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풍당당 - 성석제 장편소설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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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장치들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곳, 과시와 기만이 부질없는 곳, 그래서 인간이 어떤 것으로 굳이 수식될 이유가 없는 곳이라면 그 곳이 바로 유토피아 아닐까! 유토피아라 해서 공정함의 정의나 민주주의와 같은 주의와 도덕율의 잣대로 정의할 필요까지는 없다. 사람들이 서로 믿으며, 자기 몸처럼 사랑하고 서로를 지켜주려는 마음을 지니고 있는 곳이면 족하지 아니한가?

 

소설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 소박하게 서로를 의지하며 사는 어느 벽지를 묘사한다. 금강산도 아닌 것이 봉래산이란 이름을 가진 곳, 한자말은 더욱 우습다. 봉황의 봉(鳳)이요, 래 자는 그저 올 래(來)이다. 단지 봉이 올 것이란 이 소망의 말에 더해 사백 여 미터에 불과한 야트막한 산이고 보니 더욱 보잘것 없어보이게 한다. 더구나 이 외진 산기슭 강마을에 인간의 온갖 욕망이 휩쓸고 지나간 흔적인 겉만 번지르르하고 내용은 하나도 없는 버려진 드라마 세트장이 생뚱맞게 촌 동네를 차지하고 있다. 이 우스꽝스런 공간의 대비(對比)가 꼭 우리들의 모순된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 나는 마음껏 웃음에 동참하지 못한다.

 

아무도 찾지 않는, 아니 찾기도 힘든 깡 촌에 세상의 사연이란 속박을 버리고 제각기 찾아 든 일곱 명의 사람들이 나무와 풀, 꽃과 숲, 강물이 흐르는 자연 속에서 보이지 않는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정감을 나누며 소박한 일상을 함께한다. 이들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오직 “자신들의 선택에 의해서 가족이 된”사람들, 서로를 가족으로 선택한 사람들이다. 육십, 오십, 이십대의 세대를 달리하는 남자와 여자들이 자연 같은 마음으로 낙원 같은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가뜩이나 좁아터진 우리네 세상이 이 같은 낙원을 가만둘 턱이 없다. 전국구 폭력 조직배의 눈에 띤 처녀의 미모는 이 조용한 시골 마을을 격전장이 되게 한다. 여자의 걸음과 속도를 같이하며 산길을 따라가는 검게 선팅이 된 벤츠와 그 안에 선글라스를 착용한 세 명의 남자, 이미 불온함과 폭력의 기운이 가득하다. 게다가 ‘아르마니 넥타이, 페라가모 구두, 베르사체 선글라스, 카르티에 시계’를 착용하고 뒷자리에 앉아있는 조직 두목의 차림새는 휴대전화조차 걸리지 않는 오지의 마을에는 어처구니없을 만큼 희화적(戱畵的)이다.

 

이 희극적 모습의 의미는 두목의 독백에 들어있는데, “봐줄 사람 하나 없는 개떡 같은 절벽을 바보 같은 부하 놈 때문에 땀을 흘리며 내려간다. 구두에 그 놈의 똥을 묻히고”처럼 터무니없는 과시에 제 놈들의 똥을 처바름으로써 소비지상의 허접함이 적나라해진다.

이후 처녀를 추행하려다 예기치 못한 일격을 당한 폭력배들이 마을을 공격하는 것인데, 조직원의 모습 또한 이 시대의 얼굴들을 하고 있다. 미소년의 얼굴과 잘 다져진 육체가 그것이다. 거죽, 표피의 포장은 그럴듯하지만 속은 완전히 썩고 비어있는, 실종된 정신을 대체한 물질만이 주렁주렁 매달린 21세기 한국인의 모습이 이런 것이 아닐까? 그런 이들에게 기다리는 것은 역시 그들과 같은 모습을 한 겉만 번지르한 세트장의 거대한 똥통이고 똥간이다. 문명의 광기는 이렇게 자신들이 주조한 허위와 기만의 공간과 장치에 응징된다. 그 잘난 물질의 폭력성이 무시하고 짓밟는 자연의 평화에 굴복하는 것이다.

 

문명과 자연의 싸움, 폭력조직과 촌동네 사람들의 전투는 그 극단적 대비만큼이나 우스운 것이지만 마침내 참았던 웃음을 터지게 하는 해학의 정점은 조직원들에게 뿌려진‘똥 폭탄’에 대한 서술이다. “똥 폭탄은 물리적 효과보다 심리적 효과가 훨씬 컸다”라면서, 전투력 상실과 스스로를 톨아 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고 하면서 짐짓 너스레를 떠는 것인데, “나는 누구인가, 여기서 뭘 하고 있나, (중략) 인간이란 뭔가”하면서 잃어버렸던 자아성찰이 돌아온다는 것이다. 똥물 세례가 이성을 찾게 하는 모티브가 되는 것이니 이 대목에서 나는 책을 읽다말고 큰 소리로 한껏 웃어젖혔다.

 

마침내 마을 철수를 내건 촌 동네 가장격인‘여산’과 폭력배 두목인‘정묵’의 일대일 대결이 펼쳐지지만 “강변의 흙길을 따라 열 지어”중장비와 덤프트럭 수백 대가 군대처럼 들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강이 생긴 이래 이토록 많은 내연 기관이 한꺼번에 진주한 적이 없었다.”고.  폭력배들이 퇴각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평화가 오는 듯하지만 문명의 광기는 이렇게 ‘거대한 기계괴물 집단’이 되어 낙원을 제거해 나가려고만 한다.

“어머이, 우리 그냥 예전처럼 살면 되겠소. 누구든지 쳐들어올까? 보였소? 우리는 싸운다, 이긴다. 그놈들 잘못, 가르쳐 준다. 자연 잘못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자연이 가르쳐준다.”라는 어눌한 여산의 외침이 제발 광기의 도시 문명에게 들렸으면 좋으련만 그 소망이 왠지 실낱같아 애처롭기만 하다. 내가 받은 책에는“강 같은 평화!”라는 작가가 손수 쓴 글귀가 있다. 이들이 있는 곳, 서로 지켜주고 믿음과 사랑이 있는 곳, 소리 없이 흐르는 강물과 야트막하지만 인간의 발길을 쉬이 허락하지 않는 강과 산이 있는 곳을 지켜야 할 당위의 선언 같다. 이 땅에 정말 강 같은 평화가 흐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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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만들기 1945-1987 - 경제성장과 민주화, 그리고 미국
그렉 브라진스키 지음, 나종삼 옮김 / 책과함께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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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일제로부터의 독립한 1945년 이후 1987년까지란 시간의 구분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의미가 자못 커다란 숫자이다. 아마 저자도‘대한민국’이라는 동아시아의 작은 민족 집단에게 비로소‘국가’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 숫자일 게다.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이렇다 할 경제적 기반도, 국가 행정자원도, 통치력도 지니지 못한 보잘것없는 후진적 민족 집단이 소위 서구의 근대화, 민주화된 산업 국가를 형성할 수 있었는지, 나아가 세계무대에 개발국의 지위를 확보하는 성공적 민주국가가 되었는지, ‘발전 지향적 독재’를 비롯한 독특한 한국의 산업근대화와 정치민주화의 과정을 탐사하고 있다.

 

 

책의 표제를 보면 전능한 힘을 가진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냈다는 뉘앙스가 강하다. 일견 미국인인 저자의 오만함으로 비치기도 하지만 객관적 사실의 표현, 즉 대한민국을 근대적 국가로서의 탄생이란 의미에서 바라보면 굳이 사시로 바라볼 것도 아니다. 1945~1948년 당시의 국제적 시선을 보면 “국가라면 당연히 갖추고 있어야 할 최소한의 정치적 감각조차 갖추지 못한 뒤쳐진 국가”라는 것이 지배적이었으므로 실제 하나의 독립된 국가로서의 형태를 지니지 못한 그야말로 오합지졸의 인구집단이라는 것이 진솔한 표현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로부터 60여년이 지난 오늘의 시점에서 우린 대한민국을 명실상부한 근대적 국가, 민주국가라고 자처하는데 크게 저항감이나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근대 국가의 이념적 기반을 이루고 있는 인권(人權) 및 개인의 자유, 평등과 민주주의 등 형식적 조건을 성취하는데 40여년의 시간이 소요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수많은 민초들이 탐욕스런 독재 권력들의 폭압과 폭력에 참혹하게 희생되어야 했으며, 일제 부역자들을 청산하지 못하고 민족의 배반자들에게 기득권을 여전히 향수하게 하고 있다는 치욕스러움이 남아있다. 또한 사회의 많은 부분에서 실질적 민주주의가 정착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천부적 인권이라고까지 불리는‘인간의 존엄성’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복지분야, 만인의 평등을 법이란 형식 속에 명시하고 있지만 실제 정치, 경제, 사회의 수많은 분야에서 차별과 분류, 구별짓기로 평등의 가치는 오히려 실종되어만 가고 있듯이 퇴행적 양태를 부인 할 수 없는 것도 현실이다.

 

 

이 책은 이러한 측면에서 그나마 형식적 민주화를 시작하게 된 원년, 세계인의 시선에 정말의‘국가’로서의 지위를 인정받게 된 1987년에 이르는‘국가화’의 시간에 전개된 양상들을 정면으로 직시하게 함으로써 우리들이 반복하는 어리석음의 실체, 그 부당함과 부정의 요인들을 통해 진짜의 정치,경제 민주주의, 국민의 행복과 자유, 평등이 보장되는 선진 국가를 향한 귀중한 사유의 초석이 되어준다.

사실 이 책이 기술하고 있는 한반도 남쪽지역의 인구집단이 경험한 42년 동안은 민주주의가 실행된 적이 없다. 아니 실행하기 위한 안으로부터의 저항과 밖으로부터의 압력과 지원이 있었지만 그 외형적 안정성을 확보하는 데에만 엄청난 시간과 민초들의 희생이 소요되었다. 바로 이들 압력과 저항, 희생, 지원이란 무엇이었는지, 그것들이 궁극적으로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국가를 탄생시키는 데 어떠한 작용과 영향을 주었는지 목격케 하는 기획이라 할 수 있다.

 

 

1. 근대화를 지체시킨 독재자들

 

 

 

이 책의 남다른 미덕중의 하나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국내권력의 시선을 인식하지 않아도 된다는 편향성에 대한 시비를 부분적으로 낮출 수 있음으로 인한 높은 객관성이다. 물론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역할이란 측면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한국의 좌와 우, 진보와 보수의 눈치를 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승만과 박정희, 이 두 인물의 독재기간만 무려 30년인데다가, 이후 10 여 년간은 다시금 동족의 무차별적 살해를 통해 정치권력을 침탈한 군사 쿠데타 세력의 독재가 이어졌으니 여기에 뭐라 인문학적 성찰을 한다는 것이 수치스럽기조차 하다. 그럼에도 당사자로서가 아니라 제3자적 시선의 이들에 대한 평가, 특히 미국 정부의 당시 입장을 비롯한 근대화라는 가치 지향적 접근에서의 고찰은 국내사가(史家)들이 미처 서술하지 못한 것들을 발견하게 한다.

 

 

일례로 미국무부 작성 <이승만에 관한 비밀 보고서>에서 “현실 정치가로서 갖춰야 할 역량과 자질이 턱없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와 같이 미국 정부의 평가나, 왜 미국이 이승만을 한국정치의 리더로 선택하고 지원했는지의 배경을 볼 수 있다. 또한 이승만이 개인적 권력욕에 그토록 쪄들었는지, 국민의 의사 일체를 무시하고 안하무인의 독재자가 될 수 있었던 자원(資源)적 배후도 명료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당시 모든 국가 재건과 전쟁비용 등 국가의 재원 모두를 미국이 제공했으므로 이승만으로서는 국민과 협상이 필요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재원들이 경제발전이나 국가사회를 위한 자원으로 이용되었으면 다행이었겠지만, 정치적 라이벌 제압과 같은 권력 유지비용, 기업에 특혜제공을 통한 정경유착의 씨앗비용은 물론 전쟁 중에도 자금을 비밀리에 빼돌려 결탁하고 개인사단을 위한 정보비로 사용하는 등 악질적이고 파렴치한 노회(老獪)한 늙은이가 우리민족의 가장 중요한 12년간을 갉아먹었다는 증언을 들을 수 있다.

 

 

이어진 군사쿠데타와 박정희의 군사혁명정권이 들어서는 과정에서 당시 냉전체제하에서의 미국 케네디 정부의 입장이 어떠했는지, 박정희의 권력유지를 위한 외줄타기 외교모험의 결과나 한일국교정상화가 미국정부나 박정희 군사정권의 어떤 이해관계의 타협산물인지를 보게도 된다. 특히 박정희에 이르러‘발전 지향적 독재’로 명명되는 독재정권 하에서 국가권력의 일방적인 권위에 의한 경제발전 모델이 성립하게 되는 과정에 대한 기술은 항상 논쟁의 중심에 서는 항목인데, 경제자립의 명목 하에 거대재벌에 원조자금을 집중하여 줌으로써 자신의 정치자금원을 확보하고, 경제발전을 이루겠다는 일석이조의 야심에 대한 미국의 당시 목소리를 들을 수 도 있다.

 

 

1차 경제개발 계획을 시작으로 박정희의 경제적 자주권을 향한 노력 - 재벌의 집중 육성을 통한 경제발전 - 은 오늘의 시점에서 결과론적으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노동자를 비롯한 국민의 자유와 인권을 철저하게 유린하는 토대에선 부도덕하고 패륜적인 물질주의, 경제최우선주의 지향이 절대적 불가피 정책이었다는 주장은 그 정당성을 지니지 못한다. 여기서 우리나라에는 왜 중소기업이 육성되지 못하는지, 오늘날 기업집단의 파행적 행태와 고질적인 정경유착, 재벌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우리의 정치, 관료사회의 뿌리 깊은 부패함 등의 원인이 이로부터 시작되었음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한편 유신헌법이라는 기본권은 물론 국민의 모든 권리가 제한되거나 부정된 막되 먹은 헌법 개정과 부패한 독재권력에 학문적 정당성이라는 방패를 마련하고 권력의 시녀가 된 원숭이들도 이 시절부터 한국의 혐오스러운 사회현상의 하나로 대두되기 시작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독재권력에 빌붙어 논리를 제공하고 관료자리를 한자리 꿰차는 것에 목메는 어용교수라는 것들이 유행하기도 했었다. 오늘의 이 사회의 모습을 보면 거의 모든 것이 박정희 독재정권이 낳은 패습들의 연장에 있다해도 무방할 정도로 그 농도 짙은 썩은 냄새가 쉽게 가시지 않는 것 같다. 아무튼 이승만과 박정희의 정치적 입지 및 권력유지와 관련하여 미국 정부의 입장 변화들의 상린(常鱗)성을 통해 다채로운 사실과 분석적 통찰을 얻을 수 있다.

 

 

2. 국가화 과정의 요인들

 

 

나로서는 가장 매력적으로 읽게 된 부분이라 할 수 있는데, 민주화와 근대 산업사회에 걸 맞는 지식인의 성장과 관련하여 정치, 경제, 사회문화의 근대화를 위한 연구와 노력이 어떻게 수행되었는지에 대한 분석이다.

식민통치 하에서 일제의 권위적, 그리고 전통적 유교 교육에 얽매여 있던 전근대적 교육체계에서 미국을 통한 서구의 근대식 교육체계의 주입으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사상의 유입이 이루어지는 경로와 프로그램 등 이식 방법 등이나, 특히 선택된 정치 행정 관료들 및 군 장교들의 교육이 한국의 정치경제 및 사회전반의 성장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를 당시 참여자들까지 거명하며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기도 하다. 실제 사회전반에 미국의 지원 프로그램에 의해 양성된 사람들이 각 분야의 리더로서 한국사회의 근대화 등 성장에 중추적 역할을 하였음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있는 것인데, 미국 공보실의 후원으로 언론 유학을 다녀온 언론인들이 중심이 되어 형성된 관훈클럽의 전신이라든가, 군대에는 육사와 국방대학원을, 하다못해 출판분야에서는 『사상계』까지 원조에 이르는 전방위적인 미국의 적극적이고 의도적인 국가형성 작업의 영향력의 범위가 그것이다.

 

 

특히 서구의 근대화 이론을 통한 미국식 사고의 주입이 한국의 학생들과 지식인 사회에 자극을 주고 여하한 방식으로 수용되었는가에 대한 고찰은 우리가 보다 심층적으로 연구해야 할 분야로 인식되는데, 단지 추상적으로 독재권력에 대항한 민주적 욕구 발현의 동력이 되었다거나, 서구의 근대화 과정에 결여된 한국의 전통적 가치가 도덕적 보완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정도에서 그쳐서는 부족할 것이다. 실제 우리는 서구가 근대화라고 일컫는 산업자본주의는 물론 민주주의, 자유주의, 합리주의의 이념을 성공적으로 받아들였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우리는 여기에 우리 고유의 양식과 과정으로 변환하여 수용하였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요인들이 때론 충돌하여 갈등하거나 배제되었는가하면, 유연하게 조화를 맺거나 저항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것들 각각에 대한 우리만의 연구와 진단의 성과는 미약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현대 한국사회의 정체성에 대한 민감한 부분들을 다루고 있다. 후진국이 경제발전우선주의 정책이란 가치를 위해 인간의 존엄성을 비롯한 자유와 평등과 같은 기본권을 억압하고 유린하는 것이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인가? 와 같은 정의의 문제에서부터 이승만이나 박정희와 같은 독재자들과 그 권력에 이론과 행동의 실천으로 아첨하고 선전의 선봉에 섰던 자들에 대한 조명이 있으며, 미국의 권력이 한국 사회에 어떻게 작동해왔으며 실제 작동하는 양태와 그 역학 관계를 분석하고 있기도 하다. 우리 현대사, 그것도 민주화 이전의 시기를 되돌아 볼 때면 항상 눈살이 찌푸려진다. 오직 일그러진 초상만이 있기에 그런 것인데, 이 책이 이러한 성찰을 회피하는 것은 아니지만 근대화이론을 비롯한 경제발전론, 그리고 미국이라는 제3의 시각에서 자료를 덧대어 역사적 시점을 현재화 하여 왜곡되거나 편향됨을 배제하고 분석, 제시하고 있는 것은 새로운 이해와 관점을 갖도록 해준다. 마침 한국의 정치 사회는 시민으로 외면당하고 부인될 정도로 신뢰를 상실하고 있으며, 이러한 판을 새롭게 구성해야 하는 선거를 목전에 두고 있다. 우리 사회가 보다 도덕적으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민주화된 국가로 도약하는 중대한 전환의 시기라는 점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현대한국의 정치경제사는 우리들이 판단하여야 할 귀중한 요인들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도와준다. 수준 높은 역사 인식과 안목을 지닌 책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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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를 조금만 줄여도 삶의 새로움이 넘쳐난다~


그저 스피드도 모자라 그 앞에‘초(超)’자를 붙여야 직성이 풀리는 속도경쟁의 시대에 안단테(andante: 조금 느리게)를 말하는 자는 무능과 낙오의 낙인까지 찍히기 십상이다. 지쳐있고 급격히 피로에 시달리고 있으면서도 속도의 감각을 늦추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타인을 누르고 차지한 높은 지위, 명예, 권력을 통해 궁극적으로 부를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한 경쟁에서 뒤쳐질까봐 하는 안달일 것이다. 결국 물질과 소비의 능력을 보다 더 갖기 위한 속도이다. 그런데 이것을 타인에게 과시하지 못하면 쓸 데 없는 것이어서, 정작 삶의 필요와는 관련이 없는 것들이다.


상황이 이렇고 보니 과시를 위해서는 남보다 먼저 새로운 것, 고가여서 감히 넘볼 수 없는 것을 구입하기 위해 정신없는 속도로 뛰어다닌다. 물질의 소비에 노예가 되어 인생의 참 맛을 느낄 겨를도 없이 시간을 소모한다. 사실 타인에게 관심도 없는 개인주의에 찌든 사람들이 과시하기 위해 삶의 제 속도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기이하기 그지없는 현상이다. 기이함! 바로 광기에 휩싸여 있다는 것이다. 아마 몇 세대가 지나 21세기 전후의 시대를 평가할 때, 분명‘광기의 시대’라고 명명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젠 장사꾼에 불과한 영어강사에게 스타 칭호를 붙이고, 청년들을 대상으로 인생강의를 하게 한다. 실소를 멈출 수 없는 이 사회의 실종된 정신 상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돈 만 많이 모으면 인생의 교본이 된다고 생각하는 가히 미친 사회이다. 오직 돈벌이를 위해 정신없는 속도로 뛰어다니는 자들이 과연 인생의 무엇을 알고 있다는 것일까?  결코 초고속의 빠르기로는 인생의 본질적 가치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말 하지 못한다. 산책하듯이 거닐 때 비로소 주변의 사물이 뚜렷하게 보이고, 번잡스러워 정작 생각다운 생각을 하지 못했던 뇌에서 참말의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

 

이 책은 바로 이렇게 잃어버린 우리의 인생 속도를 찾아준다. 안단테! 의 속도로. 그래서 우리들이 관심을 가지지 못했던, 혹은 볼 수 없었던 일상의 세세한 것들, 이웃들의 소소한 이야기가 우리의 인생을 얼마나 여유 있고 따뜻하며, 풍요롭게 하는지 잠시나마 순박한 웃음을 지으며 안온한 행복에 젖어들 수 있게 해준다.

작가‘호어스트’는 질주를 미덕이라고 칭송하고 새 것을 창조라 치켜세우는 무지하고 몰염치한 이들의 세상을 비판한다고 핏대를 세우거나 목청을 돋우지 않는다. 그의 일상 자체가 유머고 위트이며 해학이어서 그의 재밌는 생활이야기에 빠져들다 보면 어느새 그 속에 진중한 가치의 언어들이 힘을 발휘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인류사의 많은 위대한 발명과 발견은 무지와 실수에서 비롯됐다.”면서 구글의 검색에 의존하려했던 에피소드에서‘생각’의 가치를 말하며, 전자책 단말기를 받아들며 “그걸로 DVD도 볼 수 있나요?”라고 능청을 떠는 모습에서 우린 우리들이 상실하고 있는 가치들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딸아이와 함께한 쓰레기가 된 지구를 청소하는 로봇이 주인공인, 소비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라는 교육적 효과 높은 <월-E> 라는 영화 감상의 일화에는 “자막이 올라가고 마침내 불이 들어왔을 때 눈에 들어 온 것은 종이컵, 팝콘 찌꺼기, 비닐봉지 따위의 쓰레기로 뒤덮인 의자들”이라면서 세상을 헛된 소비로부터 구제하는 일은 이토록 재미있을 수도 있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한다.

오늘의 소비사회가 만들어내는 인류의 숭고한 가치들에 대한 훼손은 이루 다 열거하기가 벅찰 정도일 것이다. 현대의 소비는 자기과시를 지향한다. 그렇다보니 외형, 표피, 거죽의 포장에 열을 올린다. 사내들은 근육 만들기와 매력적 육체를 만들고 꾸준한 운동은 기대수명을 늘린다고 매일 한 시간씩 조깅을 한다. 하지만 기대수명은 2년이 늘어나는 데 비해 달리는데 총 4년을 소비해야 한다. 책을 한 줄 더 읽고, 타인을 위해, 사회의 건강을 위한 시간이라면 모두가 행복해질 텐데 말이다.


한편 작가의 재치에 반하게 되는 여유작작한 이야기들도 시름을 잊게 해주는데,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서의 천연덕스런 장난이다. 자기계발서, 주식투자 등 돈 버는 법과 같은 아무런 것도 말하지 않는 허접한 책들을 조롱하며, “그날 내가 용서를 빈 책은 모두 17권이었다.”며 할 말 다하고는 은근슬쩍 용서를 비는 것이다. 이 도서전시회의 에피소드는 노벨상 수상자인 ‘귄터 그라스’와의 그닥 유쾌하지 않은 사건으로도 이어진다. 엉겁결에 귄터그라스의 커피 심부름을 하게 된 일종의 모욕사건 일 수 있는데, 아주 멋지게 관용의 해석으로 마무리 짖는다. 나중에 작가인 걸 안 그라스가 미안했던지“호어스트, 그는 심부름을 하는 것보다 글 쓰는 솜씨가 훨씬 더 낫다!”고 말했다면서 용서하는 것이다. 그도 높이고 자신의 자존감도 회복하면서 말이다.


세상을 향한 은근한 비판만으로 이 책이 채워진 것은 물론 아니다. 독일‘니더작센’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작가의 사 계절에 걸친 벗과, 이웃들, 가족들과의 기억들이 수놓아 지고 있는데, 갈등으로 얼굴을 붉힐 만한 사건의 술회에도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그리고 회색과 어둠, 차가운 바람에 나뭇잎 떨어지고 보슬비마저 내리는 가을의 니더작센을‘완벽하고 좋은 우울증 패키지’라면서 단점일 수 있는 고향의 짙은 색채를 긍정의 언어로 반전시키기도 한다. 소년 시절의 연애 사건도 들려주는데, 티끌만큼도 낭만이 없는 자신은 “여자의 매력과 소유토지의 크기가 비례 한다고 믿는 그런 곳에서 성장”한 탓이라고 슬쩍 비판의 메시지도 담아내면서, 최초의 데이트 신청에 사용했던 자작시를 자랑하기도 한다.


「네 별빛 머리카락을 꿈꿔

  그리고 우리가 한 쌍의 연인이기를 꿈꿔」


히힛, 이 순박한 소년의 연애시가 간지럽고 풋풋하다. 아마 이 책의 모든 이야기들을 쓴 작가의 심성이 어떤 모양인지 그려지지 않는가? 세 송이 장미꽃과 이 연시(戀詩)를 받은 소녀는 자신과의 데이트를 수락했단다. 바쁜 일상에 쫓겨 오늘의 우리들은 자신의 일상을 볼 수가 없다. 모처럼의 짬을 내서 우리들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책이다. 한 걸음 쉬어 가보자. 훨씬 많은 것들이 새롭게 보이고 해석될 것이다. 삶의 의미가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라르고까지는 아니더라도 안단테정도는 생의 속도에서 꼭 필요한 감각일 것이다. 웃음과 여유 속에서만 진실을 발견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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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드 1 - 가난한 성자들 조드 1
김형수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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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학이 광활한 대륙을 배경으로 한 영웅의 서사를 그리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주목하게 하는 작품이다. 소설의 도입부인 ‘늑대 서사’는 과연 우리들의 영혼을 태고부터 신체에 각인 된 무의식의 시원을 자극하는 수려한 신화의 지대로 이끌어 격한 감동으로 충일하게 한다. 사랑과 모험, 그리고 생존과 번식, 달빛 사람과 사랑한‘알랑 고아’의 후손들, 새로운 인간의 시작을 알리는 생명의 집요함 같은 것. 푸른 하늘과 대지와 산과 강과 호수, 늑대와 말, 인간이 자연과 어우러져 빚어내는 적대와 조화, 오만과 겸허, 절망과 환희의 드라마가 지면을 가득 채운다.

 

소설 1권은 이 거대한 서사를 기반으로 달빛 사람의 후손인‘푸른 늑대 부족’의‘흰 뼈(적통)’인 소년‘테무진’의 청년, 성년에 이르기까지의 혹독한 시련과 소명을 깨달아가는 전환적 사건들의 기록으로 짜여 있다. 아버지‘예수게이’의 죽음으로 해체되고 분열된 ‘어린 몽골’의 반목과 대립, 약탈과 복수가 연속되는 피폐한 세상의 사슬을 끊어내기 위해 가진 것 없이 도망 다녀야 하는 가난한 성자에게 어떻게 그의 벗과 형제, 가족들, 흩어졌던 부족민들이 규합되는 가를 보여준다. 어린 몽골이 성숙한 어른의 몽골, 국가로의 이행으로 다가가는 진통과 산고의 시기에 대한 이야기다.

 

눈과 얼음이 뒤덮은 혹독한 겨울의 메마른 자연의 폭력 앞에 모든 생명은 죽음으로 복종한다. 이 거센 건조기의 자연력이‘조드’이다. 조드가 엄습하면 가축이 전멸하고 생존의 경쟁에 내몰린 인간들은 약탈의 세계로 내몰린다. 이처럼 자연의 조드 못지않게 인간의 발자국이 파괴하는 초원으로 인해 협소해진 초원은 서로 간의 폭력,‘발자국 조드’로 더욱 무참해 진다. 씨족간의 충돌, 부족과 씨족의 충돌, 부족간의 충돌, 서로가 서로를 사냥하는 무한 폭력의 세상이 전개된다. 이 끝없는 분열과 보복의 반복은 어린 몽골이 사라져 버릴 수 있는 위기를 의미한다.

        

소년 테무진이 성년으로, 어른 몽골을 위한 소명의 각성으로 나아가는 여정은 아마 내 뇌리에 깊이 이미지화 된 두 개의 명장면만큼 선명한 것은 없을 것 같다. 그 하나는 분열된 어린 몽골을 규합하기 위해 준비하는 청년 ‘자무카’가 백 필의 말을 이끌고 조드를 피해 자신의 명마‘회색의 새’와 함께 헤를렌 강의 초원으로 달려가는 그림이다. 냉혹한 추위와 거친 눈발 속에 산과 초원을 달리는 말들을 향해 달려드는 굶주린 늑대 무리의 공격, 대열을 흩뜨리려는 늑대의 전술과 이를 방어하려는 인간과 말의 대결, 적을 사지로 몰아넣기 위한 늑대들의 끈질긴 기만전술, 절대절명의 순간, 늑대의 전술을 꿰똟고 대열을 재정비하고 생환케 하는 테무진의 출현은 청년 장군 자무카와 함께 무수한 은유적 의미를 출발시킨다.

 

그리고 또 하나는 메르키드족의 대를 잇는 피비린내 나는 복수의 희생물이 되어 테무진의 아내인 ‘버르테’가 약탈(?)당하는 것인데, 빼앗긴 아내를 되찾기 위해 케레이트족의 칸과 자무카의 군대를 연합하여 4만의 기병 연합군을 도모해 매르키드족을 습격하는 장면이다. 적진을 가로막는 킬코강을 심야에 4만 필의 말과 병사가 도강(渡江)하는 묘사는 일대 장관이다. 장애물의 완벽한 사전 숙지, 결단력, 전략에 대한 신뢰감 등 지도자의 역량이 무엇인지, 게다가 인내와 양보, 겸허의 지혜까지 살펴내어 삶의 모든 정치를 담아내고 있다. 결국 이 걸출한 전환적 사건들의 기술(記述)은 테무진의 인물됨에 대한, 세상의 이치에 대한 진실 들을 말하고 있다. 의리, 복수, 신뢰, 인내, 사랑, 명분, 술책의 진리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아내를 찾기 위해 벌이는 이 전쟁의 정당성이란 무엇일까? 소설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남김없이 살해되고 말 것 같은 무서운 몰살작전이 계속되었다.”라고! 패덕에 대한 징벌이겠지만, 이것이 전쟁을 합리화 할 수 있는 것일까? 전쟁은 전쟁의 원인과는 무관한 대다수의 민중을 희생시킨다. 다분히 전쟁을 명분화하는 논리들이란 많은 도덕적 결핍을 가지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실, 이 소설이 서구의 영웅 신화, 다시 말해 서구중심의 역사관으로 인해 배제된 아시아적 사고의 복원이라 하고 있지만 그 이유로 영웅이라는 서구식의 방법론을 반복하는 것이 패착인 것은 아닌가하는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제 2권의 독서에서 소설이 취하고자 하는 본질을 확인하기를 기대해본다. 이러한 비판적 논의는 따라서 잠시 유보하기로 한다. 이러한 인문학적 관점을 능가하는 지혜의 목소리들이 소설의 문장들마다 번쩍이고 있기 때문이다.

 

테무진이 최초의 벗이라 할 수 있는‘보오르추’로부터 세상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깨달음 갖게 되는 것인데, “벗이여 홀로 외롭겠구나!”라며, 테무진의 고독한 영혼을 어루만지는 진심의 언어이다.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 그토록 따뜻하고 계산 속 없는 음성이 존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세상을 오해한 것을 깊이 뉘우쳐야 했다.”고 하는 긍정의 태도이다. 또한 어머니‘후엘룬’의 목소리를 빌어 스스로 존엄을 지키기 위해 절망에 눈멀어야 하고 슬픔에 하늘을 원망하지 않는 마음의 연마는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시사가 큰 문장이다. 더불어 말들을 거세하는 이유에서 “욕망에 허덕이는 것들을 거세하지 않으면 남을 물어뜯게 되어 있다.”는 답변은 절제의 제동기능을 상실한 소비지상의 지금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되새기게도 한다.

 

특히 “자신의 생애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 이해하기에 인간은 너무 작아. 인생은 아주 크단다. 우리는 자기 발밑도 온전하게 볼 수가 없어.”라는 문장은 삶에 대한 겸손과 삶의 지대한 가치를 가늠하게 해준다. 세계 주류의 역사에서 배제된 몽골의 역사를 통해 자연을 제압하는 오만한 영웅의 역사가 아니라, “땅 위에서 겸손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날씨”만큼이나 대자연에의 겸허와 교감이 바로 인류의 정말의 정신을 낳았다고 말하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이 소설에서 새소리, 바람소리, 땅의 소리, 별들이 풀밭에 속삭이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 “자연과 한 톨로 뒹구는” 인간의 목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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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뒷면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9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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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있음. 아직 책을 읽지 않으신 분들은 이 리뷰의 중반 이후는 읽지마세요~]

 

나뭇가지처럼 얽힌 수로에 에워싸인 소도시, ‘야나쿠라’. 비가 흩뿌리고 빗물에 젖은 수로변의 집들이 어우러져 한층 을씨년스러움을 더한다. 소설 전체에 물이 줄줄 흘러내린다. 뿌옇게 흐려진 시야에 사물들은 제 형태를 찾지 못하고 어떤 환상의 공간을 떠 올리게 한다. 이 환상적 분위기는 물이 지니는 태초의 공포로 서서히 내 무의식의 심연을 잠식한다. 그래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가늠하기 어려워진다.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서부터 환상의 세계인지. 물의 도시 야나쿠라는 이렇게 모호한 느낌의 공간으로 다가온다.

 

대중음악 기획자인‘다몬’은 스승,‘교이치로’의 요청으로 야나쿠라에 도착하고, 스승으로부터 연쇄적인 노인들의 실종과 그리고 어느 날 갑작스레 태연자약한 모습으로 복귀한 그들의 기이한 사건을 듣게된다. 여기에 학창시절을 같이했던 스승의 딸인 ‘아이코’와, 지역신문 기자인‘다카야스’가 합류하여 이 기이한 현상의 이면(裏面)을 쫓는다. 아이코는 수년 전 실종되었다가 불현듯 돌아온 작은아버지 내외의 모습에서 동일한 인간이 아니리라는 막연한 의구심을 술회하고, 다카야스가 녹음한 복귀 노인들과의 인터뷰 내용 속에서 공통되게 들리는 특이한 소리는 어떤 낯선 존재의 전조(前兆)로 의심되기에 이른다.

 

교이치로가 애정으로 기르는 고양이는 야나쿠로의 옛 유명 시인의 이름과 관련되어 은닉된 사연의 개체가 되고, 사건의 배후에 있는 미지의 주체를 매개하는 어떤 영물처럼 보이기조차 한다. 고양이가 물어 온 인간 신체의 한 부분, 귀, 코..., 그러나 정말의 인체가 아니지만 너무도 인간의 그것과 똑 같은 것을 어딘가에서 물어뜯어 온 흔적을 지니고 있다. 이야기는 괴이함과 낯선 거북함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미지(未知)의 존재를 추적하기 위해 이들은 도시에 숨겨진 역사를 찾기 위해 도서관으로, 신문사의 옛 취재 기록을, 도시의 숨겨진 어떤 비밀을 간직한 듯한 인물을 찾아 진실의 존재로 다가가려 한다. 그러나 이미 거대한 힘은 이들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점액질의 투명한 물질이 도서관을 휩싸고, 급기야는 도시에서 사람들의 모습이 자취를 감춘다.

 

다분히 환상적이다. 이 비현실적 공간에 남은 네 사람의 공포는 그대로 독자인 내게 전달된다. 그리고 마침내 이들은 사라진 인간들이 재생되는 장소의 발견과 개구리 알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미완성상태의 인간의 얼굴들을 목격하게 된다. 아마 이것을 이미지화하면 어지간한 호러장면은 저리가라고 할 정도일 것이다. 역겨움을 동반한 급격한 공포가 등줄기를 타고 내려온다. 실종된 사람들의 복귀를 설명하는 이 괴이한 전경은 현실과 환상이 겹쳐진 설명 불가능한 시공이다. 복귀한 사람들은 과연 인간인가? 실종되기 전의 사람과 동일한 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이러한 의문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다카야스마저 사라지고 그 역시 재생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이들은 이렇게 현실의 존재자인 자신들이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이해할 수 없는 시공으로 회수되는 것을‘도둑맞는다.’고 표현한다.

 

이미 기억을 도둑맞았던 사람들, 그들이 정작 도둑맞은 것은 기억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 이 세상 사람들 모두가 이렇게 자신도 알지 못하는 새에 회수와 재생을 반복하고 있다면, 즉 삶과 죽음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라면, 결코 어제의 나와 내일의 나와의 동일성을 주장할 수 없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의 기억이란 것이 얼마나 취약한지는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고 해서 실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요, 지금 눈앞에 보인다고 해서 실재라고 말 할 수도 없는 것 아니겠는가? 우리가 찾아 헤매는 진실이란 이 처럼 보이지 않는, 도저히 기억 할 수 없는 시공을 초월한 그 무엇일지도 모른다.

 

“천천히 찾아드는 정적(靜寂)” 그리고 “내 부름에 응답하는 것 같은 절대적인 목소리”, “누구도 제지 할 수 없는, 태곳적부터 존재해온 거대한 의사(意思)의 목소리”, 그 미지의 힘에 겸허해진다. 공포의 힘이라서가 아니라 내 존재의 한계를 알기 때문에. 마침내 소설의 마지막 읽기를 마치고 나면 자아(自我)의 저 밑바닥 어두운 곳의 진실을 체험하고 난 듯한 의연한 기분이 된 것을 문득 깨닫는다. 마음의 고향, 진화의 저 앞선 시기의 조상들이 살던 물속을 한바탕 헤맸기에 그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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