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 본능 - 불, 요리, 그리고 진화
리처드 랭엄 지음, 조현욱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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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행태와 습속, 외양 등 우리가 왜 오늘의 이러한 모습을 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궁금증에는 바로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규명함으로써 인간 자신에 대한 이해라는 진실에 보다 가까이 다가서려는 욕구가 바탕을 이루고 있다. 인간을 지배하는 신체의 형태, 행동 양식, 사고방식 등에 생태계의 어떤 선택압(選擇壓)이 작동하여 진화를 이끌었는가 하는 의문이다.
직립보행하게 된 배경, 나무에서 내려와 대지를 삶의 바탕으로 삼게 된 이유, 뇌가 커지고 생각을 하게 된 압력, 성별로 차별화된 기능분담이 이루어진 원인 등등, 이러한 것들로 진행하게 한 어떤 자연적 힘, 그 결정적 요인을 안다는 것은 바로 오늘의 우리를 이해하는데 있어 지극히 중대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에 대해 그간의 인류는 무수한 답을 내놓았다. ‘놀이’하는 인간,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 ‘불’을 사용하는 인간과 같이 우리가 인간이게끔 구별된 종으로써의 진화와 또한 인간의 본능과 문명 행태를 설명하는 요인으로 제시되고 있다. 사실 이러한 가설들 중 하나는 인간의 진화를 설명하는 진실일지도 모르지만 여전히 그것들로만 인간의 본성을 설명하는데 우리는 어려움을 겪는다. 그런데 저자 ‘리처드 랭엄’은 이와 같은 견고한 가설들에 또 하나의 가설을 더하고 있다. 의외의 주장으로 ‘화식(火食)가설’이라는 익힌 음식을 먹게 됨으로써 인간은 인간만의 독특한 진화로 나아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불 피우기 ; 화식은 어떻게 해서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었는가」라는 원제목이었더라면 훨씬 이 책의 정체성을 이해하는데 수월했을 것이다. 『요리 본능』이라는 번역판 제목은 마치‘요리’능력이 생래적으로 각인되어 있었다는 터무니없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결코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현생인류로의 진화를 이루어가는 과정에 ‘요리본능’을 발휘한 적은 없다. 단지 익힌 음식, 불에 굽거나 두들겨 연해진 음식을 먹게 된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의미일 뿐이다. 그래서 더욱 호기심을 자극한다. 단지 익힌 음식이 어떻게 직립으로, 나무에서 대지로, 성별에 따른 기능분화로, 사회화로 이끌었는가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을 야기하는 것이다.

우선 뇌의 무게가 여타 유인원을 제치고 커지게 된 이유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저자는 이를 먹거리의 차별에서 찾고 있다. 뇌는 신체의 다른 어떤 기관보다 많은 에너지를 요구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특히 침팬지와 같은 타 유인원보다 고열량의 음식을 섭취했음을 증명해 내지 않는 이상 설명할 수 없다. 오랜 시간 씹어야 하고 소화하는 데 또한 장시간을 요구하는 거친 풀과 열매와 같은 음식으로서는 고 칼로리를 확보 할 수 없다. 우리의 조상은 이들과는 달리 부드러워 씹고 소화가 쉬운 연한 뿌리식물들, 과즙이 풍부한 과일들, 그리고 약간의 육식을 함으로써 그들과는 차별화된 섭생을 함으로써 신체의 내장기관을 대폭 줄였으며, 이들 내장기관이 소화를 위해 요구하는 막대한 열량을 뇌로 보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 침팬지나 보노보, 오랑우탄과 같은 유인원에 비해 인간의 내장은 신체크기에 비해 1/3에 불과할 정도로 작다. 이것이 바로 먹거리가 선택압을 다르게 작동시킨 결과이며 뇌의 용량이 커진 것을 설명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뇌가 커지게 됨으로써 보다 넓은 영역에 대한 관점을 제공하고 사고의 능력을 신장시켰다는 것이다. 한편 고 열량의 에너지원은 수렵을 통한 육식이 가능해야 함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여기서 생식의 문제가 대두된다. 질긴 고기를 날 것으로 먹었을 때 실제 위와 대장에서 소화하는 양은 극히 적어 대부분은 소화되지 못하고 덩어리가 되어 배설된다고 한다.

이것은 야생 유인원들의 섭생에서도 발견되는 현상이며, 원시 부족들의 식생활에서도 발견되는데, 유인원들이 단백질 보충을 위해 타 동물을 살생하더라도 부드러운 내장만을 먹고는 질긴 고기를 방치한 채 버려두는 양태라든가, 원시부족의 극히 예외적인 생식에서도 연한 지방이나 내장은 먹지만 고기는 익혀서 먹는 행태가 그것을 입증한다고 한다. 바로 현생인류로의 비약적 발전인 뇌의 용량의 증대와 내장기관의 축소는 불을 통한 고기의 익힘으로써, 부드러워진 음식으로 소화를 용이하게 하여 비싼 대가를 치루던 소화기관의 열량을 뇌로 보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불에 거친 야생의 음식들, 열매, 풀뿌리, 생고기를 익힘으로써 씹고 소화하는 시간을 괄목할 만큼 줄이게 되었으며, 이는 곧 일생을 먹고 소화하는데 분주해야 했던 삶의 시간을 혁명적으로 바꾸게 했다는 것이다. 사냥은 매일 할 수도 없는 것이고, 또한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불이 없다면 오랜 시간을 요구하는 채집하고 씹고 소화하는 식물성 음식의 생식을 포기하고 성공률이 극히 낮은 사냥에 실패했을 경우에는 이는 곧 죽음이라는 생명의 담보를 요구하는 위험한 행위였기에 쉽게 수행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었다. 그러나 불을 통한 익힌 음식은 획기적으로 여유 시간을 만들어 냈고, 사냥의 시간을 확보케 하였으며, 육식의 기회가 그만큼 증가하게 됨으로써 뇌를 비롯한 신체구조의 변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결국 화식(火食)은 이러한 인간의 신체적 진화를 설명하기도 하지만, 인간의 독특한 생활구조인 사회성을 설명하기도 한다. 유인원을 비롯한 야생의 동물들은 자기의 먹을 것을 나누어 먹지 않는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이전의 우리 조상들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불에 익힌 음식은 오래 저장할 수 있었고, 불가에 둘러 앉아 관계성을 갖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곧 사회적 구조를 가능하게 만들어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는 남녀 성(性)의 차이에 따른 기능분담이라는 의미심장한 배경이 이면에 놓여있다고 주장된다.

신체적으로 남성에 비해 작은 여성이 자신의 채집 식량을 쌓아두고 홀로 불에 익혀 먹는 것은 수월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불을 피워 음식을 익히는 냄새는 주변 남성들의 약탈을 촉발 했을 것이며, 여성은 완력으로 이를 지켜낼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여성은 음식을 특정 남성에게 제공함으로써 자신의 식량을 지키고자 했으며, 이렇게 여성으로부터 제공된 안정적인 음식의 제공을 받은 남성은 사냥을 하기위한 시간의 확보는 물론, 안정적인 생존이 가능했을 것이다. 결국 저자는 지금까지의 진화론적 정설을 뒤집는 주장을 하는 것인데, 여성의 남성 선택이 성(性:sex)적 선택이 아니라 식량, 즉 먹거리의 보존을 위한 것이라는 새로운 가설이다. 여성은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 남자를 기다리고 남자는 그 여성을 사회로부터 보호해 준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진화 속에 각인되어 현대 인류사회에 있어서조차 남성과 여성의 성적 구분에 의한 가사분담의 역할 구분으로 나타나는 뿌리깊은 본성 중의 하나라는 것이며, 성은 음식보다 후차적인 것으로서 먹는 것이 제1의 본능이라는 점을 확인하는 것이다.

화식이 인간이 되게 한 결정적 요인이었음을 주장하는 이 책의 여정에는 이 밖에도 흥미로운 주제들로 넘쳐나고 있다. 생식과 다이어트의 그 역설적 관계는 아주 대표적인 화식가설 주장의 논리적 뒷받침으로 등장하는데, 소화율을 보더라도 익힌 음식에 비해 절대적 열위인 생식은 그 음식이 가진 열량을 흡수하지 못함으로써 불가피하게 야윌 수밖에 없는 것이니 다이어트 효과가 반대급부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과연 생식이 인간의 섭생에 익힌 음식보다 유익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가능해진다. 200만년 이상 거슬러 올라가는 인간의 진화 역사를 보더라도 불에 익힌 음식이 인간을 만든 이상 이를 역행하는 생식이 인간의 신체에 더 유용하리라는 주장은 왠지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불에 탄 음식에는 발암불질이 발생한다고 하지만 인간은 이에 대항하는 유전적 요소를 또한 진화시켜 왔다는 것이다. 생태학, 심리학, 동물학, 진화생물학, 인류학, 고고학 등 다채로운 이론적 배경과 실험사례가 즐비하다. 이들을 통해 인류 진화의 혁명적 계기를 주장하는 이 책은 그만큼 흥미로우며, 재치 넘치는 지혜가 그득하다. 새롭게 보고 해석하려는 시각, 저자와 같이 세상을 보는 이러한 탐구자세가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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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 가든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6
기리노 나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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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무라노 미로’시리즈를 완결하는 4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소설집이다. 특히 미로 시리즈를 읽었던 독자로서는 이 소설집을 통해서 그녀의 삶의 원형을 확인, 완성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비로소 완결된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첫선을 보였던 『얼굴에 흩날리는 비』의 처음 장면부터 음울하게 흘러내리던 새벽녘의 빗소리처럼, 또한 SM 쇼와 같은 소재에서 느껴지던 특유의 욕망의 끈적거림에 내재된 어둠과 죽음의 그림자와 관능적이며 그로테스크한 세계에서 전율케 하던 근원을 이해하게 된다는 점이다.

표제인 단편「로즈 가든」은 죽은 남편으로만 등장하던 ‘히로오’의 삶의 모습과 기억을 통해 미로라는 여인을 재구성하여 그녀의 치명적 독성을 이루게 한 요소들이 무엇인지 드러낸다. 더구나 『다크』에서 아빠 ‘무라노 젠조’를 의붓아버지임을 부각함으로써 적개심까지 불태우던 그 심리적 배경이 된 원인을 목격 할 수도 있다. 의붓아비와 소녀 미로의 금지된 장난, 그리고 이 야릇한 비밀이 발산하는 퇴폐적이기 조차한 어떤 원시적 관능까지 몽환적 분위기를 한껏 돋운다.

한편 시리즈 각 작품에 공히 흐르던 인간 모두가 내밀히 품고 있는 악의(惡意)를 단순한 일상으로부터 발견케 하는 「표류하는 영혼」이라든가, 「혼자 두지 마세요」와 같이 사랑과 욕망의 혼돈, 그리고 거짓과 분노하는 인간을 목격할 수 있으며, 마지막으로 수록된 단편인 「사랑의 터널」은 마치 미로시리즈에 등장했던 온갖 불온하고 불편했던 존재들이 뿜어내는 은폐된 폭력과 강압, 은밀한 욕망의 집산지처럼 극한의 자극 세계를 좇는 감각이 마비된 현대인들의 어두운 공조를 까발린다.

이러한 작업은 욕망에 취약한 인간의 정신, 불완전한 인간세계, 악의에 대한 해방을 염원하는 미로의 세계, 우리들이 진정 헤어나야 할 닫힌 공간으로부터의 탈출, 어둠의 미세한 균열을 찾는 여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니게 한다.
이렇듯 기리노 나쓰오의 작품은 인간 욕망의 이면에 감춰진 어둠의 세계를 파헤치기에 엽기적이고 음침하며 음란하기조차 한 소재들로 인한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지만 치밀한 복선, 논리적 정교함을 통해 우아하기까지 한 분위기로 전환되는 탓에 그 기이한 마력에서 쉽사리 발을 빼지 못하게 한다.
장편『천사에게 버림받은 밤』을 연상시키는 단편「혼자 두지 마세요」에 등장하는 게이바, 호스트바, 포르노그래피 등 어두운 욕망이 암약하는 오늘의 세계, 그것이 딛고 있는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세계의 심각성이 발작적 슬픔처럼 다가오게 하기도 한다.

또한 장편 『다크』에서 선악 관념이 더욱 흔들리고 보다 감성적 인물로 변한 미로를 접했던 독자로서 증오와 삶의 체념에 사로잡혀 있는 인물인 그녀의 내면이 왜 지옥의 어둠 같이 뒤틀린 잔인한 무엇으로 가득 차 있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또한 폭력적 분노, 광기에 휩싸인 미로의 거침없는 감정의 질주처럼 악마적 탐욕스러움으로 그녀에 대한 기존의 이해를 완전히 전복시켰던 장면들이 이 세계의 당혹스런 도덕성에 직면케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지향했던 반항과 반란의 열망이었음에 대한 이해를 완성시켜준다.

매혹되었다는 말이 그대로 적용되었던 미로 시리즈를 완결하는 이 소설집을 덮는 심정이 아쉽기만 하다. 붉은 장미 같고 독사를 품은 것 같은 여인, 순수함과 관능을 동시에 발산하는 이 여인에 중독된 독자들에게 『로즈가든』은 위안을 삼게 해 줄 작가의 배려인 듯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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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신자들 - 대중운동의 본질에 관한 125가지 단상
에릭 호퍼 지음, 이민아 옮김 / 궁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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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나 발칙한 인간 정신, 그리고 사회심리에 대한 해체이다. 어떤 지배 질서에 반목하는 존재들의 광신적인 몰입이 없다면 진보도 발전도 없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주류의 무능과 무력함이 노정될 때 자기모멸과 자기 책임회피를 도모하는 좌절한 인간들의 결집이 대중운동의 본성이며, 바로 이러한 운동에 참여하는 맹신적 믿음에 포획되는 인간의 심리를 역사적 통찰을 통해 분석해 내고 있다. 또한 교활한 언어로 말한다면 민중봉기를 위한 심리교본이자 대중운동 지도자의 지침서라고 해도 될 듯하다.

인간의 역사 이래 이러한 대중운동의 유형은 종교적 맹신, 민족주의적 맹신, 체제와 이념에 대한 맹신이라는 종교화된 광신적 현상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무릇 인류의 역사는 기존의 질서를 전복함으로써 새로이 열리는 과정의 반복이다. 이러한 전복, 혁명은 대중이 질서정연하고 평화로우며 쾌적한 세상에서 실현 된 적은 없다. 현실의 삶에 환멸을 느끼고 무력감에 젖어들며, “창조적 물줄기가 메말라버려” 좌절하게 되는 시대를 토양으로 한다. 설혹 이와 같은 환경이 무르익어 민심이 이반되어 있지 않을지라도 운동할 적정의 대지를 조성하고, 대중을 설득하여 운동의 대열에 참여케 하는 종교화된 열정을 주입하고 유지하며 혁명을 도모 할 수도 있다. 실제 역사는 그런 모습들을 보여준다.

맹신자들은 대체누구인가?

그렇다면 운동에 참여할 대상인 대중이란 누가 적절한가? 지배 질서에 냉소적이고 저항하는 사람들은 누구란 말인가? ‘에릭 호퍼’는 그들을 ‘좌절한’ 사람들이라고 답한다. 현재의 삶에 충만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그 세계를 좋은 곳으로 인식하는데 굳이 현실을 버리려 하지 않는다. 결국 변화를 선호하는 것은 좌절한 사람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좌절의 원인이야 재산이기도 하며, 창조력이기도 할 것이고, 사회의 지위 등 계급이기도 할 것이다. 또한 해소되지 못한 권태에 만연한 자이기도 할 것이며, 이기심으로 뼈저린 실망에 사로잡힌 자일수도 있고, 죄의식에 휩싸인 인간일 수도 있다.

한편 이 좌절한 사람들은 결코 중산층의 대중에서 출현하지 않는다. 역사란 놀이는 항상 최상과 최하위층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 평균적인 인간들인 중산층은 타성적이어서 현재의 삶을 파괴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최하층의 사람들이 두드러진 영향을 발휘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현재 상태를 털끝만치도 존중”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며, “언제든 현재의 인생을 내버리고 파괴할 준비가 되어있는”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최상층의 혁명도 이와 다르지 않다. 17세기 영국의 지주와 귀족이 사회질서를 전복한 부자들이 일으킨‘종획운동’이나, 19세기 초‘산업혁명’은 현재를 파괴함으로써 혁명을 완수한 불만세력의 대표적 봉기이다.

그렇다면 이들 좌절한 사람들의 열정적 헌신에 의해 결집된 대중운동을 성숙, 유지시키고, 성공적 혁명 완수를 위한 요소와 조건들은 무엇일까? 이 좌절한 사람들의 속성을 이해하는 것에 해답이 있다.
이들에게 대중운동이란 자기발전 욕구를 충족시켜서가 아니라 자기부정이란 열망을 충족시켜준다는 데 있는 것이다. 즉 대중운동의 숭고한 대의에 대한 신념이 잃어버린 자신의 믿음을 대신한, 개인적 희망을 대체하는 것이기에 그들은 엄청난 힘을 발휘하여 몰입한다.

맹신자들을 계속 맹신자로 이끄는 법

숭고한 대의, 국가나 세계를 변혁하려는 운동에 나섰다면 이들 맹신자들을 변함없이 대중운동에 붙들어 매야한다. 그들에게 부푼 희망의 불을 지피고 일으키는 방법을, 그리고 유지하여 마침내 승리를 거두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이 좌절한 맹신자들 중 가장 강경한 맹신자들, 뛰어난 광신자들을 추려내야 할 것이다. 절망적 열정에 사로잡혀 숭고한 대의에 헌신할 자들 말이다. 아마 글쓰기, 그림, 작곡 따위의 창조활동을 향한 열망에서 가차 없이 실패한 자들만큼 영구적 부적응자도 없을 것이다. 이들 지식인층의 무리는 대중운동의 끈끈한 공동체 안에서 자신을 잊음으로써 영원히 끝나지 않을 수레바퀴에서 헤어 나오는 것이니, 그 어떤 좌절자보다 열정적인 광신자들이 된다.

이처럼 “지지자들을 끌어들이고 지키는 것은 본질적으로 좌절한 사람들의 심리 고유의 경향과 대응 방식을 고취하도록 도야하는 필수불가결의 기술”이다. 효과적 대중운동을 위해서 죄의식을 키우는 것 만한 것도 없다. 개인의 개성과 독립성을 벗겨내어 도덕적으로 저열하다고 가르치는 것, 구원은 자신을 잊고 전체와 하나 되는 행위이다. 유대 기독교가 그러했고, 프랑스혁명, 독일민족주의, 모든 대중운동이 그러했다. ‘나’라는 개인이 깨어나서는 안 된다. 또한 현재를 비열하고 비참한 것으로 끊임없이 묘사해야 한다. 울적하고 고단하며 억압적이고 생기 없는 개인의 삶이라는 원형을 빚어내어 현재는 단지 영광된 미래의 연결고리에 불과하다고 금욕적 설교를 반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를 증오하고 증명 할 수 없는 미래의 환상에 맹목적인 믿음을 헌신케 해야 한다. 강력하고 영광스러우며 파괴되지 않는 무언가의 일부가 된다는 환상, 팔레스타인 유대인의 시온주의는 바로 이러한 불멸의 민족이란 웅원한 이상의 일원이 된 존재임을 강력하게 주입한 대표적 예이다. 이것은 그 대의가 신성하거나 정의로워서가 아니다. 자신들이 열정적으로 매달릴 무언가가 성립했기 때문인 것이다. 믿음을 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수많은 불신이 필요할 뿐이다. 의식과 이성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절대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난해하면서 모호한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증명 할 수 없는 이상이어야 안전하다. 광적인 신념을 불러일으키고 자신은 오직 전체의 일부로서 불멸의 존재라고 느끼게 하여야 한다. 맹신자는 영원히 불안한 존재이다. 개인이 자신의 지성을 믿고 의지하는 순간 운동은 실패한다.

대중 운동의 시작과 성공

평화 시(時)의 민주주의 국가, 다소 자유로운 개인으로 구성된 체제에서 대중운동이 시작될 가능성은 없다. 더구나 자기희생을 덕목으로 하는 맹신의 환상이 확산되기에는 더없이 열악한 환경이다. 더구나 권력층과 지식층의 유대가 돈독하고, 교육 받은 자가 전부 관료이거나 이들에게 높은 지위가 인정되는 곳에서는 저항운동이 들어서기 어렵다. 조선의 양반사대부 사회가 그렇고 유럽의 중세가 그러했다. 교육 받은 자가 모두 성직자였던 시대, 양반귀족이었던 시대는 저항세력이 자리 잡을 여지가 없다. 그러나 교육이 이들의 전유물에서 풀려나는 순간 종교개혁이, 동학혁명이 일어났다. 프랑스 계몽주의의 민족주의 광풍을 타고 일어난 프랑스 혁명, 독일 지식인들에 의한 민족주의 창시가 그러했다.

지식인이 끊임없이 지배질서를 소용돌이치게 하여야한다. 무능하고 무력하며 부정하고 부패하여 환멸만을 낳는 기성 권력에 대해 증오를 발산하여야 한다. 그러나 창조적 지식인은 현재에 애착을 가진 자들이다. 그들은 결코 현재의 파괴에 나서지 않는다. 창조의 장벽에 막혀 좌절한 지식인이어야 한다. 그들은 막힌 자신들의 열정을 강렬한 증오로 뿜어 낼 것이다. 그리곤 좌절한 사람들 - 빈민, 부적응자, 부랑자, 소수자, 청소년, 야심가들, 따분한 자, 실업자, 신빈곤층, 불평분자 - 의 운동 참여를 통해 그들의 부담스런 자유를 구제해 주어야 한다. 운동의 대열이란 “소속되고자 하는 열망, 다수의 결집에 대한 열망, 강력한 전체라는 위엄 넘치는 장관 속에서 저주 받은 개인으로서의 존재를 해체하고자 하는 열망”을 충족시켜주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대중운동

에릭 호퍼가 이 책을 썼던 1960년대와 오늘의 시대적 환경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대중의 심리적 근인(根因)은 바뀌기는커녕 오히려 더더욱 답습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기 이익만 좇는 무차별적 금융자본을 앞세운 시장자유주의는 양극화의 고착화로 점차 엘리트 관료사회화 하며, 지배계급을 고착화시키고 있다. 양질의 교육받은 자가 모두 엘리트관료가 되려는 사회, 유럽의 중세와 조선 사대부사회와 다를 것이 없다. 진정한 정신의 변화가 멈추고 정체되어 썩어 문드러지는 암흑의 시대, 과거로의 복귀라는 수구의 시대로 회귀하려 한다.

이는 진정한 민중봉기의 씨앗을 밟아 인류사회의 진보와 발전, 문명의 지속적 부흥을 봉쇄할 수 있다. 더구나 역사를 보는 인식조차 사대주의와 수구적 태도로 인하여 민족학적 지능이 위축되어 시민정신이 제대로 발육하지 못하고 있다. 이젠 미국을 유럽을 모방하는 자세로는 한없는 추락의 길만을 마주할지도 모른다. 새롭게 미치기 위해 우린 이러한 지배체제와 불화하여야 한다. 눌려있는 대중의 잠재적 역량은 깨어나야 하며 고인 물을 퍼내고 그래서 새로운 수로를 만들어 내야 한다. 맹신, 광신주의는 영혼의 질병이기도 하지만 이 질병을 통해서 우리 인간은 부활한다. 대중운동의 발동은 사회부흥이라는 과업을 성취하는 대중의 가장 유용한 도구이다. 무함마드, 루터, 칼뱅, 히틀러, 레닌, 스탈린 같은 광신자들도 있지만 이들 못지않게 대중운동의 생리를 터득해 인류의 혁명적 진보를 완수한 링컨, 간디, 처칠 같은 이들도 있다. 대중운동의 선동책이란 비루함이나 교활함으로 읽힐 수도 있지만 자칫 부패하기 쉬운 인간 사회를 교정하는 안내서로서, 사회 지도자의 대중 리더십을 위한 지침서로서 읽는다면 호퍼는 진심의 환한 미소 지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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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랑드르인의 집 매그레 시리즈 14
조르주 심농 지음, 성귀수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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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농’의 ‘매그레’시리즈 작품과의 첫 대면이다. 첫 인상치곤 낯설지 않다. 격렬한 긴장이나 수위 높은 자극으로 과도한 감정의 소모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편안한 자세로 느긋하게 읽어야 할 작품이란 의무감을 들게 할 정도이다. 그래서 소파에 길게 누워 읽을 요량이었는데, 어느 새 입맛을 다셔야 하는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는 아쉬움으로 게으름의 만끽을 앗아가 버린다. 설명이 필요 없는 감정, 정말 재미있다는 것이다.

어디 출장이나 여행 갈 일이 생기면 짐 속에 필히 시리즈 중 한 권을 끼워 넣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상의 강박을 해소하는 가벼운 긴장, 그리고 여유로움, 권태에서 살짝 비켜난 즐거움이 있다.  특히 이 작품에서만 그러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사건의 해결을 위해 달려가지만 한 걸음 뒤로 물러선 매그레 반장의 관찰자적 행동이 주는 중립성의 어떤 위안이랄까? 심드렁한 무심함 속의 예리함, 요즘에는 발견하기 힘든 외유내강의 인물이 발산하는 매력 때문이었을까? 아무튼 꽤나 빨리 매그레란 인물에 대해 친근함을 갖게 된 것은 분명하다.

라인강이 흐르는 벨기에와 프랑스의 국경지대 작은 마을‘지베’, 호우로 불어난 강물로 인해 운송선들은 발이 묶여있고, 플랑드르인 가족이 운영하는 작은 가게가 외로이 불을 밝히고 있는 전경이 눈에 그려지는 듯하다. 친지의 서신을 지닌 여인의 부탁으로 살인의 누명을 쓴 그녀의 가족을 위한 일종의 구명 수사를 위한 사적(私的) 방문이다. 법학 공부를 하는 남동생의 정부인 여인의 실종, 프랑스인이 주류인 마을의 여론은 돈 많은 이 플랑드르인 가족을 용의자로 몰아간다.

        

보잘것없는 공장 노동자 집안의 단정치 못한 여자가 아이까지 낳아들고 변호사가 되려는 플랑드르인 가족의 청년과의 결혼을 집요하게 요구한다. 이 불온한 여자의 행위는 플랑드르인 가족의 평온과 이상을 위협하는 것이다. 바로 그 여자가 실종되었으니 곱지 않은 시선을 이들에게 보내는 것은 일견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작가는 마치 사건의 수사, 범인을 찾아내려는 의지를 잃어버린 듯이 실종된 여자의 가족과 플랑드르인 가족의 면면, 즉 개개 인간들의 삶의 이면을 좇는다. 아마 이처럼 사람들 저마다의 내면을 형성하는 기질들, 그것들이 품고 있는 사연들에 우리의 관심은 훨씬 증폭되기 마련이고 그 신호들에 본능적으로 빠져들도록 유인하려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수사의 진행 상황은 매그레를 통해서가 아니라 사건담당 형사로부터 듣게 되지만 그가 진실에 접근하는 것은 애당초 어렵다는 것을 독자는 알게 된다. 왠지 진실은 매그레가 관심을 갖는 인간들의 삶의 모습이 내지르는 그 속성에 있는 것 같다는 믿음이 드니 말이다. 마을의 적대감에 고립된 플랑드르인 가족의 자기 보호를 위한 공고한 가족의 연대라는 중요한 덕목, 그들이 지켜내야 할 가치, 그 기대에 대한 정념은 구원수사 의뢰자인 ‘안나’라는 여성을 통해 어떤 과잉의 으스스함을 더한다.  

흐트러짐 없는 표정, 무표정한 온화함을 걸친 회색빛 여인, 그녀에 대한 매그레의 관심, 그것은 독자의 관심을 집중시키는데 이 특별한 여성의 성격은 이 소설의 분명한 매력 요소이다.
한편 반복되어 등장하는 피아노의 선율을 타고 흐르는 ‘입센’의 시(詩) 「솔베이지의 노래」는 이야기의 끊임없는 매개체가 되고 있는데, 사랑의 기다림을 약속하는 그 애절한 내용에 마비되는 것은 동서고금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겨울이 지나가도 / 사랑스러운 봄날이 / 흘러가 버려도... / 가을 낙엽과 / 여름의 열매가 / 모두 스러질지라도..., / 당신은 돌아올 거예요, / 오, 나의 멋진 연인이여, / 영원히 내 곁에 머물기 위해....”

여기에 비 내리는 부두와 물결에 흔들리는 무력한 배들의 한가로운 무리, 진흙길을 지나는 드문 발길들, 뿌연 빗줄기 너머 불 밝힌 외딴 주점, 경계에 선 사람들이 뿜어내는 알 수 없는 우수(憂愁)까지 더해 범죄 추리를 초월한 심연의 무엇을 자극하는 안온함이 작품 전체를 감싸 흐르는 것 같은 느낌에 빠져든다. 그것의 정체가 인간에 대한 연민이든, 고상하게 휴머니즘이라 말하든 따뜻한 밥이 차려진 식탁에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하고 있는 그런 좋은 기분이다. 아무래도 시리즈 나머지 작품들도 주문해야 할 것 같다. 물 흐르듯 유연한 인간 개성의 탐사와 함께 절로 다가서는 사건의 진실에 대한 접근은 가히 이야기의 참 맛을 가르쳐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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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살, 최고의 날
카를로스 발마세다 지음, 박채연 옮김 / 북스토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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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스 발마세다’의 소설은 달콤하고 관능적 음악이 흐르고 열대의 찬란한 색감들로 조화롭게 꾸며진 최고의 요리들, 자신들의 지성과 탄력 있는 육체를 과시하려는 선남선녀들이 즐비한 화려한 잔치를 연상시킨다. 감각의 풍요로운 향연, 드라마틱한 전개와 즐비한 지성의 요리들, 이 모두가 먹음직스럽게 차려져 육체와 정신의 구분이 없어지는 지고의 쾌락에 흠뻑 빠지게 된다. 요리와 섹스, 그리고 잘 갈린 은빛 칼날이 은밀하게 반짝이는 그의 전작(식인종의 요리책)이 발가벗겼던 인간의 욕망이 여기서 또 다시 빛을 발한다. 이번에는 신화와 문학, 오페라, 회화를 아우르는 예술 작품 속에 표현된‘열정적 사랑’에 깃든 본질의 탐색이다.

작품의 무대 역시 아르헨티나 남부 해안도시‘마르텔 플라타’이다. 왠지 이 도시에 있으면 절로 사랑에 빠지고 오감이 깨어나 생명력이 충만해질 것만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첫 페이지부터 감각들을 바짝 긴장시킨다. 절정과 감미로운 노곤함에 눈꺼풀을 스르르 감는 여인, 그녀의 기억을 여기에 멈추게 했던 사랑의 고고학적 발굴이 시작된다.

문학을 전공하는 서른 살의 대학 강사, ‘파울리나’는 박사 학위를 위해 <사랑과 연인들의 책>이라는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이것이 걸작인 게 소설 속에 총 9개장으로 이 논문이 에세이처럼 소개되고 있는 것인데, 주제의식과 사랑의 본질에 대한 제법 경이로운 이론까지 완비하고, 스토리와 상호 교섭하여 암시와 복선을 주고받으며 소설의 품격을 진부한 로맨스와 복수극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또 하나의 신화적 작품으로 올려놓는다는 것이다.

사랑과 배신, 증오와 복수의 실체, 열정과 그 소멸, 이에 반응하는 연인들의 참담함, 그리고 그 열정의 본질에 대해서 그리스 비극 『아이네이스』를 시작으로 『오셀로』,『트리스탄과 이졸데』,『페르 귄트』, 『피아노 치는 여자』등 오페라와 소설문학 속 비련의 연인들의 사랑의 자취를 거닐며, ‘옥타비오 파스’의 사랑의 비평과 ‘피카소’의 자화상이랄 수도 있는 인간의 육신을 한 수소 ‘ 미노타우로마키(La Minotauromachie)’가 뿜어내는 남성의 굶주린 욕망의 파멸성에 대한 해석까지 더해, 남자와 여자의 사랑의 색깔을 조명한다.

새로 부임한 동료 교수‘호나스’라는 남자에게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드는 것인데, “사랑은 육화된 열정”인 것 같다는 파울리나의 열정적 사랑에 대한 고백처럼, 쾌락을 줄 수 있는 서로의 몸을 느낄 수 없는 사랑이란 강박관념 같은 고통, 좌절과 공허일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사랑에 대한 체험적 논의들이 예술 작품들 여기저기를 누비며 사랑과 육체의 불가분성은 물론 연인의 육체에 대한 남성의 욕망의 속성, 그리고 사랑이 배신과 분노로 변질되고 증오와 죽음으로 연결되는 여정에 도사린 육체의 한계성을 부정으로서가 아니라 본질로서 파헤쳐 댄다.

여자의 사랑, 더구나 육화된 열정, 즉 육체를 잃어버린 사랑이란 이미 사랑이 아니라는 여자를 배신하는 것은 아마 죽음을 예약하는 무지가 되고 말 것이다. 그리스 비극작가‘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는 바로 배신한 사랑에 대처하는 여성의 화신이다. ‘입센’의 소설 『페르귄트』가 파울리나가 선택하게 될 사랑을 알려준다면, 『메데이아』는 사랑의 배신이 가져올 귀결이다. 열정은 그 열정의 사그라짐이 두려워 어느 순간부터 사랑을 확인하기 시작하려 한다. 그것은 공포다, 믿음을 흔들어대는 의심이 피어나는 순간 우린 사랑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리곤 다가오는 상실의 고통, 사랑은 그런 것이다. 사랑이란 육화된 열정처럼 간절한 쾌락임을 부정할 이유는 없지만 미노타우로스의 야수적 성애가 있다면 메데이아의 복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두어야 할 것만 같다. 가히 매혹적인 사랑의 고고학적 탐사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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