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
시몬 베유 지음, 이종영 옮김 / 리시올 / 202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마르크스주의적 독트린은 존재하는가라는 두 편의 평설로 묶여있습니다. 초월적 신비로서 은총을 말하는 '시몬 베유'의 종교적 이상주의에는 공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회구조를 규정하는 체계를 오로지 힘의 관계로만, 힘이 전부인 양 간주하기 시작한 지금 이 세계에 대한 비판적 환기의 글이라는 점에서 이 두 평설은 힘이 야기하는 인간 삶에서의 본질적 모순을 각성하게 돕고 있는 탁월한 주장이라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1. 마르크스 유물론의 곡해

 

우선 초월적 공산주의를 주창했던 푸르동에 경도되어있던 시몬 베유의 마르크스에 대한 비판론인 마르크스주의적 독트린은 존재하는가를 간략하게 언급하고 넘어가야 겠습니다. 19세기 물리학을 이해하는 세몬 베유의 관점은 마르크스가 "부동의 사물을 다루듯 사람을 연구(70)"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원자의 심리적 등가물'로 이해했다는 것이죠. 마르크스는 이러한 물리학적 과학주의에 토대를 둔 과학적 사회주의자라는 것입니다. 베유는 마르크스의 박사학위 논문을 알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결정론적 원자론을 비판하고 비결정론적 원자론으로서 '마주침의 유물론'은 굴종하지 않는 유물론이라는 것을.

 

인간의 사회적 관계에 이같은 "천박한 과학주의를 덧씌웠다(70)"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물론 철학자 '강신주'가 그의 역작인 철학 VS 실천에서 마르크스주의로 포장한 엥겔스의 왜곡을 비난했듯 시몬 베유 또한 "지적으로 열등했던 엥겔스가 불모의 것으로 만들었음(70)"을 잘 알고 있는 듯합니다. 그럼에도 베유는 이 유물론자 마르크스는 인간을, ()을 만들어내는 기계처럼 물질로 바라 볼 수밖에 없음으로서 맹목적 인 힘, 필연성에 종속시켜, 존재 자체가 선의 추구인 인간 삶과 본질적 모순을 안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물질처럼 힘의 관계를 인간 삶의 전부로 인식하는 순간 악마적 이론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자기 철학을 '인간주의''자연주의'라고 불렀습니다.(강신주 , 철학 VS 실천』 「정치철학 3453쪽 참조) 신이나 세계를 초월하는 초자연적 신비주의자인 푸르동이나 시몬 베유와 같은 관념론적 형이상학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억압체제인 '(권력)'을 대상화하여 저항하는 '대상적 활동'을 긍정하는 철저한 인간주의자였습니다.

 

시몬 베유는 이것을 전도하여 왜곡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그 누구보다 힘의 속성을 깊이 읽고 있었으며, 곡해된 낡아빠진 유물론자가 아니었습니다. '감각-운동' 을 반복을 하는 신체를 가진 인간으로서 감각을 통해 물결의 특이점들과 결합하는 존재로서 말이죠. 또한 '들뢰즈'차이와 반복에서 얘기하듯 다른 것, 차이를 포함하는 반복으로서의 유기체, 다양한 기호들을 발산하는 인간을 말한 것입니다. 힘의 굴레, 그 적대적 한계성을 비판하려한 시몬 베유의 의지가 비뚤어진 자기애로 흘러간 듯싶습니다. 다만 '힘의 굴레'를 역설하기 위한 베유의 열정적 의도를 알기에는 충분한 비평이라 하고 싶습니다.

 




2. 놀라운 공평함의 미학 일리아드(Iliade)에 대하여 ; 힘과 영혼 관계의 대서사시

 

이제 힘을 주제로 한 서사시로서 그리스 정신의 최고라 찬미한 시몬 베유의 첫 번째 평설인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를 보아야겠습니다. 짧지만 강력한 이 글은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또는 일리아스(Iliade)를 전쟁 영웅의 찬가로, 그 야만적 폭력성에 대한 예찬으로 이해했던 저의 편협한 독서의 이해를 벗어나 폭력, 근원으로서의 힘에 내재한 자기 굴레의 한계를 성찰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 글이라 해야 하겠습니다. 한편으론 힘의 의지를 주장한 니체와 베유가 한 자리에서 대담을 했다면 어떠했을까? 라는 상상을 해보게도 되는 양단의 상념을 갖게되는 비평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지금도 힘에 도취해 분별을 망각한 저 정신적 유아상태의 인물과 그 주변의 기회주의적 정치배들의 행태를 보면서 호메로스가 통찰한 '힘의 본성'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다음과 같은 힘의 효과를 꿰뚫는 시선입니다. "힘과 접촉하면, 힘의 불가피한 효과 아래 놓이고, 접촉하는 모든 것의 입을 막거나 귀를 멀게 해버리는 효과(47)"를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이 속성은 지금 대선 정국에서 한국사회의 모든 영혼들을 점령하고, 충동에 불과한 눈먼 힘으로 전락한 인간들이 벌이는 흡사 전쟁과 같은 폭력적 언어의 무참한 난무로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지요.

 

시몬 베유는 '일리아스'가 시종 힘이란 무엇인지 알려주려 한다고 쓰고 있습니다. "사람을 종속시키고, 그 앞에 서면 움츠러드는 힘(8)"이죠. 힘은 문자그대로 사람을 사물로 만듭니다. 아킬레우스의 칼에 죽음을 맞이하고 전차 끝에 끌려가는 헥토르의 시신을 우리는 떠 올릴 수 있습니다. 호메로스는 끊임없이 이러한 이미지를 제시하며 힘에 대한 깨달음을 촉구하지요. 거기에는 영웅도, 영광도, 그 어떤 불멸성도 존재하지 않는 무의미한 하나의 물질만이 쓰라리게 남지요. 힘이란 그런 것이랍니다.

 

"힘은 자신에게 종속된 사람을 사물로 만들어 버립니다. 끝까지 행사되는 힘은 (...) 사람을 시체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잠시후엔 아무도 없습니다."

- 9

 

힘은 그 자체로 파멸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힘을 소유했거나 그렇다고 믿는 인간은 다른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짓밟는 꼭 그만큼 힘에 도취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진정 영원한 힘을 지닐 수는 없습니다. 결국 언젠가는 힘 앞에 무릎을 꿇게되죠. 아킬레우스도, 아가멤논도, 하물며 한 때 트로이아의 적장자였던 헥토르도 왕 프리아모스도 모두 힘 앞에 고개를 떨굽니다. 무적의 오만한 아킬레우스도 아가멤논에게 여인을 빼앗기며 모욕과 무력한 고통을 주는 능욕감에 고통스러워합니다. 하지만 고작 며칠 뒤에 아가멤논 역시 헥토르에게 치욕의 두려움으로 몸을 떱니다. 서사시의 전개 내내 이같은 힘의 교대적 이동이 시소처럼 공평하게 나타납니다.

 

이들은 힘이 영원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사회적 관계는 불균형한 힘들의 균형에 따른 것일 뿐이라는 걸 이들은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주변을 돌아보는 역량을 가지지 못합니다. 여기서 호메로스, 그리스인들의 '기하학적 엄밀성, 미덕의 배움'이라는 네메시스(응보의 여신)적 징벌이 등장합니다.즉 힘의 남용에 대한 처단이라는 균형의 명상들이죠. 결국 이 전쟁에서는 그 누구도 승자나 패자가 아닙니다. 헥토르를 죽인 아킬레우스의 기쁨도 순간일 뿐이지요, 토로이아를 멸망시킨 아가멤논의 아카이오족의 기쁨 역시 찰라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힘이란 것은 무엇일까요? 힘이라는 위세는 약자에 대한 방약한 무관심을 내포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무관심은 전염성이 강해 위세의 정치집단은 힘이라는 과잉의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곤 합니다. 힘의 절제된 사용은 인간적 속성을 넘어서려는 미덕을 지녀야만 벗어날 수 있는 거랍니다. 아킬레우스는 죽음을 무릅쓴 용맹한 전사입니다. 그는 살려는 열망을 스스로 지워버린 존재입니다. 그러니 그 앞의 적군에 관용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무참한 살해의 힘만이 넘실댑니다. 결코 자신의 심정을 넘어서지 못하니 다른 인간의 생명에 대한 존중이 깃들 여지가 없습니다. 호메로스의 모든 전사들이 이런 역량이 없어요.

 

그래서 일리아드(Iliade)에는 힘만이 넘실댑니다. 결국 호메로스는 전쟁의 최종적 비밀은 눈먼 힘과 그 앞의 수동적 물질화한 대상 사이에 벌어지는 충동일 뿐이라 드러냅니다. 힘과 사물화의 단조로운 그림뿐이죠. 이 서시시의 분위기는 내내 슬픔에 젖어 있습니다. 파괴된 것에 대한 아픔, 전투에 희생되는 자들의 고통을 누구하나 소외됨 없이 감추지 않고 드러냅니다. , 폭력이 소멸시키고 파괴한 것들에 대한 비통함에 대한 절절한 체감을 요구합니다. 승자와 패자도 모두 똑같은 자격을 지닌 인간으로서.

 

아마 이 서사시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토로이아도 그리스의 누구도 힘에 무릎을 꿇습니다. 아무도 이 힘의 영역에서 빠져나오지 못하죠. 그렇다고 호메로스는 이들에게 경멸의 시선을 보내지 않습니다. 호메로스는 이렇게 묻습니다. 힘에의 종속, 물질에의 종속이라는 필멸의 이러한 속성에서 인간의 영혼이 갖춰야 할 미덕이 무엇인가?라고. 차가운 잔혹함 속에서 드러나는 이 힘은 사용하는 자나 이로인해 고통받는 자 모두 재난에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인간적 처참성에 이 같은 감수성으로 우리는 자신과 분리된 타자에 대한 동정심, 사랑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몬 베유는 이를 통해 사랑할 수 있고 정의로울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합니다. "힘의 제국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하며, 힘의 제국을 존중하지 않을 줄 알아야 한다(61)"고 말이죠. 오늘 우리는 과연 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적들을 증오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불행한 사람들을 멸시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시몬 베유의 이 마지막 물음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영혼에게 숙고할 이유를 웅변적으로 들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인처럼 자신을 속이지 않는 영혼을 복원해 낼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들은 사회에 만연한 이 힘의 위세가 보이는 오만과 무도함을 무력하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오직 힘, 권력의 교체만을 부르짖는 힘의 소유만을 탐하려는 인간과 그 무리들이 태생적으로 결코 알 수 없는 것들 때문에 답답한 가슴을 부여잡게 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