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를 안다는 것 열린책들 세계문학 83
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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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전원주택 마을에 자신만의 식민지를 만들고 은둔한 한 남자의 이야기다. 그에게는 빠져있는 삶의 기쁨과 연민, 그리고 욕망을 되찾아가는. 또한 「창세기」의 <그리고 아담은 자기 여자를 알았다>는 구절처럼 그와 삶의 무대를 함께해온 아내와 딸과 노모와 장모, 그리고 스쳐간 여인들을 이해하려는, 그녀들과 자신의 삶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일어나고 있는지를 발견하려는 절박한 자기 관찰기이다.

 

이스라엘 비밀 정보요원‘요엘’은 아내‘이브리아’의 알 수 없는 죽음과 함께 은퇴한다. 우연한 감전사인지, 혹은 연인과의 동반 자살인지 불분명한 이 죽음은 아내를 더욱 이해할 수 없게 하지만, 간질 발작의 질환을 지닌 딸, ‘네타’를 보호하려는 책임감과 단짝이 된 어머니와 장모를 위해 텔아비브 근교의 ‘라마트 로탄’이란 전원마을에 은거한다.

 

요엘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서두를 필요 없고, “내일도 또 날이야.”라는 방기 속에서 기억 속 삶의 흔적들을 추적하며 자기의 여자들을 이해 할 수 있게 되리라는 현재와 과거의 경계가 사라진 시간을 살아간다. 자기 욕망이 배제된 이웃집 여자와의 잠자리, 정원 가꾸기에 공을 들이고, 열여섯 살 딸아이의 삶이 다치지 않도록 보호하며, 창고에 드나드는 고양이에게 음식을 건네는 단조로운 일상에 과거 기억의 조각들 - 첩보활동을 벌였던 세계의 도시들과 마주한 사람들, 순간의 상황의 기록들, 그리고 그를 향해 뱉어진 문장들... - 이 더해지며 모호하고 알 수 없었던 비밀의 실체를 이해하려 시도한다.

 

그러나 우리네 삶이란 것이 본디 재단하듯 그리 명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것이 아니리라. 선명하게 다가가 이해하려는 비밀들이 명료한 정의로 나아가기에는 흐릿하기만 하다. 아내의 죽음도, 딸의 질병의 원인도, 방콕에서 순간 사라진 여인의 모습도, 휠체어에 앉았던 남자의 움직임도, 이웃집 여자와의 관계도, 모든 것이 분명치 않다. 이런 남자에게 그가 맡았던 사건의 해결을 위하여 비밀정보원으로서의 임무가 종용되지만 딸의 보호를 위하여 거절한 것이 그를 대신한 동료요원의 죽음이 되어 돌아온다.

 

여기에 이르러서 이 소설의 뚜렷한 내적 갈등을 포착하게 되는데, 국가를 위한 임무 수행으로 자기 인생의 유일한 연인이었던 아내를 이해하지도, 보호하지도 못했다는 죄책감의 깊이, 그 고통의 무게를 헤아리게 된다. 반면에 국가의 부름을 받지만 자기 여자인 딸의 보호와 더는 바꿀 수 없다는 사적안위로 인해 동료가 희생되었다는 대칭적 상황으로 인한 또 다른 죄책감이란 구렁텅이에 빠지고 만다. 이 소설에 감정적으로 동조하게 되는 것은 이 딜레마를 어떻게 탈출하는 가라 할 수 있다. 소위 ‘마이클 샌델’과 같은 다분히 도덕철학적인, 개인이냐 국가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해당 국면에 정당하게 맞서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죽은 동료의 늙은 아버지를 찾아 비록 혹독한 비난을 받을지언정 스스로는 지울 수 없는 죄의식을 털어내는 것이고, 궁극에는‘살아있음’, 그 살아있음의 불패를 인정하는 것이다. 삶의 이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작가에 대한 경외로 머리가 숙여지는 대목이다.

 

이 전환적 사건으로부터 느린 행보를 거듭하던 소설은 조금 속도감을 찾는다. 딸아이의 보호가 오히려 그녀의 삶을 방해하는 것이라는 각성, 이웃집 여자와의 관계에서 자기 욕망을 발견해 나가고, 자신 속에서 동정과 슬픔, 연민의 힘을 조화롭게 뽑아내는 법을 깨달아간다. 그리고 그토록 풀어보려 했던 비밀들, 즉 모든 사람들은 아무도 풀 수 없는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마침내 그는 “ 몇 분 후에 절망적인 친지들은 재앙에 대항하여 슬기롭고 영리하게 자신들을 대신하여 싸워주고 또 쉽게 패배할 것 같지 않은 동맹군이 여기 있다는 신비한 감정으로 벅차올랐다.” 고 조용히 독백을 외친다. 어둠이 순간적으로 밝아지는 흔치 않고 예상치 않은 순간을 맞이하는 요엘이란 중년 남자의 환한 얼굴이 떠오르고, 내게도 “은밀하게 가물거리는 빛이 다가오기를 희망”해 본다.

 

삶의 기쁨을 알지 못하고 지낸 것이 꽤 오랜 시간인 듯하다. 그러니 욕망도, 연민도 알지 못하는 것이 당연 할 터. 병원 봉사활동에서 투명한 기쁨을 온 몸으로 발산하는 요엘을 통해서 삶의 비밀을 모두 알아 버린 것만 같은 넉넉해진 마음을 갖게 된다. 기억과 현실의 일상이 뒤얽긴 독특한 서술구조로 인해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이야기가 실루엣 뒤의 무언가를 기대케 하여 읽기를 주저치 못하게 하는 기교는 가히 약이 오를 정도로 대단하다. 그러나 결코 뚜렷한 형상은 그려 내지 않는다. 'W.G. 제발트'의 『이민자들』의 문체를 생각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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