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배 애도 적대 - 자살과 한국의 죽음정치에 대한 7편의 하드보일드 에세이 서해문집 사회과학 시리즈
천정환 지음 / 서해문집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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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아니라면 산 자들은 삶을 근본적으로 성찰해 낼 방법이 별로 없는데,

죽음이 만연해 있어 무감해져 있는 듯하다. 그래서 이런 책을 낸다.” -머리말에서

 

 

이 머리말은 오늘의 한국사회 구성원들인 대중을 지배하고 있는 마음의 레짐(regime; 인간의 상호관계를 이끄는 가치, 규범의 총합)’에 대한 문제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1990년대까지의 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무수한 저항의 노력 후에 어느 만큼의 성취를 인식하게 됨에 따라 2000년대 이후 오늘에 이르러서 사람들은 인간 해방 이념의 실종과 함께 착취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 사회의 전망(143)”또한 상실했다.

 

이제 인간 유일의 주체적 사유 방식의 원천은 자기계발 따위의 경영학적 신자유주의적 속물성, 즉 경제성과 효율성을 지닌 인간외의 가능성을 상상하지 못하는 그런 시대성에 압도되어있다. 이러한 레짐의 변화는 타자와의 관계를 소멸시키고 그 자리에 성과주의라는 시간의 기획성에 종속시키는 주체들로 들끓게 만들었다. 대중을 이루는 각 개인들은 다른 존재에 대한 연민조차 가질 내면의 공간이 사라지고 있다. 그러니 누군가의 죽음, 하물며 자살이야 일시적 호기심으로서의 쾌락으로 금방 소비되는 스펙터클 이상이 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도덕적 무감증(無感症)을 넘어 조롱하고 희화화하며 잔인성과 무자비한 적대감을 내뿜기까지 한다. 우리는 동료 인간의 죽음이 말하는 것에서 그 어떠한 도덕적 언어도 그것이 환기하려하는 의미에 대한 각성도 하지 못하고 있다. 저자 천정환은 이 사회가 이러한 죽음을 이용하는 두 측면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는 그 죽음을 조롱하고 모욕하며 고립화시켜 마치 존재치 않았던 것처럼 지상의 삶에서 추방하고 배제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 죽음이 야기한 죄의식과 안타까움을 자기연민과 뒤섞어 이용하는 것이다. 왜 우리는 인간 동료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지 못하고 한낱 병적 수준의 욕구만을 드러내게 되었을까?

 

 

어쩌면 이 책은 바로 이 무감해진 우리네 도덕 감각의 전환적 사건이라 부를 수 있는 사건들을 통해 죽음에 보내는 시선인 숭배와 애도, 그리고 적대의 감정에 은폐된 실체를 파헤친다. 그 파헤침의 작업은 숨어버리거나 사라지고 있는 도덕적 감수성을 깨어내고 복원시키고자 하는 노력일 터이다. 그것은 열사(烈士)들의 시대로 부를만한 80~90년대 학생과 노동자의 죽음에서부터, 민주주의가 정착된 시대라는 2000년대에 발생하는 무자비한 정치 폭력에 의한 죽음, 즉 정치적 타살이라 부를 수 있는 자살과 전직 대통령을 비롯한 증오와 복수의 적대가 기획한 죽음들, 그리고 여성 연예인들의 자살을 강요하는 이 사회가 지닌 잔인성의 체제가 야기한 죽음들의 성찰이다.

 

사람을 자살하게 만드는 어두운 힘은 학교, 가족, 이웃이 근거하는 세계에 있다.

이 힘을 조절하고 제어할 수 있는 힘 또한 정치다.“ -8

 

 

A. 열사(烈士)를 양산하던 폭력사회

 

 

80~90년대의 학생들과 노동자들의 자살은 정치적 타살이라 함에 주저치 않으련다. 80년 광주민중항쟁, 87년 시민민주항쟁, 91년 민주투쟁 등을 비롯하여 71년 노동자 전태일 열사의 분신에서부터 헤아릴 수 없는 학생과 노동자들의 죽음은 이 사회의 지배 권력에 저항하다 어떻게도, 아무것도 할 수 없음(40)”이라는 절망적 심리 상태에 몰렸던 긴급하고도 절박한 상태의 토로였다.

 

당대의 시민 대중은 이들 사회적 죽음을 맞이한 동료 인간을 기념하고 기려야 한다는 도덕적 책임감의 언어(45)”로 그들을 열사(烈士)‘로 부르며 자신들의 윤리적 딜레마를 달랬다. 즉 이들의 죽음이 시민을 각성하게 하는 도덕적 각성의 추동력이었음이다. 또한 이 도덕적 책무감의 언어는 일반 자살과는 달리 취급되어야 한다는 복잡다단한 시민적 양심, 죄의식이 시민 대중에 폭넓게 수용되고 확산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정착하기 시작했다는 인식과 함께 신자유주의의 효율성, 경제성에 점령된 2000년대 이후의 사회는 노동자들의 죽음을 70년대 기업주들과 공권력이 일하기 싫어 소란을 피운 깡패(69)”라 악선전하던 퇴행의 언어를 다시 사용하기 시작했다. 201212월 한진중공업 노동자의 자살, 명확한 사회적 타살사건임에도 한국사회를 지배하던 언론 미디어는 잠잠하기만 했다. 다시금 쌍용자동차 노동자 23명의 죽음이 뜻있는 작가들의 르포로 발표되고서야 미약한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조중동 수구 언론기업들은 고작 강성 노조가 노사관계에 해악을 끼쳤다는 악의적 비난의 기사를 게재하며 선동질하는 것이었을 뿐이다.

 

이미 경제적 인간의 가능성 이외의 인간을 생각지 못하는 인간들의 사회는 동료 인간에 대한 연민의 상실을 떠올리지 못한다. 사회 관계망 전체가 성과주의에 식민화(144)”되었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인식능력과 표상을 배분하는 것은 사회 전반의 윤리적 능력이나

이데올로기의 상황에 근거한다."   -144

 

지금의 한국 사람들이 윤리적이라고 부르는 것의 정체는 진정 무엇일까? 공정을 말하지만 그것은 성과주의, 능력주의라는 효율과 경제적 이익, 힘을 지닌 자리로서의 권력 아닌가? 사회 전반의 의식에 속속들이 스며있는 인식의 부패성에 대한 성찰 없음 아니겠는가?


 



B. 억압과 배제 그리고 보복의 정치 참살

 

이 사회에는 강력한 특권과 주류집단의 동맹이 있다. 검찰, 언론, 정당 권력으로 이루어진 이들이 지배하며 그자들의 이데올로기를 지지하고 지원하지 않는 타자는 삶이라는 지상의 영역에서 쫓아내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한다. 속물 권력 절정의 표상이랄 수 있는 2009년 이명박, 오세훈은 폭력 진압으로 용산 재개발 철거민을 극악한 저항에 불가피한 대응이었다는 변으로 참살을 정당화 했다. 이 엘리트의식에 장악된 권위주의적 수구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권력 독점에 방해되는 것에는 오로지 혐오와 적대감만을 투사한다.

 

2009430일은 전직 대통령 노무현을 대검찰청으로 소환한 날이다. 당시 조사를 지휘하던 자가 박근혜 정권의 민정수석이었던 우병우다. 이 정치검찰은 언론에 조사내용을 흘림으로써 조롱하고 모욕한다. 이 지배권력 동맹은 상고출신의 필부 외양을 지닌(180)” 사람에 대한 혐오와 반감, 그리고 공포를 지워버리고 싶어 했다. 모두 같은 대학 출신의 동문들로 이루어진 이들 간교하고 힘센 한국 지배계급 동맹(181)”은 그 경박함과 무례로, 씻기지 않는 모욕으로 정치적 타살을 아주 무감하게 자행했다. 이것이 한국 사회의 버젓한 민낯이다.

 

이후 한국의 지배동맹은 시민적 자발 조문행사를 촛불시위를 벌일지 모른다는 이유로 공권력을 이용해 조문을 방해하고, 분향소 주변 추모행사를 원천 봉쇄했다. 근처에 얼씬하는 사람은 잠재적 반정부 시위대로 간주하여 적대적으로 체포하는 무자비함을 감행했다. 이러한 지배권력 동맹인 언론, 사법(검찰), 수구정당이 강력한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특권 집단이면서 오늘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며, 끊임없이 친노, 친문의 감정정치를 비루한 언어들로 조롱(195)하고 폄훼하며 부도덕성을 감추지도 않고 파렴치함을 행사한다.

 

노동자 출신의 진보 정치인 노회찬이 자살한 다음날 <조선일보>는 그의 죽음 기사 옆에 지면을 가득 채운 환호하는 야구 선수 사진을 실음으로써 죽음마저도 조롱했다. 동료 인간의 죽음에 대한 무감각, 삶과 죽음에 대한 무지, 인간성과 언어 빈곤의 발로(216)”이다. 위악과 관종의 정신 상태, 무자비한 진영논리와 타인을 향한 적대만이 넘실댄다. <뉴욕타임스>노무현의 죽음이 정치 보복에 의한 것이며, 증오와 죽음의 정치가 확대 반복(173)”되리라고 썼다.

 

 

C. 잔인성이 장악한 한국의 사회 현상 - 여성 연예인의 죽음

 

최진실, 장자연, 설리, 구하라...,박지선, 이들은 모두 사회적 잔인성이 행한 타살, 자살이란 형식에 의해 사망한 여성 연예인들이다. 타자의 불행과 고통에서 쾌감을 얻는 인간들, 한국 사회가 이러한 위악성이 만연한 도덕적 불감증을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장자연이란 여성 무명 연예인을 돈과 술수로 파괴했던 간악한 자들, 인간 소비의 잔인한 집단 행위(267)”에 가담한 악인들은 많은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결코 밝혀지지 않았다. 가해자들이 공고하게 구축된 지배 동맹(언론, 검찰)의 일원들이었기에 애초에 찾아낼 수 없었다는 것이 옳은 판단일 것이다.

 

삶의 적나라한 공개를 감수해야했던 이들 연예인의 죽음은 죽어서도 선정적 흥미의 대상으로 소비된다. 흥행성과 이익에 몰두하는 언론 미디어는 관성화되고 무뎌진 도덕적 감각으로 무장하곤 열정적으로 대중의 소비를 부추기며, 타자에 대한 관음적 평가에 놀랍도록 냉정하고 폭력적인 취향에 젖은 대중들은 맞장구치듯 게걸스럽게 소비한다. 그리곤 잊혀 진다. 이윤과 쾌락 추구를 향한 브레이크 없는 이 냉혹한 잔인성(147)”은 대체 어디서 분출되고 있는 것인가? 나인가? 너인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란 대체 무엇인가? 우리의 윤리 의식을 쪼그라들게 만드는 이것으로부터 우린 벗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D. 결어 - 애도와 연민의 확장, 인간성 회복을 위해

 

OECD 회원국 중 독보적인 1위의 자살율을 영광스런 타이틀처럼 고수하는 나라, 이 사회는 옆 자리의 동료가 죽어도, 이웃의 자녀가 죽어도, 하물며 사회를 향한 명확한 메시지를 지닌 사회 정치적 타살에도 무심과 외면, 혐오와 경멸, 조롱과 모욕의 시선을 보내며 즐거워한다. 너무 만연해서 그런 것인가? 일회적, 피상적, 형식적 찰나의 호기심과 함께 증발되어 버린다. 그런데 왜 이 만연한 죽음의 현상을 교정하려 들지 않을까?

 

 

전직 대통령의 죽음을 수준 낮은 풍자로 조롱하며 낄낄거리는 수구 정당 의원들의 부패한 도덕성에서부터 죽음에도 조롱과 조리돌림의 악플을 매다는 패덕(悖德)의 관심종자들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는 성찰성과 도덕적 제약을 상실한 듯하다. 이 사회적 잔인성을 향해 배려와 존중의 문화를 외쳐본들 공허한 울림 이상이 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들은 왜 이렇게 참담한 인간들이 되었을까? 너무도 만연해진 죽음들로 무감해진 것이라고만 말하기에는 지나치게 미흡하다.

 

열사들의 죽음, 대통령의 죽음을 숭배하며 애도하는 것에 그 누가 시비하겠는가? 그러나 시비를 넘어 조롱과 혐오의 적대를 보내기까지 한다. 대중들은 2009523일 대통령의 서거 소식에 못 지켜줘서 미안합니다며 죄의식과 안타까움, 회한의 애도를 발하기 시작했다. 아마 순수한 인간적 연민의 표시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 이 애도의 감정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소환하는 행태들을 보게 되고, 이는 반대 진영이 다시금 폄훼하고 경멸하는 빌미가 되어 한 인간의 죽음을 반복적으로 소비하는 저열한 부도덕을 재생산한다.

 

또한 인지자본주의의 과잉 확장, 점진적으로 확장되고 있는 정신과 육체노동의 간극 확대는 노동에 대한 혐오와 배제를 가속화하고 이제 노동자의 죽음 따위는 더 이상 말해지지 않고 있다. 모든 가치가 물화되며 죽음 역시 그것(it)이라는 혐오의 대상으로만 얘기 될 뿐이다. 정당하게 말해져야 하고, 애도되어야 할 죽음들이 말해질 수 없는 세상이 되도록 조장하는 집단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를 바로잡는 것은 인간의 차별을 금지하는 차별방지법의 제정과 같은 제도적 실행이 될 수도 있으며, 언론에 대한 인권 보호 보도 지침의 엄격한 준수의 요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무소불위의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파렴치한 검찰과 사법 권력의 철저한 개혁이기도 하며, 악플 문화에 대한 적절한 기술적, 법률적 대응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이 사회를 무참하게 지배해온 지배동맹의 해체, 기득권 해체를 요구하는 시민 대중의 강력한 연대이다. 정작 시민 대중의 70~80%를 대변하는 아무런 단체도, 정당도 없는 오늘의 형국이야말로 시급한 시민적 과제이다. 제도와 입법이 시민 대중의 의지가 반영되지 않는 구조적 부패성을 시정해야 한다. 그래야 기득권을 척결 할 수 있다. 이것이 실현 될 때 우리 사회에 깊숙이 스며있는 죽음을 떨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시민의 각성이다. 그래야 적대하는 골 깊은 갈등이 무의미해지는 지대를 우리는 후손들에게 남겨 줄 수 있을 것이다. 시민의 죽음을 잔뜩 머금은 작금의 권력 정치에 우리의 삶을 담보하는 것은 너무 어리석지 않은가?

 

이 책은 한국 사회를 장악한 사회적 타살의 실체를 날카롭게 통찰하여 시민의 잠든 도덕 인식을 깨어나게 하는 사회적, 정치학적 고투이자, 스러져간 동료 인간들에 대한 애도이며 시민대중을 향한 위로이다. 오늘의 우리들과 사회의 정치 현상을 이해하는 귀중한 거울이라 해도 무방하리라.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엘리아스 카네티(Elias Canetti), 군중과 권력, 2010년 바다출판

▲스탠리 코언(Stanley cohen)『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 2009년 창비 

프랑코 비포’ 베라르디(Franco 'Bifo' Berardi)죽음의 스펙터클, 2016년 반비 

수전 손택(Susan Sontag)타인의 고통, 2007년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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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베스 / 양심을 지닌 아킬레스 주제들(THEMEN) 시리즈 5
폴 A. 캔터 지음, 권오숙 옮김 / 에디투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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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들은 그렇게 복음화 되었는가? (Are you so gospell'd)" - 3185

 

 

이 문장은 왕을 시해하고 다시금 왕권에 위협이 되는 동료 귀족 뱅쿠오(Banguo)’를 살해하기위한 암살단을 앞에 두고 '맥베스(Macbeth)'가 묻는 말이다. 셰익스피어를 집중 연구해 온 문학비평가인 버지니아영문학 교수인 A. 켄터는 이 장면을 작품 전체를 이끄는 정신세계라 주장한다.

 

이 극은 위대한 전사들의 사회가 기독교화 됨으로써 일어나는 현상들, 복음화된 스코틀랜드라는 엄청난 역사적 변화의 와중에 있는 나라의 인간정신의 비극적 갈등에 주목했던 셰익스피어의 역사관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반란군을 제압하고 의기양양하게 귀환하던 맥베스와 뱅쿠오는 불현 듯 나타난 마녀들의 예언을 듣게 되는데, 뱅쿠오를 향한 다음과 같은 예언이 맥베스를 괴롭힌 것이다. 왕이 되지는 못하나 후손이 왕이 되리.(1367)” 바로 이 지점이 오늘 이 작품을 소환하여 읽게 되는 동기라 할 수 있다. 한국 사회 또한 국제 지정학적 위협과 4차 산업혁명이라는 직면한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이라는 역사적 대전환의 시기에 놓여있지 않은가?

 

찬탈한 왕위를 불안정하게 할 요소인 뱅코를 제거하기위해 암살단원들에게 온유와 자애로움의 기독교 정신이 혹여 이들의 행동을 저해하는 일이 발생할까를 우려하여 새로운 정신에 대한 경멸을 보내는 것이다. 암살자들은 이에 대해 저희들도 인간(사내)입니다라고 답하지만 맥베스는 인간을 개에 비유하여 서열화한다. 하운드, 그레이하운드, 잡종개, 스파니엘, 똥개, 늑대개가 모두 개라는 이름으로 불리듯이 말일세.(3195)” 옛 전사들의 주변을 둘러보지 않는 잔인한 폭력성을 고결한 영웅적 가치로서, 인내와 평화를 가르치는 기독교는 천한 것이라는 주장을 담고 있다. 비극 맥베스는 이처럼 영웅적 전사의 가치관과 기독교의 절대적 진리 사이에서 갈등(16)”하는 두 가지 삶의 방식에 낀 인간들의 상황을 재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작품의 도입부라 할 수 있는 13장의 마녀들과 맥베스의 조우는 한 인간의 영혼을 적시는 결정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맥베스를 환영하라! 왕이 되실 분이시다.(1350)” 이 예언적 계시(啓示)는 맥베스의 모든 행위의 기초가 된다. 이미 왕 던컨을 살해하여 왕이 되었으니 예언은 실행된 것이다. 그런데 이 인물의 정신세계를 자극하는 것은 기독교의 절대주의 정신이다. 완벽함을 이루고 불멸 영생하는 삶의 성취다. 맥베스가 이해하는 기독교는 지극히 피상적이며 예전과 새로운 것의 나쁜 결합 총체라 할 수 있다.

 

왕을 살해하였을 때 시종들의 기도와 함께 마지막 아멘을 말할 때 맥베스는 이를 이교도의 주문정도로 여기는 것인데, 기독교에서 취할 수 있는 은혜만을 얻고 부과되는 도덕적 요구는 이해하지 못한다. 한 놈이 하나님, 우리를 굽어 살피소서라고 하니 다른 놈이 아멘 하더군. (...) 나는 아멘이라고 말하지 못했소.(2224)” 새로운 정신으로서 기독교를 진정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이 장면은 자신이 주최한 궁정연회에 왕의 자리에 앉아 있는 뱅쿠오의 유령을 보았을 때, 전사들의 야만적 영웅의 시대를 그리워하며 기독교 정신에 대한 혐오의 방백을 주절거린다. 사람이 죽으면 죽은 채로 품위를 지녔던 이교도 시절과 달리 그것들이 다시 일어나 나를 내 의자에서 밀쳐 내는구나.(3481)”


 



이교도의 영웅적 허영심이라는 가치를 놓지 않으면서 한편으론 이를 경멸한다. 기독교에서 배운 영원성에 대한 찬양이다. 맥베스에게 새로운 정신세계의 통합이 굴절되어 내면화되는 것인데, 바람직한 결합의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이교도의 일시성이라는 가치에 경멸을 보내면서 자기 안위와 안전에 대한 집착을 보인다.

 

이는 영웅주의와는 다른 새로운 기독교 환경이 그에게 이미 중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이다. 왕을 살해하고 난 후의 독백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중얼거린다. 그의 서거로 성공을 낚을 수만 있다면, 이 한방이 전부이고 (...) 내세의 삶은 신경 쓰지 않겠다(177)”. 역설적이게도 내세에 대한 삶을 배제하려고 하는 사고방식에 이미 반()기독교적이긴 하지만 기독교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자 이것은 한 인간의 정신적 분열을 의미한다, 기독교를 경멸하면서 기독교도처럼 생각하는 인간을 생각해보라.

 

행동을 주저하게 하는, 그리고 자기 행동의 결과를 마주하지 못하는, 즉 양심과 싸우는 이전의 영웅 전사는 사라지고 심리적 깊이가 자리를 잡는다. 그런데 아이러니는 내세를 부정하면서 내세의 영원한 삶, 완벽하고 무한한 만족적 삶을 그는 이승에서 누리고 싶어 한다. 이 새로운 감정에 터 잡은 소망은 절대행동이라는 사유 없는 즉각적 행동의 실천, 기계적 양상으로 치닫게 한다. 침해당하는 안전 욕구의 불안을 벗어나기 위해 맥베스는 마녀를 찾아 나서 운명의 예언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그는 어둠의 도구인 반()기독교적 존재인 마녀, 달리 표현하면 지상의 일들은 더 높은 차원의 세력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는 믿음(97)”이 내면화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제 자기 운명은 미리 정해진 바에 의하여 실행된다는 믿음은 지상의 도덕이나 양심, 연민과는 무관한 것이 되고 만다. 손바닥의 왕()자처럼 초자연적 신비의 세계에 의존하는 순간, 자제력은 무용해지며 그 어떤 짓도 행할 수 있게 된다. 하늘의 뜻이 자기편이라는 이 맹목적 믿음(狂信)은 잔인성과 폭력성의 무한한 증가로 나타난다.

 

 

이를테면 선의의 가면을 쓰고 사악한 의도를 숨기며, 대리인들을 통해 작업하는 은밀한 행동(99)“, 오늘의 말로하면 공작 정치를 통해 양심의 가책을 피하면서 악행을 반복하는 것이다. 양심으로 균열이 생긴 자신의 영혼을 보호하기 위한 이러한 무의식적 파렴치는 더욱 극단적인 욕망의 노예로 한 인간을 종속시킨다. 14장의 방백은 이의 실체를 보여준다.

 

별들이여 너의 빛을 감추어라! 그 빛이 내 마음 속 깊은 곳의 욕망을 보지 않도록 / 눈이여, 손이 하는 짓을 보지 말지어다. 그러지 아니하면 눈은 손이 행한 걸 보기 두려워 할 것이다.”   - 1450~53

 

 

이것은 극단적 이기주의와 무절제한 폭력으로 이어진다. 자신의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온 세상이 조각나 온 천지가 고통을 겪는 것(3216)”이 낫겠다든가, 나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대의명분도 다 양보할 것(34135)”이라는 것이다, 그에게 자기 욕망에 제동을 거는 것은 모두 제압하고 제거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만이 유일한 진실이다. 이미 초자연적 세력과 연결되어 있다는 오만함은 지상의 모든 것이 고려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는 잔인성과 포악함, 무관심과 부정, 부인, 외면으로 표출된다.

 

이를 치유하는 법에 대한 비상한 대사가 등장하는데, 몽유병에 시달리며 분열적 증세로 죽어가는 맥베스 부인을 본 전의(典醫)가 진단하는 말이다. 자연에 어긋난 행동은 비정상적인 고통을 낳는 법이라며 의사보다는 신()의 도움이 필요(5174)”하다는 것이다. 물론 맥베스는 이 같은 자연의 힘에 기초한 의사에게 경멸의 폭언을 내뱉는다. 자연의 힘 위에 있다고 믿는 자로서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그에게 귀결될 것은 마녀들의 예언이다. 거대한 숲이 언덕 위까지 올라오는 사건이나 여인의 몸에서 출생하지 않은 이가 아니고서는 결코 맥베스는 쓰러지지 않으리라는 예언을 자기 욕망의 귀로만 듣는 것이다. 이 예언의 본질을 생각지 못함으로써 파멸한다.

 

스코틀랜드의 이 전사의 비극은 오늘의 인간 사회에서 벌어질 비극을 예시한다. 역사적 전환기란 갈등, 충돌하는 정신세계가 첨예하게 대립되는 시기이다. 지금 우리 사회 또한 수구 기득권과 새로운 민주적 가치가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다. 손바닥에 왕자를 쓰고 시민을 개로 표현하는 인물이 타인을 종속, 굴복시키는 힘으로서의 통치권만을 탐하려한다. 한껏 영웅주의의 포만감에 휩싸여 주변의 고통과 신음소리에 귀 기울이지 못하는 것은 곧 폭력과 잔인성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자기 파멸의 길이다. 맥베스란 인간을 통해 오늘 우리들이 직시하여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신중히 생각하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작품이다


【민음사 2021.12.10 간행 알라딘 특별에디션, 셰익스피어 비극 세트-햄릿,오셀로,맥베스,리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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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
시몬 베유 지음, 이종영 옮김 / 리시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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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마르크스주의적 독트린은 존재하는가라는 두 편의 평설로 묶여있습니다. 초월적 신비로서 은총을 말하는 '시몬 베유'의 종교적 이상주의에는 공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회구조를 규정하는 체계를 오로지 힘의 관계로만, 힘이 전부인 양 간주하기 시작한 지금 이 세계에 대한 비판적 환기의 글이라는 점에서 이 두 평설은 힘이 야기하는 인간 삶에서의 본질적 모순을 각성하게 돕고 있는 탁월한 주장이라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1. 마르크스 유물론의 곡해

 

우선 초월적 공산주의를 주창했던 푸르동에 경도되어있던 시몬 베유의 마르크스에 대한 비판론인 마르크스주의적 독트린은 존재하는가를 간략하게 언급하고 넘어가야 겠습니다. 19세기 물리학을 이해하는 세몬 베유의 관점은 마르크스가 "부동의 사물을 다루듯 사람을 연구(70)"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원자의 심리적 등가물'로 이해했다는 것이죠. 마르크스는 이러한 물리학적 과학주의에 토대를 둔 과학적 사회주의자라는 것입니다. 베유는 마르크스의 박사학위 논문을 알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결정론적 원자론을 비판하고 비결정론적 원자론으로서 '마주침의 유물론'은 굴종하지 않는 유물론이라는 것을.

 

인간의 사회적 관계에 이같은 "천박한 과학주의를 덧씌웠다(70)"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물론 철학자 '강신주'가 그의 역작인 철학 VS 실천에서 마르크스주의로 포장한 엥겔스의 왜곡을 비난했듯 시몬 베유 또한 "지적으로 열등했던 엥겔스가 불모의 것으로 만들었음(70)"을 잘 알고 있는 듯합니다. 그럼에도 베유는 이 유물론자 마르크스는 인간을, ()을 만들어내는 기계처럼 물질로 바라 볼 수밖에 없음으로서 맹목적 인 힘, 필연성에 종속시켜, 존재 자체가 선의 추구인 인간 삶과 본질적 모순을 안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물질처럼 힘의 관계를 인간 삶의 전부로 인식하는 순간 악마적 이론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자기 철학을 '인간주의''자연주의'라고 불렀습니다.(강신주 , 철학 VS 실천』 「정치철학 3453쪽 참조) 신이나 세계를 초월하는 초자연적 신비주의자인 푸르동이나 시몬 베유와 같은 관념론적 형이상학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억압체제인 '(권력)'을 대상화하여 저항하는 '대상적 활동'을 긍정하는 철저한 인간주의자였습니다.

 

시몬 베유는 이것을 전도하여 왜곡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그 누구보다 힘의 속성을 깊이 읽고 있었으며, 곡해된 낡아빠진 유물론자가 아니었습니다. '감각-운동' 을 반복을 하는 신체를 가진 인간으로서 감각을 통해 물결의 특이점들과 결합하는 존재로서 말이죠. 또한 '들뢰즈'차이와 반복에서 얘기하듯 다른 것, 차이를 포함하는 반복으로서의 유기체, 다양한 기호들을 발산하는 인간을 말한 것입니다. 힘의 굴레, 그 적대적 한계성을 비판하려한 시몬 베유의 의지가 비뚤어진 자기애로 흘러간 듯싶습니다. 다만 '힘의 굴레'를 역설하기 위한 베유의 열정적 의도를 알기에는 충분한 비평이라 하고 싶습니다.

 




2. 놀라운 공평함의 미학 일리아드(Iliade)에 대하여 ; 힘과 영혼 관계의 대서사시

 

이제 힘을 주제로 한 서사시로서 그리스 정신의 최고라 찬미한 시몬 베유의 첫 번째 평설인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를 보아야겠습니다. 짧지만 강력한 이 글은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또는 일리아스(Iliade)를 전쟁 영웅의 찬가로, 그 야만적 폭력성에 대한 예찬으로 이해했던 저의 편협한 독서의 이해를 벗어나 폭력, 근원으로서의 힘에 내재한 자기 굴레의 한계를 성찰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 글이라 해야 하겠습니다. 한편으론 힘의 의지를 주장한 니체와 베유가 한 자리에서 대담을 했다면 어떠했을까? 라는 상상을 해보게도 되는 양단의 상념을 갖게되는 비평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지금도 힘에 도취해 분별을 망각한 저 정신적 유아상태의 인물과 그 주변의 기회주의적 정치배들의 행태를 보면서 호메로스가 통찰한 '힘의 본성'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다음과 같은 힘의 효과를 꿰뚫는 시선입니다. "힘과 접촉하면, 힘의 불가피한 효과 아래 놓이고, 접촉하는 모든 것의 입을 막거나 귀를 멀게 해버리는 효과(47)"를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이 속성은 지금 대선 정국에서 한국사회의 모든 영혼들을 점령하고, 충동에 불과한 눈먼 힘으로 전락한 인간들이 벌이는 흡사 전쟁과 같은 폭력적 언어의 무참한 난무로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지요.

 

시몬 베유는 '일리아스'가 시종 힘이란 무엇인지 알려주려 한다고 쓰고 있습니다. "사람을 종속시키고, 그 앞에 서면 움츠러드는 힘(8)"이죠. 힘은 문자그대로 사람을 사물로 만듭니다. 아킬레우스의 칼에 죽음을 맞이하고 전차 끝에 끌려가는 헥토르의 시신을 우리는 떠 올릴 수 있습니다. 호메로스는 끊임없이 이러한 이미지를 제시하며 힘에 대한 깨달음을 촉구하지요. 거기에는 영웅도, 영광도, 그 어떤 불멸성도 존재하지 않는 무의미한 하나의 물질만이 쓰라리게 남지요. 힘이란 그런 것이랍니다.

 

"힘은 자신에게 종속된 사람을 사물로 만들어 버립니다. 끝까지 행사되는 힘은 (...) 사람을 시체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잠시후엔 아무도 없습니다."

- 9

 

힘은 그 자체로 파멸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힘을 소유했거나 그렇다고 믿는 인간은 다른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짓밟는 꼭 그만큼 힘에 도취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진정 영원한 힘을 지닐 수는 없습니다. 결국 언젠가는 힘 앞에 무릎을 꿇게되죠. 아킬레우스도, 아가멤논도, 하물며 한 때 트로이아의 적장자였던 헥토르도 왕 프리아모스도 모두 힘 앞에 고개를 떨굽니다. 무적의 오만한 아킬레우스도 아가멤논에게 여인을 빼앗기며 모욕과 무력한 고통을 주는 능욕감에 고통스러워합니다. 하지만 고작 며칠 뒤에 아가멤논 역시 헥토르에게 치욕의 두려움으로 몸을 떱니다. 서사시의 전개 내내 이같은 힘의 교대적 이동이 시소처럼 공평하게 나타납니다.

 

이들은 힘이 영원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사회적 관계는 불균형한 힘들의 균형에 따른 것일 뿐이라는 걸 이들은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주변을 돌아보는 역량을 가지지 못합니다. 여기서 호메로스, 그리스인들의 '기하학적 엄밀성, 미덕의 배움'이라는 네메시스(응보의 여신)적 징벌이 등장합니다.즉 힘의 남용에 대한 처단이라는 균형의 명상들이죠. 결국 이 전쟁에서는 그 누구도 승자나 패자가 아닙니다. 헥토르를 죽인 아킬레우스의 기쁨도 순간일 뿐이지요, 토로이아를 멸망시킨 아가멤논의 아카이오족의 기쁨 역시 찰라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힘이란 것은 무엇일까요? 힘이라는 위세는 약자에 대한 방약한 무관심을 내포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무관심은 전염성이 강해 위세의 정치집단은 힘이라는 과잉의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곤 합니다. 힘의 절제된 사용은 인간적 속성을 넘어서려는 미덕을 지녀야만 벗어날 수 있는 거랍니다. 아킬레우스는 죽음을 무릅쓴 용맹한 전사입니다. 그는 살려는 열망을 스스로 지워버린 존재입니다. 그러니 그 앞의 적군에 관용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무참한 살해의 힘만이 넘실댑니다. 결코 자신의 심정을 넘어서지 못하니 다른 인간의 생명에 대한 존중이 깃들 여지가 없습니다. 호메로스의 모든 전사들이 이런 역량이 없어요.

 

그래서 일리아드(Iliade)에는 힘만이 넘실댑니다. 결국 호메로스는 전쟁의 최종적 비밀은 눈먼 힘과 그 앞의 수동적 물질화한 대상 사이에 벌어지는 충동일 뿐이라 드러냅니다. 힘과 사물화의 단조로운 그림뿐이죠. 이 서시시의 분위기는 내내 슬픔에 젖어 있습니다. 파괴된 것에 대한 아픔, 전투에 희생되는 자들의 고통을 누구하나 소외됨 없이 감추지 않고 드러냅니다. , 폭력이 소멸시키고 파괴한 것들에 대한 비통함에 대한 절절한 체감을 요구합니다. 승자와 패자도 모두 똑같은 자격을 지닌 인간으로서.

 

아마 이 서사시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토로이아도 그리스의 누구도 힘에 무릎을 꿇습니다. 아무도 이 힘의 영역에서 빠져나오지 못하죠. 그렇다고 호메로스는 이들에게 경멸의 시선을 보내지 않습니다. 호메로스는 이렇게 묻습니다. 힘에의 종속, 물질에의 종속이라는 필멸의 이러한 속성에서 인간의 영혼이 갖춰야 할 미덕이 무엇인가?라고. 차가운 잔혹함 속에서 드러나는 이 힘은 사용하는 자나 이로인해 고통받는 자 모두 재난에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인간적 처참성에 이 같은 감수성으로 우리는 자신과 분리된 타자에 대한 동정심, 사랑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몬 베유는 이를 통해 사랑할 수 있고 정의로울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합니다. "힘의 제국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하며, 힘의 제국을 존중하지 않을 줄 알아야 한다(61)"고 말이죠. 오늘 우리는 과연 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적들을 증오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불행한 사람들을 멸시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시몬 베유의 이 마지막 물음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영혼에게 숙고할 이유를 웅변적으로 들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인처럼 자신을 속이지 않는 영혼을 복원해 낼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들은 사회에 만연한 이 힘의 위세가 보이는 오만과 무도함을 무력하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오직 힘, 권력의 교체만을 부르짖는 힘의 소유만을 탐하려는 인간과 그 무리들이 태생적으로 결코 알 수 없는 것들 때문에 답답한 가슴을 부여잡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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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단상은 창작과 비평2021 겨울호(통권 194)에 게재된 식인 자본주의 부상이라는 제하의 낸시 프레이저와 마르띤 모스께라의 대담 내용에 대한 소회임을 밝혀둡니다.

 


정치 철학자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칼 마르크스'의 사회적 인과성은 경제적 토대로부터 법적 ,정치적 상부구조로 흘러가는 것이라는 '토대-상부구조(base-superstructure)'에서 경제적 토대에 비경제적 배경 조건까지 포함하는 확장된 시스템을 주장한다. 자본주의란 경제적 토대만으로 작동하는 시스템이 아니라는 것이다. 경제적 하위 시스템과 그 가능성의 필수적 배경조건인 "사회적 재생산, 비인간 자연, 공공재화 등등(369)"과의 관계성을 사유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A. 자본주의 토대 개념의 확장 필요

 

이 필수적 배경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은 작동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노동 인간을 유지하기 위해서 공식적 경제 바깥에서 새로운 세대를 낳고, 돌보고, 사회화하고, 교육하는 일과 같이 경제적 토대에 편입되지 못한 이 비경제적 조건은 의심할 수 없는 자본주의의 토대이다. 이것이 부재하다면 사회적 재생산은 불가능해질 것이다. 코로나19'비인간 자연'이라는 비경제적 조건이 전체 경제 시스템을 얼마나 수축시켰는지, 자본주의적 질서에 대한 회의를 얼마나 불러 일으켰는지에 대한 훌륭한 사례가 될 것이다. 이같이 배재하였던 생태적 기능 장애가 자본주의 경제와의 인과적 역동성을 가지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이러한 반론이 가능할 것이다. 자연 같은 비경제적 영역을 조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점이야말로 본디 자본주의적 특성아닌가?라고. 따라서 이러한 하위 시스템은 자본주의 토대에서 배제하여도 언제든 마음대로 사용, 통제할 수 있다는 자만이이 있다. 낸시 프레이저는 "한계 없이 자본을 축적하고, 가치를 팽창시키려는 절대적 강박(370)"을 내재하고 있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비경제적 조건들을 의지대로 굴복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녔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생태적 재생산의 시간성은 자본주의 토대아래 있지 않은 것(371)"처럼 이들의 능력은 결코 절대적이지 않음을 설명하고 있다.

 

물론 자본은 개별 인간의 의지보다 강하고 자본의 가치를 스스로 확장하도록 동기화되어 있어 '자본 의지'를 관철한다. 그리고 자본 배경 조건을 이 의지에 의해 변경시키고 말테지만 역시 한계 내에서만 가능할 뿐이다. 결국 자본주의 경제적 토대에서 소외된 개별 인간과 비인간 자연이 자본 의지의 작동을 제어할 수 있는 동력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시켜준다.

 


B. 자본주의 위기를 이해하는 방식

 

지구 온난화, 생태위기는 이미 오랜 기간 조짐을 드러내왔을뿐아니라 생생하게 감지되고 있는 실상임에도 자본주의는 그 토대인 비경제적 필수 조건을 외면하거나 눈에 보이는 것, 감각되는 것에만 미봉책으로 나서곤 했다. 즉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의 위기, 전 지구적인 총체적 위기로 감지하지 않는 것이다. 낸시 프레이저의 토대확장 이론은 바로 이 지점을 시정하는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코로나19가 드러낸 돌봄 노동의 실태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필요 노동시간과 에너지를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 임금을 잡아먹는 것을 우리들이 목격하게 하였다. 부유계층(의사들의 정부의 의료 공공정책에 대한 반항)에 제압당해 시민을 향한 중대 정책이 좌절되는 모습을 무력하게 지켜보아야 하기도 했다. 거버넌스 위기다! "마치 전이되는 암처럼 도처에 전체 사회조직이 압도당할 때까지 인구 집단에 고통을 가하게 될 것(373)"이다. 위기는 '발전적 위기''획기적 위기'로 구분되기도 하는데, 발전적 위기란 특정한 축적 체계나 단계에 국한하여 현안 위기에 대한 문제 해결이라는 땜질식 처방의 이해이며, 획기적 위기란 모든 단계와 총체적 현실 자체에 모순이 내재하고 있어 시스템이 위기의 경향을 품고 있다는 관점이다.

 

전 지구로 확산된 미국 발 금융대란이 발생하자 파생금융 상품에 대한 무분별성이라는 특정 문제만이 원인이라 보고 잠정적 문제 해결을 끝냈다고 판단하는 것이 작금의 행태이다. 결코 근본적 모순은 전혀 해소되지 않은 채 축적과 이윤추구를 향한 강박적 욕망이라는 무분별한 자본 의지만이 작동하고 있다. 낸시 프레이저는 파국적 위기를 겁박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예견되는 파국을 회피하고 인류의 해방적 시나리오를 향한 행동을 만들어내기 위한 숙고이자 각성의 요청이며, 획기적 위기 인식으로의 전환 요구이다.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자본주의 가치법칙을 폐지하고, 착취와 탈취를 종식시키며, 민주적 계획과 시장간 의 관계를 재발명할 수 있다. 한편 서로 적대하는 독재자들, 전 지구적 권위 체제하의 막대한 사회적 퇴행을 볼 수 도 있을 것이다. 인간적이라는 것들이 남아나지 않을 때까지 사회가 스스로를 파괴하는 위기 지속의 가능 속에서 살아 갈수도 있다. 지금이라도 노동권, 녹색 환경 운동가들, 돌봄과 젠더 투쟁에 참여하는 사람들, 권위주의적 기득권에 맞서는 이들이 연대해야 한다. 모두 자본주의 필수 배경인 토대이다. 다양한 이해들을 하나의 통일된 주체로 규합하는 정치적 과제를 위해 모여야 한다. 전체주의적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지만, 포퓰리즘은 이미 보수 우파가 선점해서 사용하고 있다. 그 성격은 전혀 같지 않은 상태로서.

 

C. 삶의 문법을 만드는 힘을 누가 가졌는가?

 

포퓰리즘은 대중 선동적이라는 의미를 씌우는 이들이 누구인가? 우파가 선점한 포퓰리즘과 구분되는 좌파 포퓰리즘은 절대 필요하다. 우파는 인간 집단을 삼분하여 대중적 우위를 점하려 한다. 피 빨아먹는 엘리트, 기생하는 하층 집단. 그리고 이 둘 사이에 선량한 사람들로 나누어 적들을 특징적이고 실체적 용어로 정체성 정치를 벌인다. 예를들어 실업급여 수급자를 비난하기 위해 '게으른 실업자', 퀴어 집단을 분열시키기 위해 '동성애 음모집단'으로 부르는 식이다. 낙인을 찍어 경계에서 배제하는 악의적 포퓰리즘 정치이다.

 

반면 좌파 포퓰리즘은 방대한 다수인 인민 대중과 이들로부터 막대한 부를 빼앗아 축적하는 소수의 과두 기득권 집단으로 구분하는 이분법을 취한다. 즉 시스템 내의 역할이라는 기능적 정의를 통해 사회적 진실에 접근하는 포퓰리즘이다. "누가 누구의 목을 밟고 있는지 사회적 위계 지도가 분명해 질 것(378)"이다. 우파의 정체성주의 포퓰리즘은 집단과 계층을 분열시켜 자기 기득권을 항상적으로 유지하려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좌파가 우파의 포퓰리즘과 싸우기 위해서는 투쟁과정에서 시스템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떻게 조작되고 사용되고 있으며, 그 영향이 어떻게 파급되어 대중적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에 대해 교육시킬 수 있는지 자문해야 한다.

 

'칼 폴라니(Karl Polanyi)'는 계급투쟁을 확장하여 '경계투쟁'을 주장했다. 투쟁이 그저 잉여가치의 분배방식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무엇이 우리네 삶의 문법을 결정하는 가'의 물음이었다. "자연, 공공재, 규제 역량, 정치적이라 간주하는 법 형식을 둘러싼 투쟁 또한 자본주의 시스템 핵심을 둘러싼 투쟁(383)"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공동체에서 자본이 마음대로 행동하게 되는지 알아야 한다.

 

일례로써 법인세 감면 법안의 입법 제의가 있었다고 하자. 여기서 우리는 물어야 한다. 누가 삶의 문법을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는가?하고. "이 질문이 정치적 의제에서 은밀히 제거되고 몰래 자본과 축적을 책임지는 이들에게 맡겨(384)"진다면 악당에게 총칼을 쥐어주는 것 아닌가? 경계투쟁이란 사회적 문법이 조직되는 방식에 대한 헤게모니 선점의 싸움인 것이다. 연대해야 한다. 삶의 문법을 만드는 이들은 방대한 대중이어야 한다. 자기 집단을 분열시키는 세력을 지지해서는 진정 악당들을 꺾을 수 없다. 논쟁적인 이 담론은 오늘 우리 대중들에게 포스트 자본주의, 민주적 생태 사회주의를 향한 새로운 체제를 사유케 하는 귀중한 출발점이 되어 줄 것이다.

 

 

참조: 식인 자본주의(cannibal capitalism)

 

미국 뉴스쿨 정치철학 교수인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가 자본주의가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을 침범함으로써 생존조건을 파괴할 수 있다는 전망 하에 자본주의의 임박한 재앙에 명명한 개념이다.   국역본은 <좌파의 길>로 번역되어 2023. 2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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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유럽 선언 - 만국의 시민이여, 연대하라
콜린 크라우치 지음, 박상준 옮김 / 페이퍼로드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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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적 시민권은 체제의 자비로움이 베푼 것이 아니다. 인간적 삶, 사회가 필요로 하기에 성취된 것이다. 인간다운 삶을 보호하기 위한 기본 소득(시민 소득)은 시민권의 정당한 자격이지 복지 동냥이 아닌 것이다." - 106~107쪽 발췌 인용

 

바로 지금 한국 정치권에서는 기본소득의 지급 여부와 관련하여 논쟁적 갈등이 첨예하다. 수구집단들과 신자유주의자들은 마치 기본소득을 자신들이 베풀지 말지를 결정할 권한이 있는 것처럼 주장한다. 저자 '콜린 크라우치'의 지적처럼 '복지 동냥'이라 이해하는 이러한 착오적 망상에는 시민의 헌법적 권리와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과 훼손의 저의가 스며있다. 바로 이것이 이 책이 선언하려는 '사회적 유럽'으로의 복귀를 막고 있는 이기심과 혐오에 터 잡은 탐욕의 민낯이다.

 

'사회적 유럽'이란 "급진적 재발명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복지국가 전략 강화(16)"의 의미를 지닌다. 모든 걸 시장(市場)의 논리로, 즉 시장이 인간사를 지배하여야 한다는 교리를 신봉하는 신자유주의의 세계화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어, 사리사욕에 집착하고 분배 요구를 외면하며 불평등 증가를 기업가 정신의 보상이라고 까지 하는 반동적 수구성으로 퇴화하는 세계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이다.

 

A. 코로나 팬데믹이 알려준 교훈들 - 인간사회의 상호의존성

 

COVID-19가 지구촌을 휩쓸며 우리에게 인상 깊은 현상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줬다. 이 재앙적 전염병이 창궐하자 "경시받고 심지어 혐오와 경멸을 당하던 간병인, 쓰레기 수거인, 보안 요원, 배달 기사 등 저임금 노동자들이 맡은 중요한 역할(15)"이 드러났다. 사람들의 가치를 시장에서의 성과로 평가하는 사회질서의 부도덕성에 대한 깨달음이다. 또한 우파 포퓰리즘 세력이 집권한 미국, 영국,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일본, 브라질 등이 방역에 실패한 주요 국가였으며, 시장이 모든 걸 지배케 한 결과로 방호 장구, 인공호흡기, 기타 의료 제재에 대한 대량 수요 조달의 실패는 물론 진단과 병상 연계의 혼란으로 사회적 약자들을 무참하게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리곤 강력한 국경, 자급자족 사회로의 회귀 등 인종적 계급적 차별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고 협력과 공유를 위한 요청들을 배제하기 시작했다.

 

이에 더해 백신 투입이 이루어지고 집단 면역 형성의 시기가 가까워오자 다시금 재분배 정의, 노동및 인권에 대한 제고, 지구 온난화 등 환경 대처 조치 등을 언제였더냐는 식으로 내던져 버리고 수익성(성장) 논리를 앞세워 기업과 부자들의 세금 감면 정책을 흔들기 시작하고 있다. "소비자, 노동자, 일반 대중의 이익을 자신들 주주를 위한 이윤 우선의 정언명령에 종속시켜야 한다(24)"고 주장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우리는 향후 수십 년 동안 우리 삶을 구체화할 선택이 이루어지는 역사적 순간들 중 하나에 서 있다." - 서문 중에서

 

COVID-19가 인간 사회의 상호의존이라는 가치를 각성케 하였음에도 보수주의와 신자유주의자들은 인간 협력 영역의 확장을 노골적으로 거부하며, 구성원 간(계층 간)의 차별과 혐오를 부추기며 반()평등주의와 계급()주의와 인종주의를 부르짖고 있다. 이 보수주의와 반평등주의의 냉소적 동맹으로 이루어진 한국의 수구세력은 인간 행동의 매우 강력한 동기인 이기심과 혐오의 감정을 노골적으로 자극 옹호함으로써 대중을 효과적으로 흔들어 대고 있다. 오늘 우리 일반 대중들은 선택의 갈림 길에 있다. 선린 의식과 상호의존성의 가치, 불평등 해소의 절박감인지, 아니면 사회적 배제의 강화, 시장 이익의 극대화를 향한 경쟁과 탈규제가 초래하는 극단적 양극화의 세계인지를.

 

"Better together, Hope not hate (함께하면 더 좋고, 혐오가 아닌 희망으로)"

 

B. '사회적'이라는 의미 - 복지 국가 전략을 위해서

 

이 책의 표제인 유럽을 수식하고 있는 '사회적'이라는 의미가 모두(冒頭)에서 언급하였듯이 '복지 국가 전략'으로서의 의미임은 물론이거니와 역사적으로 새길 필요가 있다. 유럽연합(EU)1993년 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 조약 사회적 장(Social Chapter)에서 "사회적 유럽 건설을 목표"로 하였으며, 20171117EU의 대표기관인 유럽위원회는 스웨덴 예테보리에서 '유럽 사회권 기둥(European Pillar of Social Rights)'으로 "기회 균등, 노동 시장 평등 접근, 공정 노동 조건, 사회 보장 등" 사회적 기본원칙을 선언 했으며, EU 회원국 정상들의 모임인 유럽이사회는 다시금 포용과 협력의 사회적 유럽 건설을 확인하였다.

 

이렇듯 책의 표제인 '사회적 유럽'이란 표현은 이미 유럽연합 회원국(EU)들에게는 그네들이 지향하는 사회에 대한 합의의 언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를 코로나 팬데믹이 한창인 오늘 거듭 선언하는 이유는 이들 앞선 조약과 선언을 거부하고 포퓰리즘에 의한 퇴행적 그림자가 유럽을 뒤덮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의 힘이 지배하는 세계에는 인간적 삶이 들어 설 자리가 없어진다. 이기심과 혐오가 지배하는 세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대중의 도덕적 합의가 부정되는 세계는 인간 삶의 걷잡을 수 없는 파괴가 따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회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이 선언의 실천 과제는 무엇이어야 할까? 우리들은 어느 정책 집단에 투표를 해야 하나? 무엇이 진정 국민 대중의 삶을 위한 선택이어야 할까?

 

콜린 크라우치는 이를 방해하는, 즉 경제 권력이 인간의 행복을 위해 사용되는 것과 세계화를 인간의 통제 아래 두려는 도전을 가로 막는 장애물의 제거를 통해 사회적 민주주의가 실현 될 수 있으리라 역설하고 있다. 특히 신자유주의와 인종, 계급주의로서의 차별과 배제 이데올로기인 민족주의를 인간적 삶을 파괴하는 두 망령(유령)으로 지목하고, 그 실천 방안으로 세계화의 개혁, 금융 자본의 규제, 물질적 불평등 감소를 위한 노동자들의 안전한 삶에 대한 요구와 조화 등을 설명하고 있다. 이들 유럽연합의 회원국들과 같이 한국 사회 역시 이미 "구조적으로 결정된 친()시장 성향"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정치적 현상들 또한 그리 다르지 않기에 오늘 한국의 시민 대중에게 이들 실천 과제의 설명은 중대한 시사점을 안겨준다.

 

C. 멈출 수 없는 시장 확대와 세계화 추구, 그리고 공공성의 내재화를 위해

 

크라우치는 세계화를 중단하고 국경을 걸어 잠그자거나 시장 메커니즘을 부정하고 시장 억제 정책을 옹호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장 범위의 적극적 확대라는 세계화를 추구하며, 광범위한 시장 추구를 주장하기까지 한다. 다만, 이미 드러났듯이 시장 자체만으로 인간 삶, 사회 안전망에 뚤려 있는 수많은 틈을 메꾸지 못하기에 공공 정책으로서 기반시설(운송망-물리적인 것, 직업 훈련-인간적인 것)과 효율적 규제의 리드가 필요하며, 적극적 정책 개발을 통해 세계화를 인간의 통제아래 둘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는 상충하는듯 보이는 시장 규제와 광범위한 시장 추구를 통한 경제의 효율적 작동을 어떻게 추구할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아마 이를 위한 실천 방안으로써 "기술적 토론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논의 과제로 격상되어 제안"되는 '표준 설정'은 시장 범위의 효율적 규제와 시장 우위확보를 동시에 아우르는 돋보이는 안목이라 하겠다. 기업들은 자신들의 기술 표준으로 시장 우위 선점을 경쟁한다. 자신의 상품과 서비스가 국제 표준을 확보한다는 것은 자기의 규범이 시장 규칙이 됨으로서 지배적 우위를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표준 설정'은 여기에 내부 품질 표준, 노동 환경 품질 표준을 추가하여 더 강력한 표준 설정 제도를 국제 규범화하자는 것이다. 표준 설정 자체에 인간 삶의 안정성과 환경 보호 규제가 내재되어 시장의 자율적 움직임에 억제와 간섭을 최소화할 수 있으리라는 발상이다. 이러한 권위를 지닌 표준 설정은 기업이 규제에 취약하지 않게 되며, 표준 달성을 위한 가격 상승은 자원의 효율적 사용과 기술 개발을 촉진하는 등 상품, 서비스 생산의 새로운 가치 창출의 기회를 이끌기도 한다. 해양 환경 규제에 따라 디젤 추진 선박에서 LNG추진 선박으로 선박건조 주문이 이동함에 따라 기술을 선점한 한국조선업체가 시장 지배자가 된 것이나. 내연기관에서 전기 배터리로 이전하는 자동차 설계, 제조부문의 표준을 선점하는 것은 이의 좋은 사례라 할 것이다.

 

이에 더해 표준 설정은 규제가 낮은 곳으로 이동하려는 산업투자를 억제 할 수 있으며, 산업 노동자의 지위를 안정적으로 보장하는 데 기여하기도 한다. 즉 확장된 상품, 서비스 표준 설정은 부정적 제재가 아니라 시장이 결여하고 있던 공공성을 내재시켜 차원 높은 시장 제도가 될 수 있다.

 

"이기심과 배제의 호소들은 단순하고 쉽지만 어둡고 사나운 목적지로 이어질 뿐이다. 협력과 포용에 대한 요구들은 더 부담되지만, 그것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더 큰 궁극적인 보상을 가져다준다." -125

 

COVID 팬데믹은 배제와 차별, 불평등의 구조를 더욱 극명하게 드러냈다. 능력주의라는 허구적 발상에 뿌리박고 도덕적 외피를 입은 가치는 불평등의 정상화라는 기이한 현상을 고착화시키고 있다. 2 기계시대로의 급속한 진행은 플랫폼 노동과 같은 합법적 노동착취의 토대가 되고, 노동자들은 가변적이고 불안정한 노동 형태로 내몰릴 뿐이다. 그마저도 많은 일자리의 소멸이 가속화되고 있다. 이처럼 극단적 취약 상태에 노출된 불안정 노동자가 증가하고 있을 때 사회는 이들에게 더욱 관대해 질 필요가 있다. 그것이 인간 사회가 마땅히 취할 의무가 될 것이다.

 

그러나 한국 보수 집단은 실업수당 지급자격을 까다롭게 하여 그 규모를 줄이려고 친기업적인 황색신문들을 동원한 프로파간다로 왜곡, 보편적 복지의 취지에 역행하려한다. 프레카리아트(precariat)가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다. 노동 현장은 월 단위 계약에서 최장 1년 계약을 통해 쉬운 고용과 해고라는 노동수급의 유연성만이 활용되고 있는 현실이다. 5년 내 3회 이상 실업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실업급여 수급을 제한한다는 발상은 1년에도 수차례 일자리에서 퇴출당하여야 하는 열악한 노동자들을 사지로 내모는 악행이 되고 만다. 이러한 상황에 약삭빠르고 게을러빠진 인간들이란 굴레를 씌우는 자본축적의 탐욕에 눈 먼 자들의 편협성은 폭력과 다르지 않음을 인식하여야 한다.

 

이기심과 배제와 혐오의 세계가 아니라 포용과 협력, 모든 인간이 좋은 삶을 함께하는 세계를 위한 길은 항상 열려 있다. 이 길을 선택하는 것은 시민 대중의 몫이다. 지배 기득권자의 시선이 아니라 다수의 대중적 시선, 수많은 노동자의 시선으로 세계를 볼 수 있을 때, '사회적' 가치가 우리들을 보호할 수 있다. 시장도, 세계화도 모두 인간의 행복을 위한 수단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책은 바로 그 길을 밟아나가게 해주는 안내자이자 조언자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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