로 인식되지만 고대사회의 증여에 의한 교환시스템이나 희생제의와 같은 종교적 축제를 비롯해서 군사기획사회로서의 이슬람의 소모적 전쟁이나, 티베트의 승려사회라는 비생산적 집단, 서구 중세 종교기획사회의 모습을 통해 잉여의 해소가 인간과 지구, 나아가 우주 질서의 본성임을 다채로운 사례들을 통해 납득케 하고 있다.

 

이처럼 ‘에너지 과잉’을 안정화시키기 위한 행위로서 비생산적 소비는 “사치, 종교예식, 기념물 건조, 전쟁, 축제, 스포츠, 장례, 예술, 도박, 섹스”와 같은 “소비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소비”이다. 여기서 섹스는 과잉 에너지를 해소하는 아주 본원적이며 유용한 수단이라는 것이 도출된다. 예로서 북미 인디언의  ‘포틀래치’와 같은 독특한 증여메커니즘이나,  값비싼 장신구, 넘치는 음식물, 피의 희생과 같은 엄청난 부의 소비를 요구했던 고대 아즈텍인들의 ‘희생제의(犧牲祭儀)’는 신성한 소비, 비생산적 소비, 과잉에너지의 효율적 소비라고 해석되듯이, 섹스로서의 에로티즘은 인류의 죽음에 대한 깨달음, 다시 말해서 소멸에 대한 가치, 비생산적 소비의 본원적 중대성의 이해로부터 시작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의 에로티즘에 대한 위대한 해석,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숭고하다고 할 만한 업적이 탄생한다. 고대 동굴벽화의 죽음에 대한 공포와 경외감, 그리고 죽음에 대한 관능의 모습, 공포라는 죽음의 외연이 만들어낸 종교적 감수성에 대한 인류의 섹스에 대한 목적의식의 발견은 에로티즘의 역사에 대한 성찰을 낳는다.  죽음의 인식으로부터 살해의 금지와 같은 금기를 낳고 궁극에는 금기위반을 둘러싼 욕망의 메커니즘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두 개체의 하나로의 결합, 이는 새로운 불연속적 존재를 탄생시키고 둘은 소멸한다. 곧 성행위는 죽음의 다른 이면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알몸과 알몸이 결합하는 한 순간 자아의 경계가 사라지며, 이순간이 바로 존재의 연속성이 구현되는 순간, 즉 신성성에 이르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곧 생명의 절정인 에로티즘을 통해 인간은 역설적이게도 죽음의 심연을 맛보는 것의 다름 아니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며, 결국 에로티즘은 신성성의 현현이며, 비생산적소비의 전형이라는 것이다. 바타이유를 이해하게 될수록 인간이란 근원적으로 생산의 이성보다 소비의 욕망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임을 이해하게 되는 정말 엄청난 사유의 대 전복을 경험케 되는 것이다. 대체 욕망이 선악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로부터 시작되는 금기(禁忌)의 장치들에 대한 현대의 담론적 장치들의 세계로 사상적 지평이 활짝 열리게 된다.

 

소설 얘기를 빼 놓을 수는 없겠다. 그의 사상적 기반에 어떠한 형식으로든 영향을 끼친 출생과 불우한 성장의 환경에서부터, 니체로부터의 영감이나 투우장 죽음의 목격이 반영된 지극히 개인적 체험이 반영 된 것들이기에 인간의 내면에 잠재워진 뿌리 깊은 강박, 그 요소들인 에로티즘과 죽음의 비상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눈의 이야기>는 이러한 그의 심리적 세계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화자와 마르셸, 시몬을 통해 드러내는 그로테스크한 괘락, 수용하기에 버거운 불결함과 외설스러움의 갈망들은 불쾌한 공포의 전율만 느껴지기도 한다. 나아가 그의 저술 『에로티즘의 역사』속 화보를 방불케 하는 소설 <하늘의 푸른 빛>은 관습, 금기의 질서에 도전한다. 절판 또는 미출간이었던 이들 소설이 '비채'에 의해 다시금 국내에 소개되는 기회가 된 것은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많은 독자들이 그의 세계로 접근하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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