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크루그먼, 좀비와 싸우다 - 나쁜 신념과 정책은 왜 이토록 끈질기게 살아남는가
폴 크루그먼 지음, 김진원 옮김 / 부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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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정책 비평가로 나선 경제학자들이 존경하는 경제학자로 불리는 폴 크루그먼의 보수주의 정책에 대한 강력하고 신랄한 논평집이다. 뉴욕 타임스20년 넘게 정치, 경제, 문화를 아우르는 정책들을 중심으로 하여, 탄탄한 지적 배경을 토대로 탐욕과 편협, 거짓과 무지, 음모와 공작으로 버무려진 보수당파를 예리하게 분석, 비판하고, 국민들의 지성이 사실을 바르게 직시할 수 있도록 견인하는 총론집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이 책이 대선(大選)전에 출간되었으면 더욱 시의적절 했을 터이지만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이 정권과 보수 극우당파들의 실체를 지금이라도 국민이 파악할 수 있도록 돕는다면 아쉽지만 의의가 충분하리라. 표제처럼 그 논평의 대상은 좀비(zombies)’. 내게 좀비란 뇌가 비었거나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인간의 외형을 하고는 오직 자기 욕망의 방향을 향해서만 돌진하는 존재로 이해된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니 딱 작금의 한국에 극우화된 보수당파를 기술한 것처럼 되어버렸다. 어찌 이다지도 좀비와 하나의 당파가 같은 말로 정의될 수 있는지 놀랍기도 하다.

 

이 좀비들은 권력을 잡기만 하면 늘상 하는 짓이 있다. 부자 감세와 사회안전망 해체이다. 폴 크루그먼은 이 반복되는 뻔뻔한 불한당주의를 제 일성(一聲)으로 하여 비판의 논의를 연다. 보수 당파가 하는 짓의 유일한 정책이기 때문인데, 그 밖의 모든 것은 이 탐욕을 성취하기 위해 파생된 것들이다. , 이것에 그자들의 모든 이기심이 내재되어 있는 까닭이다. 이것 외에는 그자들은 어떠한 정책도 내놓지 못하며, 잘못되거나 악화되면 남 탓을 해대며, 저열한 음모와 공작 정치로 빨갱이 놀이를 하여 국민의 시선을 돌리고, 바로 그 국민의 삶을 볼모로하여 정치 싸움으로 세월을 보낸다.

 

결국 이 책은 이러한 보수정치 집단의 이기주의의 신성화에서 비롯되는 각양의 우파 정책들이 안고 있는 파렴치를 경제적, 정치적 정연한 논리에 의거, 그 그릇되고 악의적인 행태를 규명하며, 본색을 혁파하는 논증들이라 할 것이다. 이 논평들이 싸우는 좀비는 부자감세 좀비, 사회보장제도 물어뜯기 좀비, 공기업 민영화 좀비, 불평등은 없다 좀비, 빨갱이다 좀비, 긴축 좀비, 기후변화 부정 좀비, 가짜뉴스로 진실을 호도하는 언론 좀비 등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무수히 등장한다.

 

미국 보수 우파정당인 공화당을 비판 대상의 기저로 하고 있으나 한국의 수구 정당과 사실 한 치의 다름도 없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의 보수 우파의 이념을 그대로 식재(植栽)한 것이기에 본디 다를 수가 없는 태생적 동일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미군정(美軍政)의 역사로 시작되는 수구정당의 역사를 여기서 새삼스레 논의하지는 않겠으나, 폴 크루그먼의 비판 내용을 우리의 것으로 이해하고 동의 할 수 있는 역사적이고 현재적인 이유인 것이다.

 

 

이미 검찰이 장악한 수구 정권은 대기업에 대한 대대적인 감세 정책 실행을 발표했다. 이들이 하는 수작은 항상 같다. 박정희부터 이명박, 박근혜 시절에도, 한결같이 부자 감세를 최우선 정책으로 시행하면서 부자가 잘되면 국민도 잘살게 된다는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정당화했다. 크루그먼도 지적하듯이 이것은 실증적으로도 경제논리로도 한 번도 사실로 증명되지 못한 개수작이다. 부자 감세로 발생한 이익을 노동의 신규 고용과 시설 투자로 이어져 경제가 부흥할 것이라는 논리는 특권층인 자신들의 탐욕을 위장하는 허상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투자를 이끌어내는 요소는 사장 수요’의 인식이며, 기업의 본성상 감세조치와 같은 재정적 유인책에 결코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결국 감세로 인해 발생한 이익은 부자에게 완전히 덤일 뿐이며, 고용투자에 아무런 명분도 주지 못하는 이 부가적으로 발생한 이익은 대부분 자사주식의 매입을 통해 자기 자산 불리기에 소용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부자 감세는 이 정책을 통해 살찌게 된 부자로부터 은밀하게 거대한 돈을 사취하려는 수구당의 오래된 탐욕에 터 잡은 것이기에 이들은 이 정책을 그 거짓됨에도 반복하는 이유이다.

 

더구나 감세로 이해 줄어든 세수는 국부(國富)의 채산이 맞지 않기에 어떻게든 균형을 맞춰야 하게 되는데, 국민의 안정적 삶이라는 공공의 이익을 위한 사회 안정 제도의 지출을 줄이려고 한다. 그것이 곧 건강보험 민영화, 한전 민영화와 같은 정부투자기관의 민영화 이전이라는 악질적인 정책이다. 그래서 이 불의한 정권은 뻔뻔한 거짓의 명분아래 시민의 정책적 대변 기관인 각종 민간단체에 대한 보조금을 없애거나 해체하는 짓을 거리낌 없이 실행한다. 이것이 일석이조인 것은 부자감세로 감소한 세수의 일부를 시민의 입을 틀어막음으로서 보전하는 것이다. 세출도 줄이고, 권력에 비판적인 입도 막는 교활성, 악질성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보수 당파란 구속받지 않는 사리사욕 추구가 번영과 행복의 열쇠라고 주장하는 말종 집단이다. 타자를 위해 작은 희생의 감수도 전혀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파렴치한 탐욕의 정신, 이것을 정의와 공정이라 말하는 족속이다. 크루그먼의 보수 당파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생생하게 드러나는 규정이다. 보수주의가 국민 대다수를 희생양으로 삼아 부유한 특권층에 이로운 정책을 펴나가는 이 편집증적 사고방식에 한국 사회의 언론은 이 정책이 얼마나 국민에게 해로운 것인지 아무런 정보도 전하지 않거나 하지 않는다.


 



사실 보수 세력이 이러한 행태를 겁 없이 반복하는 이유는 무지한 국민, 진실을 알려는 국민이 많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에 기초한다. 우경화는 항상 우매한, 무사유의 국민을 토대로 한다. 그리고 이들의 행태가 새롭지도 않은 것이 수십 년 간 이 자들이 걸어 온 길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부패, 정략적 무지, 음모이론, 협박..., 조작, 부하뇌동..., 이들은 그저 사악한 이념만 쫓는 게 아니다. 현재로서는 사악한 존재 그 자체다!(221)” 이익을 쫓고, 정치적 우위를 점하고, 자기이익을 구하느라 온갖 진실을 부정하는 행위에 익숙한 집단인 까닭이기도 하다.

 

사회 안전망을 강화하거나 불평등을 해소하려는 어떤 시도에도 경제적 파국으로 이끈다고 주장하며 정책 발안자를 빨갱이로 내몰기까지 한다. 전 정권을 빨갱이 정권이라 규정하는 극우화된 한국의 수구 정권은 소위 자유시장 경제 + 복지국가는 빨갱이 국가, 즉 사회주의라 왜곡한다. 폴 크루그먼은 이와같은 전형적 국가로 유럽의 부유한 국가인 덴마크를 예로 든다. 시민의 자유가 보장되고 불평등이 가장 적은 이 시장자본주의 국가가 빨갱이 국가인가하고 되묻는다.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는 완전히 다른 체제이다. 수구 세력은 이 둘의 차이를 흐리게 하여 건전한 복지 정책, 사회안전망의 구축을 방해한다.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사리사욕을 채울 욕심에 국민의 삶이나 문명도 기꺼이 위험에 빠뜨릴 위인들이라고 맹공을 가하는 크루그먼의 비평에 체증이 다 내려가는 시원함을 느끼게 된다. 사회민주주의는 시장경제이며 탄탄한 공공 사회 안전망을 갖추고 기업 이윤을 쫓아 경영 전략을 세울 때 그 범위에 일정한 제약(공공기업, 독점규제 등)을 가하는 규정을 마련해 놓은 체제를 말한다.

 

만일 지금의 수구 정권이 말하는 빨갱이시선으로 판단하게 되면 서유럽의 모든 국가가 빨갱이 국가가 되고 만다. 크루그먼은 시민 여론을 조사하여 사회안전망을 강화하는 것이 빨갱이국가라고 하는데 전국민 건강보험제도를 실시하는데 찬성하겠느냐고 묻는다. 시민들은 그렇다면 보수정당이 말하는 빨갱이여도 좋으니 실시하여야 한다고 답했음을 지적하며, 보수 당파가 주장하는 공포전략의 구사가 얼마나 파렴치한 것인지를 비판한다.

 

한국전력이나 건강보험공단은 민간 기업처럼 서비스나 제품을 새로이 창출하여 수요를 늘리는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이 아니다. 이것은 국민의 생활 안정과 빈부의 차이를 불문하고 형평적 삶의 보장을 위해 기꺼이 공공성을 우위에 두고 정부가 지원하는 정책적 공기업이다. 수구 당파는 경영효율이 악화되어 적자가 늘어났으니 민간기업으로 이전하여 효율을 추구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파렴치한 말이다. 특권층에 천문학적인 거대한 혜택을 주고 그곳으로부터 막대한 돈을 받아내려는 추악한 욕망이외에는 없다. 내부 효율을 감독 통제할 권력을 국민으로부터 대리한 정권이 탁월한 공기업 리더를 등용하여 실천하는 것이 그들의 책임이지, 이를 민간에 팔아먹어 배를 불리라 한 것이 아니다. 외부 효율이 존재하지 않는 공기업의 특수성을 고려치 못하는 이 무식하고 냉혹한 수구 우파의 더러움은 어떻게도 국민이 막아내야 할 것이다.

 

미국의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메디칼 케어(medical care; 일종의 국민건강보험)의 실시가 반쪽자리나마 실행되는 데 온갖 적의를 가지고 반대하는 미국 공화당의 실례는 이들의 실체가 어떠한 것인지를 이해하는 데 한국인들에게 충분한 반면교사가 되어 줄 것이다. 사회를 지배하는 이들 우경화된 보수 집단의 실체란 것이 무엇인가는 사실 파악할 것도 없다. 자신들의 정치적 위기가 올 때면, ‘진정한 보수주의로 거듭 나겠다고 속이 텅 빈 말을 부르짖기도 하지만, 실상은 그 보수주의란 것이 이기주의 신성화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온난화 등 기후변화를 부정하는 이면의 추악한 돈의 집착 논리부터 부정직이 떨치는 그 더러운 왜곡의 힘에 이르기까지 좀비와의 투쟁이 장장 600 여 쪽을 채우고 있지만, 요즘 한 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작태와 그 궤를 같이하여 읽게 되는 또 하나의 싸움에 대한 비평으로 감상을 맺어야 할 것 같다.

 

도어 스테핑에서 보이는 태도를 보자. 정권의 무능력과 법치의 경멸, 권위주의 행태, 정치 검찰로 도배질 된 행정부 기관 등등에 대해 비판적 질문을 하면 무조건 무시하며 마치 반역자의 말이기라도 한 듯 소리 높여 질시하기까지 한다. 검찰 권력을 앞세워 초법적 권력을 행사하는 무법의 권위를 내세우기까지 한다. 여기에 특권층의 이익집단인 조중동 황색신문이 결탁하여 비뚤어지고 탐욕스러운 시선으로 여론을 호도하고 정치가 이처럼 막무가내의 내리막길로 들어서게 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좀비가 이 사회 곳곳에 포진하여 나라를 패망의 길로 이끌고 있는 형국이다.

 

여기에 어용(御用) 학자들까지 가세하여, 한 쪽이 분명 거짓말을 하고 있음에도 마치 자신들만은 중도의 균형적 시선을 가지고 있다는 거짓된 등가성(false equivalence)’의 태도를 표명하곤 한다. 논쟁을 벌이는 양쪽을 똑같이 대하는 양비론은 사실 저세상 논리의 다름 아니다. 미국인들은 이를 행성 형태 다르게 보기라 부르는 모양이다. 이 기계적 중립주의는 위선이며, 기회주의이고, 정치 논쟁을 무슨 연극이나 문학비평 다루듯 하는 엉뚱한 경향성이라 할 것이다. 이제는 Covid19의 방역과 관련하여 국민건강 안전을 정치화하여 뚱딴지같은 과학방역이라는 유치하고 천박한 논리를 내세워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책임과 무관심의 전형적 보수 특권층의 본색을 유감없이 발휘하기까지 한다. 각자도생의 원칙, 역시 이기주의의 발현이다.

 

우파 정치꾼들이 점령한 지금의 한국 정치에는 그들, 특권층이라는 보호막 밖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이 보이지 않는다. 시민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말하고 생각하며 행동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까짓 하찮은 9급 공무원 마음대로 취직시킨 것이 무엇이 문제냐고 죄책감 없이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현실 인식의 눈을 갖지 못한 이 어둠의 극우 정파에 대한 실체20년의 살아있는 정치현장에서 함께 숨 쉬며 그 터무니없는 거짓말의 향연을 냉정한 논리로 비평하는 이 책에서 오늘의 한국 사회의 동일 유사성을 바라보는 것은 참담함이며, 수치스럽기까지 하다.

 

시민들, 독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 바짝 정신을 차려야 하는 시국에 놓여있음을 자각하는 계기가 되어 줄 것이다. 다 없애버렸다고 여겼던 황당하고 터무니없는 소리가 어디선가 망령처럼 다시금 튀어나오기 때문에 바퀴벌레 발상이라 비유하듯 어렵게 선취한 민주주의와 시민적 자유의 삶을 퇴행시키지 않기 위해 필히 참조해야 할 먼저 경험한 공공정책 학자의 이 실증적 논평집을 귀감으로 삼아야 할 이유가 충분함을 발견할 것이다. 악의적이며 탐욕적인 수구파 주장의 무식과 뻔뻔함을 깨부수는 풍부하고 지적인 논리로 가득하다. 그 위선으로 가득찬 허상을 무너뜨리는 진실의 논리를 통해 우리 삶의 안전성을 위한 시민적 책임을 또한 각성하는 계기가 되어 줄 것이다. 시원하고 후련한 비평과 함께하는 모처럼 너절한 세계에서 벗어나는 느낌이다. 부디 많은 독자들이 이 위대하고 예리한 통찰과 함께 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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