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레혼
새뮤얼 버틀러 지음, 한은경 옮김, 이인식 해제 / 김영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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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here', 어디에도(없는)이라는 단어가 거꾸로 써진 ‘Erewhon(에레혼)’이란 이 소설은 146년 전, 18725월에 발표되었다. 19세기 중엽에 써진 케케묵은 이야기가 21세기 오늘 다시 소환되어 읽혀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기계가 더욱 완벽하게 우리를 독재하지 못하게끔 우리에게 없어도 될 만큼 기계를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P257)”하는 소설 속 문장이 지닌 오늘의 현실과의 유비(類比)때문일 것이다.

 

컴퓨터 혁명이 순수한 기계적 사건에서 생물학적 격변으로 바뀌고, 권한이 인간에게서 네트워크로 연결된 알고리즘에게로 이동(호모데우스P472)”하는 현실, 더 이상 인간 자신들의 욕망과 경험 중심으로 세계가 돌아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위기의 예견과 닮아있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겐 이 영국인의 직관이 더욱 빛나게 와 닿은 것은 공동(共同)이 만들어내는 믿음의 허구성과 환상성이라 해야 할 것 같다.

 

그것은 사람들이 믿기로 하면 곧 의미가 되, 그 믿음이 자신들의 질서를 구축하고, 또 그 기반위에서 세계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양을 치는 목동인 화자(話者)가 새로운 땅과 황금을 찾아 아무도 넘어서지 못했던 아득한 산맥과 협곡을 넘어 찾아든 새로운 세계인 에레혼의 사람들이 지닌 도덕관과 세계관에 혼란을 느끼는 것은 다른 믿음, ‘유발 하라리의 말을 빌면, 그네들이 함께 짠 공동의 이야기망()’이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리라.

 

개인의 질병은 물론 불운(不運)조차 재판을 받고 구금되는 범죄가 되고, 출생하는 것은 태어 난 자()의 책임이며, 비이성이 찬양받는 세계를 오늘 우리들의 심상에 떠올리기란 극히 어려운 일이다. 소설의 거의 모든 지면은 이러한 기이한 질서가 삶을 지배하는 낯선 세계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이를테면 <에레혼의 재판>이라는 장에 등장하는 한 토막의 이야기인데, 아내를 막 잃은 남자에 대한 판사의 선고는 다음과 같다. “피고는 큰 상실을 경험했다. 자연은 이러한 범죄에 심각한 벌점을 부여하며, 인간의 법은 자연의 명령을 강조해야한다. 배심원의 권고가 아니었더라면 피고에게 6개월의 노역을 선고했겠으나 ....(中略)...감형한다.” 상실이라는 불운은 자연의 섭리에 비추어 볼 때 조야하고 반사회적이라는 믿음이 이들의 삶을 지탱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같은 이야기를 믿는 한, 사람들은 똑같은 규칙을 따르고, 그 상상의 질서에 자신들 믿음의 토대를 구축한다는 이야기이다.

 

21세기 바로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질서, 도덕, 체제라는 것들 역시 이러한 이야기의 그물망에 기반한 것 아닌가? 이걸 거꾸로 새기면 사람들이 더 이상 믿지 않게 되면 가치가 증발해 버리고,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호모데우스에서 유발 하라리가 적시하는 돈, , 기업, 국가와 같이 상호주관적 실재라는 것들, 그 허구적 실체에 목매는 우리들을 에레혼 사람들이 보았을 때, 그들 역시 혼란스럽지 않겠는가?

 

우리의 믿음이란 것은 결국 우리네가 어떤 이야기를 직조해내느냐, 그리고 그것에 어떤 상상의 질서를 부여하려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환경에 놓여 질수 있는 것이지 않겠는가?

그래서 아무런 의견을 갖지 않는 것은 물론,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는 태도는 학문과 훌륭한 교육의 완성으로 여겨졌다.”<비이성의 대학>의 우아하게 완벽한 중립의 태도를 접하게 될 때 실소(失笑)보다는 새뮤얼 버틀러의 이 해학(諧謔)적 묘사에서 극단의 순전한 부조리가 넘쳐나는 넌더리의 냄새를 맡게 되는 것은 왜일까?

 

에레혼의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이러한 가치중립적 태도는 오늘 우리네가 과학기술에 기대했던 동일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소설은 바로 여기에서 그들이 이러한 삶의 태도, 즉 이러한 믿음의 질서를 만들어 낸 동기가 소개되는데, 이 작품을 미래소설의 걸작으로 불리게 한 3개의 장으로 구성된 <기계의 책>이 그것이다. 기계파괴혁명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논리들인데, 분명 작가 새뮤얼 버틀러의 안광(眼光)이 돋보이는 부분이랄 수 있다.

 

기계에 구속된 이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기계왕국의 발전에 평생을 헌신하는 이들도 늘어난 것을 감안 해 볼 때, 기계가 인간보다 우위를 점했다는 사실이 명백하지 않은가?(P259)” 이어서 기계는 인간의 영적인 것보다 물질적인 이익을 훨씬 선호하는 경향을 착취하여...(後略)”, 그리곤 인간의 의식이 갑자기 충격을 받게 될 일은 없을 것이다. 소리 없이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살금살금 인간은 기계에 구속되고...(後略)”에서와 같이 오늘날 잠시도 디지털 네트워크에서 자신을 분리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서 발산되는 스트레스 냄새의 유사성이다.

 

즉 에레혼은 기계파괴혁명 이후에 새롭게 만들어진 믿음의 세계인 것이다. 21세기 오늘, 우리들 역시 인간의 개별성이 내부에서 조용히 붕괴되는 소리를 듣고 있다. 자신들이 개발한 기술들이 성장하면서 그것이 인간이 한 번도 가 본적 없는 곳으로, 또는 인간이 갈 수 없는 곳으로 가는지에 대한 두려움도 성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지금의 우리는 멈출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소설 에레혼의 낯선 도덕과 믿음들의 이야기는 더더욱 인간의 믿음이라는 이 허구적 실체, 그 환상을 다시 그려 낼 수는 없는 것인지를 생각게 한다. 21세기 인간들이 믿고 있는 도덕 과 법이라는 윤리와 질서의 기반이 된 인본주의의 신화, 그 이야기를 새로 짤 수는 없는 것인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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