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이란 무엇인가 - 폭력에 대한 6가지 삐딱한 성찰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현우.김희진.정일권 옮김 / 난장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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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가시적이지 않은 것을 누군가에게 이해시킨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눈웃음 지으며 뱉어내는 정중한 말에 내재된 폭력성을 설명하려 하거나, 빌게이츠 같은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가 베푸는 자선의 이면에 축적된 폭력성을 이야기 하는 것처럼 말이다. 직접적이고 표면화된 것에만 익숙해진 물질의 시대에 상징적이고 구조적이어서 비가시적인 것을 이해할 지적 사유능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1. 비가시적 폭력에 대해서

 

그래서 무언가 부당하고, 비정상적이며, 우리의 삶을 잔혹하게 배제시키며, 자유를 구속하고 불평등을 고착화시키는 폭력성을 지적할 때 고작 동족학살, 인종주의, 성차별, 경제적 양극화와 같은 겉보기에 비합리적인 주관적 폭력을 말하는 데 그치고 만다. 이를테면 사회적 약자를 향한 억압적 공권력의 양태라든가, 부패의 썩은 내가 진동하는 관료의 도덕적 무감각이란 사악성, 착취적 노동위에 군림하는 재벌의 도착적 이기심 같은 것을 지적함으로써 사회적 폭력의 병리적 현상을 말하는 것이 고작이다. 결국, 이러한 것들을 제아무리 비판하고 변화를 요구한다고 해서 근본은 바뀌지 않는다. 굳이 이론적으로 입증하지 않아도 인간의 역사, 아니 한국사회만 바라보더라도 이것은 결코 변화된 적도 없으며, 변화할 가능성이 전혀 없음을 헤아릴 수 있다.

 

이러한 지점에서 폭력의 본질을 이해하고, 정작 우리들이 관심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비판하여야 할 정말의 ‘폭력’을 해독하는 ‘지젝’의 폭력에 대한 사유는 사회의 변화를 야기할 수 있는 그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폭력, 가시적이고 주관적인 폭력의 원인을 제공하는 원천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그는 폭력을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는데, 통상 겉으로 드러난 폭력을 ‘주관적 폭력’이라 하고, 드러나지 않은 비가시적 폭력을 ‘상징적 폭력’과 ‘ 구조적 폭력’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그것이다. 상징적 폭력이란 언어 자체에 들어있는 것으로 언어가 의미세계를 대상에 부과하는 형식이며, 구조적 폭력이란 경제, 정치체가 정상적으로 작용함으로써 나타나는 파국적 결과이다. 즉 정상적인 상태에 내재하는 폭력이어서 정상을 혼란시킴으로서 두드러지게 가시화되는 주관적 폭력과 달리 보이지 않는 폭력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거의 대다수가 직접적이고 물리적이며 이데올로기적인 폭력, 즉 주관적 폭력만이 있는 것처럼 떠들어대고 마치 그것이 사회악을 야기하는 전부인 듯 다른 형태의 폭력을 시야에서 지우고 있다는 점이다. 진정 주의를 기울여야 할 객관적 폭력(상징적 폭력, 구조적 폭력)을 보지 못하도록 필사적으로 방해하려는 듯이. 객관적 폭력은 주관적 폭력의 실질적 동인(動因)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제아무리 주관적 폭력을 비판해 보아야 근본적 폭력성을 근절할 수 없는 것이다. 공선옥의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라는 소설은 바로 이것, 시민을 무심히 학살하는 구테타 군의 만행, 이 주관적 폭력이 한국사회의 밑바닥까지 잠식해 있는 - 이미지, 언행, 삶의 습관 등 - 구조화된 폭력성을 원인으로 하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결국 주관적 폭력이란 객관적 폭력을 토대로 한 결과물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은 사람들을 삶의 평안에서 고통으로 내모는 것은 평범해 보이는 이웃들의 언행, 구조적인 것임을 시종 그려내고 있다.

 

지젝은 이러한 객관적 폭력의 본질, 그 민낯을 보여주기 위해 그야말로 찬란한 설명을 구가(謳歌)하듯 열거하는데, 민주주의, 자본주의를 필두로 해서 자유주의, 근본주의를 구조적 폭력의 토대로 하여, 언어라는 상징화 과정 자체의 폭력성, 궁극의 공포정치인 생명정치, 보편성의 윤리에 터 잡은 종교의 잔혹성, 사회적 최고의 악인 집단이라 할 수 있는 빗장 공동체, 나르시시즘적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니체적 말인(末人)의 형상을 한 쾌락주의적 금욕주의에 몰입하는 대중문화 등 비가시적 폭력의 양태 등은 무궁무진하다.

 

2. 자신과 맞서 싸워야 하는 구조적 폭력의 역설

 

이것들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공동체가 맞서 싸우는 외부적 위협이 바로 공동체 속에 내재된 본질”이라 할 것이다. 예로서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개인은 자기가 자기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보편적 자본의 확대 재생산에 일조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조금 시각을 달리하면 거대 자본가인 ‘조지 소로스’나 ‘빌 게이츠’가 인도주의를 위기로 부각하고 진정 사랑을 보내며 자신들의 선한 면을 드러내는데 내재된 폭력을 보는 것이다. 막대한 기부를 위해서는 막대한 이익을 거두어야 한다. 극단의 개인주의적 경제윤리라는 착취는 예외로 하더라도 “변비를 고치기 위해 변비를 유발하는 초콜릿 변비약”을 파는 태생적인 폭력성을 본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의 자선은 초자아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인도주의적 가면이며, 사회적 재생산의 순환을 유지하려는 자본주의 연명(延命)적 필요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보편성을 겉으로 명백히 내세우는 윤리의식일수록 근원적으로 더 잔혹하게 타자를 배제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전 인류를 포용한다는 기독교의 논리를 보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는 하나이니라, 모든 인간은 형제이니”, 이를 다른 말로하면 기독교의 형제애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인간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가장 보편적인 듯 하지만 가장 지독하게 타자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악랄한 상징적 폭력의 전형이라 할 것이다. 이것은 전반적으로 생태계를 파괴하고 오염시키는데 주도적으로 관여했던 지배계급이 자신이 저지른 결과에서 쏙 빠져나와 유기농 식품을 사먹으며 자연보호구역에서 휴가를 즐기는 빗장공동체의 내재적 폭력과 너무 닮아있다. 이렇게 타자를 배제하는 것, 자기이익, 자기연민을 위해서 타자를 고통에 빠뜨리고, 타자의 삶을 파괴함으로써, 아니 설혹 아무런 나쁜 일을 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자신들이 누리는 안락한 생활을 위해 지속적인 구조적 폭력이 누적되어야 했음에 대한 놀라울 정도의 무감각을 보게 된다.

 

3. 사회적 습관의 뒤흔듦에 대해서

 

내가 주목한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이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적 폭력의 이유 중 하나인 ‘습관’에 대한 통찰이다. 습관이란 “우리의 일상생활을 암묵적으로 떠받치는 지하영역”이라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습관이란 무엇일까? 일을 신속하고 원만히 처리하기 위해 급행료와 뇌물을 주고, 법률 등 규칙의 절차를 밟지 않거나 위반하면 학연, 지연 등 인맥을 찾는, 부정한 것을 잘하는 융통성이며, 인간관계의 칭송이며, 이것을 생존의 필수 조건이라 치켜세우는 것이다. 한국인을 사로잡고 있는 이 습관의 본바탕은 그야말로 위협적인 폭력성을 내재하고 있다.

 

수년전 한국사회를 들끓게 했던 해병대 병사의 총기사건은 습관, 즉 “동료군인을 아무도 모르게 구타해도 된다는” 집단 결속의 확인을 위한 행위는 암묵적 관습이 지닌 폭력성의 전형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위반행위이지만 모두가 묵인하는 무의식적으로 체화된 폭력이다. 사실 이러한 것들은 한국인의 삶 속에서 지극히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에 폭력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한번 떠올려보자. 가시적 주관적 폭력은 이러한 구조적, 상징적 폭력을 원인으로,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말이다. 자신의 권력야욕을 위해 동족을 학살하는 군인 독재자의 탄생이라는 폭력은 한국인, 한국사회에 뿌리를 깊게 내린 객관적 폭력위에서 가능했었다는 것을.

 

이것은 또 다른 측면에서 조명이 가능하다. 일례로 모두가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엄격한 규제를 만드는 것이다. 한국의 지배 권력은 이 전략을 아주 즐겨 사용한다. 그리곤 집행은 엄격하게 하지 않는다. 아주 자의적으로 행사되는데, 마치 자비를 베풀듯 집행 또는 유예하는 것이다. 단지, “ 뭐 우리에게 거슬리는 자들이 있을 때 우리 뜻대로 버릇을 잡아 줄 수단 정도는 있어야 된다”는 식으로 행사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비의 체제’는 전체주의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이 전체주의적 행태가 다소 흐릿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한국의 지배 권력은 이것을 놓지 못하고 있다. 결국 암묵적인 관습적 규칙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네트워크인 전체주의적 습관을 붕괴시켜야 하는 것인데, 소비에트의 붕괴는 이것을 실제로 증명한다.

 

어떤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에게 뇌물을 주고 누군가에게 연락하면 되던 것이, 어느 순간 그 누구라는 대상이 사라진 것이다. 기존의 구조적 폭력의 사슬이 끊어진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흥미로운 시사를 던져준다. 습관을 파괴하면 체제는 붕괴한다는 것이다.

공동체 속에 내재된 본질, 공동체를 위협하는 폭력의 본질로서의 습관을 파괴하는 것이다. 주관적 폭력과 싸운다고 하면서 구조적 폭력에 가담하는 자들의 위선이 아니라, 구조적 폭력 그것과 싸워야 비로서 삶의 자유와 평온, 정당함이라는 진리가 성취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눈에 보이는 것만을 기만적으로 흔드는 것이 아니라, ‘제도적 무의식’, 일상생활을 암묵적으로 받치고 있는 것을 뒤흔들어야만 한다는 이야기이다.

 

이외에도 자신이 처한 상황의 경험을 의미있는 전체 속에 위치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공간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행위로의 이행”이라는 폭력의 정당성, 때론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가장 폭력적인 무엇을 할 수 있음의 얘기들은 이 배타적이고 범주화하는 불온한 세상을 극복하기 위한 삶의 의식과 태도, 사유의 방식을 안내한다. 폭력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라는 ‘뮐레르’의 말처럼 지젝의 이 책은 폭력 그 자체를 이해하는 더없이 탁월한 저술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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