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티모어의 서
조엘 디케르 지음, 임미경 옮김 / 밝은세상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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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본 리뷰는 소설의 흥을 미리 깨어버릴 수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소설은 두 개의 시간에서 진행되는데, 하나는 유명 소설가가 된 마커스 골드먼2012년이라는 현재로서 새로운 소설 쓰기의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헤어진 연인 알렉산드라와의 우연한 재회에서 시작된 그의 사촌들과 함께했던 성장기로부터 시작되는 과거의 시간이다. 그리곤 이 둘의 시간은 현재라는 하나의 시간에 서로 교섭하면서 삶의 행로에서 걷잡을 수 없이 마주해야만 했던 비극, 그것의 기원이었던 무수한 순간들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불완전성, 그 부조리함을 반추케 하며 하나의 완성된 소설로 결집한다.

 

비극의 기원을 찾아서

 

마커스에게 뉴저지의 중산층인 몬트클레어 골드먼으로 불리는 자신의 부모들에 비해 볼티모어 골드먼으로 불리는 로펌을 이끄는 변호사인 큰아버지 사울 골드먼과 대학병원 의사인 큰어머니 아니타 골드먼의 대저택, 고급 별장 등의 부유함은 동경과 숭배의 대상이다. 그에게 볼티모어는 곧 성공과 부의 기호이며, 동갑내기 사촌인 힐렐, 그리고 외톨이가 되어가는 힐렐을 위해 사울과 아니타가 거둔 양아들 우디는 마커스의 성장기 깊은 우애를 나누는 골드먼가의 형제들이 된다.

 

<골드먼 갱단>이라는 이들의 애칭과 볼티모어로의 귀속감은 마커스의 자긍심이 되지만, 부의 화려함을 뒤로하고 뉴저지 몬트클레어의 집으로 향하는 마커스는 열등감으로 조바심을 낸다. 아마 돈독하기만 했던 이들에게 미세한 틈이 발생하기 시작한 것은 힐렐과 우디가 그들의 동료로 안아준 스콧 네빌과 그의 누이인 알렉산드라 네빌과 함께하게 되는 변화된<골드먼 갱단>으로부터 일 것이다. 소년들에게 아름다운 연상의 소녀 알렉산드라는 보이지 않는 경쟁이라는 감정의 시작점이 아니었을까? 작은 균열의 시작, 우리네 삶을 결정짓는 어떤 순간들의 시작으로서.

알렉산드라가 눈부시도록 예쁘게 웃었다. 그녀가 비로소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왔고, ... 우리의 세계를 완전히 뒤흔들어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P207)

 

풋볼팀의 최고 선수인 우디, 힐렐은 보조코치로서 그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두 소년의 불가피한 분리가 발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점액과다증으로 호흡곤란을 겪는 병약한 스콧의 간절한 소망, 풋볼 경기에서 질주하는 자신을 느끼는 것, 힐렐은 스콧의 기쁨을 위해 터치다운을 향한 마지막 찬스에 그를 투입하고, 스콧은 생의 통렬한 환희를 느끼지만 사망하고 만다. 학교는 힐렐에게 책임을 묻고, 사울과 아니타는 힐렐을 특수학교로 보내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우디와의 분리는 힐렐의 운명을 결정짓는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었음을, ‘볼티모어 골드먼이라는 그 화려함의 숭배어린 가문의 비극이 시작되는 지점이었음을 훗날 확인하게 된다.

 

그럼에도 <골드먼 갱단>들은 볼티모어 오크파크 저택에 모여들고 그들만의 끈끈한 우정을 확인한다. 힐렐과 우디는 주식투자로 거대한 부를 쌓은 알렉산드라의 아버지 패트릭 네빌의 권고로 그녀가 다니고 있던 대학에 각기 법학도로서, 풋볼팀 장학생으로 입학한다. 마커스는 알렉산드라의 반대로 이들과는 다른 대학 문학부에 입학하지만, 힐렐과 우디와의 합의를 깨고 알렉산드라와의 비밀스런 연인관계를 발전시킨다. 대학리그 최고의 풋볼 선수로 각광받는 우디, 오크파크 저택이 초라해 보일정도의 호화저택에 사는 패트릭의 권위는 사울에게 자식들을 향한 사랑과 권위의 박탈감을 가져온다. 이것은 대학 풋볼팀 전용구장의 스폰서가 되어 사울 골드먼구장의 명패를 다는 행위로 이어지지만 막대한 기부금의 부담은 그가 쌓아올린 변호사의 명성뿐 아니라 오크파크의 삶 전반을 손상시키는 치명적인 결정이 되어 돌아온다.

 

이쯤에서 질투라는 감정이 야기하는 형언할 수 없는 삶에 대한 불공평성, 어떤 폭력성에 직면하게 한다. 힐렐의 우디에 대한, 사울의 패트릭에 대한, 마커스의 볼티모어에 대한, 그들의 사랑의 대상에 끼어드는 방해자들을 향한 단호한 거절과 잠재적 폭력의 양상들이 싹트는 양상의 그 어리석음,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이 한계라는 부조리에 대해서. 결국 프랑스의 사상가인 알랭 핑켈크로트인간적인 것은 어떤 것도 어리석음과 낯설지 않다. 이점에서 어리석음이 해학을 넘어서 부동의 힘이 되고 잔인함이 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이다.”라는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이러한 관조(觀照)를 마치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이 질투와 분별력을 상실한 어리석음과 폭력은 뒤엉켜 삶의 향방을 비극의 낭떠러지로 가속화되어 내몰기 시작한다. 거듭되는 오해의 연쇄적 반응들, 금지 약물의 복용으로 NFL입단 최고유망주였던 우디의 대학풋볼팀 퇴출, 아니타 골드먼의 터무니없기만 한 죽음, 그리곤 상습폭력에 시달리던 한 여인에 대한 동정과 연민으로부터 시작된 우발적인 사건들은 선망의 대상이자 영화의 상징이기만 했던 볼티모어 골드먼들의 그 작은 균열이라는 틈새의 기원, 그것의 본질을 생각게 한다. 아마 사랑이라는 얄궂은 얼굴의 이중성, 삶의 의미이기도 한 이것의 부조리한 본성이 아니었을까?

주는 행위와 받는 행위, 자비와 욕망, 자선과 소유욕을 동시에 의미하는 유일한 낱말, 어떤 존재가 갖게 되는 격렬한 욕망과 무조건적인 헌신이 같은 어휘 안에 역설적으로 담겨 있는 이 사랑의 음험한 모순성을 알아차리지 못한 어리석음 그것 말이다.

 

글쓰기, 부조리한 삶에 맞서는 복수전

 

영화화된 첫 소설의 성공, 그럼에도 마커스 골드먼에 족쇄처럼 채워져 있는 힐렐과 우디의 비극적 죽음에 대한 예리한 슬픔, 그리고 상처만 가득 가슴에 안은 채 생을 다한 큰아버지 사울 골드만에 이르는 볼티모어 골드먼들의 영원한 상실은 그토록 그리워하던 연인 알렉산드라와의 재회에서 사랑의 복원을 향한 걸음을 주저하게 한다. 그의 온 마음을 장악했던 볼티모어 골드먼들의 우월한 지위와 풍요로운 부, 아름다움과 지성 가득한 큰아버지와 큰어머니의 우아한 매력들에 대한 동경이란 외피는 열등감이라는 내피를 포장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한 그의 앞에 서있는 것은 삶에 대한 자신의 믿음에 대한 당혹이지 않았을까?

 

자기 삶에 대한 책임이란 의미를 비로소 직면한 사람의 각성, 그것은 마커스가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듣게 되는 행복에 대한 이해일 것이란 생각이 든다.

우리는 몬트클레어 골드먼으로 행복했잖아. ... 우리가 다른 누군가가 되기를 바랄 이유는 없어. 모든 사람은 제각기 달라. 행복이란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출발한다고 생각해.” (P469)

마커스가 새롭게 펜을 든 소설이 <볼티모어의 서>가 되는 것은 바로 이 마주선 슬픔과 자기 책임에 대한 도전의 의미로써 이다.

 

결국 마커스의 자기 삶의 정립을 위한 글쓰기는 글을 쓸 수 있어서 전부 지울 수 있었고, 전부 잊을 수 있었고, 전부 용서할 수 있었고, 전부 치유할 수 있었다.” (P605)는 독백에 그대로 담겨있다. 이 쓰기의 여정에서 알렉산드라의 자기 연인인 마커스를 잃지 않으려했던 진실, 사랑, 그 변화무쌍했던 여인의 얼굴을 비로소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또한 임종의 자리에서 마커스에게 정작 중요한 건 우리가 그 일들(불행)을 이겨내야 한다는 거야.”라고 말하는 사울의 이 유언은 난 사랑하고, 사랑받고, 용서하는 게 삶의 의미라고 생각한단다. 그 나머지는 흘러버린 시간의 합에 불과해.” (P635)라는 말과 함께 마커스의 새로운 소설이자 조엘 디켈의 이 소설의 진정한 주제를 관통하는 문장인 것만 같다.

 

마커스는 외친다.

왜 글을 쓰냐고 묻는다면?”

글이 삶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우리가 부조리한 삶에 맞서는 복수전을 펼칠 때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어준다.” (P640) 라고.

 

아마 이 소설은 치유의 서라고 말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삶의 어느 순간에 스치듯 발생하는 작은 균열이 우리네 인생의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될 수 있음을, 그럼에도 그것조차 사랑의 다른 면에 불과한 것 아니냐고, 허물, 슬픔, 과오, 아픔, 이 모든 생의 부조리함 그것은 정말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래 사랑의 서라 해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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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 - 수줍은 마음이 당신의 삶에 노크하는 소리 월간 정여울
정여울 지음 / 천년의상상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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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내 심상(心像)에 빈번하게 떠오르는 것 중의 하나는 어린 시절 흑백TV 앞에서 보았던 몇 몇의 영화장면들이다. 그 중에서도 전쟁의 한 가운데 극히 제한된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애절(哀切)한 사랑, 그리곤 공허함만이 아프고 답답하게 다가오던 마지막 장면으로 기억되는 영화, 사랑할 때와 죽을 때의 그 애틋함인데, 아마 소년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던 모양이다. 결국 영화의 원작인 레마르크의 소설을 펴들고 아주 조금씩 읽어나가기도 했다. 언젠가부터 그 소년의 마음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리워하는 그 마음에 무언가를 채워 넣으려는 소극적인 시도였을 것이다. 작가 정여울의 글에는 이러한 문장이 있다.

나는 우선 당신조차 알지 못하는 그 아픈 무의식의 밑바닥까지 어루만지는 글을 쓰고 싶다. 마침내 당신의 상처 입은 마음 속 깊은 그곳까지 닿을 수 있도록

설혹 그것이 상처인지 아닌지 그저 막연한 결핍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심스러움이 묻어나는 똑똑하는 두드림의 소리에 문을 열면 그곳에는 부드러운 손길을 가진 진솔한 말()이 서있으리라.

 

이렇게 마주하게 된 월간 정여울은 나와의 은밀한 대화가 된다. 내 자신을 향하여 솔직한 삶을 얘기하게 한다. “나에게 부디 낯선 사람이 되지는 말아줘.” 라는 관계의 기적을 말하기 위해 인용된 이 평범한 문장이 모든 관계를 무시하는 듯한 내 오만의 밑바닥에 있는 정말의 목소리가 아닐까하는 의문의 시간이 되고, 그것은 다시금 한쪽이 열릴 때도 한쪽은 늘 닫혀있는 회전문의 비유에서 내가 침전 시켜놓은 마음의 비밀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묻혀있었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비밀이 없으려면 아낌없이 마음을 줘야 한다.” (P56)

 

얼마나 굳게 마음이 닫혀있었는지, 관계에 얼마나 소홀했는지, 얼마나 인색한 마음이었는지를 조용히 가늠해본다. , 인과응보지. 그렇게 닫아걸고는 옛 소년을 그리워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속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소년은 사람들을 많이 사랑했다. 그리고 무한한 사랑을 받았다. 소년에겐 숨길 것이 없었으니까. 정말 자신감이 넘쳤다. 그리고 얼마나 열성적으로 들었던가?

 

표현보다는 수용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보세요.” (P86)

 

나이가 들며 소년의 열성적 듣기가 수그러들긴 했지만 표현보다 수용의 비중이 크다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판단하려 들었던 모양이다. 작가의 지적처럼 좋다, 나쁘다, 괜찮다, 싫다, 라는 판단으로 단절을 만들어냈던 모양이다.

 

판단은 이야기를 끝내는 것이지만 사유는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에요.” (P89)

 

허겁지겁 판단하며 달려왔더니 정말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부터 일 것이다. 그럼에도 외로움이란 것을 알지 못했다. 그것을 부르는 것이 그 단어임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가뭄처럼 쩍쩍 갈라진 메말라버린 심장. 그 목마름을 저 깊은 곳에선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느 하나 버릴 것 없는 눈부신 첫 사랑의 기억을 간직한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의 소년이 지닌 감성, 내가 너무 멀리 도망쳐왔던 것의 실체이리라.

 

그 모든 삶의 기쁨이 오직 당신과 함께 해야만 가능한 눈부신 기적이었음을, 이제야 깨달았으니까.” (P100)

 

작가가 말하는 부사 어쩌면의 용법이 절실하게 다가온다. “주술적 희망의 향기가 묻어나는, “가능성을 탐색하여야 할 여유의 공백을 잃어버리고 있었음을. 아마 소년을 찾는 내 여정에 월간 정여울은 동행할 것이리라.

읽는 이 마다 대화의 내용은 달라지리라. 그럼에도 문을 열면 그 진솔함에 마음을 열지 않을까? “끝내 자신뿐 아니라 타인의 마음 또한 어루만지는 치유자이기를 말하는 작가 정여울과 내밀한 속내를 교환하는 순수한 희열의 시간이 될 수 도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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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저드 베이커리 (크리스마스 에디션 리커버 한정판)
구병모 지음 / 창비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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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쁘게 새로 장정(裝幀)된 작은 책, ‘마법사 빵집(Wizard Bakery)’의 유혹에 꼴까닥 넘어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책을 펴면 발효된 이스트의 냄새, 이른 아침 제과점 앞을 지날 때 후각을 강렬하게 자극하는 그 풍미가 확 밀려든다. 몰입하지 않을 도리가 없지 않은가?

 

열여섯 살 소년이 황급히 도망가고 있다. 비명, 그리고 분노하는 절규의 소리가 그를 집요하게 쫓아온다. 소년은 갓 구운 빵들의 열기로 가득한 가게의 문을 민다. “나 좀 숨겨줘”,

의붓 여동생 무희의 집게손가락이 가리킨 엉뚱하고도 터무니없는 방향이 야기한 누명, 새어머니 배 선생의 분별과 판단의 이성을 상실한 맹목(盲目), 아버지의 무관심에 존재할 곳을 잃은 소년과 빵집은 그렇게 서로의 삶에 연결된다.

 

위저드 베이커리’, 이곳에선 마법이 든 빵들을 판다. 화해 100%의 효력이 있는, 보기 싫은 인간을 떨어내는, 짝사랑을 연인으로 만들어주는 것과 같은 야릇한 이름을 가진 마법의 빵들 - 메이킹 피스 건포도 스콘, 노 땡큐 사브레 쇼콜라, 체인 월넛 프리첼... - 의 주문이 그치지 않는다. 그런데 물품의 상세정보사용시 유의사항을 건성으로 읽어서는 곤란하다.

 

이를테면 사랑을 얻기 위해 짝사랑하는 상대에게 먹이면 효력 있는 체인 월넛 프리첼이것을 사용함으로써 맺어진 인연은 함부로 끊을 수 없다는 점을.....진지하게 고민한 다음 선택해주세요.”라는 유의사항이 있다. 단순히 마법을 파는 빵집이 아니라, 자기 책임과 삶의 진실한 요구가 무엇인지를 숙고하게 하는 그런 영적 사유의 공간이 된다. 순간의 열정, 혹은 분노에 지배당하는 삶의 결정이 수반하는 후회와 번민(煩悶)이라는 고통에 악다구니 부리는 인간들이 스쳐간다. 자기 인식과 삶의 그 심원한 진지함을 생각조차 않는 사람들.

 

자신을 따뜻하게 안아준 위저드 베이커리의 마법사(점장)가 짊어진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몽마(夢魔)를 기꺼이 자신의 꿈으로 안는 용기로부터, 소년은 그의 언어가 목소리가 되어 나오기 불가능 할 만큼의 저 깊은 곳의 상처들, 그 기억들을 비로소 정면으로 마주 한다. 청량리역 에 버려졌던 여섯 살 그 어느 때의 기억, 가죽 띠에 목을 맨 어머니의 잔상들, 오직 자기 영역과 소유에만 관심을 지닌 초등학교 선생인 새어머니의 이기심과 냉담, 그리고 편견과 몽매성, 자기 편의에만 열중하는 아버지의 방관적 무관심들을 현실이라는 불가피적 관계로서 수용한다. “나는 단지 거기 있었을 뿐 인데를 되뇌는 소년의 억울함에서 한 존재에게 가해진 숙명과 현상의 관계에 잠시 시선을 떨구게 된다.

 

아마 이 동화(童話)같은 소설의 깜찍스러움은 급하게 문을 닫아야 하는 빵집의 마지막으로 출력된 주문서 일 것이다. ‘마지팬 부두인형’, 누군가에게 해코지를 하기위한 것, 소년은 도망쳐 나왔던 집을 향해 점장이 만들어준 물품을 들고 나선다. 그가 마주한 패륜(悖倫)적 현장, 칼을 쥐고 그를 향해 달려오는 배 선생, 그리곤 소년의 손에 들린 시간을 되돌릴 마법의 빵인 머랭 쿠키’....,이 때, 우린 시간을 되감아 어떤 과거로 돌아가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 우연이라는 삶의 숙명성을 겸허히 받아들이면 되는 것일까? 우주의 한낱 미물인 존재들이 빚어내는 그 수많은 자기변명들이 초라하게만 느껴진다. 달콤한 향기에 숨겨진 마법의 빵이 어디에선가 팔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작품을 읽는 시간 내내 상처받아 헐떡이는 소년을 품어주던 '위저트 베이커리'의 오븐 속에만 콕 박혀있었으면 하는 느낌이었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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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레혼
새뮤얼 버틀러 지음, 한은경 옮김, 이인식 해제 / 김영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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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here', 어디에도(없는)이라는 단어가 거꾸로 써진 ‘Erewhon(에레혼)’이란 이 소설은 146년 전, 18725월에 발표되었다. 19세기 중엽에 써진 케케묵은 이야기가 21세기 오늘 다시 소환되어 읽혀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기계가 더욱 완벽하게 우리를 독재하지 못하게끔 우리에게 없어도 될 만큼 기계를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P257)”하는 소설 속 문장이 지닌 오늘의 현실과의 유비(類比)때문일 것이다.

 

컴퓨터 혁명이 순수한 기계적 사건에서 생물학적 격변으로 바뀌고, 권한이 인간에게서 네트워크로 연결된 알고리즘에게로 이동(호모데우스P472)”하는 현실, 더 이상 인간 자신들의 욕망과 경험 중심으로 세계가 돌아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위기의 예견과 닮아있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겐 이 영국인의 직관이 더욱 빛나게 와 닿은 것은 공동(共同)이 만들어내는 믿음의 허구성과 환상성이라 해야 할 것 같다.

 

그것은 사람들이 믿기로 하면 곧 의미가 되, 그 믿음이 자신들의 질서를 구축하고, 또 그 기반위에서 세계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양을 치는 목동인 화자(話者)가 새로운 땅과 황금을 찾아 아무도 넘어서지 못했던 아득한 산맥과 협곡을 넘어 찾아든 새로운 세계인 에레혼의 사람들이 지닌 도덕관과 세계관에 혼란을 느끼는 것은 다른 믿음, ‘유발 하라리의 말을 빌면, 그네들이 함께 짠 공동의 이야기망()’이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리라.

 

개인의 질병은 물론 불운(不運)조차 재판을 받고 구금되는 범죄가 되고, 출생하는 것은 태어 난 자()의 책임이며, 비이성이 찬양받는 세계를 오늘 우리들의 심상에 떠올리기란 극히 어려운 일이다. 소설의 거의 모든 지면은 이러한 기이한 질서가 삶을 지배하는 낯선 세계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이를테면 <에레혼의 재판>이라는 장에 등장하는 한 토막의 이야기인데, 아내를 막 잃은 남자에 대한 판사의 선고는 다음과 같다. “피고는 큰 상실을 경험했다. 자연은 이러한 범죄에 심각한 벌점을 부여하며, 인간의 법은 자연의 명령을 강조해야한다. 배심원의 권고가 아니었더라면 피고에게 6개월의 노역을 선고했겠으나 ....(中略)...감형한다.” 상실이라는 불운은 자연의 섭리에 비추어 볼 때 조야하고 반사회적이라는 믿음이 이들의 삶을 지탱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같은 이야기를 믿는 한, 사람들은 똑같은 규칙을 따르고, 그 상상의 질서에 자신들 믿음의 토대를 구축한다는 이야기이다.

 

21세기 바로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질서, 도덕, 체제라는 것들 역시 이러한 이야기의 그물망에 기반한 것 아닌가? 이걸 거꾸로 새기면 사람들이 더 이상 믿지 않게 되면 가치가 증발해 버리고,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호모데우스에서 유발 하라리가 적시하는 돈, , 기업, 국가와 같이 상호주관적 실재라는 것들, 그 허구적 실체에 목매는 우리들을 에레혼 사람들이 보았을 때, 그들 역시 혼란스럽지 않겠는가?

 

우리의 믿음이란 것은 결국 우리네가 어떤 이야기를 직조해내느냐, 그리고 그것에 어떤 상상의 질서를 부여하려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환경에 놓여 질수 있는 것이지 않겠는가?

그래서 아무런 의견을 갖지 않는 것은 물론,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는 태도는 학문과 훌륭한 교육의 완성으로 여겨졌다.”<비이성의 대학>의 우아하게 완벽한 중립의 태도를 접하게 될 때 실소(失笑)보다는 새뮤얼 버틀러의 이 해학(諧謔)적 묘사에서 극단의 순전한 부조리가 넘쳐나는 넌더리의 냄새를 맡게 되는 것은 왜일까?

 

에레혼의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이러한 가치중립적 태도는 오늘 우리네가 과학기술에 기대했던 동일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소설은 바로 여기에서 그들이 이러한 삶의 태도, 즉 이러한 믿음의 질서를 만들어 낸 동기가 소개되는데, 이 작품을 미래소설의 걸작으로 불리게 한 3개의 장으로 구성된 <기계의 책>이 그것이다. 기계파괴혁명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논리들인데, 분명 작가 새뮤얼 버틀러의 안광(眼光)이 돋보이는 부분이랄 수 있다.

 

기계에 구속된 이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기계왕국의 발전에 평생을 헌신하는 이들도 늘어난 것을 감안 해 볼 때, 기계가 인간보다 우위를 점했다는 사실이 명백하지 않은가?(P259)” 이어서 기계는 인간의 영적인 것보다 물질적인 이익을 훨씬 선호하는 경향을 착취하여...(後略)”, 그리곤 인간의 의식이 갑자기 충격을 받게 될 일은 없을 것이다. 소리 없이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살금살금 인간은 기계에 구속되고...(後略)”에서와 같이 오늘날 잠시도 디지털 네트워크에서 자신을 분리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서 발산되는 스트레스 냄새의 유사성이다.

 

즉 에레혼은 기계파괴혁명 이후에 새롭게 만들어진 믿음의 세계인 것이다. 21세기 오늘, 우리들 역시 인간의 개별성이 내부에서 조용히 붕괴되는 소리를 듣고 있다. 자신들이 개발한 기술들이 성장하면서 그것이 인간이 한 번도 가 본적 없는 곳으로, 또는 인간이 갈 수 없는 곳으로 가는지에 대한 두려움도 성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지금의 우리는 멈출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소설 에레혼의 낯선 도덕과 믿음들의 이야기는 더더욱 인간의 믿음이라는 이 허구적 실체, 그 환상을 다시 그려 낼 수는 없는 것인지를 생각게 한다. 21세기 인간들이 믿고 있는 도덕 과 법이라는 윤리와 질서의 기반이 된 인본주의의 신화, 그 이야기를 새로 짤 수는 없는 것인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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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도서출판 은행나무의 문학지(文學誌) Axt 10(2017.1/2)부터 15(2017.11/12)까지, 6회에 걸쳐 게재된 작가 김 숨의 장편소설 떠도는 땅에 대한 리뷰입니다.)

 

 

월간, 격월간, 혹은 계간에 이르기까지 연재(連載)된 장편소설을 찾아 읽는 것은 내겐 손에 꼽는 극히 예외적인 독서 행위라 할 수 있다. 소설의 흐름이 단절된 상태를 다시 복원하여 기억을 되살려내야 하는 불편 때문이며, 이 과정 속에서 독서의 의지를 상실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랄 수 있다. 그럼에도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고 떠도는 이야기가 있어, 연결되기를 기다리게 되는 드문 경우가 발생하곤 한다. 아마 떠도는 땅의 화자(話者)들이 실려 있는 공간의 특수성 때문이었던 것 같다.

 

소설은 아기가 태어날 땅, 그 땅이 어떤 땅일지 금실은 모른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 된다. 1937103, 스탈린의 강제이주 명령에 따라 어디로 가는지, 그것이 죽음의 처형장인지, 삶의 무대인지조차 알지 못한 채 가축운반용 열차에 실려 그저 끌려가는 여인과 그녀의 뱃속 아기, 그리고 미지의 땅에 대한 이야기임을.

 

팔다리를 접고 웅크린 사람들의 두루뭉술하게 뭉개진 윤곽으로 표현되는 조선인 무리로 그득한 열차안의 풍경, 그리고 뼈들이 구르고 구르는 동안 부서지고 마모되어서는, 마침내 열차가 최종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가루가 될 것 같은 고통에 시달리며, 마치 이를 잊기라도 하려는 듯이 이들이 토해내는 고독과 그리움과 생존, 안주(安住)를 향한 처절한 삶의 투쟁에 대한 기억들과 소회들이 흐른다.

 

지주의, 일본의 개가 되지 않기 위해서, 한 그릇의 죽이라도 먹기 위해, 고향을 등지고 버려진 이국의 땅을 찾아든 조선인들, 무리를 이끈 가장도, 그들의 손에 이끌려온 아이도, 그리고 그 척박한 곳에서 생을 시작한 이들까지, 그네들이 이루어낸 환경에서 무참히 내쫓겨 가축처럼 실려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열차 안에서 꾸려진다. 그것은 그네들의 사연과 기억이란 기록 속을 오가며 , 삶의 뿌리가 내려지는 곳, 그러나 이를 방해하는 편견과 의혹들이 인종적으로, 때론 민족주의에 실려, 그리고 이념과 영토와 국가라는 허구적 실재가 사람들을, 땅을 어떻게 갈라놓는지를 드러내 놓는다.

 

그런데 이들의 대화는 능숙하게 숙련된 지식인의 언어로서가 아니라 순박함과 귀동냥한 소박한 말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테면 아기도 살수 없는 그 어떤 곳으로 자신들을 이끄는 처참한 가축용 열차 칸에 태운 스탈린의 처사를 말하는 인물들의 면면이다. 유대인의 머리가 큰 것은 하도 머리를 쳐서라고 믿는 을녀, 오순, 백순, 공덕과 같은 사람들의 물음과 대답이 엮여 디아스포라(Diaspora)에 이르고, “뭔가 죄를 지었으니까 떠돌며 사는 거겠지에 도달한다.

 

소설에서는 그네들 자신에게 씌워진 죄의 굴레에 대한 인식의 대립이 인설일천이라는 두 인물에 의해 그려진다.

소련 내에 외국 스파이, 해충, 변절주의자....들로 가득하다....‘ 소련 정부가 조선인들을 탄압하기 위해 떠들어대던 말을 하고 싶은 거요?”

따지고 보면 반역자들 때문에 우리가 이 꼴을 당하는 거 아니겠소?”

누가 반역자인가요? 볼셰비키 혁명의 승리를 위해 싸운,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을 외치던 조선인이 반역자인가요?”

 

고난의 여정인 강제이주 열차는 이러한 담론들의 격전장이기만한 것은 아니다. 7개월 된 태아를 지닌 여인 금실인설에게 감도는 삶의 태동, 흐릿한 희망의 움, 그 잿빛 무대에서도 실낱같은 빛이 있다는 것이다. “금실의 눈길이 그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인설을 향한다. 남편 근석에게는 느끼지 못했던 낯설고 미묘한 감정에 그녀는 어깨를 떤다.”

 

“103일 페르바야 레치카 역을 떠난 열차는 30여일이 지나서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구릉들과 갈대밭뿐인 버려진 땅. 다시 반복된다. “너희는 무슨 죄를 지어서 아무것도 없는 땅에 버려졌지?” “신조차 용서 못할 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버려진 거야?”

나는 이런 것들을 떠올린다. 허구에 대한 믿음을 가진 죄,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인간을 믿은 죄, 고향을 그리워하게 된 죄..., 아니 죄 없이 버려진 죄. 떠난 자들을 망각한 자들의 죄....

 

80년이 지난 오늘, 우리의 세대들은 무심히 하바롭스크로, 블라디보스톡으로, 또한 알마타로 여행을 떠난다. 그리곤 예기치 않게 위령비와 곡창지대로, 화려한 도시로 변화된 그곳들을 거닐게 된다. 소설 속의 후손들, 우리가 잊어버린 우리 형제와 자매들의 그리움과 외로움을 알지 못한 채. 땅에 대한 그 절박한 필요가 있었던 삶들에 대한 찬연(燦然)한 애가(哀歌)를 이제야 들으려 하고 듣게 된 우둔함과 부끄러움이 밀려든다.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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