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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 - 수줍은 마음이 당신의 삶에 노크하는 소리 ㅣ 월간 정여울
정여울 지음 / 천년의상상 / 2018년 1월
평점 :
요즈음 내 심상(心像)에 빈번하게 떠오르는 것 중의 하나는 어린 시절 흑백TV 앞에서 보았던 몇 몇의 영화장면들이다. 그 중에서도 전쟁의 한 가운데 극히 제한된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애절(哀切)한 사랑, 그리곤 공허함만이 아프고 답답하게 다가오던 마지막 장면으로 기억되는 영화, 《사랑할 때와 죽을 때》의 그 애틋함인데, 아마 소년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던 모양이다. 결국 영화의 원작인 ‘레마르크’의 소설을 펴들고 아주 조금씩 읽어나가기도 했다. 언젠가부터 그 소년의 마음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리워하는 그 마음에 무언가를 채워 넣으려는 소극적인 시도였을 것이다. 작가 ‘정여울’의 글에는 이러한 문장이 있다.
“나는 우선 당신조차 알지 못하는 그 아픈 무의식의 밑바닥까지 어루만지는 글을 쓰고 싶다. 마침내 당신의 상처 입은 마음 속 깊은 그곳까지 닿을 수 있도록”
설혹 그것이 상처인지 아닌지 그저 막연한 결핍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심스러움이 묻어나는 ‘똑똑’하는 두드림의 소리에 문을 열면 그곳에는 부드러운 손길을 가진 진솔한 말(語)이 서있으리라.
이렇게 마주하게 된 『월간 정여울』은 나와의 은밀한 대화가 된다. 내 자신을 향하여 솔직한 삶을 얘기하게 한다. “나에게 부디 낯선 사람이 되지는 말아줘.” 라는 관계의 기적을 말하기 위해 인용된 이 평범한 문장이 모든 관계를 무시하는 듯한 내 오만의 밑바닥에 있는 정말의 목소리가 아닐까하는 의문의 시간이 되고, 그것은 다시금 “한쪽이 열릴 때도 한쪽은 늘 닫혀”있는 회전문의 비유에서 내가 침전 시켜놓은 마음의 비밀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묻혀있었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비밀이 없으려면 아낌없이 마음을 줘야 한다.” (P56)
얼마나 굳게 마음이 닫혀있었는지, 관계에 얼마나 소홀했는지, 얼마나 인색한 마음이었는지를 조용히 가늠해본다. 헛, 인과응보지. 그렇게 닫아걸고는 옛 소년을 그리워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속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소년은 사람들을 많이 사랑했다. 그리고 무한한 사랑을 받았다. 소년에겐 숨길 것이 없었으니까. 정말 자신감이 넘쳤다. 그리고 얼마나 열성적으로 들었던가?
“표현보다는 수용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보세요.” (P86)
나이가 들며 소년의 열성적 듣기가 수그러들긴 했지만 표현보다 수용의 비중이 크다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판단하려 들었던 모양이다. 작가의 지적처럼 “좋다, 나쁘다, 괜찮다, 싫다, 라는 판단”으로 단절을 만들어냈던 모양이다.
“판단은 이야기를 끝내는 것이지만 사유는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에요.” (P89)
허겁지겁 판단하며 달려왔더니 정말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부터 일 것이다. 그럼에도 외로움이란 것을 알지 못했다. 그것을 부르는 것이 그 단어임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가뭄처럼 쩍쩍 갈라진 메말라버린 심장. 그 목마름을 저 깊은 곳에선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느 하나 버릴 것 없는 눈부신 첫 사랑의 기억”을 간직한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의 소년이 지닌 감성, 내가 “너무 멀리 도망쳐” 왔던 것의 실체이리라.
“그 모든 삶의 기쁨이 오직 당신과 함께 해야만 가능한 눈부신 기적이었음을, 이제야 깨달았으니까.” (P100)
작가가 말하는 부사 ‘어쩌면’의 용법이 절실하게 다가온다. “주술적 희망의 향기가 묻어”나는, “가능성을 탐색”하여야 할 여유의 공백을 잃어버리고 있었음을. 아마 소년을 찾는 내 여정에 『월간 정여울』은 동행할 것이리라.
읽는 이 마다 대화의 내용은 달라지리라. 그럼에도 문을 열면 그 진솔함에 마음을 열지 않을까? “끝내 자신뿐 아니라 타인의 마음 또한 어루만지는 치유자”이기를 말하는 작가 정여울과 내밀한 속내를 교환하는 순수한 희열의 시간이 될 수 도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