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론 교양사상서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정영하 옮김 / 산수야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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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자유(自由;liberty), 어렵고도 쉬운 말이다. 인간 개체의 생래적 본성 같기도 하지만 사회라는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존재로서 개체의 집단이 행사하는 자유까지 고려하면 이처럼 경계가 애매한 표현도 없기 때문이다. 사전적 의미를 보면 구속이나 억압에 반대되는 어휘이고, 법률이 되었든 그 어느 것이 되었든 외부적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행위, 또는 자연 및 사회의 객관적 필연성을 인식하고 이것을 활용하는 일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전자의 경우는 개인적 자유를, 후자는 사회 등 외부 환경 하에서의 자유를 말하고 있다. 결국 이 둘은 어디선가 충돌하고 소음과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J.S.밀은 이처럼 개인의 자유가 사회와 맞닥뜨리게 되면서 불가피하거나 불가결하게 침해받거나 통제되는 현상에 부당성과 불법성이 개입될 수 있음을 보았으며, 이에 대한 경계, 그 한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함을 직관했던 것 같다. 따라서 『자유론』은 “개인에 대해 사회가 정당하게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본질과 한계”라는 시민적, 사회적 자유에 대한 논지를 핵심으로 전개하고 있다. 개인의 자유는 어디까지이며, 사회는 그 자유의 어느 지점에서 권력을 행사하여야 하는가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오늘의 사회는 거대한 정부와 다양한 사회집단, 게다가 민간기업조차 대규모화되면서 개인과 이들 집단과의 마찰의 형태는 엄청날 정도로 다양하며 복잡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즉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억압하려는 권력화 된 집단들이 무수히 증가하여 그 어느 시대보다 시민적 자유는 위협을 받고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자유의 자기중심적 발현으로 인해 공동체의 건강성이나 사회적 안정에 해악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시민과 사회적 자유에 대한 최초의 담론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은 오늘의 우리에게 개인적 자유와 권력의 한계에 대한 판단의 귀중한 가치 기준을 제공하고 있다 할 수 있다.

개인의 자유에 간섭하는 것은 언제 정당화될 수 있는가?

밀은 공리주의자답게 “사회 전체의 부를 감소시키는 것이나, 전체의 행복을 감소시키는 것”은 사회가 간섭할 수 있는 개인의 자유라 주장한다. 이는‘벤담’의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절대적 공리주의에서 조금 후퇴한 논리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행복의 크기를 침해하지 않는 한, 오히려 개인의 자유는 절대적으로 보호되고 지켜져야 한다는 자유지상주의적 견해라고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여기서 밀은 자신만의 공리를 내세운다. 개인의 자유재량에 일임하는 것이 전체적으로 보아 이익일 경우, 사회가 통제하면 오히려 개인보다 더 큰 해악이 발생할 경우, 사회가 단지 간접적 이해관계만을 갖는 경우의 개인의 자유는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와 간접적 이해관계를 갖는 자유는 왠지 개인의 절대적 자유로서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어 보인다. 개인이 직접적으로 특정한 타인에게 행한 것이 아니지만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있다. 언론과 출판의 자유, 결합(결사)의 자유는 이러한 유형의 대표적인 자유 형태가 될 것이다.

왜 언론 출판의 자유 등 간접적 이해관계의 자유는 절대적 자유이어야 하는가?

인간의 내부 의식세계의 영역에 있는 양심의 자유, 사상과 감정의 자유, 기호의 자유와 행복추구의 자유가 절대 불가침의 자유라는 점에 이의를 제기하는 지성은 없다. 그런데 사상의 자유와는 유사하지만 언론, 출판의 자유는 개인 일신상의 내면에 머물지 않고 공중을 향해 드러나는 자유이기에 의도하지 않지만 간접적으로 불특정인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즉 개인을 넘어 타인과 관계를 맺게 되는데, 이러한 자유에 절대 불가침의 권능을 부여하면 해악이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떨쳐내기 어렵다. 그러나 밀의 논리는 의외로 간결하고 명확하다. 그 첫째 이유는 어느 누구의 의견도 ‘절대무오류’의 진리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억압하려 애쓰는 의견이 잘못된 의견이라고 단정할 정도로 우리는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세상은 절대로 아무런 잘못도 범하지 않는다는 맹목적 신뢰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으며, 시대라는 것도 개인 못지않게 잘못을 저질러 왔으며, 절대적 확실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부정하고 침묵을 강요당하는 의견이 진리 일 수 있음을 차단하는 형국이 되어버려 전체의 행복을 감소시킬 수 있다고 지적한다.

둘째는 억압되는 의견이 설혹 잘못된 것일지라도 지배적 의견이란 항상 완전한 진리가 아니기에 일부 진리를 포함할 수 있으며, 셋째는 이미 일반에 널리 인정된 진리가 있을지라도 활발한 논쟁이 허용되지 않을 경우 대다수는 편견을 품어 합리적 근거를 이해하고 실감하는 일을 잃어버리게 되며, 끝으로 참된 진실로 향하는 전제인 비판을 통한 완전한 진리의 추구를 방해하여 인류의 인성과 행동에 미치는 결정적 영향력을 상실시켜 진리의 확신을 미완에 그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언론과 출판의 자유가 통제되고 억압된다면 개인들은 누구의 비위도 거슬리지 않으려는 기회주의적 태도로 결코 진리를 이야기하려 하지 않거나, 두려워 정신적 발전이 전면적으로 위축되고 이성이 겁에 질려 사상의 발전은커녕 획일화로 인한 편협한 세상으로 퇴보하게 되고 말 것이다.

자유와 개성, 그리고 개인주의에 대해서

반대 의견을 충분히 자유롭게 비교해본 결과, 즉 자유와 다양성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결코 진리를 발견 할 수 없으며, 이 다양성은 개성을 창조하고 발전시킨다. 개성의 시대라고 부추기는 오늘은 자유의 기초위에 서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이 개성이란 것이 자제력을 상실하고 오직 욕망과 충동으로 치달아 좋지 못한 행위로까지 비난받기도 한다. 균형을 잃어버렸다는 지적인데, 그렇다면 개성은 억제되어야 한다는 것일까?

공리주의적 논리를 역설적으로 적용하였을 경우 그 개성이 공중에게 어떤 어리석고 저속하며 타락적인 해를 주는 것일지라도 존중되어야 하는 것일까? 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을 볼 권리, 싫은 것을 피할 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아닐까? J.S.밀도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는 행위는 도덕적 벌과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데 동의하지만, 단지 비호의적 판단인 악평과 긴밀하게 결부되어있는 불편일 뿐인 만큼 감수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태도는 오늘날 개인주의로 고착화되어 공동체의 의식을 저해하고 이기적 개성을 중시하는 민주주의 타락이란 오명으로 연결되어 오히려 시민의 권리를 위협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밀의 주장은 절대적 진리가 아니다. 시대가 지나면서 과거의 진리가 새로운 시대의 진리에 부정되기도 한다. 진리는 공리적으로만 판단 할 것이 아니다. 여기엔 중대한 함정이 있어 보인다. 공동체의‘연대의식’이라는 자연적 의무나 합의를 필요로 하는 자발적 의무를 넘어서는 의무에 적대하게 되는 것이다. 자유에서 출발한 개성도 사회라는 공동체의 정체성을 파괴하는 욕망의 과잉으로 내 닫게 되면 우린 그것에 무언가 간섭을 해야 하지 않을까? 칸트의 말처럼 인간을 쾌락, 즉 전체의 행복의 도구로만 보는 그런 자유의 정의는 왠지 도덕적으로 수용하는데 어려움을 느끼게 된다.

결 어

근대적 시민의 자유에 대한 최초의 정의에 나선 이 책은 이와 같이 사상과 언론의 자유, 그리고 인간의 개성이 자유의 필수 요소로서 존중되어야 하는 이유와 개인과 사회적 권위의 경계와 한계, 시민적 자유의 공리적 권위를 지니는 원리의 실질적 적용에서의 문제라는 주제로 사회와 국가, 개인의 자유에 대한 다층적 사례와 분석을 수행하고 있다. 우리가 오늘을 살며 부딪치는 각양의 정의의 문제에는 자유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가 있다. 인간 정신의 진보를 위한 진리의 발견이라는 본질적이며 인간사회 전반의 기초를 이루는 자유의 기준에 대한 밀의 공리는 세상을 보다 신중하고 입체적인 관점에서 생각토록 견인한다.

다른 의견이 존재한다는 것은 대단히 유용한 것이다. 잘못되고 버려진 의견이 진리일수도 있으며, 진리성을 명확히 이해하고 느끼기 위해서는 반드시 잘못과 싸우는 것이 필수불가결의 조건인 것이다. 모든 학문이나 종교적 진리조차 치열한 공박과 싸움에서 비로소 참된 의미로 접근해왔다. 논쟁이 가라앉는 것은 의견의 통일이 될 수 있지만 의견의 다양성의 범위가 좁아져 진실과 진리의 방향을 상실 할 수 있다. 더구나 진리는 두 편이 나누어 가지는 경우도 있다. 서로가 진리의 한 부분에 불과해서 반대의견을 통해 보충되고 완전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유의 정의를 넘어 개방적이고 진리에 대해 열린 자세를 취하는 위대한 지성으로부터 배우게 되는 자유와 정의, 진리의 탐구는 시민적 자유, 사회적 자유라는 정치철학 그 이상의 엄숙한 삶의 태도를 가르쳐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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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바리 부인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52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민희식 옮김 / 문예출판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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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리가 아직 영글기 전이었으리라. 그때의 감상을 지금에 되살린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을 36년이 지나서 다시 읽게 한 데에는 아주 막연하게 당시에 내 마음에 어떤 파문을 일으켰던 기억 때문인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엠마’란 여인이 발산하는 나른한 정염, 더없이 낭만적으로 느껴졌던 사랑의 감미로운 쾌락에 대한 환상이었던 것 같다. 그 시절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감상이었을 것이고, 어린 마음을 풍성한 감성의 사람으로 성장시키는데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이 책으로 내 손길을 다시 이끈 것이라면 역시 환상일지언정 그 애정의 실체에서 어떤 새로운 이해를 발견하려는 의지가 있었음을 부인 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15세 소년의 감상과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지나 중년의 남자가 이해하는 세계의 간극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만큼 다르다. 보이지 않고 어떤 관점도 제공하지 않았던 인물들이 이제는 생생히 살아나 무언가를 내게 말한다. 그리고 미처 눈치 채지 못했던 어느 회화작품과 철학자의 이름조차 그 의미 속에 내장된 결코 작지 않은 이미지들과 관념으로 연결된다. 그래서 <목욕하는 할렘 여인>을 자신에게 비유하는 엠마로부터 남성의 눈길을 유혹하는 듯한 관능미와 포즈를 연상하고, 계몽주의 사상가‘볼테르’가 대화에 비칠 때면 종교와 형이상학에 대한 강렬한 거부를 의지하는 인물임을 알아차린다. 갑자기 몇 곱절은 늘어난 풍부해진 의미와 다채로워진 장면으로 전혀 다른 『보바리 부인』을 읽게 된 것이다.

사실주의 문학의 효시로 평가받고 있듯이 인간의 성향과 행동에 대한 관찰자적 분석이 장면들을 구성하고 있다. 때문에 그 실체감이 전달하는 느낌은 환상과 현실을 동일시하는 보바리 부인처럼 독자인‘나’를 어느덧 소설 속 인물에 매몰되게 하곤 된다. 아내의 생각을 알지 못하는, 혹은 자신의 행복과 타인의 행복을 혼동하는 무감각하고 무기력해 보이는‘샤를 보바리’야말로 내가 아닌가?, 권태와 환상에 젖어 새로운 쾌락을 끊임없이 찾아 헤매는 ‘엠마 보바리’야말로 나 아닌가? 아니 명예와 출세를 위해 수단으로서 인간관계를 사용하는 약사 ‘오메’는 또 다른 오늘의 우리모습 아닌가? 화려한 이미지와 욕망에 현혹된 우유부단한 저 청년‘레옹’도 내 안에 있지 않은가? 하고 말이다. 여기서 문득 오늘의 우리들, 바로 근대적 인간, 물질에 대한 욕망과 그 도달할 수 없는 한계를 위해 질주하는 인간의 탄생, 자본주의적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근대적 인간의 탄생

의사개업이나 초혼인 과부와의 결혼조차 부모의 의지의 결과일 뿐 자신의 의사가 없는‘샤를 보바리’란 인물은 치열한 인생의 목표를 가진 인물이 아니다. 이와는 대비되어 샤를의 재혼의 상대인 엠마는 현실에 대한 끝없는 탈출, 열정과 이상에 대한 추구, 화려함과 황홀함이 가득한 쾌락의 세계를 그리는 여인이다. 통속 소설에 취해 자신을 그 안의 낭만적 세계에 살게 하고, 어느 귀족의 화려한 파티장의 기만에 찬 우아함에 매료되며, 대도시 파리에 넘쳐흐를 환희가 자신이 누려야 할 당위의 것으로 생각하는 여성이다.

이러한 자아에 대한 인식은 동경과 몽상을 혼동케 하는데, 시골의사의 아내라는 위치는 그 간극으로 인생의 일상적 행복을 사라지게 하고, 인생에 대한 고통으로 남편과 현실에 대한 부정과 저주로 이어지게 한다. 귀족들의 우아한 품격, 열정적 아름다움과 시인같은 마음을 가진 남자, 자신의 욕망을 한 없이 고귀하게 해줄 남자에 대한 갈망은 제어 할 수 없을 정도가 된다. 나는 이 인물에서 근대적 인간의 출현을 목격한다. 억측일까? 욕망과 자제력의 균형을 잃어버리고 끝없는 욕망의 추구에 나선 오늘의 인간의 모습 그대로인 것이다. 허영심을 충족시켜주는 물질의 추구, 간통, 어음과 같은 위선을 조작하기 위한 시간이란 근대적 산물의 악의적 사용, 화폐중심의 자본주의의 마약에 중독되어 끝 간 데 없는 욕망의 무한 추구에 몸부림친다. 또한 균형을 상실한 욕망은 도달하면 얼마되지 않아 권태가 습격해오고 드러난 바닥, 그 충족되지 못한 터 큰 쾌락의 욕망이 남아 엠마를 괴롭힌다.

인생에 대한 불만은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아내의 우아한 자태, 예쁜 딸아이‘베르트’, 소박하지한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직업과 가정이 행복일 것이라고 믿는 샤를과 달리 “지금까지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고 느끼는 엠마의 인생에 대한 불만은 남편의 무능함에 이유를 돌리고 있지만, 그 원인은 그들 각자에게 있음을 수 없이 목격하게 된다. 현실의 하찮음을 뛰어나와 동경하는 세계, 그에 대한 환상에 자신을 매몰시키는 현상을 표현하기위해‘보바리즘’이란 용어가 다 만들어졌듯이 욕망의 실체를 알지 못하고 자제력과의 균형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또한 자기 연민에 골몰하는 이기적 인간, 즉 타자 읽기에 무심한 개별화되고 파편화를 강요하는 물질주의적 삶의 환경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샤를은 엠마가 자신의 불륜이나 현실의 저주를 은폐하기 위해 위장된 허위의 행동을 가족에 대한 애정의 행위로 단정하거나, 관능의 열정에 포획되게 했던 정부(情夫)로부터의 배신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아내의 내면을 보지 못하고 의료적 처방과 병간호에 몰두하는 어리석음으로 일관한다. 게다가 엠마는 아예 샤를에 대한 관심은커녕 외면과 존재의 부정으로까지 치닫는다. 타자 읽기에 전혀 무관심하고 실패하는 사회에 행복이란 것이 깃들 여지가 있을 턱이 없다.
        
결국 “미덕과 애정과 쾌락이 하나로 녹아들어” 있으리라는 몽상적 열정의 세계의 끝은 혐오와 저주가 숨겨져 있음을 발견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일이 걸리지 않는다. 거듭된 부정(不貞)과 절제되지 않은 사치로 인한 거대한 부채는 동일한 것이다.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지고의 쾌락이란 행복은 결코 끔찍한 권태와 저주스런 실체만 드러내고,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더미의 강박일 뿐이다. 결국 플로베르는 두 사람의 생명을 지상의 세계에서 거두어 가는데, 어떤 의미에서 실제인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환상에 젖어있던 사람들의 실패를 확인해주고 싶은 의도가 아니었을까?

꿈과 현실의 간극을 인식하지 못했던 한 여인의 탐욕스런 불륜이 하나의 거대한 플롯을 이루고 있지만 이는 근대가 낳은 욕망에 대한 강박적 추구에 대한 비판적 은유이며, 공동체가 서서히 해체되어가며 개인화로 인해 파멸되어가는 근대적 삶의 모순에 대한 통찰이기도 하다. “보바리 부인은 바로 나다!”라는 플로베르의 말처럼 자기중심적이고 비루한 속물적 세계에 지배당하여 상처받고 고통 받는 인물들은 우리들 자신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소재 역시 당시 프랑스의 지방 소도시 의사와 아내의 실화였다는 측면에서 이 소설은 산업화, 물화로 인해 권태와 방탕, 쾌락적 욕망을 향해 치닫는 인간들의 비루한 실상에 대한 경종과 연민이었을 것이다. 여전히 근대적 삶이 생산하는 모순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19세기에 써진 이 소설이 들려주는 진정의 목소리는 어떠한 생기도 잃지 않는 감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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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 행복한 사회를 꿈꾸는 이상형의 나라
성 토마스 모어 지음, 황문수 옮김 / 종합출판범우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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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인간사회의 모순은 시대의 현상에 따라 그 원인은 다른 형태를 띠지만 삶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자유와 상충하는 속박과 억압의 고통은 변질되지 않을 뿐 아니라 더욱 다양한 모습을 하고 인간을 절망하게 한다.
노동으로부터의 자유, 차별과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물질의 편향성과 양극화의 해소 등등 인간사회가 안고 있는 해결되어야 할 부정적 모습은 이젠 생태계 복원과 보전의 문제, 신자유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시장자본주의가 출산해내는 병폐까지 더해져 암울해 보이기만 한다.

그래서인지 인류의 지성들은 시대가 안고 있는 인간사회의 불완전한 현상들에 대한 본원적 문제를 진단하고, 미래를 위한 대안 사회를 설계하고 전망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지속시켜왔다. 이처럼 인간 세계를 다시 생각하고 모든 억압과 차별로부터 해방된 완전한 자유의 장소, 이상향을 꿈꾸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모색이라 할 수 있다.
‘토머스 모어’가‘어디에도 없는 나라(ou + topos)’, 즉 인간의 세계에서는 결코 실현할 수 없는‘유토피아(Utopia)’를 염원했던 것은 이러한 실패한 낙원인 암울한 인간 세상의 불완전성을 돌파하고, 마침내 도달하고픈 이상적 삶과 사회체제를 향한 진일보였을 것이다.

이 책『유토피아』는 1516년에 출간되었으니 500년이란 정신적 지속성을 유지해 온 저술이다. 따라서 오늘의 이성으로 재단하려들면 근대적인 생명의 존엄성이나 인권관이 출현하기 이전의 시대에서 오는 편협함처럼 시대의 간극으로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에 집착할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이 그의 저술,『공화국』에서 설파한 이상적 국가 이래 중세 암흑기를 거쳐 2000년 만에 비로소 인간자신들의 삶의 세계를 비판하고 완전함을 향한 미덕과 지향하여야 할 도덕성을 갖춘 사회체제를 축조하였다는 것은 어떠한 이유로도 폄하될 수 없는 고귀한 인류의 정신 유산이라 아니할 수 없다. 특히 16세기 초 화폐경제본위의 자본주의체제에 들어선 영국의 정치사회 현실과 인민의 삶을 배경으로 하여 그 제도와 체제의 모순과 부정, 부도덕성에 대한 비판과 대안으로서의 유토피아에 대한 기획은 21세기 오늘에도 생명력을 가지고 우리를 되돌아보게 하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책의 구성은 모어의 친구인 안트와프 수석장관이었던‘피터 자일즈’의 소개로 유토피아 섬을 탐험하고 돌아온‘라파엘’이라는 인물로부터 유토피아의 제도와 삶의 모습들을 전해 듣는 2권의 형식으로 되어있다. 1권은 정치적 식견과 다양한 세계경험을 지닌 라파엘이 중앙정치 무대에 서지 않으려는 이유로서 화석화된 현실사회의 비판의 변(辯)을 담고 있으며, 2권은 본론이자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덕이 존중되고 만인이 평등하며 모든 것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는 나라, 이성을 존중하고 삶의 향락인 쾌락을 인간의 온갖 노력의 자연적인 목표라고 생각하는 공동체사회로서의 유토피아를 소개하고 있다.

‘라파엘’의 중앙정치 참여 불응의 변에 대해서

왕과 소수의 성직자, 그리고 귀족과 지주에 의해 통치되는 사회, 최고 권력자에 아첨하고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에만 혈안이 되어있는 정치 무대에서 새로운 정치 이념과 개혁 아이디어, 더구나 그들의 지배적 이익에 반하는 정의를 실행한다는 것은 사실상 가능한 일이 아니다. 특히 당대는 자본주의가 태동하는 시기로서 이들 지배 권력의 무차별적 탐욕에 의해 농민이 농토에서 축출되고 엄청난 전야(田野)가 수지맞는 양(羊)목장으로 약탈되고 있던 시대이고, 쫓겨난 농민은 걸인이 되고 도둑이 되어야만 연명할 수 있는 사회, 그리고 도둑으로 내몰린 이들을 정의의 구현이라는 미명하에 사형으로 처벌하는 사회였다.

또한 화폐가치조차 소수의 권력층이 조작하여 폭리를 취하고, 인민을 함정에 몰아넣고 위법의 댓가로 벌금을 징수하며, 법을 자신들의 이익에 맞춰 해석하는 사회였으니 이러한 지배 권력을 향해 그들이 받아들이지 못할 충고를 한다는 것은 실로 어리석은 일일 수 있다. 사실 이러한 양태는 인플레이션과 환율 정책을 조정하고, 세수의 항목과 세액감면 및 공제항목의 인위적 조작을 통해 부의 편중된 독식을 추구하려는 오늘의 지배 권력과 다를 바가 없다는 점에서 이들 무리로 뛰어 들어가(실제 뛰어들지도 못하게 내쳐지겠지만) 도덕적 이상을 말하고 뿌리 깊은 사악함의 시정을 말한다면 백이면 백 적으로 간주되어 엄청난 핍박과 고통을 감수하여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바람을 억제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폭풍우속에서 배를 버리지는 못하는 것 아닌가”하고 항변하며, 더구나 “수년 내 인간이 완전해질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는 것”인 만큼, 이상과 현실의 조화를 도모하려는 간접적 수단이라도 동원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어리석음과 사악함을 은폐하기 위해 지배질서에서 벗어나는 것은 현실과는 괴리된 한낱 이상이며 환상이라 경시하며, 모든 부(富)가 극소수의 인물에 의해 독점되고 있는 나라를 번영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회에서는 중앙정치의 참여라는 것이 위선이며 공허한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는 반대론도 가능하다. 라파엘의 중앙정치 참여 불가의 변은 이처럼 오늘의 우리 사회현실에 비추어보더라도 그 비판적 시각은 시사하는 바가 자못 크게 느껴진다.

이상적 사회, 유토피아에 대해서

유토피아는 인간의 도덕적 이성을 중시하는 스토아적 삶을 구현하는 사회인 동시에, 자연적이라는 삶의 향락적 쾌락을 지고의 선으로 하는 에피쿠로스적 인생관이 지배하는 사회이기도 하다. 일견 모순되어 보이지만 개인이면서 사회라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개인이라는 인간을 떠올리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우린 공동체에서 에피쿠로스적이며 개인의 삶은 메마른 사막이 되어 무참히 이성적이다. 이렇게 삶의 궤도를 찾지 못하고 혼란스러운 인간과 사회가 된 연유는 무엇일까?

이상적 사회인 유토피아를 관통하는 사상이자, 인간사회가 부정하고 부도덕한 나락으로 떨어진 이유를 ‘결핍의 공포’와 ‘탐욕’, 그리고 ‘오만’에서 찾고 있다.
결핍의 공포가 없는 곳에선 탐욕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모든 생활의 수단이 언제든 획득 될 수 있을 만큼 풍부하다면 굳이 욕심을 부릴 이유가 없어진다. 또한 인간의 허영심도 탐욕을 부르지만 모든 인간에게 균등한 배분이 이루어지게 되면 이 또한 차단된다.
한편 오만이란 것은 계급의 구분을 통해 빛나는 것으로 열등한 지위와 계급, 가난한 사람이 존재함으로써 비로소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속에 달라붙은 지옥의 뱀”같은 오만은 평등과 자유, 참된 민주주의의 실현으로 퇴색되어 버린다.

이와 같은 사회, 인간의 허영심도, 오만도 부질없으며, 결핍의 공포가 사라진 사회, 그래서 개인의 자유가 존중되고, 공정함과 평등이 실현된 사회, 하물며 공동체의 사무를 위해 선출된 인물조차 “다스릴 인민이 없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아데무스(ademus)로 불리며, 봉사하는 자임을 표시하는 사회라면 완전한 사회, 이상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회를 이루기 위해 실천되는 미덕과 제도는 어떤 것들인가? 유토피아에서 토지는 재산으로서의 가치가 아니라 단지 경작되어야 할 대상으로서의 의미만을 가진다. 개인 소유의 사유재산은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 할 이유가 사라진다. 그리고 노동력은 국가가 관리하며, 모든 생산품은 공동 분배된다. 공산주의의 일면을 보이지만 이들은 철저히 유물론을 배척하고, 종교적 자유는 물론 지고한 도덕성으로 무장된 사회이다.

또한 개인의 향락이라는 에피쿠로스적 쾌락, 즉 진리의 관조에서 오는 만족인 정신적 쾌락과 신체의 기관을 충족시켜주고 질병도 걸리지 않는 건강한 상태로서의 육체적 쾌락을 지향함으로써 자칫 사회적 평등으로 박탈될 수 있는 개인의 자유, 즉 자연적 삶에 대한 철학을 존중하는 사회이기도 하다.
이처럼‘토머스 모어’의 이상향은 자유가 없는 행복, 혹은 행복 없는 자유와 같은 딜레마를 연상시키는 <멋진 신세계>나 <1984>와 같은 디스토피아의 세계와는 달리 삶의 조화와 균형을 이룬 세상을 꿈꾸고 있다. 그러나 21세기 우리의 현실은 디스토피아의 세계와 점점 닮아가고 있다. 그래서 케케묵은 갈등으로 그 균열이 날로 커져만 가고 있는 듯한 우리 사회를 되돌아보고 새로운 가치와 이상을 실현키 위한 사색의 시간으로 ‘대안사회’에 대한 이 걸출한 지성사의 뼈대를 성찰하는 기회는 여간 유익하고 유쾌하지 않을 수 없다.

출간될 당시 원제목인 「사회생활의 최선의 상태에 대해서, 그리고 유토피아라고 불리는 섬에 대해서 유익하고 즐거운 저작」에서 보여 지듯이 인간의 삶이 도달하여야 할 최고의 선(善)으로서의 세계인 섬나라‘유토피아’의 노동과 생산제도, 교육체계, 정치적 민주주의, 신앙의 자유, 도덕심, 통치 형태 등 설명되는 사회일반의 모습은 오늘에 세계에도 생생한 시사를 던져준다. 또한 즐거운 저작이라는 표현만큼 풍자적 서사로 현학적인 체함을 던져버려 현실 비판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추구했다는 점은 토머스 모어의 보편적 이상을 향한 의지를 더욱 강하게 느낄 수 있게 하여 준다. 불완전함을 자각하고 끊임없이 완전함을 추구하려는 겸허함을 가질 때 우리는 어느 작은 부분에서라도 한걸음 완전에 다가갈 것이다. 모어가 유토피아를 집필한 영국의 16세기의 인권과 삶의 질에 비해 오늘의 우리가 다소 나아진 것은 분명하다 할 것이다. 반대자, 소수자, 약자의 목소리에 담긴 진리를 혹여나 놓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자유와 평등을 외치는 모어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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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천주의자 캉디드
볼테르 지음, 최복현 옮김 / 아테네 / 2003년 9월
평점 :
품절


해학적 풍자로 어처구니없어 보이는 어리석음을 즐비하게 나열한 이 소설의 이야기 전개를 따르다보면 어느덧 인간과 인간사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에 사로잡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주인공의 이름조차 '천진난만'하다는 의미를 지닌 '캉디드(Candide)'이어서 이 순진무구한 인물의 맹목적 형이상학이 소용돌이치는 현실세계와 조우하며 어떠한 반응을 일으킬 것인가에 절로 주목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제목이 시사(示唆)하듯이 인생의 의의와 가치 등을 궁극적으로 선(善)이라고 하는‘낙천주의(Optimism)'가 발산하는 왠지 모를 유아적 시선이 오히려 불신의 눈초리를 권유하여 비판적 사유로 이끄는 마력이 있다.

소설은 행복과 감탄의 세계였던 독일의‘툰더 덴 트롱크’ 성(城)에서 아동기를 보내던 캉디드가 성주인 남작의 딸 ‘퀴네공드’와의 사랑이 발각되면서 추방되어 마주하게 되는 현실세계의 파란만장한 대 여정이다. 바로 여정은 “범죄와 혼란, 실수와 편견, 불행과 어리석음을 축적”하는 사건들의 반복이고, 이 반복되는 과정의 사건들을 통해 인간의 조건과 삶의 그러해야 함에 대한 사유의 성숙으로 견인된다. 이것은 볼테르의 치밀한 계산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성에서의 추방, 방랑과 도피로 점철된 남아메리카(신대륙)와 유럽여행, 그리고 마지막 정착지인 콘스탄티노플의 작은 농원이라는 캉디드의 인생역정은 인류가 지향하여야 할 궁극의 사회형태를 향한 탐색이며, 당대에 낙천주의를 주창했던‘라이프니츠’의 “어떤 원인 또는 어떠한 결정적인 이유 없이는 그 어떠한 일도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충족이유’의 진리성에 대한 모순의 실질적 증거를 제시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낙천주의자, 캉디드』는 18세기 당대의 인간사회에서 벌어지던 혐오스런 사건들의 반복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추방된 캉디드가 체험하고 목격하는 전쟁, 기근, 광신주의, 지진, 난파, 사기, 위태로운 열정과 살인, 도둑, 배신이라는 낙천주의 형이상학을 파괴하는 현실적 사건들의 반복을 통해 충족이유, 원인과 결과의 모순을 보여주는 과정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더욱 주목하게 하는 것은 등장인물들의 뚜렷한 개성이 품고 있는 세상관(觀)의 대치라 할 수 있다. 이 구별되는 관념의 세계, 즉 낙천주의와 염세주의라는 세상을 서로 다르게 인식하게 하는 지상의 사실적 양상을 이들이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캉디드를 낙천주의자로 만든 사람은‘팡글로스’라는 현자이다. 그는 충족이유와 예정조화설에 절대적인 믿음을 가진 인물로서 현실세계는 최선(最善)의 것으로 창조되었으며, 설혹 악(惡)이 있더라도 그것은 최선의 세계를 만드는 예정조화를 돕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사람의 인생이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성에서 추방되어 걸인이 되고, 교수대에 목이 매달리며, 노예로 전전긍긍하는 것인데, 여기서 충족이유를 발견한다는 것은 실로 우스꽝스런 일이 되어버린다.

한편, 우발적 살인으로 남미로 도피하게 된 캉디드가 우여곡절 끝에 다시금 베네치아로 돌아오기 위해 말동무로 고용한 철학자‘마르탱’이란 인물은 우주를 선과 악이라는 두 원리의 투쟁이라고 보고 있으며, 악이 범람하는 세상은 인간의 본성으로서 당연한 상태라 인식한다. 따라서 인간이 근심의 소용돌이에서 사는 것과 권태롭고 무기력한 상태에서 사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라 주장한다. 사실 소설은 이처럼 팡글로스와 마르탱으로 대변되는 두 형이상학의 충돌이자 갈등이며, 캉디드는 이 두 세계에서 갈등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캉디드의 체험 세계는 신부와 수사들의 방탕과 탐욕에 희생되는 수많은 사람들, 귀족과 교회의 야심으로 인한 전쟁에 동원되어 약탈과 살인이 그치지 않으며,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배신과 살인을 마다하지 않는 현실에서 악만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이러한 현실세계는 순간순간 오늘의 우리사회에 대입해보게 하는데, 결코 원인과 결과가 일치하지 않는 이 모순의 세계를 순진하게 낙관주의적이고 충족이유가 있는 세계라고 믿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캉디드의 우여곡절의 이 여정은 충족이유가 모순되는 세계를 희극적으로 반복하여 보여줌으로써 새로운 이상의 세계, 형이상학의 세계가 아닌 실체적 삶의 세계를 구상하게 한다.

이렇듯 결코 철학을 말하지 않지만 한없이 철학적인 책, 우스꽝스런 콩트이지만 역사와 사색을 요구하는 책이다. 또한 운명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여린 인간의 진솔함이 그대로 스며들어 더욱 깊은 감동과 공감을 갖게 하여, 잠든 우리의 의식세계를 일깨운다. 끝내 선과 악, 낙천과 염세에 대한 어떠한 결론을 내리지는 않지만 삶을 견뎌내는 길이 무엇인지를 우린 알게 된다. 형이상학을 포기한 현명한 공동체의 삶을. 이 계몽주의 시대의 철학자와 함께 웃다보면 우리의 본성과 정염이 일치하는 즐거움을 경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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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조종자들 - 당신의 의사결정을 설계하는 위험한 집단
엘리 프레이저 지음, 이현숙.이정태 옮김 / 알키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기술결정주의, 특히 정보결정주의 환경의 지배력 확장과 이러한 현상에 무기력하게 종속되어가고 있는 현실 세계에 대한 경종이자 비판이다. 정신없이 쏟아지고 있는 정보통신 기기들과 소프트웨어들은 각종의 융합기술을 동원하여 그 어느 때보다 생활의 획기적인 이기라 선전하면서 미디어의 세계로 인간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특히 웹기반의 인터넷 환경은 거의 모든 사람들의 일상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을 정도에 위치하고 있어, 소수의 거대 포탈사이트는 막강한 지배력을 행사한다.

사람들은 그저 사이트가 토해내고 있는 내용을 클릭하는 수동적인 존재가 되어 그들이 노출하는 것만을 본다. 메인화면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뉴스를 비롯한 콘텐츠라는 것들은 감각적이거나 달콤한 유혹을 부추기고, 연예인 동정과 같은 거짓 이슈로 채워지고 있다. 정작 인간 세계가 이루어내기 위해 알아야 하는 중요한 사안은 보이지도 않는다. 보이는 것과 믿는 것을 동일시하려는 인간의 경향은 이들이 보여주는 것만이 세상이라고 믿는다. 결국 자기표현과 자기실현에만 가치를 두는 ‘탈물질주의’에 광분하는 기형적 인간과 사회로 몰아가고, 이렇게 공공의 문제가 사라져버린 세상에서 자신의 열망만 부채질하는 인간들에게 정치는 사회의 정의나, 도덕성, 민을 위한 정책과는 무관한 인기만으로도 권력을 재생산하며 수월하게 지켜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인터넷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초기에는 인간들은 그 다양한 정보의 세계에 탄성을 외치고, 어떤 매개자 없이 직접적인 민(民)의 소통이 이뤄지며, 소수에게 집중된 권력도 분산되어 다수의 민이 참여하는 진정한 민주주의 실현의 플랫폼이 될 것이라 열광하였다. 그러나 지금 어떠한가? 소수에게서 권력을 빼앗아오기는 커녕 오히려 그네들의 권력은 더욱 집중되고 공고해졌으며, 정보의 비대칭은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대체 30여년의 과정에서 어떤 현상들이 발생한 것이기에 초기의 기대가 이렇게 우울한 상황으로 전환 된 것일까?

웹, 미디어의 실패

저자가 시종일관 중점을 두어 설명하는 것은 ‘인터넷 필터’를 통한 ‘개별화’이다. 거대 사이트들은 물론 군소 사이트들 모두 자신의 사이트에 방문한 개인들을 추적하면서 예측 엔진들을 가동한다. 그리고 그 개인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실제 무슨 일을 했는지 추론하고 예측하여 행태에 대한 이론을 만들어낸다. 그리곤 이 데이터를 이용하여 정보와 아이디어를 조작하고 개인들의 입맛에 맞는, 그들이 친근함을 느끼는 세상을 펼쳐낸다. 이렇게 “정보를 맞닥뜨리는 방법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현상을 ‘필터버블(filter bubble)'”이라 부른다.

이 필터버블, 즉 개별화라는 맞춤식 전개는 일견 소비자중심의 이상적인 진화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는 참담하며 사악한 요소가 압도적으로 우세적이다. 개별화된 맞춤식 필터는 개인마다의 생각만을 더 주입하고 친숙한 욕구만을 더 찾게 한다. 그래서 타자의 견해나 심각하고 복잡한 세상의 문제, 다양한 세상의 현상을 외면하게 하고 중요한 공공문제를 사라지게 해버린다. 사람의 인식을 왜곡하고 인식의 쳇바퀴 속에서 편협한 인간들만을 증식시키는 것이다.
실제 구글에서 동일한 단어를 검색해보라. 평소 서로 술자리를 같이하는 친구이지만 한 사람은 증권분석가이고 다른 한 사람은 소설가라 하면, 그 두 사람이 같은 검색어를 입력 했을 때 전혀 다른 검색결과가 나열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결국 이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주장의 근거를 찾게 된다는 것이다. 공통의 견해, 자기와는 다른 견해를 알 수가 없게 된다는 의미이다. 인식의 균형은 파괴되고, 자신의 견해만이 고착화되어 확증 편향에 빠져 세상의 소통은 단절되고 만다. 공통의 경험이 사라진 세상, 편협하고 이기적 인간들만 양산된다.

한편 소비자를 우선하는 듯 보이는 이 이상적 진화의 의도 역시 순수함과는 아예 거리가 멀다. 어떤 병명을 검색하면 동시에 컴퓨터에 당사자는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최대 223개의 쿠키가 설치되고, 그 병과 관련한 서비스를 판매하려는 다른 웹사이트에 의해 개인의 온라인 행태가 추적된다. 검색 댓가로 우리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우리의 행동을 비롯한 정보가 어둠 속의 누군가에게 제공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양상은 심화되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보험료도 뛰어 오를 수 있다. 익스트림 스포츠에 관심이 있어 무심코 몇 차례 관련 사이트를 방문하면 보험사는 우리가 사고의 위험성이 높은 사람이라고 판단해 버린다. 과연 어떤 개인이 온라인에서 몇 번 클릭 한 과거의 결과, 재산, 직업, 구매성향, 수입, 의료기록이 그 사람을 설명 할 수 있는 것일까? 더구나 현재의 소망이 미래의 욕구를 이해 할 수 있기나 할까? 이 기술 맹신주의가 낳은 오만은 인간을 점점 참혹한 구렁텅이로 내몰고 있다.

무책임하고 비도덕적인 정보기술자들

우리가 사는 오프라인 세상에서 법을 기획하고 제정하는 일련의 작업은 어느 한 사람의 독단에 의해서 결코 이루어지지도 않을 뿐 아니라 이루어 질 수도 없다. 그러나 프로그래머들, 코드를 만드는 사람들은 법체계나 법률가도 없이 만들고 완성되는 즉시 즉각적으로 시행한다. 이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게 되는데, 자신들의 결정이 무엇을 초래하는지 전혀 무관심하며 무책임하다는데 문제가 있다. 페이스북의 ‘저커버그’같은 젊은 사업가는 이러한 사회적 책임과 도덕적 의식의 요청에 대해 “원하지 않으면 사용하지 말라!”는 식으로 책임을 회피한다. 소위 ‘매수자 부담의 원칙’이라는 사악한 상인의 의지만을 고수하는 것인데, 자신에게 천문학적 광고수입을 안겨주는 수십억의 사용자들에 대한 도덕적 책무란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이들 정치적 사고가 미성숙한 이들에게 엄청난 권력이 손에 쥐어진 것은 진정 인류에게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이 심화시키고 있는 개별화라는 필터버블은 도덕적 개념이 전혀 없는 기계시스템에 인간과 인간사회를 내맡기자고 광분하는 것이다. 귀납적 알고리즘에 의존하는 정보결정주의를 맹신하는 부도덕하고 무책임하며 인간에게 무관심한 이들의 행태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교정되어야 한다. 지금의 온라인 시스템, 그리고 개별화를 강화해 나가는 시스템은 인간들을 일반적인 지식의 통합 대신 과잉 집중에 몰입케 함으로써 인간 내부의 정신과정과 외부 환경간의 상호작용을 방해하고, 동떨어진 아이디어의 병렬을 통해서 가능한 인간의 창의력과 혁신성을 실종시킨다.

더구나 개별화를 통해 획일화된 세상은 ‘J.S.밀’이 그의 『자유론』에서 말했듯이 “반증 가능성이 진리를 찾는 핵심”이라는 여지를 말살함으로써 점점 인간사회는 진리구현과는 멀어지는 어둠의 세계로 전락하는 길을 재촉하게 될 것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인터넷에 대한 애초의 기대인 권력 분산의 길이 아니라 집중화의 길로 치닫고 있다는 말이 된다. 이처럼 맥락의존적인 귀납적 시스템의 추구, 고착화와 인식의 왜곡, 공공영역을 멸실시키며 정적인 개념의 개성으로 내모는 무한반복의 함정에 빠뜨리는 시스템은 여론의 조작과 정보의 비대칭을 심화시키게 된다. 지식의 비대칭은 곧 권력의 비대칭을 낳는다. 권력이 없는 민(民)에게서 다시금 권력이 있는 소수에게 정보권력을 재분배하게 되는 개별화, 필터버블은 공동체의 단절과 참을 수 없는 침체의 세계를 만들게 될 것이다.

필터버블의 대항과 감시를 위해서

분리하고, 조작하며, 의도적으로 세분화하여, 대화에 적대적인 공공영역을 만들어 내는 개별화를 향한 웹미디어의 행태는 통제되어야 한다는 것은 이제 이론의 여지가 없다. 기술지상의 광신적 부도덕성의 결말은 인류의 공멸이다. 결국 미디어는 사람들이 하는 일을 그대로 비추는 개별화의 무조건적 추진이 아니라 사람들이 무엇을 모르는지 보여줄 수 있는 미디어로서의 책임을 가져야 한다. 공동체간의 연결도 없고 겹치는 부분도 없는 단절과 불통, 소외의 하위문화가 아니라 삶의 시선과 관점을 폭넓게 인식할 수 있는 균형 잡힌 기술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사용자가 알 수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자신들만의 규칙을 무차별적으로 사용하는 체계가 아니라 투명한 시스템이어야 한다. 개별화의 진행은 필히 사용자의 승낙을 받아야 하며 실종된 편집윤리도 도덕적으로 보강되어야 한다.

국가권력 또한 기득 권력의 보존과 확대를 위해 외면하고 이들 거대 웹미디어 세력과의 결탁에 혈안될 일이 아니다. 개인의 행태를 추적하는 금지체계의 기술적 도입을 위한 노력을 하여야 하며, 개인정보 통제권이 지금처럼 사이트에 있어서는 안 된다. 사용자에게 주어지고 승낙이 있어도 그 사용에는 구체적 용도가 개별적으로 피드백되어야 하는 것과 같은 정보사용규칙의 변경과 정보사용 감시체계의 도입을 최우선적으로 검토하여야 할 것이다. 웹미디어 기업들에 옴부즈만 제도를 의무화하는 것도 하나의 제도적 장치가 될 것이다.
툭하면 터지는 개인정보들의 도난과 중개사건을 민사사건이라고 술수방관만 하는 국가는 부도덕하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민주주의의 토대를 말살하고 공공지향의 영역을 사라지게 하는 것은 소수권력이나 사용자인 대다수의 민중에게 공히 위험한 결과를 초래 한다.

정보결정주의에 빠진 웹미디어의 위험천만한 행태를 치밀하게 탐색하고 그의 재앙적 문제점들을 인문학적, 기술적 지식의 토대위에 예리하게 분석해낸 정보기술의 현상학이라 할 수 있는 이 저술은 개인의 이기적 욕망이란 기형화된 자유주의적 삶의 실태를 냉철하게 통찰하고 있다. 우리에게 편협한 이해관계만이 모든 것이라고 주입하는 세계는 우리가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는 여지를 아예 존재치 않는 것으로 몰아 낼 수 있음을 알리기 위한 진심의 노력이 곳곳에 배어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웹미디어에 의존적인 오늘의 세계에서 코드가 법이라고 외치는 새로운 입법자들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를 파악하고 이해하는 일의 절대적 중요성에 비추어 볼 때 이 저술의 의의와 가치는 더 없이 중대하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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