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정치저술가인 ‘로베르트 미지크’에 의하면, 공통감각(Common Sense: 상식)이란 “자연처럼 본능적이고 직관적인 앎의 형태로” 우리네 머릿속에 들어선 “세상을 보는 흔한 방식”이며, “철학적, 이론적 성찰의 산물이 시간의 퇴적을 통해 동시대 대다수의 공통된 생각이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그의 저서 『좌파의 생각은 어떻게 상식이 되었나』는 수많은 좌파적 사상들이 오늘 어느 한 측을 대변하는 이념으로서가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연히 알고 있으며, 지지하는 것이 되었는가를 추적하는 과정이다. 결국 이 추적의 여정을 통해서 세상을 변화시켜보려는 생각의 단초(端初)를 제공하는 것이라 하겠다.
1. 깨어있는 인간만이 세상을 변화시킨다
좌파의 생각을 말하면서 ‘마르크스’의 인용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의 사상의 많은 부분들이 오늘 우리들 삶의 양식을 이해하는 기초가 되고 있다. 미지크는 “거의 공공재산이 된 마르크스 사상”이라고까지 표현하고 있는데, 이를테면 ‘소외’, ‘자본주의 경제 모순’과 같은 것들은 좌우를 가리지 않고 사용하는 공통의 언어라 할 수 있다. 그럼 이렇게 모두가 알고 있는 상식이라면 이것을 새삼 되뇌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는 이렇게 답변하고 있다.
“독창적이고 탁월한 이론을 통해 이전에는 결코 떠올리지 못했던 생각에 도달한다. 생각과 이론은 우리의 머릿속에서 우리가 계속 깨어 있도록 하며, 우리가 타락하고 무뎌지는 것을 막는다. 생각을 통해 인간은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마음을 품고 움직인다.”
이제는 공통감각이 된 사상들을 추적하면서, 공통감각은 결코 “경직되거나 고정되어있지 않으며, 오히려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것임을 확인하고, 이로써 우리는 우리들의 삶을 조직하고 구성하며, 내면에 이주해 들어오는 것들에 대한 비판과 이해를 통해 더 나은 세상을 상상하고 행동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생각’이란 것을 하자는 것이다. 이 생각의 모험 속에서 생각지 못했던 것들을 비로소 생각하는 시간이 되리라는 것이다.
선거를 앞둔 시기는 물론 우리 사회의 정치, 언론, 경제 등 지배적 조직들이 뱉어내는 말 들을 보면 과연 ‘생각’, 즉 고뇌와 비판, 충분한 이해를 위한 노력과 사유가 전제된 언어라고 판단하기에 불편한 것들이 지나치게 난무하고 있다. 최근 우리사회에도 ‘생각 없음(無思惟)’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한 ‘반지성’과 관련한 관심이 싹트고 있는 지점에서 공통감각이 된 마르크스로부터 시작하여 그람시, 아도르노, 벤야민, 라캉, 샤르트르, 보부아르, 주디스 버틀러, 하버마스, 푸코, 들뢰즈에 이르는 대(大)사상을 통해 보다 나은 세상을 함께 고민하는 기회가 된다.
스스로 생각하는 일을 멈춘 바로 지금의 우리네 정치사회는 조금만 알아보면 간단하게 그 천박성과 거짓이 드러날 주장들이 마구 구사되는 현실임을 목도할 수 있다. 이러한 행위의 목적은 사회나 특정 세력을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복무케 하기 위함이다. 근거가 빈약하거나 전혀 사실과 다른 내용으로 자기주장을 내세우고, 그래서 그것이 사람들에게 선입견을 부여하기만 하면 집단 사이에 벽을 세워 고정된 정체성을 구조화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이 부실한 반지성적 주장에도 불구하고 이를 믿어버리는 생각하지 않는 대중이 있어서이다. 해방이후 70여년이 지난 오늘에까지 수구 세력들은 여전히 ‘빨갱이’라는 전형적인 반지성의 용어로 계급과 집단 분열의 책략을 구사하는 것은 하나의 사례가 될 것이다.
깨어있지 못한 대중은 이러한 반지성의 권력에 기만당하고 만다. 지금의 우리 현실이 바로 그러하지 않은가? ‘그람시’가 말한 ‘헤게모니’는 좌파의 용어였지만 이젠 극우 수구세력들이 더욱 악용하는, 아니 거의 대대수의 사람들이 아는 공통감각이지 않은가? 한 사회의 지배적 세계관의 자리를 잡기위한 이 투쟁의 핵심, 즉 “정치 투쟁은 사상에 대한 헤게모니, 세상에 대한 ‘자발적인 이해’를 차지하기 위한 투쟁”이기에 이러한 반지성은 더욱 활개를 친다. 생각하지 않는 대중은 불행과 파탄이 다가서고서야 진실을 알려고 한다. 기차가 떠나고 난 뒤의 그 애처로운 발길의 한심함과 같다.
2. 담론 세계의 진실
이렇게 맹렬한 지적 정열로 타자를 압도하여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사람들을 보면 이내 그 깊이 없고 천박한 지성을 발견하게 된다. 아마 TV화면에 등장하는 셀 수 없이 많은 토크 프로그램들 중 어느 하나만 아주 잠깐만 보더라도 이내 정말 무지(無知)하기 그지없는 담론을 떠벌이며 아는 체하는 아무런 의미 없는 공허한 소비임을 확인 할 수 있다.
이 프로그램들에 등장하는 패널, 즉 담론의 발화자들은 누구인가? 토론되는 해당 분야의 진정한 전문가, 다시 말해서 담론의 내용에 대해 충분한 연구와 자료가 축적된 사람들 간의 토론인가? 그저 교수거나, 변호사거나, 유명 연예인, 부를 축재한 사업가이거나 하면 인생살이 전반에 대한 인정받는 발화자가 되어 전혀 지성적이지 않은 반지성의 지적 열변을 토할 권리를 획득한 것처럼 행동한다. ‘미셸 푸코’는 이처럼 “특정한 발화자를 선택하는 것은 일종의 권력 행위”이며, “말하기는 곧 투쟁이다. 그래서 담론은 권력효과를 만들어낸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이렇게 표방되는 앎(지식)이란 것이 과연 진실이고 진정한 지식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많은 사람들은 그저 즐기고 잠깐 공감하는 것뿐이라고 답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담론은 “사회관계 전반을 관통하는 강제되고 강제하는 의미 총체”로서 역할을 하기에 선입견을 만들고, 이념간의 집단을 분리하며, 계층을 분할하는 결과를 야기하기도 하며, 이미 권력의 영향을 받는 구조에서 생성된, 차별을 두는 특유의 의사소통인 이 담론의 효과는 부인될 수 없는 것이다. 반지성이 활약하기에 기막히게 좋은 환경이다.
‘푸코’가 말한 담론의 속성을 이해하게 되면 ‘마르크스’의 한 문장을 연결하게 된다. “사회의 물질 권력을 차지한 지배계급은 동시에 지배적인 정신 권력도 차지한다.” 여기에는 진실이나 진리라는 말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지배적인 사상이나 생각이란 것은 그저 “사회적 관계라는 부식토에서 자라난다.”는 것뿐임을 지적하는 일종의 공통감각이다. 이제 우리들은 안다. 그 주류적인 담론들이나 기득권을 가진 수구세력들의 많은 언어들이 가짜, 허위, 거짓이라는 것을.
대중의 지성이 깨어있어야 한다. ‘파농’은 말했다. 사회적 맥락에서 주변화 되고 상처받기 쉬운 계층인 ‘서발턴’은 “말을 하지 못한다.”고. 사회적 약자인 대중인 그들 개인의 어느 누가 말하더라도 중요한 위에 있는 어느 누구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 실제적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권력을 지니지 못한 우리네 대중은 알아야 한다. 그 사회적 진실의 체계를, 그리고 생각해야 한다. 스스로 생각하는 지성을 갖추어야 한다. 그래야 불의와 불합리와 불평등의 세계를 개선할 수 있다.
3. 비판, 그리고 개선
“불평등한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경우가 드물고 이웃이나 동료를 믿지 않는다. ...사회적 소외, 악화된 사회관계, 문화적 계층 하락, 존중의 상실은 불평등이 심한 사회에 만연 한다. ...(중략)... 많은 사람들이 날마다 멸시와 굴욕에 방치되는 사회는 부패한다.”
‘로산나 로산다’는 “의문을 품고 살았다.”고 말했다. 세상에 분명한 것은 없다. 네모난 지구는 둥근 지구로 바뀌었다. 진실은 변화한다. 그래서 비판해야 한다. 그저 반대하기가 아니라 “객관적인 방식의 해부, 개념에 대한 분석, 전제 근거와 비난에 대한 분석, 숙고와 이해를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것으로서의 비판을. 마치 대선후보자의 토론에서 등장하는 ‘비판은 잘하지만 실제로 어떻게 개선시킬지 대안은 있나?’라고 빈정댈 수 있다. 그러나 비판할 내용을 만들어내는 일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며, 꼭 필요하다. 결코 비판은 부정성만을 지니지 않는다.
비판으로 인해 세상은 숨김없고 꾸밈없는 상태에 놓이게 되며, 이로써 사람은 더 나은 세상을 설계할 수 있게 된다. 『계몽의 변증법』에서 ‘아도르노’는 “일단 확고하게 알고 명확하게 규정하면 올바른 것, 더 나은 것을 모아놓은 색인 목록이 된다. 비판의 부정성에는 늘 긍정성이 들어있다.”고 말했다. 맹목적 믿음처럼 세상을 불행하게 하는 것은 없다.
오늘날 거의 모든 좌파의 사유는 혁명을 계획하지 않는다.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대중에게 실익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비판의 결과,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점진적이고 끊임없는 개선이 더욱 행동적이고 인간을 위한 길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말하던 프롤레타리아라는 동질적 계급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은 세계에 와있다. 문화적 환경이 매우 다른 여러 하위환경으로 이루어진 다양한 집단의 사회가 되어있다. 이제 이상에 서서히 접근하는 것으로 만족하여야 함을 우리는 안다. 결단코 멈춤은 없는 그러한 개선을 향해서.
일찍이 “인간의 소외는 인간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마르크스’는 통찰했다. 좌파의 이론이라서 고려할 가치가 없는 말이었던가? 이젠 우리네 공통감각이 되어있는 말이다.
‘발터 벤야민’은 ‘브레히트’를 이렇게 평가했다고 한다. “절대 환상에 빠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숨김없이 신봉한다.”고. 현실, 사회관계를 벗어나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무수한 현상들에 깊숙한 비판과 이해, 그리고 사유가 있어야 한다. 반지성적 현실에 대한 자각이 어느 시기보다 필요한 때다. “오직 동의한 사람들만이 세상을 변화시킬 기회를 얻는다.”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