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론 교양사상서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정영하 옮김 / 산수야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자유(自由;liberty), 어렵고도 쉬운 말이다. 인간 개체의 생래적 본성 같기도 하지만 사회라는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존재로서 개체의 집단이 행사하는 자유까지 고려하면 이처럼 경계가 애매한 표현도 없기 때문이다. 사전적 의미를 보면 구속이나 억압에 반대되는 어휘이고, 법률이 되었든 그 어느 것이 되었든 외부적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행위, 또는 자연 및 사회의 객관적 필연성을 인식하고 이것을 활용하는 일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전자의 경우는 개인적 자유를, 후자는 사회 등 외부 환경 하에서의 자유를 말하고 있다. 결국 이 둘은 어디선가 충돌하고 소음과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J.S.밀은 이처럼 개인의 자유가 사회와 맞닥뜨리게 되면서 불가피하거나 불가결하게 침해받거나 통제되는 현상에 부당성과 불법성이 개입될 수 있음을 보았으며, 이에 대한 경계, 그 한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함을 직관했던 것 같다. 따라서 『자유론』은 “개인에 대해 사회가 정당하게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본질과 한계”라는 시민적, 사회적 자유에 대한 논지를 핵심으로 전개하고 있다. 개인의 자유는 어디까지이며, 사회는 그 자유의 어느 지점에서 권력을 행사하여야 하는가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오늘의 사회는 거대한 정부와 다양한 사회집단, 게다가 민간기업조차 대규모화되면서 개인과 이들 집단과의 마찰의 형태는 엄청날 정도로 다양하며 복잡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즉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억압하려는 권력화 된 집단들이 무수히 증가하여 그 어느 시대보다 시민적 자유는 위협을 받고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자유의 자기중심적 발현으로 인해 공동체의 건강성이나 사회적 안정에 해악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시민과 사회적 자유에 대한 최초의 담론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은 오늘의 우리에게 개인적 자유와 권력의 한계에 대한 판단의 귀중한 가치 기준을 제공하고 있다 할 수 있다.

개인의 자유에 간섭하는 것은 언제 정당화될 수 있는가?

밀은 공리주의자답게 “사회 전체의 부를 감소시키는 것이나, 전체의 행복을 감소시키는 것”은 사회가 간섭할 수 있는 개인의 자유라 주장한다. 이는‘벤담’의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절대적 공리주의에서 조금 후퇴한 논리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행복의 크기를 침해하지 않는 한, 오히려 개인의 자유는 절대적으로 보호되고 지켜져야 한다는 자유지상주의적 견해라고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여기서 밀은 자신만의 공리를 내세운다. 개인의 자유재량에 일임하는 것이 전체적으로 보아 이익일 경우, 사회가 통제하면 오히려 개인보다 더 큰 해악이 발생할 경우, 사회가 단지 간접적 이해관계만을 갖는 경우의 개인의 자유는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와 간접적 이해관계를 갖는 자유는 왠지 개인의 절대적 자유로서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어 보인다. 개인이 직접적으로 특정한 타인에게 행한 것이 아니지만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있다. 언론과 출판의 자유, 결합(결사)의 자유는 이러한 유형의 대표적인 자유 형태가 될 것이다.

왜 언론 출판의 자유 등 간접적 이해관계의 자유는 절대적 자유이어야 하는가?

인간의 내부 의식세계의 영역에 있는 양심의 자유, 사상과 감정의 자유, 기호의 자유와 행복추구의 자유가 절대 불가침의 자유라는 점에 이의를 제기하는 지성은 없다. 그런데 사상의 자유와는 유사하지만 언론, 출판의 자유는 개인 일신상의 내면에 머물지 않고 공중을 향해 드러나는 자유이기에 의도하지 않지만 간접적으로 불특정인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즉 개인을 넘어 타인과 관계를 맺게 되는데, 이러한 자유에 절대 불가침의 권능을 부여하면 해악이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떨쳐내기 어렵다. 그러나 밀의 논리는 의외로 간결하고 명확하다. 그 첫째 이유는 어느 누구의 의견도 ‘절대무오류’의 진리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억압하려 애쓰는 의견이 잘못된 의견이라고 단정할 정도로 우리는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세상은 절대로 아무런 잘못도 범하지 않는다는 맹목적 신뢰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으며, 시대라는 것도 개인 못지않게 잘못을 저질러 왔으며, 절대적 확실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부정하고 침묵을 강요당하는 의견이 진리 일 수 있음을 차단하는 형국이 되어버려 전체의 행복을 감소시킬 수 있다고 지적한다.

둘째는 억압되는 의견이 설혹 잘못된 것일지라도 지배적 의견이란 항상 완전한 진리가 아니기에 일부 진리를 포함할 수 있으며, 셋째는 이미 일반에 널리 인정된 진리가 있을지라도 활발한 논쟁이 허용되지 않을 경우 대다수는 편견을 품어 합리적 근거를 이해하고 실감하는 일을 잃어버리게 되며, 끝으로 참된 진실로 향하는 전제인 비판을 통한 완전한 진리의 추구를 방해하여 인류의 인성과 행동에 미치는 결정적 영향력을 상실시켜 진리의 확신을 미완에 그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언론과 출판의 자유가 통제되고 억압된다면 개인들은 누구의 비위도 거슬리지 않으려는 기회주의적 태도로 결코 진리를 이야기하려 하지 않거나, 두려워 정신적 발전이 전면적으로 위축되고 이성이 겁에 질려 사상의 발전은커녕 획일화로 인한 편협한 세상으로 퇴보하게 되고 말 것이다.

자유와 개성, 그리고 개인주의에 대해서

반대 의견을 충분히 자유롭게 비교해본 결과, 즉 자유와 다양성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결코 진리를 발견 할 수 없으며, 이 다양성은 개성을 창조하고 발전시킨다. 개성의 시대라고 부추기는 오늘은 자유의 기초위에 서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이 개성이란 것이 자제력을 상실하고 오직 욕망과 충동으로 치달아 좋지 못한 행위로까지 비난받기도 한다. 균형을 잃어버렸다는 지적인데, 그렇다면 개성은 억제되어야 한다는 것일까?

공리주의적 논리를 역설적으로 적용하였을 경우 그 개성이 공중에게 어떤 어리석고 저속하며 타락적인 해를 주는 것일지라도 존중되어야 하는 것일까? 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을 볼 권리, 싫은 것을 피할 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아닐까? J.S.밀도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는 행위는 도덕적 벌과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데 동의하지만, 단지 비호의적 판단인 악평과 긴밀하게 결부되어있는 불편일 뿐인 만큼 감수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태도는 오늘날 개인주의로 고착화되어 공동체의 의식을 저해하고 이기적 개성을 중시하는 민주주의 타락이란 오명으로 연결되어 오히려 시민의 권리를 위협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밀의 주장은 절대적 진리가 아니다. 시대가 지나면서 과거의 진리가 새로운 시대의 진리에 부정되기도 한다. 진리는 공리적으로만 판단 할 것이 아니다. 여기엔 중대한 함정이 있어 보인다. 공동체의‘연대의식’이라는 자연적 의무나 합의를 필요로 하는 자발적 의무를 넘어서는 의무에 적대하게 되는 것이다. 자유에서 출발한 개성도 사회라는 공동체의 정체성을 파괴하는 욕망의 과잉으로 내 닫게 되면 우린 그것에 무언가 간섭을 해야 하지 않을까? 칸트의 말처럼 인간을 쾌락, 즉 전체의 행복의 도구로만 보는 그런 자유의 정의는 왠지 도덕적으로 수용하는데 어려움을 느끼게 된다.

결 어

근대적 시민의 자유에 대한 최초의 정의에 나선 이 책은 이와 같이 사상과 언론의 자유, 그리고 인간의 개성이 자유의 필수 요소로서 존중되어야 하는 이유와 개인과 사회적 권위의 경계와 한계, 시민적 자유의 공리적 권위를 지니는 원리의 실질적 적용에서의 문제라는 주제로 사회와 국가, 개인의 자유에 대한 다층적 사례와 분석을 수행하고 있다. 우리가 오늘을 살며 부딪치는 각양의 정의의 문제에는 자유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가 있다. 인간 정신의 진보를 위한 진리의 발견이라는 본질적이며 인간사회 전반의 기초를 이루는 자유의 기준에 대한 밀의 공리는 세상을 보다 신중하고 입체적인 관점에서 생각토록 견인한다.

다른 의견이 존재한다는 것은 대단히 유용한 것이다. 잘못되고 버려진 의견이 진리일수도 있으며, 진리성을 명확히 이해하고 느끼기 위해서는 반드시 잘못과 싸우는 것이 필수불가결의 조건인 것이다. 모든 학문이나 종교적 진리조차 치열한 공박과 싸움에서 비로소 참된 의미로 접근해왔다. 논쟁이 가라앉는 것은 의견의 통일이 될 수 있지만 의견의 다양성의 범위가 좁아져 진실과 진리의 방향을 상실 할 수 있다. 더구나 진리는 두 편이 나누어 가지는 경우도 있다. 서로가 진리의 한 부분에 불과해서 반대의견을 통해 보충되고 완전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유의 정의를 넘어 개방적이고 진리에 대해 열린 자세를 취하는 위대한 지성으로부터 배우게 되는 자유와 정의, 진리의 탐구는 시민적 자유, 사회적 자유라는 정치철학 그 이상의 엄숙한 삶의 태도를 가르쳐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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