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는 잠들지 않는다 - 일상화된 재난의 시대를 살아가는 법
줄리엣 카이엠 지음, 김효석.이승배.류종기 옮김 / 민음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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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은 해로움 때문에 주의를 끌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사회와 제도의 실체를 비추기 때문에 

관심을 끈다. 재난은 이미 잘못된 것을 드러낸다.”

 -본문 56쪽에서

 

 

지금 한국사회는 짧은 시간에 너무도 많은 재난을 겪고 있다. 이 재난은 바로 그 사회의 제도와 정책, 관리들, 사회구성원의 민낯을 드러내 윤리적, 정치적 실체를 까발린다. 딱 그 정도의 수준과 위치임을, 젊은이들의 어처구니없는 죽음, 예견된 재난에 대한 무대책과 방관이 야기한 불필요한 죽음들이 마치 불가피하고 대비 불능했다는 듯이 일탈적인 예외적 사건으로 치부되고 책임을 회피한다. 책임져야 할 정부는 외면을 넘어 터무니없는 변명과 정쟁으로 시선을 왜곡하기까지 한다. 때문에 재난이 야기된 원인에 대한 조사도 애초에 하지 않게 되고, 재난은 반복되고 더 빨리 재앙이 되어 돌아온다. 그 피해는 온전히 시민대중이 반복적으로 뒤집어쓰게 되는 결과만 초래한다.

 


이 책은 재난에 대한 인식제고를 통해 어떻게 재난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지, 더 성공적으로 이겨 낼 수 있는지에 대한 새로운 전략과 지표, 척도를 제시한다. 재난의 본질이란 재난에 대처하기 위한 준비는 결코 완전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데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또한 재난은 어떤 일회적 일탈적 사건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늘 함께하는 일상적 표준으로 인식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경고의 목소리. 재난조차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덧씌워 쟁점을 흐리거나 정치화하여 일개 괴담놀음거리로 만들어대는 권력의 선전장으로 전락하는 작금의 현실은 너무도 안타깝기만 하다.

 

국민의 안전을 위해 아무런 짓도 하지 않은 주무처 장관에게 헌재(憲裁)는 면제부를 쥐어줬다. 과연 이러한 권력의 시선으로 국민을 재난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을까? 아마 잠자지 않은 재앙은 끊임없이 무대책과 무방비로 일관하는 권력으로 인해 시민대중에게는 각자도생의 길을 찾는 험한 길만 주어진 것 같다. 이 책은 위에서 언급했듯 재난에 대한 인식과 대비를 위한 깊이 있는 지식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주목하게 것은 재난에 대처하는 지방 및 중앙 정부의 주무관리들과 그 수뇌부들이 응당 해야만 하는 책무와 태도이다. 때문에 시민의 시선에서 이들 행정권력 기관에 대한 재난 정책에 대한 감시 역량을 높이는데 분명 도움을 줄 것이라 생각된다.

 

내가 있다고 달라질 것이 없다!’, 지역의 수장은 재난 상황의 실시간 상황인식의 엄중성을 부정하는 말을 감히 내뱉으며 책임을 외면하는 현실에서 국민은 이들에게 강력하고 엄격한 명령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재난은 지나가지만 그 과정에서 사회의 정체성과 문화, 무시해 온 문제들을 드러낸다. 오송 지하차도 침수로 인한 인명 피해는 예견된 집중폭우에 대한 그 흔한 대비가 전무했음을 드러낸 여실한 사건이다. 재난에 대한 사전 대비 없음도 문제지만 실시간 상황에 대한 상황보고 체계도 작동하지 않았으며, 이를 통합 지휘해야하는 도지사는 마치 자신과는 무관한 재난이 펼쳐진 것처럼 자신을 예외지대로 두는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책은 리더의 상황 인식과 상황지휘 체제를 중요한 재난관리 요소로 다루고 있다. 특히 사고지휘체계(ICS)는 모든 리더가 이해하고 있어야 할 대응체계로서 현장 정보를 보고, 분석, 의사결정하여 신속한 재난 대응 처리를 위한 필수책무로 강조하고 있다. 재난의 실시간 상황보고와 상황인식은 지역의 수장, 중앙기관의 리더, 최고통치권자에 이르는 자들이 왜 재난 현장을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하는지의 중대한 앎을 제공한다. 결과 추이에 따른 문제 최소화를 위한 즉각적 조치뿐 아니라 후일 반복되는 재난에 대처하는 방식에 효과적 지식으로 축적되기 때문이다. 이를 회피한 자들은 재난에 대해 결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할 뿐 아니라, 재난의 실체를 결코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의심할 여지없이 절대적으로 대응이 필요한 위협을 위기(risk)라고 말한다. 이 위기가 적절히 해결되지 않고 끔찍한 결과가 발생할 때를 재난(disaster)이라 부르며, 이 재난이 미숙하게 제대로 처리되지 않은 것을 재앙(catastrophe)이라 한다. 금의 한국사회는 위기의 단계에서 처리되는 것이 없다. 위기가 발생하면 모두 재앙에 이르고 있는 현실은 중앙정부나 지방정부 모두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다는 말과 같다. 재난 불감증에 걸린 권력은 배워야 하지만 배우려 하지 않는다. 국정을 장악한 현 권력들은 한결같이 실존적 결정을 돌아보길 거부하면서 학습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때문에 아무런 학습이 되지 않으며 실패의 역사를 반복하게 된다. 신속하고 정직하게 배워야 될 절실한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외면 혹은 무능을 자처하기에 이 사회의 재난은 항시 재앙으로 귀결될 것이다.



예견되는 재난에 대비하는 계획을 유비무환이라 하여 전통적인 사전 대비책도 재난관리에 있어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재난이 닥쳤을 때 재난이 진행 중인 상황을 관리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시대에 우리는 진입해있다. 상황인식은 재난관리에 있어 더욱 중요해졌으며, 그래서 정부(중앙 및 지방) 수장의 현장관리는 재난의 최소화에 있어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책은 재난의 예견에 따른 준비 및 재난 차단도 중요하게 다루고 있으나 더욱 중점을 둔 분야는 재난이 발생한 이후의 관리에 보다 역점을 두고 있다. 지진이 발생한 후 정부 리더와 원자력발전을 비롯한 당해 기관의 위기관리자 역할에 따라 재앙이 되기도 하고 재난의 최소화로 방어 할 수 있기도 하다. 재앙으로 귀결된 사례들로부터 우리들은 상당한 교훈과 지침, 윤리적 책임의식 등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무시하고 은폐하고 거짓말로 기만적으로 넘어갔던 재난은 재앙으로 반드시 그 추악한 몰골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위기가 코앞에 닥쳤는데도 외면하는 현상을 타조의 역설이라 부른다. 근시안, 낙관주의, 기억상실, 타성, 단순화, 자기 이익과 무관함 등이 서로 얽혀 다가오는 위기를 받아들이는 것을 꺼리는 태도이기에 이들에게 재난의 닥침은 곧 재앙으로 무참히 연결될 뿐이다. 특히, 서울의 상습적 침수는 배수관로에 대한 전반적 점검 및 개량을 필요로 한다, 즉 예산을 요구하는 것이지만 수장은 이 예산을 전면 삭감하였다. 자원낭비라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이들에겐 재난 대비 예산은 본질적으로 바보같은 짓이며, 신경쇄약자의 과잉반응으로 간주된다. 그리고는 재난이 닥치면 다시는 안 된다(never again)'는 진부한 문장으로 짐짓 결연한 기만적 태도로 자신감을 내보이곤 한다.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은 없으며, 재난은 반복된다.

 

혹여 행정기관의 재난에 대한 준비태도나 방법에 대한 시민적 오해가 있다면 그것에는 도사리고 있는 무수한 또 다른 방해 요인이 있을 것이다. 지식이나 역량의 문제가 아니라 거버넌스 구조의 책임 분산이 통합된 노력으로 대응하는 체제를 방해했거나, 예견되는 무수한 적색신호의 잡음에 대한 무시, 사적 이해관계가 얽힌 규제의 느슨함이거나 규제 특권이 부여된 예외지대의 탈법적 지대가 생성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최후 방어선이라는 함정에 빠져 최후의 안정장치에 의존하여 재난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수도 있다. 최후의 안전장치가 작동하지 않으면 안전장치는 사라지고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고 만다. 저자는 이와같이 재난에 대한 대비책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들, 리더가 필히 갖춰야 할 태도와 방법적 도구들, 그리고 심리적 태도들에 이르기까지 재난 대응책들을 촘촘하게 제시하고 있다.

 

재난 대비예산의 촉구와 대응책을 요구할 때 지금까지 잘 작동하고 있는데, 별다른 사고도 일어나지 않는데...’와 같이 변화란 없다는 듯한 반론을 곧잘 듣게 된다. 하지만 근본적인 것들은 항상 변하고 있으며, 더구나 인간도 변하고 있다. 과거와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만일 똑같았다면 모든 재난관리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을 것이다. 재난 관리란 끊임없이 울퉁불퉁한 바닥상태에 맞춰 안정되게 만들려는 세 발 의자와 같은 것이라고 저자는 역설한다. 항공기 추락, 태풍과 홍수, 쓰나미와 같은 자연재해, 컴퓨터 네트워크의 해킹, 감염성 질병의 확산, 테러로 인한 재앙 등 유형별 재난 사례들과 함께 재난의 대비성이 왜 강조되어야 하는 것인가를 거듭 확인할 수 있게 된다.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의 멜팅(melting) 사고, 911 테러, 보잉 737의 연속적 추락, COVID 확산,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인한 제방 붕괴 등 지구촌 뉴스를 장식했던 재앙적 사건들은 성공적 예방으로 엄청난 인명 손실과 재산의 파괴를 최소화할 수 있었던 사전 대비가 가능했던 사건들이다. 사욕과 권위적 과시, 권력과 기업의 결탁, 규제 완화와 같은 공적 감시소홀로 재난을 촉진한 인재가 위기를 재앙으로 만들었음을, 즉 재앙의 거의 모든 중심에는 인간의 재난에 대한 이해의 결여, 미숙함, 회피가 놓여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재난에 대한 이 전문적이고 밀도높은 저술은 재난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는 생각으로 우리를 바꿔 놓는다. 지방 및 정부 관리들은 물론, 기업 위기관리자, 그리고 시민 대중 모두에게 재난을 바라보는 시선을 이 책은 분명 한 층 올려 줄 것이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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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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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나를 집으로 데려가는 대신 엄마의 고향인 해안 쪽을 향해 웩스퍼드 깊숙이 차를 달린다.” 소설의 첫 문장이다. 어린 소녀 의 감정이 개입되지 않은, 왠지 체념과 감정의 억제를 익혀 체화된 아이가 보이는 듯하여, 아니 사랑을 겪어본 적 없어  버려짐에 대한 감정의 언어도 없는 이 문장이 벌써 가슴을 시리게 한다. 어린 소녀 에게 벌어지는 일에 대해 자신의 감정이 개입되지 않은 상황을, 전속력으로 날아가며 사라지는 작은 갈색 새 떼와 분필 칠을 칠한 듯한 구름을 바라보며 낯섦의 환경을 상상한다. 아이의 말은 극히 절제된 느낌과 정경만을 전함으로써 삶이라는 표면의 신비로운 이면, 그 공백에 어린 무수한 물음들을 생성하여 상상하게 하고 답하게 하려는 것만 같다.

 

다섯 아이와 집안의 허드렛일, 밭일 등 산더미같은 일에 찌든 엄마, 카드게임으로 집안의 큰 재산인 붉은 암소를 잃은 아빠, 건초 수확시기를 놓친 것을 거짓 허영으로 둘러대는 아빠로 표현되는 부모를 둔 아이다. 또 다시 배가 부풀어 오른 엄마의 출산 예정으로 아이는 먼 친척에게 맡겨진다. 소설은 결코 애정이 없는 엄마라던가 무능력하고 이기적인 아빠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의 생각은 말로 표현되지 않으며 무한한 여백을 만들어내며 독자를 상상의 지대로 밀어 넣는다.

 

나는 아이의 생각을 쫓으며 첫 문장에서 지녔던 단념에 익숙한 아이를 거듭 발견한다. 자신을 맡아줄 킨셀라 아주머니와 아저씨에 대한 상상, 가끔 엄마가 기분 좋을 때 하는, 가능성이 훨씬 낮은 따뜻함을 기대하지만 그런 희망은 주어지지 않으리라는 낙망을 당연함으로 생각한다. 좀처럼 사랑이란 기대할 수 없는 것이며,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이라는 이 체념의 생각을 읽을 때 마음 한 곳이 허물어지는 슬픔이 나를 누른다.

 

아이의 머리는 온통 헝클어져 집시 아이처럼 지저분하고, 아빠는 짐도 안 내려주고 아주머니가 내 온 음식을 먹기가 바쁘게 내빼듯 가버린다. 제대로 된 작별 인사도 없이, 나중에 데리러 오겠다는 말도 없이. 원하는 만큼 데리고 있으면 안 되나?”, “애들 먹이는 게 골치예요. ...얘도 마찬가지고요.....먹기야 많이 먹겠지만 대신 일을 시키세요.” 이것이 아이 아빠의 목소리다. 아이의 감정에 대한 어떠한 이해도, 수치심도 없는 어른을 떠올리게 한다.

 

킨셀라 아주머니와 아저씨의 집에 들어서자 빵을 굽는 냄새 외에도 소독약 냄새와 표백제 냄새가 살짝 난다.” 이것은 아이에게 쾌적함, 청결함을 느끼게 한 인상일 것이다. 아주머니는 아이의 더러워진 옷을 벗기고 따뜻한 욕조에 들어가게 하고 목욕을 시킨다. 아주머니 손은 엄마손 같은데 거기에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는 것도 있다. 적당한 말을 찾을 수 없지만 여기서는 새로운 말이 필요하다.” 아이가 겪어보지 못한 손길, 결코 받아보지 못한 느낌이기에 표현될 수 없는 것이다. 아이는 비로소 새로운 말, 감정에 대한 앎의 경지가 열린다.

 


아이는 킨셀라 아주머니, 아저씨와 함께하는 일상 속에서 인간에 대한 다정함과 믿음, 사랑을 경험한다. TV 뉴스 속 단식투쟁으로 사망한 자에 대한 연민, 비가 오면 빗물이 새는 마을 학교 지붕 교체 자선복권을 사는 행위, 미사 보러가기 전 날 네 옷이 생기면 정말 좋을 거야라며 새 옷을 사러갔을 때의 은근한 기쁨, 무릎에 앉히고 자신의 발을 느긋하게 어루만지며, 침대에 눕히고 머리핀으로 귀지를 파주는 아주머니로부터 사람의 감정과 언어를 배우는 것이다.

 

마을 이웃의 장례에 이바지하러 킨셀라 부부와 불가피하게 함꼐 간 날, 아이는 동네 여인 밀드레드에게 잠시 맡겨진다. 그녀는 아이가 입은 옷이 킨셀라 부부의 죽은 아들의 옷이며 죽은 아이가 사용하던 방에서 네가 자고 있는 것이라는 말과 함께 사연을 듣게 된다. 돌아오는 길에 아이는 밀드레드가 묻고 해주었던 말을 킨셀라 부부에게 사실 그대로를 전한다. 이 집에는 비밀은 없으며, 비밀이 있는 곳에는 부끄러운 일이 있는 거라는킨셀라 아주머니의 말을 지킨 것이다.

 

아저씨 존 킨셀라는 나를 데리고 밤 산책을 나간다. 바닷가 모래 언덕이 있는 곳으로. 존은 나에게 말한다. 이상한 일이란 일어나기 마련이다. .... 에드나(킨셀라 아주머니)에게 나쁜 뜻은 없었어. 사람이 너무 좋거든. 남한테 좋은 점을 찾으려하는데 가끔은 다른 사람을 믿으면서 실망하는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지.” 아이와 아내의 감정 상태를 보듬고 이해시키려는 충실한 노력이다. 아이의 인격을 한 인간으로 동등하게 존중하는 어른, 아마 사랑이리라. 프랑스 철학자 장 켈레비치천진난만의 지혜가 살아있으려면 염려하는 어른이 그 옆에서 생존과 안전을 신경 써줘야 한다.’고 말했다. 정신을 비옥하게 만들어주는 창조의 힘, 생성의 힘, 아마 사랑의 감정에 대한 경험의 교환일 것이다. 바다 저 멀리서 비치는 세 개의 불빛, 내가 아저씨 딸이라도 되는 것처럼 꼭 끌어안는다.”

 

존은 단어 하나하나 손톱으로 짚으면서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며 책 읽는 것을 가르쳐준다. 자전거를 배우는 것처럼, 갈 수 있는 곳까지 자유롭게 가게 될 때까지, 어느 날 출산소식과 함께 아이를 데려다 달라는 엄마의 편지가 도착한다. 나는 울지 않으려고 애쓴다. 울지 않으려고 애쓰는 건 정말 오랜 만이고 그래서...”, 어린 아이가 자신의 집에서 울음도 스스로 억압해야만 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또한 킨셀라 부부의 따뜻한 보살핌,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과의 작별에 대한 슬픔이다. 이러한 사랑의 전염은 아이를 수동적 인간에서 능동적 인간으로 바꿔 놓는다. 바쁜 아주머니를 돕기위해 양동이에 우물을 깃다가 빠져 오한이 들어 며칠을 앓는 사건은 체념과 실망, 혼돈의 슬픔에 지배되던 아이가 새로운 감정, 앎을 지니게 되었음의 메타포일 것이다.

 

아이는 킨셀라 부부와 함께 그녀의 집으로 돌아온다. 아이를 반기는 그 누구도 없다. 집의 진입로 대문은 닫혀있고, 아저씨는 차를 세우고 문을 연 뒤 진입로로 들어서서 다시 대문을 닫아놓는다. 엄마가 출산한 새로운 아기와 무질서하게 엉킨 집안, 형제자매들의 낯선 눈초리의 어색함, 엄마와 아빠는 킨셀라 아주머니와 아저씨에게 고마움 전달하기는커녕 냉랭하기만 하다. 킨셀라 부부는 서둘러 갈 길에 나선다. 아이는 대문을 열기위해 멀어지는 아저씨를 바라본다. 그리고는 망설임없이 달려가 그 앞에 도착하고, 아저씨는 를 팔로 안아 든다...쿵쾅거리는 내 심장이 느껴지고...“ 옆에는 목구멍 속으로 흐느끼다 울다가를 반복하는 아주머니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어쩌면 작품 속 어린 소녀 의 말처럼 우리들의 세계에는 새로운 말이 필요한 지도 모른다. 우리들이 경험하지 못해 알지 못하는 그 무수한 감정들과 앎의 지대를 위해서. 소설은 절제된 표현들, 상상력이 직관을 자극하고 그 직관이 일격에 완성되어 비유와 은유가 시사하는 갑작스런 도약을 통해 형언 할 수 없는 앎의 지대를 재창조한다. 그것은 어떤 말보다 더 풍부하고 깊은 것, 사랑의 마술이라고, 그래서 여백 가득한 문장으로 채워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말 할 수 없는 것을 중언부언하며 말재간을 그 원천까지 고갈시켜버리는 그 메마름과 무지의 공허를 거닐지 않기 위해서. 따뜻함, 배, 사랑 따위의 말을 하지 않음에도 그 어떤 소설보다 뜨거운 감동에 젖어들게 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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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도널드 케이건 지음, 허승일.박재욱 옮김 / 까치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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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사와 국가의 비극,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읽을만한 강력한 이야기>

 

이 읽기는 국제 사회의 신()냉전 질서와 갈수록 그 골이 깊어지는 소득 양극화와 정치체제와의 상호성을 분석한 경제사가(經濟史家) 마이클 허드슨이 통찰도구로 이용한 역사기록에서 비롯되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역사학자 도널드 케이건도 지적하듯 비록 2,400년 전에 끝이 났지만 끊임없이 모든 시대 지식인들을 사로잡는 영향력을 지니고있다. 특히 그것은 스파르타로 대표되는 펠로폰네소스(또는 아카이아)동맹과 아테네로 대표되는 델로스 동맹이 기원전 431년부터 27년간 벌인 대()전쟁이 인간사의 특별한 비극이 있을 때마다 실로 무수한 정치적, 경제적, 지정학적, 외교적 모델을 제공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두 동맹의 중심인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각 동맹의 맹주로서 그들의 역사적 행위는 오늘의 미국과 중국을 축으로 하는 대립 체제의 실제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준다. 또한 아테네의 민주주주의적 제국주의는 오늘날 미국이 그 동맹과 세계에 행사하는 다양한 형태의 행위 의도를 분석하는 맞춤의 도구가 되어준다. 동시대 아테네의 장군으로 현장의 당사자였던 투키디데스가 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아테네 정치체(政治體)의 혼란스러운 변화상은 물론 그리스 전역에서 치러진 전투의 전략적 전술적 사례를 제공하고 있을 뿐 아니라, 당대의 국제 질서와 교역 및 실질적 국가권력의 이동을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거시적 질서의 변화와 더불어 아테네 민주정과 과두(寡頭)정의 갈등과 같은 내부체제가 빚어내는 양상들은 오늘 한국사회의 정치체에서 발생하는 현상들의 긴요한 분석도구가 되어주기도 한다. 무려 27년간 지속된 오늘날 그리스 전역과 이탈리아 남부의 시칠리아, 소아시아지역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벌어진 투키디데스의 장엄한 전쟁의 역사서술은 예언적 지혜들로 가득 차 있어 가히 인간사의 전범(典範)이라 해도 지나친 이해는 아닐 것이다.

 

여기에 짧게 아테네 민주주의적 제국주의가 오늘의 미국과 얼마나 똑같은 지 마이클 허드슨의 글을 인용해 보겠다. 아테네는 매년 자국 예산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액수를 동맹국들로부터 공납으로 거두어 들였다. 그것도 자신의 은광에서 채굴한 광석으로 주조한 4 드라크마 짜리 은화 올빼미로만 납부할 수 있었다. 마치 21세기 기축통화인 달러의 역할과 동일한 것이다. 결국 델로스 동맹은 아테네가 동맹도시국가들에 지원을 요구하는 민주주의적 제국주의의 착취체제가 되었다....오늘날 북대서양조약기구를 비롯한 동맹국가들로부터 군사지원을 얻어내 자신의 경제적 요구에 저항하는 국가들을 파괴할 때 한 짓과 똑같다.”

 



이것은 동맹 도시국가들을 부채 위기에 몰아넣으면서 금융긴장을 유발하는 오늘과 유사한 양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펠로폰네소스의 전쟁은 이러한 금융긴장, 즉 아테네 제국에 복속된 도시국가들의 경제적 곤란이 하나의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스파르타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은 이와달리 주종의 공납 관계가 아닌 느슨한 우호적 방어 동맹이어서 공납을 받지 않았다. 물론 스파르타는 동맹의 리더로서 권위, 헤게모니를 놓지 않았다. 특출하게 강력한 아테네와 장기적이고 힘겨운 분쟁을 수행하는 데 스파르타는 당연 주저했기에 동맹국들은 자신들의 이익이 아테네의 식민국이나 동맹국, 아테네 당사자로부터 위협을 받으면 스파르타의 참전을 요구했다.

 

아슬아슬한 평화의 긴장을 깨는 전쟁은 스파르타의 즉각적 위협도 없고 손에 잡히는 이익도 없는 중립국가의 다툼으로 발발했다. 주저하는 스파르타의 개입을 유도한 것은 동맹국 코린토스의 식민 지역이 아테네에 위협받자 지정학적으로 곡물 수입지역인 그리스 북부와 연결되는 중부 교점 지역 코린토스의 강력한 요구를 물리칠 수 없던 까닭이기도 하지만, 동맹 지도자로서의 신뢰성을 과시하지 않을 경우 동맹이탈로 인한 헤게모니 상실 위험, 아테네가 지나치게 강력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는 서방 연합인 NATO 회원국이 아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인접 서방국가들의 이익과 연결되어 있다. 미국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군수물자 등 경제적 지원을 하는 양태와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스파르타는 주요 동맹국인 코린토스의 이익을 돕고 그리스의 유일한 헤게모니 국가였던 옛 지위와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 아티카(아테네)를 침공하는 것이 기원전 431년이다. 전쟁 수행 슬로건은 그리스인의 자유, 아테네 제국의 파괴와 제국의 지배를 받는 도시들의 해방을 표방했다. 대만 침공을 협박하는 중국이 하나의 중국실현을 내걸 듯 이들이 모두 자국의 이기적 이익을 위한 불의한 침략 행위임을 부정할 수 없다. 스파르타가 아테네의 강함에 대한 떨칠 수 없는 공포였듯, 중국이 지닌 미국의 힘에 대한 두려움은 언제든지 전쟁 발발의 주요 요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최초의 전쟁 발발은 인류 역사이래 평화 시기에 사용된 최초의 사례인 경제적 금수조치 때문이다. 코린토스의 식민국인 메가라에게 아테네 제국의 항구와 아고라 출입을 금지하는 법령을 통과시켜 금수조치를 가했다. 이러한 경제적 제국주의의 적대행위는 아테네 자신들의 심기를 건드리면 막대한 피해를 피할 수 없다는 경고의 천명이다. 이것은 메가라를 향해 있지만 그들의 모국인 코린토스에 대한 위협이기도 했다. 다시말해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대한 도전장으로 여겨질 만한 것이었다. 도널드 케이건의 펠레폰네소스 전쟁사는 동명의 역사서인 투키디데스의 책을 저본으로 하여 크세노폰의 아테네인의 國制, 아리스토델레스 혹은 그의 제자가 쓴 또 다른 저술 아테네의 국제와 작자를 알 수 없는 헬레니카, 플루타르코스의 전기저술을 보조적으로 사용하여 쓴 통합적 분석서이다.

 

분파들 때문에 도시들에서 많은 끔찍한 일들이 벌어졌다.

그런 일들은 지금도 벌어지고, 그리고 인간의 본성이 그대로인 한 

언제나 벌어질 것이다.”

- 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각 전투의 참전 결정과 승리와 패배에 따른 시민의 심리 변화, 요동치는 정치질서, 전쟁비용 부담의 고통, 3국 페르시아와의 동맹을 향한 외교적 모색, 정치가의 능력에 따른 국가 생존에 미치는 영향, 분파적 투쟁으로 인한 국력의 부침현상 등으로 오늘의 국내외질서를 비교, 예견할 수 있는 유사양상들로 빼곡하다. 무엇보다 특별히 시선을 끄는 부분은 참주정을 끝내고 100년을 시민의 자유를 기조로하는 민주정을 펼쳤던 아테네의 과두정으로의 이행이 야기한 몰락이다.

 

아테네는 평화를 지향하는 온건한 민주정을 지지하는 시민세력과 전쟁에 대한 광적 열광을 지지하는 과두정으로의 전복을 꾸미는 세력의 분파갈등이 전쟁 내내 지속되었다. 민주정이 전복되는 기원전 411년은 아테네의 국가 존망을 다툴 수 있는 시칠리아 전투에서 대참패를 겪은 후 과두정을 세우려는 극단적 과두파들이 민주파 지도자들 및 정적들을 암살하며 급격하게 수행되었다. 이들은 반대자들을 공포로 침묵시킨 후 반대 발언을 하려하면 즉각 편리한 방법으로 살해하고 아무런 고발, 조사, 재판도 받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자유를 빼앗는 일에 신속하게 움직였으며, 단지 개인적 야망에따라 행동하는 이기적 기회주의자들 뿐이었다.

 

이들 세력은 모든 시민이 참여하던 민회(에클레시아)를 폐지하고, 중장보병 계급 이상의 특권층으로만 이루어진 정치체로 상위부자들만을 위한 정부를 구성했다. 그리고는 모든 하위계급에 지급되던 급여지급을 중단하고 무료봉사를 강요했으며, 그들에 대한 사회적 지출 역시 전부 중단했다. 오늘의 말로 하자면 일종의 긴축재정으로 시민의 생활을 졸라맨 것이다. 이 긴축재정은 부채를 창조하고 그 부채의 채권자인 상위 계급 부의 증가를 만들어낸다. 가장 야만적이고 탐욕스러운 정책을 아테네의 과두세력이 자행한 것이다. 지금 한국의 검찰정권이 하는 행위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2400년 전 투키디데스의 이러한 일의 반복 예견을 다시금 확인하는, 그 통찰력을 확증하게 된다. 부자감세와 시민대중의 가계를 착취하는 파렴치함의 극치를.

 

급기야 스파르타의 위협이 아테네의 목전에 이르자 이들 과두파들은  민주정의 복원을 받아들이기보다 적국을 끌어들여 배들과 성벽을 포기하고 오직 자신들의 생명과 부를 구하기 위해 아테네에 관한 모든 조건들을 받아들일 작정으로 스파르타와 평화를 추구하자고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아테네를 배신하고 나라를 팔아먹기로 한 것이다. 물론 이후 민주정으로 복귀에 따라 이들 과두파들은 도주하거나 사형을 당했다. 27년에 걸친 무수한 해전과 육상전은 물론 적의 동맹파괴와 자국의 교역로 확보를 위한 전략과 술책에 따른 찬란한 해석들이 정치체와 시민의 의식과 관련하여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또한 진정한 리더와 시민정신은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는 전범으로서의 역사 서술이 가득하다.

 

기원전 404년 스파르타가 승리하고 아테네는 몰락함으로써 장구했던 전쟁은 막을 내렸다. 스파르타가 아테네보다 강해서 승리한 것일까? 아테네는 내부의 분파적 갈등, 특히 귀족과 부유층의 탐욕에 의해 무너졌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단순히 단 하나의 원인으로 붕괴했다고 말 할 수 없다. 리더의 부재, 시민적 무지로 인한 오판, 지속되는 내분, 전쟁재정의 파탄, 외교적 실패 등의 총체적 귀결이지만 그 궁극적 바탕에는 부와 권력을 독차지 하려는 상위계층의 추악한 욕구가 자리잡고 있다. 이를 차지하기 위해 저항하고 반대하는 대중을 유린, 억압하는 공포정치를 동원하게 된다. 그것은 결국 국가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지름길이다. 지금 한국 사회가 처해있는 모양이 아테네가 몰락을 향해 달려가던 즈음과 너무도 흡사하다.

 

스파르타는 아테네에 30인 참주정을 부과하여 과두파 괴뢰정부를 수립하고 공포정치를 편 것은 예견된 일이다. 시민의 재산 압류와 광범위한 사법적 살해를 시행하였다. 어쩌면 아테네 시민이 자초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국가 리더는 시민의 수준 만큼이다. 17만 표만큼 앞서 만들어낸 대통령이 바로 지금 한국사회 시민의 수준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나라의 존망을 바꾼다.


이를 어쩌나, 몰락의 길을 향해 질주하는데 시민은 이에 대해 하는 일이 없다. 펠레폰네소스 전쟁사 이후의 스파르타와 아테네를 비롯한 여타 도시국가의 흥망을 바라보면 범()그리스의 실현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27년에 이르는 장기 전쟁은 오히려 분노와 좌절, 복수심을 증폭시켰으며, 분파적 분쟁을 더욱 악화시켰고. 따라서 각 도시국가들은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다시금 끊임없는 침략을 상시화 했다. 내전과 국제전의 확산으로 공포가 일상화되고 잔혹한 난폭성이 줄지어 벌어졌다. 스파르타의 승리는 일시적인 것이었을 뿐 그들은 범 그리스를 유지할 정책도, 재화도, 정치적, 인적 자원도 없는 과두정에 의존한 군사국이었을 뿐이다. 스파르타는 동맹이었던 테베와의 싸움에서 패배하였으며 더 이상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그리스 남부의 보잘 것 없는 세력으로 몰락했다.

 

그리스의 지배라는 27년 전쟁의 헛된 시도는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쇠약함을 가져왔을 뿐, 그리스인에 의한 지배는 페르시아의 개입과 마케도니아에 의해 정복되면서 그 영화는 사라졌다. 오늘의 신냉전 질서의 우두머리로 자처하는 미국, 중국 갈등의 미래를 투키디데스를 통해 예견하게 된다. 한편으로 아테네의 국제(國制) 변화로 야기되는 부와 권력의 집중을 탐욕스럽게 추구하는 세력이 만들어낸 것은 국가의 침몰이었다는 것을 보게 된다. 시민 대중의 전통적 믿음과 가치들에 의문이 제기되고 사회를 더욱 분열시키는 권력은 국가의 기초를 파괴하는 짓거리가 된다. 사회는 회의론과 냉소적 합리성이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사람들은 의고적(擬古的)이고 비합리적 경건함으로 퇴행하게 된다. 즉 수구화되어 시대정신의 퇴화로 인해 이루어놓았던 시민적 결과물인 민주주의, 여성주의, 사회적 안전망 등 사회적 정의, 인간 존엄성, 표현과 언론의 자유 등등, 이 모든 것들이 중세적 폭력의 시대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물리적 파괴를 만들어내는 현상적인 전쟁이든, 경제적 정치적 분리를 종용하는 야비한 정쟁이든, 인간을 계층화하여 분리하는 권력의 갈라치기 획책이든 사람들에게 편안한 만족과 일상적 필요를 빼앗아가는 이들 갈등과 당쟁과 전쟁은 사람들의 성향을 그 환경과 같게 맞추는 난폭함을 닮게 된다. 이러한 긴장을 만들어낸 권력처럼 나쁜 것은 없다고 역사는 말해준다. 멍청하게 이러한 짓을 반복하지 말라고. 그럼에도 이 사회는 바보짓을 멈추려하지 않는 것 같다. 자신이 과두권력과 같은 계층이라는 이 가공할 망상이 도둑놈들을 보호해준다. 다음의 인용문장으로 맺음에 갈음한다.

 

당파에 대한 소속감과 충성심이 가장 높은 덕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다른 모든 것들을 뒤덮고 전통적 도덕성의 모든 제한을 폐기하는 행위를 정당화했다. 광신적인 행위와 등 뒤에서 적을 파멸시키려고 계략을 꾸미는 짓거리 역시 마찬가지로 존경받았다. ...맹세는 그 의미를 잃고 표리부동의 도구가 되었다.”

- 도널드 케이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P 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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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운명 - 금융자본주의인가 산업자본주의인가
마이클 허드슨 지음, 조행복 옮김 / 아카넷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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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권력은 쉽게 물리는 바나나와 같지 않다....여기에 한계효용이론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 서문 부와 경제는 어디로 가는가중에서

 

위 문장은 최상위 1퍼센트의 경제적 지대 수취계급의 물리지 않는 돈에 대한 탐욕을 말하는 것이다. 이들은 돈을 향한 무한한 욕구를 유지하고 지키기 위해 실제의 권력을 장악하고, 조종, 통제하여 세상의 모든 부를 자신들에게 집중시키기 위해 경제이론은 물론 제도와 법률, 정책을 유리하게 관리한다. 그것은 노동하지 않으며 발생하는 불로소득을 항구적으로 증가시키기 위한 일련의 추구이며, 바로 고질적인 양극화의 근원적 얼굴이다.

 


책은 금융자본주의인가 산업자본주의인가라며 양자 선택의 물음을 부제(副題)로 하고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 경제 주체가 누구여야 하느냐는 질문이며, 어느 선택이 인류라는 행성지구 구성원들인 다수 대중의 문명적 삶을 보장할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경제적 부()가 다수 인류에 공정하게 배분되는 길에 대한 물음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고전 경제학의 중요 목적의 서술로 지대(地代)라는 불로소득이 산업경제에 미치는 악영향으로 시작한다. 그것은 산업화동력을 가로막았던, 즉 산업생산비를 비정상적으로 증가시켰던 지대를 포함한 불로소득인 경제적 지대를 최소화하여 생산 간접비를 줄임으로써 산업생산을 촉진하는 것이었다. 즉 지대에 과세하여 지주 계급의 특권을 없애 사업비용을 낮추고, 전력, 통신, 교통 등 자연독점에 대한 공공기간시설 투자를 통해 독점으로 발생하는 지대를 차단, 산업경제의 경쟁력을 제고(提高)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신자유주의 경제이론가들은 지대라는 것은 없다고, 금융이자, 부동산 임차료, 공기업 민영화(私營化)로 인한 독점 이윤은 생산소득, 근로소득과 같은 순수소득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신자유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무시한 고전경제학 이론을 차용하여 생산함수가 수확체감의 법칙에 따른다고 주장하며, 독점 및 부채로 인해 발생한 경제적 지대의 수취를 생산 소득이라며 정당화한다. 실제로 기계화 및 자동화, 생물공학 등 비약적인 기술발달로 수익은 체감하지 않고 오히려 폭증하고 있음을 은폐한다.

 

이것은 한 국가의 내부 경제에서도, 국가 간의 경제인 국제 경제에 있어서도 동일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첨예한 경제적 갈등으로 초래된 신냉전 또한 이와같은 금융자본주의와 산업주본주의의 전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타국에 부채와 무역의존을 밀어붙여 경제적 지대를 독점하려는 측과 이를 방어하려는 측의 싸움이다.

 

책은 13개장에 걸쳐 신자유주의가 강력하게 드라이브하는 금융자본주의의 본질을 파헤치며 이들이 어떻게 불로소득이라는 특권을 탈취하고 경제적 부를 착취하는 가를 조세회피, 거대 금융화, 역사와 이념의 가치 왜곡 등 그 양태를 달리하며 반복적으로 서술한다. 한편으로는 미국의 패권주의적 금융자본주의가 지구촌을 어떻게 유린하고 있는지, 그 탐욕스러운 정치경제의 역사를 추적하며, 극단적 양극화, 부의 첨예한 집중현상의 근저를 차지하고 있는 경제적 지대의 본질을 설명한다. 결국 이것은 불로소득, 경제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는 경제적 지대의 추구에 집중하여 1퍼센트 부자의 탐욕에 부응하는 충족경제와 이를 차단하여 99퍼센트의 다수 대중의 삶의 질 제고를 위한 경제의 투쟁이라 할 수 있다. 야만과 문명의 대결에 대한 경제적 탐구이며, 다수를 위한 혁명의 목소리라 할 수 있다.

 

부동산 대출은 자산 인플레이션과 부채 디플레이션을 초래한다, 본문 P66에서


금융 대출의 80퍼센트가 부동산 담보대출이라고 한다. 이로 인해 원리금은 은행에 상환된다. 이 이자(利子)는 생산 대가인가? 아니면 불로소득인가? 신자유주의자들은 생산소득이라고 주장하고, 고전경제학자들은 경제적 지대, 불로소득이라고 본다. 이 시선의 차이는 잠시 유보해두자. 이 대출로 인해 주택구입 수요자는 증가하고 따라서 주택가격은 오른다. 한편으론 임금생활자는 가처분 소득이 이로인해 감소하여 소비가 그만큼 위축되지만, 금융투자자는 오히려 대출금융의 증가로 투자수익이 증가한다. 실제로 경제에는 그 어떠한 생산 유발도 하지 않음에도 경제의 규모는 마치 커진 것처럼 표기된다.

 

고전경제학의 관점에서 이는 생산소득이 아니고 단순 비용이므로 국민총생산(GDP)이나 국민총소득(GNI)에 반영하지 않는다. 반면 오늘의 신자유주의 금융자본주의에서는 이를 포함시켜 국가의 경제규모를 부풀린다. 신자유주의 금융자본주의 경제이론가들은 말한다. 이렇게 최상위 부자에 재화가 모이면 낙수효과를 통해 아래로 상당한 부가 이전된다고. 이런 헛소리와 기만적 거짓말이 어디 있겠는가. 이는 사실과 전혀 다른 악질적 궤변임이 많은 실제에서 이미 입증되었다. 특히 기업의 재무담당 책임자들은 이렇게 경제지대로 수취한 부를 단기적 이익을 위해 자사주 매입이나 배당금의 지급으로 자사의 주가를 견인하여 더욱 많은 부를 획득하는데 이용하는 것이 실상이다. 이들 부는 결코 생산시설 투자나 임금의 증가에 사용되지 않는다. 양극화는 이러한 반복의 심화 결과이다.

 

대중의 많은 이들이 경제 실태의 이해에 취약한 것이 실상이다. 이러하다보니 경제지대 수취계급은 권력을 장악하여 마음껏 자신들의 약탈적 지대 추구를 위한 정책으로 변경하여 부를 착취한다. 이 책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대중적 언어로 써진 오늘 우리네 눈앞에서 전개되는 부의 탈취를 목격할 수 있는 시선을 제공한다. 아울러 국민경제와 미중갈등을 비롯한 국제경제의 그 근본원인을 이해함으로써 문명의 야만적 퇴행에 저항할 수 있는 역량을 제공한다.

 

경제적 지대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파이어(FIRE; Finance, Insurance, Real Estate)’라 부른다. 이들 요소경제가 발생시키는 부는 실상 생산소득 혹은 근로소득이라 할 수 없으며, 자본소득이라 할 수 있다. 즉 돈이 돈을 벌어들이는, 노동하지 않고 벌어들이는 부다. 이들 요소를 장악하는 것, 그리고 이들에 부과되는 과세를 피하고, 가해지는 공공규제를 완화하거나 폐지하고, 특히 독점지대를 창출함으로써 부를 집중시키려는 것이 곧 금융자본주의이고 신자유주의 경제의 목표다. 이것은 다수 대중을 위한 경제도 아니며, 국가 경제에 어떤 생산적 도움도 주지 않는 그저 사적 탐욕으로서의 재화일 뿐이다.

 

신자유주의 정치적 전략은 과두지배 체제이며, 민주주의의 실질적 입법권과 과세권, 규제권한을 갖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다.”

 

검찰독재 권력은 정권을 차지하자마자 재벌 대기업에 수 조원에 이르는 법인세를 파격적으로 인하해주었다. 그리고는 줄어든 세수를 벌충하기 위해 노동자들의 근로소득 감세항목을 폐지하여 가계부담을 증가시켰다. 이어 각종 공기업의 재산을 헐값에 마구잡이로 매각하여 금융자본에 막대한 이익을 선사했으며, 경제지대를 더욱 착취하여 사적 소득을 늘리려는 대기업 재벌을 위해 합법적 노동조합을 탄압하고 노동자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공포정치를 펼쳤다.

 

주식과 채권, 고속도로 등 공공기간시설 투자에는 자신들에게 유리한 노선을 획책하거나 모의를 통해 주가를 조작하여 눈 먼 돈을 독차지하는 데 혈안이 된 파렴치를 버젓이 행하기까지 한다. 그리고는 경제지대 수취계급의 이익에 방해되는 다수 대중과 사회적 약자를 위한 민생 입법은 거부권을 행사하여 양극화를 지원한다. 아마 현재의 검찰독재 정권은 이 책에서 말하는 전형적인 금융자본주의에 터 잡은 신자유주의 자유경제 지상주의자들이라 할 것이다.

 

주택과 채권, 주식 등 이러한 형태의 재산과 유가증권은 실제의 생산수단이 아니라 소득과 산출에 대한 지대 수취자의 청구권이다. 이같은 청구권적 부가 피라미드의 최상층에 집중되고 나머지 90퍼센트는 더 깊은 부채의 늪에 빠지게 되는 정책은 제어되어야 한다. 현 정권은 지속적으로 공기업의 민영화를 획책하며 시민대중을 위협하고 있다. 공공재의 증가된 비용은 가뜩이나 위축된 서민경제를 더욱 어렵게 할 것이다, 어쩌면 다수 대중의 빈곤화가 이들의 목표인지도 모를 일이지만, 실제 미국의 신자유주의 정책가들은 대중의 빈곤화는 최상위 1퍼센트의 부를 위해서 필요한 정책임을 선언하기도 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지대추구 억제, 경제적 불평등을 줄이는 공기업과

보호관세, 보조금을 자유시장을 방해하며 비효율적이라고 비난한다.....

그런데 대체 무엇에 비효율적이라는 말인가?”

 

부채사회는 채권자의 불로소득을 증가시키는 아주 쉬운 길이다. 일하지 않고 거저 굴러들어오는 돈의 양을 증가시키려는 체감하지 않는 이 욕구는 얼마든지 입법과 정책으로 제어할 수 있다. 오늘날 미국의 중국 경제에 대한 윽박질은 탈산업화하여 생산시설이 해외로 이전되어 금융산업경제로 변화된 자신들의 이익과 상충하는 산업자본주의 경제 정책을 사용하는 국가들에 대한 불편함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기간사업에 대한 공기업의 유지는 일반 가계의 사회적 비용을 낮추고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 또한 부동산 지대에 대한 과세는 주택 가격의 안정과 금융소득이라는 불로소득을 낮추어 건전한 경제를 보장한다. 결국 이러한 국가경제는 약탈적 금융자본주의인 미국 경제의 이익을 방해한다. 이것이 곧 미중갈등의 핵심 이다.

 

이는 한국의 국내 경제에서도 아주 동일한 형태로 나타난다. 지대수취계급을 대변하는 현 정권은 약탈적 수취경제체제를 확보하기 위한 파이어부문의 이익을 키우기 위해 국민경제를 희생하는 짓을 서슴지 않고 있다. 경제 양극화를 초래하는 불평등은 지대추구 경제의 본질적이고 보편적 특성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이를 일시적이고 이례적 현상이라며 어물거리며 넘어가려하지만 그 결과는 참담한 국민경제의 파탄으로 귀결될 것이다. 채무탕감과 같은 리셋(reset)등의 조치나 경제적 지대에 대한 고율의 과세 등은 물론 적절한 대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에 앞서 이러한 금융자본주의적 질서가 심화되는 것을 차단하는 것이 보다 건전한 지혜가 되지 않을까? 일부에서는 금융기관의 높은 부동산 담보대출이나 신용대출의 연체 또는 지급 불능으로 인한 채무파산자에 대한 구제금융으로 부채탕감 정책을 제시하면 자본주의 질서를 파괴한다고 비난하고 나선다. 공적자금을 개인들의 구제에 사용하는 것을 사회주의적이라며 맹렬하게 혐오를 드러낸다. 그러나 대기업이나 금융기관이 방만 경영을 통한 경영 실패로 부도나 지불불능 사태에 빠지면 정부가 나서서 공적자금 지원에 빨리 나서지 않는다고 아우성을 떨어댄다. 결국 최상위 부자는 자신이 저지른 실패에도 아무런 손실을 입지 않으며 외려 불로소득을 국민세금인 공적 자금으로 향유한다.

 

오늘날의 국가 경제는 선진 유럽국가들은 물론 미국에서조차 공기업 민영화에 대한 반성을 시작으로 경제적 지대, 독점 지대의 초과이익에 대한 과세 등 국가주의적 경제정책으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양극화라는 불평등의 문제에 앞서 이러한 불로소득 경제가 실제 자국의 산업경제의 몰락은 물론 성장에 실제 도움이 되지 못함을 인식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권력은 반동적으로 역류하려 하고 있다. 대체 문명이란 무엇이고 야만이란 무엇인가?

 

우리사회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 금융자본주의의 배후에는 이러한 심각한 문명적 위기가 깔려있음이다. 대중들, 특히 자신을 중산층이라 여기는 사람들, 자신들이 피라미드의 저 최상층에 도달하리라는 환상에 사로잡힌 계층들은 부동산과 주식, 채권 등 이러한 경제지대를 수취함으로써 야만적 경제를 수호하는 세력이 되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경제적 몰락을 재촉하는 길일 것이다. 정책과 법률은 1퍼센트를 위해 항상 조작되고, 결코 몫은 돌아오지 않는다.

 

아마 이 책을 읽게되면 경제적 불평등과 공정한 조세정책, 국제 교역 정책의 진실을 새로운 가치관으로 바라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또한 오늘의 우리 경제는 물론 수없이 자행되는 미국의 일방적 경제외교로 발생되는 국제갈등의 본질을 이해하는 기회가 되어 줄 것이다. 우리는 어느 길을 선택할 것인가? 금융자본주의가 지향하는 신자유주의의 길을 걸을 것인가? 그 길은 우리를 어떤 상황에 내려놓을까? 빈곤과 야만을 선택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강력하게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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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지대(地代): 금융이자, 임차료, 주식 및 채권차익, 독점지대 이익, 면제된 법인세, 정부 보조금, 각종 공적 구제자금 등 노동없이 발생하는, 경제기여 없이 공짜로 취득하는 일종의 불로소득을 일컫는다.

 

부채디플레이션: 물가 하락으로 실질금리가 상승하면 채무부담이 커지고 결국 빚을 갚으려고 담보로 맡긴 자산을 처분해 다시 물가하락 압력으로 작용하는 현상을 말한다. 부채 디플레이션이 발생하게 되면 신용의 축소로 인해 자금의 원활한 흐름이 막히게 되어, 자금이 흘러야 하는 곳으로 제대로 흐르지 못하고 안전한 곳으로만 몰리게 되어, 자금을 구하지 못한 시장 참여자들은 자금을 구하기 위해 부동산이나 주식 등을 매각함으로써 물가하락을 유발시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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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대학살 현대의 지성 94
로버트 단턴 지음, 조한욱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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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포용하는 사회영역의 포괄 범위에 따라 거시사와 미시사로 구분한다. 즉 정치에서부터 경제와 법률, 문화, 과학 등등의 영역을 아우르는 역사를 거시사, 우리네가 늘 접하는 통상의 역사이고, 이들 영역에서 하나의 영역에 세밀한 연구를 수행한 것을 미시사로 부른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책은 18세기 프랑스 미시사이다. 볼테르, 루소, 디드로, 달랑베르가 살던, 소위 계몽주의가 대두하던 시기의 오늘날 프랑스라는 단일의 영토국가로 불리는 지역의 사람살이를 추적한다.

 

그것은 농민의 목소리가 배어있는 민담이고, 어느 인쇄공의 이야기이며, 중산계급이라 자부하는 어느 슬기롭지 못하고 아둔한 부르주아의 설명서이고, 문필가들의 사상 검증을 위해 명부를 작성한 하급 경찰 조사서이며, 어느 독서가의 도서주문 편지이다. 이를 통해 당대 프랑스의 사고방식을, 즉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들의 지성사를 연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서술을 망탈리테(mentalite)의 역사라 부른다. 사회문화 현상의 바닥에 자리잡은 인간집단의 무의식, 시대의 개인들이 공유하는 집단적 의식, 다시말해 표면적으로 떠올라 가시화되지 않아 인지되지 않았으나 실제 광범위하게 인간들의 삶을 지배하는 정신의 역사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책은 마더구스 이야기와 같은 당대 민담이나 도서 주문 편지, 경찰의 조사서, 중산계급임을 자부하는 인물이 쓴 도시 설명서 등 아카이브(문서고)를 각기 바탕으로 한 여섯 꼭지의 미시사 연구로 구성되어 있다. 이 무관해 보이는 각각의 이야기들의 저류에 흐르는 당대 인간들의 정신을 관통하는 하나의 거대한 정신사를 우리는 직조해 낼 수 있게 된다.

 

미시사가 아름다운 것은 마치 저 위에서 조망하듯 지배자의 총합적인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거시사의 오만함이 아니라 당대 세계의 다수자인 대중이라는 존재들의 진실된 삶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와 아주 유사한 그 평범성에 내재하는 속성들, 그들의 삶의 방식과 지혜를 바라보는 일은 새로운 깨달음이며 즐거움이기도 하다.

 


책의 제목인 <고양이 대학살>의 논의에 앞서 저자는 역사적 문서로서의 민담을 우선 살펴본다. 이것은 이유가 있는 배치인데, <장화신은 고양이>처럼 민담이 이야기하려는 했던 것들을 시대의 사회상 반영으로 해독하여 왜 고양이를 대학살해야 했는지, 그 저의(底意)를 보다 내밀하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민담은 밑도 끝도 없이 임의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항시 기존 사회질서 속에서 경험된 것들의 어떤 공통적 근거를 표현하는 것이다. 때문에 민담은 사실상의 역사적 문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저자는 루이 14세의 권위주의적 문화정책 입안자로서 농민 문화에 일말의 동정심조차 보이지 않았던 페로의 민담집처럼 기득권자의 교만한 훈계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농민판본에 의거한 원색적이고 날것인 이야기를 토대로 한다.

 

빨간 모자, 엄지 소년, 신데렐라, 잠자는 미녀, 장화신은 고양이,... 등 이야기를 독일과 프랑스의 서로 다른 판본을 비교 분석하며 18세기 대중인 농민들에 깃든 의식, 그 본질을 길어 올린다. 프랑스의 민담은 동일한 소재의 이야기에서 독일과는 아주 다른 과정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독일의 민담에서는 콩나무를 기어올라 닿은 공상의 세계에서 거인을 죽이지만 프랑스인들은 현실적 배경에서 기지와 교활성을 통해 거인을 처단한다. 빨간 모자역시 소녀는 늑대에게 잡아먹히는 것으로 끝나며 불가해하고 비정한 세계에 어떠한 포장도 하지 않는다. 신데렐라의 프랑스 판본인 작은 아네트에는 영양실조를 두드러지게 묘사하여 이를 제외한 판본들과 다른 현실을 보여준다. 오늘날 우리는 이들 민담의 주인공이 이루어 질 수 있는 소원의 권리를 취득했을 때 고작 음식을 말하는 것에 공감하기 어려워한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 농민들의 상상 속에 어른거리는 일차적 즐거움은 식욕이 고갈될 때까지 먹어보는 것이었고, 실상 그들은 죽을 때까지 이를 실현시키지 못했다는 진실이다.

 

민담의 도처에 등장하는 그 많은 계모와 의붓자식의 박대, 연약한 아이에게 초인적인 일을 던지고 끝내놓으라는 명령들의 이야기는 실재하는 당대의 현실의 반영이었다. 18세기 여러 문헌들은 프랑스인의 40%10세 이전에 죽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성직자와 귀족은 빠진 채 농민에게만 부과되던 악명 높은 타이유(taille)부터 기근과 흉작으로 인한 빚더미와 이에따른 노역으로 극빈으로 내몰려 길에 떠돌던 절박한 영혼이 수백만에 달했음의 투영이기도 하다. “보잘 것 없는 몸이 보잘 것 없이 죽었다.”, 따라서 모든 곳에서 계모가 급증했으며, 고아와 의붓자식이 방치되고 넘쳐났다.

 

세계는 냉혹하고 마을은 야비하고 인류는 악당으로 가득 차있다면 농민 대중은 무엇을 해야 했을까? 프랑스인의 독특한 세계관은 이를 도피로 해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세상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이해하고 그 세상에 대처하는 전략을, 그 경계표시를 민담으로 이야기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네들의 이야기에는 어떠한 우둔함에도 동정을 보이지 않으며, 멍텅구리라는 단순성은 죄악의 전형이며 치명적 죄악으로 인식했다.

 

그들에게 순진함이란 재앙으로 가는 초청장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상은 고되고 동료 이웃의 이타심에 대해 어떤 환상도 갖지 않는다, 작은 것이나마 지키기 위해서는 명석한 두뇌와 재빠른 기지가 요구된다는 것, 도덕적 고결함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이기에 냉소적 초연함이 민담의 분위기를 장악한다. 미몽에서 깨어날 것! ‘장화 신은 고양이의 꾀바름은 이렇게 출현한다. 결코 추상을 다루지 않으며 현실적 삶의 기지와 그 경계를 경고한다. 그렇게 그들은 이야기를 통해 세상에 모욕을 가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라블레식 웃음으로 파안대소하며 현실의 삶으로 되돌아 올 수 있는 동력을 얻으며.

 

고양이 대학살이라는 주제는 이렇게 이어진다. ‘작은 사람들(menu peuple)’큰 사람들(les gros)’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역사의 표현으로서 인쇄소 직공들인 노동자들의 폭동이야기가 된다. 18세기의 노동자와 부루주아 사이에는 일과 음식과 잠이라는 아주 기본적인 삶의 요소에서 커다란 운명적 불균형이 놓여있었다. 고용과 해고는 대단히 빠른 속도로 이어져 일주일후에도 같은 사람이 남아있는 경우가 없을 만큼 폭력적이었다. ‘퇴니스공동사회와 이익사회에서 산업화 이전 사회를 미화하여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당대는 공동체의 가치를 우선하는 공동사회였다.”고 말이다. 이런 낭만적 헛소리를 학교에서 배우고 자랐다. 삶이 비정한 죽음과의 투쟁이었음에 눈을 감는, 지배권력을 위한 학자의 글이 여전히 득세하는 오늘의 세계 또한 혐오스럽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고양이 대학살은 생세브랭 가() 자크 뱅상 인쇄소에서 일어났던 일을 기록한 인쇄소 직인이었던 니콜라스 콩타가 전하는 일화이다. 당대 분위기는 이렇다. 부르주아와 노동자는 이미 완전히 다른 문화권에 속한 종()이었다는 점이다. 계급의 분할 기준인 특징은 부르주아는 일하지 않는 것으로 규정되었다는 것이다. 인쇄소 주인부부는 실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며 늦게까지 잠을 자며, 견습공들은 물론 직인과 장인(匠人)조차도 주인이 기르는 고양이가 먹고 남은 쓰레기 같은 음식을 먹어야 했으며, 하늘이 바라보이는 천장에서 오들오들 떨며 서로 몸을 붙이고 가까스로 불편한 잠을 자야했다. 더구나 밤마다 울어대는 주인부부가 기르는 25마리의 고양이로 인해 짧은 수면조차도 불가능했던 이들은 지혜를 짜낸다. 주인부부가 자는 본채의 지붕 위에서 고양이 울음소리를 내서 주인부부의 잠을 방해한다. 이윽고 주인의 부인은 이들에게 고양이를 처치하라고 명령한다.

 

인쇄소 직공들은 이 명령이 떨어지자 부인이 가장 아끼는 고양이부터 시작하여 무차별적으로 학살한다. 이 살육의 향연 이야기에는 무수한 상징이 가득한데, 이들 노동자의 행위는 그래서 더욱 재미있다. 혹자는 동물에 대한 잔혹행위라고 오늘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가학적 환상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을 테지만 고양이 죽이기는 17세기 초부터 19세기 말까지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대중문화의 깊은 조류중 하나의 표현이었다. 노동자들은 그들 문화의 주제를 가지고 유희를 함으로써 부당하고 불의한 부르주아를 드러나지 않게 모호하게 공격한 것이다. 당대에 고양이에게 부여한 의미는 마법, 광란, 오쟁이 지기, 학살, 유혹, 강간, 살인...등이었다. 그들은 사회질서 전체를 조롱하고 축적된 분노를 슬기롭게 발산한 것이었다.

 

인쇄소 사장 부인이 애지중지하던 고양이를 제일먼저 처단함으로써 그녀의 약탈적 성욕에 은밀히 혐오와 멸시로 답했으며, 한편으로는 오쟁이 진 사장의 멍청함을 조롱한 사건이기도 하다. 이 일종의 성()과 유혹의 카니발은 폭력의 언저리에 억압된 감정을 희롱했던 유머의 한 형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상징적 능욕을 가함으로써 그들은 한바탕 무릎을 치고 배를 잡는 라불레식 웃음을 지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주목할 부분이 있다. 인쇄 노동자들의 이러한 폭력성 분출에는 다가오는 민중 봉기의 징후가 서려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1789년 대혁명의 씨앗은 이렇게 농민, 노동자에게서 싹트고 있었다. 누구도 예견하지 못했지만 18세기 프랑스 사회는 갈라치기의 잔혹함, 냉혹한 배제, 참담할 정도의 가렴주구가 만연한 사회였음을, 이러한 양상이 광범위하게 대중의 의식에 확산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자신을 부르주아로 인식하는 인간은 당대의 사회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1768년 자신이 살고있던 도시 몽펠리에를 자부심 가득한 어조로 쓴 도시설명서에 나타난 한 견실한 중산 계급 시민의 가치관과 관념을 해독한다. ‘몽펠리에 퍼레이드라는 도시의 대행사에 대한 세밀한 기록으로부터 시작되는데, 행진 순서에 따라 참가한 인물들에 대한 칭호, 특권, 수입, 기능까지 일일이 열거하여 도시사회의 집합적 질서와 인간 희극의 복잡성과 모순의 극치를 보게 한다. 이 부르주아는 행진의 순서인 명예와 품격이 실질 권력과는 일치하지 않음을 도처에서 드러내며, 신분을 구별하는데, 부르주아는 제 2신분으로서 정직한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반면 제 3신분인 평민은 본연적으로 악하고 방종하며 폭동과 약탈을 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그들 위치에 제한시켜야 되며, 아니면 추출하거나 교수형에 처하여 제거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부르주아인 자신의 신분을 정의할 때조차 적대적 이웃 신분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함으로써 부르주아의 권위를 정당화한다. 특히 제 3신분의 부르주아화()를 극도로 경계하며 혐오감을 보이고, ‘떨거지 출신이라 비하하는가 하면, 자율적 선출을 통한 정치적 집합의 움직임에 경악하기도 한다. 특히 제3신분의 아이들에 대한 교육 기회를 맹비난하며 사회질서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며, 그들에 대한 교육기회의 폐지를 주장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부유하고 잘 먹고 깔끔하게 입으며 확고한 인식을 가지고 있음에 기뻐한다. 동료 시민을 분류하려 시도하며 자신의 도시성에 행복해하는 18세기 중산층의 인간상을 바라 불 수 있는 특별한 사료이다.

 

이 같은 몽펠리에의 한 부르주아의 관념은 앞선 농민과 노동자의 분노가 근거없는 것이 아니라는 증거가 될 것이다. 물론 당대 부르주아의 정신이 모두 이러한 이념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것은 과도한 일반화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사실의 존재가 공개적으로 표명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리 폄하할 이해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계층 간의 분열이 가진 자들에 의해 극단적으로 획책되고 보다 악질적으로 누적되고 있었음이다.

 

이것은 한 서적거래 수사관의 500명에 이르는 문필가들의 조사보고서에 의해 당대 지식 사회 계급간의 관계성을 통해 또다른 차원의 확대된 갈라치기 된 사회상을 엿보게 된다. 파리의 이 하급 경찰관은 지식인을 걸러내어 명부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일종의 스토리텔링을 포함하는 전기적 단평(短評)의 성격을 지닌, 즉 문학적 감수성과 관료적 질서가 기묘하게 결합된 서류라는 점이다. 이를 통해 당대 문필가들의 지위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했는가, 그런 것이 없었다면 그들의 생의 실존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대체 이러한 명부가 왜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는 열쇠가 된다.

 

18세기 프랑스 문필가, 즉 글쓰기는 독자적 직업이나 별개의 신분으로 여겨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서적상의 독점과 해적 산업으로 책으로 수입을 기대할 수 없었기에 그들은 필수적으로 보호의 그물망, 일종의 후견인을 갖지 못하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실상이었음을 알게 된다. 소설 마농 레스코의 작가 아베 프레보(Abbé Prevost)’는 법원 관리로서 원장 신부 생활에서 나오는 돈으로 생활을 유지했다. 문필가로서 살기 위해서는 그들이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몇 푼의 돈이 나오는 직업을 줄 수 있는 후견인이 반드시 필요했다. 후원자의 시혜에서 나오는 후원은 문필 공화국의 일용할 양식과 관련해서 가장 중대한 요인이었다.

 

단지 먹고사는 것도 그만큼 용이하지 않은 시대였음을 의미할 것이다. 문필가들은 누군가에게 보호받고 그 권위를 이용해 다시 누군가를 도와주는 그러한 커넥션으로 유지되는 체제였다는 점이다. 만일 이러한 체제의 중심 권력을 풍자하거나 조롱하면 바로 이 사상검증의 공권력에 의해 바스티유로 직행하게 된다. 이 기본원리를 벗어난 문필가들은 살기 위해 불가피하게 부수적 활동을 하게 되고, 이는 곧 감옥행으로 이어지곤 했으니 1789년 이전에 바스티유는 급진적 선동의 상징적 의미로 이미 가득 차 있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볼테르를 비롯해 극작가 샤를루아 등이 귀족들의 하인에게 매질을 당하거나 죽도록 얻어맞는 일이 빈번했던 것처럼 문필가란 보잘 것 없는 하나의 재주에 불과했으니 이들이 기존의 지식에 대한 일반적 관념을 재구성하려 했던 백과전서파로 불리는 계몽주의자들의 삶이 얼마나 험난했을까는 상상을 초월하는 위험의 걸음이었을 것이다.

 

디드로와 달랑베르의 <지식의 나무-세부화된 인간 지식의 체계>, P340에서


디도로와 달랑베르를 중심으로 하는 백과전서의 내용을 오늘의 시선으로 읽게되면 그 지루함으로 왜 이 저술이 그토록 역사성을 지닌 책일까 물음을 갖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이들이 지식의 낡은 질서를 해제시키고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 사이에 새로운 금을 그으려고 시도했다는 점에 있다. 지식의 경계선을 새롭게 그으려 했던 것이다. 기독교의 엄중한 지식이 지배하던 낡은 지식의 분류를 해체하고 새로운 지식의 분류를 정립하려는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즉 금기(taboo)를 건드리는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오늘날 우리들이 배우는 지식의 분류체계는 이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도전은 어느 시기에나 기득권의 잔악한 방해를 받게 된다. 사실 그 어떤 질서가 고정된 진리라 하겠는가. 모든 질서는 임의적이라는 사실을 의식하도록 만든 어쩌면 최초의 시도였는지도 모르겠다. 책은 이렇게 민담에서 시작하여 백과전서의 이야기를 통해 18세기 프랑스 민중의 역사를 파헤친다. 농민, 노동자, 부르주아, 귀족과 왕정의 이데올로기, 무의식과 현실의식이 어떻게 이들을 지배하고 있었으며, 그것이 마침내 민중의 봉기로 이어지는 과정의 한 정면들이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마지막 여섯 번째 미시사를 여는, 독서가의 도서주문 편지를 통해 읽기의 실제로부터 당대인의 생각하기를 도출한다. ‘문화=부패라는 문학적 문학의 유형을 만들어내 교양인에 호소했던 장자크 루소의 고백록신엘로이즈에 열광했던 18세기 프랑스인들의 내밀하고 진솔한 감정의 메마름을 엿보게 된다. 진실하고 순수한 영혼에 대한 갈망, 그러한 영혼과의 연결에 대한 희구, 저자의 내면까지 관통하도록 장려하는 독서의 이야기가 마지막 장을 수놓는다.

 

지배적 가치에 대한 반기를 들었던 루소의 소설이 1800년 이전까지만 70개 판본이 출시될 정도의 베스트셀러였다니 당시 대중의 정신은 이미 혁명에 가닿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갈라치기, 자기와 다른 이들의 배제와 억압, 다시금 69시간 노동을 외치는, 그리곤 공기업의 사영화를 통한 시민 삶의 빈곤화를 종용하는 퇴행적이고 사악한 권력을 마주한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이 18세기 미시사는 많은 깨달음과 지혜, 그 길로 통하는 어떤 모티프를 발견하게 한다. 고양이 대학살의 이야기를 반복하며 호탕하게 웃는 노동자들의 유머가 유독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 냉소적 초연함으로부터 기지와 지혜를 도모했던 18세기 프랑스 대중으로부터 모처럼 진짜 인간들의 역사를 배운다. 이제 현실로 돌아올 시간이다. 역사가 지시한다. 혁명, 민중의 봉기는 기어이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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