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이란 무엇인가 - 폭력에 대한 6가지 삐딱한 성찰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현우.김희진.정일권 옮김 / 난장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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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가시적이지 않은 것을 누군가에게 이해시킨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눈웃음 지으며 뱉어내는 정중한 말에 내재된 폭력성을 설명하려 하거나, 빌게이츠 같은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가 베푸는 자선의 이면에 축적된 폭력성을 이야기 하는 것처럼 말이다. 직접적이고 표면화된 것에만 익숙해진 물질의 시대에 상징적이고 구조적이어서 비가시적인 것을 이해할 지적 사유능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1. 비가시적 폭력에 대해서

 

그래서 무언가 부당하고, 비정상적이며, 우리의 삶을 잔혹하게 배제시키며, 자유를 구속하고 불평등을 고착화시키는 폭력성을 지적할 때 고작 동족학살, 인종주의, 성차별, 경제적 양극화와 같은 겉보기에 비합리적인 주관적 폭력을 말하는 데 그치고 만다. 이를테면 사회적 약자를 향한 억압적 공권력의 양태라든가, 부패의 썩은 내가 진동하는 관료의 도덕적 무감각이란 사악성, 착취적 노동위에 군림하는 재벌의 도착적 이기심 같은 것을 지적함으로써 사회적 폭력의 병리적 현상을 말하는 것이 고작이다. 결국, 이러한 것들을 제아무리 비판하고 변화를 요구한다고 해서 근본은 바뀌지 않는다. 굳이 이론적으로 입증하지 않아도 인간의 역사, 아니 한국사회만 바라보더라도 이것은 결코 변화된 적도 없으며, 변화할 가능성이 전혀 없음을 헤아릴 수 있다.

 

이러한 지점에서 폭력의 본질을 이해하고, 정작 우리들이 관심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비판하여야 할 정말의 ‘폭력’을 해독하는 ‘지젝’의 폭력에 대한 사유는 사회의 변화를 야기할 수 있는 그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폭력, 가시적이고 주관적인 폭력의 원인을 제공하는 원천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그는 폭력을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는데, 통상 겉으로 드러난 폭력을 ‘주관적 폭력’이라 하고, 드러나지 않은 비가시적 폭력을 ‘상징적 폭력’과 ‘ 구조적 폭력’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그것이다. 상징적 폭력이란 언어 자체에 들어있는 것으로 언어가 의미세계를 대상에 부과하는 형식이며, 구조적 폭력이란 경제, 정치체가 정상적으로 작용함으로써 나타나는 파국적 결과이다. 즉 정상적인 상태에 내재하는 폭력이어서 정상을 혼란시킴으로서 두드러지게 가시화되는 주관적 폭력과 달리 보이지 않는 폭력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거의 대다수가 직접적이고 물리적이며 이데올로기적인 폭력, 즉 주관적 폭력만이 있는 것처럼 떠들어대고 마치 그것이 사회악을 야기하는 전부인 듯 다른 형태의 폭력을 시야에서 지우고 있다는 점이다. 진정 주의를 기울여야 할 객관적 폭력(상징적 폭력, 구조적 폭력)을 보지 못하도록 필사적으로 방해하려는 듯이. 객관적 폭력은 주관적 폭력의 실질적 동인(動因)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제아무리 주관적 폭력을 비판해 보아야 근본적 폭력성을 근절할 수 없는 것이다. 공선옥의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라는 소설은 바로 이것, 시민을 무심히 학살하는 구테타 군의 만행, 이 주관적 폭력이 한국사회의 밑바닥까지 잠식해 있는 - 이미지, 언행, 삶의 습관 등 - 구조화된 폭력성을 원인으로 하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결국 주관적 폭력이란 객관적 폭력을 토대로 한 결과물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은 사람들을 삶의 평안에서 고통으로 내모는 것은 평범해 보이는 이웃들의 언행, 구조적인 것임을 시종 그려내고 있다.

 

지젝은 이러한 객관적 폭력의 본질, 그 민낯을 보여주기 위해 그야말로 찬란한 설명을 구가(謳歌)하듯 열거하는데, 민주주의, 자본주의를 필두로 해서 자유주의, 근본주의를 구조적 폭력의 토대로 하여, 언어라는 상징화 과정 자체의 폭력성, 궁극의 공포정치인 생명정치, 보편성의 윤리에 터 잡은 종교의 잔혹성, 사회적 최고의 악인 집단이라 할 수 있는 빗장 공동체, 나르시시즘적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니체적 말인(末人)의 형상을 한 쾌락주의적 금욕주의에 몰입하는 대중문화 등 비가시적 폭력의 양태 등은 무궁무진하다.

 

2. 자신과 맞서 싸워야 하는 구조적 폭력의 역설

 

이것들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공동체가 맞서 싸우는 외부적 위협이 바로 공동체 속에 내재된 본질”이라 할 것이다. 예로서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개인은 자기가 자기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보편적 자본의 확대 재생산에 일조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조금 시각을 달리하면 거대 자본가인 ‘조지 소로스’나 ‘빌 게이츠’가 인도주의를 위기로 부각하고 진정 사랑을 보내며 자신들의 선한 면을 드러내는데 내재된 폭력을 보는 것이다. 막대한 기부를 위해서는 막대한 이익을 거두어야 한다. 극단의 개인주의적 경제윤리라는 착취는 예외로 하더라도 “변비를 고치기 위해 변비를 유발하는 초콜릿 변비약”을 파는 태생적인 폭력성을 본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의 자선은 초자아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인도주의적 가면이며, 사회적 재생산의 순환을 유지하려는 자본주의 연명(延命)적 필요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보편성을 겉으로 명백히 내세우는 윤리의식일수록 근원적으로 더 잔혹하게 타자를 배제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전 인류를 포용한다는 기독교의 논리를 보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는 하나이니라, 모든 인간은 형제이니”, 이를 다른 말로하면 기독교의 형제애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인간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가장 보편적인 듯 하지만 가장 지독하게 타자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악랄한 상징적 폭력의 전형이라 할 것이다. 이것은 전반적으로 생태계를 파괴하고 오염시키는데 주도적으로 관여했던 지배계급이 자신이 저지른 결과에서 쏙 빠져나와 유기농 식품을 사먹으며 자연보호구역에서 휴가를 즐기는 빗장공동체의 내재적 폭력과 너무 닮아있다. 이렇게 타자를 배제하는 것, 자기이익, 자기연민을 위해서 타자를 고통에 빠뜨리고, 타자의 삶을 파괴함으로써, 아니 설혹 아무런 나쁜 일을 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자신들이 누리는 안락한 생활을 위해 지속적인 구조적 폭력이 누적되어야 했음에 대한 놀라울 정도의 무감각을 보게 된다.

 

3. 사회적 습관의 뒤흔듦에 대해서

 

내가 주목한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이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적 폭력의 이유 중 하나인 ‘습관’에 대한 통찰이다. 습관이란 “우리의 일상생활을 암묵적으로 떠받치는 지하영역”이라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습관이란 무엇일까? 일을 신속하고 원만히 처리하기 위해 급행료와 뇌물을 주고, 법률 등 규칙의 절차를 밟지 않거나 위반하면 학연, 지연 등 인맥을 찾는, 부정한 것을 잘하는 융통성이며, 인간관계의 칭송이며, 이것을 생존의 필수 조건이라 치켜세우는 것이다. 한국인을 사로잡고 있는 이 습관의 본바탕은 그야말로 위협적인 폭력성을 내재하고 있다.

 

수년전 한국사회를 들끓게 했던 해병대 병사의 총기사건은 습관, 즉 “동료군인을 아무도 모르게 구타해도 된다는” 집단 결속의 확인을 위한 행위는 암묵적 관습이 지닌 폭력성의 전형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위반행위이지만 모두가 묵인하는 무의식적으로 체화된 폭력이다. 사실 이러한 것들은 한국인의 삶 속에서 지극히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에 폭력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한번 떠올려보자. 가시적 주관적 폭력은 이러한 구조적, 상징적 폭력을 원인으로,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말이다. 자신의 권력야욕을 위해 동족을 학살하는 군인 독재자의 탄생이라는 폭력은 한국인, 한국사회에 뿌리를 깊게 내린 객관적 폭력위에서 가능했었다는 것을.

 

이것은 또 다른 측면에서 조명이 가능하다. 일례로 모두가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엄격한 규제를 만드는 것이다. 한국의 지배 권력은 이 전략을 아주 즐겨 사용한다. 그리곤 집행은 엄격하게 하지 않는다. 아주 자의적으로 행사되는데, 마치 자비를 베풀듯 집행 또는 유예하는 것이다. 단지, “ 뭐 우리에게 거슬리는 자들이 있을 때 우리 뜻대로 버릇을 잡아 줄 수단 정도는 있어야 된다”는 식으로 행사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비의 체제’는 전체주의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이 전체주의적 행태가 다소 흐릿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한국의 지배 권력은 이것을 놓지 못하고 있다. 결국 암묵적인 관습적 규칙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네트워크인 전체주의적 습관을 붕괴시켜야 하는 것인데, 소비에트의 붕괴는 이것을 실제로 증명한다.

 

어떤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에게 뇌물을 주고 누군가에게 연락하면 되던 것이, 어느 순간 그 누구라는 대상이 사라진 것이다. 기존의 구조적 폭력의 사슬이 끊어진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흥미로운 시사를 던져준다. 습관을 파괴하면 체제는 붕괴한다는 것이다.

공동체 속에 내재된 본질, 공동체를 위협하는 폭력의 본질로서의 습관을 파괴하는 것이다. 주관적 폭력과 싸운다고 하면서 구조적 폭력에 가담하는 자들의 위선이 아니라, 구조적 폭력 그것과 싸워야 비로서 삶의 자유와 평온, 정당함이라는 진리가 성취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눈에 보이는 것만을 기만적으로 흔드는 것이 아니라, ‘제도적 무의식’, 일상생활을 암묵적으로 받치고 있는 것을 뒤흔들어야만 한다는 이야기이다.

 

이외에도 자신이 처한 상황의 경험을 의미있는 전체 속에 위치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공간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행위로의 이행”이라는 폭력의 정당성, 때론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가장 폭력적인 무엇을 할 수 있음의 얘기들은 이 배타적이고 범주화하는 불온한 세상을 극복하기 위한 삶의 의식과 태도, 사유의 방식을 안내한다. 폭력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라는 ‘뮐레르’의 말처럼 지젝의 이 책은 폭력 그 자체를 이해하는 더없이 탁월한 저술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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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e - 시즌 8 가슴으로 읽는 우리 시대의 智識 지식e 8
EBS 지식채널ⓔ 지음 / 북하우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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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뜩 충혈된 의식의 탐욕스런 목소리로 소란스럽게 소음을 양산하는 세상에서 정말 차분히 이러한 외란들을 차단한 채 지금 내가 있는 세상의 진실은 어떤 모양새인지를 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지식 e』1권을 시작으로 이제 8권에 이른 이 시리즈의 이러한 시선은 주류적 삶의 소요에 매몰되어 망각되거나 혹은 저 심연에 묻혀 잠들어버린 고귀한 정신을 깨운다. 특히,‘세상을 바꾸는 작은 힘’이란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은 간결한 메시지들을 통해서 우리 보통사람들의 의지와 소망을 깨우고, “시대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더라도 아직은 포기해선 안 된다. 세상은 결코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라는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의 지적, 그 자체의 실천을 보여준다.

 

여전히 ‘언론 부분자유국’이며, 인권의 유린은 구태를 벗어나지 못한 채 상시적으로 자행되고, 사회적 부의 불균형은 세계 1위 그룹을 놓치지 않으며, 사회학자‘에밀 뒤르켕’이 정의내린 “모든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다.”라는 명제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탓으로만 돌리는 이 사회의 자살율은 OECD국가 1위의 명성을 고수하고 있다. 또한 노인 빈곤율 OECD 1위를 명예라도 되는듯이 사회안전망부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회복지이야기만 나오면 종북주의자니 빨갱이니를 떠드는 기득권력의 악랄성은 그칠 줄 모른다.

 

우리사회의 은폐되거나 슬그머니 사라지는 사실들, 혹은 보이지 않는 사람들과 그네들의 처지들, 정작 자신들이 마주해야 할 현실이자 미래임에도 무관심과 배척으로 드러나지 않는 실제들이 작은 대안들과 이 고통의 터널이란 세상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놓지 않고 지옥 아닌 길을 찾기위해 분투하고 묵묵히 실천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교통하면서 바로 개인인 ‘ 나 자신’이 세상을 바꾸는 작은 힘임을 직시하게 한다.

 

이 세상이 지옥이라고 지옥의 일부가 되는 사람들 속에서 지옥 아닌 길을 찾으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를 우리들은 알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하곤 한다. ‘세상을 바꿔요? 계란으로 바위치깁니다. 그냥 자신의 일에 열중하세요.’ , 더구나 ‘정치가 바뀌겠어요, 교육이 바뀌겠어요, 저들의 의식이 바뀌겠어요.’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불의와 모순, 왜곡과 부정과 불평등이 구조화된 세상을 외면한다면 절로 좋은 세상이 올까? 이렇게 지레 포기만 하려드는 사람들, 그리곤 불이익이나 불평등을 마주하면 불평하기 시작한다. 이기심이 도달 할 수 있는 자기 욕망의 가능성에 대한 환상 때문이다. 자기만은 저 높은 고지에 올라 권력과 부위에 군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책은 이제 더 이상 그의 목소리를 들려줄 수 없지만 희망의 세상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던 사회학자 에릭 홉스봄의 이야기로부터 대중의 진의를 감시하고 훈육하려드는 야비한 권력의 전체주의적 욕망을 해부하고, 자신의 정치적 욕망의 수단으로 전락한 사면제도의 남용과 인권과 언론에 대한 권력의 교활한 법제화등의 수단을 드러내는가 하면, 시민 대중과는 어떠한 교감도 없이 국민의 혈세인 국고보조금으로 독재자의 기념탑을 세우고, ‘새천년 생명의 숲’이 시민을 무참하게 학살했던 쿠데타 주역의 아호를 딴 일해공원으로 탈바꿈하는 아부와 파렴치한 권력의 전형적 타락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처럼 일상적 관심에서 떠나있지만 희망의 세상을 위해서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과제들의 적시만을 상기하는 것은 아니다. 세계적인 축구 명문 클럽인 ‘바르셀로나’를 통해 무한 경쟁체제인 자본주의 체제의 대안으로 부상하는 협동조합을 설명하기도 하고, 23년간의 총리직을 사임했을 때 자신을 위한 아무런 소유물도 없었다는 국가 지도자의 이상적 모델의 실존을 발견하기도 한다. “국가, 국민을 위한 좋은 집, 이 집에서 누구도 특권의식을 누리지 않으며,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다.”는 ‘타게 에를란데르’스웨덴 총리의 실천은 너무도 부러워서 괜스레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한다. 우리도 이러한 지도자를 탄생시킬 만큼 시민 의식이 성숙해야 할 텐데 말이다.

 

그러나 이 책은 우리들의 아픈 곳을 찌르기도 한다. 옛 만주지역이었던 지금은 연변이라 불리는 곳은 20세기 전후 살기위해 쫓기듯 제 나라를 떠나 일구었던 황무지이다. 이들의 후손을 오늘 우리는 ‘조선족’이란 부른다. 다분히 인종적 폄하가 담긴 언어. 너와 나의 다름을 구분짓는 언어로. 그러가하면 ‘데니스 P. 렛’이라는 미국의 인류학자 눈에 비친 한국사회는 그저 부끄럽기만 하다. “한국의 아파트 경비원은 낮은 임금에 고용된 하인에 가깝다.” 이 한마디에 오늘 우리 한국인의 의식 모두가 담겨있다면 과언이 될까?

 

이렇게 왜곡된 우리들의 의식, 우리들이 잊고 지내거나 은폐한 과오들을 우린 바꿀 수 있다. 정작 배제시켜야 했던 민족배반자는 득세하고 안아야 할 것은 소외시키고 내치는 사회가 아닌 정의가 바로선 당위의 사회를. 한 사람의 작은 정의의 실행이, 이러한 사람들이 협력하고 연대하면 그 무엇인들 바꾸지 못하겠는가? 우리 모두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작은 힘인 것을. 이 책 『지식 e』의 판매부수가 100만권을 돌파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적어도 100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다는 것이고, 또한 방송으로 접했던 사람들까지 더하면 ‘세상을 바꾸는 작은 힘’에 대한 시민적 합의와 의식의 성숙이 눈에 보이는 것만 같아 희망의 세계에 대한 낙관을 기대하게도 된다.

 

P.S.

'지식채널 e'는 2005년 9월부터 '1초'와 '베이비 사인'을 주제로 EBS에서 방송되기 시작한 5분짜리 동영상 프로그램이다. 알파벳 'e'를 키워드로 사회, 인간, 교육, 문학, 과학 등 각 분야의 지식을 강렬한 영상과 음악, 간결한 메시지만을 통해 세상에 대한 이해와 진실을 감동적으로 체화토록 하여준다. 책으로 간행되어 100만부를 돌파한 이 프로그램은 “2013, 세상을 바꾸는 작은 힘”이라는 주제하에 시청자 및 독자를 대상으로 UCC 동영상 공모전진행하고 있다. 이 시대의 올바른 가치와 방향을 함께 고민해 보는 귀중한 계기가 될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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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
공선옥 지음 / 창비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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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여느 작품과 다른 시적 운율(韻律)로 읽는 내내 간결함, 문장의 경쾌함과 율동감을 느낄 수 있었던 소설임을 우선 말하고 싶다. 제목의 ‘그 노래’에 무엇인가가 깃들듯이 말이다. 저 깊은 안에 갇혀 자기 소리마저 잃어버린 그 노래의 사연들을 오늘의 사람들이 혹여 지레 귀를 막아버릴까 저어하여 선택된 유혹의 비(非)의식적 수단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속하여 말하여야 할 것이고, 써야 할 것이기에 그래서 잊지 말아야 할 우리들의 이야기이기에, 아니 꼭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이기에 노래가 되어야 했을 것이다.

 

소설의 배경인 1980년 전후는 내겐 더할 수 없이 우울한 시절, 바로 대학 재학시절이었다. 계엄군이 점령한 학교는 오랜 휴교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었고, 4년의 기간 중 삼분의 일은 사실 세월만 낚았다고 해도 될 듯하다. 더구나 부마항쟁을 시작으로 광주민주화항쟁이 내 젊은 대학 시절을 횡단하고 있었기에 아마 인생의 가장 밝아야 했을 시절이 나와 같은 세대들에게는 어둠 그 자체로 기억되곤 할 것이다. 광주시내에 투입된 공수부대 등의 시민을 향한 무차별적 만행은 새삼 되뇌고 싶지 않을 만큼 잔혹하고 처절한 것이었음을 반복하지 않으련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해야만 할 것이 있다. 부정한 것이 권력을 가지려할 때 그 폭력성은 가히 극악함의 끝이라고, 또한 약자의 것을 빼앗고 그네들을 짓밟는 것이 곧 선이 되고 재화가 되어 권력이 되는 이 패덕(悖德)의 순환은 이젠 끊어야 하지 않겠는냐는 이성 말이다. 30여년이 지났으나 우리사회는 이 점에 있어서는 별반 변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부녀자를 겁탈하고 대검으로 잔인하게 난도질하며 패악질로 한 지역을 파멸시킨 인면수심의 군인이 대통령이 되고 이에 뇌동(雷同)하고 협력하던 정치 행정관료들이 오늘 더욱 득세하여 나라의 정체성을 흔들어대고, 인민의 삶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으니 우리가 얼마나 잊기 좋아하며 무심하고 생무지인가를 생각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소설이 이러한 외형적이고 누구나 아는 드러난 폭력을 말하고자하는 것은 아니다. 이보다 더 깊고 본원적인 폭력, 이 땅의 대다수 사람들의 생리가 되어버린, 너무도 구조적이이서 보이지 않는 폭력의 실체를 형상화하는 것이다. 단지 지독히 객관적이고 구조화되어 있는 한국인들의 폭력성이 군사 쿠데타와 정치권력 탈취를 위한 시민의 대대적 학살인 1980년 5월 광주 민중의 항쟁이란 역사적사건과 맞물려 표현될 뿐이다. 늘상 거침없이 뿜어내는 탐욕의 광기들, 그러나 이것을 광기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온통 미쳐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애’와 ‘묘자’로 대변되는 소설의 두 인물을 중심으로 그녀들의 어린 시절을 에워싼 우리사회, 아니 시골동네의 이웃이라 불리는 바로 우리네들이 약자에게 행하는 위선과 추오를 보게 된다. 다름아닌 광기이다. 곤궁함으로 스러져가는 이웃, 그러한 이웃의 생존을 도적질하는 우리네들의 무심한 얼굴이다. 도적질 항의에 자신의 자존심을 해쳤다고 살해하는 사회, 그리고 이를 비호하는 사회, 나아가 그러한 이들이 주도하는 사회가 시리게, 그리고 끝도 없이 그려진다. 어찌 이 모두를 쓸 수 있겠는가? 굶어죽고, 겁탈당하고, 시퍼런 대검에 찔려 살해당하고, 삼청교육대라는 기이한 이름의 국가폭력에 끌려가 정신과 육체 모두가 파괴되는 엄연한 현실을 마주한 당사자가 온전히 살아 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망상일 것이다.

 

한국인의 심신에 새겨진 이 구조화된 폭력성, 무심함, 타자가 배척된 자기중심적이기만한 탐욕스러움, 소설의 면면에 새겨진 평범하기 그지없는 인간들의 욕망이 “새벽종이 울렸네, 새마을이 밝았네”라는 이 기만적인 노래를 타고 광적으로 흐른다. 소설은 거창한 외침이나 과도한 울분을 토하지 않는다. 구조화된 것은 자극적이지도 노출되지도 않는 것이기에 그 객관적 형상, 본질적 폭력의 양태란 어떤 것인지를 담담하게 기술할 뿐인 것이다. 권력에 눈먼 무식한 군인이 벌인 민중 학살이란 폭력이 문제가 아니라 이러한 폭력이 가능한 이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내재적 인식능력이 지닌 폭력의 모습들을 말하기 위함인 것이다. 이 사회의 구성원인 우리들에게 체화된 폭력으로서의 광기 말이다.

 

계엄군에게 겁탈당하고 피투성이로 길거리에 버려졌던 정애의 정신이 현실에 머물지 못하고 이미 주검이 된 가족들의 온기와 고향마을을 떠도는 것, 또한 어린시절 정애의 유일한 벗이었던 묘자의 수감생활은 이들에게 광인의 낙인을 찍는 우리의 정신을 의심케 한다. 정작 미친 것들은 누구인가하고. 회사재산의 유출을 막기위해 수레를 끌고 나오는 사람들의 신체 곳곳은 물론 수레의 틈새 모두를 수색한다. 그러나 정작 유출되는 것은 수레인 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일화처럼 보다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폭력과 패악은 구조적이고 객관적이어서 눈에 띄지 않는 우리네의 일상적 몸짓이라는 것을 소설은 말하려는 것이지 않을까하고 생각해 본다.

사람이 더 어떻게 해 볼 수 없을 때 터져 나오는 소리, 정애의 아비에게서, 그리고 정애에게, 그리고 묘자에게서 흘러나오는 신음같은 공허한 노래 소리가 이젠 들리지 않는 사회가 되어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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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문학의 맛있는 코드
석영중 지음 / 예담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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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슈킨에서 솔제니친에 이르는 19세기와 20세기의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문호들의 작품을 음식이라는 코드로 재해석하여 당대 러시아 사회와 사람들의 정신을 조명하는 이 책은 독서가들에게 책 읽기의 또 다른 시선을 제공하여 준다. 소설과 희곡 등 문학작품 속에 투영된‘음식’, ‘먹는다’라는 소재가 러시아 사회의 변화를 반영하는 의미심장한 제재였음을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러시아문학의 이해에 한걸음 다가선다는 느낌을 획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2세기에 걸친 러시아의 세계사적 격변은 그대로 사람들의 삶에 녹아 흐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특히나 인간의 생존을 위한 기본중의 기본인 먹는 행위는 개인 삶의 미세한 변화는 물론 사회 상황이라고 하는 시대의 조류를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리라. 그래서 19세기 전반기, 러시아에 문학다운 문학의 뿌리를 비로소 내리게 했다는 푸슈킨에게서 음식들의 요란한 나열과 비평을 보게 되는 것은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에 대한 열망의 문화적 소산임을 알게 되는 것이고, 20세기 초 소비에트 혁명의 무참한 시대의 식탁과 먹는 것이 ‘파스테르나크’의 ‘지바고’나, ‘솔제니친’의‘이반’으로 표상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남의 것인 서구화와 자신의 것인 슬라브적인 것의 갈등과 절충, 융화가 러시아인들에게 어떤 양상으로 진행되었는가를 바라보는 것은 부끄러운 근대화의 길을 걸어야만 했던 우리의 역사와 견주어 흥미로운 과정이 되어주기도 한다. 프랑스적인 것은 고급스럽고 우아한 것이고 슬라브적인 것은 촌스럽고 저렴한 것이라는 당대 러시아 지배계급의 허영과 맹목이 대문호들에게 어떠한 문화적 기호로서 수용되고 있는 가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 책의 의지일 것이다. 물론 음식과 역사적, 문화적 상호성만을 해독하는 것은 아니다. 먹는것 그 자체가 지니는 본성으로서의, 인간 삶의 본질이라는 철학적 사유가 배제되지 않은 독해이기에 더욱 매혹적인 관점이 된다.

 

그러나 ‘고골’이나 ‘체호프’의 작품 해석에 주류를 이루는 비평적 단어인‘범속성’에 대한 의미의 부정확한 정의에 기초한 해석의 연장이나, ‘파스테르나크’의 소설을 통해 주장하는 삶의 존재론적 의의와 같은 이해에 있어서는 인문학적 논리를 벗어나 사적인 주장으로 비쳐 부분적으로 거북한 것도 사실이다. 예컨대 범속성이라는 어휘 그 자체는 아무런 가치지향성을 지니고 있지 않음에도 고인물, 비루함, 게으름과 같은 언어와 동등으로 의미화 하는 것과 같다. 범속성은 지극히 찬미할 수도 있는 언어이며 혹은 비난에 사용 할 수도 있는 언어이지만 그것은 전제된 상황에 종속되어 활용되는 것이지 어휘 본성이 그런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미 언급하였지만 이 책은 신선한 문학적 해석을 지닌 매혹적인 책임을 부인할 수 없다. 특히, ‘곤차로프’의 『오블로모프』, ‘불가코프’의 『개의 심장』, ‘유리 올레샤’의 『질투』와 같은 작품들은 폭넓은 러시아 문학의 접근을 가능케 해주고, 독자의 읽기 영역을 확장시켜주고 있으며, ‘고골’의 「옛 기질의 지주」, ‘체호프’의 「국어 선생」등 단편소설의 해석은 여기서만 맛 볼 수 있는 독특한 경험이 된다. 어쨌든 책의 코드는 ‘먹는 것’, 음식의 자연적 영역과 문화적 영역을 오가면서 거장들의 문학이라는 숲속에 내재된 정신과 육체, 즉 인간의 삶속을 산책한다.

 

내게 깊은 인상을 준 해석은 ‘고골’의 『검찰관』, ‘곤차로프’의『오블로모프』, 그리고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들 수 있겠다. 본의 아니게 말단 관리에서 담대한 사기꾼이자 허풍꾼이 되는 ‘흘레스타코프’의 빈곤한 경험과 상상력을 표현하는 유치찬란한 음식이름의 열거, 철저한 감각의 백지상태, 고요와 무관심한 평온이 가득한 ‘오블로모프 기질’과 관련한 논쟁 가능한 삶의 범속성에 대한 비평, 고급 레스토랑과 지옥이 동의어가 되는 문학 관료들의 탐욕에 대한 작품설명은 독자로서만이 아니라 글 쓰는 이들에게도 유용한 시사점들을 드러내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인생은 예기치 않은 기쁨과 우연의 일치와 기적과 선물로 가득 찬 것”이라는 ‘파스테르나크’의 흠결 많은 대작 『닥터 지바고』 대한 이해를 토대로 혁명과 이로 인해 소외되고 소멸되는 인간의 존엄성, 참된 존재로의 복귀를 향한 고독한 여정에 대한 이야기들은 무릇 전체주의를 동반하는 혁명의 고통스런 이면을 생각게도 한다.

 

사실 책은 먹는다는 것의 사색을 통한 존재론 적 삶에 대한 다양한 사유들에 대한 해석이고, 이에 대한 특히 범속성에 대한 비판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한편 ‘톨스토이’식 쾌락주의 비판을 기초로 하여 음식과 섹스의 권력과 지배 욕구라는 폭력성을 지적하고, 먹는다는 것의 문화화, 즉 미학화, 의식화와 같은 군더더기인 과잉의 악덕에 대한 이야기도 쏠쏠한 재미를 주기도 한다. 먹기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인간은 범속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남녀모두 진정한 생생한 관심사는 모두 먹는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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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나 좀 구해줘 -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꼭 알아야 할 51가지 심리 법칙
폴커 키츠 & 마누엘 투쉬 지음, 김희상 옮김 / 갤리온 / 201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심리학, 왜 필요할까? 만일 ‘나 홀로 살 수 있는 세상’이라면 과연 ‘심리(心理)’, 즉 마음이라 일컫는 사람의 내면 읽기가 구태여 필요하겠는가 라는 점이다. 사람은 관계의 동물, 타인의 시선을 인식하고 그 타인들과 더불어 살기에, 바로 그(그녀)들을 이해하는 것이 자신의 삶에 있어 너무도 중요한 것이다. 그렇기에 심리는 이 단어가 오늘의 의미이기 이전부터 사람의 생존을 위한 필수 자질로서 터 잡았을 것이다.

 

저 사람과 상대하기 위해, 저 상황을 마주할 때, 저 사람이 하는 말의 속뜻은 등등에 대해서 내 마음의 상태는 어떠해야 할 것인가처럼 상대가 존재하기에 심리에 대한 해독은 의의를 갖게 되는 것이다. 혹은 그들과 그 상황으로 인해 야기된 결과의 현상이 내게 주는 다양한 감정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하여야 하는 것인가? 그래서 이러한 것들을 만들어내는 마음이라는 의식과 잠재의식, 알 수 없는 심연의 무의식을 작동시키는 본질은 무엇인가하는 앎의 욕구는 사람들의 당연한 관심사일 밖에 없다.

 

이처럼 심리는 타인과의 관계를 전제로 하기에 의미를 갖는다. 상대가 없는 나만의 심리 읽기는 공허한 것이 되어버리거나 타인을 배제한 채 자기에게만 집중한 자기중심주의, 다시말해 에고이스트 또는 나르시시스트가 되어 소통이 불가능한 괴물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래서 심리에 대한 이해는 관계를 기초로 한 사람의 세상에서 슬기롭게 사는 지혜가 된다. 타인의 심리, 그리고 나의 심리, 사람이란 동종(同種)이 지니는 본질로서의 심리적 기제를 아는 것은 바로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교정해주고, 왜곡이나 오류, 부조화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주는 것이다.

 

이 책의 진가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심리학의 무수한 이론들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사람들이 살아감에 있어 빈번하게 마주하는 일상의 상황들을 50여개로 범주화하여 심리적 본질을 인식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기본적 귀인오류, 사회적 상승비교, 호수효과, 단순노출효과, 상호성의 원리, 리액턴스효과, 방관자효과, 조명효과 등의 사람의 심리적 본질로 소개되고 이것들이 사람의 행동을 어떻게 지배하고 통제하는지를 직시함으로써 삶의 의미와 가치를 제고시킬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1. 사람의 마음은 자기중심적 오류로 향한다.

 

타인의 감정을 알려고 하지도, 또는 무시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공감(Empathy)능력이 결여된 사람이라고 부른다. 우리일상의 주변이 이런 사람들로 가득하다면 그 냉랭한 기운으로 삶은 살벌한 격투장이 되어버릴 것이다. 사실 오늘 이 사회의 많은 현상들이 이미 지독한 격전장인 것을 보면 우리사회에 공감능력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왜 그럴까? 그 하나는 기본적 귀인오류라는 선입견을 진리로 단정짓는 오류이다. 내가 성공하면 능력이고, 타인이 성공하면 운이며, 내가하면 로맨스이고 타인이 하면 불륜이라고 하는 마음 말이다. 이건 또 하나의 심리적 오류인 호수효과라 불리는 우월감 환상과도 관련을 갖는다. 자신은 타인보다 능력이 뛰어나고 매력적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반대로 어렵거나 궃은일에서는 자신을 과소평가하고 내빼는 특성을 보인다.

 

바로 자기중심적인 심리에 지배되어 있는 것이다. 자기애(自己愛)로는 훌쩍이지만 타인의 고통에는 냉혹함이나 멸시를 보낸다. 타인의 의견에는 귀 기울이지 않으며 자신의 목소리에는 경청을 요구한다. 나는 항상 옳지만 타인은 틀렸다고 생각한다. 그리곤 현실과 충돌하는 자신의 생각이나 기대를 왜곡하고 미화하며 자신을 정당화시킨다. 아마 TV속 심야 토론프로그램의 인물들을 떠올리면 될 것 같다. 에고이스트들로 넘쳐나는 한국사회, 갈등으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타인은 적대시하고 멸시하는 사회, 그것의 중심에는 이렇듯 공감능력을 잃어버린 자기중심주의의 오류에 매몰된 넘쳐나는 인간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절망하지는 말자. 자기중심주의를 경계하고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는 심리적으로 성숙한 많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하니 말이다. 그래서 책속의 또 다른 이론들은 삶의 슬기로서의 심리적 현상들을 통해 즐겁고 기쁘거나 숭고한 가치를 향한 제안들로도 가득 차 있다.

 

2. 그와 그녀의 마음을 얻는 법들

 

개체로서의 사람은 분명 다르다. 그(그녀)들의 마음이 다른 것은 그와 그녀들의 숫자만큼 다양할 것이다. 다른 경험과 지식, 다른 환경, 또한 다른 신체구조와 유전형질 등 다름이 오히려 진실이며 진리일 것이다. 그러니 갈등은, 즉 어떤 목적이나 다른 목적이 달성되지 않게끔 막는 것으로 한 체계 안에서 서로 다른 목적들이 충돌하는 상황은 지극히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말해 갈등 그 자체는 중립적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갈등은 그것으로 인해 발생하는 긴장상태가 문제이고, 이것이 해결되지 못하고 장기화되면 어떤 지경이라고 부르는 것에까지 치닫게 된다. 다름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다름의 의미를 듣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입이 아니라 귀”라고 한다. 해결책은 그리 복잡한 것이 아니다. 타인의 말을 적극적으로 경청하는 노력에 있는 것이다.

 

물론 어렵다.‘경청’은 곧 내 마음의 자세이기 때문이다. 존중과 배려, 이해와 공감의 성숙한 심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타인의 마음을 얻는 법이 이렇게 어렵기만 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끌리는 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에게 빈번하게 눈에 띄도록 하는 것, 이것을 단순노출효과라고 한단다. 검증된 심리이론이란다. 그나 그녀에게, 혹은 직장상사에게 자신의 친절하고 우호적인 모습의 노출을 반복하는 것은 훌륭한 방법이 된다고 한다. 그리고 상호성의 원리라고 부르는데, 뒤에서 성품이나 아름다움, 능력을 칭찬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반드시 그 말은 상대의 귀에 들어가고 그나 그녀는 호감을 송신한다는 것이다. 정말 쉬워 보인다. 그런데 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인지...

 

반면에 심리적 효과를 역으로 실행해보는 방법도 있다. 리액턴스효과로 하지 못하게 하면 더욱 하고 싶은 충동이 이는 사람의 심리이다. ‘그 초콜릿 먹지마!’ 그러면 더 먹고 싶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대답해보라고 한다. ‘나는 더 이상 그 초콜릿 먹고 싶지 않아’, 그러면 먹지 말라고 했던 이의 금지했던 심경이 시들해지고 획득이 수월해진다는 것이다. 사람의 심리란 이렇게도 간사하고 변화무쌍한 것이다. 그러나 말과 감성이 어긋나는 상대로서 남자와 여자는 커다란 간극을 지닌다. 재밌는 일화가 소개되고 있는데, 여자가 남자에게 말한다. “따뜻한 커피 마실래요, 차를 드릴까요?” , 그러자 남자는 느닷없이 “섹스!”라고 답한다. 코드가 빗나갔다. 여자는 그저 친절함과 우호를 보인 것이지만, 남자는 ‘뜨거운 것’을 권하는 여성에게 관능을 암시받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는 솔직한 대화가 감성의 간극을 좁히는데 최고라는 것이다. “ 그 뜨거운 것을 말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말해 줄 수 있소?”라고 말이다. 재치와 진의를 모두 전할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 자기와 닮은 사람을 선택하란다. 결코 다른 사람과는 오래 살 수 없단다. 이를 ‘사회적 호모가미(Homogamy)’라고 하는데, 서로 달라서는 이혼하지만 닮아서 이혼한 사람을 본 적 있느냐고.

 

3. 심리의 이해는 사회의 소통을 증진한다.

 

사람의 심리를 이해하는 것, 그것은 곧 배려이고 공감일 것이다. 그리고 내 심리, 사람의 본질적 심리를 아는 것은 겸허이고 호의이며 삶의 지혜일 것이다.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동원되는 인지 부조화의 실체, 이기주의가 아닌 에고이즘으로의 매몰, 자기중심주의로 인해 아무도 주시하지 않는데 혼자 쩔쩔매는 조명효과처럼 사람들의 심리는 곧 세상이고 관계성이며 삶의 모양이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타인을 자신의 수단이나 도구, 경쟁자, 적대자로 보는 시선에 길들여지고 있다. 이것은 진실이 아니다.

 

우린 지극히 불완전한 심리와 육신을 가지고 있다. 변화맹이 그렇고 섬광기억이 그렇다. 방관자효과가 그렇고 동조현상이 또한 그렇다. 우린 누구보다 우월하지도 않다. 우린 자신도 모르게 끝없이 현혹되고 오류를 저지른다. 자신의 내면으로만 들어가 공감과 소통을 상실한 사람이란 유아적 껍질을 깨고 세상에 나와야 할 것이다. 그래야 사회의 갈등은 줄어들고 소통은 원활해져 모두가 살기 좋다고 외치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 심리학은 우리의 그릇된 심리를 바로잡아준다. 정신위생(Mental Healthy)이 더욱 중요한 사회적 언어가 되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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