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읽어나가는 데 불편함을 떨쳐내기란 쉽지 않다. 바로 ‘나’와 ‘우리’에게 내재화된 생각과 가치관이 잘못되었음을,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가 말하는 많은 것들이 새롭거나 낯선 것 들은 아니다. 그러나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는 제목의 ‘당신’에 대한 정의에서 빠져나갈 틈이 없는 대다수의 ‘우리’라 할 수 있는 서민 대중들의 계급적 위치를 적나라하게 일깨우고 있다는 점에서 자극을 받는 탓일 게다.

 

‘~ 을 위한 국가는 없다.’고 한다. 그런데 누군가에게는 있는 것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없는 국가이다. 아니 누군가를 위해서는 있지만 누군가를 위해서는 없다는 것이다. 그 누군가는 이렇게 서로 대척점에 놓여있다. 전자는 소수의 지배계층인 권력과 부를 차지하고 있는 자이며, 후자는 거의 대다수인 서민대중이다. 그래서 지배계층을 제외한 대다수의 한국인들을 위한 “국가는 없다.”는 의미가 된다. 왜 우리 대다수의 국민을 위한 국가는 없다는 것일까? 부자와 권력자 등 상류계층을 위해서는 존재하는 국가가 말이다. 이 물음은 국가를 묘사한 다음의 문장으로 해결된다. “지배 계급의‘사무총국’ 같은 국가” 가 그것이다. 국가는 오직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사무관리 부서의 총체이며 이들 외의 모든 타자는 이용하고, 착취하며, 짓밟고, 억누를 뿐이라고 한다. 이 주장의 진위는 ‘국가’의 행동양태가 실제 그러했는지를 확인하면 될 것이다. 국가가 누구를 위해서는 선하게 작동하고 누구에게는 폭력과 억압과 무관심을 행하는지 말이다. 이 책은 바로 이 확인 작업이다. 근대의 역사와 현재 지구촌에서 벌어지고 있는 실제의 현상들을 통해 국가가 그 존립의 정당성을 잃어가고 있는지를 증명하는 작업인 것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서점가를 보면‘선비 정신’ 혹은 ‘선비의 나라’에 대한 전근대 사회의 향수를 말하는 책들이 즐비하다. 마치 우리 대다수가 선비의 후손인 것처럼. 선비란 조선조 사대부 양반계급을 일컫는다. 전 인구의 10%내외의 특권계층이다. 이후 조선조 말기 매관매직으로 40~50%에 이르며 체제가 스스로 붕괴되었지만 말이다. 이것은 절대다수의 국민이 선비의 자손이라기보다는 “선비에게 착취, 토색질, 무시당하는 상것들의 자손”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무슨 선비의 나라라고?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에는 “소유욕, 지배욕, 출세욕으로 상것의 재산을 빼앗는데 혈안이 된 선비들”의 망국적 질환을 한탄하는 구절이 있다.19세기 전근대 시절조차 이 땅에는 서민대중을 위한 국가는 없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20세기 근대화가 진행되어 오늘에 이른 한국사회에는 누가 ‘당신’일까? 썩을 대로 썩어빠졌던 이승만, 박정희니 하는 독재시대의 얘기는 생략하자. 바로 지금의 우리를 얘기하기에도 숨이 가쁘니 말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최근에 ‘국가의 힘’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보면 ‘당신’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의사, 약사들 중산층이 자신들의 기득권적 이익을 차지하기 위해 시민을 볼모로 집단적 자기과시를 할 때에는 경찰의 동원이나 폭력적인 저지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용산 참사’, ‘쌍용자동차 투쟁’,‘한진중공업 영도 조선소 투쟁’과 같이 가지지 못한 자들의 저항에 대해서는 합법적 살해로서 대응한다. 없는 자가 대들기만 하면 폭력으로 짓눌러 생물적 공포를 자극하고 가시화해서 저항 의식을 꺾어버리는 데 최대한의 힘을 발휘한다. 금융기업들의 파렴치와 부도덕에는 눈을 감고, 대기업 등 재벌에게는 감세 등 각종 정책적 혜택을 베풀어 재산을 보충해주며, 그들이 부실해지면 국민의 혈세를 동원해 구제금융 자금을 퍼준다. 국가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지는 이처럼 너절하게 열거하지 않아도 될 만큼 뻔하다. 시장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이들 10%내외의 소득 상류계층의 부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나머지인 ‘당신’을 위해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튼 국민의 80%이상이 ‘당신’이다. 그런데 왜 많은 한국인들은 자신이 ‘당신’임을 인정하지 못할까? 왜 지배계급의 자기 유지와 확대를 위한 행동에 동조하는 것일까?

 

오늘, ‘당신’들의 국가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떤 일을 하고 있나?

 

이와 같은 ‘당신’의 ‘자기모순’적 행동을 이해하는 데 좋은 예가 있다. 대부분의 상류층은 기피를 상습적으로 하고 있으며, 중산층은 어떻게든 회피하려 갖은 수를 쓰고, 나머지는 도리 없이 의무를 수행하는 것, 바로 ‘병역’이다. 그럼에도‘병역 기피’는 마치 신성모독인 것처럼 전 국민에게 부정적 인식이 팽배하다. 여기에는 외형적으로 “군대만큼은 다들 똑같이 간다.”라는 자기 위안에 매달리는 애처로움, 지배체제가 내면화시킨 순응성의 효율성이 있다. 질서에 고분고분 복종하고 서열사회를 체득하는 체제순응 과정의 의미를 은닉하고 있는 “군대에 갔다 와야 남자가 된다.”는 말 속의 이중성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서민 대중은 이를 남성의 건강성이라는 쿨한 의미의 해석에 머문다. 위선적이고 모순이 가득한 어리석음 아닌가? 자기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 것에 동조하는 그 숨겨진 모순성, 바로 그것이리라.

 

지배계급이 자기체제 보호와 유지를 위한 대중을 향한 내면화 방법에는 이러한 조국애, 민족애와 같은 신성불가침적 자극뿐 아니라 ‘학교’교육과 같은 핵심적 과정이 있다. 결코 ‘비판적 시민’이 양성 되지 못하게 하는 데 있는 것인데, 교육을 통해 지배 이데올로기 - 경쟁의 우상화, 서열주의, 승자독식, 나와 타자의 구별, 재화와 소비의 쾌락, 물질지상의 감각 ... - 를 내면화시켜 체제 순응자들을 만들어 낸다. 아마 자신들 스스로가 ‘당신’임을 자각하지 못하게 하는 데에는 최상의 방법일 것이다. 이렇게 체제 순응자로 내면화된 다수는 불평등의 세습화에도 불구하고 지배계급에 공헌하게 된다. 결국 자신들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존재를 위해 충성하는 것이다. 국가는 이렇게 지배계급을 위해 모든 유무형 자원과 사회시스템의 에너지를 투입한다.

 

책은 이처럼 국가가 대중을 내면화시킨 것들과 이데올로기들을 서술하고 있다. 문학과 예술 작품을 통해서, 영화와 TV 등 집단 기억을 부단히 재생산해내는 미디어를 통해서 계층을 분화하고, 전쟁을 미화하며, 군사주의와 영웅주의로 순응하는 인간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 양상들을.

또한 서민 대중의 자식들이 총알받이가 될 것이 뻔한 전쟁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진정, 역사 이래 전쟁이 이(利)가 아니라 의(義)를 위해 수행된 적이 있는가하고 반문한다. 여기에 더해 문명사적으로 기이하기 그지없는 한국 기독교의 이상적 부흥이 군사주의에 기생해서 지배계급에 편승하는 추악한 한국의 종교사 조명에 이르면 이맛살이 찌푸려지다 못해 읽기를 중단하고 싶어지기까지 한다.

 

그런데 듣기 싫고, 보기 싫다고 해서 외면 할 수 없는 ‘당신’인 바로 ‘나’와 ‘우리’를 위한 이야기이고, 한국 사회에 대한 깊은 연민을 기초로 하는 저자의 의지를 알기에 그만 둘 수가 없기도 하다. 우린 2007년 7월 4일 부산 남구에 있는 한 중학교 교사(국가 공무원)가 성적이 나쁘다고 체벌을 하여 한 중학생을 죽인 사건을 기억하지 못한다. 대다수 언론이 이슈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산재 사망률이 OECD가입국 중에서 단연 최고라는 사실도 알지 못한다. 2위인 멕시코의 3배나 높은 수치이고, 소득이 불평등하기로 소문난 국가인 영국의 30배에 이른다고 한다. 우리사회가 “미시적 차원에서 국가 폭력에 얼마나 익숙해져 있는지를”, 즉 국가가 사회적 약자들, 서민 대중에 대해 얼마나 무심한지, 국가에 대해 대다수의 민중이 어떤 기대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확인케 하는 이런 사실들을 어떻게 외면만 할 수가 있겠는가?

 

맺는 말

 

이렇듯이 우리의 “속살에 배인 일상”은 보통 반성적 고찰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국가 폭력의 실체에 초점을 맞추고, 그 폭력이 지금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합리화되고 낭만화되고 있는지에 대해 집중 조명하고 있는 이 책이 우리의 길들여진 반(反)민중적 감각에 강력한 충격들을 가하여 반성적 고찰의 대상으로 깨워내는 불편한 작업을 하게 했으리라. 국가는 무엇인지, 당신들은 어떻게 길들여지는지, 한국 사회의 현실과 동서양 근세사, 각종 인문학적 기록들을 통해 재인식하는 귀중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곧 입법부 의원들을 선출하는 선거가 있다. 그간의 선거가 비록 민중의 삶과 연결된 정책으로 변화하지는 않았지만, 이 번 만큼은 대다수 서민대중을 위한 진정한 민중의 조직화를 위한 첫 걸음이 되기를, ‘당신’을 위한 국가로 만드는 현실적 제도장치로서의 역할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보게 된다. 더 이상 ‘당신’을 위한 국가가 아닌 국가의 바로 섬을 위해 제도정치에 출사표를 던진 저자‘박노자’에게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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