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어둠을 밝힐 불빛이 없어 세상이 이렇게 어둡다고들 얘기한다.

나는 이러한 시선에 그리 관대하게 동의하기가 어렵다.

정말 불빛이 없어 한국 사회가 어두운 것인가?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도시의 밤 거리도 대낮처럼 밝지 않은가?

철학자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은 『반딧불의 잔존』에서

오늘 사람들이 반딧불을 볼 수 없는 것은 이것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불 정도로 충분히 어두운 곳에 사람들이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했다.

불빛이 없어 어두운 것이 아니라 어둠을 내치고 몰아내는 불빛만 있는 세상이어서

그 밝은 불빛 탓에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정작 시야에서 사라지게 한 어둠이 그대로 남아 있어 밝은 대낮 같은 세상에도

어둠이 가시지 않으니 빛 타령을 하며 본질을 외면한 주장들을 넘치도록 하는 것 아닐까?

그래서였을까? 시인 장혜령은 보고 발견하고 그리고 깨우침의 시간을 갖기 위해서는

충분한 어둠이 있어야 한다고 산문집 『사랑의 잔상들』 에 쓰고 있다.

우리의 세계는 어둠은 커녕 온통 빛의 홍수이고,

잠깐의 단절도 참지 못하는 고독이 부재하는 시간을 잘 사는 삶이라고 까지 떠들다보니

막상 정말 제대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피상적 무사유의 언어들만이

넘실 댈 까닭 밖에 없는지도 모르겠다.

극장은 영화라는 이미지를 위해 어둠의 장막을 내리고,

꿈을 꾸기 위해서는 잠의 어둠에 잠겨야 한다.

글의 진정한 함의, 그 이면의 사유를 탐색하기 위해서는

어둠의 터널을 통과하는 고독의 시간을 지나야 한다.

밝은 빛만 내리 쏟아지는 세계는 위장과 가면들, 과시와 무사유가 점령한다.

아무것도 꿈 꾸지 못하고, 적나라한 그 무엇도 내비치지 못한다.

눈 감고 저 깊은 사유의 언어를 끌어 올릴 겨를을 가지지 못한,

이런 시간을 견뎌낸 언어를 지니지 못한,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이 세계를 차지한다.

디지털 혁명의 세계? 광소자가 빛나는 그 환한 가상의 공간은 생명의 에너지를 고갈시키고

아무런 사유의 자리도 남기지 않을 정도로 사람들을 빨아들이고 있다.

점점 어둠을 상실해가는 오늘, 우리는 의지처를 찾지 못해 서성거리는 마음에게

어둠과 고독이라는 존재의 지혜를 선물해야 한다.

빛이 찬연한 곳에는 프레카리아트(precariat)가 보이지 않으며,

그 어떤 고통의 사건도 드러나지 않는다.

어둠의 공간으로 가야지만 이들의 모습과 상황이 보인다.

빛 속에서는 너무도 많은 것들이 은폐되어 있어 세계를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게 된다.

우린 어둠의 권력을 포기하거나 잃어버리고 있다.

어둠을 되찾아야 꿈도, 소망도, 사랑도, 사람들도 발견 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우리가 찾아야 하는 것은 불빛이 아니라 어둠인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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