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스 포풀리 - 고전을 통해 알고 싶었지만 차마 물을 수 없었던 모든 것
피터 존스 지음, 홍정인 옮김 / 교유서가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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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조건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우리 삶이 더욱 풍요롭고 만족스러워진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36

 

호메로스의 일리어드오디세이아가 그리스어로 구술되기 시작했던 기원전 8세기에서 서(西) 로마제국이 몰락했던 서기 5세기까지, 그리스와 로마 문명에 대한 '역사-고고학, 문헌학, 정치학, 언어학, 철학'을 아우르는 다각적이고 다층적 시선을 지닌 저술이다. 위의 인용 문장처럼 고전학은 당대의 삶을 대하는 태도와 방식으로부터 우리 시대의 관심사, 즉 삶을 결정짓는 현상들을 오늘의 시선으로 재해석하며 어떤 유익성을 발견케 한다.

 

책은 로마로부터 시작되지만 이보다 앞선 고대 그리스부터 시작하는 것이 수순일 것 같다. 그리스 문명이란 아테네, 스파르타, 테베 등의 도시 국가만을 뜻하지 않는다. 터키와 시리아지역인 소아시아 사람인 호메로스로부터 레스보스 섬 출신의 시인 사포, 터키 서해연안 밀레토스 출신인 탈레스, 사모스 섬 사람인 피타고라스, 남부 이탈리아 엘레아 출신의 제논과 같이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전 5~4세기에 이르는 대 철학자들과 시인의 출신지가 말하듯 그리스는 지중해 연안을 지휘하는 광대한 지역의 패권 문명이었음을 의미한다.

 

특히 기원전 338년의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의 그리스 권역 통일과 원정을 통한 영토 확장은 그리스어와 그들의 신이라는 문명이 근동과 아시아 깊숙한 지역, 아프라카 북부지역을 아우르는 광범위한 권역을 그리스화 했다고 말 할 수 있다. 이것은 공통 그리스어(코이네;Koine)라는 같은 말을 하는 인간과 지역의 거대한 확산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나 소아시아의 아탈로스 왕조 등 지중해 연안의 왕조는 모두 알렉산드로스가 정벌 후 남겨둔 후예 왕들이 정착해서 일궈낸 왕조들이다. 로마가 기원전 197년에서 기원전 149년에 이르는 장장 반세기에 걸친 그리스 복속의 기간은 지중해를 둘러싼 그리스 권역의 많은 패권국가들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야만이 문명을 정복하면 발생하는 것은 문명의 이식이다.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의 "포획된 그리스가 사나운 정복자를 다시 포획해 교양 없는 라티움에 문화를 가져다주었노라라고 말했듯이 로마의 그리스 복속은 로마의 그리스화로 이어진다. 그리곤 약탈한 그리스의 무수한 미술, 조각품, 각종 문헌들은 전례로서 모방되고 표준화되어 로마의 것이 된다. 결국 로마의 문명인 라틴 문명이란 그리스 문명의 라틴화라 할 수 있다. 로마는 결코 그리스를 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마치 오늘날 일본()이 한국을 잊지 못하는 것과 같은 현상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로마 제국에 흡수된 그리스어가 잊힌 언어가 되는 상황이 닥치는데, 로마 세계의 주요 정치권력이 되는 기독교 세력의 부상이다. 다신을 모시는 그리스 문명, 그네들의 철학과 사상을 기독교가 수용할 수 없었음은 당연한 귀결이었을 것이다. 서기 250년부터 기독교 교회는 라틴어만을 유일한 교회언어로 하면서 이후 1천 년 이상 그리스어 문헌은 서구 문명에서 사라지게 되는 운명을 맞이한다. 서구 유럽 전역을 장악한 기독교는 사실 인류의 문명을 거꾸로 돌려놓는 역할을 한 것이랄 수 있는데, 교회의 언어인 라틴어가 서구의 교육과 학문의 중심어가 되어 일종의 문화혁명인 계몽주의가 대두되는 17세기까지 중세 암흑시대의 독점적 권위를 구가하는 수단이 된 것이다.

 

이쯤에서 그리스-로마문명의 배경을 그치고 텍스트 안으로 들어가야겠다. 이 고전학 저술은 무진장한 독서의 즐거움을 주는 책이라 할 수 있는데, 그리스의 민주정에 대한 고전 탐색을 통해 현대 민주주의의 터무니없음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는 부분이나, 지식이 주는 쾌락이 치솟는 장이라 할 수 있는 제 5여자 위의 남자와 제 6황제와 제국에 이르면 책을 손에서 내려놓지 못하게 되기까지 한다.

 

민주정을 뜻하는 데모크라시(Democracy)의 데모스(Demos)가 당대에는 일반 시민이 아닌 부유층과 귀족층을 지칭하는 언어였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리스인들은 법 앞에 평등한'이라는 의미를 지닌 '이소노미아(isonomia)'를 사용했다고 한다. 데모크라시는 후대에 의미가 확장되어 사람 일반을 의미하게 되었다고 한다. 어쨌거나 이들의 민회(에클레시아)나 상임 평의회(프리타네이스)라는 18세 이상 남자들이 모두 참여하는 민회가 기반이었음은 많은 이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이야기다. 그런데 아르콘(archon)이라는 추첨으로 선출되는 행정관 중에서 스트라고테스로 불리는 군사령관 10명만은 그 기능의 고유성 으로 인해 매년 투표로 선출하는 예외를 두었으며, 임기가 종료되면 수행 업무의 잘잘못을 따져 10명 중 2명을 사형시켰다는 것이다. 실로 무시무시한 무보수 행정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는 부정부패가 싹틀 여지가 없었음을 말하는 것이리라. 여기에는 아주 특수한 이야기거리가 있다. 죽기까지 15년 연속해서 아르콘으로 활동한 페리클레스란 인물이다. 동시대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명목상 민주정이지만 실제로는 일인자의 제국"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아테네는 페리클레스 1인 독재정이었을까? 그릇된 국정 수행을 하면 민회에서 사형에 처해지는데 독단적 정책 수행이란 아예 불가능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는 민의 존중 정치가였으며, 타인 설득과 장악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수사학, 즉 웅변술이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하는데 얼마나 중요한 기술이었는지 가늠케 된다.


 




웅변술이 시민 자신을 지키고 의지를 관철시키는 삶의 필수 자질이었음을 보여주는 그 유명한 '네아이라 재판' 과정 사례가 소개되고 있다. 노예이던 네아이라를 해방시켜준 남편 프리니온이 오쟁이 지게되자 네이아라가 새롭게 살고 있던 스테파노스라는 남자를 고소하곤 배심원단을 향해 일장 연설을 하는 것이다. 그 판결 내용이야 오늘의 시선으로는 우습기 그지없지만 그 연설 내용이나 배심원단 투표 방식은 법 질서에 내재된 민주주의의에 대한 당대의 믿음을 보여준다. 네아이라 재판보다 더욱 흥미로운 사례가 있는데, 기소인이 내세운 죄목을 보면 이것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나하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내용이다. 기소 내용은 다음과 같다. 노예 출신으로 시민이 되었고, 본래 거지였는데 부자가 되었으며, 서기보였던 사람이 입법자가 되었다.(191)”

 

사실 이것은 죄가 아니지만 핵심은 피고가 된 인물에게 유력자인 적들은 분노를 일으켰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 사람이 법을 어겼는가?라든가, 위법을 증명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우리한테 자꾸 방해가 되는 이 자를 어떻게 혼내 줄 수 있을까?를 묻는 것이었다고 이해하면 이 기소행위의 저의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즉 시민 다수의 삶과 합치하지 않는 행위를 하는 사람에 대한 경고를 통해 공동체에의 결속을 다졌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이들의 민주정은 권력이 시민의 손 안에 있는 평등과 법의 연계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수평적 결속, 민주주의 이상적 실현 그것이었다.

 

이에 짧은 코멘트를 하고 가야 할 것 같다. 오늘날 우리들은 의회 민주주의, 대의 민주정치라며 민주주의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의 질문만으로도 이것이 궤변(詭辯)에 불과함이 분명히 드러난다. 선거에서 누가 후보로 나올지 누가 정할까?” 국민이 정하나? 아니다. 국민이 정하지 않는 후보들이 나와 알지도 못하는 자에게 투표하는 것으로 민주주의라 부른다. 이것이 엉터리인 것을 길게 말하는 것은 수고스럽기 만한 언어 낭비가 될 것이다. 그리스의 직접민주주의의 명칭과 외형성만을 빌려 사용할 뿐 전혀 민주적이지 않은 것이 오늘의 민주주의 제도 형식이다.

 

이제 이 책 최고의 즐거움을 주는 2개 장, 여자 위의 남자 황제와 제국을 말해야 할 것 같다. 그리스 로마 당대의 비문, 지금은 유실된 저작물, 연설문, 서간문을 비롯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유언장, 간통에 대한 소송 연설, 폼페이 벽의 낙서에 이르기까지 결혼생활과 자녀에 대한 관심 등 일반 시민인 남성과 여성에 대한 훔쳐보기는 즐거움에 들뜨게 한다.

 

기원전 452월 로마의 정치가 키케로가 출산 중에 사망한 자신의 딸 툴리아를 향한 슬픔으로 모든 대화를 단절하고 숲으로 들어가 고독과 책을 벗하며 삶을 버티지만 매번 별안간 터지는 울음에 지고 마는 자신의 상황을 전하는 벗에게 전하는 편지부터 아리스토텔레스의 유언장에 적시된 딸 피티아스, 아들 니코마코스, 아내 헤르필리스, 조카 니카르노에 대한 유산 배분과 이들에 대한 보호의무와 권리에 대한 것인데, 당대의 남자와 여자에 실체 상을 읽는 중요한 자료가 되어준다. 한편 자신의 코앞에서 다른 남자와 아내가 벌이는 은밀한 관계를 발견한 에우필레토스라는 인물이 간통한 사내를 살해하고 자기변호를 위해 하는 연설은 당대 여성들의 삶의 일면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이처럼 이러한 진귀한 사례들이 많은 지면을 차지하고 있는데, 역사적 그리고 주제의 일관된 지향과 어울려 이 책의 진가를 높여주는 부분이라 하고 싶다.

 

로마인은 불모지를 만들고 그것을 평화라 부른다.", 자기비판적인 인간들이라 한다. 하지만 이는 도덕 추구와는 하등 관련이 없는 이익 추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이들이 속주를 직접 통치하지 않았던 것은 도덕적 자질이 고매해서가 아니라 효율적인 이익의 향유만을 원했던 이유이다. 정기적 인구조사와 징세 체계를 정비하여 효율성 높게 세금을 흘러들어오게 하는 것으로 족했다는 것이다. 이들 문명화되지 않았던 속주민들에게 이미 그리스문명이 찬란하게 꽃핀 로마 제국의 화려한 아케이드와 욕장, 사치스러운 연회 등은 자연스레 그네들의 삶으로 침투하게 되었으며, 이를 문명화라는 미명하에 예속화가 별다른 장해 없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동시대의 역사학자 타키투스는 그의 저술 아그리콜라에서 식민지 브리타니아(오늘의 영국) 사람들은 서서히 부도덕한 쾌락에 물들어가고 있었다. 무지한 그들은 이것을 문명화라고 불렀으나 사실 그것은 예속화의 과정이었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로마의 태도와 요령은 지중해 지역의 로마화와 함께 넘쳐나는 부와 자만으로 스스로 붕괴하는 양극단의 현실을 가져온다. 국가의 세입의 원천을 틀어쥔 황제는 더 이상 정치 경영의 중심지인 로마에 있지 않았으며, 외딴 곳에 궁전을 짓고 해방 노예들의 조언과 결정에 의존하는 폐쇄된 의사결정으로 모든 것이 은폐된 시대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투스의 죽음과 전남편과의 자식인 티베리우스를 제위에 올리는 리비아의 추정된 음모는 역사가 타키투스의 연대기에서의 지적처럼 궁정의 은폐성, 그 정보의 철저한 차단성이 지닌 결정적 폐해를 시사한다. 정확한 실상을 외부의 그 누구도 알 수 없으니 소문이 억측을 쓰고 뉴스로서의 힘을 얻는 것이다. 가짜 뉴스 생산의 한 단면이다. 이처럼 밀실 정치의 해악은 인간 역사 내내 국가 경영의 참혹한 결과를 보여준다. 한편 이들 황제들이 시민을 자신의 편으로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스펙타클을 연 것을 자신들의 치적이라 말하는 것에서 저자와는 다른 관점에서 말하고 싶어진다. 피터 존스는 황제들이 시민의 눈치를 보고,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쇼와 거대 행사를 개최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시민의 비판적 저항 정신을 무디게 하는 일종의 최면술이라 하여야 하지 않을까?

 

우민화된 시대 대중은 거대한 검투사 경기와 전차 경주, 해상 전투 쇼에 넋이 빠져 그 흥분의 열정에 도취된다. 우리는 궁전 발코니에서 로마 전경을 내려다보며 노래를 흥얼거리는 쇼 맨 네로의 영상을 그릴 수 있다. 시민은 네로를 위해 환호했고 그의 편이었다. 그가 뱉은 말처럼 죽음이로다. 그 얼마나 위대한 예술가였나는 번영하던 로마가 왜 무너지기 시작했는지 이해하게 되는 구절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서기 238년 한 해에만 황제가 6명이었으며, 100년 동안 황제의 수가 60명이 넘었다니 위대했던 제국의 체제는 이렇게 무너져 내렸다. 아마 오늘의 말로 표현하자면 포퓰리즘이란 것의 폐해는 국가마저도 몰락시키는 역사의 증언이랄 수 있겠다.

 

이후 7~9장까지는 라틴어와 그리스어의 융합 흡수, 프랑스어의 사용과 고대 영어로부터 중세와 현대 영어로 정착하는 언어의 역사 과정을 쫓으며, 그리스어와 라틴어의 교육과 문법, 언어의 사회적 영향을 고전의 문헌들과 사료들로부터 그 의의를 탐색하며 현대적 의미로 새기고 있다. 여기에는 언어의 본성으로서 유비와 변칙에 대한 고대 사상가들의 학설은 물론 교육과 직접민주주의 필수 요소로서 언어와 수사학적 중요성을 추적하기도 한다.

 

10장의 스토아와 에피쿠로스로 대립되는 두 고대 철학사상을 대비하면서 인간 삶과 우주적 본질에 대한 의문에 대한 도전의 역사는 일신교 기독교의 대두와 함께 어떻게 이들 사상이 소외되거나 사멸되며, 흉측스런 누명을 쓰게 되었는지를 살핀다. 원자론과 영혼 불멸성에 대한 부정을 주장한 에피쿠로스가 감각적 욕망을 쫓는 쾌락주의의 누명을 쓴 것 역시 기독교의 박해라 할 수 있다. 스토아 철학이 살아남은 것은 스토아의 물질과 영혼의 이원론이나 선한 신과 세상의 악에 대한 그들의 신정론이 기독교의 입맛에 맞는 적절한 교리의 토대를 제공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늘의 인류에게 과학과 철학, 문학, 미술과 조각 등 예술, 그리고 인간 삶의 문명적 기반을 제공한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 대한 이 다 방향의 고전 탐색의 저술은 무엇보다 흔치 않은 흥미로운 사적(史的) 편린들을 총합하여 일관된 의미를 일구어내고,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그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성찰을 하도록 은근히 부추긴다. 아마도 이 책을 읽게 되는 이들은 책 속의 무수히 소개되는 고대의 사료들이 제공하는 사례에 빠져 그 지적 즐거움에서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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