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목소리가 들려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세상이란 도화지에 수 천대의 오토바이로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했던” 소년의 승천(?) 이야기다. 보이지 않는 존재들, 아니 이 사회에서 그 존재자의 존재를 부인하고 무시했던 존재들을 비로소 보이는, 관심의 영역으로 인식하게 하고자 했던 오토바이 폭주족 소년의 분노의 울부짖음이다.

우린 낯선 무엇인가 눈앞에 있지만 무엇 때문에 저런 짓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때, 그 부정의 대상이 내 생활영역에 들어 올 것 같으면 불편해하고 그 불편하고 불안한 감정을 떨어내려 한다. 그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말하려하는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알 수 없는 존재가 되고, 이 알 수 없음, 대상에 대한 무지(無知)는 당혹스러움과 거북한 무엇이 된다. 그리곤 배제의 낙인을 찍어버리고 그것에‘불온한 것’이라 명명한다. 사회의 경계에서 내쳐야 하는 것들, 급기야 억압하고 폭력을 휘둘러 그 존재를 지워버리려 한다. 우리 사회에는 이렇게 불온 한 것들이 되어 주류 사회의 경계 밖으로 밀려나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린 타자가 무수하다. 장애자가 그렇고, 프레카리아트가 그렇고, 이 소설의 주인공들인 십대의 폭주족 소년 소녀들이 그렇다. 이들이 주류 사회에 대체 무슨 일을 했기에 존재자의 지위에서 지워버리려 하는 것일까?


소설은 바로 이 낯설고 불편해서 주류사회에서 추방되고 제거되어 버려 잊혀진 존재, 십대의 폭주족 소년을 통해서 분류하고 구별하여 존재를 서열화하는 우리들의 비루한 통념적 감각을 일깨운다. 십대 소녀가 고속터미널 화장실로 뛰어든다. 화장실 변기에는 터진 양수가 흐르고 뒤이어 앙칼진 생명의 울음소리가 길과 길이 만나는 그 무심한 광장에 울려 퍼진다. 무관심과 혼돈의 공간으로 이만큼 적절한 장소도 없을 것이다. 소년‘제이’는 이렇게 세상과 대면한다. 그러나 길러주던 여인마저 자기의 절망과 함께 사라지고 재개발사업이란 도시의 폭력 속에 외톨이가 된 채 소년은 남겨진다. 주류가 정상이라고 정의 한 것에 위배되는 한 바로 영역 밖의 세상으로 추방된다. 고아원이란 곳으로.

‘길’, 영역을 나누는 경계에서 태어난 아이는 그 위태로운 지대의 안에서 곧바로 바깥으로 내쳐진 것이다. 그래서 소년은 자신의 인생을 예감한다. “앞으로도 계속 길에서 살게 될 것 같다는.”


이 예감을 완성하는 첫 번째 전환점은 고아원 인근의 개 농장과 버섯 재배사의 화재사건이랄 수 있다. 개를 방치하고 달아난 인간, 불길을 피해 산 속으로 숨어든 개들, 이것들을 포획해 한 몫 잡으려는 개 잡이들, 소년은 여기서 인간의 폭력적 범주화를 목격한다. “죄, 잘못, 인간, 동물,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을 구분하는 게 인간이에요. 그러니까 잘난 척을 하는 거에요. 내가 인간이다.” 이 항변은, “고통을 외면하는 거에요. 고통의 울부짖음을 들어주지 않는 거에요. 세상의 모든 죄악은 거기서 시작해요.”라며 구별짓기, 서열화, 범주화로 인해 야기되는 우리의 무능한 감각에 문제가 있음을 발설하는 것이다. 타자의 읽기에 무관심한 우리의 이기심과 오만, 현대인의 나르시시즘에 분노하는 것이다.


이 사건은 제이로 하여금 고아원을 뛰쳐나오게 하는데, 소년을 맞이해 줄 세상이 없다. 아니 있다. 동류를 알아보는 그 범주화의 원시적 눈 때문에 그에게 말을 거는 소녀,‘목란(Mulan)'이 있다. 가출한 십대들, 가정으로부터 사회로부터 외면된 이들의 본능만 난무하는 세계의 경험은 그가 목란과 재회 할 때까지 방치된 소수자, 약자들의 세계의 적나라함, 리더로 군림하기 위한 기교를 체득하는 시간이 된다. 이제 길 위의 삶에 대한 예감을 완성하는 목란의‘가와사키 오토바이’가 등장하고, 소년 제이는 그들, 폭주족 무리의 리더가 된다. 바로 여기서 우리들의 초상, 할리 데이비슨을 모는 경찰 경위가 이들에 대한 비하와 동정의 양가감정을 수반하는 거부의 시선, 바로 그것으로 등장한다. 정말 가소롭고 희극적인 모습이다. 소설이 조롱하는 이 희화된 인물로 인해 낯짝이 화끈거린다.


폭주족 무리를 단속하던 의경이 숨지고, 이는 곧 주류에 대한 도전, 그래서 이 존재들의 말살을 위해 국가의 합법적 폭력기관이 나선다. 광복절 전야 대폭주의 정보를 움켜쥔 경찰은 이 불온한 것들을 때려잡기 위해 총동원된다. 이 행렬이 강북에서 강남을 잇는 한남대교를 들어 설 때, 주류의 대행자인 경찰간부의 다급하고 경망스런 발악이 들려온다. “강남으로 가게 놔뒀다간 다들 각오해!” 대체 국가가, 사회가 누굴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 배제된 이들 타자에게, 아니 어떤 인간이던지 타자 없이 단 한순간이라도 존재 할 수 있단 말인가? 한 술 더 떠서 압구정동 피부과 의사, 골프숍 운영 사업가등 지킬 박사들이 BMW, 야마하, 할리데이비슨 등 고급 기종의 오토바이를 몰고 나타나 폭주족 박멸에 경찰력과 함께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역겨운 우리들의 일그러진 모습을 대변한다. 과연 주류라고 하는 존재들이 이들 장애자와 십대 폭주족을 비난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들은 치킨 배달부이고, 자장면 배달부이며 퀵 운송업체 직원이고, 사회 약자들의 자식일 뿐이다. 그들에게조차 우리 역시 폐를 끼치고 사는 것 아닌가? 아마 가진 자들이 가장 많이 타인에게 폐를 끼치고 사는 자들일 것이다. 수많은 노동자가 과로하며 생산해주고, 누군가가 귀찮은 일을 기꺼이 감수해주었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 아닌가? 모든 존재자는 수많은 다른 존재자에 기대어 살 수 밖에 없다. 우린 운명적으로 장애자인 것이다. 누가 누굴 차별하고 서열화 한다는 말인가? 낯설고 불편한 것들은 적대하고 갈등할 대상이 아니다. 우리가 껴안고 보듬어 동등한 일원으로 함께해야할 존재자들이다. 우리의 잃어버린 보편적 진실에 대한 감각을 살려내는 한 편의 멋진 존재론적 사유를 이끄는 작품이다. 불온한 것들의 ‘있음’, 그 ‘실재함’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성수대교에서 승천했다는 제이, 그가 우리들, 주류사회가 망각했던 불온한 것들의 존재 목록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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