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를 안다는 것 열린책들 세계문학 83
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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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전원주택 마을에 자신만의 식민지를 만들고 은둔한 한 남자의 이야기다. 그에게는 빠져있는 삶의 기쁨과 연민, 그리고 욕망을 되찾아가는. 또한 「창세기」의 <그리고 아담은 자기 여자를 알았다>는 구절처럼 그와 삶의 무대를 함께해온 아내와 딸과 노모와 장모, 그리고 스쳐간 여인들을 이해하려는, 그녀들과 자신의 삶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일어나고 있는지를 발견하려는 절박한 자기 관찰기이다.

 

이스라엘 비밀 정보요원‘요엘’은 아내‘이브리아’의 알 수 없는 죽음과 함께 은퇴한다. 우연한 감전사인지, 혹은 연인과의 동반 자살인지 불분명한 이 죽음은 아내를 더욱 이해할 수 없게 하지만, 간질 발작의 질환을 지닌 딸, ‘네타’를 보호하려는 책임감과 단짝이 된 어머니와 장모를 위해 텔아비브 근교의 ‘라마트 로탄’이란 전원마을에 은거한다.

 

요엘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서두를 필요 없고, “내일도 또 날이야.”라는 방기 속에서 기억 속 삶의 흔적들을 추적하며 자기의 여자들을 이해 할 수 있게 되리라는 현재와 과거의 경계가 사라진 시간을 살아간다. 자기 욕망이 배제된 이웃집 여자와의 잠자리, 정원 가꾸기에 공을 들이고, 열여섯 살 딸아이의 삶이 다치지 않도록 보호하며, 창고에 드나드는 고양이에게 음식을 건네는 단조로운 일상에 과거 기억의 조각들 - 첩보활동을 벌였던 세계의 도시들과 마주한 사람들, 순간의 상황의 기록들, 그리고 그를 향해 뱉어진 문장들... - 이 더해지며 모호하고 알 수 없었던 비밀의 실체를 이해하려 시도한다.

 

그러나 우리네 삶이란 것이 본디 재단하듯 그리 명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것이 아니리라. 선명하게 다가가 이해하려는 비밀들이 명료한 정의로 나아가기에는 흐릿하기만 하다. 아내의 죽음도, 딸의 질병의 원인도, 방콕에서 순간 사라진 여인의 모습도, 휠체어에 앉았던 남자의 움직임도, 이웃집 여자와의 관계도, 모든 것이 분명치 않다. 이런 남자에게 그가 맡았던 사건의 해결을 위하여 비밀정보원으로서의 임무가 종용되지만 딸의 보호를 위하여 거절한 것이 그를 대신한 동료요원의 죽음이 되어 돌아온다.

 

여기에 이르러서 이 소설의 뚜렷한 내적 갈등을 포착하게 되는데, 국가를 위한 임무 수행으로 자기 인생의 유일한 연인이었던 아내를 이해하지도, 보호하지도 못했다는 죄책감의 깊이, 그 고통의 무게를 헤아리게 된다. 반면에 국가의 부름을 받지만 자기 여자인 딸의 보호와 더는 바꿀 수 없다는 사적안위로 인해 동료가 희생되었다는 대칭적 상황으로 인한 또 다른 죄책감이란 구렁텅이에 빠지고 만다. 이 소설에 감정적으로 동조하게 되는 것은 이 딜레마를 어떻게 탈출하는 가라 할 수 있다. 소위 ‘마이클 샌델’과 같은 다분히 도덕철학적인, 개인이냐 국가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해당 국면에 정당하게 맞서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죽은 동료의 늙은 아버지를 찾아 비록 혹독한 비난을 받을지언정 스스로는 지울 수 없는 죄의식을 털어내는 것이고, 궁극에는‘살아있음’, 그 살아있음의 불패를 인정하는 것이다. 삶의 이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작가에 대한 경외로 머리가 숙여지는 대목이다.

 

이 전환적 사건으로부터 느린 행보를 거듭하던 소설은 조금 속도감을 찾는다. 딸아이의 보호가 오히려 그녀의 삶을 방해하는 것이라는 각성, 이웃집 여자와의 관계에서 자기 욕망을 발견해 나가고, 자신 속에서 동정과 슬픔, 연민의 힘을 조화롭게 뽑아내는 법을 깨달아간다. 그리고 그토록 풀어보려 했던 비밀들, 즉 모든 사람들은 아무도 풀 수 없는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마침내 그는 “ 몇 분 후에 절망적인 친지들은 재앙에 대항하여 슬기롭고 영리하게 자신들을 대신하여 싸워주고 또 쉽게 패배할 것 같지 않은 동맹군이 여기 있다는 신비한 감정으로 벅차올랐다.” 고 조용히 독백을 외친다. 어둠이 순간적으로 밝아지는 흔치 않고 예상치 않은 순간을 맞이하는 요엘이란 중년 남자의 환한 얼굴이 떠오르고, 내게도 “은밀하게 가물거리는 빛이 다가오기를 희망”해 본다.

 

삶의 기쁨을 알지 못하고 지낸 것이 꽤 오랜 시간인 듯하다. 그러니 욕망도, 연민도 알지 못하는 것이 당연 할 터. 병원 봉사활동에서 투명한 기쁨을 온 몸으로 발산하는 요엘을 통해서 삶의 비밀을 모두 알아 버린 것만 같은 넉넉해진 마음을 갖게 된다. 기억과 현실의 일상이 뒤얽긴 독특한 서술구조로 인해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이야기가 실루엣 뒤의 무언가를 기대케 하여 읽기를 주저치 못하게 하는 기교는 가히 약이 오를 정도로 대단하다. 그러나 결코 뚜렷한 형상은 그려 내지 않는다. 'W.G. 제발트'의 『이민자들』의 문체를 생각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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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터스 블랙 로맨스 클럽
리사 프라이스 지음, 박효정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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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이 우리의 도덕적 감수성을 당황하게 하는가? 나는 그러해야 한다고 이해한다. 자기 삶의 역사의 고유한 저자로서 주체성을 상실하게 되는 인간의 도덕의식의 변질과 파괴에 대한 성찰을 그리고 있는 이 소설에서 인류의 자기 이해를 건드리는 본원적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한낱 먼 미래의 공상적 이야기의 재미 밖에 느끼지 못한다면 이는 이미 인간 종으로서의 자기이해를 상실한, 즉 윤리적 감각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1. 이야기 속으로

 

노인과 십대의 어린 소년, 소녀만이 생물학전에서 살아남은 세계가 배경이다. 한 쪽은 사회적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고 한 쪽은 누군가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사회적 약자이다. 그러나 여기엔 오로지 약육강식의 논리만이 작동하고, 물질적 부(富)가 역시 지금과 같이 최고의 선(善)이라고 하는 세계이다. 거리의 부랑자로서 숨어 살 수밖에 없는 열여섯 살 소녀‘캘리’는 병약한 어린 남동생‘타일러’를 위하여 결단을 내린다. ‘엔더’라 불리는 노인들에게‘스타터스’인 어린 자신의 몸을 대여하면 동생과 안락한 삶을 꾸릴 수 있는 돈을 마련할 수 있다는‘바디 뱅크’를 찾아간다.

 

부를 거머쥔 소수의 특권계층 노인들이 젊고 생기 넘치는 아이의 몸을 렌탈하는 것이다. 렌탈된 기간동안 아이는 의식을 상실한 채 기간 종료로서만 자신의 몸을 되찾을 수 있다. 인간의 신체가 사물화되어 거래대상이 된 것이다. 이러한 일은 지금도 이미 일어나고 있다. 소수의 부자들은 자신들의 수정란을‘대리모’에 이식하여 대신 임신토록 하고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다. 대리모는 자신의 신체를 1년 이상 이들에게 렌탈하는 것인데, 이 역겨운 일을 의학적 정당성이란 논리로 항변하는 것을 보면 인간 탐욕의 동력에 혐오스러움으로 치가 떨린다.

 

이 렌탈 행위가 불법인 것은 소설의 세상에서도 당연한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돈이 이미 최고선(最高善)의 지위를 가진 세상에서 법과 제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프라임 데스티네이션(Prime Destination)'이란 특권층을 위한 바디뱅크에서 공공연히 십대의 신체 렌탈 행위는 자행되고, 급기야 유력 상원의원과 결탁하여 영구 렌탈은 물론 합법화시키는 데까지 이른다. 부와 권력의 결탁, 부도덕과 비윤리적 행위에는 항상 추악한 이것들의 결탁이 있다.

 

여기에 더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하나 더 있다. 물론 젊음이라는 추상성의 연장이랄 수 있겠지만 외형, 표피에 대한 숭배에 매몰된 몰가치화된 미의 추구이다. 성형대국인 한국사회처럼 깍고 째고 주입하여 조형된 얼굴에 대한 획일화된 기준에 몰두하는 정신 실종의 사회상이다. 렌탈되는 소녀는 티 하나 없는 완벽한 피부와 성형을 통해 투명할 정도의 미녀가 되어 대여되는 것이다. 이러한 바디뱅크의 성형기술에 현혹된 일부 부유층 아이들이 프라임 데스티네이션에 찾아갔다가 영영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결국 이렇게 실종된 손녀를 찾기 위해 캘리를 렌탈한 엔더인 헬레나의 추적 작업이 소설의 주요 스토리이다.

 

이 파렴치한 신체 강탈 행위의 원흉을 찾아 불의를 처단하는 것이고, 누군가에게 렌탈당하여 자신의 신체를 잃어버린 손녀를 찾는 것이다. 프라임데스티네이션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머리에 이식된 칩을 개조하는 과정에서 헬레나는 캘리의 몸을 지배할 수 없게 되고, 캘리는 헬레나를 대신하여 불법적 집단의 괴수인‘올드맨’과 부도덕행위에 협력하는 상원의원을 찾아 진실을 규명하려 한다. 쫓고 쫓기는 긴박감과 사이사이 캘리와 상원의원의 손자인 블레이크와의 풋풋한 사랑의 설렘이 달콤하게 지면을 채워 나간다.

 

2. 제동장치 없는‘욕망 이라는 이름의 전차’

 

오늘 우리들의 세상은 물질적 소비의 광란과 표피적 향락에 정신이 실종되고, 소수의 특권층은 브레이크 없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인간들을 태워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게 하여 이러한 광기가 영원히 계속 될 수 있으리라는 환상을 불어 넣는다. 계속 되려면 끝없이 레일을 깔아야 하는데 과연 가능하기나 할까? 조만간 대형 참사가 일어 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생물공학 기술은 배아 줄기세포를 도구적으로 이해해도 좋다는 공리주의적 인증과 더불어 의학적 정당화와 경제적 정당화의 논리에 기초하여 인간의 도덕적 감수성을 혼란에 몰아넣고 있다. 생명의 객체화, 대상화, 생산물화로 인한 인간 고유의 정체성을 변질시키고, 인간 종의 윤리적 자기 이해를 붕괴시키고 있다. 여기에는 인간의 불평등성을 당위시하는 도덕의식의 변질과 파괴가 있다는 말이다. 근육과 같은 신체 강화, 보톡스와 같은 약물 주입으로 피부의 조절, 집중력 강화제 등 생체공학, 유전공학 기술이 만들어내는 도덕적 문제를 우린 회피하고 있다. 인간의 행위 주체성을 침식해서 바로 인간성을 훼손하고 있는 것임에도 지양(止揚)되어야 할 이기적 경쟁의 논리가 만들어내는 불평등이라는‘프로메테우스적 욕구’인 인간의 본성이 아무런 반성도 절제도 없이 극한으로 치닫고만 있다.

 

결국 태아줄기 세포를 얻기 위해 난자가 적출되어 거래되고, 태아가 되려는 수정란을 실험 도구로 사용하다가 폐기하면서 생명에 대한 아무런 도덕적 회의조차 하지 않는다. 불치병 환자의 세포를 동의 없이 반복하여 의료용 재료로 활용하는 등 인간의 신체가 한낱 물질적 도구에 불과하며, 대리모란 신체 렌탈을 마치 자애(慈愛)적 의학수단이라고 정당화하는 정도에 이르러 있다. 그러니 늙어 부패해진 몸뚱어리를 가진 부유한 특권층이 젊은 십대의 신체를 렌탈하여 렌탈된 십대의 소년소녀가 그들의 삶을 잃어버리는 것에 어떤 연민과 도덕적 가책을 느끼겠는가.

 

‘위르겐 하버마스’는 그의 저서 『인간이라는 자연의 미래』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인간의 생명을 일단 한 번 도구화하기 시작한 사람, 살 가치가 있는 것과 살 가치가 없는 것을 구분하기 시작한 사람은 정지 없는 궤도를 달리게 된다.”

 

생명 윤리에 대한 논의는 아무리 반복한다해도 거듭해야 하는 긴 호흡이 필요한 규범적 해명과정이 필요한 중대하고 또 중대한 문제이다. 인간 상호간의 대칭적인 책임 묻기의 관계를 제한하는 오늘과 같은 공리와 경제중심의 논리는 절대적으로 제거되어야 할 논리일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정복과 통제의 가치로 유전학 기술을 사용하려는 계층의 야욕은 인류 전체에 적대적 칼을 들이대는 문제이다. 이 비정한 신체 강탈의 가상 세계를 그려낸 SF 소설을 그저 그 소재의 참신성과 스토리의 달달한 맛에만 머물 수 없는 이유는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생명윤리에 대한 도덕적 성찰을 이끄는 훌륭한 작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참고> '바디뱅크'가 미래의 공상이라구? - 사이언스타임즈 2012.4.26자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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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빈병 - 글쓰기 실력이 눈에 띄게 달라지는 100가지 노하우
배상문 지음 / 북포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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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이 왠지 낯익다. 「창작과 비평」이란 문예 비평지를 떠 올렸다는 것은 저자도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지만 ‘제목’이 독자에게 주는 호감의 중요성이란 측면에서 한 수 알려 주려는 이중의 의미였던 듯하다. 이 책을 읽고자 한 이유인 창작, 특히 글쓰기에 대해 한 수 배우고자 한 동기는 이것만으로도 성취한 것이리라.

 

그런데 이처럼 제목 하나 선정하는 데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는 언젠가는 작가가 되어보겠다는 의지의 다름이 아닐 것이다. 독자들에게 읽히는 글을, 그리고 공감과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는 소망에서 일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 책은 거의 완전히 기대에 보답한다. 작가 지망생들이 의례히 겪고 있는, 또한 겪게 될 장애에 대한 정곡을 찔러대고 그것에 대한 일종의 체험적 해법을 들려준다.

 

막상 어떤 아이디어나 주제를 가지고 글을 쓰려다보면 어느 순간 진부하기 그지없는 글을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혹은 더 이상 몇 줄 쓰지 못하고 막혀 버리기가 일쑤이다. 저자도 말하고 있지만 수 천 권에 이르는 독서의 경험이 절로 묻어나겠거니 하는 자신감을 믿고 이젠 나도 써 낼 수 있겠다는 마음에서인데, 읽는 것과 쓰는 것은 결코 연결되지 않는다. 그렇다보니 어떤 완결된 글을 쓰는데 이르지 못하고 머릿속에 구상만 해대곤 한다. 완벽하게 구상만 해 내면 글을 잘 쓸 수 있을 거야라고 위안하면서 말이다. 문제가 뭘까? 아니, 작가 지망생이라면 이미 등단한 동료들이나 주변의 글쟁이들로부터 받은 무수한 조언들 때문에 알고 있음에도 실천하지 않는 것이 있을 터이다.

 

바로 많이 써 보야 한다는 것이다. 오랜 습작의 누적으로 훈련되어야 한다는 말인데, 한 편의 습작도 완결해 보지 못하고서 고작 세상 많이 살았다는 연륜, 책 많이 읽었다는 잡다한 지식의 양이 절로 글이 되겠거니 하는 안일함에 의존했으니 글을 완성시킬 능력이 있을 턱이 없었을 것이다. “많이 써 본 놈이 결국 작가가 된다.”는 이 말의 무게를 창작 메커니즘의 본질은 “글은‘몸’으로 쓰는 것”이라는 부연 설명과 함께 새삼 귀중한 가치로 느껴지게 된다.

 

“다독은 작가 지망생의 세련된 인테리어 감각은 길러주지만 건축술까지 가르쳐 주지 않는다. (중략)안목이 높은 것과 손목이 야문 것은 다르다.”

 

그럼 어떻게 쓰기 시작해야 할까? 사실 막상 쓰고 싶다는 소망과는 달리 소설 한 줄을 시작하려하면 막연함에 부딪혀 자괴감에 시달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아이디어도 변변찮고 스토리 구상도 만만치 않다고 고민하지 말 것을 조언하고 있다. 우선 인물 몇 명을 만들고 그들의 이력에 대해 써보라는 것이다. 외양, 성격, 신상정보, 버릇 등등을. 처음부터 굉장한 작품을 쓰겠다는 강박관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그리고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필사해보고, 소설들의 인물 묘사만을 정리도 해보고 하면서 자신만의 글을 무던히 쓰는 것이다. 이외에도 작가의 눈, 작가의 본능이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글의 내용과 포장, 형식미에서부터 모방과 절제의 태도에 이르는 조언들은 어느 하나 놓칠 수 없는 글쟁이로서의 중대한 토대가 되어준다.

 

특히 작가라면 빈번하게 마주하게 되는‘상투성’과의 싸움을 이겨나가는 방법, 그리고 언어 예술가로서 단어의 사용과 문장, 문체에 대한 글 다루기에 대한 지식의 전수는 글을 쓴다는 실전(實戰)면에서 작가의 자의식과 관련하여 주요한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비판적으로 이해되어야 할 대목도 있다. 언어순결주의와 나쁜 언어를 설명하면서 한글 사용과 개념어의 사용에 대한 다소 편협한 관점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는 여전히 지망생에 불과한 이들로서는 참조로 이해하면 족할 것이다. “듣기 좋은 글은 읽기도 좋다”는 퇴고의 방법론에 공감하면서 이 책은 그동안 경험과 읽기를 통해 입력된 데이터들이 언제가 있을 수 도 있는 출력의 즐거움을 기대하는 작가 지망생들에게 아주 긴요하고 날카로운 조언이 되어 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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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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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화자의 미덥지 못한 기억의 편린들을 좇는 내내, 내 인생의 한 페이지들도 더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한 여자와의 이별에 대한 회한의 기억, 절망을 외치던 친구를 위해 썼던 편지, 그리고 기록되지 않은 것이 태반인 단편적인 기억들을 더듬는 나를.

결코 그리 현명한 삶이었음을 인정하기 어려운 역사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나 역시 육십의 노년 남자인 ‘토니 웹스터’처럼 삶의 본질과 그 삶에 딸린 조건 모두를 시험할 철학적 의무를 수행한 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저 인생의 뚜렷한 방향도 없이 피동적으로 떠밀려왔다는 자괴감이 엄습한다. ‘토니 웹스터’의 “인생을 흘려보내는 무가치한 수동성”의 역사를 확인하는 우울함, 거북함이라 할까?...

 

한 개인의 사적 인생을 역사에 대유(代喩)하여 인생의 목적, 인생에 대한 어떤 믿음들, 즉 인생의 가치에 대한 사유의 기록이랄 수 있는 이 소설은 이렇듯 비록 사소하지만 역사적 사건으로서 내 삶의 기록들을 들춰보게 한다. “시간 속에 살고, 그것은 우리를 제한하고 규정하며 그것을 통해” 역사를 측량하고, 설혹 소소하고 사적이고 기록되지 않는 단편들의 기억임에도 불구하고 행위를 근거로 정신 상태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역사라는 이해를 통해서 말이다. 또한 화자의 인생전반을 지배했던, 소년과 청년기의 정신적 우상이었던 친구‘에이드리언’의 준열한 기질을 입증하듯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 바로 역사라는 주장의 관점에서.

 

그렇다. 소설은 우리들의 부정확한 기억과 불충분한 문서가 충돌해서 빚어내는 삶의 역사를 규명하는 작업이다. 한 때 연인이었던‘베로니카’와의 열등감에 휩싸인 만남과 그녀의 가족에 대한 결코 우호적이지 못했던 기억들, 그리고 이별과 친구 에이드리언으로부터 날아든 베로니카와의 만남을 알리는 편지, 답장, 이후 에이드리언의 자살 소식에 반응했던 기억의 편린들이 친구의 일기 한 쪽과 그에게 보낸 편지의 실체가 부딪혀 역사로서의 한 인간의 인생의 진실을 드러낸다.

 

자기 삶의 주도자였던 적이 있었던가? 라는 문장이 불현듯 마음속에 떠오른다. 연애에서도, 결혼생활에서도, 그 밖의 무수한 인간관계와 사회생활이 내 삶의 지향점이라는 본질과 연결되는 것이었던가 하는 의문이다. 원칙이 이끄는 것에 행동하지 않았었다는 느낌에 지배된다. 수동성의 삶, 그것이었을 것이다. 회한이 밀려든다.

 

토니는 베로니카의 엄마가 죽으면서 남긴 의외의 유증, 오백 파운드의 돈과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을 그에게 남겼음을 전달 받는다. 그러나 일기장은 베로니카가 지니고 전달되지 않는다. 이메일을 통한 집요한 요구 끝에 인수된 일기장중 한 쪽에 불과한 정수와 등식으로 이루어진 논리식을 포함한 사본은 에이드리언이 자살을 하게 된 이성적 논거처럼 보인다. 하물며‘피 묻은 돈’이라는 짤막한 베로니카의 회신은 물론, 토니는 이 문서의 의미를 해독하지 못한 채 오히려 베로니카에 대한 향수와 만남의 기대를 키워나간다. 그리고 짧은 만남에서 베로니카는 한 통의 편지를 건네준다. 베로니카와의 사귐을 통지했던 에이드리언의 편지에 대한 토니의 답신인데, 그것은 그의 기억과는 달리 저주와 적의의 문장으로 가득하다. 현재의 정신 상태를 근거로 과거의 행위를 판단하는 우리들 기억의 기만성은 토니의 주장처럼 자기보존 본능의 한 발로일 것이다.

 

이것은 에이드리언의 자살이 토니 자신의 편지가 담고 있는 저주, 그 예감의 실현이었음을 의미한다. 행위를 근거로 정신 상태를 판단할 수 있음을 입증하듯 에이드리언의 인생이란 거대한 기만에 대한 저항적, 자기 주도적 행동성의 귀결이랄 수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토니의 삶이란 우연성과 수동성에 깃댄 평범함, 삶의 본연적 예감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것, 그저 생존하고자 하는 모종의 본능에 의지하는 것이다. 조잡하게 윤색된 자기 보존적 기억의 허위에 에워싸인 채.

 

내 삶이라고 토니의 그것과 그리 다를 것이 있을까? 그저 꾸역꾸역 “환희와 절망이라는 말은 소설에서나 구경한 게 전부인 인간으로 살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자문을 하게 된다. 이 지리멸렬함. “자살이 단 하나의 진실한 철학적 문제”라고 했던‘카뮈’의 말이 새삼 선명한 의미가 되어 다가온다. 인간의 조건에 거부할 권리로서의 자기 죽음에 대한 당당한 진실을 말이다. 아마 나는 삶의 귀결이란, 주어짐에 대한 맹목의 수용이 아니라 철저한 자기 책임과 주도라는 것을 이해조차 못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어쩐지 토니처럼 내 묘비명도 “아무개, 전혀 감을 잡지 못하다. ”가 되어야 했으리라는 생각조차 깃든다. “기억의 묵은 폐쇄회로”가 노년의 토니처럼 터지지 않는 아직은 급급한 일상에 치여 고작 최근의 기억들에서 맴돌지만 이 자기 반성적 인생 성찰의 역사적 기록은 이렇게 삶의 본연에 대해 정말의 생각을 하게 한다. 사유를 인생에 적용할 수 있다는 믿음을, 원칙이 행동을 이끌어야 한다는 것을, 인생의 수동성에 적극 개입하는 행동성을, 그리고 기억과 인생이란 운명의 기만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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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연속 세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0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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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도시라는 환상적 공간에서 한바탕 자아의 심연을 헤집어 삶과 죽음이 일체화된 존재자로서의 각성을 던지고 무심히 발길을 돌리던 음반 프로듀서‘다몬’의 세상 보기 후속 작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람이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이 세상이 과연 실재하긴 하는 건가? 하는 몽환적 인식이 지배하는 모호한 존재론에 대한 5편의 이야기들이 옴니버스 형식으로 엮인 소설집이다.

 

<나무 지킴이 사내>라는 첫 번째 작품은 타 작품과 달리 사회성을 많이 띠고 있다. 2008년도 발표 작 이다보니 당시 일본의 경제침체에 대한 집단적 불안 심리를 반영 한듯하다. 민속고유의 불안 징조인 유령적 존재인 ‘나무 지킴이 사내’가 환영처럼 등장함으로써 유행과 아이돌, 부동산과 주식에 흥청대던 물신적 존재들의 야단법석을 죽은 이의 시간에 빗대어 세상을 연상케 한다. 사실 메시지의 선명성에는 이 작품이 독보적이지만 정작 내 시선을 주목시킨 단편은 <악마를 동정하는 노래>와 <사구 피크닉> 두 작품이다. ‘온다 리쿠’만의 암흑 색채가 주는 기묘한 매혹, 죽음의 선율이 유혹하고, 절묘한 정신분석적 해독이 돋보이는 지적 반짝임이 돋보이기 때문이다.

 

지역 음악방송에서 흘러나온 여인의 노래를 들은 사람들이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는 소문을 모티브로 하는 <악마를 동정하는 노래>는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소설, <산소리>를 슬쩍 끼워 넣어 작품의 어두운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킨다. ‘죽음’에 매료된 이들이 잠든 산의 소리와 의문의 노래가 어우러져 빚어내는 인간의 악마성이 내밀하게 잠자던 시원적 본능을 관통한다.

 

“잠이 안와 오늘밤도 잠이 안와

그 소리가 들리니까

밤의 밑바닥 졸졸 소리 나뭇가지 스치는 바람

그리고 그 소리가 들려와”

 

세 번째로 수록된 <환영 시네마> 역시 ‘애드거 앨런포’의 <까마귀>에 등장하는 ‘네버 모어’라는 사랑하는 여자를 잃은 남자의 시(詩)를 모티브로 하여 여인을 상실한 남자의 정신적 상흔을 아이돌 로커를 주인공으로 하여 인간 기억회로의 불안정함에 연민을 가득 실어낸다.

 

한편 환영적 체험 사건인 사구(砂丘;모래 언덕)의 사라짐을 서술한 프랑스 물리학자의 과학논픽션이 시발이 되어 동행한 다몬과 번역자 여성의 상상력과 지력 충만한 이야기인 <사구 피크닉>은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잠자는 미녀>를 떠올리게 하는 관능적 환상까지로 연결되는 기발한 작품이다. 사실이 생략되고 감추어진 건조한 과학에세이에서 인간의 잠자는, 은폐된 욕망의 실체를 규명하는 장면은 그야말로‘온다리쿠 답다 ’라는 칭찬의 말이 튀어나오게 한다.

 

그리고 마지막 작품인 <새벽의 가스파르>는 주인공 다몬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죽음의 사실에 대한 통증을 트라우마의 이상적 징후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데, 갈수록 세대간, 집단간 가치관의 차이가 벌어지고, 파편화되어가는 개인들의 고통이란 지금의 세상에서 어떤 의미인지를 빗대어 보여 준다. 자신의 기억을 조작하면서도 그 사실성에 대한 현실감을 상실해가는 우리들의 초상이 유일하게 공감할 수 있는 공포감이란 감성으로 비로소 납득되어야 하는 현실에 대한 유감일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현실의 세상은 과연 존재하긴 하는 건가? 하는 이 기만적이기 조차한 물음은 실재와 환상, 시간에 대한 서로 다른 체감, 기억과 시각의 불편할 정도의 왜곡 등과 어울려 삶의 현실감을 아득하게 한다. 시간과 공간, 보고 느껴지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에 늘 열린 상태로 살아가는 주인공 다몬의 삶의 방식에 동화되고 끌려 다니다보면 어느덧 전혀 다른 낯선 시간에 놓여 어리둥절해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하는 소설이다. 현실의 세계가 고달프면 고달플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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