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만들기 1945-1987 - 경제성장과 민주화, 그리고 미국
그렉 브라진스키 지음, 나종삼 옮김 / 책과함께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일제로부터의 독립한 1945년 이후 1987년까지란 시간의 구분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의미가 자못 커다란 숫자이다. 아마 저자도‘대한민국’이라는 동아시아의 작은 민족 집단에게 비로소‘국가’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 숫자일 게다.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이렇다 할 경제적 기반도, 국가 행정자원도, 통치력도 지니지 못한 보잘것없는 후진적 민족 집단이 소위 서구의 근대화, 민주화된 산업 국가를 형성할 수 있었는지, 나아가 세계무대에 개발국의 지위를 확보하는 성공적 민주국가가 되었는지, ‘발전 지향적 독재’를 비롯한 독특한 한국의 산업근대화와 정치민주화의 과정을 탐사하고 있다.

 

 

책의 표제를 보면 전능한 힘을 가진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냈다는 뉘앙스가 강하다. 일견 미국인인 저자의 오만함으로 비치기도 하지만 객관적 사실의 표현, 즉 대한민국을 근대적 국가로서의 탄생이란 의미에서 바라보면 굳이 사시로 바라볼 것도 아니다. 1945~1948년 당시의 국제적 시선을 보면 “국가라면 당연히 갖추고 있어야 할 최소한의 정치적 감각조차 갖추지 못한 뒤쳐진 국가”라는 것이 지배적이었으므로 실제 하나의 독립된 국가로서의 형태를 지니지 못한 그야말로 오합지졸의 인구집단이라는 것이 진솔한 표현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로부터 60여년이 지난 오늘의 시점에서 우린 대한민국을 명실상부한 근대적 국가, 민주국가라고 자처하는데 크게 저항감이나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근대 국가의 이념적 기반을 이루고 있는 인권(人權) 및 개인의 자유, 평등과 민주주의 등 형식적 조건을 성취하는데 40여년의 시간이 소요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수많은 민초들이 탐욕스런 독재 권력들의 폭압과 폭력에 참혹하게 희생되어야 했으며, 일제 부역자들을 청산하지 못하고 민족의 배반자들에게 기득권을 여전히 향수하게 하고 있다는 치욕스러움이 남아있다. 또한 사회의 많은 부분에서 실질적 민주주의가 정착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천부적 인권이라고까지 불리는‘인간의 존엄성’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복지분야, 만인의 평등을 법이란 형식 속에 명시하고 있지만 실제 정치, 경제, 사회의 수많은 분야에서 차별과 분류, 구별짓기로 평등의 가치는 오히려 실종되어만 가고 있듯이 퇴행적 양태를 부인 할 수 없는 것도 현실이다.

 

 

이 책은 이러한 측면에서 그나마 형식적 민주화를 시작하게 된 원년, 세계인의 시선에 정말의‘국가’로서의 지위를 인정받게 된 1987년에 이르는‘국가화’의 시간에 전개된 양상들을 정면으로 직시하게 함으로써 우리들이 반복하는 어리석음의 실체, 그 부당함과 부정의 요인들을 통해 진짜의 정치,경제 민주주의, 국민의 행복과 자유, 평등이 보장되는 선진 국가를 향한 귀중한 사유의 초석이 되어준다.

사실 이 책이 기술하고 있는 한반도 남쪽지역의 인구집단이 경험한 42년 동안은 민주주의가 실행된 적이 없다. 아니 실행하기 위한 안으로부터의 저항과 밖으로부터의 압력과 지원이 있었지만 그 외형적 안정성을 확보하는 데에만 엄청난 시간과 민초들의 희생이 소요되었다. 바로 이들 압력과 저항, 희생, 지원이란 무엇이었는지, 그것들이 궁극적으로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국가를 탄생시키는 데 어떠한 작용과 영향을 주었는지 목격케 하는 기획이라 할 수 있다.

 

 

1. 근대화를 지체시킨 독재자들

 

 

 

이 책의 남다른 미덕중의 하나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국내권력의 시선을 인식하지 않아도 된다는 편향성에 대한 시비를 부분적으로 낮출 수 있음으로 인한 높은 객관성이다. 물론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역할이란 측면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한국의 좌와 우, 진보와 보수의 눈치를 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승만과 박정희, 이 두 인물의 독재기간만 무려 30년인데다가, 이후 10 여 년간은 다시금 동족의 무차별적 살해를 통해 정치권력을 침탈한 군사 쿠데타 세력의 독재가 이어졌으니 여기에 뭐라 인문학적 성찰을 한다는 것이 수치스럽기조차 하다. 그럼에도 당사자로서가 아니라 제3자적 시선의 이들에 대한 평가, 특히 미국 정부의 당시 입장을 비롯한 근대화라는 가치 지향적 접근에서의 고찰은 국내사가(史家)들이 미처 서술하지 못한 것들을 발견하게 한다.

 

 

일례로 미국무부 작성 <이승만에 관한 비밀 보고서>에서 “현실 정치가로서 갖춰야 할 역량과 자질이 턱없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와 같이 미국 정부의 평가나, 왜 미국이 이승만을 한국정치의 리더로 선택하고 지원했는지의 배경을 볼 수 있다. 또한 이승만이 개인적 권력욕에 그토록 쪄들었는지, 국민의 의사 일체를 무시하고 안하무인의 독재자가 될 수 있었던 자원(資源)적 배후도 명료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당시 모든 국가 재건과 전쟁비용 등 국가의 재원 모두를 미국이 제공했으므로 이승만으로서는 국민과 협상이 필요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재원들이 경제발전이나 국가사회를 위한 자원으로 이용되었으면 다행이었겠지만, 정치적 라이벌 제압과 같은 권력 유지비용, 기업에 특혜제공을 통한 정경유착의 씨앗비용은 물론 전쟁 중에도 자금을 비밀리에 빼돌려 결탁하고 개인사단을 위한 정보비로 사용하는 등 악질적이고 파렴치한 노회(老獪)한 늙은이가 우리민족의 가장 중요한 12년간을 갉아먹었다는 증언을 들을 수 있다.

 

 

이어진 군사쿠데타와 박정희의 군사혁명정권이 들어서는 과정에서 당시 냉전체제하에서의 미국 케네디 정부의 입장이 어떠했는지, 박정희의 권력유지를 위한 외줄타기 외교모험의 결과나 한일국교정상화가 미국정부나 박정희 군사정권의 어떤 이해관계의 타협산물인지를 보게도 된다. 특히 박정희에 이르러‘발전 지향적 독재’로 명명되는 독재정권 하에서 국가권력의 일방적인 권위에 의한 경제발전 모델이 성립하게 되는 과정에 대한 기술은 항상 논쟁의 중심에 서는 항목인데, 경제자립의 명목 하에 거대재벌에 원조자금을 집중하여 줌으로써 자신의 정치자금원을 확보하고, 경제발전을 이루겠다는 일석이조의 야심에 대한 미국의 당시 목소리를 들을 수 도 있다.

 

 

1차 경제개발 계획을 시작으로 박정희의 경제적 자주권을 향한 노력 - 재벌의 집중 육성을 통한 경제발전 - 은 오늘의 시점에서 결과론적으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노동자를 비롯한 국민의 자유와 인권을 철저하게 유린하는 토대에선 부도덕하고 패륜적인 물질주의, 경제최우선주의 지향이 절대적 불가피 정책이었다는 주장은 그 정당성을 지니지 못한다. 여기서 우리나라에는 왜 중소기업이 육성되지 못하는지, 오늘날 기업집단의 파행적 행태와 고질적인 정경유착, 재벌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우리의 정치, 관료사회의 뿌리 깊은 부패함 등의 원인이 이로부터 시작되었음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한편 유신헌법이라는 기본권은 물론 국민의 모든 권리가 제한되거나 부정된 막되 먹은 헌법 개정과 부패한 독재권력에 학문적 정당성이라는 방패를 마련하고 권력의 시녀가 된 원숭이들도 이 시절부터 한국의 혐오스러운 사회현상의 하나로 대두되기 시작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독재권력에 빌붙어 논리를 제공하고 관료자리를 한자리 꿰차는 것에 목메는 어용교수라는 것들이 유행하기도 했었다. 오늘의 이 사회의 모습을 보면 거의 모든 것이 박정희 독재정권이 낳은 패습들의 연장에 있다해도 무방할 정도로 그 농도 짙은 썩은 냄새가 쉽게 가시지 않는 것 같다. 아무튼 이승만과 박정희의 정치적 입지 및 권력유지와 관련하여 미국 정부의 입장 변화들의 상린(常鱗)성을 통해 다채로운 사실과 분석적 통찰을 얻을 수 있다.

 

 

2. 국가화 과정의 요인들

 

 

나로서는 가장 매력적으로 읽게 된 부분이라 할 수 있는데, 민주화와 근대 산업사회에 걸 맞는 지식인의 성장과 관련하여 정치, 경제, 사회문화의 근대화를 위한 연구와 노력이 어떻게 수행되었는지에 대한 분석이다.

식민통치 하에서 일제의 권위적, 그리고 전통적 유교 교육에 얽매여 있던 전근대적 교육체계에서 미국을 통한 서구의 근대식 교육체계의 주입으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사상의 유입이 이루어지는 경로와 프로그램 등 이식 방법 등이나, 특히 선택된 정치 행정 관료들 및 군 장교들의 교육이 한국의 정치경제 및 사회전반의 성장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를 당시 참여자들까지 거명하며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기도 하다. 실제 사회전반에 미국의 지원 프로그램에 의해 양성된 사람들이 각 분야의 리더로서 한국사회의 근대화 등 성장에 중추적 역할을 하였음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있는 것인데, 미국 공보실의 후원으로 언론 유학을 다녀온 언론인들이 중심이 되어 형성된 관훈클럽의 전신이라든가, 군대에는 육사와 국방대학원을, 하다못해 출판분야에서는 『사상계』까지 원조에 이르는 전방위적인 미국의 적극적이고 의도적인 국가형성 작업의 영향력의 범위가 그것이다.

 

 

특히 서구의 근대화 이론을 통한 미국식 사고의 주입이 한국의 학생들과 지식인 사회에 자극을 주고 여하한 방식으로 수용되었는가에 대한 고찰은 우리가 보다 심층적으로 연구해야 할 분야로 인식되는데, 단지 추상적으로 독재권력에 대항한 민주적 욕구 발현의 동력이 되었다거나, 서구의 근대화 과정에 결여된 한국의 전통적 가치가 도덕적 보완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정도에서 그쳐서는 부족할 것이다. 실제 우리는 서구가 근대화라고 일컫는 산업자본주의는 물론 민주주의, 자유주의, 합리주의의 이념을 성공적으로 받아들였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우리는 여기에 우리 고유의 양식과 과정으로 변환하여 수용하였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요인들이 때론 충돌하여 갈등하거나 배제되었는가하면, 유연하게 조화를 맺거나 저항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것들 각각에 대한 우리만의 연구와 진단의 성과는 미약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현대 한국사회의 정체성에 대한 민감한 부분들을 다루고 있다. 후진국이 경제발전우선주의 정책이란 가치를 위해 인간의 존엄성을 비롯한 자유와 평등과 같은 기본권을 억압하고 유린하는 것이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인가? 와 같은 정의의 문제에서부터 이승만이나 박정희와 같은 독재자들과 그 권력에 이론과 행동의 실천으로 아첨하고 선전의 선봉에 섰던 자들에 대한 조명이 있으며, 미국의 권력이 한국 사회에 어떻게 작동해왔으며 실제 작동하는 양태와 그 역학 관계를 분석하고 있기도 하다. 우리 현대사, 그것도 민주화 이전의 시기를 되돌아 볼 때면 항상 눈살이 찌푸려진다. 오직 일그러진 초상만이 있기에 그런 것인데, 이 책이 이러한 성찰을 회피하는 것은 아니지만 근대화이론을 비롯한 경제발전론, 그리고 미국이라는 제3의 시각에서 자료를 덧대어 역사적 시점을 현재화 하여 왜곡되거나 편향됨을 배제하고 분석, 제시하고 있는 것은 새로운 이해와 관점을 갖도록 해준다. 마침 한국의 정치 사회는 시민으로 외면당하고 부인될 정도로 신뢰를 상실하고 있으며, 이러한 판을 새롭게 구성해야 하는 선거를 목전에 두고 있다. 우리 사회가 보다 도덕적으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민주화된 국가로 도약하는 중대한 전환의 시기라는 점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현대한국의 정치경제사는 우리들이 판단하여야 할 귀중한 요인들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도와준다. 수준 높은 역사 인식과 안목을 지닌 책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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