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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천주의자 캉디드
볼테르 지음, 최복현 옮김 / 아테네 / 2003년 9월
평점 :
품절
해학적 풍자로 어처구니없어 보이는 어리석음을 즐비하게 나열한 이 소설의 이야기 전개를 따르다보면 어느덧 인간과 인간사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에 사로잡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주인공의 이름조차 '천진난만'하다는 의미를 지닌 '캉디드(Candide)'이어서 이 순진무구한 인물의 맹목적 형이상학이 소용돌이치는 현실세계와 조우하며 어떠한 반응을 일으킬 것인가에 절로 주목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제목이 시사(示唆)하듯이 인생의 의의와 가치 등을 궁극적으로 선(善)이라고 하는‘낙천주의(Optimism)'가 발산하는 왠지 모를 유아적 시선이 오히려 불신의 눈초리를 권유하여 비판적 사유로 이끄는 마력이 있다.
소설은 행복과 감탄의 세계였던 독일의‘툰더 덴 트롱크’ 성(城)에서 아동기를 보내던 캉디
드가 성주인 남작의 딸 ‘퀴네공드’와의 사랑이 발각되면서 추방되어 마주하게 되는 현실세계의 파란만장한 대 여정이다. 바로 여정은 “범죄와 혼란, 실수와 편견, 불행과 어리석음을 축적”하는 사건들의 반복이고, 이 반복되는 과정의 사건들을 통해 인간의 조건과 삶의 그러해야 함에 대한 사유의 성숙으로 견인된다. 이것은 볼테르의 치밀한 계산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성에서의 추방, 방랑과 도피로 점철된 남아메리카(신대륙)와 유럽여행, 그리고 마지막 정착지인 콘스탄티노플의 작은 농원이라는 캉디드의 인생역정은 인류가 지향하여야 할 궁극의 사회형태를 향한 탐색이며, 당대에 낙천주의를 주창했던‘라이프니츠’의 “어떤 원인 또는 어떠한 결정적인 이유 없이는 그 어떠한 일도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충족이유’의 진리성에 대한 모순의 실질적 증거를 제시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낙천주의자, 캉디드』는 18세기 당대의 인간사회에서 벌어지던 혐오스런 사건들의 반복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추방된 캉디드가 체험하고 목격하는 전쟁, 기근, 광신주의, 지진, 난파, 사기, 위태로운 열정과 살인, 도둑, 배신이라는 낙천주의 형이상학을 파괴하는 현실적 사건들의 반복을 통해 충족이유, 원인과 결과의 모순을 보여주는 과정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더욱 주목하게 하는 것은 등장인물들의 뚜렷한 개성이 품고 있는 세상관(觀)의 대치라 할 수 있다. 이 구별되는 관념의 세계, 즉 낙천주의와 염세주의라는 세상을 서로 다르게 인식하게 하는 지상의 사실적 양상을 이들이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캉디드를 낙천주의자로 만든 사람은‘팡글로스’라는 현자이다. 그는 충족이유와 예정조화설에 절대적인 믿음을 가진 인물로서 현실세계는 최선(最善)의 것으로 창조되었으며, 설혹 악(惡)이 있더라도 그것은 최선의 세계를 만드는 예정조화를 돕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사람의 인생이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성에서 추방되어 걸인이 되고, 교수대에 목이 매달리며, 노예로 전전긍긍하는 것인데, 여기서 충족이유를 발견한다는 것은 실로 우스꽝스런 일이 되어버린다.
한편, 우발적 살인으로 남미로 도피하게 된 캉디드가 우여곡절 끝에 다시금 베네치아로 돌아오기 위해 말동무로 고용한 철학자‘마르탱’이란 인물은 우주를 선과 악이라는 두 원리의 투쟁이라고 보고 있으며, 악이 범람하는 세상은 인간의 본성으로서 당연한 상태라 인식한다. 따라서 인간이 근심의 소용돌이에서 사는 것과 권태롭고 무기력한 상태에서 사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라 주장한다. 사실 소설은 이처럼 팡글로스와 마르탱으로 대변되는 두 형이상학의 충돌이자 갈등이며, 캉디드는 이 두 세계에서 갈등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캉디드의 체험 세계는 신부와 수사들의 방탕과 탐욕에 희생되는 수많은 사람들, 귀족과 교회의 야심으로 인한 전쟁에 동원되어 약탈과 살인이 그치지 않으며,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배신과 살인을 마다하지 않는 현실에서 악만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이러한 현실세계는 순간순간 오늘의 우리사회에 대입해보게 하는데, 결코 원인과 결과가 일치하지 않는 이 모순의 세계를 순진하게 낙관주의적이고 충족이유가 있는 세계라고 믿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캉디드의 우여곡절의 이 여정은 충족이유가 모순되는 세계를 희극적으로 반복하여 보여줌으로써 새로운 이상의 세계, 형이상학의 세계가 아닌 실체적 삶의 세계를 구상하게 한다.
이렇듯 결코 철학을 말하지 않지만 한없이 철학적인 책, 우스꽝스런 콩트이지만 역사와 사색을 요구하는 책이다. 또한 운명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여린 인간의 진솔함이 그대로 스며들어 더욱 깊은 감동과 공감을 갖게 하여, 잠든 우리의 의식세계를 일깨운다. 끝내 선과 악, 낙천과 염세에 대한 어떠한 결론을 내리지는 않지만 삶을 견뎌내는 길이 무엇인지를 우린 알게 된다. 형이상학을 포기한 현명한 공동체의 삶을. 이 계몽주의 시대의 철학자와 함께 웃다보면 우리의 본성과 정염이 일치하는 즐거움을 경험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