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풍당당 - 성석제 장편소설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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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장치들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곳, 과시와 기만이 부질없는 곳, 그래서 인간이 어떤 것으로 굳이 수식될 이유가 없는 곳이라면 그 곳이 바로 유토피아 아닐까! 유토피아라 해서 공정함의 정의나 민주주의와 같은 주의와 도덕율의 잣대로 정의할 필요까지는 없다. 사람들이 서로 믿으며, 자기 몸처럼 사랑하고 서로를 지켜주려는 마음을 지니고 있는 곳이면 족하지 아니한가?

 

소설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 소박하게 서로를 의지하며 사는 어느 벽지를 묘사한다. 금강산도 아닌 것이 봉래산이란 이름을 가진 곳, 한자말은 더욱 우습다. 봉황의 봉(鳳)이요, 래 자는 그저 올 래(來)이다. 단지 봉이 올 것이란 이 소망의 말에 더해 사백 여 미터에 불과한 야트막한 산이고 보니 더욱 보잘것 없어보이게 한다. 더구나 이 외진 산기슭 강마을에 인간의 온갖 욕망이 휩쓸고 지나간 흔적인 겉만 번지르르하고 내용은 하나도 없는 버려진 드라마 세트장이 생뚱맞게 촌 동네를 차지하고 있다. 이 우스꽝스런 공간의 대비(對比)가 꼭 우리들의 모순된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 나는 마음껏 웃음에 동참하지 못한다.

 

아무도 찾지 않는, 아니 찾기도 힘든 깡 촌에 세상의 사연이란 속박을 버리고 제각기 찾아 든 일곱 명의 사람들이 나무와 풀, 꽃과 숲, 강물이 흐르는 자연 속에서 보이지 않는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정감을 나누며 소박한 일상을 함께한다. 이들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오직 “자신들의 선택에 의해서 가족이 된”사람들, 서로를 가족으로 선택한 사람들이다. 육십, 오십, 이십대의 세대를 달리하는 남자와 여자들이 자연 같은 마음으로 낙원 같은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가뜩이나 좁아터진 우리네 세상이 이 같은 낙원을 가만둘 턱이 없다. 전국구 폭력 조직배의 눈에 띤 처녀의 미모는 이 조용한 시골 마을을 격전장이 되게 한다. 여자의 걸음과 속도를 같이하며 산길을 따라가는 검게 선팅이 된 벤츠와 그 안에 선글라스를 착용한 세 명의 남자, 이미 불온함과 폭력의 기운이 가득하다. 게다가 ‘아르마니 넥타이, 페라가모 구두, 베르사체 선글라스, 카르티에 시계’를 착용하고 뒷자리에 앉아있는 조직 두목의 차림새는 휴대전화조차 걸리지 않는 오지의 마을에는 어처구니없을 만큼 희화적(戱畵的)이다.

 

이 희극적 모습의 의미는 두목의 독백에 들어있는데, “봐줄 사람 하나 없는 개떡 같은 절벽을 바보 같은 부하 놈 때문에 땀을 흘리며 내려간다. 구두에 그 놈의 똥을 묻히고”처럼 터무니없는 과시에 제 놈들의 똥을 처바름으로써 소비지상의 허접함이 적나라해진다.

이후 처녀를 추행하려다 예기치 못한 일격을 당한 폭력배들이 마을을 공격하는 것인데, 조직원의 모습 또한 이 시대의 얼굴들을 하고 있다. 미소년의 얼굴과 잘 다져진 육체가 그것이다. 거죽, 표피의 포장은 그럴듯하지만 속은 완전히 썩고 비어있는, 실종된 정신을 대체한 물질만이 주렁주렁 매달린 21세기 한국인의 모습이 이런 것이 아닐까? 그런 이들에게 기다리는 것은 역시 그들과 같은 모습을 한 겉만 번지르한 세트장의 거대한 똥통이고 똥간이다. 문명의 광기는 이렇게 자신들이 주조한 허위와 기만의 공간과 장치에 응징된다. 그 잘난 물질의 폭력성이 무시하고 짓밟는 자연의 평화에 굴복하는 것이다.

 

문명과 자연의 싸움, 폭력조직과 촌동네 사람들의 전투는 그 극단적 대비만큼이나 우스운 것이지만 마침내 참았던 웃음을 터지게 하는 해학의 정점은 조직원들에게 뿌려진‘똥 폭탄’에 대한 서술이다. “똥 폭탄은 물리적 효과보다 심리적 효과가 훨씬 컸다”라면서, 전투력 상실과 스스로를 톨아 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고 하면서 짐짓 너스레를 떠는 것인데, “나는 누구인가, 여기서 뭘 하고 있나, (중략) 인간이란 뭔가”하면서 잃어버렸던 자아성찰이 돌아온다는 것이다. 똥물 세례가 이성을 찾게 하는 모티브가 되는 것이니 이 대목에서 나는 책을 읽다말고 큰 소리로 한껏 웃어젖혔다.

 

마침내 마을 철수를 내건 촌 동네 가장격인‘여산’과 폭력배 두목인‘정묵’의 일대일 대결이 펼쳐지지만 “강변의 흙길을 따라 열 지어”중장비와 덤프트럭 수백 대가 군대처럼 들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강이 생긴 이래 이토록 많은 내연 기관이 한꺼번에 진주한 적이 없었다.”고.  폭력배들이 퇴각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평화가 오는 듯하지만 문명의 광기는 이렇게 ‘거대한 기계괴물 집단’이 되어 낙원을 제거해 나가려고만 한다.

“어머이, 우리 그냥 예전처럼 살면 되겠소. 누구든지 쳐들어올까? 보였소? 우리는 싸운다, 이긴다. 그놈들 잘못, 가르쳐 준다. 자연 잘못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자연이 가르쳐준다.”라는 어눌한 여산의 외침이 제발 광기의 도시 문명에게 들렸으면 좋으련만 그 소망이 왠지 실낱같아 애처롭기만 하다. 내가 받은 책에는“강 같은 평화!”라는 작가가 손수 쓴 글귀가 있다. 이들이 있는 곳, 서로 지켜주고 믿음과 사랑이 있는 곳, 소리 없이 흐르는 강물과 야트막하지만 인간의 발길을 쉬이 허락하지 않는 강과 산이 있는 곳을 지켜야 할 당위의 선언 같다. 이 땅에 정말 강 같은 평화가 흐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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