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바리 부인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52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민희식 옮김 / 문예출판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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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리가 아직 영글기 전이었으리라. 그때의 감상을 지금에 되살린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을 36년이 지나서 다시 읽게 한 데에는 아주 막연하게 당시에 내 마음에 어떤 파문을 일으켰던 기억 때문인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엠마’란 여인이 발산하는 나른한 정염, 더없이 낭만적으로 느껴졌던 사랑의 감미로운 쾌락에 대한 환상이었던 것 같다. 그 시절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감상이었을 것이고, 어린 마음을 풍성한 감성의 사람으로 성장시키는데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이 책으로 내 손길을 다시 이끈 것이라면 역시 환상일지언정 그 애정의 실체에서 어떤 새로운 이해를 발견하려는 의지가 있었음을 부인 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15세 소년의 감상과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지나 중년의 남자가 이해하는 세계의 간극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만큼 다르다. 보이지 않고 어떤 관점도 제공하지 않았던 인물들이 이제는 생생히 살아나 무언가를 내게 말한다. 그리고 미처 눈치 채지 못했던 어느 회화작품과 철학자의 이름조차 그 의미 속에 내장된 결코 작지 않은 이미지들과 관념으로 연결된다. 그래서 <목욕하는 할렘 여인>을 자신에게 비유하는 엠마로부터 남성의 눈길을 유혹하는 듯한 관능미와 포즈를 연상하고, 계몽주의 사상가‘볼테르’가 대화에 비칠 때면 종교와 형이상학에 대한 강렬한 거부를 의지하는 인물임을 알아차린다. 갑자기 몇 곱절은 늘어난 풍부해진 의미와 다채로워진 장면으로 전혀 다른 『보바리 부인』을 읽게 된 것이다.

사실주의 문학의 효시로 평가받고 있듯이 인간의 성향과 행동에 대한 관찰자적 분석이 장면들을 구성하고 있다. 때문에 그 실체감이 전달하는 느낌은 환상과 현실을 동일시하는 보바리 부인처럼 독자인‘나’를 어느덧 소설 속 인물에 매몰되게 하곤 된다. 아내의 생각을 알지 못하는, 혹은 자신의 행복과 타인의 행복을 혼동하는 무감각하고 무기력해 보이는‘샤를 보바리’야말로 내가 아닌가?, 권태와 환상에 젖어 새로운 쾌락을 끊임없이 찾아 헤매는 ‘엠마 보바리’야말로 나 아닌가? 아니 명예와 출세를 위해 수단으로서 인간관계를 사용하는 약사 ‘오메’는 또 다른 오늘의 우리모습 아닌가? 화려한 이미지와 욕망에 현혹된 우유부단한 저 청년‘레옹’도 내 안에 있지 않은가? 하고 말이다. 여기서 문득 오늘의 우리들, 바로 근대적 인간, 물질에 대한 욕망과 그 도달할 수 없는 한계를 위해 질주하는 인간의 탄생, 자본주의적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근대적 인간의 탄생

의사개업이나 초혼인 과부와의 결혼조차 부모의 의지의 결과일 뿐 자신의 의사가 없는‘샤를 보바리’란 인물은 치열한 인생의 목표를 가진 인물이 아니다. 이와는 대비되어 샤를의 재혼의 상대인 엠마는 현실에 대한 끝없는 탈출, 열정과 이상에 대한 추구, 화려함과 황홀함이 가득한 쾌락의 세계를 그리는 여인이다. 통속 소설에 취해 자신을 그 안의 낭만적 세계에 살게 하고, 어느 귀족의 화려한 파티장의 기만에 찬 우아함에 매료되며, 대도시 파리에 넘쳐흐를 환희가 자신이 누려야 할 당위의 것으로 생각하는 여성이다.

이러한 자아에 대한 인식은 동경과 몽상을 혼동케 하는데, 시골의사의 아내라는 위치는 그 간극으로 인생의 일상적 행복을 사라지게 하고, 인생에 대한 고통으로 남편과 현실에 대한 부정과 저주로 이어지게 한다. 귀족들의 우아한 품격, 열정적 아름다움과 시인같은 마음을 가진 남자, 자신의 욕망을 한 없이 고귀하게 해줄 남자에 대한 갈망은 제어 할 수 없을 정도가 된다. 나는 이 인물에서 근대적 인간의 출현을 목격한다. 억측일까? 욕망과 자제력의 균형을 잃어버리고 끝없는 욕망의 추구에 나선 오늘의 인간의 모습 그대로인 것이다. 허영심을 충족시켜주는 물질의 추구, 간통, 어음과 같은 위선을 조작하기 위한 시간이란 근대적 산물의 악의적 사용, 화폐중심의 자본주의의 마약에 중독되어 끝 간 데 없는 욕망의 무한 추구에 몸부림친다. 또한 균형을 상실한 욕망은 도달하면 얼마되지 않아 권태가 습격해오고 드러난 바닥, 그 충족되지 못한 터 큰 쾌락의 욕망이 남아 엠마를 괴롭힌다.

인생에 대한 불만은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아내의 우아한 자태, 예쁜 딸아이‘베르트’, 소박하지한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직업과 가정이 행복일 것이라고 믿는 샤를과 달리 “지금까지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고 느끼는 엠마의 인생에 대한 불만은 남편의 무능함에 이유를 돌리고 있지만, 그 원인은 그들 각자에게 있음을 수 없이 목격하게 된다. 현실의 하찮음을 뛰어나와 동경하는 세계, 그에 대한 환상에 자신을 매몰시키는 현상을 표현하기위해‘보바리즘’이란 용어가 다 만들어졌듯이 욕망의 실체를 알지 못하고 자제력과의 균형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또한 자기 연민에 골몰하는 이기적 인간, 즉 타자 읽기에 무심한 개별화되고 파편화를 강요하는 물질주의적 삶의 환경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샤를은 엠마가 자신의 불륜이나 현실의 저주를 은폐하기 위해 위장된 허위의 행동을 가족에 대한 애정의 행위로 단정하거나, 관능의 열정에 포획되게 했던 정부(情夫)로부터의 배신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아내의 내면을 보지 못하고 의료적 처방과 병간호에 몰두하는 어리석음으로 일관한다. 게다가 엠마는 아예 샤를에 대한 관심은커녕 외면과 존재의 부정으로까지 치닫는다. 타자 읽기에 전혀 무관심하고 실패하는 사회에 행복이란 것이 깃들 여지가 있을 턱이 없다.
        
결국 “미덕과 애정과 쾌락이 하나로 녹아들어” 있으리라는 몽상적 열정의 세계의 끝은 혐오와 저주가 숨겨져 있음을 발견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일이 걸리지 않는다. 거듭된 부정(不貞)과 절제되지 않은 사치로 인한 거대한 부채는 동일한 것이다.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지고의 쾌락이란 행복은 결코 끔찍한 권태와 저주스런 실체만 드러내고,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더미의 강박일 뿐이다. 결국 플로베르는 두 사람의 생명을 지상의 세계에서 거두어 가는데, 어떤 의미에서 실제인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환상에 젖어있던 사람들의 실패를 확인해주고 싶은 의도가 아니었을까?

꿈과 현실의 간극을 인식하지 못했던 한 여인의 탐욕스런 불륜이 하나의 거대한 플롯을 이루고 있지만 이는 근대가 낳은 욕망에 대한 강박적 추구에 대한 비판적 은유이며, 공동체가 서서히 해체되어가며 개인화로 인해 파멸되어가는 근대적 삶의 모순에 대한 통찰이기도 하다. “보바리 부인은 바로 나다!”라는 플로베르의 말처럼 자기중심적이고 비루한 속물적 세계에 지배당하여 상처받고 고통 받는 인물들은 우리들 자신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소재 역시 당시 프랑스의 지방 소도시 의사와 아내의 실화였다는 측면에서 이 소설은 산업화, 물화로 인해 권태와 방탕, 쾌락적 욕망을 향해 치닫는 인간들의 비루한 실상에 대한 경종과 연민이었을 것이다. 여전히 근대적 삶이 생산하는 모순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19세기에 써진 이 소설이 들려주는 진정의 목소리는 어떠한 생기도 잃지 않는 감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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