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숭배 애도 적대 - 자살과 한국의 죽음정치에 대한 7편의 하드보일드 에세이 ㅣ 서해문집 사회과학 시리즈
천정환 지음 / 서해문집 / 2021년 12월
평점 :
“죽음이 아니라면 산 자들은 삶을 근본적으로 성찰해 낼 방법이 별로 없는데,
죽음이 만연해 있어 무감해져 있는 듯하다. 그래서 이런 책을 낸다.” -머리말에서
이 머리말은 오늘의 한국사회 구성원들인 대중을 지배하고 있는 ‘마음의 레짐(regime; 인간의 상호관계를 이끄는 가치, 규범의 총합)’에 대한 문제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1990년대까지의 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무수한 저항의 노력 후에 어느 만큼의 성취를 인식하게 됨에 따라 2000년대 이후 오늘에 이르러서 사람들은 “인간 해방 이념의 실종과 함께 착취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 사회의 전망(143쪽)”또한 상실했다.
이제 인간 유일의 주체적 사유 방식의 원천은 자기계발 따위의 경영학적 신자유주의적 속물성, 즉 경제성과 효율성을 지닌 인간외의 가능성을 상상하지 못하는 그런 시대성에 압도되어있다. 이러한 레짐의 변화는 타자와의 관계를 소멸시키고 그 자리에 성과주의라는 시간의 기획성에 종속시키는 주체들로 들끓게 만들었다. 대중을 이루는 각 개인들은 다른 존재에 대한 연민조차 가질 내면의 공간이 사라지고 있다. 그러니 누군가의 죽음, 하물며 자살이야 일시적 호기심으로서의 쾌락으로 금방 소비되는 스펙터클 이상이 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도덕적 무감증(無感症)을 넘어 조롱하고 희화화하며 잔인성과 무자비한 적대감을 내뿜기까지 한다. 우리는 동료 인간의 죽음이 말하는 것에서 그 어떠한 도덕적 언어도 그것이 환기하려하는 의미에 대한 각성도 하지 못하고 있다. 저자 천정환은 이 사회가 이러한 죽음을 이용하는 두 측면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는 그 죽음을 조롱하고 모욕하며 고립화시켜 마치 존재치 않았던 것처럼 지상의 삶에서 추방하고 배제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 죽음이 야기한 죄의식과 안타까움을 자기연민과 뒤섞어 이용하는 것이다. 왜 우리는 인간 동료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지 못하고 한낱 병적 수준의 욕구만을 드러내게 되었을까?
어쩌면 이 책은 바로 이 무감해진 우리네 도덕 감각의 전환적 사건이라 부를 수 있는 사건들을 통해 죽음에 보내는 시선인 ‘숭배와 애도, 그리고 적대의 감정’에 은폐된 실체를 파헤친다. 그 파헤침의 작업은 숨어버리거나 사라지고 있는 도덕적 감수성을 깨어내고 복원시키고자 하는 노력일 터이다. 그것은 열사(烈士)들의 시대로 부를만한 80~90년대 학생과 노동자의 죽음에서부터, 민주주의가 정착된 시대라는 2000년대에 발생하는 무자비한 정치 폭력에 의한 죽음, 즉 정치적 타살이라 부를 수 있는 자살과 전직 대통령을 비롯한 증오와 복수의 적대가 기획한 죽음들, 그리고 여성 연예인들의 자살을 강요하는 이 사회가 지닌 잔인성의 체제가 야기한 죽음들의 성찰이다.
“사람을 자살하게 만드는 어두운 힘은 학교, 가족, 이웃이 근거하는 세계에 있다.
이 힘을 조절하고 제어할 수 있는 힘 또한 정치다.“ -8쪽
A. 열사(烈士)를 양산하던 폭력사회
80~90년대의 학생들과 노동자들의 자살은 정치적 타살이라 함에 주저치 않으련다. 80년 광주민중항쟁, 87년 시민민주항쟁, 91년 민주투쟁 등을 비롯하여 71년 노동자 전태일 열사의 분신에서부터 헤아릴 수 없는 학생과 노동자들의 죽음은 이 사회의 지배 권력에 저항하다 “어떻게도, 아무것도 할 수 없음(40쪽)”이라는 “절망적 심리 상태에 몰렸던 긴급하고도 절박한 상태의 토로”였다.
당대의 시민 대중은 이들 “사회적 죽음을 맞이한 동료 인간을 기념하고 기려야 한다는 도덕적 책임감‘의 언어(45쪽)”로 그들을 ’열사(烈士)‘로 부르며 자신들의 윤리적 딜레마를 달랬다. 즉 이들의 죽음이 시민을 각성하게 하는 도덕적 각성의 추동력이었음이다. 또한 이 도덕적 책무감의 언어는 일반 자살과는 달리 취급되어야 한다는 복잡다단한 시민적 양심, 죄의식이 시민 대중에 폭넓게 수용되고 확산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정착하기 시작했다는 인식과 함께 신자유주의의 효율성, 경제성에 점령된 2000년대 이후의 사회는 노동자들의 죽음을 70년대 기업주들과 공권력이 “일하기 싫어 소란을 피운 깡패(69쪽)”라 악선전하던 퇴행의 언어를 다시 사용하기 시작했다. 2012년 12월 한진중공업 노동자의 자살, 명확한 사회적 타살사건임에도 한국사회를 지배하던 언론 미디어는 잠잠하기만 했다. 다시금 쌍용자동차 노동자 23명의 죽음이 뜻있는 작가들의 르포로 발표되고서야 미약한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조중동 수구 언론기업들은 고작 강성 노조가 노사관계에 해악을 끼쳤다는 악의적 비난의 기사를 게재하며 선동질하는 것이었을 뿐이다.
이미 경제적 인간의 가능성 이외의 인간을 생각지 못하는 인간들의 사회는 동료 인간에 대한 연민의 상실을 떠올리지 못한다. “사회 관계망 전체가 성과주의에 식민화(144쪽)”되었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인식능력과 표상을 배분하는 것은 사회 전반의 윤리적 능력이나
이데올로기의 상황에 근거한다." -144쪽
지금의 한국 사람들이 윤리적이라고 부르는 것의 정체는 진정 무엇일까? 공정을 말하지만 그것은 성과주의, 능력주의라는 효율과 경제적 이익, 힘을 지닌 자리로서의 권력 아닌가? 사회 전반의 의식에 속속들이 스며있는 인식의 부패성에 대한 성찰 없음 아니겠는가?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1/1227/pimg_7290341033248881.jpg)
B. 억압과 배제 그리고 보복의 정치 참살
이 사회에는 강력한 특권과 주류집단의 동맹이 있다. 검찰, 언론, 정당 권력으로 이루어진 이들이 지배하며 그자들의 이데올로기를 지지하고 지원하지 않는 타자는 삶이라는 지상의 영역에서 쫓아내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한다. 속물 권력 절정의 표상이랄 수 있는 2009년 이명박, 오세훈은 폭력 진압으로 용산 재개발 철거민을 ‘극악한 저항에 불가피한 대응’이었다는 변으로 참살을 정당화 했다. 이 엘리트의식에 장악된 권위주의적 수구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권력 독점에 방해되는 것에는 오로지 혐오와 적대감만을 투사한다.
2009년 4월 30일은 전직 대통령 노무현을 대검찰청으로 소환한 날이다. 당시 조사를 지휘하던 자가 박근혜 정권의 민정수석이었던 우병우다. 이 정치검찰은 언론에 조사내용을 흘림으로써 조롱하고 모욕한다. 이 지배권력 동맹은 “상고출신의 필부 외양을 지닌(180쪽)” 사람에 대한 혐오와 반감, 그리고 공포를 지워버리고 싶어 했다. 모두 같은 대학 출신의 동문들로 이루어진 이들 간교하고 힘센 한국 지배계급 동맹(181쪽)”은 그 경박함과 무례로, 씻기지 않는 모욕으로 정치적 타살을 아주 무감하게 자행했다. 이것이 한국 사회의 버젓한 민낯이다.
이후 한국의 지배동맹은 시민적 자발 조문행사를 촛불시위를 벌일지 모른다는 이유로 공권력을 이용해 조문을 방해하고, 분향소 주변 추모행사를 원천 봉쇄했다. 근처에 얼씬하는 사람은 잠재적 반정부 시위대로 간주하여 적대적으로 체포하는 무자비함을 감행했다. 이러한 지배권력 동맹인 언론, 사법(검찰), 수구정당이 “강력한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특권 집단이면서 오늘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며, 끊임없이 “친노, 친문의 감정정치를 비루한 언어들로 조롱(195쪽)”하고 폄훼하며 부도덕성을 감추지도 않고 파렴치함을 행사한다.
노동자 출신의 진보 정치인 노회찬이 자살한 다음날 <조선일보>는 그의 죽음 기사 옆에 지면을 가득 채운 환호하는 야구 선수 사진을 실음으로써 죽음마저도 조롱했다. “동료 인간의 죽음에 대한 무감각, 삶과 죽음에 대한 무지, 인간성과 언어 빈곤의 발로(216쪽)”이다. 위악과 관종의 정신 상태, 무자비한 진영논리와 타인을 향한 적대만이 넘실댄다. <뉴욕타임스>는 “노무현의 죽음이 정치 보복에 의한 것이며, 증오와 죽음의 정치가 확대 반복(173쪽)”되리라고 썼다.
C. 잔인성이 장악한 한국의 사회 현상 - 여성 연예인의 죽음
최진실, 장자연, 설리, 구하라...,박지선, 이들은 모두 사회적 잔인성이 행한 타살, 자살이란 형식에 의해 사망한 여성 연예인들이다. 타자의 불행과 고통에서 쾌감을 얻는 인간들, 한국 사회가 이러한 위악성이 만연한 도덕적 불감증을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장자연이란 여성 무명 연예인을 돈과 술수로 파괴했던 간악한 자들, “인간 소비의 잔인한 집단 행위(267쪽)”에 가담한 악인들은 많은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결코 밝혀지지 않았다. 가해자들이 공고하게 구축된 지배 동맹(언론, 검찰)의 일원들이었기에 애초에 찾아낼 수 없었다는 것이 옳은 판단일 것이다.
삶의 적나라한 공개를 감수해야했던 이들 연예인의 죽음은 죽어서도 선정적 흥미의 대상으로 소비된다. 흥행성과 이익에 몰두하는 언론 미디어는 관성화되고 무뎌진 도덕적 감각으로 무장하곤 열정적으로 대중의 소비를 부추기며, 타자에 대한 관음적 평가에 놀랍도록 냉정하고 폭력적인 취향에 젖은 대중들은 맞장구치듯 게걸스럽게 소비한다. 그리곤 잊혀 진다. 이윤과 쾌락 추구를 향한 “브레이크 없는 이 냉혹한 잔인성(147쪽)”은 대체 어디서 분출되고 있는 것인가? 나인가? 너인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란 대체 무엇인가? 우리의 윤리 의식을 쪼그라들게 만드는 이것으로부터 우린 벗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D. 결어 - 애도와 연민의 확장, 인간성 회복을 위해
OECD 회원국 중 독보적인 1위의 자살율을 영광스런 타이틀처럼 고수하는 나라, 이 사회는 옆 자리의 동료가 죽어도, 이웃의 자녀가 죽어도, 하물며 사회를 향한 명확한 메시지를 지닌 사회 정치적 타살에도 무심과 외면, 혐오와 경멸, 조롱과 모욕의 시선을 보내며 즐거워한다. 너무 만연해서 그런 것인가? 일회적, 피상적, 형식적 찰나의 호기심과 함께 증발되어 버린다. 그런데 왜 이 만연한 죽음의 현상을 교정하려 들지 않을까?
전직 대통령의 죽음을 수준 낮은 풍자로 조롱하며 낄낄거리는 수구 정당 의원들의 부패한 도덕성에서부터 죽음에도 조롱과 조리돌림의 악플을 매다는 패덕(悖德)의 관심종자들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는 성찰성과 도덕적 제약을 상실한 듯하다. 이 사회적 잔인성을 향해 배려와 존중의 문화를 외쳐본들 공허한 울림 이상이 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들은 왜 이렇게 참담한 인간들이 되었을까? 너무도 만연해진 죽음들로 무감해진 것이라고만 말하기에는 지나치게 미흡하다.
열사들의 죽음, 대통령의 죽음을 숭배하며 애도하는 것에 그 누가 시비하겠는가? 그러나 시비를 넘어 조롱과 혐오의 적대를 보내기까지 한다. 대중들은 2009년 5월 23일 대통령의 서거 소식에 ‘못 지켜줘서 미안합니다’며 죄의식과 안타까움, 회한의 애도를 발하기 시작했다. 아마 순수한 인간적 연민의 표시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 이 애도의 감정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소환하는 행태들을 보게 되고, 이는 반대 진영이 다시금 폄훼하고 경멸하는 빌미가 되어 한 인간의 죽음을 반복적으로 소비하는 저열한 부도덕을 재생산한다.
또한 인지자본주의의 과잉 확장, 점진적으로 확장되고 있는 정신과 육체노동의 간극 확대는 노동에 대한 혐오와 배제를 가속화하고 이제 노동자의 죽음 따위는 더 이상 말해지지 않고 있다. 모든 가치가 물화되며 죽음 역시 그것(it)이라는 혐오의 대상으로만 얘기 될 뿐이다. 정당하게 말해져야 하고, 애도되어야 할 죽음들이 말해질 수 없는 세상이 되도록 조장하는 집단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를 바로잡는 것은 인간의 차별을 금지하는 ‘차별방지법’의 제정과 같은 제도적 실행이 될 수도 있으며, 언론에 대한 인권 보호 보도 지침의 엄격한 준수의 요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무소불위의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파렴치한 검찰과 사법 권력의 철저한 개혁이기도 하며, 악플 문화에 대한 적절한 기술적, 법률적 대응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이 사회를 무참하게 지배해온 지배동맹의 해체, 기득권 해체를 요구하는 시민 대중의 강력한 연대이다. 정작 시민 대중의 70~80%를 대변하는 아무런 단체도, 정당도 없는 오늘의 형국이야말로 시급한 시민적 과제이다. 제도와 입법이 시민 대중의 의지가 반영되지 않는 구조적 부패성을 시정해야 한다. 그래야 기득권을 척결 할 수 있다. 이것이 실현 될 때 우리 사회에 깊숙이 스며있는 죽음을 떨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시민의 각성이다. 그래야 적대하는 골 깊은 갈등이 무의미해지는 지대를 우리는 후손들에게 남겨 줄 수 있을 것이다. 시민의 죽음을 잔뜩 머금은 작금의 권력 정치에 우리의 삶을 담보하는 것은 너무 어리석지 않은가?
이 책은 한국 사회를 장악한 사회적 타살의 실체를 날카롭게 통찰하여 시민의 잠든 도덕 인식을 깨어나게 하는 사회적, 정치학적 고투이자, 스러져간 동료 인간들에 대한 애도이며 시민대중을 향한 위로이다. 오늘의 우리들과 사회의 정치 현상을 이해하는 귀중한 거울이라 해도 무방하리라.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엘리아스 카네티(Elias Canetti)著, 『군중과 권력』, 2010년 바다출판 刊
▲스탠리 코언(Stanley cohen)著, 『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 2009년 창비 刊
▲프랑코 ‘비포’ 베라르디(Franco 'Bifo' Berardi)著, 『죽음의 스펙터클』, 2016년 반비 刊
▲수전 손택(Susan Sontag)著, 『타인의 고통』, 2007년 이후 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