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목소리가 들려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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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세상이란 도화지에 수 천대의 오토바이로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했던” 소년의 승천(?) 이야기다. 보이지 않는 존재들, 아니 이 사회에서 그 존재자의 존재를 부인하고 무시했던 존재들을 비로소 보이는, 관심의 영역으로 인식하게 하고자 했던 오토바이 폭주족 소년의 분노의 울부짖음이다.

우린 낯선 무엇인가 눈앞에 있지만 무엇 때문에 저런 짓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때, 그 부정의 대상이 내 생활영역에 들어 올 것 같으면 불편해하고 그 불편하고 불안한 감정을 떨어내려 한다. 그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말하려하는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알 수 없는 존재가 되고, 이 알 수 없음, 대상에 대한 무지(無知)는 당혹스러움과 거북한 무엇이 된다. 그리곤 배제의 낙인을 찍어버리고 그것에‘불온한 것’이라 명명한다. 사회의 경계에서 내쳐야 하는 것들, 급기야 억압하고 폭력을 휘둘러 그 존재를 지워버리려 한다. 우리 사회에는 이렇게 불온 한 것들이 되어 주류 사회의 경계 밖으로 밀려나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린 타자가 무수하다. 장애자가 그렇고, 프레카리아트가 그렇고, 이 소설의 주인공들인 십대의 폭주족 소년 소녀들이 그렇다. 이들이 주류 사회에 대체 무슨 일을 했기에 존재자의 지위에서 지워버리려 하는 것일까?


소설은 바로 이 낯설고 불편해서 주류사회에서 추방되고 제거되어 버려 잊혀진 존재, 십대의 폭주족 소년을 통해서 분류하고 구별하여 존재를 서열화하는 우리들의 비루한 통념적 감각을 일깨운다. 십대 소녀가 고속터미널 화장실로 뛰어든다. 화장실 변기에는 터진 양수가 흐르고 뒤이어 앙칼진 생명의 울음소리가 길과 길이 만나는 그 무심한 광장에 울려 퍼진다. 무관심과 혼돈의 공간으로 이만큼 적절한 장소도 없을 것이다. 소년‘제이’는 이렇게 세상과 대면한다. 그러나 길러주던 여인마저 자기의 절망과 함께 사라지고 재개발사업이란 도시의 폭력 속에 외톨이가 된 채 소년은 남겨진다. 주류가 정상이라고 정의 한 것에 위배되는 한 바로 영역 밖의 세상으로 추방된다. 고아원이란 곳으로.

‘길’, 영역을 나누는 경계에서 태어난 아이는 그 위태로운 지대의 안에서 곧바로 바깥으로 내쳐진 것이다. 그래서 소년은 자신의 인생을 예감한다. “앞으로도 계속 길에서 살게 될 것 같다는.”


이 예감을 완성하는 첫 번째 전환점은 고아원 인근의 개 농장과 버섯 재배사의 화재사건이랄 수 있다. 개를 방치하고 달아난 인간, 불길을 피해 산 속으로 숨어든 개들, 이것들을 포획해 한 몫 잡으려는 개 잡이들, 소년은 여기서 인간의 폭력적 범주화를 목격한다. “죄, 잘못, 인간, 동물,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을 구분하는 게 인간이에요. 그러니까 잘난 척을 하는 거에요. 내가 인간이다.” 이 항변은, “고통을 외면하는 거에요. 고통의 울부짖음을 들어주지 않는 거에요. 세상의 모든 죄악은 거기서 시작해요.”라며 구별짓기, 서열화, 범주화로 인해 야기되는 우리의 무능한 감각에 문제가 있음을 발설하는 것이다. 타자의 읽기에 무관심한 우리의 이기심과 오만, 현대인의 나르시시즘에 분노하는 것이다.


이 사건은 제이로 하여금 고아원을 뛰쳐나오게 하는데, 소년을 맞이해 줄 세상이 없다. 아니 있다. 동류를 알아보는 그 범주화의 원시적 눈 때문에 그에게 말을 거는 소녀,‘목란(Mulan)'이 있다. 가출한 십대들, 가정으로부터 사회로부터 외면된 이들의 본능만 난무하는 세계의 경험은 그가 목란과 재회 할 때까지 방치된 소수자, 약자들의 세계의 적나라함, 리더로 군림하기 위한 기교를 체득하는 시간이 된다. 이제 길 위의 삶에 대한 예감을 완성하는 목란의‘가와사키 오토바이’가 등장하고, 소년 제이는 그들, 폭주족 무리의 리더가 된다. 바로 여기서 우리들의 초상, 할리 데이비슨을 모는 경찰 경위가 이들에 대한 비하와 동정의 양가감정을 수반하는 거부의 시선, 바로 그것으로 등장한다. 정말 가소롭고 희극적인 모습이다. 소설이 조롱하는 이 희화된 인물로 인해 낯짝이 화끈거린다.


폭주족 무리를 단속하던 의경이 숨지고, 이는 곧 주류에 대한 도전, 그래서 이 존재들의 말살을 위해 국가의 합법적 폭력기관이 나선다. 광복절 전야 대폭주의 정보를 움켜쥔 경찰은 이 불온한 것들을 때려잡기 위해 총동원된다. 이 행렬이 강북에서 강남을 잇는 한남대교를 들어 설 때, 주류의 대행자인 경찰간부의 다급하고 경망스런 발악이 들려온다. “강남으로 가게 놔뒀다간 다들 각오해!” 대체 국가가, 사회가 누굴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 배제된 이들 타자에게, 아니 어떤 인간이던지 타자 없이 단 한순간이라도 존재 할 수 있단 말인가? 한 술 더 떠서 압구정동 피부과 의사, 골프숍 운영 사업가등 지킬 박사들이 BMW, 야마하, 할리데이비슨 등 고급 기종의 오토바이를 몰고 나타나 폭주족 박멸에 경찰력과 함께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역겨운 우리들의 일그러진 모습을 대변한다. 과연 주류라고 하는 존재들이 이들 장애자와 십대 폭주족을 비난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들은 치킨 배달부이고, 자장면 배달부이며 퀵 운송업체 직원이고, 사회 약자들의 자식일 뿐이다. 그들에게조차 우리 역시 폐를 끼치고 사는 것 아닌가? 아마 가진 자들이 가장 많이 타인에게 폐를 끼치고 사는 자들일 것이다. 수많은 노동자가 과로하며 생산해주고, 누군가가 귀찮은 일을 기꺼이 감수해주었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 아닌가? 모든 존재자는 수많은 다른 존재자에 기대어 살 수 밖에 없다. 우린 운명적으로 장애자인 것이다. 누가 누굴 차별하고 서열화 한다는 말인가? 낯설고 불편한 것들은 적대하고 갈등할 대상이 아니다. 우리가 껴안고 보듬어 동등한 일원으로 함께해야할 존재자들이다. 우리의 잃어버린 보편적 진실에 대한 감각을 살려내는 한 편의 멋진 존재론적 사유를 이끄는 작품이다. 불온한 것들의 ‘있음’, 그 ‘실재함’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성수대교에서 승천했다는 제이, 그가 우리들, 주류사회가 망각했던 불온한 것들의 존재 목록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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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여행법 - 소설을 사랑하기에 그곳으로 떠나다
함정임 글.사진 / 예담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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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 그대로의 의미인‘여행’하는 방법에 대한 책일까? 아닐 수도 있고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다. 소설 속 무대인 도시의 거리와 풍경이란 특정 장소로 이동하고 그 감상을 말하고 있으니 여행기이다. 그러나 소설들을 읽고 그 소설의 주인공과 작가들의 영혼이 배어있을 공간을 시간을 초월하여 음미하고 그 감각을 깨워내는 작업이기에 단순히 여행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책의 제목을 해석하려 할수록 그 제목이 지닌 의미에 수긍을 하게 된다. 소설가(小說家)만이 하는 여행, 지극히 문학적(예술적) 행보라는 얘기다. 그래서 수십 편의 작가와 작품에 대한 ‘함정임’의 소설 여행 담론은 허구의 소설 작품을 현실의 공간, 바로 지금 여기라는 실체감으로 끌어오는 살아있는 서평이 되어 죽은 문장들에 숨을 불어넣어 우리에게 펼쳐 보인다.


그렇다. 이 책은 소설가의 애정이 곳곳에서 숨 쉬는 서평모음이다. 그 애정들이 우리들의 것과 아주 닮은 것이 많아서 그녀의 소설 사랑에 동화되어 버린다. 30여 편의 소설과 작가들의 작품을 축으로 하여 다양한 관계성에 얽힌 작품들의 비교문학적 소개로 거의 100여 편에 이르는 작품들의 맛깔스런 감상을 더불어 맛볼 수가 있다. 일례로 천명관의 작품을 얘기할 때에는 김영하와 김애란의 작품이 같이 등장하고, 애드거 앨런 포를 말할 때는 보들레르와 플로베르가 얘기되며, 헤밍웨이를 따라가다 보면 코리네 호프만과 카렌 블릭센을 만나게 된다. 이렇게 그녀의 감상들은 하나의 작품에서 여럿의 작품으로 확장되어 풍부한 이야기 거리들을 쏟아내고, 소설이 단순히 문학 작품의 의미 이상의 어떤 충일함으로 가득차서 다가오게 한다.


특히 이 책에 새로운 규정을 가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는데, 소설의 공간적 무대를 같이 거닐며 작품의 주인공이 되어, 혹은 작가의 분신이 되어 그 이미지가 체화된 상태에서 서평을 쓴다는 의미에서 장소적 공간의 어떤 정서적 내면화로 인한 애정이랄 수 있는‘토포필리아(topophilia)적 서평’이란 지위를 부여하고 싶다는 것이다. 물론 장소적 애정에만 머무는 것이라면 여행기에 불과하겠지만 문학이 있고, 삶의 철학과 인문학적 식견이 같이 넘실댄다면 그야말로 환상적인 서평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사실 영국, 프랑스, 터키, 그리스, 아일랜드, 미국, 페루, 아프리카 등 소설 속 무대가 된 지역을 모두 돌아다니며 읽고 쓴다는 것이 사치스럽기는 하지만 말이다.


책은 뉴요커인 폴 오스터의 <브루클린 풍자극>의 첫 대목으로부터 시작된다. 언젠가 맞이할 멋진 죽음의 장소, 그리고 자아 찾기라는 인간의 성찰을 얘기하면서 저자의 여행 변과 교묘히 쌍을 이루며 작품과 도시의 얘기를 풀어간다. 그리곤 허먼 벨빌이 그려낸 독특한 인물인 <필경사 바틀비>를 통해 소설은 인간의 조건을 묻는 것, 즉 인간학으로서의 소설론을 전개하기도 한다. 많은 작가들과 작품이 소개되고 있지만 내 눈을 유혹하는 것들은 아무래도 내가 읽고 감동을 받았거나 공감을 했던 작품들, 혹은 그 작가의 문장이나 글쓰기를 흠모하게 된 작가들의 얘기에 더욱 관심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카뮈가 그렇고 키냐르와 칼비노가 그렇다. 그 중에서도 ‘파스칼 키냐르’는 삶에 대한 내 의식과 가장 깊게 공명하는 작가인데, 그의 출생지인‘르 아브르’의 예술적 혼이 깃든 야외의 풍광과 삶의 궤적이 작품, 《옛날에 대하여》의 문장들과 조응하여 다시금‘아연실색’의 기운에 침잠하게도 한다.


또한 카뮈의 산문인 <티파사에서의 결혼>에 대한 저자의 감상은 그의 마지막 삶의 고장이었던‘루르마랭’과 묘지 곁에 놓고 온 명함의 인연이 어우러져 애틋함이 그대로 전달되어 온다. 그것은 나에게 잔뜩 쌓여 어딘가 놓여있을 그의‘결혼’에 관한 산문집을 찾아내는 수고를 하게하고, 어렵사리 헤집어 마치 새로운 발견이라도 한듯 흐뭇한 기분에 빠져들게도 한다. 그런가하면 시각적, 일상적 환상으로 환상을 구분했던 칼비노를 통해 네르발과 모파상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도 하고, 바로 그 환상이란 “잡히지 않는 것,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언어로 표현해 하나의 질을 내고, 형상을 창조해 내는 것”으로서의 소설의 본질을 이해하는 길잡이 역할을 해주기도 한다.


한편 로맹가리의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로 시작하여 페루의 작가 바르가스 요사로 이어지고 요사의 관능이 넘치는 문학은 뒤라스와 에르노의 열정과 에로티시즘에 가닿는다. 장소에서 정서(情緖)로, 그리고 정서의 심연으로 깊이를 더해가며 삶 속으로 파고드는 저자의 소설 이야기는 그렇게 묘한 그리움과 생명력으로 우리의 가슴에 “자국을 남기며 공명을 일으킨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나면 책 속에 서술된 작가들과 작품들을 정리하고 읽어야 할 작품 목록에 기입하느라고 분주해진다. 이처럼 이 책은 문학작품을 다양한 층위에서 읽을 수 있도록 길잡이 역할도 하고, 독자 자신의 감상과 비교하면서 비판과 새로운 관점을 더하는 시간이 되도록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류의 삶과 그 형식의 탐구가 바로 소설이라는 저자의 정의처럼 문학작품들, 소설들에 더욱 애정을 갖게 된다. 그러고 보니 마치 소설 예찬(?)론 같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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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 아말리아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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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냐르의 작품에서‘빌라’는 아주 특별한 지위를 가지고 있는 어휘이다. 이 빌라에 대한 정의를 위해서는 저자의 불세출의 걸작 『섹스와 공포』의 문장을 인용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것은 바로 “천으로 덮여 키 안에 들어 있는 파스키누스를 향해 일제히 집중되어 있는 공포어린 사람들의 표정이 있는 벽화”이다. 소설 『빌라 아말리아』에도 이 매혹을 마주하는, 또는 죽음에 직면한 놀라움인 ‘아연실색’이란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 것에서 그 관계성은 더욱 명료해진다. 이것은 다름 아닌 은밀한 쾌락의 공간이자, 은둔의 장소이며, 존재가 비로소 있게 하는 시원(始原)의 장소로서의 의미이다.

 

‘빌라 아말리아’ 역시 새로운 시간,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시원, 즉 영(zero)의, 출발의 시,공간이다. 소설은 평온이 부재하고, 끈질기고 집요한 타성에 젖은 현실을 청산하고 완전히 다른 시간, 오롯이 자기만의 새로운 시간을 다시 살아가는 여자의 이야기다.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수동적인 고집의 본성”과 결별하기 위한 여자, ‘안 이덴’의 작업은 어느 비밀 첩보원의 흔적지우기보다 더욱 철저하게 진행된다. 태우고, 버리고, 국경을 몇 차례 넘어서면서 자신에게 들러붙은 과거의 찌꺼기들을 제거한다.

 

이 변신의 과정에서 운명을 자각한 여자는 중얼 거린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나는 결연히 그곳으로 달려간다. 어떤 것이 내게 결여된 그곳에서 내가 헤매고 싶어지는 느낌”이 드는 그곳으로. 나를 온전히 나로서 자각하며 사는 삶을 기대하는 간절함에 빠져있는 나는 지금 이 여인을 이해 할 수 있다. 내 영혼 역시 사랑에 빠질 수 있는 미지의 공간과 시간에 대한 어떤 태곳적 그리움에 자주 눈물지으니 말이다. 그래서 도달한 곳, 이탈리아 나폴리의 이스키아 섬, 쪽빛 지중해와 따사로운 햇빛이 비추는 절벽위에 파란 지붕만을 보이는 외딴 집, ‘빌라 아말리아’. 그녀에게 오라고 부르는 집, 산의 내벽(內壁), 후미진 곳, 강렬하고 임박한 어떤 것이 그녀를 맞이한다. 그녀가 사랑하고 싶었던 것, 그 대상 속으로 사라지고 싶었던 것, 그것에 매혹된다. 그것은 아마 자연 한가운데에서 맞이하는 황홀경이고 새로운 “시간의 탄생”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혼자 수영하고, 혼자 걸으며, 혼자 먹고, 혼자 구석에서 책을 읽는다. 이 완벽한 고독의 쾌락이 더없이 부러워진다. 영국 여류시인 ‘캐서린 필립스’의 엘레지, 「오 고독이여!」가 흐를 때 ‘발라 아말리아’는 키냐르가 말하는 경직, 아연실색 그것이 되고, 나는 꼼짝없이 굳어버리는 죽음 같은 관능의 지고함에 빠져든다.

 

「오 고독이여                         O solitude

  어둠에 바쳐진                       my sweetest sweetest choice

  달콤하기 그지없는 나의 선택이여     devoted to the Night

 

 

  오 오 얼마나 나는                   O Oh how I

  고독을 사랑하는지」                 solitude adore!

 

"나는 더 이상 꼼짝달싹 못했다. 내 삶은 멈췄어요.“ 아름다움에 마비되어 그 안에서 죽어가는 것, 인간의 탐욕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 진정한 의미에서의 방에 가득한 외설스런 시간이 정지한 듯 흐르고, 그래서 보통 사람들이 겁나해하는 거짓말 같은 행복이 그녀를 충전한다. 여기서 그녀는 모든 사람이 된다. 그녀를 치료하는 의사 레오에게는 고독한 예술가이고, 그의 어린 딸 레나(마그달레나)에게는 폭풍우를 잠재우는 지배자이며, 그녀를 비로소 여자이게 하는 줄리아에겐 감미롭고 믿음직하며 육감적인 커다란 육체가 된다. 또한 초등학교 동창 조르주에겐 오만하고 경계태세이며 심약한 어린 소녀이고, 죽음에서 그녀를 구해준 샤를에게는 천재 음악가이다. 그녀는 ”아무에게도 복종하지 않고, 더욱이 누구에게도 명령하지 않는“ 자기의 삶을 살아낸다.

 

시간을 새로이 쓰기 시작한 그녀가 “삶이 몸 속 깊은 곳에서 점점 더 내면화 되었다.”고 말하게 되었을 때, 그 축복의 진정함이 꿈결처럼 나를 재촉하는 것 같은 느낌에 빠져든다. 내 시간을 탄생시킬 어딘가의 그 곳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 애틋함에 젖는다. 나도 누군가의 삶을 환히 비출 수 있는 빛을 발산하게 될 그런 완벽한 고독의 세계를 찾아 떠나고 싶어진다. 잡다함이 가득한 도시, 그 사회적 근거지에서 가능한 멀리 떨어져 비로소 자기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안 이덴의 놀라운 표정, 정신을 몽롱하게 하고 죽음을 가져오는 에로틱한 그 시선을 그려보게 한다. “매혹은 언어 사각지대에 대한 인식”이란 키냐르의 말을 다시금 확인하는 시간이다. 또한 죽음을 배경으로 반짝이는 빛, 삶의 신비에 깊숙이 매료되게 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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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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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어나가는 데 불편함을 떨쳐내기란 쉽지 않다. 바로 ‘나’와 ‘우리’에게 내재화된 생각과 가치관이 잘못되었음을,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가 말하는 많은 것들이 새롭거나 낯선 것 들은 아니다. 그러나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는 제목의 ‘당신’에 대한 정의에서 빠져나갈 틈이 없는 대다수의 ‘우리’라 할 수 있는 서민 대중들의 계급적 위치를 적나라하게 일깨우고 있다는 점에서 자극을 받는 탓일 게다.

 

‘~ 을 위한 국가는 없다.’고 한다. 그런데 누군가에게는 있는 것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없는 국가이다. 아니 누군가를 위해서는 있지만 누군가를 위해서는 없다는 것이다. 그 누군가는 이렇게 서로 대척점에 놓여있다. 전자는 소수의 지배계층인 권력과 부를 차지하고 있는 자이며, 후자는 거의 대다수인 서민대중이다. 그래서 지배계층을 제외한 대다수의 한국인들을 위한 “국가는 없다.”는 의미가 된다. 왜 우리 대다수의 국민을 위한 국가는 없다는 것일까? 부자와 권력자 등 상류계층을 위해서는 존재하는 국가가 말이다. 이 물음은 국가를 묘사한 다음의 문장으로 해결된다. “지배 계급의‘사무총국’ 같은 국가” 가 그것이다. 국가는 오직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사무관리 부서의 총체이며 이들 외의 모든 타자는 이용하고, 착취하며, 짓밟고, 억누를 뿐이라고 한다. 이 주장의 진위는 ‘국가’의 행동양태가 실제 그러했는지를 확인하면 될 것이다. 국가가 누구를 위해서는 선하게 작동하고 누구에게는 폭력과 억압과 무관심을 행하는지 말이다. 이 책은 바로 이 확인 작업이다. 근대의 역사와 현재 지구촌에서 벌어지고 있는 실제의 현상들을 통해 국가가 그 존립의 정당성을 잃어가고 있는지를 증명하는 작업인 것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서점가를 보면‘선비 정신’ 혹은 ‘선비의 나라’에 대한 전근대 사회의 향수를 말하는 책들이 즐비하다. 마치 우리 대다수가 선비의 후손인 것처럼. 선비란 조선조 사대부 양반계급을 일컫는다. 전 인구의 10%내외의 특권계층이다. 이후 조선조 말기 매관매직으로 40~50%에 이르며 체제가 스스로 붕괴되었지만 말이다. 이것은 절대다수의 국민이 선비의 자손이라기보다는 “선비에게 착취, 토색질, 무시당하는 상것들의 자손”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무슨 선비의 나라라고?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에는 “소유욕, 지배욕, 출세욕으로 상것의 재산을 빼앗는데 혈안이 된 선비들”의 망국적 질환을 한탄하는 구절이 있다.19세기 전근대 시절조차 이 땅에는 서민대중을 위한 국가는 없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20세기 근대화가 진행되어 오늘에 이른 한국사회에는 누가 ‘당신’일까? 썩을 대로 썩어빠졌던 이승만, 박정희니 하는 독재시대의 얘기는 생략하자. 바로 지금의 우리를 얘기하기에도 숨이 가쁘니 말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최근에 ‘국가의 힘’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보면 ‘당신’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의사, 약사들 중산층이 자신들의 기득권적 이익을 차지하기 위해 시민을 볼모로 집단적 자기과시를 할 때에는 경찰의 동원이나 폭력적인 저지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용산 참사’, ‘쌍용자동차 투쟁’,‘한진중공업 영도 조선소 투쟁’과 같이 가지지 못한 자들의 저항에 대해서는 합법적 살해로서 대응한다. 없는 자가 대들기만 하면 폭력으로 짓눌러 생물적 공포를 자극하고 가시화해서 저항 의식을 꺾어버리는 데 최대한의 힘을 발휘한다. 금융기업들의 파렴치와 부도덕에는 눈을 감고, 대기업 등 재벌에게는 감세 등 각종 정책적 혜택을 베풀어 재산을 보충해주며, 그들이 부실해지면 국민의 혈세를 동원해 구제금융 자금을 퍼준다. 국가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지는 이처럼 너절하게 열거하지 않아도 될 만큼 뻔하다. 시장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이들 10%내외의 소득 상류계층의 부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나머지인 ‘당신’을 위해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튼 국민의 80%이상이 ‘당신’이다. 그런데 왜 많은 한국인들은 자신이 ‘당신’임을 인정하지 못할까? 왜 지배계급의 자기 유지와 확대를 위한 행동에 동조하는 것일까?

 

오늘, ‘당신’들의 국가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떤 일을 하고 있나?

 

이와 같은 ‘당신’의 ‘자기모순’적 행동을 이해하는 데 좋은 예가 있다. 대부분의 상류층은 기피를 상습적으로 하고 있으며, 중산층은 어떻게든 회피하려 갖은 수를 쓰고, 나머지는 도리 없이 의무를 수행하는 것, 바로 ‘병역’이다. 그럼에도‘병역 기피’는 마치 신성모독인 것처럼 전 국민에게 부정적 인식이 팽배하다. 여기에는 외형적으로 “군대만큼은 다들 똑같이 간다.”라는 자기 위안에 매달리는 애처로움, 지배체제가 내면화시킨 순응성의 효율성이 있다. 질서에 고분고분 복종하고 서열사회를 체득하는 체제순응 과정의 의미를 은닉하고 있는 “군대에 갔다 와야 남자가 된다.”는 말 속의 이중성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서민 대중은 이를 남성의 건강성이라는 쿨한 의미의 해석에 머문다. 위선적이고 모순이 가득한 어리석음 아닌가? 자기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 것에 동조하는 그 숨겨진 모순성, 바로 그것이리라.

 

지배계급이 자기체제 보호와 유지를 위한 대중을 향한 내면화 방법에는 이러한 조국애, 민족애와 같은 신성불가침적 자극뿐 아니라 ‘학교’교육과 같은 핵심적 과정이 있다. 결코 ‘비판적 시민’이 양성 되지 못하게 하는 데 있는 것인데, 교육을 통해 지배 이데올로기 - 경쟁의 우상화, 서열주의, 승자독식, 나와 타자의 구별, 재화와 소비의 쾌락, 물질지상의 감각 ... - 를 내면화시켜 체제 순응자들을 만들어 낸다. 아마 자신들 스스로가 ‘당신’임을 자각하지 못하게 하는 데에는 최상의 방법일 것이다. 이렇게 체제 순응자로 내면화된 다수는 불평등의 세습화에도 불구하고 지배계급에 공헌하게 된다. 결국 자신들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존재를 위해 충성하는 것이다. 국가는 이렇게 지배계급을 위해 모든 유무형 자원과 사회시스템의 에너지를 투입한다.

 

책은 이처럼 국가가 대중을 내면화시킨 것들과 이데올로기들을 서술하고 있다. 문학과 예술 작품을 통해서, 영화와 TV 등 집단 기억을 부단히 재생산해내는 미디어를 통해서 계층을 분화하고, 전쟁을 미화하며, 군사주의와 영웅주의로 순응하는 인간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 양상들을.

또한 서민 대중의 자식들이 총알받이가 될 것이 뻔한 전쟁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진정, 역사 이래 전쟁이 이(利)가 아니라 의(義)를 위해 수행된 적이 있는가하고 반문한다. 여기에 더해 문명사적으로 기이하기 그지없는 한국 기독교의 이상적 부흥이 군사주의에 기생해서 지배계급에 편승하는 추악한 한국의 종교사 조명에 이르면 이맛살이 찌푸려지다 못해 읽기를 중단하고 싶어지기까지 한다.

 

그런데 듣기 싫고, 보기 싫다고 해서 외면 할 수 없는 ‘당신’인 바로 ‘나’와 ‘우리’를 위한 이야기이고, 한국 사회에 대한 깊은 연민을 기초로 하는 저자의 의지를 알기에 그만 둘 수가 없기도 하다. 우린 2007년 7월 4일 부산 남구에 있는 한 중학교 교사(국가 공무원)가 성적이 나쁘다고 체벌을 하여 한 중학생을 죽인 사건을 기억하지 못한다. 대다수 언론이 이슈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산재 사망률이 OECD가입국 중에서 단연 최고라는 사실도 알지 못한다. 2위인 멕시코의 3배나 높은 수치이고, 소득이 불평등하기로 소문난 국가인 영국의 30배에 이른다고 한다. 우리사회가 “미시적 차원에서 국가 폭력에 얼마나 익숙해져 있는지를”, 즉 국가가 사회적 약자들, 서민 대중에 대해 얼마나 무심한지, 국가에 대해 대다수의 민중이 어떤 기대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확인케 하는 이런 사실들을 어떻게 외면만 할 수가 있겠는가?

 

맺는 말

 

이렇듯이 우리의 “속살에 배인 일상”은 보통 반성적 고찰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국가 폭력의 실체에 초점을 맞추고, 그 폭력이 지금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합리화되고 낭만화되고 있는지에 대해 집중 조명하고 있는 이 책이 우리의 길들여진 반(反)민중적 감각에 강력한 충격들을 가하여 반성적 고찰의 대상으로 깨워내는 불편한 작업을 하게 했으리라. 국가는 무엇인지, 당신들은 어떻게 길들여지는지, 한국 사회의 현실과 동서양 근세사, 각종 인문학적 기록들을 통해 재인식하는 귀중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곧 입법부 의원들을 선출하는 선거가 있다. 그간의 선거가 비록 민중의 삶과 연결된 정책으로 변화하지는 않았지만, 이 번 만큼은 대다수 서민대중을 위한 진정한 민중의 조직화를 위한 첫 걸음이 되기를, ‘당신’을 위한 국가로 만드는 현실적 제도장치로서의 역할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보게 된다. 더 이상 ‘당신’을 위한 국가가 아닌 국가의 바로 섬을 위해 제도정치에 출사표를 던진 저자‘박노자’에게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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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이 답이다 - 왜 평등한 사회는 늘 바람직한가?
리처드 윌킨슨 & 케이트 피킷 지음, 전재웅 옮김 / 이후 / 2012년 2월
평점 :
품절


‘평등’이란 단어만 등장하면 시장자본주의에서는 거부감을 드러내고, 혹여 가진 것을 빼앗기기나 할까하며 어떤 숨겨진 저의(底意)는 없는가하고 경계의 사시(斜視)를 치뜬다. 이것은 이 어휘 자체가 내재하고 있는 동등함의 가치 때문에 평균이상의 것을 가진 자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이 말하려는‘평등성’의 지향은 완전 평등과 같은 이상적 가치나, 유토피아의 공상적 가치를 말하려는 것도 아니요, 정치적, 도덕적 이데올로기 중심의 그 흔한 편협성의 이야기가 아님은 물론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이론적 접근 또한 아니다. 단지 책의 서문에서 저자들이 선언하고 있듯이 “평등의 혜택을 인식하는 사회”, 즉 “사회를 바라보는 방법을 바꿀 수”있기를 기대하며 경험적이고 실증적이며 구체성을 띤 인류애라는 보편적 의지에 의해 써진 시장민주주의에서 발생하고 있는 사실의 문제적 현상들을 분석, 규명한 것일 뿐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소득 상류계층인 부자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써진 것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오늘 우리가 사는 사회는 인류 역사이래 그 어느 시대보다 물질적 성공을 이루고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의 사회를 성공사회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물질적 성공만큼이나 사회적 실패의 증가로 더 많은 사회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제아무리 경제성장이란 것을 진행해도 삶의 질, 즉 행복과 같은 가치가 올라가지 않는다. 외려 세계 최고의 부자나라인 미국의 1952~1993년에 이르는 40년 동안 미국인들의 근심수준이 꾸준히 증가했음을 보여 줄 뿐이다. 삶에 대한 불안이 거의 사람들을 정신질환의 상태에 몰아댈 정도로 개인적 행복지수는 곤두박질치고 있다. 왜 사회의 평균적 부는 지구촌 최고의 수준에 이르렀는데 구성원들은 삶의 안락함을 잃어가고만 있는 것일까?

 

그래서 저자들은 시장민주주의 선진 25개국을 대상으로 1인당 국민소득수준과 소득격차를 나타내는 소득불평등 지표를 분석해 보았으며, 여기서 그들은 의미심장한 관계성을 발견한다. 소득 상위 20% 대비 하위 20%에 대한 소득비율인 국가별 소득 불평등도(度)를 보았더니 미국, 영국, 싱가폴, 포르투칼, 호주는 소득하위계층에 비해 상위계층이 8~10배의 수준을 보였으며, 일본, 핀란드,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는 4배 전후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일본 등 5개국에 비해 미국 등 5개국은 소득불평도가 월등히 심화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이를 기초로 하여 기대수명, 사망률 등 각종 삶의 지표, 그리고 범죄율, 십대출산율, 사회 신뢰수준, 수감자비율 등 사회문제들의 통계수치와 25개국의 소득 불평등지표와의 관계를 분석하고 있다.

 

 

결과는 예외 없이 소득 불평등이 심화된 국가들이 이들 사회문제의 발생빈도와 삶의 지표에서 최악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고등학교 자퇴율, 십대여성 출산율, 10만 명 당 수감자수에서 미국, 영국, 포르투칼, 싱가폴 등이 단연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으며, 이 수치들은 일본 등 불평등도가 낮은 국가들보다 수십, 수백 배에 이르는 끔찍한 상황이라는 점이다. 그렇다고 사망률, 신생아 사망률, 정신질환자율과 같은 건강지표는 나은가 하면 그것도 역시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이들 불평등심화 국가들이 단연 높은 수치를 보인다. 게다가 대외원조비율, 사회신뢰지수, 기대수명, 유니세프 아동복지지수 등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형편없이 낮음을 나타낼 뿐이다. 즉 소득 불평등과 각종 사회문제는 강력한 상관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의미이다. 물론 상관관계가 매우 높다고 인과관계까지 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인과관계마저 결정적인 관계성, 부인 할 수 없는 연관성을 인정하게 된다.

 

이 책의 대부분이 바로 이 불평등과 사회문제들의 인관관계를 증명하는데 할애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례로 불평등이 폭력과 십대출산율, 기대수명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가 보자. 사회적 지위가 부(富)의 능력에 따라 인간을 서열화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인 곳, 한국사회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책에 통계대상이 된 25개국과 같이 우리도 시장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으니 인정하지 못할 것도 없지 않은가? 이런 곳에서는 “드러나는 성공이나 실패의 징후”, 즉 더 나은 직장, 더 높은 소득, 더 많은 교육, 더 넓고 좋은 집, 더 좋은 차와 옷 등이 사람들의 위계적 차이를 평가하는 척도가 된다. 왜 그렇지 않은가? 우린 수 초 만에 상대방의 아래위를 훑어보며 사회적 서열의 판단을 끝내지 않는가 말이다. 그 때 이런 징표들을 활용하는 것이 우리에게 내면화되어 있기 때문에 별 정신적 부담 없이 이러한 판단을 가볍게 내릴 수 있게 된다.

 

물론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의 정도는 나라마다 다르다. (상대적으로 평등화된 - 불평등이 심화된 미국, 영국 등에 비해서 - 북유럽 및 일본은 분명 사람을 계급적으로 판단하는 데 이들처럼 극단적으로 노출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이 물질적 서열화 현상이 어떻기에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일까? 최상층의 소득계층인 자들도 그렇겠지만 서열이 낮은 사람들 역시“사회적 평가에 대한 반응”에 민감하게 행동한다.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고 그래서 사회적 비교에 감수성이 자극된다. 더구나 계급적 편견에 사로잡힌 사회(부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의 사회적 거리가 커지고 강남과 강북이란 지리적 격리로까지 전환되어 사회계층을 나누는 한국사회이기에 이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에서는 ‘사회적 평가 위협’이 모든 삶에 작동하고 있어 지위경쟁이 격화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수치와 모멸, 위축과 열등감을 벗어나기 위해서 지위의 성공적인 차지라는 방법이외에는 없다.

 

그런데 소득 하위계층은 이 지위경쟁에 뛰어들 자원이 없거나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위를 드러내는 것을 모두 박탈당한 상황에서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을 과시하기 위한 폭력적 반응을 표출하는 것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사회 바닥계층의 아이들은 어떨까? 이들 역시 자기존중과 지위달성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학교에서 배운다. 극단적인 승자독식의 사회이며 사람을 구분하고‘사회이동성’이 차단되다시피 한 사회임을 터득한 아이들은 공격적, 착취적, 단기성과에 몰두하는 경향을 보일 수밖에 없게 된다. 아마 한국 사회의 급증하는 학교폭력이 이러한 현상의 적절한 사례일 것이다. 여자 아이들 또한 질적 경쟁에서 승산이 없다는 것을 이해한다. 따라서 이들이 채택하는 것은 양적 승부이다. 그 양적 승부가 자신의 아이를 갖는 것이다. 자신의 우호자, 자아를 확인시켜 줄 수 있는 존재에 집착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행동패턴이 상대적인 박탈감, 바로 불평등에 기초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과관계에 대한 사례가 개별 사회문제마다 빼곡하다. 타인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 그리고 공동체의 붕괴와 사회분열, 복지 교육예산은 벌벌 떨면서 형벌제도와 사법체계의 확충이라는 사회적 약자를 처벌하는 데는 예산을 아까워하지 않는 것, 살인율과 자살율이 증가하는 것, 이 모두가 어플루엔자 바이러스가 만연한 불평등 국가일수록 악화되고 불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을 목격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그렇다면 불평등이 이들 하위계층, 사회적 서열이 낮은 사람들에게만 문제가 되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최근의 보수 언론지의 보도가 있었지만 강남 3개구의 기대수명이 타 지역 보다 길다는 통계가 있었다. 그들의 건강이 다른 지역의 사람들보다 양호하다는 의미이다. 바른 자료일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같은 소득수준의 훨씬 평등화된 국가의 사람들보다 더 건강하고 수명이 긴 것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한국은 이 책의 통계자료 대상국인 25개국에 끼지 못했다. 아마 신뢰할만한 국제적 기준의 소득 불평등 지표를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 건강자료 분석에서 불평등이 심한 미국의 부자들보다 평등화된 나라들의 부자들 수명이 훨씬 길고 사망률도 낮다는 것이다. 불평등 사회는 이같이 부자들의 삶의 질도 동반적으로 떨어뜨리고 있음이 수많은 사회문제들의 발생율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불평등은 빈자와 부자 할 것 없이 사회의 총체적 질을 후퇴시킨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는 자명해졌다, 경제성장이 더 이상 인간의 삶을 개선시키지 못하는 것이라면 불평등 정도를 조금만 완화시켜도 그것이 사회전체의 행복지수를 제고시키고, 신뢰를 회복하며, 사회통합을 통한 호혜성, 상조성, 공동체적 안락을 증진시킬 것이다. 그러나 얼마 전 보수 언론의 종합편성채널 TV 인터뷰에 나온 D그룹 재벌 총수의 말처럼 99개를 가져도 1개를 가진 자의 것을 빼앗아 100개를 채우고 싶다는 욕망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주장하듯이 현대의 소비주의, 물질주의, 개인주의는 별도리 없는 것 아닌가하고, “불멸의 인간 본성”에 반한다고 반론을 펼 수도 있을 것이다. 과연 그럴까? 동일한 소득수준에도 불구하고 불평등 정도가 일본에 비해 3배 이상이나 차이가 나는 것은 인간 본성에 대한 가정을 달리하게 하지 않는가?

 

더구나 ‘평등’은 ‘동일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소득 상위 20%에게 하위 20%가 같아지자고 하는 것이 평등이 아니다. 실제 “법 앞에 평등원칙이 있다고 사람들이 동일해 지지 않듯이” 동일성의 지향은 낭만적 공상일 뿐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25개 선진국의 소득 불평등 정도를 보더라도 가장 낮은 일본도 대략 4배의 격차를 보이고 있다. 잘 알려진 ‘최후통첩 게임(Ultimate Game)'은 인간의 ’평등 본능‘을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또한 우리가 협동의 힘을 발휘할 때 뇌의 보상센터가 활성화되어 이기적 행동욕구를 억제하고 있음이 밝혀진 것이나, 사회적 지위와 정반대에 있는 우정처럼 반(反)지배전략을 통해 긴장을 완화하는 것은 인간이 얼마나 공감과 동일시라는 집단적‘우리’의 형성을 필요로 하는 존재인지를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불평등을 완화할 수 있다. 물론 이를 실천하는 데에는 현실적인 조치가 필요하다. 지위와 위계에 의해 덜 분리된 사회, 공동체 의식이 회복된 사회를 향한“정치적 의지”가 절대로 요구된다. 사실 부와 결합된 현재의 정치권력이 이를 스스로 이행할 것을 바라는 것은 죽은 고목에서 새 잎이 돋아나기를 기대하는 것만큼이나 요원한 일이다. 이 책은 몇 가지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고 있는데, 조세 정책과 복지혜택을 통한 소득 분배 규칙을 교정하는 것이지만 이보다 앞서 일본처럼 아예 소득 자체의 불평등 격차를 줄이는 것이다. 오늘의 불평등은 경제영역에서 민주주의가 배제되어 야기된 것이니 만큼 노동 임금의 왜곡된 불평등 구조를 시정하는 일이 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소득 불평등 격차를 줄일 때 인구 전체에 미치는 심리적 복지 증진은 그 어떠한 정책보다 커다란 효과를 보이고 있음이 증명되고 있는 이상 “정상상태 경제”로의 이행을 위한, 평등의 가치로의 이행은 포기할 수 없는 인류의 가치라 할 것이다. 이 책은 이와 같이 공상적 완전 평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심화된 불평등을 줄여보자는 것이다. 평등성이 지니는 궁극의 미덕을 향해서 말이다. 평등이란‘공정함’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이다. ‘마이클 샌델’이 ‘정의(Justice)’를 통해 공정함의 고귀한 가치를 말했듯이 저자들의 ‘평등’또한 공정함의 인류적 가치를 실물경제사회를 통해 명쾌하게 설명한 노작(勞作)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많은 이들이 저자들의 바람처럼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에 작은 변화가 있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대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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