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이 답이다 - 왜 평등한 사회는 늘 바람직한가?
리처드 윌킨슨 & 케이트 피킷 지음, 전재웅 옮김 / 이후 / 2012년 2월
평점 :
품절


‘평등’이란 단어만 등장하면 시장자본주의에서는 거부감을 드러내고, 혹여 가진 것을 빼앗기기나 할까하며 어떤 숨겨진 저의(底意)는 없는가하고 경계의 사시(斜視)를 치뜬다. 이것은 이 어휘 자체가 내재하고 있는 동등함의 가치 때문에 평균이상의 것을 가진 자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이 말하려는‘평등성’의 지향은 완전 평등과 같은 이상적 가치나, 유토피아의 공상적 가치를 말하려는 것도 아니요, 정치적, 도덕적 이데올로기 중심의 그 흔한 편협성의 이야기가 아님은 물론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이론적 접근 또한 아니다. 단지 책의 서문에서 저자들이 선언하고 있듯이 “평등의 혜택을 인식하는 사회”, 즉 “사회를 바라보는 방법을 바꿀 수”있기를 기대하며 경험적이고 실증적이며 구체성을 띤 인류애라는 보편적 의지에 의해 써진 시장민주주의에서 발생하고 있는 사실의 문제적 현상들을 분석, 규명한 것일 뿐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소득 상류계층인 부자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써진 것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오늘 우리가 사는 사회는 인류 역사이래 그 어느 시대보다 물질적 성공을 이루고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의 사회를 성공사회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물질적 성공만큼이나 사회적 실패의 증가로 더 많은 사회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제아무리 경제성장이란 것을 진행해도 삶의 질, 즉 행복과 같은 가치가 올라가지 않는다. 외려 세계 최고의 부자나라인 미국의 1952~1993년에 이르는 40년 동안 미국인들의 근심수준이 꾸준히 증가했음을 보여 줄 뿐이다. 삶에 대한 불안이 거의 사람들을 정신질환의 상태에 몰아댈 정도로 개인적 행복지수는 곤두박질치고 있다. 왜 사회의 평균적 부는 지구촌 최고의 수준에 이르렀는데 구성원들은 삶의 안락함을 잃어가고만 있는 것일까?

 

그래서 저자들은 시장민주주의 선진 25개국을 대상으로 1인당 국민소득수준과 소득격차를 나타내는 소득불평등 지표를 분석해 보았으며, 여기서 그들은 의미심장한 관계성을 발견한다. 소득 상위 20% 대비 하위 20%에 대한 소득비율인 국가별 소득 불평등도(度)를 보았더니 미국, 영국, 싱가폴, 포르투칼, 호주는 소득하위계층에 비해 상위계층이 8~10배의 수준을 보였으며, 일본, 핀란드,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는 4배 전후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일본 등 5개국에 비해 미국 등 5개국은 소득불평도가 월등히 심화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이를 기초로 하여 기대수명, 사망률 등 각종 삶의 지표, 그리고 범죄율, 십대출산율, 사회 신뢰수준, 수감자비율 등 사회문제들의 통계수치와 25개국의 소득 불평등지표와의 관계를 분석하고 있다.

 

 

결과는 예외 없이 소득 불평등이 심화된 국가들이 이들 사회문제의 발생빈도와 삶의 지표에서 최악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고등학교 자퇴율, 십대여성 출산율, 10만 명 당 수감자수에서 미국, 영국, 포르투칼, 싱가폴 등이 단연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으며, 이 수치들은 일본 등 불평등도가 낮은 국가들보다 수십, 수백 배에 이르는 끔찍한 상황이라는 점이다. 그렇다고 사망률, 신생아 사망률, 정신질환자율과 같은 건강지표는 나은가 하면 그것도 역시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이들 불평등심화 국가들이 단연 높은 수치를 보인다. 게다가 대외원조비율, 사회신뢰지수, 기대수명, 유니세프 아동복지지수 등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형편없이 낮음을 나타낼 뿐이다. 즉 소득 불평등과 각종 사회문제는 강력한 상관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의미이다. 물론 상관관계가 매우 높다고 인과관계까지 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인과관계마저 결정적인 관계성, 부인 할 수 없는 연관성을 인정하게 된다.

 

이 책의 대부분이 바로 이 불평등과 사회문제들의 인관관계를 증명하는데 할애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례로 불평등이 폭력과 십대출산율, 기대수명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가 보자. 사회적 지위가 부(富)의 능력에 따라 인간을 서열화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인 곳, 한국사회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책에 통계대상이 된 25개국과 같이 우리도 시장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으니 인정하지 못할 것도 없지 않은가? 이런 곳에서는 “드러나는 성공이나 실패의 징후”, 즉 더 나은 직장, 더 높은 소득, 더 많은 교육, 더 넓고 좋은 집, 더 좋은 차와 옷 등이 사람들의 위계적 차이를 평가하는 척도가 된다. 왜 그렇지 않은가? 우린 수 초 만에 상대방의 아래위를 훑어보며 사회적 서열의 판단을 끝내지 않는가 말이다. 그 때 이런 징표들을 활용하는 것이 우리에게 내면화되어 있기 때문에 별 정신적 부담 없이 이러한 판단을 가볍게 내릴 수 있게 된다.

 

물론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의 정도는 나라마다 다르다. (상대적으로 평등화된 - 불평등이 심화된 미국, 영국 등에 비해서 - 북유럽 및 일본은 분명 사람을 계급적으로 판단하는 데 이들처럼 극단적으로 노출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이 물질적 서열화 현상이 어떻기에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일까? 최상층의 소득계층인 자들도 그렇겠지만 서열이 낮은 사람들 역시“사회적 평가에 대한 반응”에 민감하게 행동한다.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고 그래서 사회적 비교에 감수성이 자극된다. 더구나 계급적 편견에 사로잡힌 사회(부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의 사회적 거리가 커지고 강남과 강북이란 지리적 격리로까지 전환되어 사회계층을 나누는 한국사회이기에 이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에서는 ‘사회적 평가 위협’이 모든 삶에 작동하고 있어 지위경쟁이 격화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수치와 모멸, 위축과 열등감을 벗어나기 위해서 지위의 성공적인 차지라는 방법이외에는 없다.

 

그런데 소득 하위계층은 이 지위경쟁에 뛰어들 자원이 없거나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위를 드러내는 것을 모두 박탈당한 상황에서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을 과시하기 위한 폭력적 반응을 표출하는 것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사회 바닥계층의 아이들은 어떨까? 이들 역시 자기존중과 지위달성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학교에서 배운다. 극단적인 승자독식의 사회이며 사람을 구분하고‘사회이동성’이 차단되다시피 한 사회임을 터득한 아이들은 공격적, 착취적, 단기성과에 몰두하는 경향을 보일 수밖에 없게 된다. 아마 한국 사회의 급증하는 학교폭력이 이러한 현상의 적절한 사례일 것이다. 여자 아이들 또한 질적 경쟁에서 승산이 없다는 것을 이해한다. 따라서 이들이 채택하는 것은 양적 승부이다. 그 양적 승부가 자신의 아이를 갖는 것이다. 자신의 우호자, 자아를 확인시켜 줄 수 있는 존재에 집착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행동패턴이 상대적인 박탈감, 바로 불평등에 기초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과관계에 대한 사례가 개별 사회문제마다 빼곡하다. 타인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 그리고 공동체의 붕괴와 사회분열, 복지 교육예산은 벌벌 떨면서 형벌제도와 사법체계의 확충이라는 사회적 약자를 처벌하는 데는 예산을 아까워하지 않는 것, 살인율과 자살율이 증가하는 것, 이 모두가 어플루엔자 바이러스가 만연한 불평등 국가일수록 악화되고 불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을 목격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그렇다면 불평등이 이들 하위계층, 사회적 서열이 낮은 사람들에게만 문제가 되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최근의 보수 언론지의 보도가 있었지만 강남 3개구의 기대수명이 타 지역 보다 길다는 통계가 있었다. 그들의 건강이 다른 지역의 사람들보다 양호하다는 의미이다. 바른 자료일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같은 소득수준의 훨씬 평등화된 국가의 사람들보다 더 건강하고 수명이 긴 것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한국은 이 책의 통계자료 대상국인 25개국에 끼지 못했다. 아마 신뢰할만한 국제적 기준의 소득 불평등 지표를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 건강자료 분석에서 불평등이 심한 미국의 부자들보다 평등화된 나라들의 부자들 수명이 훨씬 길고 사망률도 낮다는 것이다. 불평등 사회는 이같이 부자들의 삶의 질도 동반적으로 떨어뜨리고 있음이 수많은 사회문제들의 발생율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불평등은 빈자와 부자 할 것 없이 사회의 총체적 질을 후퇴시킨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는 자명해졌다, 경제성장이 더 이상 인간의 삶을 개선시키지 못하는 것이라면 불평등 정도를 조금만 완화시켜도 그것이 사회전체의 행복지수를 제고시키고, 신뢰를 회복하며, 사회통합을 통한 호혜성, 상조성, 공동체적 안락을 증진시킬 것이다. 그러나 얼마 전 보수 언론의 종합편성채널 TV 인터뷰에 나온 D그룹 재벌 총수의 말처럼 99개를 가져도 1개를 가진 자의 것을 빼앗아 100개를 채우고 싶다는 욕망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주장하듯이 현대의 소비주의, 물질주의, 개인주의는 별도리 없는 것 아닌가하고, “불멸의 인간 본성”에 반한다고 반론을 펼 수도 있을 것이다. 과연 그럴까? 동일한 소득수준에도 불구하고 불평등 정도가 일본에 비해 3배 이상이나 차이가 나는 것은 인간 본성에 대한 가정을 달리하게 하지 않는가?

 

더구나 ‘평등’은 ‘동일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소득 상위 20%에게 하위 20%가 같아지자고 하는 것이 평등이 아니다. 실제 “법 앞에 평등원칙이 있다고 사람들이 동일해 지지 않듯이” 동일성의 지향은 낭만적 공상일 뿐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25개 선진국의 소득 불평등 정도를 보더라도 가장 낮은 일본도 대략 4배의 격차를 보이고 있다. 잘 알려진 ‘최후통첩 게임(Ultimate Game)'은 인간의 ’평등 본능‘을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또한 우리가 협동의 힘을 발휘할 때 뇌의 보상센터가 활성화되어 이기적 행동욕구를 억제하고 있음이 밝혀진 것이나, 사회적 지위와 정반대에 있는 우정처럼 반(反)지배전략을 통해 긴장을 완화하는 것은 인간이 얼마나 공감과 동일시라는 집단적‘우리’의 형성을 필요로 하는 존재인지를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불평등을 완화할 수 있다. 물론 이를 실천하는 데에는 현실적인 조치가 필요하다. 지위와 위계에 의해 덜 분리된 사회, 공동체 의식이 회복된 사회를 향한“정치적 의지”가 절대로 요구된다. 사실 부와 결합된 현재의 정치권력이 이를 스스로 이행할 것을 바라는 것은 죽은 고목에서 새 잎이 돋아나기를 기대하는 것만큼이나 요원한 일이다. 이 책은 몇 가지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고 있는데, 조세 정책과 복지혜택을 통한 소득 분배 규칙을 교정하는 것이지만 이보다 앞서 일본처럼 아예 소득 자체의 불평등 격차를 줄이는 것이다. 오늘의 불평등은 경제영역에서 민주주의가 배제되어 야기된 것이니 만큼 노동 임금의 왜곡된 불평등 구조를 시정하는 일이 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소득 불평등 격차를 줄일 때 인구 전체에 미치는 심리적 복지 증진은 그 어떠한 정책보다 커다란 효과를 보이고 있음이 증명되고 있는 이상 “정상상태 경제”로의 이행을 위한, 평등의 가치로의 이행은 포기할 수 없는 인류의 가치라 할 것이다. 이 책은 이와 같이 공상적 완전 평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심화된 불평등을 줄여보자는 것이다. 평등성이 지니는 궁극의 미덕을 향해서 말이다. 평등이란‘공정함’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이다. ‘마이클 샌델’이 ‘정의(Justice)’를 통해 공정함의 고귀한 가치를 말했듯이 저자들의 ‘평등’또한 공정함의 인류적 가치를 실물경제사회를 통해 명쾌하게 설명한 노작(勞作)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많은 이들이 저자들의 바람처럼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에 작은 변화가 있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대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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