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 - 융합과 횡단의 글쓰기 정희진의 글쓰기 5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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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합은 아는 것을 버릴 수 있는 용기와 다른 입장에 대한 탐구력이다.” -155

 

 

이 사회에 차고 넘치는 말들이 정작 소통을 방해하고 사회갈등의 주 원인이 되는 까닭에 대한 규명이며, 이를 넘어서기 위한 앎에 대한 지향을 역설하는 신랄한 비평 에세이다. 그것을 저자는 융합이라 표현하며, 지식의 필요성과 쓸모와 가치에 관한 질문과 논쟁하는 일(51)”, “인간 스스로 자신을 아는 과정(110)”이며, 의미의 도덕을 추구하는 마음가짐(16)”이라 정의한다.

 

우리는 어떤 언어로 말하고 있는가? 우리가 극복해야 할 인간들의 언어로 우리의 현실을 말할 수 있는가는 중요한 물음이다. 또한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극히 부분적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즉 아는 것만을 보고, 모든 것을 하나의 잣대로만 평정하려는 무지의 폭력을 휘두르는 것에 대한 판단정지의 용기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세상을 보는 시각이 마치 하나라는 양 이 사회를 거대한 돌처럼 변화없는 단일한 조직(160)”으로 인식하는 권력화된 무지, 자신이 한 말의 의미를 모르면서 여론을 주도하고 지도자가 된 작금의 현실만큼 우리 공동체가 위험해졌다는 인식이 근접했던 적이 없다. 왜 이러한 상황이 발생했을까? 저자는 이 파국의 시대를 재촉한 요인의 하나로 한국 사회의 낮은 문해력을 설명하고 있으며, 그 둘째는 지배자, 강자, 착취자의 언어인 문화권력, 즉 보편성이라는 언어의 폭력성을 지적하고 있다.

 

사실 책에 열거된 세계 다르기 보기를 위한 쓰기에는 자유, 표절, 이성, 이분법, 미국주의, 환원주의, 구조적 모순 등 무수한 문제적 사유의 물음들이 담겨있지만, 어쩌면 문해력과 보편성이라는 두 주제어의 범주로 설명가능 할 것이다. 물론 그 총체적 단일 언어는 융합혹은 횡단의 정치로 수렴하겠지만 말이다. 결국 이 모든 문제의식의 출발은 앎의 문제이다.

 

자신의 위치를 모르는 앎은 무의미하거나 대개는 사회악이다.” - 59

 

고작 편협하게 알고 있다고 여기는 것들의 관념의 변죽만 울려대며, 실상은 아는 것이 없는 까닭에 모든 문제 제기가 돌고 돌아 좌빨, 페미니스트, 틀딱 같은 차별과 혐오의 언어로 귀결된다. 이렇게 세상의 모든 현상이 하나의 출구로 빠지는 깔때기 이론을 환원주의라 한다. 이것에는 세상을 보는 시각이 하나 밖에 없다는 편협성이 놓여있으며, 마치 그것이 보편성이라는 진리의식을 갖는다고 여기는 우매한 폭력성 또한 똬리를 틀고 있다. 지금 우리의 공동체를 불안한 위험에 빠뜨리고 있는 권력이 말하는 보편적 가치란 이 깔때기 주의의 다른 이름이다.

 

지금의 권력은 스스로 자신을 아는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대체 어떤 보편적 가치를 수호하겠다는 것인가? 부자 감세의 보편성? 공기업 민영화의 보편성? 사회안전망 해체의 보편성? 이처럼 보편적 가치의 대상도 문제지만 오늘의 세계는 불변하는 보편적 가치는 존재치 않는다. 기회의 평등? 이것은 불평등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보편적 가치를 적용할 수 있는 조건이 사람이 처해있는 위치마다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무수한 차별의 조건들이 현재하는 데, 보편적 가치란 그야말로 거짓의 언어, 무지한 대중 속이기의 잡설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자유를 부르짖기까지 하는데, 이건 정말 위험하기 그지없는 무서운 말이다.

 

자유란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 무엇인가에 따라 달라지는 개념어이다. 경쟁사회, 소음과 먼지, 타인의 시선, 신분차별, 신자유주의...,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인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 말이다. 자유는 결코 그냥 주어진 적이 없다. 모두 투쟁으로 쟁취해 얻어야 하는 것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서 그냥 부자유 상태로 산다.(28)” 그런데 자유, 자유를 외치는 윤정권의 자유는 개인적 차원의 자유이다. 내 뜻대로, 내 맘대로의 자유이기에 소름끼치는 것이다. 그런 자유는 혼자 있을 때 맘대로 하면 된다. 공동체에서 자신의 이런 자유를 행사하려하면 타인을 다치게 한다. 결국 이 자의 자유는 타인이라는 국민 대중의 존재를 무시하고 자기 생각대로 하겠다는 것의 표현일 뿐이다. 조물주라도 된 듯 생각대로 자유를 행사하게되면 그 삶은 오래지 않아 멸망하게 된다.


 



왜 이런 무지와 무능력이 이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이 되었을까? 저자는 분단(分斷)체제를 기반으로 하는 이분법이 한국 사회를 장악하고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이 이분법이 한국사회의 낮은 문해력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북, 반미, 친일 ... 이러한 언설을 생명줄로 삼는 반국가적 사회에서 어떻게 문해력을 논하겠는가?(95)”라는 한 문장이면 그 설명으로 족할 것이다. 앎의 궁극적 목적이란 배제없는 온전함(108)”이다. 경계와 선입견 없이 모든 것을 수용하는 자유로운 가능성의 상태, 적어도 상상력이라도 갖추는 것이다.

 

문해력이 낮다는 말은 실제로 문해력이 낮다는 것과, 이해하지 않겠다는 맹목의 의미를 갖는다. 낮은 문해력은 소통에 장애를 일으킴으로써 사회갈등의 주 원인이 된다. 인터넷 검색창을 통해 정보를 얻는 것은 이미 아는 것의 구체화이지 새로운 정보의 획득이 아니다. 모르는 것은 검색하지 못한다. 이 말은 자기 옹졸한 한 움큼의 지식을 굳게 하는, 즉 변화하지 않겠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지식도 품지 못한다. 더구나 긴 글이나 조금만 익숙지 않은 문장에도 스트레스를 받으며, 자기 무지는 외면하기 일쑤다. 문해력은 자신의 가치관과 무지에 대한 자기 인식의 문제라는 지적처럼, 나는 모른다는 겸허한 앎의 태도는 우리의 사회를 위해 중대하고도 또 중요한 출발점이다.

 

내 자신이 무지하다고 가정하는 것은 정말 굉장히 어려운 노력을 요구한다. 공부가 중노동인 이유이다. 사유는 고통스럽고 외로운 노동이다. 이러하다보니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범위 안에서 편협하고 속된 믿음을 만들어낸다. 일례로 1934년 한 일간지에 연재되던 일제 강점기 식민지민의 침해된 권리를 말하던 이상의 오감도(烏瞰圖)가 무슨 말인지 모를 시의 게재를 중단하라고 항의하던 독자들로 인해 연재를 이어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역사는 이렇듯 독자의 수준이 만들어간다. 무지가 역사를 만들어내는 이 폭력성이 결국 자신들을 신음하게 하는 것임을 알지 못하는 이 낮은 문해력이 문제인 이유이다.

 

낮은 문해력은 궁극적으로 좋은 지식 생산의 토양을 파괴한다. 지식 생산을 궤멸시키는 요인에는 표절도 한 몫하고 있는데, 마치 단순한 사적 윤리의 문제처럼 치부하고 마는 만연한 도덕 불감증이다. 표절은 윤리문제가 아니라 법적 문제로 심각하게 다루어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공정거래를 해치는 가장 부정의한 도적질이라는 점이다.

 

표절로 받은 학위로 돈벌고 고용의 수혜를 입는 것이라면 이보다 악질적 행위가 있을 수 있는가의 물음이다. 보석 훔치는 것보다 훨씬 쉬운, 그냥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표절이라는 이 절도에 대해 이 사회는 왜 이리 무감하며, 표절자의 당당함은 어찌 가능한 것일까? 이 표절자가 버젓이 지식인 행사를 하다보니 이 사회의 지식 생산은 바닥을 해매고 천박함이 오히려 권력을 행사하며 양양거린다. 자신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인지하는 방법은 쓰기와 과학적 실험이라는 방법 외에는 별 개 없다. 그래서 쓰기는 앎의 중요한 출발점이다. 쓰지 않고 베끼고 복사하는 세계에 진정한 지식은 결코 생산되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사회의 여론을 온통 지배했던 세 가지 사건을 예시하고 있는데, 저마다 다른 동기와 유형을 지닌 사건이다. 그런데 이 사회는 이들 모두에 동일한 결론을 내린다. 다른 사건인데 결론이 같다는 것은 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이는 곧 하나의 잣대로 모든 것을 재단하려는 폭력의 다름 아니다.  사회변화, 차별받고 배제되는 약자들은 새로운 언어로, 지식의 재해석을 통해, 나아가 기존의 지식을 넘어 새로운 앎을 향한 경계넘기를 시도해야 한다. 그 방법론이 곧 새로운 지식 생산이 가능한 자기 무지의 고통스런 인식이다.

 

안다고 여기는 순간 그 어떤 지식 생산의 영역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지식이 생산되지 않을 경우 그 사회적 고통은 오롯이 현실에 대처할 수 없는 약자들의 몫이다.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고, 제시된 언어의 개념 내부에 도사린 차이를 드러내고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하기 위해서 우리는 앎을 위해 부단히 공부를 하여야 한다. 그 공부가 곧 문제의식이요, 융합이다. 역사는 공동체의 안목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 결과는 바로 그 공동체의 안목의 결과일 뿐이다.

 

이 책의 새로운 언어를 위해 쓴다는 표제는 바로 이러한 앎, 융합의 출발을 함의한다. 이 책은 세상을 보는 열린 시각을 지니기 위한 그 지향의 제시로 가득하다. 지배이데올로기와 계급을 끊임없이 재생산하여 기득권을 항구화하려는 주류의 언어를 탈피하여 진정한 시민의 언어를 재창조하기 위한, 또한 우리네 좁아터진 앎에 훌륭한 채찍이 되어 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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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2-08-18 19: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필리아님 안녕하세요, 희진샘 이번 책 정말 필요한 말들로 이루어져있지요? 군더더기 없이 신랄한 비평(?) 리뷰를 읽으며 감동받고 갑니다..^^!!

필리아 2022-08-18 19:30   좋아요 1 | URL
네, 앎의 지평을 넓히려는 좋은 책입니다.
세대를 망라한 많은 이들이 읽어주었으면 하는 바람뿐입니다.
공감의 말씀 고맙습니다. 공쟝쟝님 :)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듀나 지음 / 네오픽션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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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4차 산업 혁명의 물결이 아직은 미치지 않았던 시절, 11년 전인 2011년에 발표, 출간된 Sci-Fi 작품집이다. 작가의 통찰력이 발산하는 지적 묘미는 오늘에 더욱 그 의미에 생생하게 감응할 수 있는 소설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2022년에 이르는 십년 사이 포스트인본주의 기술의 윤리적 성찰을 요구하는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가 독서계를 달구기도 했으며, 이제는 이 작품집의 많은 소재들이 현실적 물음을 제기하는 실재적인 것이 되기에 이르렀다. 어쩌면 이번의 개정 출간은 더욱 실감하는 새로운 성찰로 안내해줄 지도 모를 일이다.

 



자신들의 실체조차 여전히 모르는 인간들이 마치 모두 알고 있다는 듯이 그 한계를 망각하고 자행하는 행위에 대한 조롱일 수도 있으며, 어떤 측면에서는 물화(物化)된 인간의 기계주의적 사유에 대한 역설적 예찬으로 비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고작 자아나 의식이 하는 보잘것없는 이해 그 이상의 심연에 대한 겸허함으로의 회귀를 주창하는 것 같기도 하다. 작가의 진실이야 어찌되었든 이러한 본원적 의문을 던지는 그 자체만으로서 이 단편집은 흥미로움 덩어리라 할 수 있다.

 

우선 문학은 말할 것도 없이 사회학이나 철학을 비롯하여 종교, 문화인류학, 신경생물학 부분 등 인간의 불멸에 대한 희구가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담론은 존재론적 논쟁을 지속적으로 야기한다. 해서 수록된 총 13편의 장단편(短篇), 단지 신체로서의 인간에 공생하는 의식이자 영혼이라는 존재를 통해 삶과 죽음, 즉 부조리로 고통스러워하는 인간의 이원론적 산물인 디북은 세상과 생명에 대한 궁극의 진실을 말하고자 애를 쓴다.

 

보이지 않는 영혼에 실체라는 존재자를 설정함으로써 인간의 육신을 분리한다. 과연 분리될 수 있는가는 이 작품의 주제가 아닌 듯싶다. 인간의 의식을 구성하는 재료로서의 이 존재가 지구 생명체에 깃들어 공생함으로써 불필요하게 인간을 괴롭혔다고 얘기한다. 그래서 이 존재들이 새로운 숙주인 자신들의 삶의 공간을 마련하고 생명체들을 떠나는 것은 곧 인간의 죽음, 아니 아무것도 인식할 수 없는 무념(無念)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라고,

 

처음부터 삶과 죽음은 결코 이렇게 기형적인 방식으로 묶여서는 안 되었다. 지구의 생명체들이여, 안녕.”이라고 유감을 외친다. 이원론적인 기독교의 종교적 색채가 물씬 풍기는데, 우리의 자아라는 것이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무의식, 잠재의식은 물론 감각기관을 비롯한 감성의 세계인 신체를 이탈한 정신이 가능한 것인가라는 생각에 이르면 사실 공허한 얘기가 되어버리고 말지만, 출생의 기원이자 저 지옥이라 불리는 모체의 아득한 게헨나(Gehenna)의 세계, 암흑과 죽음의 공포를 그럴듯한 또 하나의 신화로 안내하는 사색으로서 깊은 인상을 남긴다.

 

한편 죽음과 세금같은 작품은 짙은 현실 참여적 색채로 우리사회에 신랄한 풍자의 메스를 들이대는데 역시 경제적 효율, 공리주의를 잇는 절대 실용주의가 생명의 가치를 초월한 몰가치로 질주하는 오늘을 냉소적인 해학으로 지펴낸다.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고 있는 지구촌의 경제적 과제를 해결하는, 어쩌면, 아니 가능성이 높은 암울한 우리의 미래상일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의 수명을, 개인의 삶과 죽음을 조작하고 통제하는 신()적 존재, 기관, 시스템..., 시스템이라는 자신들이 만든 기계에 기꺼이 복종하고 물질과 소비의 향유를 맞바꾸는 그런 사회의 도래 말이다.

 

이처럼 오늘의 인간을 지배하는 기계, 과학이라는 합리주의 만능의 사유는 심각한 결핍을 가지고 있음에도 결코 인정하려하지 않는데, 이러한 문제제기는 수록된 여러 작품에서 발견하게 된다. 소유권이라는 작품에서 죽은 자의 소유였으나 주인 없이 방치된 부양품(浮揚品)6살 소녀모습 텔렉 로봇의 자기 정체성의 발현이라는 우화를 통해 사랑과 같은 감성이 물질처럼 소유대상이 될 수 있는가라든가, 정원사에서는 외계의 작은 공간에서 정원을 가꾸는 한 생물학자의 오만에서 인간의 상상력이나 창조력이란 것은 부품이나 모듈을 짜 맞추는 재능 이상이 아님을, 다시 말해서 인간의 의식이라는 것은 정말 보잘것없는 것임을 드러내고 조소하며 안타까워한다.

 

이 소설집의 표제가 된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는 다소 이색적으로 느껴짐에도  링커 바이러스라는  범 우주 네트워크 환경통합 과정으로서 오늘의 세계화된 자본주의 체제로의 통합과 대비되어 인간 욕망의 무차별적 잔인성에 대한 기막힌 메타포로 소설적 감동의 여진이 제법 큰 작품으로 느껴진다. 게다가 고립된 사회로서 북한의 등장이나 게걸스러운 육식동물로서의 장면들은 그 혐오스러움 만큼이나 극명하게 비관적인 오늘의 자본주의의 속성을 그려내고 있다.

 

이 링커 바이러스라는 단어는 안개 바다에서 다시금 등장하는데, 다윈 생태계가 단절되고 링커 생태계라는 새로운 진화체계로 이전된 변종의 세상으로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지옥을 탄생시키고 있다. 사실 모든 사회비판적 문학 작품에서 반복되는 주제라서 진부할 수 있음에도 SF적 요소는 다른 차원의 맛을 느끼게 해준다. A,B,C.D,E & F, 메리고라운드와 같은 비교적 재치 넘치는 소재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 있기도 하지만, 역시 작가 듀나의 비평적이고 사색적이며 기원적인 통찰을 요구하는 작품 세계는 이 소설집에서도 그 빛을 잃지 않고 통렬하고 준엄한 사유로 독자의 기대를 채워준다.

 

당신들은 죽음을 향해, 우리는 삶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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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 윌북 클래식 첫사랑 컬렉션
제인 오스틴 지음, 송은주 옮김 / 윌북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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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시대 배경으로 추정되는 18세기 말 영국사회는 산업혁명과 식민지개척으로 물질적 부를 쌓은 신흥 부자들이 출현하고, 전통 귀족 문화를 동경하던 이들이 귀족의 작위 거래를 통해 자신들의 신분을 세탁하던 시대라 할 수 있다. 주인공인 앤 엘리엇의 신분, 즉 사회적 계급을 대변하는 그녀의 아버지 월터 엘리엇준남작을 간결하게 설명하는 다음의 문장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으로 인해 무수히 함축된 의미를 전달해준다.

 

월터 엘리엇 경은 허영심을 빼면 시체나 다름없었다.” -9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가 살던 1650년대에 이미 국왕의 부족한 재정 충당을 위해 제한된 귀족 작위의 남발을 피하면서 가장 낮은 작위인 남작에 준하는 준남작을 판매했다는 얘기가 있다. 엘리엇 가문도 이러한 범주의 한미(寒微)한 가문으로 추정될 수 있을 것 같다. 월터 경이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은 외모(얼굴과 피부)와 옷차림이며, 이를 통한 재산의 많고 적음을 구별하여 상대할 대상인지를 판별한다. 아마 이러한 가치관이 당대 영국 주류 사회의 지배적인 인식이었던 것 같다.

 

준남작 명부라는 변변찮은 가문 소개 책자만을 읽는 켈린치 홀로 불리는 저택과 영지의 주인인 월터 경을 묘사하는 소설 첫 문장부터 그가 붙잡고 놓지 않으려는 신분적 권위의 집착은 그 외에는 어떠한 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존재임을 역설적으로 부각시킨다. 이 명부에 기재된 내용을 통해 아내 레이디 엘리엇의 사망, 엘리자베스, , 메리, 세 명의 딸이 자연스레 소개되며 소설 무대에 등장한다.

 

작품의 서사는 이 시대의 허영과 위선적 가치, 즉 월터 엘리엇 가문에서 소외된 둘째 딸 앤 엘리엇의 사랑의 귀결을 쫓는 단순한 구조를 지니고 있지만, 작가 제인 오스틴은 이 사랑의 여정을 통해 시대적 가치를 세련된 비판으로 녹여낸다. 월터 엘리엇 가문의 법적 승계자인 먼 사촌 윌리엄 엘리엇이란 인물은 아마 당대의 사람들이 지니던 가치관을 대표하는 인물이랄 수 있다. 그는 작위나 영지의 승계, 월터 경 가문과의 교우 등에 대해 혐오를 보이며, 이들과의 만남조차 회피하며, (재산)의 가치를 삶의 최우선으로 삼는다. 이러한 태도는 후일 급격하게 변질되어 적극적으로 월터 엘리엇 가문에 친화적 자세로 돌변하는데, 이러한 변화 또한 부정하게 쌓은 부를 완전하게 과시하기 위한 신분의 확보를 위한 위선에 지나지 않는다.

 

한편 앤은 결혼한 동생 메리의 간호 요청으로 가족과 함께 새로운 거처에 동행하지 못하고 동생의 집에서 머물게 되는데, 이 때 메리의 시댁인 머스그로브집안은 중산층의 화목함, 서로 응원하는 가족으로서 그 평범성의 안정감을 월터 가문과 대비하여 비춘다. 스물일곱 살의 앤은 사랑했으나 가족들의 반대로 헤어져야 했던 칠 년 전 연인 프레더릭 웬트워스의 누이가 켈린치 홀의 세입자인 크로프트 제독의 아내임을 알게 되고, 웬트워스와의 불가피한 마주침을 고통스럽게 가다리게 된다.

 

그런데 두 사람의 약혼을 반대했던 이유가 당시 무일푼의 보잘 것 없는 해군 장교라는 것이다. 하찮은 준남작이라는 귀족의 신분을 내세우며, 상대의 신분과 재산을 싸잡아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다. 앤을 비롯한 월터 가문의 보호자인 레이디 러셀은 다소 지성을 겸비한 이성적 여인으로 앤에 대한 지극한 연민과 보살핌을 자처하는 인물이지만 그녀 역시 이러한 가치관을 벗어나지 못한다. 세상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앤은 러셀 부인의 극력한 만류로 인해 연인과 헤어지는 결정을 했었음을 회고한다.

 

소설의 제목인 설득은 이러한 중대 사안, 또는 선택을 하여야 하는 어떤 상황에서 상대를 자신의 의견으로 복속시키는 언어이다. 이것은 월등한 지성과 경험, 사회적 권위를 지닌 존재의 언어가 미성숙한 상대에게 행해질 때 그 효과가 성립한다. 결국 소설의 이야기들마다 전환적 상황을 맞이할 때 독자는 이러한 설득의 장면을 거듭 목격하게 되는데, 앤의 약혼 상대자 반대라는 부정의 설득이 많은 설득의 장면을 거쳐 연인의 사랑 확인을 만들어내는 긍정적 설득으로 맺는 것도 흥미롭다.

 

이 긍정의 설득은 권위에서 평등의 주체로의 이동을 전제로 한다는 점이다. 서사의 삽입 구절처럼 이어지는 머스그로브 집안의 두 딸과 웬트워스 대령, 그리고 그의 해군 동료들인 하빌, 벤윅 대령에 얽힌 배려와 우정, 우연한 사랑의 결실 등은 인간 내면의 예측 불가능성, 연민과 사랑의 우연성에 대한 아름다운 풍경들을 양념처럼 비추어준다.


 



아마 소설 속에서 하빌 대령 부부가 사는 라임 지역 여행은 가장 밝은 햇살이 비치는 장면들이며, 서사적 전환점이 되는 중요한 매개적 이야기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웬트워스와 앤, 두 사람 각자 옛 사랑에 대한 자기 검증, 확인의 시간이기도 한데, 이것은 앤의 주변인 귀족적 신분이나 부의 높낮음 등을 벗어난 오직 사람 자체에 대한 이해를 넓혀가는 주체적인 인간으로서의 자기 발견의 순간이기도 하다. 또한 어렴풋한 사랑의 회복이 시작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갑자기 거리를 산책하던 앤 일행이 비를 마주하게 되어 잠시 건물 내에서 마차를 기다리는 장면이 있다. 앤과 웬트워스는 확인하지 못한 서로의 감정으로 선뜻 다가서지 못하는 고통을 안고 있던 차에 다시금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마주하는 것인데, 이때 앤은 자신의 감정을 이렇게 토로한다. 너무 놀란 탓에 가슴이 답답하고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정신을 못 차릴 것 같은 (...中略...) 동요, 고통, 기쁨, 희열과 비참 그 사이 어딘가의 감정이었다.(161)” 이 구절은 제인 오스틴의 빼어난 묘사의 절정을 보여주는 것 같기만 하다.

 

두 연인의 옛 사랑의 확인을 향한 오르고 내리는 감정의 기복을 바라보는 것도 재미의 한 요소이긴 하지만 시대적 가치관을 내재한 인간 상()을 읽는 것도 또 다른 흥미의 요소이다. 사실 월터 경과 큰 딸 엘리자베스는 전통적 신분이 지니는 허영과 위선에 사로잡혀 있는 인물들이랄 수 있다. 이들이 먼 집안 사람들인 달림플 자작 부인과 그 영애에 친분을 맺으려는 경박함 등은 그네들의 사치스런 복장과 우아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천박한 무엇으로 다가올 뿐이다.

 

한편 가문의 승계 내정자인 월터란 인물은 사람의 지성과 품격 보다는 재산을 최선의 가치로 하며, 실제 미천하지만 재산이 많은 여인과 결혼하여 부를 차지하고, 아내가 죽자 이를 과시하기위한 안정적 위신, 즉 가문의 작위와 영지를 차지하기 위해 예전에는 하찮게 여기던 월터 경의 집 문턱이 닳도록 들락거린다. 더구나 품위와 지성을 겸비한 앤 엘리엇의 발견은 자신의 지위를 돋보이기 위한 배경으로 맞춤이라는 생각이다. 그에게 여성은 상품이며 배경이지 사랑과 존경, 배려를 나누는 상호 평등한 인격관계가 형성되는 그런 존재가 아닌 것이다.

 

이것은 빈곤한 처지에 시달리는 옛 동창인 스미스 부인을 방문하여 위로하고 말벗이 되어 준다던가, 가족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 대한 배려와 보살핌, 연민이 일상화된 앤과 대척이라 할 수 있다. 아마 이러한 시대성의 중립적 인물은 러셀 부인이라 통하는 레이디 러셀일 것이다. 그녀는 신분제와 재산이라는 정형화된 인간 범주화의 인식을 지니고 있지만, 겸허한 지성을 갖춘 시선의 소유자로서 앤의 영향으로 점차 새로운 시선, 평등한 인간관, 사람 자체에 대한 가능성의 시각으로 관대한 사유의 이전을 보여준다.

 

사랑하는 연인 앤과 웬트워스가 신분적 차별이라는 장벽과 사람들이 지닌 시대적 편협성을 넘어서고 자신들이 평등한 두 주체의 만남으로서의 결실을 이루어내는 결정적 장면까지 묘사하지는 않겠다. 반복하여 읽을수록 시대성을 돌파하려는 작가의 의지가 곳곳에서 발현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작품이다. 그것은 단지 여성의 독립적인 주체성 발견만이 아니라 물질과 형식적 예절이 뒤범벅되어 허영에 찬 위선이 선으로 행사되는 그러한 시대에 대한 자각과 비판이다. 단순함 속에 인간 의식의 다양성을 품어내는 유쾌한 작품임에는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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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베개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3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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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한 것을 자유롭게 내던지고 해진 갓 안에 한없이 상쾌한 여름 바람을 담는다.” 

- 87

 

세계의 이해(利害)관계에 얽매여 있지 않은데도 마음의 분주함과 심사의 사나움을 떨쳐내기 쉽지 않은 시절이다. 나쓰메 소세키가 그리는 선경(仙境)을 거니는 듯 봄 햇빛이 여유로이 비추는 산골 마을 비인정(非人情)의 세계를 향한 까닭이다. 아마 괴로움, , 사리사욕이 분출하는 인정(人情)을 벗어날 수 없는 도시를 떠나 있는 그대로의 나를 완전히 잊고 순수 객관에 눈을 맡긴 채 자연의 경치와 일체가 되는, 오직 존재하는 것은 마음뿐인 그런 무위(無爲)의 시간에 온전히 잠기는 순간이 그리웠는지도 모르겠다.


 



산속 구불구불한 길 위에 부슬부슬 내리는 비에 젖은 채 화구(畵具)를 메고 걷는 남자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을 바라보는 듯 취하게 한다. 남자는 화가이며 시인이다. 그는 산길을 걸으며 비인정을 다짐한다. 어떠한 이해(利害)의 밧줄에도 얽매이지 않는 집착으로부터의 해방, 고요의 세계로의 침잠을 통해 진정한 그림, 화가의 길을 찾는다. 나는 작가 소세키가 추구했던 예술의 지고(至高)를 향한 일본적 자긍심은 회피하며 읽는다. 오직 마음의 평정, 잠시라도 비인정(非人情)의 천지를 소요(逍遙)하고자 하는 읽기에 열중한다.

 

이제 빗길을 걷고 있는 남자에겐 괴로움이 없다, 그저 경치를 한 폭의 그림으로 보고 한 편의 시로 읽는 이에게는 오직 티끌만한 고통도 없는 산 속 종달새 소리와 노랗게 피어있는 유채꽃 군집만이 있을 뿐이다. 산길 모퉁이에 자리잡은 찻집을 경유하여 여장을 풀 나코이 마을 숙소를 향한다. 찻집에서 듣게 된 이혼하고 돌아 온 여인이 운영하는 산골 마을 여관, 근처의 조금은 넓게 만들어진 가가미가 연못과 산사(山寺) 간카이지, 내려다보이는 푸른 바다와 나무와 잡초가 우거진 자연은 신선의 마을처럼 모든 것이 분별의 자물쇠를 열고 집착의 빗장을 벗어난 아득한 고요함으로 가득하다.

 

화공(畵工)은 순간순간 마음에 닿는 세계를 열일곱자 하이쿠에 담아내거나 당시(唐詩)를 곁들이며 비인정의 풍류를 한껏 즐긴다.

 

동쪽 울타리 아래서 국화를 꺾다보니,

한가로이 남산이 들어오네

採菊東鬱下 悠然見南山 - 22

 

장지문 밖의 밤 풍경 속에서 들려오는 천하의 춘한(春恨)을 모두 모으는 듯한 노래를 부르는 인물을 생각하다 잠 못 이루고, 오매(寤寐)의 경계를 소요(逍遙)하고 있을 때, 환영처럼 홀연히 나타난 여자의 그림자를 느낀다. 어떠한 양해도 없이 미끄러져 들어와 살금살금 걷는 여인, 이 낯선 여인은 남자의 심상에 맺혀진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의 그림 속 오필리아에 대입되어 마음뿐인 비인정의 세계와 대상의 선택이 불가피한 인정의 세계와의 절충, 그 모순 속의 조화를 향한 모델이 된다.

 

남자는 느낌없이 물체만 있으면 되는 그림, 물체와 느낌이 양립하는 그림을 넘어 제 3의 그림을 추구한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마음뿐인 그림. 그러나 그게 어디 가능한 일이던가. 그저 감흥에 빠진 마음을 얼마간이라도 전하여 다소의 생명을 어렴풋한 분위기로 보여줄 수만 있어도 인간 세계 최고의 그림이 될 테니 말이다.


 



남자가 수시로 드나드는 시적, 회화적 입각점(立脚點)에 들어서, 절로 떠오르는 심상은 선경(仙境)을 향한 그리움에 가깝다.

 

문득 고요한 하루 얻었으니,

백년이 분주한 줄 알았네.

아득한 심사 어디에 둘까,

멀기만 하구나, 신선의 마을 -95

 

사실 가까이 다가갔다고 여기지만 그저 찰나(刹那)이고 다시금 아득하게 먼 곳에 있는 것 같은 것이 이상(理想)일 것이다. 어쩌면 몽롱한 영적 시공에서나 가능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지만, 마치 이를 현실화하려는 듯한 여관 온천탕 장면의 묘사는 신경(神境)의 실재(實在)화 같아 그 풍경을 바라보는 남자의 마음, 그 정취에 몰입하게 된다.

 

비마저 흥을 돋우는 고요한 봄비가 내리는 산골의 탕 안에서 혼()까지 봄의 온천물에 띄우며 멀리서 들려오는 샤미센 소리를 무책임하게 듣고 있는 한 남자, 그의 앞에는 실내를 가득 메운 김이 가득 피어오르고있다. 그때 봄밤의 불빛을 반투명으로 흩뜨리며 목욕탕 가득한 무지개 세계가 진하게 흔들리는 가운데 몽롱하고...뿌옇게 하며 순백색의 모습이 구름 속에 점차 오른다....신대(神代)의 모습을 구름 속에 불러일으킨 것처럼 자연스럽게 나타난 아름다운 여인은 노골적으로 들이 밀어진 것이 아닌, 모든 것을 그윽하게 만드는 일종의 영적인, 충분히 웅숭깊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오직 마음인 그림을 그리며, 비인정의 세상을 만끽하려 산골 마을을 찾은 화공인 남자는 실제 단 한 장의 그림도 그리지 않는다. 그의 말처럼 화구 상자는 단지 취흥을 돋우기 위한 악세사리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지금의 나는 진정한 화가다, 훌륭한 화가라고 외친다. 작품화하는 순간 비인정은 사라지고 인정의 세계가 들어차기 때문이다. 이 가로놓인 거대한 아이러니를 왕래하는 것이 인간사가 아닐까?

 

작품을 읽는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인정이라는 세속의 세계를 떠나 온 듯, 비인정이 그득한 시()와 수채화같은 풍경을 거니는 소설 속 침잠은 더럽혀지고 사나운 떼를 벗겨낸 듯 머리가 맑아진다. 이 작품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다시금 시 속의 사람도 아니고 그림 속의 나도 아닌 인정의 세계에 내 딛어야만 하는 이 불가피성이 고통스럽기만 하다. 거듭 소설의 세계 속으로 돌아가고픈 심정이다. 그렇다고 도연명처럼 내내 남산만 바라보고 있을 순 없을 터. 현실로 돌아와 이렇게 감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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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크루그먼, 좀비와 싸우다 - 나쁜 신념과 정책은 왜 이토록 끈질기게 살아남는가
폴 크루그먼 지음, 김진원 옮김 / 부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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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정책 비평가로 나선 경제학자들이 존경하는 경제학자로 불리는 폴 크루그먼의 보수주의 정책에 대한 강력하고 신랄한 논평집이다. 뉴욕 타임스20년 넘게 정치, 경제, 문화를 아우르는 정책들을 중심으로 하여, 탄탄한 지적 배경을 토대로 탐욕과 편협, 거짓과 무지, 음모와 공작으로 버무려진 보수당파를 예리하게 분석, 비판하고, 국민들의 지성이 사실을 바르게 직시할 수 있도록 견인하는 총론집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이 책이 대선(大選)전에 출간되었으면 더욱 시의적절 했을 터이지만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이 정권과 보수 극우당파들의 실체를 지금이라도 국민이 파악할 수 있도록 돕는다면 아쉽지만 의의가 충분하리라. 표제처럼 그 논평의 대상은 좀비(zombies)’. 내게 좀비란 뇌가 비었거나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인간의 외형을 하고는 오직 자기 욕망의 방향을 향해서만 돌진하는 존재로 이해된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니 딱 작금의 한국에 극우화된 보수당파를 기술한 것처럼 되어버렸다. 어찌 이다지도 좀비와 하나의 당파가 같은 말로 정의될 수 있는지 놀랍기도 하다.

 

이 좀비들은 권력을 잡기만 하면 늘상 하는 짓이 있다. 부자 감세와 사회안전망 해체이다. 폴 크루그먼은 이 반복되는 뻔뻔한 불한당주의를 제 일성(一聲)으로 하여 비판의 논의를 연다. 보수 당파가 하는 짓의 유일한 정책이기 때문인데, 그 밖의 모든 것은 이 탐욕을 성취하기 위해 파생된 것들이다. , 이것에 그자들의 모든 이기심이 내재되어 있는 까닭이다. 이것 외에는 그자들은 어떠한 정책도 내놓지 못하며, 잘못되거나 악화되면 남 탓을 해대며, 저열한 음모와 공작 정치로 빨갱이 놀이를 하여 국민의 시선을 돌리고, 바로 그 국민의 삶을 볼모로하여 정치 싸움으로 세월을 보낸다.

 

결국 이 책은 이러한 보수정치 집단의 이기주의의 신성화에서 비롯되는 각양의 우파 정책들이 안고 있는 파렴치를 경제적, 정치적 정연한 논리에 의거, 그 그릇되고 악의적인 행태를 규명하며, 본색을 혁파하는 논증들이라 할 것이다. 이 논평들이 싸우는 좀비는 부자감세 좀비, 사회보장제도 물어뜯기 좀비, 공기업 민영화 좀비, 불평등은 없다 좀비, 빨갱이다 좀비, 긴축 좀비, 기후변화 부정 좀비, 가짜뉴스로 진실을 호도하는 언론 좀비 등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무수히 등장한다.

 

미국 보수 우파정당인 공화당을 비판 대상의 기저로 하고 있으나 한국의 수구 정당과 사실 한 치의 다름도 없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의 보수 우파의 이념을 그대로 식재(植栽)한 것이기에 본디 다를 수가 없는 태생적 동일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미군정(美軍政)의 역사로 시작되는 수구정당의 역사를 여기서 새삼스레 논의하지는 않겠으나, 폴 크루그먼의 비판 내용을 우리의 것으로 이해하고 동의 할 수 있는 역사적이고 현재적인 이유인 것이다.

 

 

이미 검찰이 장악한 수구 정권은 대기업에 대한 대대적인 감세 정책 실행을 발표했다. 이들이 하는 수작은 항상 같다. 박정희부터 이명박, 박근혜 시절에도, 한결같이 부자 감세를 최우선 정책으로 시행하면서 부자가 잘되면 국민도 잘살게 된다는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정당화했다. 크루그먼도 지적하듯이 이것은 실증적으로도 경제논리로도 한 번도 사실로 증명되지 못한 개수작이다. 부자 감세로 발생한 이익을 노동의 신규 고용과 시설 투자로 이어져 경제가 부흥할 것이라는 논리는 특권층인 자신들의 탐욕을 위장하는 허상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투자를 이끌어내는 요소는 사장 수요’의 인식이며, 기업의 본성상 감세조치와 같은 재정적 유인책에 결코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결국 감세로 인해 발생한 이익은 부자에게 완전히 덤일 뿐이며, 고용투자에 아무런 명분도 주지 못하는 이 부가적으로 발생한 이익은 대부분 자사주식의 매입을 통해 자기 자산 불리기에 소용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부자 감세는 이 정책을 통해 살찌게 된 부자로부터 은밀하게 거대한 돈을 사취하려는 수구당의 오래된 탐욕에 터 잡은 것이기에 이들은 이 정책을 그 거짓됨에도 반복하는 이유이다.

 

더구나 감세로 이해 줄어든 세수는 국부(國富)의 채산이 맞지 않기에 어떻게든 균형을 맞춰야 하게 되는데, 국민의 안정적 삶이라는 공공의 이익을 위한 사회 안정 제도의 지출을 줄이려고 한다. 그것이 곧 건강보험 민영화, 한전 민영화와 같은 정부투자기관의 민영화 이전이라는 악질적인 정책이다. 그래서 이 불의한 정권은 뻔뻔한 거짓의 명분아래 시민의 정책적 대변 기관인 각종 민간단체에 대한 보조금을 없애거나 해체하는 짓을 거리낌 없이 실행한다. 이것이 일석이조인 것은 부자감세로 감소한 세수의 일부를 시민의 입을 틀어막음으로서 보전하는 것이다. 세출도 줄이고, 권력에 비판적인 입도 막는 교활성, 악질성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보수 당파란 구속받지 않는 사리사욕 추구가 번영과 행복의 열쇠라고 주장하는 말종 집단이다. 타자를 위해 작은 희생의 감수도 전혀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파렴치한 탐욕의 정신, 이것을 정의와 공정이라 말하는 족속이다. 크루그먼의 보수 당파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생생하게 드러나는 규정이다. 보수주의가 국민 대다수를 희생양으로 삼아 부유한 특권층에 이로운 정책을 펴나가는 이 편집증적 사고방식에 한국 사회의 언론은 이 정책이 얼마나 국민에게 해로운 것인지 아무런 정보도 전하지 않거나 하지 않는다.


 



사실 보수 세력이 이러한 행태를 겁 없이 반복하는 이유는 무지한 국민, 진실을 알려는 국민이 많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에 기초한다. 우경화는 항상 우매한, 무사유의 국민을 토대로 한다. 그리고 이들의 행태가 새롭지도 않은 것이 수십 년 간 이 자들이 걸어 온 길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부패, 정략적 무지, 음모이론, 협박..., 조작, 부하뇌동..., 이들은 그저 사악한 이념만 쫓는 게 아니다. 현재로서는 사악한 존재 그 자체다!(221)” 이익을 쫓고, 정치적 우위를 점하고, 자기이익을 구하느라 온갖 진실을 부정하는 행위에 익숙한 집단인 까닭이기도 하다.

 

사회 안전망을 강화하거나 불평등을 해소하려는 어떤 시도에도 경제적 파국으로 이끈다고 주장하며 정책 발안자를 빨갱이로 내몰기까지 한다. 전 정권을 빨갱이 정권이라 규정하는 극우화된 한국의 수구 정권은 소위 자유시장 경제 + 복지국가는 빨갱이 국가, 즉 사회주의라 왜곡한다. 폴 크루그먼은 이와같은 전형적 국가로 유럽의 부유한 국가인 덴마크를 예로 든다. 시민의 자유가 보장되고 불평등이 가장 적은 이 시장자본주의 국가가 빨갱이 국가인가하고 되묻는다.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는 완전히 다른 체제이다. 수구 세력은 이 둘의 차이를 흐리게 하여 건전한 복지 정책, 사회안전망의 구축을 방해한다.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사리사욕을 채울 욕심에 국민의 삶이나 문명도 기꺼이 위험에 빠뜨릴 위인들이라고 맹공을 가하는 크루그먼의 비평에 체증이 다 내려가는 시원함을 느끼게 된다. 사회민주주의는 시장경제이며 탄탄한 공공 사회 안전망을 갖추고 기업 이윤을 쫓아 경영 전략을 세울 때 그 범위에 일정한 제약(공공기업, 독점규제 등)을 가하는 규정을 마련해 놓은 체제를 말한다.

 

만일 지금의 수구 정권이 말하는 빨갱이시선으로 판단하게 되면 서유럽의 모든 국가가 빨갱이 국가가 되고 만다. 크루그먼은 시민 여론을 조사하여 사회안전망을 강화하는 것이 빨갱이국가라고 하는데 전국민 건강보험제도를 실시하는데 찬성하겠느냐고 묻는다. 시민들은 그렇다면 보수정당이 말하는 빨갱이여도 좋으니 실시하여야 한다고 답했음을 지적하며, 보수 당파가 주장하는 공포전략의 구사가 얼마나 파렴치한 것인지를 비판한다.

 

한국전력이나 건강보험공단은 민간 기업처럼 서비스나 제품을 새로이 창출하여 수요를 늘리는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이 아니다. 이것은 국민의 생활 안정과 빈부의 차이를 불문하고 형평적 삶의 보장을 위해 기꺼이 공공성을 우위에 두고 정부가 지원하는 정책적 공기업이다. 수구 당파는 경영효율이 악화되어 적자가 늘어났으니 민간기업으로 이전하여 효율을 추구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파렴치한 말이다. 특권층에 천문학적인 거대한 혜택을 주고 그곳으로부터 막대한 돈을 받아내려는 추악한 욕망이외에는 없다. 내부 효율을 감독 통제할 권력을 국민으로부터 대리한 정권이 탁월한 공기업 리더를 등용하여 실천하는 것이 그들의 책임이지, 이를 민간에 팔아먹어 배를 불리라 한 것이 아니다. 외부 효율이 존재하지 않는 공기업의 특수성을 고려치 못하는 이 무식하고 냉혹한 수구 우파의 더러움은 어떻게도 국민이 막아내야 할 것이다.

 

미국의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메디칼 케어(medical care; 일종의 국민건강보험)의 실시가 반쪽자리나마 실행되는 데 온갖 적의를 가지고 반대하는 미국 공화당의 실례는 이들의 실체가 어떠한 것인지를 이해하는 데 한국인들에게 충분한 반면교사가 되어 줄 것이다. 사회를 지배하는 이들 우경화된 보수 집단의 실체란 것이 무엇인가는 사실 파악할 것도 없다. 자신들의 정치적 위기가 올 때면, ‘진정한 보수주의로 거듭 나겠다고 속이 텅 빈 말을 부르짖기도 하지만, 실상은 그 보수주의란 것이 이기주의 신성화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온난화 등 기후변화를 부정하는 이면의 추악한 돈의 집착 논리부터 부정직이 떨치는 그 더러운 왜곡의 힘에 이르기까지 좀비와의 투쟁이 장장 600 여 쪽을 채우고 있지만, 요즘 한 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작태와 그 궤를 같이하여 읽게 되는 또 하나의 싸움에 대한 비평으로 감상을 맺어야 할 것 같다.

 

도어 스테핑에서 보이는 태도를 보자. 정권의 무능력과 법치의 경멸, 권위주의 행태, 정치 검찰로 도배질 된 행정부 기관 등등에 대해 비판적 질문을 하면 무조건 무시하며 마치 반역자의 말이기라도 한 듯 소리 높여 질시하기까지 한다. 검찰 권력을 앞세워 초법적 권력을 행사하는 무법의 권위를 내세우기까지 한다. 여기에 특권층의 이익집단인 조중동 황색신문이 결탁하여 비뚤어지고 탐욕스러운 시선으로 여론을 호도하고 정치가 이처럼 막무가내의 내리막길로 들어서게 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좀비가 이 사회 곳곳에 포진하여 나라를 패망의 길로 이끌고 있는 형국이다.

 

여기에 어용(御用) 학자들까지 가세하여, 한 쪽이 분명 거짓말을 하고 있음에도 마치 자신들만은 중도의 균형적 시선을 가지고 있다는 거짓된 등가성(false equivalence)’의 태도를 표명하곤 한다. 논쟁을 벌이는 양쪽을 똑같이 대하는 양비론은 사실 저세상 논리의 다름 아니다. 미국인들은 이를 행성 형태 다르게 보기라 부르는 모양이다. 이 기계적 중립주의는 위선이며, 기회주의이고, 정치 논쟁을 무슨 연극이나 문학비평 다루듯 하는 엉뚱한 경향성이라 할 것이다. 이제는 Covid19의 방역과 관련하여 국민건강 안전을 정치화하여 뚱딴지같은 과학방역이라는 유치하고 천박한 논리를 내세워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책임과 무관심의 전형적 보수 특권층의 본색을 유감없이 발휘하기까지 한다. 각자도생의 원칙, 역시 이기주의의 발현이다.

 

우파 정치꾼들이 점령한 지금의 한국 정치에는 그들, 특권층이라는 보호막 밖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이 보이지 않는다. 시민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말하고 생각하며 행동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까짓 하찮은 9급 공무원 마음대로 취직시킨 것이 무엇이 문제냐고 죄책감 없이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현실 인식의 눈을 갖지 못한 이 어둠의 극우 정파에 대한 실체20년의 살아있는 정치현장에서 함께 숨 쉬며 그 터무니없는 거짓말의 향연을 냉정한 논리로 비평하는 이 책에서 오늘의 한국 사회의 동일 유사성을 바라보는 것은 참담함이며, 수치스럽기까지 하다.

 

시민들, 독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 바짝 정신을 차려야 하는 시국에 놓여있음을 자각하는 계기가 되어 줄 것이다. 다 없애버렸다고 여겼던 황당하고 터무니없는 소리가 어디선가 망령처럼 다시금 튀어나오기 때문에 바퀴벌레 발상이라 비유하듯 어렵게 선취한 민주주의와 시민적 자유의 삶을 퇴행시키지 않기 위해 필히 참조해야 할 먼저 경험한 공공정책 학자의 이 실증적 논평집을 귀감으로 삼아야 할 이유가 충분함을 발견할 것이다. 악의적이며 탐욕적인 수구파 주장의 무식과 뻔뻔함을 깨부수는 풍부하고 지적인 논리로 가득하다. 그 위선으로 가득찬 허상을 무너뜨리는 진실의 논리를 통해 우리 삶의 안전성을 위한 시민적 책임을 또한 각성하는 계기가 되어 줄 것이다. 시원하고 후련한 비평과 함께하는 모처럼 너절한 세계에서 벗어나는 느낌이다. 부디 많은 독자들이 이 위대하고 예리한 통찰과 함께 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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