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
기욤 뮈소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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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근작(近作)파리의 아파트에 그려진 가스파르매들린이란 두 인물이 치열하게 쫓는 생의 가치일 수 있는 것, 아이와 가족, 그리고 이들을 이루는 사랑에 대한 열정적인 공감은, 아마 기욤 뮈소가 언젠가부터 우리네 삶을 버텨내는 최고의 선()은 이것이라 말하려했던 것이라는 어렴풋한 기억을 불러 일으켰다. 어느 작품에서 느낀 감정이었을까? 지금 이 순간아서리자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이 희미한 기억에 대한 확인의 과정에서 이루어졌다고 해야겠다. 그래서 펼쳐든 책의 환상적 이야기는 내 시선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다.

 

생의 한 가운데일 듯한 지금 이 순간, 내 열렬한 연인이었던 아내, 그리고 작은 미소와 한 마디의 웅얼거림조차 사랑스러워했던 아이들과 어느덧 소홀하고 어색할 만큼 거리가 생겨버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시간과 공간을 어떠한 의지도 행사할 수 없이 24년을 24일이라는 제한된 시간으로 살아야만 하는 분신으로서의 자신을 그려내야만 했던 소설가 아서 코스텔로의 소설이 망각했던 소중한 것들을 생생하게 살려낸다.

 

 

잊고 있던 내 이기적 어리석음은, 아마 ‘24방위 바람의 등대가 있는 별장의 금지된 지하 철재 문을 열고 들어간 응급의학 레지던트인 아서 코스텔로가 겪는 강제되는 시간여행의 당혹감이 끝내 귀결시킬 삶의 의미라는 진실에 직면하고서야 드러났을 것이다. 부조리한 환상에 내몰린 아서란 인물에게 닥친 시간의 불행 속에서 빚어지는 삶의 순간순간들의 이야기는 애처로울 만큼 짧기만 하다.

 

나에게 주어진 24시간이 사랑하는 이들에겐 8개월이고, 13개월이며, 혹은 15개월이라면, 한 순간 의식을 잃고 깨어나면 1년 남짓한 시간이 지난 어느 낯선 장소에 있는 자신을 발견해야 하는 것이라면 그 당혹감을 무어라 설명 할 수 있을까? 갑자기 사라진 사람이 어느 날 그렇게 나타난다면 그 많은 시간의 공백에 방치되어야만 했던 사람들의 고통은 또 어떻게 표현 할 수 있을까?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불안의 소리를 지르는 알몸의 샴푸하는 여인, 그녀의 욕조에 누워있는 아서의 낭패감은 속히 그 자리를 피하는 것이다. 정신없이 도주하지만 잃어버린 지갑을 찾기 위해 다시금 여자의 집으로 숨어들고, 우연히 그녀의 연극학교 학생증, 잔고가 없는 통장, 밀린 월세 고지서 등 신산한 삶의 형색을 보게 됨으로써 아서의 기이한 시간 여행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실종된 후 사망한 것으로 알고 있던 할아버지 설리반이 정신병원에 있음을 알게 된 아서는 자신이 처한 혼돈의 시간에 내재한 비밀을 알기위해 할아버지를 찾고, 그를 병원으로부터 탈출시키기 위한 행동에 돌입한다.

 

24시간의 극히 제한된 시간이란 어떤 목적된 행위를 완결하기위해서는 턱 없이 짧은 시간이다. 이야기의 속도는 그 만큼 빠르게 내달린다. 할아버지의 탈출을 위한 도움을 받기 위해 아서는 연극학교 학생 리자(엘리자베스)에게 인생이란 무대에서의 즉흥연기를 제안하고, 두 사람은 그렇게 삶의 우연한 동행자가 된다. 그러나 아서는 또 다시 낯선 장소의 시간에 깨어난다. 8개월이 훌쩍 지나간 터무니없는 시간의 질주! 그리고 그가 발견한 사람은 손목의 동맥을 자른 채 의식을 잃은 엘리자베스다. 응급의사로서의 침착한 처치, 그리고 신속한 구조대의 연락과 병원이송으로 살려내지만, 1년인 그의 24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시간의 늪으로 사라지고 덧없는 시간은 또 1년여가 지난 어느 날이 되고, 생의 반복되는 우연의 마주침은 사랑을 만들어 내고, 두 아이를 가진 가족이 된다. 그럼에도 1일의 만남과 1년의 헤어짐이 되는 사랑이란 고통이다. 혹독하고 잔인하기만 한 통제 불능의 시간여행에 수동적 존재인 아서가 찾아 헤매는 등대의 진실, 시간의 늪이 지닌 진실은 무엇일까?

 

아서의 어린 딸이 엄마가 그러는데 아빠는 사라지는 남자”,라는 문장은 이중의 의미를 지니고 다가온다. 현실의 삶에 놓여있는 소설가 아서가 쓴 소설 속의 응급의사 아서가 처해있는 상황이 바로 소설가 자신의 반영이라는 점이다. “가족을 방치하는 파렴치한, ...지금 하지 못하면 나중에 할 기회가 있을 거라고 믿었죠. 사람들은 흔히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걸 그때는 몰랐어요.” (P 325)

 

자신의 집필 작업과 자기의 열정에만 갇혀있는 남자, 자기실현과 돈벌이로서의 가장의 지위에만 머문, 그래서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하는 삶이 서툰 인간이 되고, 가족과의 소통은 점점 소원해지며 단절되기에 이른다. 아내에 대한 불신은 두 아이의 죽음이라는 현실이 되어 돌아오고, 아서는 슬픔과 자기 과오에 대한 불용으로 고통에 흐느적거린다. 정신병원에 자진 입원한 아서에게 담당의사는 말한다. “소설을 통해 현실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문제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 보란 말입니다.” 그래서 소설 지금 이 순간은 소설 속의 소설이며, 이 소설은 또한 바로 소설 그자체인 소설이 된다.

 

24방위 등대의 지하창고에서 느닷없이 맞이한 터무니없이 부조리한 시간 여행의 진실은 내가 이제껏 믿고 있었던 것과 달리 사라지는 건 내가 아니라 바로 내 가족들이었다.”는 깨달음이다. 우리네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 그것은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감정과 정서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마치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사라져버리는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따뜻한 시선들, 내 가족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아내와 아이들.....

 

픽션이 지닌 환상적인 이면엔 항상 일말의 진실이 감춰져 있다고 웅얼거리는 소설가로서의 아서의 말은 작가 기욤 뮈소의 감성과 감수성, 그의 아내와 아이들을 향한 사랑으로 그대로 이어진다. 지금 이 순간, 그들과 함께하는 그 찰나의 시간을 결코 뒤로 미루지 말라는 진실의 언어에 어찌 공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리자가 내민 손을 꼭 쥐는 아서, 그리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는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잃어버렸던 사랑에 대한 용기, 어떤 가능성의 상징처럼 마음에 새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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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4편의 중단편으로 엮인 무라타 사야카의 작품집 살인 출산은 아~ 하는 탄식을 뱉어내게 되는 소설이다.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내는 것, 더구나 21세기 오늘 우리네가 믿는 합리주의가 빚어낸 이성, 과학이 마침내 도달할 초월적 인간 세계의 무수한 형상들에 어린 모든 가능성들..., 이것이 빚어낼 또 하나의 미래에서 지식과 사유를 결별하기 시작한 바로 지금의 인간의 광기와 어리석음(1)’을 반복적으로 목격하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표제작인 중편, 살인 출산살인출산이라는 인간의 행위에 규정된 윤리관이 새롭게 정의된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여성들의 출산행위가 급격하게 줄어들어 새로운 생명의 출생을 견인하기 위한 제도로서 10명의 아기를 출산하면 1명을 살인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진다. 이러한 사람을 출산자(出産者)’로 부르고, 피살자로 지목된 사람을 망자(亡者)’라 부르며 그 희생을 고결한 죽음으로 칭송하는 세계이다.

 

1. 사유(思惟)의 요청

 

시선을 달리하면 이는 곧 아이들은 살인으로 태어난다는 말의 다름 아니다. 살의(殺意)가 미래로 생명을 이어가는 사회라는 의미이다. 동의 할 수 있겠는가? 실증적 공리주의자들은 과연 무어라 말할까? 인간 살해 행위를 악으로 규정하는 제도주의자들은 또 무어라 말할까? 이러한 의문들을 지니고 그 정의를 내리려는 일련의 과정을 사유(思惟)라고 한다. 그런데 과연 우린 정말 사유하는 것일까? 그런가?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세계가 그저 올바르다고 믿고 있지 않은가? 혹여 자신의 생각이란 것이 집단의 지혜가 위임한 판결의 무기력한 집합소(2)’라고 생각해 본적은 있는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암송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이다. 극단까지 밀고 나간 살인에 대한 윤리적 의심인 이 소설의 주장들을 따라가다 보면 터무니없게도, 대립하지만 자신이 믿는 세계에 대한 맹신이라는 점에 있어서 차이가 없는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소설 보바리 부인의 두 적대자인 약제사 오메와 신부(神父) ‘부르지니앵을 떠 올리게 된다. 19세기 판 정의(正義)21세기에 반복되고 있다, 라는 생각에서이다.

 

살인이 인간의 미래를 이어가는 사회를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출산자에 지목되어 살해되는 망자에 대해 신부보다 순결한 존재잖아”, 혹은 죽음의 가능성이 바로 옆에 있는 게 삶의 가치를 한층 더 강하게 깨닫게 해준다고 할까라며, 자신들의 세계에 대한 한 치의 회의도 없는 이 대화를.

이에 대해 살인은 엄연한 죄라는 믿음에 기초한 사키코라는 여성은 왜곡된 불의의 세상이며, ‘무지한 맹신의 세계라고 말 할 것이다. 출산자인 다마키를 언니로 둔 이쿠코라는 여성은 이를 다시 비판한다. “세계를 맹신한다는 의미에서는 사키코씨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과거 세계를 굳게 믿느냐, 지금 문 앞에 펼쳐진 세계를 굳게 믿느냐의 차이일 뿐이죠. 세계를 의심하지 않고, 사고가 정지돼 있다는 의미에서는 별로 다를 게 없어 보이는데.” (P 49)

 

위 문장은 이 작품을 관통하는, 오늘 우리들이 처한 첫 번째 문제의 제기이다. 맹신과 생각 없음이라는 근대 계몽주의 이래 인간의 오만이 야기한 몽매성의 반복이 몰고 올 재난에 대해서. 그럼 19세기 신앙과 과학의 분열로 대립하는 부르지니앵과 오메가 얼마나 맹신이라는 동일성에 사로잡혀 있는가를 보자.

 

단 한 권의 책(성서)밖에 모르는 무지하고 편협한 부르지니앵은 절대자가 하늘에 있다고 주장하며, 합리적 사고라는 유일한 법아래 인간을 위치시키고 싶어 하는 오메는 그것이 인간의 이성에 머물러 있다고 주장한다. 자유주의와 과학만능주의에 경도된 오메, 단독자인 그리스도의 말에 교조적으로 의존하는 부르지니앵, 이 둘 어느 한쪽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암송하고 있을 뿐이다. 무사고(無思考), 틀에 박힘, 즉 각자 자기의 우상에 대해서 무조건적인 신념을 지킨다. 어떤 생각도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양자 모두 흔들림이 없다. 그저 자신들이 아는 것을 반복하고, 암기한 구호를 거듭 반복하기만 할 뿐이다. 이 두 인물은 동류(同類)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보게 된다. ‘인류의 몽매주의와의 싸움은 단지 절대자의 이동, 즉 후견인의 교체에 그치고 말았다(3)’는 점이다.

 

소설 살인 출산은 이처럼 몽매주의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지금 우리들의 세계에 대한 자극의 수위를 극도로 높인 환기일 것이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보다는 복종한다. 쉽게 믿는 정신이 비판정신보다 우위에 서는 것이다. 과학기술에 대한 종교적 믿음을 지닌 오늘은 인류의 역사 이래 그 어느 때보다 무사유가 더욱 횡행하고 있다.

 

10명 째 아기의 출산이 임박한, 1명을 살해할 권리를 취득하기 직전의 다마키를 찾은 사키코는 인간 살해라는 잔인성을 역설하며, 출산자로서의 고통을 버릴 것을 설득하려 한다. 그러나 다마키는 예기치 못한 살인이 일어난다는 의미에서는 세상은 옛날과 다르지 않아요. 보다 합리적으로 변했을 뿐이에요. 세상은 늘 잔혹해요.” (P 86)라고 반박한다. 그리곤 당신이 옳다고 여기는 세상을 믿고 있으면, 당신이 옳지 않다고 여기는 세상을 믿는 사람을 용서할 수밖에 없어요.” (P 90)라며, 맹신주의가 어떻게 세계와 화해해야하는 것인지 답변한다. 이 답변이 여전히 만족스러울 수는 없지만 여기에는 사유의 흐릿한 그림자가 있지 않은가? 의심과 믿음과 용서의 어떤 변증법적 승화(昇華)같은 것을?

 

2. 새로운 앎의 역설

 

아마 소설의 본질적 의미를 해독할 필요 없이 어휘와 문장의 표면에 떠오르는 선정성만을 발견하는 사람들에게 이 작품은 19()이 되어야 했을 것이다. 장장 여섯 쪽에 이르는 자매의 살해 장면은 나는 자기가 하는 살인에 감동해서 울고 있었던 것이다.” (P116)라는 문장만큼 곤혹스러우며, 이질적이고, 혼란스럽다.

 

살인의 권리를 얻은 다마키는 특정한 인간에 대한 살의를 지니고 있지 않은 인물이다. 대상은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살기 위한 기도로서의 제지 할 수 없는 살인 충동이 있을 뿐이다. 그것의 실현 행위가 펼쳐진다. ‘광기’, 인간의 흉포한 원색적인 폭력성. 이렇게 극한적 장면의 묘사에 이르러야 했던 작가의 생각을 읽고 싶어진다. 다마키의 살인 행위에 가담하여 그녀보다 더욱 그 행위에 전념으로 빠져드는 이쿠코의 살인의 정의에 대한 자기 확신의 언어들에서 그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제 우리들은 두 번째 문제에 직면한 것 같다. 새로운 윤리 세계로의 안내, 인류의 정신을 지체시킨 무사유로부터의 탈출을 향한.

특정한 정의에 세뇌당하는 건 광기에요라며, 또 하나의 클리셰(cliché)로 사키코를 반박했던 이쿠코는 바로 그 광기의 향연에 참여함으로써 무지의 몽매성으로부터 탈출한다.

 

방 안은 사키코에게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힘으로 가득했다. 우리는 얼마나 올바른 세상 속에 살고 있는가. 이 세상의 정의가 파열된 것처럼 우리에게 말려들었다. ... 청결한 살의 세계로 들어가서 생명을 가로채는 행위.” (P 115~116)

우리들의 믿음에 기초한 담론들은 마치 한정된 수의 카드를 변화시켜 만든 극히 빈약한 조합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일반화된 지식의 유형에 갇힌, 처음부터 어떤 끝맺음을 할지 뻔히 예상되는, 사유를 필요로 하지 않는 신념들.

 

이 잔혹한 장면을 통해서야 비로소 파편처럼 튀어나오는 새로운 앎의 역설은 사유의 치열(熾烈), 극한(極限)성을 시사(示唆)하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결코 일반화 될 수 없는 그것으로부터 에서야 발견 될 수 있는 것이라고. 21세기 오늘, 인류의 존재론적 위기를 인식하는 많은 지성들은 말한다. 비판적 사고를 잃지 않을 때, 자기 사유의 한계를 직시할 수 있을 때에만 인류는 올바를 수 있다고 말이다.

 

우린 혹시 삶의 고통 속에서 작은 빛과 위안을 찾아 고백하러 온 엠마 보바리에게 고해 신부가 내리는 필경 소화가 잘 안되시는 모양이지요? 부인, 댁에 돌아가셔서 차를 조금 드시는 게 좋겠습니다....(4)” 와 같은 처방처럼 갇힌 사고, 무사유의 말과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얼마나 우스운가, 생각 없음이란 것은 이처럼 자기만의 소리를 웅얼거리는 귀머거리의 대화를 만들어낸다. 우리들의 미래 사회는 어떤 윤리성이 지배하는 세계가 될까 지금 우리는 정녕 올바른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인가?

 

 

*(1) 인간의 조건, P 69 한나 아렌트, 한길사

(2)(3) 사랑의 지혜, P84,85 알렝 핑켈크로트, 동문선

(4) 보바리 부인, P158 귀스타브 플로베르, 문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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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티모어의 서
조엘 디케르 지음, 임미경 옮김 / 밝은세상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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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본 리뷰는 소설의 흥을 미리 깨어버릴 수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소설은 두 개의 시간에서 진행되는데, 하나는 유명 소설가가 된 마커스 골드먼2012년이라는 현재로서 새로운 소설 쓰기의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헤어진 연인 알렉산드라와의 우연한 재회에서 시작된 그의 사촌들과 함께했던 성장기로부터 시작되는 과거의 시간이다. 그리곤 이 둘의 시간은 현재라는 하나의 시간에 서로 교섭하면서 삶의 행로에서 걷잡을 수 없이 마주해야만 했던 비극, 그것의 기원이었던 무수한 순간들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불완전성, 그 부조리함을 반추케 하며 하나의 완성된 소설로 결집한다.

 

비극의 기원을 찾아서

 

마커스에게 뉴저지의 중산층인 몬트클레어 골드먼으로 불리는 자신의 부모들에 비해 볼티모어 골드먼으로 불리는 로펌을 이끄는 변호사인 큰아버지 사울 골드먼과 대학병원 의사인 큰어머니 아니타 골드먼의 대저택, 고급 별장 등의 부유함은 동경과 숭배의 대상이다. 그에게 볼티모어는 곧 성공과 부의 기호이며, 동갑내기 사촌인 힐렐, 그리고 외톨이가 되어가는 힐렐을 위해 사울과 아니타가 거둔 양아들 우디는 마커스의 성장기 깊은 우애를 나누는 골드먼가의 형제들이 된다.

 

<골드먼 갱단>이라는 이들의 애칭과 볼티모어로의 귀속감은 마커스의 자긍심이 되지만, 부의 화려함을 뒤로하고 뉴저지 몬트클레어의 집으로 향하는 마커스는 열등감으로 조바심을 낸다. 아마 돈독하기만 했던 이들에게 미세한 틈이 발생하기 시작한 것은 힐렐과 우디가 그들의 동료로 안아준 스콧 네빌과 그의 누이인 알렉산드라 네빌과 함께하게 되는 변화된<골드먼 갱단>으로부터 일 것이다. 소년들에게 아름다운 연상의 소녀 알렉산드라는 보이지 않는 경쟁이라는 감정의 시작점이 아니었을까? 작은 균열의 시작, 우리네 삶을 결정짓는 어떤 순간들의 시작으로서.

알렉산드라가 눈부시도록 예쁘게 웃었다. 그녀가 비로소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왔고, ... 우리의 세계를 완전히 뒤흔들어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P207)

 

풋볼팀의 최고 선수인 우디, 힐렐은 보조코치로서 그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두 소년의 불가피한 분리가 발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점액과다증으로 호흡곤란을 겪는 병약한 스콧의 간절한 소망, 풋볼 경기에서 질주하는 자신을 느끼는 것, 힐렐은 스콧의 기쁨을 위해 터치다운을 향한 마지막 찬스에 그를 투입하고, 스콧은 생의 통렬한 환희를 느끼지만 사망하고 만다. 학교는 힐렐에게 책임을 묻고, 사울과 아니타는 힐렐을 특수학교로 보내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우디와의 분리는 힐렐의 운명을 결정짓는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었음을, ‘볼티모어 골드먼이라는 그 화려함의 숭배어린 가문의 비극이 시작되는 지점이었음을 훗날 확인하게 된다.

 

그럼에도 <골드먼 갱단>들은 볼티모어 오크파크 저택에 모여들고 그들만의 끈끈한 우정을 확인한다. 힐렐과 우디는 주식투자로 거대한 부를 쌓은 알렉산드라의 아버지 패트릭 네빌의 권고로 그녀가 다니고 있던 대학에 각기 법학도로서, 풋볼팀 장학생으로 입학한다. 마커스는 알렉산드라의 반대로 이들과는 다른 대학 문학부에 입학하지만, 힐렐과 우디와의 합의를 깨고 알렉산드라와의 비밀스런 연인관계를 발전시킨다. 대학리그 최고의 풋볼 선수로 각광받는 우디, 오크파크 저택이 초라해 보일정도의 호화저택에 사는 패트릭의 권위는 사울에게 자식들을 향한 사랑과 권위의 박탈감을 가져온다. 이것은 대학 풋볼팀 전용구장의 스폰서가 되어 사울 골드먼구장의 명패를 다는 행위로 이어지지만 막대한 기부금의 부담은 그가 쌓아올린 변호사의 명성뿐 아니라 오크파크의 삶 전반을 손상시키는 치명적인 결정이 되어 돌아온다.

 

이쯤에서 질투라는 감정이 야기하는 형언할 수 없는 삶에 대한 불공평성, 어떤 폭력성에 직면하게 한다. 힐렐의 우디에 대한, 사울의 패트릭에 대한, 마커스의 볼티모어에 대한, 그들의 사랑의 대상에 끼어드는 방해자들을 향한 단호한 거절과 잠재적 폭력의 양상들이 싹트는 양상의 그 어리석음,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이 한계라는 부조리에 대해서. 결국 프랑스의 사상가인 알랭 핑켈크로트인간적인 것은 어떤 것도 어리석음과 낯설지 않다. 이점에서 어리석음이 해학을 넘어서 부동의 힘이 되고 잔인함이 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이다.”라는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이러한 관조(觀照)를 마치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이 질투와 분별력을 상실한 어리석음과 폭력은 뒤엉켜 삶의 향방을 비극의 낭떠러지로 가속화되어 내몰기 시작한다. 거듭되는 오해의 연쇄적 반응들, 금지 약물의 복용으로 NFL입단 최고유망주였던 우디의 대학풋볼팀 퇴출, 아니타 골드먼의 터무니없기만 한 죽음, 그리곤 상습폭력에 시달리던 한 여인에 대한 동정과 연민으로부터 시작된 우발적인 사건들은 선망의 대상이자 영화의 상징이기만 했던 볼티모어 골드먼들의 그 작은 균열이라는 틈새의 기원, 그것의 본질을 생각게 한다. 아마 사랑이라는 얄궂은 얼굴의 이중성, 삶의 의미이기도 한 이것의 부조리한 본성이 아니었을까?

주는 행위와 받는 행위, 자비와 욕망, 자선과 소유욕을 동시에 의미하는 유일한 낱말, 어떤 존재가 갖게 되는 격렬한 욕망과 무조건적인 헌신이 같은 어휘 안에 역설적으로 담겨 있는 이 사랑의 음험한 모순성을 알아차리지 못한 어리석음 그것 말이다.

 

글쓰기, 부조리한 삶에 맞서는 복수전

 

영화화된 첫 소설의 성공, 그럼에도 마커스 골드먼에 족쇄처럼 채워져 있는 힐렐과 우디의 비극적 죽음에 대한 예리한 슬픔, 그리고 상처만 가득 가슴에 안은 채 생을 다한 큰아버지 사울 골드만에 이르는 볼티모어 골드먼들의 영원한 상실은 그토록 그리워하던 연인 알렉산드라와의 재회에서 사랑의 복원을 향한 걸음을 주저하게 한다. 그의 온 마음을 장악했던 볼티모어 골드먼들의 우월한 지위와 풍요로운 부, 아름다움과 지성 가득한 큰아버지와 큰어머니의 우아한 매력들에 대한 동경이란 외피는 열등감이라는 내피를 포장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한 그의 앞에 서있는 것은 삶에 대한 자신의 믿음에 대한 당혹이지 않았을까?

 

자기 삶에 대한 책임이란 의미를 비로소 직면한 사람의 각성, 그것은 마커스가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듣게 되는 행복에 대한 이해일 것이란 생각이 든다.

우리는 몬트클레어 골드먼으로 행복했잖아. ... 우리가 다른 누군가가 되기를 바랄 이유는 없어. 모든 사람은 제각기 달라. 행복이란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출발한다고 생각해.” (P469)

마커스가 새롭게 펜을 든 소설이 <볼티모어의 서>가 되는 것은 바로 이 마주선 슬픔과 자기 책임에 대한 도전의 의미로써 이다.

 

결국 마커스의 자기 삶의 정립을 위한 글쓰기는 글을 쓸 수 있어서 전부 지울 수 있었고, 전부 잊을 수 있었고, 전부 용서할 수 있었고, 전부 치유할 수 있었다.” (P605)는 독백에 그대로 담겨있다. 이 쓰기의 여정에서 알렉산드라의 자기 연인인 마커스를 잃지 않으려했던 진실, 사랑, 그 변화무쌍했던 여인의 얼굴을 비로소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또한 임종의 자리에서 마커스에게 정작 중요한 건 우리가 그 일들(불행)을 이겨내야 한다는 거야.”라고 말하는 사울의 이 유언은 난 사랑하고, 사랑받고, 용서하는 게 삶의 의미라고 생각한단다. 그 나머지는 흘러버린 시간의 합에 불과해.” (P635)라는 말과 함께 마커스의 새로운 소설이자 조엘 디켈의 이 소설의 진정한 주제를 관통하는 문장인 것만 같다.

 

마커스는 외친다.

왜 글을 쓰냐고 묻는다면?”

글이 삶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우리가 부조리한 삶에 맞서는 복수전을 펼칠 때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어준다.” (P640) 라고.

 

아마 이 소설은 치유의 서라고 말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삶의 어느 순간에 스치듯 발생하는 작은 균열이 우리네 인생의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될 수 있음을, 그럼에도 그것조차 사랑의 다른 면에 불과한 것 아니냐고, 허물, 슬픔, 과오, 아픔, 이 모든 생의 부조리함 그것은 정말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래 사랑의 서라 해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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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 - 수줍은 마음이 당신의 삶에 노크하는 소리 월간 정여울
정여울 지음 / 천년의상상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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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내 심상(心像)에 빈번하게 떠오르는 것 중의 하나는 어린 시절 흑백TV 앞에서 보았던 몇 몇의 영화장면들이다. 그 중에서도 전쟁의 한 가운데 극히 제한된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애절(哀切)한 사랑, 그리곤 공허함만이 아프고 답답하게 다가오던 마지막 장면으로 기억되는 영화, 사랑할 때와 죽을 때의 그 애틋함인데, 아마 소년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던 모양이다. 결국 영화의 원작인 레마르크의 소설을 펴들고 아주 조금씩 읽어나가기도 했다. 언젠가부터 그 소년의 마음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리워하는 그 마음에 무언가를 채워 넣으려는 소극적인 시도였을 것이다. 작가 정여울의 글에는 이러한 문장이 있다.

나는 우선 당신조차 알지 못하는 그 아픈 무의식의 밑바닥까지 어루만지는 글을 쓰고 싶다. 마침내 당신의 상처 입은 마음 속 깊은 그곳까지 닿을 수 있도록

설혹 그것이 상처인지 아닌지 그저 막연한 결핍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심스러움이 묻어나는 똑똑하는 두드림의 소리에 문을 열면 그곳에는 부드러운 손길을 가진 진솔한 말()이 서있으리라.

 

이렇게 마주하게 된 월간 정여울은 나와의 은밀한 대화가 된다. 내 자신을 향하여 솔직한 삶을 얘기하게 한다. “나에게 부디 낯선 사람이 되지는 말아줘.” 라는 관계의 기적을 말하기 위해 인용된 이 평범한 문장이 모든 관계를 무시하는 듯한 내 오만의 밑바닥에 있는 정말의 목소리가 아닐까하는 의문의 시간이 되고, 그것은 다시금 한쪽이 열릴 때도 한쪽은 늘 닫혀있는 회전문의 비유에서 내가 침전 시켜놓은 마음의 비밀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묻혀있었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비밀이 없으려면 아낌없이 마음을 줘야 한다.” (P56)

 

얼마나 굳게 마음이 닫혀있었는지, 관계에 얼마나 소홀했는지, 얼마나 인색한 마음이었는지를 조용히 가늠해본다. , 인과응보지. 그렇게 닫아걸고는 옛 소년을 그리워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속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소년은 사람들을 많이 사랑했다. 그리고 무한한 사랑을 받았다. 소년에겐 숨길 것이 없었으니까. 정말 자신감이 넘쳤다. 그리고 얼마나 열성적으로 들었던가?

 

표현보다는 수용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보세요.” (P86)

 

나이가 들며 소년의 열성적 듣기가 수그러들긴 했지만 표현보다 수용의 비중이 크다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판단하려 들었던 모양이다. 작가의 지적처럼 좋다, 나쁘다, 괜찮다, 싫다, 라는 판단으로 단절을 만들어냈던 모양이다.

 

판단은 이야기를 끝내는 것이지만 사유는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에요.” (P89)

 

허겁지겁 판단하며 달려왔더니 정말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부터 일 것이다. 그럼에도 외로움이란 것을 알지 못했다. 그것을 부르는 것이 그 단어임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가뭄처럼 쩍쩍 갈라진 메말라버린 심장. 그 목마름을 저 깊은 곳에선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느 하나 버릴 것 없는 눈부신 첫 사랑의 기억을 간직한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의 소년이 지닌 감성, 내가 너무 멀리 도망쳐왔던 것의 실체이리라.

 

그 모든 삶의 기쁨이 오직 당신과 함께 해야만 가능한 눈부신 기적이었음을, 이제야 깨달았으니까.” (P100)

 

작가가 말하는 부사 어쩌면의 용법이 절실하게 다가온다. “주술적 희망의 향기가 묻어나는, “가능성을 탐색하여야 할 여유의 공백을 잃어버리고 있었음을. 아마 소년을 찾는 내 여정에 월간 정여울은 동행할 것이리라.

읽는 이 마다 대화의 내용은 달라지리라. 그럼에도 문을 열면 그 진솔함에 마음을 열지 않을까? “끝내 자신뿐 아니라 타인의 마음 또한 어루만지는 치유자이기를 말하는 작가 정여울과 내밀한 속내를 교환하는 순수한 희열의 시간이 될 수 도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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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저드 베이커리 (크리스마스 에디션 리커버 한정판)
구병모 지음 / 창비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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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쁘게 새로 장정(裝幀)된 작은 책, ‘마법사 빵집(Wizard Bakery)’의 유혹에 꼴까닥 넘어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책을 펴면 발효된 이스트의 냄새, 이른 아침 제과점 앞을 지날 때 후각을 강렬하게 자극하는 그 풍미가 확 밀려든다. 몰입하지 않을 도리가 없지 않은가?

 

열여섯 살 소년이 황급히 도망가고 있다. 비명, 그리고 분노하는 절규의 소리가 그를 집요하게 쫓아온다. 소년은 갓 구운 빵들의 열기로 가득한 가게의 문을 민다. “나 좀 숨겨줘”,

의붓 여동생 무희의 집게손가락이 가리킨 엉뚱하고도 터무니없는 방향이 야기한 누명, 새어머니 배 선생의 분별과 판단의 이성을 상실한 맹목(盲目), 아버지의 무관심에 존재할 곳을 잃은 소년과 빵집은 그렇게 서로의 삶에 연결된다.

 

위저드 베이커리’, 이곳에선 마법이 든 빵들을 판다. 화해 100%의 효력이 있는, 보기 싫은 인간을 떨어내는, 짝사랑을 연인으로 만들어주는 것과 같은 야릇한 이름을 가진 마법의 빵들 - 메이킹 피스 건포도 스콘, 노 땡큐 사브레 쇼콜라, 체인 월넛 프리첼... - 의 주문이 그치지 않는다. 그런데 물품의 상세정보사용시 유의사항을 건성으로 읽어서는 곤란하다.

 

이를테면 사랑을 얻기 위해 짝사랑하는 상대에게 먹이면 효력 있는 체인 월넛 프리첼이것을 사용함으로써 맺어진 인연은 함부로 끊을 수 없다는 점을.....진지하게 고민한 다음 선택해주세요.”라는 유의사항이 있다. 단순히 마법을 파는 빵집이 아니라, 자기 책임과 삶의 진실한 요구가 무엇인지를 숙고하게 하는 그런 영적 사유의 공간이 된다. 순간의 열정, 혹은 분노에 지배당하는 삶의 결정이 수반하는 후회와 번민(煩悶)이라는 고통에 악다구니 부리는 인간들이 스쳐간다. 자기 인식과 삶의 그 심원한 진지함을 생각조차 않는 사람들.

 

자신을 따뜻하게 안아준 위저드 베이커리의 마법사(점장)가 짊어진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몽마(夢魔)를 기꺼이 자신의 꿈으로 안는 용기로부터, 소년은 그의 언어가 목소리가 되어 나오기 불가능 할 만큼의 저 깊은 곳의 상처들, 그 기억들을 비로소 정면으로 마주 한다. 청량리역 에 버려졌던 여섯 살 그 어느 때의 기억, 가죽 띠에 목을 맨 어머니의 잔상들, 오직 자기 영역과 소유에만 관심을 지닌 초등학교 선생인 새어머니의 이기심과 냉담, 그리고 편견과 몽매성, 자기 편의에만 열중하는 아버지의 방관적 무관심들을 현실이라는 불가피적 관계로서 수용한다. “나는 단지 거기 있었을 뿐 인데를 되뇌는 소년의 억울함에서 한 존재에게 가해진 숙명과 현상의 관계에 잠시 시선을 떨구게 된다.

 

아마 이 동화(童話)같은 소설의 깜찍스러움은 급하게 문을 닫아야 하는 빵집의 마지막으로 출력된 주문서 일 것이다. ‘마지팬 부두인형’, 누군가에게 해코지를 하기위한 것, 소년은 도망쳐 나왔던 집을 향해 점장이 만들어준 물품을 들고 나선다. 그가 마주한 패륜(悖倫)적 현장, 칼을 쥐고 그를 향해 달려오는 배 선생, 그리곤 소년의 손에 들린 시간을 되돌릴 마법의 빵인 머랭 쿠키’....,이 때, 우린 시간을 되감아 어떤 과거로 돌아가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 우연이라는 삶의 숙명성을 겸허히 받아들이면 되는 것일까? 우주의 한낱 미물인 존재들이 빚어내는 그 수많은 자기변명들이 초라하게만 느껴진다. 달콤한 향기에 숨겨진 마법의 빵이 어디에선가 팔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작품을 읽는 시간 내내 상처받아 헐떡이는 소년을 품어주던 '위저트 베이커리'의 오븐 속에만 콕 박혀있었으면 하는 느낌이었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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