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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터스 ㅣ 블랙 로맨스 클럽
리사 프라이스 지음, 박효정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3월
평점 :
이 소설이 우리의 도덕적 감수성을 당황하게 하는가? 나는 그러해야 한다고 이해한다. 자기 삶의 역사의 고유한 저자로서 주체성을 상실하게 되는 인간의 도덕의식의 변질과 파괴에 대한 성찰을 그리고 있는 이 소설에서 인류의 자기 이해를 건드리는 본원적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한낱 먼 미래의 공상적 이야기의 재미 밖에 느끼지 못한다면 이는 이미 인간 종으로서의 자기이해를 상실한, 즉 윤리적 감각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1. 이야기 속으로
노인과 십대의 어린 소년, 소녀만이 생물학전에서 살아남은 세계가 배경이다. 한 쪽은 사회적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고 한 쪽은 누군가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사회적 약자이다. 그러나 여기엔 오로지 약육강식의 논리만이 작동하고, 물질적 부(富)가 역시 지금과 같이 최고의 선(善)이라고 하는 세계이다. 거리의 부랑자로서 숨어 살 수밖에 없는 열여섯 살 소녀‘캘리’는 병약한 어린 남동생‘타일러’를 위하여 결단을 내린다. ‘엔더’라 불리는 노인들에게‘스타터스’인 어린 자신의 몸을 대여하면 동생과 안락한 삶을 꾸릴 수 있는 돈을 마련할 수 있다는‘바디 뱅크’를 찾아간다.
부를 거머쥔 소수의 특권계층 노인들이 젊고 생기 넘치는 아이의 몸을 렌탈하는 것이다. 렌탈된 기간동안 아이는 의식을 상실한 채 기간 종료로서만 자신의 몸을 되찾을 수 있다. 인간의 신체가 사물화되어 거래대상이 된 것이다. 이러한 일은 지금도 이미 일어나고 있다. 소수의 부자들은 자신들의 수정란을‘대리모’에 이식하여 대신 임신토록 하고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다. 대리모는 자신의 신체를 1년 이상 이들에게 렌탈하는 것인데, 이 역겨운 일을 의학적 정당성이란 논리로 항변하는 것을 보면 인간 탐욕의 동력에 혐오스러움으로 치가 떨린다.
이 렌탈 행위가 불법인 것은 소설의 세상에서도 당연한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돈이 이미 최고선(最高善)의 지위를 가진 세상에서 법과 제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프라임 데스티네이션(Prime Destination)'이란 특권층을 위한 바디뱅크에서 공공연히 십대의 신체 렌탈 행위는 자행되고, 급기야 유력 상원의원과 결탁하여 영구 렌탈은 물론 합법화시키는 데까지 이른다. 부와 권력의 결탁, 부도덕과 비윤리적 행위에는 항상 추악한 이것들의 결탁이 있다.
여기에 더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하나 더 있다. 물론 젊음이라는 추상성의 연장이랄 수 있겠지만 외형, 표피에 대한 숭배에 매몰된 몰가치화된 미의 추구이다. 성형대국인 한국사회처럼 깍고 째고 주입하여 조형된 얼굴에 대한 획일화된 기준에 몰두하는 정신 실종의 사회상이다. 렌탈되는 소녀는 티 하나 없는 완벽한 피부와 성형을 통해 투명할 정도의 미녀가 되어 대여되는 것이다. 이러한 바디뱅크의 성형기술에 현혹된 일부 부유층 아이들이 프라임 데스티네이션에 찾아갔다가 영영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결국 이렇게 실종된 손녀를 찾기 위해 캘리를 렌탈한 엔더인 헬레나의 추적 작업이 소설의 주요 스토리이다.
이 파렴치한 신체 강탈 행위의 원흉을 찾아 불의를 처단하는 것이고, 누군가에게 렌탈당하여 자신의 신체를 잃어버린 손녀를 찾는 것이다. 프라임데스티네이션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머리에 이식된 칩을 개조하는 과정에서 헬레나는 캘리의 몸을 지배할 수 없게 되고, 캘리는 헬레나를 대신하여 불법적 집단의 괴수인‘올드맨’과 부도덕행위에 협력하는 상원의원을 찾아 진실을 규명하려 한다. 쫓고 쫓기는 긴박감과 사이사이 캘리와 상원의원의 손자인 블레이크와의 풋풋한 사랑의 설렘이 달콤하게 지면을 채워 나간다.
2. 제동장치 없는‘욕망 이라는 이름의 전차’
오늘 우리들의 세상은 물질적 소비의 광란과 표피적 향락에 정신이 실종되고, 소수의 특권층은 브레이크 없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인간들을 태워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게 하여 이러한 광기가 영원히 계속 될 수 있으리라는 환상을 불어 넣는다. 계속 되려면 끝없이 레일을 깔아야 하는데 과연 가능하기나 할까? 조만간 대형 참사가 일어 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생물공학 기술은 배아 줄기세포를 도구적으로 이해해도 좋다는 공리주의적 인증과 더불어 의학적 정당화와 경제적 정당화의 논리에 기초하여 인간의 도덕적 감수성을 혼란에 몰아넣고 있다. 생명의 객체화, 대상화, 생산물화로 인한 인간 고유의 정체성을 변질시키고, 인간 종의 윤리적 자기 이해를 붕괴시키고 있다. 여기에는 인간의 불평등성을 당위시하는 도덕의식의 변질과 파괴가 있다는 말이다. 근육과 같은 신체 강화, 보톡스와 같은 약물 주입으로 피부의 조절, 집중력 강화제 등 생체공학, 유전공학 기술이 만들어내는 도덕적 문제를 우린 회피하고 있다. 인간의 행위 주체성을 침식해서 바로 인간성을 훼손하고 있는 것임에도 지양(止揚)되어야 할 이기적 경쟁의 논리가 만들어내는 불평등이라는‘프로메테우스적 욕구’인 인간의 본성이 아무런 반성도 절제도 없이 극한으로 치닫고만 있다.
결국 태아줄기 세포를 얻기 위해 난자가 적출되어 거래되고, 태아가 되려는 수정란을 실험 도구로 사용하다가 폐기하면서 생명에 대한 아무런 도덕적 회의조차 하지 않는다. 불치병 환자의 세포를 동의 없이 반복하여 의료용 재료로 활용하는 등 인간의 신체가 한낱 물질적 도구에 불과하며, 대리모란 신체 렌탈을 마치 자애(慈愛)적 의학수단이라고 정당화하는 정도에 이르러 있다. 그러니 늙어 부패해진 몸뚱어리를 가진 부유한 특권층이 젊은 십대의 신체를 렌탈하여 렌탈된 십대의 소년소녀가 그들의 삶을 잃어버리는 것에 어떤 연민과 도덕적 가책을 느끼겠는가.
‘위르겐 하버마스’는 그의 저서 『인간이라는 자연의 미래』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인간의 생명을 일단 한 번 도구화하기 시작한 사람, 살 가치가 있는 것과 살 가치가 없는 것을 구분하기 시작한 사람은 정지 없는 궤도를 달리게 된다.”
생명 윤리에 대한 논의는 아무리 반복한다해도 거듭해야 하는 긴 호흡이 필요한 규범적 해명과정이 필요한 중대하고 또 중대한 문제이다. 인간 상호간의 대칭적인 책임 묻기의 관계를 제한하는 오늘과 같은 공리와 경제중심의 논리는 절대적으로 제거되어야 할 논리일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정복과 통제의 가치로 유전학 기술을 사용하려는 계층의 야욕은 인류 전체에 적대적 칼을 들이대는 문제이다. 이 비정한 신체 강탈의 가상 세계를 그려낸 SF 소설을 그저 그 소재의 참신성과 스토리의 달달한 맛에만 머물 수 없는 이유는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생명윤리에 대한 도덕적 성찰을 이끄는 훌륭한 작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참고> '바디뱅크'가 미래의 공상이라구? - 사이언스타임즈 2012.4.26자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