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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듀나 지음 / 네오픽션 / 2022년 8월
평점 :
절판
4차 산업 혁명의 물결이 아직은 미치지 않았던 시절, 11년 전인 2011년에 발표, 출간된 Sci-Fi 작품집이다. 작가의 통찰력이 발산하는 지적 묘미는 오늘에 더욱 그 의미에 생생하게 감응할 수 있는 소설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2022년에 이르는 십년 사이 포스트인본주의 기술의 윤리적 성찰을 요구하는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가 독서계를 달구기도 했으며, 이제는 이 작품집의 많은 소재들이 현실적 물음을 제기하는 실재적인 것이 되기에 이르렀다. 어쩌면 이번의 개정 출간은 더욱 실감하는 새로운 성찰로 안내해줄 지도 모를 일이다.
자신들의 실체조차 여전히 모르는 인간들이 마치 모두 알고 있다는 듯이 그 한계를 망각하고 자행하는 행위에 대한 조롱일 수도 있으며, 어떤 측면에서는 물화(物化)된 인간의 기계주의적 사유에 대한 역설적 예찬으로 비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고작 자아나 의식이 하는 보잘것없는 이해 그 이상의 심연에 대한 겸허함으로의 회귀를 주창하는 것 같기도 하다. 작가의 진실이야 어찌되었든 이러한 본원적 의문을 던지는 그 자체만으로서 이 단편집은 흥미로움 덩어리라 할 수 있다.
우선 문학은 말할 것도 없이 사회학이나 철학을 비롯하여 종교, 문화인류학, 신경생물학 부분 등 인간의 불멸에 대한 희구가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담론은 존재론적 논쟁을 지속적으로 야기한다. 해서 수록된 총 13편의 장⋅단편(掌⋅短篇)中, 단지 신체로서의 인간에 공생하는 의식이자 영혼이라는 존재를 통해 삶과 죽음, 즉 부조리로 고통스러워하는 인간의 이원론적 산물인 「디북」은 세상과 생명에 대한 궁극의 진실을 말하고자 애를 쓴다.
보이지 않는 영혼에 실체라는 존재자를 설정함으로써 인간의 육신을 분리한다. 과연 분리될 수 있는가는 이 작품의 주제가 아닌 듯싶다. 인간의 의식을 구성하는 재료로서의 이 존재가 지구 생명체에 깃들어 공생함으로써 불필요하게 인간을 괴롭혔다고 얘기한다. 그래서 이 존재들이 새로운 숙주인 자신들의 삶의 공간을 마련하고 생명체들을 떠나는 것은 곧 인간의 죽음, 아니 아무것도 인식할 수 없는 무념(無念)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라고,
“처음부터 삶과 죽음은 결코 이렇게 기형적인 방식으로 묶여서는 안 되었다. 지구의 생명체들이여, 안녕.”이라고 유감을 외친다. 이원론적인 기독교의 종교적 색채가 물씬 풍기는데, 우리의 자아라는 것이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무의식, 잠재의식은 물론 감각기관을 비롯한 감성의 세계인 신체를 이탈한 정신이 가능한 것인가라는 생각에 이르면 사실 공허한 얘기가 되어버리고 말지만, 출생의 기원이자 저 지옥이라 불리는 모체의 아득한 게헨나(Gehenna)의 세계, 암흑과 죽음의 공포를 그럴듯한 또 하나의 신화로 안내하는 사색으로서 깊은 인상을 남긴다.
한편 「죽음과 세금」같은 작품은 짙은 현실 참여적 색채로 우리사회에 신랄한 풍자의 메스를 들이대는데 역시 경제적 효율, 공리주의를 잇는 절대 실용주의가 생명의 가치를 초월한 몰가치로 질주하는 오늘을 냉소적인 해학으로 지펴낸다.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고 있는 지구촌의 경제적 과제를 해결하는, 어쩌면, 아니 가능성이 높은 암울한 우리의 미래상일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의 수명을, 개인의 삶과 죽음을 조작하고 통제하는 신(神)적 존재, 기관, 시스템..., 시스템이라는 자신들이 만든 기계에 기꺼이 복종하고 물질과 소비의 향유를 맞바꾸는 그런 사회의 도래 말이다.
이처럼 오늘의 인간을 지배하는 기계, 과학이라는 합리주의 만능의 사유는 심각한 결핍을 가지고 있음에도 결코 인정하려하지 않는데, 이러한 문제제기는 수록된 여러 작품에서 발견하게 된다. 「소유권」이라는 작품에서 죽은 자의 소유였으나 주인 없이 방치된 부양품(浮揚品)인 6살 소녀모습 텔렉 로봇의 자기 정체성의 발현이라는 우화를 통해 사랑과 같은 감성이 물질처럼 소유대상이 될 수 있는가? 라든가, 「정원사」에서는 외계의 작은 공간에서 정원을 가꾸는 한 생물학자의 오만에서 인간의 상상력이나 창조력이란 것은 부품이나 모듈을 짜 맞추는 재능 이상이 아님을, 다시 말해서 인간의 의식이라는 것은 정말 보잘것없는 것임을 드러내고 조소하며 안타까워한다.
이 소설집의 표제가 된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는 다소 이색적으로 느껴짐에도 ‘링커 바이러스’라는 “범 우주 네트워크 환경통합 과정”으로서 오늘의 세계화된 자본주의 체제로의 통합과 대비되어 인간 욕망의 무차별적 잔인성에 대한 기막힌 메타포로 소설적 감동의 여진이 제법 큰 작품으로 느껴진다. 게다가 고립된 사회로서 북한의 등장이나 게걸스러운 육식동물로서의 장면들은 그 혐오스러움 만큼이나 극명하게 비관적인 오늘의 자본주의의 속성을 그려내고 있다.
이 링커 바이러스라는 단어는 「안개 바다」에서 다시금 등장하는데, “다윈 생태계”가 단절되고 “링커 생태계”라는 새로운 진화체계로 이전된 변종의 세상으로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지옥을 탄생시키고 있다. 사실 모든 사회비판적 문학 작품에서 반복되는 주제라서 진부할 수 있음에도 SF적 요소는 다른 차원의 맛을 느끼게 해준다. 「A,B,C.D,E & F」, 「메리고라운드」와 같은 비교적 재치 넘치는 소재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 있기도 하지만, 역시 작가 ‘듀나’의 비평적이고 사색적이며 기원적인 통찰을 요구하는 작품 세계는 이 소설집에서도 그 빛을 잃지 않고 통렬하고 준엄한 사유로 독자의 기대를 채워준다.
“당신들은 죽음을 향해, 우리는 삶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