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몰리션 엔젤 모중석 스릴러 클럽 28
로버트 크레이스 지음, 박진재 옮김 / 비채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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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션 스릴러물에 이렇게 감성이 촉촉하게 흐르고, 인물들에 연민이 가는 작품도 그리 흔하지 않을 것 같다. 그렇다고 긴장감이나 냉혹한 범죄의 그림이 소홀하다거나 취약한 것이 아닌 것은 물론 여느 유사 작품보다 세밀한 감각적 강박을 종용하고 있어 묘한 쾌감을 지속시킨다. 특히 폭발물처리 수사반원의 죽음과 교활하기 그지없는 폭탄 연쇄 살인범, 이를 쫓는 여성 수사관 ‘스타키’의 조합이라는 비교적 신선한 소재가 몰입의 강도를 한층 부추긴다.

늘 겪는 것이지만 두 눈 부릅뜨고 작가가 얼기설기 엮어놓은 복선들 중에서 암시를 읽어내려고 하지만 결국은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서야 머리를 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독자의 한계인 모양이다. 몇 차례의 절묘한 반전과 마주하게 되는데, 이 반전으로 야기되는 사회적 정의와 사적 연대성의 충돌이란 딜레마는 인간성의 반응을 주목케 하는 힘이 되어 더욱 이야기에서 이탈하지 못하게 한다.

또한 전직 폭발물처리 수사반원으로서 사랑하는 남성 동료를 잃은, 그리고 폭발사고로 심각한 신체적 손상과 정신적 후유증을 겪고 있는 여성 수사관의 자기 치유를 향한 내외적 심리와 행동의 균형을 위한 여정이란 플롯도 하나의 축이 되어 수사관이란 사회적 존재가 아니라 평범한 개인, 하나의 성(性)으로서의 고유한 감성적 본질을 비춘다. 이것은 또 한명의 여성 동료 수사관이 엄마로서, 여인으로서 가지고자 하는 소박한 희망에서 조차 괴리된 고달픈 직업인이자 생활인으로서의 삶에 대한 히스테릭한 고백과 같이하여 인간적 친밀감을 보탠다. 
이처럼 소설은 다채로운 윤리적 의제들을 양념처럼 흩뿌려 놓아 스릴러물이 자칫 허무한 재미에만 방치되는 경박함을 극복하고 세련된 구성으로 탄탄하고 매력적인 지적 독서물로 바꿔놓고 있다.

폭발물 처리요원이 폭탄 해체를 위해 정확하게 폭탄의 위에 몸을 구부렸을 때 누군가에 의해 계획적인 원거리 조정에 의해 폭발한다. 휴지처럼 너덜너덜해진 채 처리수사관은 사망하고, LA경찰국 범죄음모수사과는 긴급히 여형사 스타키를 팀장으로 수사팀을 구성한다. 여기에 연방특별수사요원 ‘잭 펠’이 가담하면서 수사관 한 사람을 죽인 단순 폭탄범죄에서 연방범죄 사건으로 확대된다. 가공할 만한 폭탄제조와 흔적조차 없는 찾을 수 없는 완벽한 연쇄 폭탄범, ‘미스터 레드’라는 미지의 범죄자를 추적하게 된다. 전설적인 인물, 폭탄 범죄자들에게는 신격화되어 숭배되는 미스터레드와 스타키의 한 판 두뇌게임이 시작된다.

변화무쌍한 변장으로 누구도 그 얼굴과 본명을 알지 못하는 범인, 이러한 인물로 접근하기위한 스타키의 저돌적 추진력은 조금씩 그 거리를 좁혀간다. 그런데 이러한 수사 과정에서 작가의 중대한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정신적 불안정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스타키에게 지속적인 신뢰를 보내주는 상관, 자신의 완결된 수사에 하자를 인정하는 꼴이 되는 완결 사건 담당 수사관과의 우호적 관계성으로의 변화, 적대적이고 뒤틀린 동료수사관과의 감성적 교감의 교환, 자신의 마음을 여는 것으로부터 얼어붙고 상처 난 마음이 치유될 수 있음과 같이 인간의 관계성이 시련과 장애를 넘어서는 요인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수사권을 빼앗길 수 있는 순간에 도움을 받고, 수사 방법론의 부도덕성으로 퇴출당하는 처벌의 상황에서 사건해결의 유일한 담당자로서의 지위를 인정받는 것이다. 물론 내적 상흔이야 자신만이 극복할 수 있는 주체이지만 이러한 자기치유 과정과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복귀를 돕는 것은 주변 사람과의 관계, 인간적 신뢰의 회복, 사람에 대한 믿음과 사랑일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이 작품의 작품성을 더욱 빛나게 하고 있으며, 숨 막히는 범죄자와의 대결이란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에 매혹을 더해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엎치락뒤치락, 그 진실의 끝을 가까스로 확인하게 해주는 이 소설의 얄궂음조차 먼 길 돌아와 비로소 사랑의 손길에 숨을 헐떡이는 여형사‘스타키 캐롤’의 행복한 모습에 눈 녹듯이 사라진다. 직업으로서의 수사관, 특히 폭발물 처리반과 같이 위험이 항시 상존하는 경찰관이 겪어야 하는 반복되는 육체와 정신적 긴장과 상처를 보기 드문 폭탄의 세계라는 소재에 세밀한 터치를 통하여 긴박감 넘치는 이야기 구조에 멋지게 버무려낸 스릴러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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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인종의 요리책
카를로스 발마세다 지음, 김수진 옮김 / 비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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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요리, 섹스, 살인”, 이 세 단어만큼 탐욕으로 똘똘 뭉친 어휘도 없을 것이다. 이 낱말들의 심연에 똬리를 틀고 있는 본성에는 허기진 무언가를 채우려는 욕망이 가득하다. 적절히 통제되거나 금지되지 않으면 사악해지고 마는 것. 그러나 교활한 인간은 우아하고 세련된 감각으로 이것들을 고상한 무엇으로 바꾸어버렸다.
우리들을 에워싸고 있는 오늘의 매스미디어가 뿜어내는 프로그램의 구성이나 그 내용만으로도 요리와 섹스가 얼마나 넘쳐나는지, 그러나 짐짓 점잖은 채, 혹은 그것들이 내재하고 있는 은폐된 의미가 무엇인지 모른 채 본질을 외면하고 포장하여 추악한 욕망을 감추는 위선에 몰입한다.
작금의 요리와 섹스의 과잉, 그 과도함은 아마도 광신적이라 해도 부족한 표현일 것이다. 이 과잉의 추구는 누군가를 끊임없이 죽음으로 내몬다. 가히 폭력적이다. 이것은 관념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실체적으로 이어진다. 자신들의 욕망을 가로막는 장애, 그것이 제도가 되었든, 윤리의식이 되었든, 사람이나 사물이 되었든, 그 어떠한 유무형의 실재가 되었든 제거 대상이 된다. 이를 부채질하는 자본가와 정치권력, 그리고 하수인 노릇을 하는 우매한 작자들의 탐욕이 만들어내는 형상이다.

아르헨티나의 작가 ‘카를로스 발마세다’는 이것들이 발산하는 광기에서 권력의 사악한 본질과의 ‘유사성’을 보았던 모양이다. 또한 허영심으로 뭉쳐진 인간들의 그칠 줄 모르며, 제어되지 않는 충동으로서의 욕망, 그 역겨움을 지적인 독자들과 함께 조롱하며, 위태로운 세상에 대한 문제의식을 나누고 싶었던 것 같다.

소름끼치게 재밌는 악마적 매혹의 이야기

인간의 오감을 자극하는 최상의 요리, 미각과 향미로 이루어내는 무한 마법, 그 절정의 쾌락이 섬뜩한 아름다움으로 그려져 있다. ‘마르텔 플라타’라는 남부해안도시에 위치한 레스토랑 ‘알마센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배경으로 70 여년 4대에 걸쳐 펼쳐진 비극적인 가족사에 권력과 계급적 도약에 탐닉하는 야만적이고 비열한 탐욕과 그 잔인성, 천박성이 경박하지 않은 진지한 풍자와 은유로 버무려진 매혹적 이야기다.

어미의 젖을 물고 있던 아기, 어미의 젖꼭지를 뜯어내어 입속에 오물거리며 그 식감을 헤아리는 첫 장면의 잔혹한 풍경은 아기의‘입’, ‘피와 미각’에 담긴 풍부한 다의성으로 가히 예술적 상상력의 극치를 보여주며, 독자를 압도한다. 아기의 입은 ‘들뢰즈’가 말한 다양체를 떠오르게 한다. 젖을 채취하는 입이자, 성애의 입, 그리고 미각과 폭력성이 일탈과 통합의 복합체로서 하나의 개념으로서가 아닌 물자체를 조명하게 하는 것이다. 세상, 현상, 인간, 사물의 협소한 인식을 넘어 그 본질, 본체라는 전체적이고도 고유한 남김 없는 이해를 가질 것을 제안하는 것이라 하겠다.

어미의 몸을 뜯어먹고 산 아이, 술주정뱅이로 권력의 아첨꾼 장례행렬을 들이박고 황당하게도 강력한 테러리스트 도당으로 변질되어 죽은 아비로 인해 고아가 되어버린 ‘세사르 롬브로소’는 어미의 사촌여동생 부부에 의해 양육된다. 화려하고 찬란한 요리, 시대와 가족사의 형식을 그대로 대변하는 매개체로서 <남부 해안지역 요리책>은 소설전체를 관통한다. 이것은 가문과 역사의 영욕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상징체이다. 알마센의 부흥을 이루어낸, 사람들의 미각을 사로잡았던 레시피의 기록물이지만 그것이 이룩한 성공, 즉 권력자들의 사랑은 정권의 교체마다 참혹한 나락이 된다. ‘단절과 연결’이란 결코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본질이라는 의미이다.

롬브로소 가문의 유일한 명맥인 세사르 롬브로소, “피가 질러대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애절한 절규”, 그것은 롬브로소 가문의 증거인 <남부 해안지역 요리책> 이기도 하다. 세사르의 이 레시피에 대한 광적 탐닉은 온통 인육 맛, 인간의 피 맛을 본 약탈자들이 우글거리는 아르헨티나 정국의 악마적 육식문화, 오늘의 우리사회와 닮아있다. “머리보다 위가 훨씬 더 많은 것을 명료하게 이야기”해준다는 조롱처럼, 뱃속의 탐욕만큼 인간을 적나라하게 설명하는 것도 없을 것이란 말이다.

젊고 아름다운 외모를 한 세사르의 관능을 자극하는 이모, ‘베티나 페리’의 비도덕적 정염, 그것은 “오물과 고름으로 가득 찬 병적인 사랑”으로 치닫는다. 두 사람의 은밀한 정사, 그 열락의 현장을 목격하게 된 베티나의 남편은 살해되어 세사르의 민활한 칼질에 의해 고기로 저며진다. 레스토랑 알마센에 걸린 특별메뉴를 찾아 날아든 손님들의 면면은 정치최고위원, 의원들, 졸부들, 고위공직자, 야심을 불태우는 권력의 조력자, 방송국 임원들...영혼을 팔아버린‘도리언 그레이’ 같은 인간들이다. 게다가 이 인육의 향연은 살인의 은폐를 위해 또 다른 살인으로 이어지고, 그야말로 최고의 코미디가 벌어진다. 인간을 먹어대면서 “성부의 은혜로 모여 음식을 나눈 이들의 영혼을 정결케 해달라고 간구”하는 신부와 정치가의 끓어오르는 감동의 연설을 뱉어내는 장면은 이보다 희극적 일 수 없는 것이다. 채식주의자의 탈을 쓴 흡혈귀들, 범죄자가 순교자가 되며, 영혼을 짓밟은 인간들이 성자가 되고, 권력의 하수인이 미화되는 이 세상의 잔혹한 일면이다.

부패하고 몰염치한 권력의 “문둥병과도 같은 경박함에” 국민전체가 물들어 버린, 신자유주의 물질만능에 대한 광적 숭배에 물든 소비지상의 우리사회, 아니 이 세상의 역겹고 추악함의 우아한 동화이다. 썩은 권력과 결탁한 자본가가 열심히 재촉하는 상식의 파괴와 영혼의 상실이 요리와 섹스에 어둡게 내려 앉아있다. 모두를 죽음의 그 어두운 심연, 공멸의 시공을 앞당기기 위해. 감각의 극한을 넘어서는 지고한 예술의 경지, 최고의 창조적 상상력이 빚어낸 아찔하고 감미로운 이야기 속에 무진장한 비판적 사색이 담긴 절대 걸작이다. 그리고 한 편의 거대한 인간의 욕망사(慾望史)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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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사랑
미셸 투르니에 지음, 이원복 옮김 / 섬앤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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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백년전쟁의 영웅인 동레미의 어린 목녀(牧女)인 성(聖)‘잔 다르크(Jeanne)’와 프랑스군의 원수(元帥)로서 잔과 함께 오를레앙 등에서 전승을 거두었던 전쟁 영웅이었으나 남색과 아동살해로 이어지는 기이한 쾌락의 추구로 악명을 떨쳤던‘질 드 레(Gilles)’백작을 인간의 속죄와 구원이라는 양식에 함께 담아 인간사회의 부조리와 인간 존재의 본원적 의식을 통찰한다. 특히 질드레에 투영된 다층적 인간상은 서로 공존할 수 없을 것 같은 악마성과 구도자적 성향의 교착을 보여주고 있어 아찔한 매혹과 성스러움, 그리고 고통스런 충격의 그 어떤 혼합된 모호함의 세계로 빠져들게 한다.

투르니에의‘방드르디’로부터 그가 갈망하는 인간상(像), 근원적으로 회귀하여야 할 자연으로서의 인간, 어떤 의미에선 니체의 영원회귀를 떠오르게 하는 그런 궁극적 지향의 이해는 생명과 죽음, 순수성과 열정의 분리 할 수 없는 합일이라는 일관된 의지를 여기서도 확인하게 된다. 또한 인간의 탐욕스런 욕망이 만들어내는 도덕적 상처, 즉 물신숭배라는 인간의 이성과 괴리된 동물적이고도 본능적인 귀결을 생생한 형상으로 축조하여 악성(惡性)과 양성(良性)의 전위를 오가며 인간 구원의 가능성이란 진정 어려운 물음을 생각게 한다. 철학을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흥미로운 이야기의 세계로 끌어들여 철학적 사유를 하게하는 투르니에의 작품세계는 이 때문에 발을 빼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어떤 마력을 가지고 있다하겠다.

성 미카엘과 성녀 카트린의 음성, 다시 말해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잔다르크의 조국 프랑스와 샤를르 황태자의 왕위 복권에 대한 충성과 소명의식은 당시 기독교의 권위에 복종하던 시대로서는 그 자체로 이미 성스러운 것이다. 오를레앙 전투의 승리, 그리고 샤를르에게 대관식을 선사함으로서 신의 음성을 이행하지만, 세상이란 그리 순수하고 단순하지만은 않다. 개인과 집단, 국가의 이기적 욕심을 위한 기만적인 협력과 배신, 음모와 질시가 따라 다닌다. 프랑스에서 영국과 그에 동조하는 세력들을 몰아내기 위한 잔(Jeanne)은 콩피에뉴 전투에서 적에게 사로잡히고 마침내, 루앙에서 마녀로 유죄판결을 받고 화형에 처해진다. 이러한 잔의 숭고한 정신, 성스러움에 매료된 질(Gilles)은 그녀의 구원을 위해 노력하지만 실패로 돌아가고, 루앙에 잠입한 그는 그녀가 예수를 부르짖으며 화형당하는 참혹한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화형은 양성의 악성으로의 전위이다. 성인을 마녀로 둔갑시킨 이 세계의 사악함, 기독교의 음험함, 바로 세상에 대한 절망감이다. 신앙심을 상실하고 깊은 상처를 받은 질드레 백작은 이 같은 인류의 도덕적 상처에 대한 치유의 방법을 찾지 못해 갈등한다.

 치유, 구원에 이르는 방법, 그 공정(工程)은 질드레의 기이한 행동양식으로 나타나는데, 일종의 연금술에 정신을 포획당하는 것이다. 연금술의 등장은 그야말로 투르니에 다운 은유라 할 수 있다. 금을 만들기 위한 인간의 속물적 행위로서 이는 화폐, 금융시대로의 이행을 의미하며, 르네상스라 불리는 예술과 물질의 풍요를 상징하는 피렌체를 시간적, 공간적 배경으로 도입함으로써 허영과 욕망의 의미를 더한다. 또한 질드레의 부서진 사랑에 대한 영속화를 위한 구원의 길로의 인도라는 치료과정으로서의 방법론이기도 하다. 그런데 바로 이처럼 연금술이 내장할 수밖에 없는 탐욕스러움과 사악함의 기운이 신비로운 것은 선과 악, 삶과 죽음, 성덕과 영벌을 오간다는 것이다.

즉 질드레의 연금술이란 사탄인 바론에게 아이들의 피와 심장, 팔다리를 바침으로서 성녀 잔에게 다가가는 구원의 길을 찾겠다는 것이다. 화형대위에서 불타죽은 잔처럼 아이들을 불태우는 것, 또한 아이들의 순진함, 생명력, 아름다움을 자신에게 합체시켜 동일화하는 것, 즉 영원성으로의 회귀이다. 완벽한 연금술이지 않은가? 또한 질드레 백작은 잔을 불러내는 일종의 위령제로서 엄청난 규모의 의식을 거행하는데, 소위 바타이유가 말하는 비생산적 소비라는 균형적 순환으로서 파괴가 아닌 영속을 위한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호사취향이나 과시가 아니라 더 나쁜 의도인 희생제의(犧牲祭儀)로서 진행된 것이라고 질드레의 보좌신부의 입을 빌려 발설하는 것에서 이미 역설적 표현인 것으로 악이 아니라 선의 행위로서 이해되는 것이다. 이러한 역설은 질드레의 변태적 쾌락의 추구와 수많은 아이들의 살해 행위라는 악덕이 궁극적으로 자신 또한 화형이라는 속죄의 불을 통해 잔이 있는 세계, 이승의 삶이 아닌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구원을 향한 여정이라는 지독한 역설, 양성적 전위를 낳는다는 데서 거듭 확인된다. 

이것은 사탄은 신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나,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어린 이삭을 자신에게 제물로 바칠 것을 요구하지 않았는가? 와 같은 발칙한 신성모독의 발언처럼, 선과 악의 심오한 유사성을 제기함으로서 오늘의 우리세계가 이와 같은 정신착란의 시대이며, 의식적 삶과 통합되지 않은 인간의 동물성만이 활개 치는 야만적이고 본능적이며 물신숭배에 몰입하고 있는 마성을 지적하는 것의 다름 아니다. 물론 이처럼 명료하기 짝이 없는 어설픈 작품만은 아니다. 인간에게 깊이를 제공하는 죽음, 그 어둠 속에 뛰어들어 어둠에서 빛을 찾으려는 용감한 시도이며, 생명과 죽음이라는 근본적 모호성, 무의식의 중핵인 자기에로의 접근로를 찾으려는 부단한 노력이기도 하다. ‘루앙의 마녀’였던 잔다르크는 오늘날‘성녀 잔다르크’로 불린다. 그러나 질드레 백작은 성인으로 불리지 않는다. 불문(火口)으로 뛰어든 그는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뜻일까? 과연 인간 삶의 정도란 어떤 것일까? 투르니에를 읽으면 번번이 내 본성을 구성하는 것들에는 어떤 이상 징후가 없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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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토
조정래 지음 / 해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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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20세기 근대사는 모멸(侮蔑)의 역사다. 인접국에 침탈당하고, 이데올로기의 최전선으로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으며, 산업화의 명분하에 독재와 민중의 고통스런 희생이 강요되었고, 권력에 눈먼 군부에 의해 민간인의 무참한 학살이 자행되었던 시기이다. 그리고는 마침내 국가경제의 붕괴로 국제긴급구호자금까지 굴욕적으로 빌려 써야하는 참담함과 민중의 또 한 번의 허리띠 졸라매기라는 고통을 통해서야 가까스로 오욕(汚辱)의 20세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1974년 발표되었던 중편을 21세기 초인 2011년 전면 개작하여 발표하는 작가의 의지는 이 모멸과 오욕에 수반되었던 정리되지 못한 찌꺼기를 그대로 간직한 채 은폐하고 오히려 기득세력이 되어 한국사회를 유린하는 인간들에 대한 상기와, 그 상처를 오롯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민중들의 아픔이란 것은 존재한 적도 없다는 듯이 까마득한 망각으로 접어두고 다시금 오욕의 길로 달려가는 이 사회에 대한 경계일 것이다.
한편은 이미 고인이 되었거나 80~90세의 고령자가 된 20세기를 온통 겪어온 우리의 부모세대들에 대한 연민과 그 아픔의 이해에 대한 요청일 것이다. 역사는 결코 단절된 적이 없다. 오늘의 우리와 우리 사회는 역사의 진실들을 자주 잊곤 한다. 가해자가 권력을 가지면 그 사악한 가해의 진실을 숨기고 지워버리려 한다. 우리들의 앞에는 그러한 자들이 활개치고 뻔뻔스럽게 권력과 부를 차지하고 여전히 민중을 기만하고 있다. 동족을 괴롭힌 가장 파렴치한 인간들을 청산하지 못하고 21세기에 이른 것이다.

소설은 이 오욕의 층위들 모두를 자신의 몸에 그대로 새긴 한 여인을 통해 우리 민중들의 고통과 한(恨)을 처절하게 드러내고 있다. 일제 식민치하에서는 황국신민이 되어야 했고, 그래서 침탈자인 일본인들과 민족을 배신하고 그들의 주구가 되어 동족을 궁지에 몰아넣던 앞잡이들로부터 육신과 정신의 희생을 강요당했으며, 해방의 시기에는 미군정(美 軍政)치하에서 물질과 영혼의 혼란을 겪으며, 이데올로기의 분열이 만들어낸 폭력을 그대로 뒤집어써야 했다.
아리따운 열일곱 처녀, ‘점례’, 20세기를 이 땅에서 그야말로 버텨냈다고 말 할 밖에 없는 그녀의 일생을 좇는 일은 차마 못할 짓이다. 우리의 20세기가 그랬다는 얘기다. 억울하고, 분하고, 고통스럽고, 그러나 어디 하소연 할 곳 없었던 바로 우리들의 어머니, 아버지인 대다수 민중의 삶이란 것이 오직 상처의 수용자로서만 존재하였다는 말이다.

왜(倭)인의 겁탈에 저항했다하여 모진 고문과 죽음에 내몰리고, 끊임없이 수탈당하고 착취당하여 가진 것 없는 민중이, 더구나 어린 여성으로서 이런 궁지를 모면하는 길이란 그 선택의 여지가 극도로 협소해진다. 겁박과 죽음에 몰린 부모를 살리기 위해 일본인 주재소장의 성적 노리개가 되고, 원수의 자식을 낳는다. 그리고 맞이한 해방은 그녀에게 외세에 의한 치욕스런 노리개로부터의 탈출이 아니라, 외려 희생자를 왜놈의 처자로 몰아대고 모욕을 주는 구속과 억압의 연장일 뿐이다.
과거의 흠 아닌 흠을 숨기고 결혼하지만 노동자와 농민, 빼앗기기만 했던 민중의 삶다운 삶을 희망했던 남편은 공산주의자가 되어 떠난다. 이데올로기가 만들어 낸 이 땅의 또 하나의 비극이다.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이었던 남편의 신분은 그녀의 삶을 다시금 파괴 하는데, 권력자들의 탐욕을 이념의 대립이란 것으로 덧씌운 파렴치는 공산주의자의 아내였다는 이유만으로 핍박의 대상이 된다.

보잘것없는 권력까지도 약자의 가녀림과 무지를 이용한다. 상황의 불리는 여성을 쉽게 소유하는 방편이 되고, 점예는 다시금 미군의 아낙네가 되는 운명을 벗어나지 못한다. 양갈보, 우린 우리의 형제와 자매의 고통을 지나치게 쉽사리 매도하고, 자신들의 무능과 무기력을 권력자가 아닌 희생자들을 손가락질 하는 것으로 회피하려한다. 식민지약탈자의 노리개로서 출산한 아들, 공산주의자가 되어 떠나버린 남편으로부터 얻은 딸, 미군의 쾌락도구로서 낳은 아들, 이 세 명의 자식은 그녀, 아니 우리들이 겪어야 했던 이 땅의 고통과 모멸의 역사이다. 그러나 우린 이 역사의 상처, 흔적, 의미들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큰 아들‘태순’이 셋째인‘동익’을 향해 내뱉는 빈정거림과 모욕은 그대로 우리와 우리사회의 초상이다. 식민지의 치유되지 않은 태순이란 흔적이 동익이란 서구사대주의를 비난하는 이 아이러니, 또한 혼혈아인 동익의 냉대받는 인간 파편이라는 자기역사의 부정, 어머니 점예와 가족의 부정은 우리의 지배적 의식에 내재하고 있는 몰상식과 몰염치, 은닉된 자기비하의 콤플렉스인 것이다.

정의롭지 못한 사회, 악을 치유하지 않는 사회, 타인의 탓만을 하는 사회, 역사의 진실을 외면하고, 왜곡하는 사회는 결코 오래갈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안으로 계속해서 곪아가다 끝내는 자멸할 것이다. 20세기를 과거사라 치부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이유에서이다. 지금에도 그 욕된 역사는 계속되고 있으니 말이다. 노 작가가 펜을 다시 들어 37년 전의 작품을 오늘에 다시 쓴 이유는 그래서 의미심장하고 시의적절하다. 이처럼 국민적 기억의 망각을 다시 불러내는 것만으로도 우리들의 역사적 이성을 일깨우는 중요한 작업인 것이다. 기억하자, 외면하지 말자, 그리고 지금이라도 청산하자. 그래야 우리의 후손들이라도 덜 고달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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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1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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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신념을 구성하게 한 것들은 가정과 학교교육, 사회가 쏟아내는 말들과 이미지들, 제도, 법, 담론 등 조직과 체제가 조성하는 보이지 않는 틀, 의식적, 무의적으로 체득된 경험과 지식들의 융합일 것이다. 아마 이러한 것들의 실체를 내밀하게 들여다 볼 수 있다면 신념을 어떤 방향이나 궤도로 수정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건대 시간의 흐름이 더 이상 지속되지 않고, 공간적 경계가 없는 초월의 어떤 곳,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무인도 같은 그런 곳이라면 대체 나를 이루었던 것들이 무엇인지 여실히 드러날 것 같기만 하다. 오직 대자연과 나만이 존재하는 곳에서 내 몸과 정신의 관습을 만들어낸 것들이 어떻게 표현되고 이용되는지를 보게 된다면, 그것들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인지 냉엄하게 성찰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미셸 투르니에’가 ‘로빈슨 크루소’와 ‘무인도’를 다시금 배경으로 삼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었을 것만 같다. 기독교관에 세뇌되어있으며, 근대문명과 화폐자본주의에 적응된 인간의 습속이란 것의 정체란 무엇인지를 투명하게 관찰할 수 있는 절대적 공간으로 제격이라는 얘기다. 나를 포획하고 있는 근대화(modernity)를 규정짓는 요소들이란 지속적이고 급속하게 흐르는 시간을 강박적으로 인식하며, 현재보다는 가능성이라는 미래의 삶을 위해 부단히 부를 축적하고, 각종의 규율장치들을 통해 규격화된 삶을 재단하며, 모든 타인과 물질을 욕망의 대상화 시키는 것들이라 정리해도 무방할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를 특징짓는 이러한 것들이 과연 나와 우리들을 어떻게 만들어 놓았을까를 유리창 너머에서 지켜본다는 것은 정말 흥미로운 일이 아니겠는가?

유일한 생존자가 되어 깨어난 곳, 무인도를 로빈슨은 ‘탄식의 섬’이라고 명명하듯 그를 길들였던 현대문명의 질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박탈감을 생각하면 이러한 의식은 꽤나 자연스러워 보인다. 무한한 자유와 자연이 펼쳐져 있지만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갖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태평양의 외딴섬에 인간이란 나 혼자란 자각을 한 로빈슨이 착수한 일이란 난파된 선박(버지니아호)에 남아있는 물건들을 섬의 동굴 속으로 옮겨 저장하는 것이고, 동물들을 잡아 우리에 가두며, 대지를 경작하고 수확하여 미래라는 걸 위해 쌓아두는 행위이다. 즉, 자연을 지배하고 통제하겠다는 의지이며, 현대라는 문명의 습관을 이식하는 행동이다. 게다가 성서와 기독교제단을 설치하고, 물시계를 만들며, 자기 한 사람을 위한 섬의 통치체제인 법률을 제정, 선포하는 일련의 통제적 장치들을 설정하는 모습은 희화(戱畵)적이기까지 하다. 무릇 섬의 통치자로 군림하는 것인데, 문명인이란 것이 이처럼 우스꽝스런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일 게다.

한편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와 결정적인 분기점이자 차이랄 수 있는데, 원주민‘방드르디’의 출현이다. 현대적이지 못하기에 야만인일 수밖에 없는 방드르디를 대척점에 두는 현대인 로빈슨이 만들어내는 긴장관계 때문이다. 성서를 읽고 설교하는 로빈슨의 낯설고 기이한 행동에 웃어 재끼는 방드르디에 대한 로빈슨의 분노, 이 야만인을 길들이기 위한 법률과 화폐거래 제도를 통한 훈련은 그 진지함만큼이나 우습다.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반복적 노동을 부여하곤 버지니아 호에서 노획한 금화를 댓가로 주고는 방드르디가 요구하는 물건이나 반일의 휴식을 구매하도록 하는 것인데, 돈에 대한 이러한 종교적 답습은 그의 청교도적 신앙과 결합하여 현대를 포획한 자본주의의 체험을 내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반일의 휴식을 선택하곤 빈둥거리는 방드르디의 늘쩍지근한 게으름에서 이미 로빈슨의 체제는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근대적 시간관, 합리주의 지성이라는 미덕, 거래수단으로서의 화폐제도, 각종 법적 제도장치들, 수확물의 축적과 같은 이식은 섬 스페란차에서 무익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로빈슨의 이러한 행위는 근대적 인간관, 문명에 대한 맹신이랄 수 있는데, 이 진보와 야만이라는 기만적 도식관계가 그야말로 천박하기 이를 데 없을 정도로 취약하다는 것이, 이 둘의 관계에서 드러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로빈슨 내면의 갈등은 야만인 방드르디에 대한 혐오에서 기인하는 것이지만, 이 부정적 관점은 불가피하게 변화할 수밖에 없는 어떤 당위를 보이기 시작한다. 무인도 스페란차의 대지에 대한 여성화이고 대자연과 합일화되는 초월적 느낌과 성적 구분의 무위에 대한 비인간화의 깨달음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더욱 극적인 전환은 동굴에 쌓아둔 화약의 폭발로 인한 문명의 시간과의 결별, 시간 인식의 소멸이다. 더 이상 근대적 시간이 머물지 않는 섬은 그의 신념을 이루고 있던, 그를 장악하고 있던 근대의 찌꺼기들의 위선이다. 방드르디에게서 발견하는 분명하고도 과격한 아름다움, 자연스럽고도 상쾌한 우아함은 로빈슨의 독실한 청교도였던 시절의 번쩍하는 초월의 그 어떤 교감 같은 것으로 다가온다.

이 소설을 그 어떤 하나의 주제나 관념적 이상으로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대사회, 즉 모더니티에 대한 비판적 맥락을 핵으로 하고 있지만, 문장들마다에서 숨 쉬고 있는 철학적 단상들은 인간 본연에 대한 무수한 사색을 말하고 있음에서이다. 또한 금요일, 비너스를 상징하는 방드르디와 같은 다의적 어휘들로 인하여 가히 신화적 상상력이란 의미의 풍성함을 더하고, 어떤 문장에서는 니체를 느끼게 되며, 또 어디에서는 루소를, 짐멜을, 보들레르를 보는듯 철학의 대 향연과 같은 도취감에 휘말리기도 하는 것이다. 위대한 작품들에 감히 눈길을 고정하기 시작하면 발견하게 되는 그 웅숭깊은 사유와 통찰에 그저 넋을 잃고 마는 것은 괜한 이유에서가 아니다. 가히 투르니에의 로빈슨은 오늘의 나와 우리는 물론 미래의 인간들에게도 인간을 이해하고 읽어내는 존귀한 기준이 될 것이다. 그야말로 명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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