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 본능 - 불, 요리, 그리고 진화
리처드 랭엄 지음, 조현욱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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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행태와 습속, 외양 등 우리가 왜 오늘의 이러한 모습을 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궁금증에는 바로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규명함으로써 인간 자신에 대한 이해라는 진실에 보다 가까이 다가서려는 욕구가 바탕을 이루고 있다. 인간을 지배하는 신체의 형태, 행동 양식, 사고방식 등에 생태계의 어떤 선택압(選擇壓)이 작동하여 진화를 이끌었는가 하는 의문이다.
직립보행하게 된 배경, 나무에서 내려와 대지를 삶의 바탕으로 삼게 된 이유, 뇌가 커지고 생각을 하게 된 압력, 성별로 차별화된 기능분담이 이루어진 원인 등등, 이러한 것들로 진행하게 한 어떤 자연적 힘, 그 결정적 요인을 안다는 것은 바로 오늘의 우리를 이해하는데 있어 지극히 중대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에 대해 그간의 인류는 무수한 답을 내놓았다. ‘놀이’하는 인간,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 ‘불’을 사용하는 인간과 같이 우리가 인간이게끔 구별된 종으로써의 진화와 또한 인간의 본능과 문명 행태를 설명하는 요인으로 제시되고 있다. 사실 이러한 가설들 중 하나는 인간의 진화를 설명하는 진실일지도 모르지만 여전히 그것들로만 인간의 본성을 설명하는데 우리는 어려움을 겪는다. 그런데 저자 ‘리처드 랭엄’은 이와 같은 견고한 가설들에 또 하나의 가설을 더하고 있다. 의외의 주장으로 ‘화식(火食)가설’이라는 익힌 음식을 먹게 됨으로써 인간은 인간만의 독특한 진화로 나아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불 피우기 ; 화식은 어떻게 해서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었는가」라는 원제목이었더라면 훨씬 이 책의 정체성을 이해하는데 수월했을 것이다. 『요리 본능』이라는 번역판 제목은 마치‘요리’능력이 생래적으로 각인되어 있었다는 터무니없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결코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현생인류로의 진화를 이루어가는 과정에 ‘요리본능’을 발휘한 적은 없다. 단지 익힌 음식, 불에 굽거나 두들겨 연해진 음식을 먹게 된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의미일 뿐이다. 그래서 더욱 호기심을 자극한다. 단지 익힌 음식이 어떻게 직립으로, 나무에서 대지로, 성별에 따른 기능분화로, 사회화로 이끌었는가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을 야기하는 것이다.

우선 뇌의 무게가 여타 유인원을 제치고 커지게 된 이유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저자는 이를 먹거리의 차별에서 찾고 있다. 뇌는 신체의 다른 어떤 기관보다 많은 에너지를 요구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특히 침팬지와 같은 타 유인원보다 고열량의 음식을 섭취했음을 증명해 내지 않는 이상 설명할 수 없다. 오랜 시간 씹어야 하고 소화하는 데 또한 장시간을 요구하는 거친 풀과 열매와 같은 음식으로서는 고 칼로리를 확보 할 수 없다. 우리의 조상은 이들과는 달리 부드러워 씹고 소화가 쉬운 연한 뿌리식물들, 과즙이 풍부한 과일들, 그리고 약간의 육식을 함으로써 그들과는 차별화된 섭생을 함으로써 신체의 내장기관을 대폭 줄였으며, 이들 내장기관이 소화를 위해 요구하는 막대한 열량을 뇌로 보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 침팬지나 보노보, 오랑우탄과 같은 유인원에 비해 인간의 내장은 신체크기에 비해 1/3에 불과할 정도로 작다. 이것이 바로 먹거리가 선택압을 다르게 작동시킨 결과이며 뇌의 용량이 커진 것을 설명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뇌가 커지게 됨으로써 보다 넓은 영역에 대한 관점을 제공하고 사고의 능력을 신장시켰다는 것이다. 한편 고 열량의 에너지원은 수렵을 통한 육식이 가능해야 함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여기서 생식의 문제가 대두된다. 질긴 고기를 날 것으로 먹었을 때 실제 위와 대장에서 소화하는 양은 극히 적어 대부분은 소화되지 못하고 덩어리가 되어 배설된다고 한다.

이것은 야생 유인원들의 섭생에서도 발견되는 현상이며, 원시 부족들의 식생활에서도 발견되는데, 유인원들이 단백질 보충을 위해 타 동물을 살생하더라도 부드러운 내장만을 먹고는 질긴 고기를 방치한 채 버려두는 양태라든가, 원시부족의 극히 예외적인 생식에서도 연한 지방이나 내장은 먹지만 고기는 익혀서 먹는 행태가 그것을 입증한다고 한다. 바로 현생인류로의 비약적 발전인 뇌의 용량의 증대와 내장기관의 축소는 불을 통한 고기의 익힘으로써, 부드러워진 음식으로 소화를 용이하게 하여 비싼 대가를 치루던 소화기관의 열량을 뇌로 보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불에 거친 야생의 음식들, 열매, 풀뿌리, 생고기를 익힘으로써 씹고 소화하는 시간을 괄목할 만큼 줄이게 되었으며, 이는 곧 일생을 먹고 소화하는데 분주해야 했던 삶의 시간을 혁명적으로 바꾸게 했다는 것이다. 사냥은 매일 할 수도 없는 것이고, 또한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불이 없다면 오랜 시간을 요구하는 채집하고 씹고 소화하는 식물성 음식의 생식을 포기하고 성공률이 극히 낮은 사냥에 실패했을 경우에는 이는 곧 죽음이라는 생명의 담보를 요구하는 위험한 행위였기에 쉽게 수행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었다. 그러나 불을 통한 익힌 음식은 획기적으로 여유 시간을 만들어 냈고, 사냥의 시간을 확보케 하였으며, 육식의 기회가 그만큼 증가하게 됨으로써 뇌를 비롯한 신체구조의 변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결국 화식(火食)은 이러한 인간의 신체적 진화를 설명하기도 하지만, 인간의 독특한 생활구조인 사회성을 설명하기도 한다. 유인원을 비롯한 야생의 동물들은 자기의 먹을 것을 나누어 먹지 않는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이전의 우리 조상들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불에 익힌 음식은 오래 저장할 수 있었고, 불가에 둘러 앉아 관계성을 갖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곧 사회적 구조를 가능하게 만들어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는 남녀 성(性)의 차이에 따른 기능분담이라는 의미심장한 배경이 이면에 놓여있다고 주장된다.

신체적으로 남성에 비해 작은 여성이 자신의 채집 식량을 쌓아두고 홀로 불에 익혀 먹는 것은 수월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불을 피워 음식을 익히는 냄새는 주변 남성들의 약탈을 촉발 했을 것이며, 여성은 완력으로 이를 지켜낼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여성은 음식을 특정 남성에게 제공함으로써 자신의 식량을 지키고자 했으며, 이렇게 여성으로부터 제공된 안정적인 음식의 제공을 받은 남성은 사냥을 하기위한 시간의 확보는 물론, 안정적인 생존이 가능했을 것이다. 결국 저자는 지금까지의 진화론적 정설을 뒤집는 주장을 하는 것인데, 여성의 남성 선택이 성(性:sex)적 선택이 아니라 식량, 즉 먹거리의 보존을 위한 것이라는 새로운 가설이다. 여성은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 남자를 기다리고 남자는 그 여성을 사회로부터 보호해 준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진화 속에 각인되어 현대 인류사회에 있어서조차 남성과 여성의 성적 구분에 의한 가사분담의 역할 구분으로 나타나는 뿌리깊은 본성 중의 하나라는 것이며, 성은 음식보다 후차적인 것으로서 먹는 것이 제1의 본능이라는 점을 확인하는 것이다.

화식이 인간이 되게 한 결정적 요인이었음을 주장하는 이 책의 여정에는 이 밖에도 흥미로운 주제들로 넘쳐나고 있다. 생식과 다이어트의 그 역설적 관계는 아주 대표적인 화식가설 주장의 논리적 뒷받침으로 등장하는데, 소화율을 보더라도 익힌 음식에 비해 절대적 열위인 생식은 그 음식이 가진 열량을 흡수하지 못함으로써 불가피하게 야윌 수밖에 없는 것이니 다이어트 효과가 반대급부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과연 생식이 인간의 섭생에 익힌 음식보다 유익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가능해진다. 200만년 이상 거슬러 올라가는 인간의 진화 역사를 보더라도 불에 익힌 음식이 인간을 만든 이상 이를 역행하는 생식이 인간의 신체에 더 유용하리라는 주장은 왠지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불에 탄 음식에는 발암불질이 발생한다고 하지만 인간은 이에 대항하는 유전적 요소를 또한 진화시켜 왔다는 것이다. 생태학, 심리학, 동물학, 진화생물학, 인류학, 고고학 등 다채로운 이론적 배경과 실험사례가 즐비하다. 이들을 통해 인류 진화의 혁명적 계기를 주장하는 이 책은 그만큼 흥미로우며, 재치 넘치는 지혜가 그득하다. 새롭게 보고 해석하려는 시각, 저자와 같이 세상을 보는 이러한 탐구자세가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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