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레니나 1 - 엘리트 북스 홍신 엘리트 북스 121
톨스토이 지음, 최원준 옮김 / 홍신문화사 / 200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세기 중엽에 발표된 이 소설은 장황한 불륜 스토리와 더불어 농촌 귀족 레빈과 그 주변 인물들로 표상되는 문명적 전환기를 마주한 인간들의 사상적 혼란과 이러한 환경 속에서 겪게 되는 혐오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구원과 속죄의 여정으로 읽게 된다.  (*이 감상 글은  1,2권 통합 리뷰입니다.) 





1. 불륜의 탐사 (1~4)

 

이 작품 속 인물들의 사유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19세기 중엽 러시아의 시대상에 대한 개괄적인 이해가 필요할 것 같다. 1850년대의 러시아는 정치, 경제, 문화 전반을 아우르는 사회적 전환기에 휩쓸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소설에는 이러한 전환기에 야기되는 가치관, 이념, 제도와 체제의 혼란이 등장인물들의 삶의 실체적 모습에 투영되어 구현되고 있는 까닭이다. 귀족 중심 사회의 점진적 쇠퇴, 여성 지위에 대한 인식의 변화, 전근대적 농노제에서 자유농의 부상,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이념의 태동 등 당대의 분위기가 작품의 저변에 흐르며, 이러한 변화를 맞이하는 인간들의 고통과 환희를 사랑과 증오, 유대와 혐오의 언어로 그려내고 있다.

 

행복한 가정은 모습이 다들 비슷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다른 이유가 있다.”

 

이 작품을 얘기하기 위해서는 진부하다 할 만큼 평이한 소설의 첫 문장부터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불행한 가정의 저마다 다른 이유를 탐사하는 것이 이 작품의 중요한 한 축이기 때문일 것이다. 불행하다고 느끼는 동기는 분명 다르다. 인간의 인지 능력, 지식의 축적 정도에서부터 취향이나 추구하는 삶의 가치에 대한 다양성에 이르기까지 천차만별일 것이다. 도입부는 오블론스키로 불리는 스테판 아르카지치의 외도로 위기에 내몰린 가정을 다루고 있다. 아내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돌리)는 이혼을 결심하지만 시누이 안나 카레니나의 위로와 중재로 이 가정의 균열은 봉합되고 위태로운 안정상태로 이어진다.

 

이에 대해 작가 톨스토이가 남자의 외도에 관대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이 점은 시대성을 넘어서지 못한 톨스토이의 한계라고 정리하는 것으로 족하겠다. 다만, 톨스토이의 변명은 안나의 입을 빌려 올케 돌리를 설득하는 다음의 문장 이라 할 것이다. 안나는 오빠 오블론스키의 입장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부정한 짓을 할지언정 자기의 가정이나 아내는 신성한 것으로 여기고. ...

그런 사람들은 그런 류의 여자들을 경멸하고 있기 때문에

가정에 대해선 관여하지 못하게 하는 법이에요.

그런 남자들은 가정과 그런 여자들 사이에 뛰어넘을 수 없는 선을 긋고 있는 거예.(1-118)”

 

그러면서 안나는 돌리에게 묻는다. ‘마음속에 오빠에 대한 사랑이 있는지, 오빠를 용서할 만큼의 사랑이 남아 있다면 오빠를 용서해줘요라고. 또한 오빠가 벌인 일은 그의 진심이 아니기에 자신이라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용서하겠다고 선언한다. 이것을 톨스토이의 남자의 외도에 대한 변명으로 이해해도 되지 않을까? 그러나 안나의 이 남성 관점의 변론은 자신이 불륜의 당사자가 되었을 때 완벽하게 그 반대의 언어를 말한다.

 

정사(情事)를 나눈 후 연인 브론스키를 향해 안나는 이젠 모든 것이 끝장이에요. 저에겐 당신밖에 없어요. 그걸 잊지 말아 주세요(1-239).”라며, 돌리를 향해 말했던 가족의 신성성을 묻어버린다. 그녀에게 이미 남편도 아들도 없다. 오직 육체적 욕망을 채워주는, 물론 안나는 이것을 사랑이라 부르긴 하지만 브론스키만이 있다.

 

안나의 세계엔 이미 남편도 아이도 없다. 안나가 브론스키에게 남편에게 모든 걸 밝히고 둘이 떠나겠다고 말할 경우 남편의 반응을 추정하는 다음의 말은 이미 돌리에게 오블론스키를 용서할 만큼의 사랑이 있느냐고 물어본 것과 극명한 대조를 보여준다. 그이는 정치가다운 태도로 분명하고 정확하게 말하겠지요. 나를 이대로 내버려 둘 수 없으니까 모든 방법을 동원해 스캔들을 없애겠다고 말예요. ...그이는 인간이 아니라 기계이니까요. 그것도 무서운 기계예요. 특히 화가 날 때에는.(1-301)” 구조적 당위성에 의해 작동되는 기계에 비유되고, 여기에 사악함을 덧씌운다. 이 말에는 남편에 대한 일말의 연민도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의 기만적 행위에 대한 성찰 또한 존재치 않다는 점이다.

 

브론스키와 그의 사촌인 남성 편력으로 소문난 베트시 공작부인을 만나기 위해 몸단장을 하던 안나에게 남편이 도착하자 그녀의 거짓 영혼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하필 이런 때에 온담, 자고 가는 것은 아니겠지?’라는 생각과 함께 여보, 오늘 밤은 주무시고 가시겠지요?”, “이제부터 우리 같이 가기로 해요.(1-323)”라는 기만적 언어를 발설한다. 알렉세이 카레닌은 이러한 기만적 언행을 감지하지 못하는 맹추가 아니다. 아마 총 8부작인 소설에서 브론스키가 말과 함께 넘어지는 경마 대회 장면은 이 불륜 이야기의 가장 결정적 장면이라 할 것이다. 귀족들과 고위 관료들의 시선이 빼곡한 곳에서 홀로 걱정의 탄성을 부르짖으며 주저앉는 안나의 행위는 어떤 확정된 상황을 예정한다.

 

안나라는 여인의 정말의 속셈은 무엇일까? 정부(情夫) 브론스키와 함께하는, 자기 욕망을 언제든 성취할 수 있는 독립되고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면서도 카레닌 부인이라는 명예의 자리를 놓지 않으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들 세료자에 대한 보호자로서 어머니인 자신의 사랑을 놓을 수 없다고 변명하지만 이것은 단지 자기기만이다.

 

자신이 카레닌을 벗어나고자 은연히 암시했을 때 브론스키가 보호자가 되겠다고 확신을 주었다면 그와 단 둘이 떠나려했음을 상기하는 장면처럼 그녀에게 아들은 자기 신분과 명예를 지키기 위한 명분으로 활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브론스키가 경마대회에 참여하고 있을 때는 이미 안나가 그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기에 하필 이런 때에 왔다며 남편의 방문을 혐오하면서도 남편의 건강을 말하며 위선을 떨던 여인은 가히 불륜이라는 가증스런 욕망 덩어리라 해도 부족할 듯싶다.

 

경마장에서의 공개적인 불륜의 확신을 주는 행위에 대한 남편의 완곡한 경고성 발언이 주어지자 이에 즉각적으로 혐오와 조롱의 언사를 행하며, 급기야 자신의 부정을 남편에게 고백한다. 아니 선언한다고 해야 옳은 표현이 될 것 같다. 너는 나의 브론스키와의 관계, 그에 대한 사랑에 대해 어떠한 간섭이나 요구도 하지 말라는 적대의 언어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 여인은 지속하여 이율배반적인 언행을 보이는데, 브론스키와의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없는 혼인의 구속에 몸부림치며, 남편으로부터의 해방을 갈구하면서도, 귀족 사회에 자신의 불륜이라는 추함이 공식화되는 것은 수용치 않으려는 것이다. 이는 남편의 공식적인 승인, 카레닌의 아무런 보복도 가해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불륜을 정상화하고 싶은 욕망이다.

 

카레닌의 입장을 보자. 그는 부정을 선언하듯이 통고한 안나에게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의사를 밝힌다. 세상 사람들이 이 소문을 모르고 있는 한, 나의 명성이 더럽혀지지 않는 한 난 모른 체할 작정이요.... 당신 스스로가 당신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행동을 할 경우엔 나는 나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그에 적합한 방법을 강구할 것이오.(1-498)” 불륜의 사실이 세상에 직접 사실로서 공식화되기 전까지는 표면적 관계를 손상시키지 말아달라는 주문이다. 그리고 부연한다. 당신은 아내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더라도 정숙한 아내로서의 모든 권리를 누릴 수 있을 것이오....식사는 집에서 하지 않을 것이오.(1-499)”

 

카레닌은 불륜 이전의 아내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를 기계라고 멸시하는 것은 정부에 매몰된 여인이 으레 갖게 되는 증오의 언어이지 이것이 카레닌을 설명하는 언어가 될 수는 없다. 그는 고위 정치 관료다. 자신의 정치적 과업에서 성취를 얻어내고자 하는 전형적인 인물이랄 수 있다. 안나는 그가 사랑이란 애초에 가지고 있는 인간이 아니라는 설명과 함께, 오빠 오블론스키의 입을 빌려 스무 살 연상의 남자와 결혼한 것이 애초에 잘못된 것이었다는 언급이 있다.

 

그러니까 이 두 사람의 결혼 성사에는 남자가 이미 쌓아 놓은 고위 정치 관료라는 명망이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세월이 지나고 나니까, 사랑이라는 낭만적 관계, 육체적 욕망의 실현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간이 지나고 보니 사랑이 사회적 지위가 제공하는 안락과 명망보다 소중해졌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늙은 남자와의 결혼관계를 무용화 시키겠다는 주장을 하는 여자에게 남자가 지켜내야 할 것은 무엇일까?

 

마침내 이혼을 결심하고, 모스크바로 고뇌어린 짧은 여행을 도모하지만, 안나로부터 죽음의 고통에 처해있으니 페테르스부르크의 집으로 돌아와 달라는 전보를 받게 된다. 안나의 전갈 내용에 대해 반신반의하면 아내의 죽음이 도래하여 마침내 이 고통스러운 위협의 상황이 끝나기를 기대한다. 안나라는 여인을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은 브론스키의 아이를 낳으며 산욕열로 죽음의 문턱을 드나들게 되자 남편을 간곡히 찾았다는 것과, 도착한 남편에게 브론스키와의 만남을 더 이상 지속하지 않겠다며 구구절절 용서를 빌며 참회하는 장면이다.

 

안나에 대한 증오로 가득했던 카레닌은 이러한 안나의 변화에 대해 연민과 용서의 마음으로 전환하여 극진한 간호와 함께 부부로서의 정상적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건강을 회복하자 안나는 남편과의 마주침 자체를 불쾌함, 혐오스러움으로 인식하며 한 집에서 산다는 것 자체의 고통을 호소하기 시작한다. 죽음만이 이 상태로부터의 구원이라며 오빠 오블론스키에게 하소연한다.

 

여동생을 위해 오블론스키는 카레닌에게 안나를 해방시켜줄 것을 완곡하게 부탁하고, 카레닌은 결국 안나와의 이혼을 승낙한다. 그러나 안나는 이혼을 선택하지 않는데, 자신의 명예를 손상시키지 않으며 브론스키와의 결합만을 욕망했기 때문이랄 수 있다. 안나는 아들과 남편을 저버리고 브론스키와 갓 낳은 딸과 해외로 떠나버린다. 안나는 그녀 자신의 이익을 완전하게 성취한 것이다. 고위관료 아내의 신분과 귀족의 평판도 잃어버리지 않고 욕망의 대상인 연인 브론스키를 마음껏 만끽하는 자유를 얻은 것이다. 카레닌과의 결혼은 실수였다고 부르짖으며 세상이 불륜이라 칭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부르는 안나의 이 성취가 과연 행복의 지속적인 관계가 될 수 있을지.

 

독립된 인간이 될 권리, 이게 불가능하다는 인식에 구속된 것(1-603)”이 당대의 여성이라 주장하는 페스초프라는 인물이 오블론스키의 저택 만찬에서 하는 말은 시대성이 내포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제약을 넘어서는 것의 어려움에 대한 지적일 것이다. 안나의 행위를 이러한 시대성의 돌파라 해석해야 할까? 나는 아니라고 이해한다. 결혼을 절대적이고 신성불가침의 파괴할 수 있는 제도라 하는 것이 아니라, 카레닌과 이룩한 가정을 일방적으로 파괴하는 안나의 일방적인 배신 행위를 미화하고 정당화하려는 위선이다.

 

당시 러시아의 이혼 법은 이혼 후에 여성은 정부(情婦)는 될 수 있었으나 정식 혼인관계를 새로이 얻을 수 없었으며, 귀족 사회의 관습 또한 불륜의 당사자인 귀족은 그 세계에서 더 이상 관계를 형성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지성을 갖춘 귀족 여성인 안나가 이러한 법적, 관습적 제도를 알지 못했다고 할 수 없다. 충분한 지적 이해 속에서 안나는 불륜을 선택했으며, 이를 배우자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그로부터 자신의 욕망을 위한 이해, 즉 불륜에 대한 완전한 방임을 요구하는 것은 부당한 것이라 여겨진다. 물론 카레닌은 안나의 삶의 복귀를 위해 합법적 남편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내려놓는다. 기다렸다는 듯이 여인은 욕망의 대상과 함께 날아가버린다. 끊임없이 자기 구속의 명분으로 삼던 아들 세료자는 버려두고서.

 



 

2. 전환기 러시아 그리고 인간 구원 (5~8)

 


불륜의 히로인(heroine)안나 카레니나의 사랑의 도피와 연인 브론스키에 대한 집착, 자기 연민의 불가항력적 귀결에 이르는 장면들은 당대 여성들, 특히 사교계로 대변되는 귀족 여성들의 사회적 위선과 자기 한계를 노출한다. 작가 톨스토이의 시선은 지극히 기독교적 순결주의의 도덕성에 천착하고 있어 소설 도입부를 장식했던 오블론스키 백작의 외도로 이혼의 위기를 가졌던 돌리의 안나에 대한 관념적 공감과 달리 그 행위의 원인이 된 사람을 보는 것은 불쾌한 일이었다.(2-292)”고 반감으로 표출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당사자인 안나 또한 시대성이 지닌 여성의 굴레를 돌파하는데 실패한다. 사랑이라는 열정에 몰입하여 연인의 신체와 정신을 견고하게 자신에게 붙들어 두는 것만이 존재의 의미가 될 수밖에 없기에 귀족 사회 및 남성적 시선에 포획된 언어를 그대로 자신에게 투사하여 역겹고 추잡스럽고 몰인정한 계집(2-192)”이라는 자기혐오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 자기 혐오는 곧 자기 연민의 다른 표현이다.

 

한편 이와 달리 안나로부터 배신당한 카레닌의 경우에는 아내를 해방시켜 줌으로써 언제까지나 자기라는 존재 때문에 아내로 하여금 고민하지 않도록 해준(2-115)” 결과가 절망감과 슬픔, 그리고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되고 경멸받는 고독한 인간이 되어버렸다는 연민의 공감으로 나타나고, 나아가서 리디아 공작부인이라는 귀족 사교계의 한 축을 구성하는 여성으로부터 사랑과 연민을 받는, 즉 사회적 권위로부터 완전히 배제되지 않으며, 종교적 구원, 하느님의 고상한 관용의 대상이 되기까지 한다.

 

그런데 아주 중요한 대목이 있다. 카레닌의 안나에 대한 죄의 물음이다. 브론스키의 아이를 출산하던 안나에 대한 극진한 간호와 그 불의의 자식에 대한 배려의 수치스런 기억과 회한이 그를 괴롭히는 중에 그 사람에게 무슨 죄가 있는 것일까? 사랑하는 법이 다른 것일까? 아니면 결혼하는 법이 다를까?(2-137)”라는 본질적 자문을 하는 것이다. 관념적 이상과 현실을 장악하고 있는 시대성의 충돌은 여성의 지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징후로 이해될 수도 있다.

 

여성의 역할과 인식에 대한 아주 소박한 변화의 징후는 농촌 귀족 레빈의 아내인 키티 레비나의 사랑의 지혜로 현현되는데, 형 니콜라이의 임박한 죽음을 대하는 자신이 지니지 못한 두려움 없는 의연함의 지혜를 발견하는 장면이다. 그에게 여성, 아이, 농민 등 평민은 복속되어야 하며, 그들에겐 지혜란 것이 없다는 믿음의 미세한 균열이다. 그는 농노제에서 소작농, 임금 및 수확배분 등 다양한 농업 경영 방식으로의 이전에서 부대끼는 당대 농부들의 게으름, 새로움에 대한 저항으로부터 인간에 대한 이해를 쌓아 나간다. 또한 그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상황들은 당대 러시아가 봉착한 정치적, 경제적 양상들의 다양한 전시장이 되어준다.

 

작가는 레빈에게 작품의 축으로서 삶의 구원이라는 거대한 문제를 안기지만, 니콜라이의 죽음으로부터 야기된 존재의 지속 가능성, 이로 인한 삶의 의미라는 풀리지 않는 의문에 대한 답의 구함은 한 농부의 신적 질서에 대한 복종이라는 우연한 언어를 마주할 때까지 계속되며 조금은 답답한 고루함을 이어나간다. 사실 오늘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제재는 레빈의 형으로 상징되는 지식 엘리트, 즉 당대 인텔리겐차의 오만한 무지와의 치열한 논쟁에 있다.

 

크림반도로 불리는 세르비아, 터키 지역의 전쟁에 동족인 슬라브 민족을 보호하기 위해 출병하는 의용군대에 대한 찬반의 문제이다. 전쟁 참여의 명분은 다분히 자의성을 지닌다. 학자인 형 코즈니세프는 주장한다. 슬라브 민족이 이교의 사라센 인 멍에 밑에서 고통을 받고 있으며 이는 러시아 정교도들에 관한 살아있는 전설처럼 동포의 고난에 민중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고. 그러나 레빈은 이를 반박한다.

 

러시아인이 왜 갑자기 슬라브의 동포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더구나 편리할 때마다 사용하는 민중의 의지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가, 그 막연한 민중의 의지라는 것이 자기 의지를 표명하지 않을 뿐 아니라 표명해야 할 사건으로 눈곱만큼도 여기지 않음에도 그들에게 민중의 의지 운운 할 수 있는 것인가라는 반론이다. 무고한 터키인을 살해하려는 것, 그리고 죽음의 전장으로 향하는 것은 누구인가라는 이의이다.

 

여기에 신문이라는 신문은 다 똑 같은 주장을 하고 있어 실재 진실의 목소리는 물론 아무것도 얻어들을 수 없는 지경이라며, 신문 즉, 여론을 조성하는 이 인위적 매체의 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레빈은 신문과 민중의 의지라는 언어를 이용하여 복수와 살인의 사상을 대표할 권리를 인렐리겐차가 가지고 있다는 데 결코 동의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21세기 한국 사회의 정치 현실에 그대로 이식해도 아무런 손상도 없는 담론적 지위를 지닐 수 있는 논리라 할 수 있다.

 

상업 권력이 지배하는 오늘의 언론 미디어는 이미 공정한 지표로서의 자격을 상실했으며, 엘리트 지배계급이란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에나 관심이 있으며, 더구나 전쟁의 선포나 참전의 결정을 자신들이 자의적으로 할 수 있다는 망상은 이제 애국심과 같은 정체성을 획책하는 저열한 악의에 결코 공감을 얻기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혜의 우둔, 지혜의 속임수에 대한 레빈의 갈파와 함께 자신의 내적 충동에 대한 깨달음을 성취하는 한 인간으로부터 사회적 조건을 초월한 진리 발견의 여정에 동참하게 된다.

 

이성이 발견한 것은 고작 생존경쟁이요, 욕망 만족을 방해하는 자에 대한 증오의 법칙일 뿐이지 않은가? 이러한 이성이 남을 사랑하라는 법칙을 발견할 리가 없다(2-565)”는 레빈의 사상은 쇼펜하우어의 반()합리주의 세계관과 많이 닮아있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우리들이 근거 없는 의지를 이해하려 할 때 과연 무엇에 의지해야 할까? 톨스토이가 말하는 구원, 영혼으로 사는 것, 하느님의 율법대로 사는 것만 유일한 길일까? 그렇다면 치욕과 불명예로 몸부림치다 열차에 뛰어든 안나의 행위는 죽음에 의한 구원의 의식인가? 아니면 원죄, 불륜의 속죄인가? 나는 그 옳고 그름의 판단을 하지 못한다. 어쩌면 영원히 이러한 우둔함에 머물지 모르겠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쉽사리 물리치지 못하는 까닭에 책의 유혹은 여전히 그리고 즉흥적으로 새로운 자극을 뽐내는 선전 문구에 이젠 멈추어야 한다던 다짐을 잊게 하기 일쑤이다.

 

불륜 스토리를 통해 인간의 구원 문제를 우회하여 넌지시 도덕성을 촉구하는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를 읽다가 '쇼펜하우어'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로부터 구원의 길을 얻지 못하던 농촌 귀족 레빈때문에, 혹은 기독교에 의해 쾌락주의 누명을 쓰고 고귀한 사상이 자칫 묻혀버릴 뻔 했던 에피쿠로스가 눈에 밟히던 중 마침 출간된 '존 셀라스'의 엑기스 같은 책을 저버리지 못하는 식이다.

 

퀴어가 대중적 이해를 획득함에 따라 새삼스레 부상하는 '미시마 유키오'금색(禁色)은 그의 군국주의자로서의 반감에도 불구하고 육체와 인간의지의 치열한 투쟁의 공존과 균형을 향한 미학에 대한 호기심을 물리치기 어려워 구입하는가하면, '매들린 밀러'의 소설은 단지 화려한 장정과 '아킬레우스'의 현대적 해석은 어떤 것일까 하며 현혹되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노리나 허츠고립의 시대는 저자의 대중을 향해 내뱉는 유창한 설득의 언변에 매료되어 있던 차에 무조건적인 지적 신뢰가 통하였으며, 아도르노의 미니마 모랄리아는 상처 받고 이방인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던 인간의 울림을 뒤늦게 찾기도 했다. 아마도 공감의 감도가 그 어느 때보다 높은 내 처지와 상통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인리히 호프만'더벅머리 아이에 대한 정신분석적 해석판 역시 스치듯 언급되던 역사서 모퉁이의 어느 한 문장이 떠올라 다행스럽게도 절판되지 않고 판매되고 있어 구입을 미룰 수 없었던 책이라고 판단했다. 타셴에서 출간하는 책의 그 촘촘한 밀도의 구성에 매료되었던 기억으로 20세기 사진 예술은 사물에 대한 통찰력의 압축으로서의 사진에 대한 매혹이 결합된 구매 욕심이었던 듯싶다.

 

이렇게 2월 한 달 구입한 책을 정리하면서 구입의 무수한 정당화의 변명을 하고, 책 마다 에 내 인상과 느낌을 기록해두는 의미를 기술해 본다. 이젠 그만 하면서도 멈추지 못하는 책을 향한 욕심이 아직 살아있음에 감사해 할 뿐이다. 이 책들은 또 어떤 책을 부를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얄라알라 2022-03-05 13: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북플에서는 많아도 많아도, 해롭지 않은 것이 ˝책욕심˝이 아닐까 싶습니다^^ 책탑 보기만 해도, 덩달아 기분이 업됩니다

필리아 2022-03-05 15:38   좋아요 1 | URL
쌓인 책들 중 정리해버릴 책을 선별하는 작업을 몇 개월마다 하면서 탑을 줄여나가는데 다시금 영역을 확장해 나갑니다. 책에도 어떤 의지가 있는 듯 싶어요. 언젠가 제 욕심이 수그러들면 함께 책 영역도 사라지겠지요. 유쾌한 주말 시간 되십시요~~
 


많은 사람들이 어둠을 밝힐 불빛이 없어 세상이 이렇게 어둡다고들 얘기한다.

나는 이러한 시선에 그리 관대하게 동의하기가 어렵다.

정말 불빛이 없어 한국 사회가 어두운 것인가?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도시의 밤 거리도 대낮처럼 밝지 않은가?

철학자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은 『반딧불의 잔존』에서

오늘 사람들이 반딧불을 볼 수 없는 것은 이것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불 정도로 충분히 어두운 곳에 사람들이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했다.

불빛이 없어 어두운 것이 아니라 어둠을 내치고 몰아내는 불빛만 있는 세상이어서

그 밝은 불빛 탓에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정작 시야에서 사라지게 한 어둠이 그대로 남아 있어 밝은 대낮 같은 세상에도

어둠이 가시지 않으니 빛 타령을 하며 본질을 외면한 주장들을 넘치도록 하는 것 아닐까?

그래서였을까? 시인 장혜령은 보고 발견하고 그리고 깨우침의 시간을 갖기 위해서는

충분한 어둠이 있어야 한다고 산문집 『사랑의 잔상들』 에 쓰고 있다.

우리의 세계는 어둠은 커녕 온통 빛의 홍수이고,

잠깐의 단절도 참지 못하는 고독이 부재하는 시간을 잘 사는 삶이라고 까지 떠들다보니

막상 정말 제대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피상적 무사유의 언어들만이

넘실 댈 까닭 밖에 없는지도 모르겠다.

극장은 영화라는 이미지를 위해 어둠의 장막을 내리고,

꿈을 꾸기 위해서는 잠의 어둠에 잠겨야 한다.

글의 진정한 함의, 그 이면의 사유를 탐색하기 위해서는

어둠의 터널을 통과하는 고독의 시간을 지나야 한다.

밝은 빛만 내리 쏟아지는 세계는 위장과 가면들, 과시와 무사유가 점령한다.

아무것도 꿈 꾸지 못하고, 적나라한 그 무엇도 내비치지 못한다.

눈 감고 저 깊은 사유의 언어를 끌어 올릴 겨를을 가지지 못한,

이런 시간을 견뎌낸 언어를 지니지 못한,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이 세계를 차지한다.

디지털 혁명의 세계? 광소자가 빛나는 그 환한 가상의 공간은 생명의 에너지를 고갈시키고

아무런 사유의 자리도 남기지 않을 정도로 사람들을 빨아들이고 있다.

점점 어둠을 상실해가는 오늘, 우리는 의지처를 찾지 못해 서성거리는 마음에게

어둠과 고독이라는 존재의 지혜를 선물해야 한다.

빛이 찬연한 곳에는 프레카리아트(precariat)가 보이지 않으며,

그 어떤 고통의 사건도 드러나지 않는다.

어둠의 공간으로 가야지만 이들의 모습과 상황이 보인다.

빛 속에서는 너무도 많은 것들이 은폐되어 있어 세계를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게 된다.

우린 어둠의 권력을 포기하거나 잃어버리고 있다.

어둠을 되찾아야 꿈도, 소망도, 사랑도, 사람들도 발견 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우리가 찾아야 하는 것은 불빛이 아니라 어둠인 이유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복스 포풀리 - 고전을 통해 알고 싶었지만 차마 물을 수 없었던 모든 것
피터 존스 지음, 홍정인 옮김 / 교유서가 / 202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의 조건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우리 삶이 더욱 풍요롭고 만족스러워진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36

 

호메로스의 일리어드오디세이아가 그리스어로 구술되기 시작했던 기원전 8세기에서 서(西) 로마제국이 몰락했던 서기 5세기까지, 그리스와 로마 문명에 대한 '역사-고고학, 문헌학, 정치학, 언어학, 철학'을 아우르는 다각적이고 다층적 시선을 지닌 저술이다. 위의 인용 문장처럼 고전학은 당대의 삶을 대하는 태도와 방식으로부터 우리 시대의 관심사, 즉 삶을 결정짓는 현상들을 오늘의 시선으로 재해석하며 어떤 유익성을 발견케 한다.

 

책은 로마로부터 시작되지만 이보다 앞선 고대 그리스부터 시작하는 것이 수순일 것 같다. 그리스 문명이란 아테네, 스파르타, 테베 등의 도시 국가만을 뜻하지 않는다. 터키와 시리아지역인 소아시아 사람인 호메로스로부터 레스보스 섬 출신의 시인 사포, 터키 서해연안 밀레토스 출신인 탈레스, 사모스 섬 사람인 피타고라스, 남부 이탈리아 엘레아 출신의 제논과 같이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전 5~4세기에 이르는 대 철학자들과 시인의 출신지가 말하듯 그리스는 지중해 연안을 지휘하는 광대한 지역의 패권 문명이었음을 의미한다.

 

특히 기원전 338년의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의 그리스 권역 통일과 원정을 통한 영토 확장은 그리스어와 그들의 신이라는 문명이 근동과 아시아 깊숙한 지역, 아프라카 북부지역을 아우르는 광범위한 권역을 그리스화 했다고 말 할 수 있다. 이것은 공통 그리스어(코이네;Koine)라는 같은 말을 하는 인간과 지역의 거대한 확산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나 소아시아의 아탈로스 왕조 등 지중해 연안의 왕조는 모두 알렉산드로스가 정벌 후 남겨둔 후예 왕들이 정착해서 일궈낸 왕조들이다. 로마가 기원전 197년에서 기원전 149년에 이르는 장장 반세기에 걸친 그리스 복속의 기간은 지중해를 둘러싼 그리스 권역의 많은 패권국가들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야만이 문명을 정복하면 발생하는 것은 문명의 이식이다.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의 "포획된 그리스가 사나운 정복자를 다시 포획해 교양 없는 라티움에 문화를 가져다주었노라라고 말했듯이 로마의 그리스 복속은 로마의 그리스화로 이어진다. 그리곤 약탈한 그리스의 무수한 미술, 조각품, 각종 문헌들은 전례로서 모방되고 표준화되어 로마의 것이 된다. 결국 로마의 문명인 라틴 문명이란 그리스 문명의 라틴화라 할 수 있다. 로마는 결코 그리스를 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마치 오늘날 일본()이 한국을 잊지 못하는 것과 같은 현상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로마 제국에 흡수된 그리스어가 잊힌 언어가 되는 상황이 닥치는데, 로마 세계의 주요 정치권력이 되는 기독교 세력의 부상이다. 다신을 모시는 그리스 문명, 그네들의 철학과 사상을 기독교가 수용할 수 없었음은 당연한 귀결이었을 것이다. 서기 250년부터 기독교 교회는 라틴어만을 유일한 교회언어로 하면서 이후 1천 년 이상 그리스어 문헌은 서구 문명에서 사라지게 되는 운명을 맞이한다. 서구 유럽 전역을 장악한 기독교는 사실 인류의 문명을 거꾸로 돌려놓는 역할을 한 것이랄 수 있는데, 교회의 언어인 라틴어가 서구의 교육과 학문의 중심어가 되어 일종의 문화혁명인 계몽주의가 대두되는 17세기까지 중세 암흑시대의 독점적 권위를 구가하는 수단이 된 것이다.

 

이쯤에서 그리스-로마문명의 배경을 그치고 텍스트 안으로 들어가야겠다. 이 고전학 저술은 무진장한 독서의 즐거움을 주는 책이라 할 수 있는데, 그리스의 민주정에 대한 고전 탐색을 통해 현대 민주주의의 터무니없음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는 부분이나, 지식이 주는 쾌락이 치솟는 장이라 할 수 있는 제 5여자 위의 남자와 제 6황제와 제국에 이르면 책을 손에서 내려놓지 못하게 되기까지 한다.

 

민주정을 뜻하는 데모크라시(Democracy)의 데모스(Demos)가 당대에는 일반 시민이 아닌 부유층과 귀족층을 지칭하는 언어였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리스인들은 법 앞에 평등한'이라는 의미를 지닌 '이소노미아(isonomia)'를 사용했다고 한다. 데모크라시는 후대에 의미가 확장되어 사람 일반을 의미하게 되었다고 한다. 어쨌거나 이들의 민회(에클레시아)나 상임 평의회(프리타네이스)라는 18세 이상 남자들이 모두 참여하는 민회가 기반이었음은 많은 이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이야기다. 그런데 아르콘(archon)이라는 추첨으로 선출되는 행정관 중에서 스트라고테스로 불리는 군사령관 10명만은 그 기능의 고유성 으로 인해 매년 투표로 선출하는 예외를 두었으며, 임기가 종료되면 수행 업무의 잘잘못을 따져 10명 중 2명을 사형시켰다는 것이다. 실로 무시무시한 무보수 행정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는 부정부패가 싹틀 여지가 없었음을 말하는 것이리라. 여기에는 아주 특수한 이야기거리가 있다. 죽기까지 15년 연속해서 아르콘으로 활동한 페리클레스란 인물이다. 동시대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명목상 민주정이지만 실제로는 일인자의 제국"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아테네는 페리클레스 1인 독재정이었을까? 그릇된 국정 수행을 하면 민회에서 사형에 처해지는데 독단적 정책 수행이란 아예 불가능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는 민의 존중 정치가였으며, 타인 설득과 장악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수사학, 즉 웅변술이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하는데 얼마나 중요한 기술이었는지 가늠케 된다.


 




웅변술이 시민 자신을 지키고 의지를 관철시키는 삶의 필수 자질이었음을 보여주는 그 유명한 '네아이라 재판' 과정 사례가 소개되고 있다. 노예이던 네아이라를 해방시켜준 남편 프리니온이 오쟁이 지게되자 네이아라가 새롭게 살고 있던 스테파노스라는 남자를 고소하곤 배심원단을 향해 일장 연설을 하는 것이다. 그 판결 내용이야 오늘의 시선으로는 우습기 그지없지만 그 연설 내용이나 배심원단 투표 방식은 법 질서에 내재된 민주주의의에 대한 당대의 믿음을 보여준다. 네아이라 재판보다 더욱 흥미로운 사례가 있는데, 기소인이 내세운 죄목을 보면 이것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나하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내용이다. 기소 내용은 다음과 같다. 노예 출신으로 시민이 되었고, 본래 거지였는데 부자가 되었으며, 서기보였던 사람이 입법자가 되었다.(191)”

 

사실 이것은 죄가 아니지만 핵심은 피고가 된 인물에게 유력자인 적들은 분노를 일으켰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 사람이 법을 어겼는가?라든가, 위법을 증명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우리한테 자꾸 방해가 되는 이 자를 어떻게 혼내 줄 수 있을까?를 묻는 것이었다고 이해하면 이 기소행위의 저의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즉 시민 다수의 삶과 합치하지 않는 행위를 하는 사람에 대한 경고를 통해 공동체에의 결속을 다졌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이들의 민주정은 권력이 시민의 손 안에 있는 평등과 법의 연계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수평적 결속, 민주주의 이상적 실현 그것이었다.

 

이에 짧은 코멘트를 하고 가야 할 것 같다. 오늘날 우리들은 의회 민주주의, 대의 민주정치라며 민주주의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의 질문만으로도 이것이 궤변(詭辯)에 불과함이 분명히 드러난다. 선거에서 누가 후보로 나올지 누가 정할까?” 국민이 정하나? 아니다. 국민이 정하지 않는 후보들이 나와 알지도 못하는 자에게 투표하는 것으로 민주주의라 부른다. 이것이 엉터리인 것을 길게 말하는 것은 수고스럽기 만한 언어 낭비가 될 것이다. 그리스의 직접민주주의의 명칭과 외형성만을 빌려 사용할 뿐 전혀 민주적이지 않은 것이 오늘의 민주주의 제도 형식이다.

 

이제 이 책 최고의 즐거움을 주는 2개 장, 여자 위의 남자 황제와 제국을 말해야 할 것 같다. 그리스 로마 당대의 비문, 지금은 유실된 저작물, 연설문, 서간문을 비롯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유언장, 간통에 대한 소송 연설, 폼페이 벽의 낙서에 이르기까지 결혼생활과 자녀에 대한 관심 등 일반 시민인 남성과 여성에 대한 훔쳐보기는 즐거움에 들뜨게 한다.

 

기원전 452월 로마의 정치가 키케로가 출산 중에 사망한 자신의 딸 툴리아를 향한 슬픔으로 모든 대화를 단절하고 숲으로 들어가 고독과 책을 벗하며 삶을 버티지만 매번 별안간 터지는 울음에 지고 마는 자신의 상황을 전하는 벗에게 전하는 편지부터 아리스토텔레스의 유언장에 적시된 딸 피티아스, 아들 니코마코스, 아내 헤르필리스, 조카 니카르노에 대한 유산 배분과 이들에 대한 보호의무와 권리에 대한 것인데, 당대의 남자와 여자에 실체 상을 읽는 중요한 자료가 되어준다. 한편 자신의 코앞에서 다른 남자와 아내가 벌이는 은밀한 관계를 발견한 에우필레토스라는 인물이 간통한 사내를 살해하고 자기변호를 위해 하는 연설은 당대 여성들의 삶의 일면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이처럼 이러한 진귀한 사례들이 많은 지면을 차지하고 있는데, 역사적 그리고 주제의 일관된 지향과 어울려 이 책의 진가를 높여주는 부분이라 하고 싶다.

 

로마인은 불모지를 만들고 그것을 평화라 부른다.", 자기비판적인 인간들이라 한다. 하지만 이는 도덕 추구와는 하등 관련이 없는 이익 추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이들이 속주를 직접 통치하지 않았던 것은 도덕적 자질이 고매해서가 아니라 효율적인 이익의 향유만을 원했던 이유이다. 정기적 인구조사와 징세 체계를 정비하여 효율성 높게 세금을 흘러들어오게 하는 것으로 족했다는 것이다. 이들 문명화되지 않았던 속주민들에게 이미 그리스문명이 찬란하게 꽃핀 로마 제국의 화려한 아케이드와 욕장, 사치스러운 연회 등은 자연스레 그네들의 삶으로 침투하게 되었으며, 이를 문명화라는 미명하에 예속화가 별다른 장해 없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동시대의 역사학자 타키투스는 그의 저술 아그리콜라에서 식민지 브리타니아(오늘의 영국) 사람들은 서서히 부도덕한 쾌락에 물들어가고 있었다. 무지한 그들은 이것을 문명화라고 불렀으나 사실 그것은 예속화의 과정이었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로마의 태도와 요령은 지중해 지역의 로마화와 함께 넘쳐나는 부와 자만으로 스스로 붕괴하는 양극단의 현실을 가져온다. 국가의 세입의 원천을 틀어쥔 황제는 더 이상 정치 경영의 중심지인 로마에 있지 않았으며, 외딴 곳에 궁전을 짓고 해방 노예들의 조언과 결정에 의존하는 폐쇄된 의사결정으로 모든 것이 은폐된 시대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투스의 죽음과 전남편과의 자식인 티베리우스를 제위에 올리는 리비아의 추정된 음모는 역사가 타키투스의 연대기에서의 지적처럼 궁정의 은폐성, 그 정보의 철저한 차단성이 지닌 결정적 폐해를 시사한다. 정확한 실상을 외부의 그 누구도 알 수 없으니 소문이 억측을 쓰고 뉴스로서의 힘을 얻는 것이다. 가짜 뉴스 생산의 한 단면이다. 이처럼 밀실 정치의 해악은 인간 역사 내내 국가 경영의 참혹한 결과를 보여준다. 한편 이들 황제들이 시민을 자신의 편으로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스펙타클을 연 것을 자신들의 치적이라 말하는 것에서 저자와는 다른 관점에서 말하고 싶어진다. 피터 존스는 황제들이 시민의 눈치를 보고,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쇼와 거대 행사를 개최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시민의 비판적 저항 정신을 무디게 하는 일종의 최면술이라 하여야 하지 않을까?

 

우민화된 시대 대중은 거대한 검투사 경기와 전차 경주, 해상 전투 쇼에 넋이 빠져 그 흥분의 열정에 도취된다. 우리는 궁전 발코니에서 로마 전경을 내려다보며 노래를 흥얼거리는 쇼 맨 네로의 영상을 그릴 수 있다. 시민은 네로를 위해 환호했고 그의 편이었다. 그가 뱉은 말처럼 죽음이로다. 그 얼마나 위대한 예술가였나는 번영하던 로마가 왜 무너지기 시작했는지 이해하게 되는 구절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서기 238년 한 해에만 황제가 6명이었으며, 100년 동안 황제의 수가 60명이 넘었다니 위대했던 제국의 체제는 이렇게 무너져 내렸다. 아마 오늘의 말로 표현하자면 포퓰리즘이란 것의 폐해는 국가마저도 몰락시키는 역사의 증언이랄 수 있겠다.

 

이후 7~9장까지는 라틴어와 그리스어의 융합 흡수, 프랑스어의 사용과 고대 영어로부터 중세와 현대 영어로 정착하는 언어의 역사 과정을 쫓으며, 그리스어와 라틴어의 교육과 문법, 언어의 사회적 영향을 고전의 문헌들과 사료들로부터 그 의의를 탐색하며 현대적 의미로 새기고 있다. 여기에는 언어의 본성으로서 유비와 변칙에 대한 고대 사상가들의 학설은 물론 교육과 직접민주주의 필수 요소로서 언어와 수사학적 중요성을 추적하기도 한다.

 

10장의 스토아와 에피쿠로스로 대립되는 두 고대 철학사상을 대비하면서 인간 삶과 우주적 본질에 대한 의문에 대한 도전의 역사는 일신교 기독교의 대두와 함께 어떻게 이들 사상이 소외되거나 사멸되며, 흉측스런 누명을 쓰게 되었는지를 살핀다. 원자론과 영혼 불멸성에 대한 부정을 주장한 에피쿠로스가 감각적 욕망을 쫓는 쾌락주의의 누명을 쓴 것 역시 기독교의 박해라 할 수 있다. 스토아 철학이 살아남은 것은 스토아의 물질과 영혼의 이원론이나 선한 신과 세상의 악에 대한 그들의 신정론이 기독교의 입맛에 맞는 적절한 교리의 토대를 제공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늘의 인류에게 과학과 철학, 문학, 미술과 조각 등 예술, 그리고 인간 삶의 문명적 기반을 제공한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 대한 이 다 방향의 고전 탐색의 저술은 무엇보다 흔치 않은 흥미로운 사적(史的) 편린들을 총합하여 일관된 의미를 일구어내고,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그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성찰을 하도록 은근히 부추긴다. 아마도 이 책을 읽게 되는 이들은 책 속의 무수히 소개되는 고대의 사료들이 제공하는 사례에 빠져 그 지적 즐거움에서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낭만적 은둔의 역사 - 혼자인 시간을 살아가고 사랑하는 법
데이비드 빈센트 지음, 공경희 옮김 / 더퀘스트 / 202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외로움은 혼자 있는 것의 아픔을 나타내기 위해 생긴 표현이다.

또 그것은 혼자 있는 것의 영광스러움을 표현하기 위해 고독이라는 어휘를 만들었다.

-신학자, 폴 틸리히 (281)

 

 

흔히 목격하게 되는 사람들, 즉 이 시대의 상징적 인물을 손에 쥔 기기 위로 조용히 어깨를 수그린 모습이라고 저자 데이비드 빈센트는 인파 속에서 정신적으로 분리된 오늘의 인간을 묘사하고 있다. 이는 무리나 군중 속에서도 철저히 개인화되어 혼자 있기를 주장하는 세계에 대한 적절한 설명처럼 보인다.

 

이러한 모습에서 집단 속에 있지 않으면서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고독과 외로움의 경계에 선 현대인의 모호한 심상을 발견하게 된다. 어쩌면 이것을 고립적이고 기쁨 없는 쾌락주의에 내맡겨진 인간이라 주장할 수도 있으며, 이와 달리 몰입과 자기 행복의 긍정적인 창의적 고독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혼자 있기의 부정적 발현인가? 긍정적 실현인가? 집단과 혼자 있기의 절묘한 균형인가?

 

책은 이 같은 혼자 있기의 역사를 집어가며 고독의 다양한 형태들 - 산책, 등산, 낚시, 바다항해, 뜨개질, 책 읽기, 수도원과 수녀원의 삶, 교도소 독방 등 -에 투영된 삶의 조화로운 가치로서 은둔, 은거, 고독의 변화를 탐사한다. 도시와 노동의 답답함에서 풀려나와 시냇물 거품을 바라보며 들판 목초지를 한가로이 거니는 산책 속의 고독을 노래하는 1820년 자작시 <고독>의 시인 존 클레어 군중의 회오리에서 달아나는 달콤함이라는 고독의 이상성으로 글을 연다. 이를 시작으로 당대 걷기의 유행과 도보 여행, 등반 여행에 이르는 혼자 있기의 갈망의 형태에 스며든 삶의 철학들을 소개한다.

 

이른 아침의 산보에서 다가오는 평화로운 고독의 울림을 노래하는 워즈워스의 시 <서곡>에서부터 보물섬의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자유의 충족과 열린 마음을 가져오는 도보 철학에 이르기까지 고독한 산책자는 공동체와 하는 삶으로부터의 도피라는 은밀함이 주는 고독의 절대 요구성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당대에 이러한 혼자 있기에 대한 찬양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뚜렷한 목적 없이 배회하는 사람들에게 벌금을 부과하는 부랑자 단속법이란 것이 만들어지면서 산책이 부도덕한 행위로 간주되었다는 것이다. 당대의 귀족과 고위 관료들에게 평민들의 혼자 걷기는 유약하고 이기적이며 불온한 행동으로 보였기에, 단독 도보는 단체 보다 윤리적으로 훨씬 아래다.”라며 단체 행동, 공동의 추구에 따라야 한다고 했다고 하니 고독을 즐기기 위한 산책마저 금지 당하던 인간 역사의 추레함을 다시 확인하게 되기도 한다.

 

다시 산책, 홀로 걷기의 찬양으로 되돌아가보자. 바이런의 잘 알려진 연작 시집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2부에서 그는 집단의 부재와 미지 자연에 깃든 정기를 찬양한다.

 

길 없는 산을 오르는 것,

홀로 비탈길을 거품 이는 폭포 위로 숙이는 것,

이것은 고독이 아니리.

이것은 자연의 매혹과 대화를 지속하고 펼쳐지지 않은

자연의 보고를 보는 일일지니.” -69

 

혼자 있기의 수단이 여행, 등반, 산책, 그 무엇이 되었든 고독은 압박을 벗어난 해방감과 자연과 일체화되는 만족감을 준다. 직업, 공동체의 관습으로부터 벗어나 자기만의 시간이 주는 즐거움을 누리는 자유야말로 고독의 핵심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고독이 마냥 축복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오염과 부패가 만연한 지하 감옥, 그리곤 참혹한 공개 사형 현장이 제도와 규율을 제대로 갖춘 교도소가 된 것은 19세기 들어서 비로소 만들어졌다고 한다. 기독교가 지배하던 당대 유럽 사회는 수감자들을 영적으로 교화시키겠다고 독방에 감금하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한다. 모든 종류의 접촉을 차단한 채 독방에 가두어 놓았더니 사람의 정신을 파괴하고 죽이더라는 것이었다.

 

카톨릭은 고독의 공포 속에서 생명의 유한성을 생각하면 마음이 열릴 것이다.(164)”고 주장했다니 이 인간에 대한 몰지각과 몰인정의 종교가 인간의 생명, 그 존엄성을 인정하기까지 다시 1세기가 흘러야 했으니 아무튼 인간 역사는 수치스러움의 연속이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강제된 고독은 고립이라는 타율적 차단의 형태이지 고독의 개념과는 그 범주가 다르다고 해야 할 것 같다.

 

18세기부터 21세기 오늘에 이르는 흥미로운 고독의 역사라 할 이 책을 모두 열거하려면 지면이 한 없이 길어질 듯 하지만 고독의 위험을 경고한 조지프 콘래드의 소설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소설 노스트로모의 중심인물인 저널리스트 마르틴 데코는 섬에 남아 홀로 구조를 기다리다 고독사(孤獨死) 한다. 작자는 이 비극 원인을 작품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고독해서 죽은 것이며, 고독은 세상 사람들이 잘 모르는 적이고, 가장 둔한 자들만 고독을 견딘다.(229)”고 썼다. 절대 고독, 종일 새 한 마리 못 봤네, 온종일 이 중얼거림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완전히 적막한 하루였다. 평생 이런 날은 처음이었다.” 고독이라는 광활하고 무심한 세계에서 내적 목적의식을 찾을 수 없을 때 인간은 쉽게 허물어질 위험 앞에 그저 삼켜지기 쉽다.

 

이러한 고독의 위험에 맞서 내적 고독의 승화를 말하는 영국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존 쿠퍼 포이스의 신비주의적 고독의 철학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하겠다. 비록 오늘날 개인이 사회에 의존한다는 주장들이 힘을 지닐지언정 번잡한 생활 속에서 사회를 견딜 만하게 만드는 것은 내적 고독을 가꾸는 일뿐이라고 반박하는 그의 무형의 명상에 대한 강조는 내 고독의 추구에 강력한 지지가 되 주었기 때문일 것 같다.

 

대화를 중단하고 영혼이 장구한 세월의 중얼거림을 듣고,

우주의 신비를 느끼는데 필요한 고요를 만들어야 한다.” -234

 

그의 지적처럼 도시를 가득 채운 고층 빌딩의 막대한 괴물성과 장중한 공포가 발산하는 피로를 훌훌 떠나 자연의 유려하고 순수한, 오랜 차분함은 내 속을 흩뜨리는 욕망과 시기와 분노를 잠재워준다. 저자는 이것을 현대의 삶에서 인공적이지 않은 틈이 있다고 믿는 무모한 순진함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나는 고독의 소명이 무한한 위험을 안는 고뇌임을 모르지 않는다.

 

이제 외로움이 부상하는 오늘의 시대를 말하는 외로움의 치명성이라는 과장된 담론을 살펴보는 것으로 책의 소감을 마쳐야 할 것 같다. 영국의 건강 및 사회연구소의 2003년 보고서는 노년의 외로움이 현저히 증가한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고 결론지었다. 이는 우리 시대가 외로움을 상징적 실패로 규정지으려는 태도, 그리고 외로움을 야기하는 근본 원인인 슬픔을 소외로 이해하려는 오류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정신의학의 만연성은 외로움을 정신 질환화 함으로써 삶을 위협하는 요소로서 증폭시키는데 일조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외로움은 양으로 측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단지 어떤 외로움은 달리 이해될 뿐이다. 사실 여기에는 현대성의 실패를 의식하고자 하는 데서 비롯된 부정적 경향이 한 몫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을 제기하게도 한다. 물론 오늘의 사회가 경쟁적 이기심과 극단적 개인주의로 견뎌낼 만한 친밀감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를 고작 환상적 공간이 주는 쾌락의 세계에 맡겨 인간성의 본질인 연결성을 파괴하는 현실의 은폐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한다.

 

1인 가구가 가파르게 증가하고 혼밥을 하며, 문을 걸어 잠그고 들어앉는 것이 소외나 고립의 외로움이 아니다. 저자의 말처럼 오늘의 혼자 살기는 현대성의 병폐가 아니라 삶의 전략이라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스스로 강력하게 주장하는 혼자 있기는 사회 거부가 아니라 사회 참여를 배우는 필요 요소일 수 있다는 것이다. 외로움이 문제되는 것은 더 이상 도피할 여지가 없을 때이지, 고독과 집단으로의 참여를 언제라도 왕래하며 이를 조절 할 수 있는 상태는 삶의 건강성이며 균형이라 할 것이다. 점점 혼자인 것이 정상이 되는 세상이 되고 있다. 고독을 무한정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짧고 우연한 혼자인 순간들의 유형이 다양해지고 있을 뿐이다.

 

디지털 시대가 야기하는 소통 파괴와 인간관계의 진정함을 훼손하는 것도 사실임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이제 우리의 사회적 관계를 새롭게 이해하여야 하는 시대에 들어섰다. 어쩌면 오늘의 우리는 혼자 있는 시간에서 자아의 안정감과 공감능력을 강화하는 시선을 읽어야 하며, 함께 일 때 생산적 고독에 빠져드는 법을 익혀야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산책과 노동의 균형을 잡던 18세기의 사람들처럼 혼자 있기와 함께 있기의 슬기로운 지혜를 갖춰야 할 때다. 고독의 지혜가 풍부하게 묻힌 역사의 길을 거닐며 고독에 대한 빼어난 지식들을 무한하게 또한 매력적으로 쏟아내고 있다. 급격하게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어떻게 고독과 관계를 맺을지 생각하는 이들에게 아마 이 책은 매혹적 즐거움을 선사할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