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를 조금만 줄여도 삶의 새로움이 넘쳐난다~
그저 스피드도 모자라 그 앞에‘초(超)’자를 붙여야 직성이 풀리는 속도경쟁의 시대에 안단테(andante: 조금 느리게)를 말하는 자는 무능과 낙오의 낙인까지 찍히기 십상이다. 지쳐있고 급격히 피로에 시달리고 있으면서도 속도의 감각을 늦추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타인을 누르고 차지한 높은 지위, 명예, 권력을 통해 궁극적으로 부를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한 경쟁에서 뒤쳐질까봐 하는 안달일 것이다. 결국 물질과 소비의 능력을 보다 더 갖기 위한 속도이다. 그런데 이것을 타인에게 과시하지 못하면 쓸 데 없는 것이어서, 정작 삶의 필요와는 관련이 없는 것들이다.
상황이 이렇고 보니 과시를 위해서는 남보다 먼저 새로운 것, 고가여서 감히 넘볼 수 없는 것을 구입하기 위해 정신없는 속도로 뛰어다닌다. 물질의 소비에 노예가 되어 인생의 참 맛을 느낄 겨를도 없이 시간을 소모한다. 사실 타인에게 관심도 없는 개인주의에 찌든 사람들이 과시하기 위해 삶의 제 속도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기이하기 그지없는 현상이다. 기이함! 바로 광기에 휩싸여 있다는 것이다. 아마 몇 세대가 지나 21세기 전후의 시대를 평가할 때, 분명‘광기의 시대’라고 명명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젠 장사꾼에 불과한 영어강사에게 스타 칭호를 붙이고, 청년들을 대상으로 인생강의를 하게 한다. 실소를 멈출 수 없는 이 사회의 실종된 정신 상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돈 만 많이 모으면 인생의 교본이 된다고 생각하는 가히 미친 사회이다. 오직 돈벌이를 위해 정신없는 속도로 뛰어다니는 자들이 과연 인생의 무엇을 알고 있다는 것일까? 결코 초고속의 빠르기로는 인생의 본질적 가치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말 하지 못한다. 산책하듯이 거닐 때 비로소 주변의 사물이 뚜렷하게 보이고, 번잡스러워 정작 생각다운 생각을 하지 못했던 뇌에서 참말의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
이 책은 바로 이렇게 잃어버린 우리의 인생 속도를 찾아준다. 안단테! 의 속도로. 그래서 우리들이 관심을 가지지 못했던, 혹은 볼 수 없었던 일상의 세세한 것들, 이웃들의 소소한 이야기가 우리의 인생을 얼마나 여유 있고 따뜻하며, 풍요롭게 하는지 잠시나마 순박한 웃음을 지으며 안온한 행복에 젖어들 수 있게 해준다.
작가‘호어스트’는 질주를 미덕이라고 칭송하고 새 것을 창조라 치켜세우는 무지하고 몰염치한 이들의 세상을 비판한다고 핏대를 세우거나 목청을 돋우지 않는다. 그의 일상 자체가 유머고 위트이며 해학이어서 그의 재밌는 생활이야기에 빠져들다 보면 어느새 그 속에 진중한 가치의 언어들이 힘을 발휘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인류사의 많은 위대한 발명과 발견은 무지와 실수에서 비롯됐다.”면서 구글의 검색에 의존하려했던 에피소드에서‘생각’의 가치를 말하며, 전자책 단말기를 받아들며 “그걸로 DVD도 볼 수 있나요?”라고 능청을 떠는 모습에서 우린 우리들이 상실하고 있는 가치들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딸아이와 함께한 쓰레기가 된 지구를 청소하는 로봇이 주인공인, 소비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라는 교육적 효과 높은 <월-E> 라는 영화 감상의 일화에는 “자막이 올라가고 마침내 불이 들어왔을 때 눈에 들어 온 것은 종이컵, 팝콘 찌꺼기, 비닐봉지 따위의 쓰레기로 뒤덮인 의자들”이라면서 세상을 헛된 소비로부터 구제하는 일은 이토록 재미있을 수도 있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한다.
오늘의 소비사회가 만들어내는 인류의 숭고한 가치들에 대한 훼손은 이루 다 열거하기가 벅찰 정도일 것이다. 현대의 소비는 자기과시를 지향한다. 그렇다보니 외형, 표피, 거죽의 포장에 열을 올린다. 사내들은 근육 만들기와 매력적 육체를 만들고 꾸준한 운동은 기대수명을 늘린다고 매일 한 시간씩 조깅을 한다. 하지만 기대수명은 2년이 늘어나는 데 비해 달리는데 총 4년을 소비해야 한다. 책을 한 줄 더 읽고, 타인을 위해, 사회의 건강을 위한 시간이라면 모두가 행복해질 텐데 말이다.
한편 작가의 재치에 반하게 되는 여유작작한 이야기들도 시름을 잊게 해주는데,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서의 천연덕스런 장난이다. 자기계발서, 주식투자 등 돈 버는 법과 같은 아무런 것도 말하지 않는 허접한 책들을 조롱하며, “그날 내가 용서를 빈 책은 모두 17권이었다.”며 할 말 다하고는 은근슬쩍 용서를 비는 것이다. 이 도서전시회의 에피소드는 노벨상 수상자인 ‘귄터 그라스’와의 그닥 유쾌하지 않은 사건으로도 이어진다. 엉겁결에 귄터그라스의 커피 심부름을 하게 된 일종의 모욕사건 일 수 있는데, 아주 멋지게 관용의 해석으로 마무리 짖는다. 나중에 작가인 걸 안 그라스가 미안했던지“호어스트, 그는 심부름을 하는 것보다 글 쓰는 솜씨가 훨씬 더 낫다!”고 말했다면서 용서하는 것이다. 그도 높이고 자신의 자존감도 회복하면서 말이다.
세상을 향한 은근한 비판만으로 이 책이 채워진 것은 물론 아니다. 독일‘니더작센’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작가의 사 계절에 걸친 벗과, 이웃들, 가족들과의 기억들이 수놓아 지고 있는데, 갈등으로 얼굴을 붉힐 만한 사건의 술회에도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그리고 회색과 어둠, 차가운 바람에 나뭇잎 떨어지고 보슬비마저 내리는 가을의 니더작센을‘완벽하고 좋은 우울증 패키지’라면서 단점일 수 있는 고향의 짙은 색채를 긍정의 언어로 반전시키기도 한다. 소년 시절의 연애 사건도 들려주는데, 티끌만큼도 낭만이 없는 자신은 “여자의 매력과 소유토지의 크기가 비례 한다고 믿는 그런 곳에서 성장”한 탓이라고 슬쩍 비판의 메시지도 담아내면서, 최초의 데이트 신청에 사용했던 자작시를 자랑하기도 한다.
「네 별빛 머리카락을 꿈꿔
그리고 우리가 한 쌍의 연인이기를 꿈꿔」
히힛, 이 순박한 소년의 연애시가 간지럽고 풋풋하다. 아마 이 책의 모든 이야기들을 쓴 작가의 심성이 어떤 모양인지 그려지지 않는가? 세 송이 장미꽃과 이 연시(戀詩)를 받은 소녀는 자신과의 데이트를 수락했단다. 바쁜 일상에 쫓겨 오늘의 우리들은 자신의 일상을 볼 수가 없다. 모처럼의 짬을 내서 우리들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책이다. 한 걸음 쉬어 가보자. 훨씬 많은 것들이 새롭게 보이고 해석될 것이다. 삶의 의미가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라르고까지는 아니더라도 안단테정도는 생의 속도에서 꼭 필요한 감각일 것이다. 웃음과 여유 속에서만 진실을 발견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