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유럽 선언 - 만국의 시민이여, 연대하라
콜린 크라우치 지음, 박상준 옮김 / 페이퍼로드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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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적 시민권은 체제의 자비로움이 베푼 것이 아니다. 인간적 삶, 사회가 필요로 하기에 성취된 것이다. 인간다운 삶을 보호하기 위한 기본 소득(시민 소득)은 시민권의 정당한 자격이지 복지 동냥이 아닌 것이다." - 106~107쪽 발췌 인용

 

바로 지금 한국 정치권에서는 기본소득의 지급 여부와 관련하여 논쟁적 갈등이 첨예하다. 수구집단들과 신자유주의자들은 마치 기본소득을 자신들이 베풀지 말지를 결정할 권한이 있는 것처럼 주장한다. 저자 '콜린 크라우치'의 지적처럼 '복지 동냥'이라 이해하는 이러한 착오적 망상에는 시민의 헌법적 권리와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과 훼손의 저의가 스며있다. 바로 이것이 이 책이 선언하려는 '사회적 유럽'으로의 복귀를 막고 있는 이기심과 혐오에 터 잡은 탐욕의 민낯이다.

 

'사회적 유럽'이란 "급진적 재발명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복지국가 전략 강화(16)"의 의미를 지닌다. 모든 걸 시장(市場)의 논리로, 즉 시장이 인간사를 지배하여야 한다는 교리를 신봉하는 신자유주의의 세계화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어, 사리사욕에 집착하고 분배 요구를 외면하며 불평등 증가를 기업가 정신의 보상이라고 까지 하는 반동적 수구성으로 퇴화하는 세계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이다.

 

A. 코로나 팬데믹이 알려준 교훈들 - 인간사회의 상호의존성

 

COVID-19가 지구촌을 휩쓸며 우리에게 인상 깊은 현상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줬다. 이 재앙적 전염병이 창궐하자 "경시받고 심지어 혐오와 경멸을 당하던 간병인, 쓰레기 수거인, 보안 요원, 배달 기사 등 저임금 노동자들이 맡은 중요한 역할(15)"이 드러났다. 사람들의 가치를 시장에서의 성과로 평가하는 사회질서의 부도덕성에 대한 깨달음이다. 또한 우파 포퓰리즘 세력이 집권한 미국, 영국,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일본, 브라질 등이 방역에 실패한 주요 국가였으며, 시장이 모든 걸 지배케 한 결과로 방호 장구, 인공호흡기, 기타 의료 제재에 대한 대량 수요 조달의 실패는 물론 진단과 병상 연계의 혼란으로 사회적 약자들을 무참하게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리곤 강력한 국경, 자급자족 사회로의 회귀 등 인종적 계급적 차별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고 협력과 공유를 위한 요청들을 배제하기 시작했다.

 

이에 더해 백신 투입이 이루어지고 집단 면역 형성의 시기가 가까워오자 다시금 재분배 정의, 노동및 인권에 대한 제고, 지구 온난화 등 환경 대처 조치 등을 언제였더냐는 식으로 내던져 버리고 수익성(성장) 논리를 앞세워 기업과 부자들의 세금 감면 정책을 흔들기 시작하고 있다. "소비자, 노동자, 일반 대중의 이익을 자신들 주주를 위한 이윤 우선의 정언명령에 종속시켜야 한다(24)"고 주장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우리는 향후 수십 년 동안 우리 삶을 구체화할 선택이 이루어지는 역사적 순간들 중 하나에 서 있다." - 서문 중에서

 

COVID-19가 인간 사회의 상호의존이라는 가치를 각성케 하였음에도 보수주의와 신자유주의자들은 인간 협력 영역의 확장을 노골적으로 거부하며, 구성원 간(계층 간)의 차별과 혐오를 부추기며 반()평등주의와 계급()주의와 인종주의를 부르짖고 있다. 이 보수주의와 반평등주의의 냉소적 동맹으로 이루어진 한국의 수구세력은 인간 행동의 매우 강력한 동기인 이기심과 혐오의 감정을 노골적으로 자극 옹호함으로써 대중을 효과적으로 흔들어 대고 있다. 오늘 우리 일반 대중들은 선택의 갈림 길에 있다. 선린 의식과 상호의존성의 가치, 불평등 해소의 절박감인지, 아니면 사회적 배제의 강화, 시장 이익의 극대화를 향한 경쟁과 탈규제가 초래하는 극단적 양극화의 세계인지를.

 

"Better together, Hope not hate (함께하면 더 좋고, 혐오가 아닌 희망으로)"

 

B. '사회적'이라는 의미 - 복지 국가 전략을 위해서

 

이 책의 표제인 유럽을 수식하고 있는 '사회적'이라는 의미가 모두(冒頭)에서 언급하였듯이 '복지 국가 전략'으로서의 의미임은 물론이거니와 역사적으로 새길 필요가 있다. 유럽연합(EU)1993년 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 조약 사회적 장(Social Chapter)에서 "사회적 유럽 건설을 목표"로 하였으며, 20171117EU의 대표기관인 유럽위원회는 스웨덴 예테보리에서 '유럽 사회권 기둥(European Pillar of Social Rights)'으로 "기회 균등, 노동 시장 평등 접근, 공정 노동 조건, 사회 보장 등" 사회적 기본원칙을 선언 했으며, EU 회원국 정상들의 모임인 유럽이사회는 다시금 포용과 협력의 사회적 유럽 건설을 확인하였다.

 

이렇듯 책의 표제인 '사회적 유럽'이란 표현은 이미 유럽연합 회원국(EU)들에게는 그네들이 지향하는 사회에 대한 합의의 언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를 코로나 팬데믹이 한창인 오늘 거듭 선언하는 이유는 이들 앞선 조약과 선언을 거부하고 포퓰리즘에 의한 퇴행적 그림자가 유럽을 뒤덮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의 힘이 지배하는 세계에는 인간적 삶이 들어 설 자리가 없어진다. 이기심과 혐오가 지배하는 세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대중의 도덕적 합의가 부정되는 세계는 인간 삶의 걷잡을 수 없는 파괴가 따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회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이 선언의 실천 과제는 무엇이어야 할까? 우리들은 어느 정책 집단에 투표를 해야 하나? 무엇이 진정 국민 대중의 삶을 위한 선택이어야 할까?

 

콜린 크라우치는 이를 방해하는, 즉 경제 권력이 인간의 행복을 위해 사용되는 것과 세계화를 인간의 통제 아래 두려는 도전을 가로 막는 장애물의 제거를 통해 사회적 민주주의가 실현 될 수 있으리라 역설하고 있다. 특히 신자유주의와 인종, 계급주의로서의 차별과 배제 이데올로기인 민족주의를 인간적 삶을 파괴하는 두 망령(유령)으로 지목하고, 그 실천 방안으로 세계화의 개혁, 금융 자본의 규제, 물질적 불평등 감소를 위한 노동자들의 안전한 삶에 대한 요구와 조화 등을 설명하고 있다. 이들 유럽연합의 회원국들과 같이 한국 사회 역시 이미 "구조적으로 결정된 친()시장 성향"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정치적 현상들 또한 그리 다르지 않기에 오늘 한국의 시민 대중에게 이들 실천 과제의 설명은 중대한 시사점을 안겨준다.

 

C. 멈출 수 없는 시장 확대와 세계화 추구, 그리고 공공성의 내재화를 위해

 

크라우치는 세계화를 중단하고 국경을 걸어 잠그자거나 시장 메커니즘을 부정하고 시장 억제 정책을 옹호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장 범위의 적극적 확대라는 세계화를 추구하며, 광범위한 시장 추구를 주장하기까지 한다. 다만, 이미 드러났듯이 시장 자체만으로 인간 삶, 사회 안전망에 뚤려 있는 수많은 틈을 메꾸지 못하기에 공공 정책으로서 기반시설(운송망-물리적인 것, 직업 훈련-인간적인 것)과 효율적 규제의 리드가 필요하며, 적극적 정책 개발을 통해 세계화를 인간의 통제아래 둘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는 상충하는듯 보이는 시장 규제와 광범위한 시장 추구를 통한 경제의 효율적 작동을 어떻게 추구할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아마 이를 위한 실천 방안으로써 "기술적 토론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논의 과제로 격상되어 제안"되는 '표준 설정'은 시장 범위의 효율적 규제와 시장 우위확보를 동시에 아우르는 돋보이는 안목이라 하겠다. 기업들은 자신들의 기술 표준으로 시장 우위 선점을 경쟁한다. 자신의 상품과 서비스가 국제 표준을 확보한다는 것은 자기의 규범이 시장 규칙이 됨으로서 지배적 우위를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표준 설정'은 여기에 내부 품질 표준, 노동 환경 품질 표준을 추가하여 더 강력한 표준 설정 제도를 국제 규범화하자는 것이다. 표준 설정 자체에 인간 삶의 안정성과 환경 보호 규제가 내재되어 시장의 자율적 움직임에 억제와 간섭을 최소화할 수 있으리라는 발상이다. 이러한 권위를 지닌 표준 설정은 기업이 규제에 취약하지 않게 되며, 표준 달성을 위한 가격 상승은 자원의 효율적 사용과 기술 개발을 촉진하는 등 상품, 서비스 생산의 새로운 가치 창출의 기회를 이끌기도 한다. 해양 환경 규제에 따라 디젤 추진 선박에서 LNG추진 선박으로 선박건조 주문이 이동함에 따라 기술을 선점한 한국조선업체가 시장 지배자가 된 것이나. 내연기관에서 전기 배터리로 이전하는 자동차 설계, 제조부문의 표준을 선점하는 것은 이의 좋은 사례라 할 것이다.

 

이에 더해 표준 설정은 규제가 낮은 곳으로 이동하려는 산업투자를 억제 할 수 있으며, 산업 노동자의 지위를 안정적으로 보장하는 데 기여하기도 한다. 즉 확장된 상품, 서비스 표준 설정은 부정적 제재가 아니라 시장이 결여하고 있던 공공성을 내재시켜 차원 높은 시장 제도가 될 수 있다.

 

"이기심과 배제의 호소들은 단순하고 쉽지만 어둡고 사나운 목적지로 이어질 뿐이다. 협력과 포용에 대한 요구들은 더 부담되지만, 그것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더 큰 궁극적인 보상을 가져다준다." -125

 

COVID 팬데믹은 배제와 차별, 불평등의 구조를 더욱 극명하게 드러냈다. 능력주의라는 허구적 발상에 뿌리박고 도덕적 외피를 입은 가치는 불평등의 정상화라는 기이한 현상을 고착화시키고 있다. 2 기계시대로의 급속한 진행은 플랫폼 노동과 같은 합법적 노동착취의 토대가 되고, 노동자들은 가변적이고 불안정한 노동 형태로 내몰릴 뿐이다. 그마저도 많은 일자리의 소멸이 가속화되고 있다. 이처럼 극단적 취약 상태에 노출된 불안정 노동자가 증가하고 있을 때 사회는 이들에게 더욱 관대해 질 필요가 있다. 그것이 인간 사회가 마땅히 취할 의무가 될 것이다.

 

그러나 한국 보수 집단은 실업수당 지급자격을 까다롭게 하여 그 규모를 줄이려고 친기업적인 황색신문들을 동원한 프로파간다로 왜곡, 보편적 복지의 취지에 역행하려한다. 프레카리아트(precariat)가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다. 노동 현장은 월 단위 계약에서 최장 1년 계약을 통해 쉬운 고용과 해고라는 노동수급의 유연성만이 활용되고 있는 현실이다. 5년 내 3회 이상 실업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실업급여 수급을 제한한다는 발상은 1년에도 수차례 일자리에서 퇴출당하여야 하는 열악한 노동자들을 사지로 내모는 악행이 되고 만다. 이러한 상황에 약삭빠르고 게을러빠진 인간들이란 굴레를 씌우는 자본축적의 탐욕에 눈 먼 자들의 편협성은 폭력과 다르지 않음을 인식하여야 한다.

 

이기심과 배제와 혐오의 세계가 아니라 포용과 협력, 모든 인간이 좋은 삶을 함께하는 세계를 위한 길은 항상 열려 있다. 이 길을 선택하는 것은 시민 대중의 몫이다. 지배 기득권자의 시선이 아니라 다수의 대중적 시선, 수많은 노동자의 시선으로 세계를 볼 수 있을 때, '사회적' 가치가 우리들을 보호할 수 있다. 시장도, 세계화도 모두 인간의 행복을 위한 수단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책은 바로 그 길을 밟아나가게 해주는 안내자이자 조언자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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