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그리고 무한 - 칼링가 상 수상자 대표작 김영사 모던&클래식
조지 가모브 지음, 김혜원 옮김, 곽영직 해제 / 김영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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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과 생명, 우주적 영감을 발견케 하는 최고의 교양과학서

 

자연 현상에 대한 많은 의구심들, 혹은 가늠할 수 없어 막연한 장벽에 부딪게 하는 최초의 탄생과 그 종말에 대한 무시할 수 없는 호기심의 문제들, 그렇다. 어떤 우주적 영감을 찾고자하는 것은 우리 인간들의 영원한 관심사일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이것들을 찾으려했고, 그리고 이 욕심은 달성됐다라고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열악한 지적 상상력이 이해하지 못했던 4차원의 세계, 유기체와 무기물의 그 경계, 나란 생명이 발을 딛고 있는 작은 행성과 태양계, 그리고 은하와 우주의 생성과 그 모습을.

 

수(數)의 발명과 수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자연을 이해하려는 요구의 인간의 탐구심, 그것이 물질을 규명하고 그 규명된 지식이 우주의 섭리를 이해하는 초석이 되고 물질과 생명의 근원을 들여다 볼 수 있게 해주며, 어린 시절 막연한 과학의 원리로만 주입되었던 것들이 어떤 의미와 배경을 가진 것이었으며, 바로 그것들이 우주의 모든 물질과 생명의 탄생과 소멸을 말하려는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내가 밖에서 볼 수 있는 것들, 내 육안으로 확인 할 수 있는 것들, 아니 과학적 도구를 통해서라도 볼 수 있는 것들의 경계를 초월한 것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구성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비로소 배웠다고 해야 하겠다.

 

길이와 너비와 높이로 이루어진 입면체인 3차원을 벗어나 4차원은 시간이 더해진다는 것은 누누이 들어왔던 상식이지만 그 형태를, 그리고 단위가 다른 시간을 어떻게 다른 세 개의 단위인 거리로 변환하고 이 과정의 의미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인지 선명하게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우주 공간 전체에 미치는 시간의 표준 속도화는‘광속’, 즉 1초에 30만Km, 1피트 입방체라는 공간은 단지 0.000000001초에 불과하다는 것을, 바로 공간의 존속기간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이 존속 기간이 길어지려면 시간축의 방향으로 길게 잡아 늘려야 하며, 그것은 이 비틀린, 또는 휜 공간의 모습을 그리게 하고, 광활한 우주의 형태를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

 

한편 제곱해서 -1이 되는 허수 'i(√-1)'의 탄생, 그것의 소용을 보게 된 것도 이 책의 미덕일 것이다. 4차원의 공간에서 시간거리를 표현하는데 얼마나 적절한 개념인지를 말이다. 단지 수학 그 자체의 계산방법으로서만 이해했던 것을 세계를 이해하고 상상하는 수단으로서 눈을 뜨게 해준 것이다. 이렇게 이 책은 내 감겼던 눈을 뜨게 해주는 설명들로 가득하다. 빛의 파동 운동처럼 아무런 느낌도 전해주지 않던 것이 모든 물체의 원자들 사이뿐 아니라 성간공간(星間空間)을 균일하게 채우고 있는 물질, 바로 ‘빛을 나르는 에테르’라는 가설적 물질을 매개하고, 분자, 원자, 그 안의 전자들의 운동을 가늠하는 데로 이어진다. 궁극의 물질을 이해하는 귀중한 개념으로서.

 

이렇게 빛과 그 속도의 무한한 개념의 영역을 여행하다보면 그 여정들, 과학적 설명의 과정에서 순간순간 SF적 상상의 세계를 그리는 몽상에도 빠져들게 된다. 달리는 열차의 식당간에 앉아있는 내가 줄어든 모습을 그려보기도 하고, 광속으로 지구에서 18년 떨어진 시리우스 별로 항해하고 온 내가 주변 사람들의 폭삭 늙은 얼굴에 당혹해하는 장면도 떠올려 본다. 시간과 공간의 그 상대성의 세계를. 이것은 신비의 영역도 환상의 세계도 아니다. 바로 입증 가능한 과학의 세계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양자 물리학’? , 뉴턴의 고전 물리학도 다 이해하지 못하겠는데, 양자물리학이라니! 그러나 고전 역학의 개념들이 원자의 세계에 적용되지 않는 물체들의 운동을 이해하기 위해서, 즉 물체의 실제 운동에 대한 진실을 규명함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요긴한 접근임을 알고서는 그 낯섦과 이질감을 벗어던지게 된다. 그 설명들이 어찌나 친절한지, 가모프가 자신의 아들을 염두에 두고 집필했기에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비록 초고를 읽게 한 당시 그의 초등학생 아들이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욕심 부리지 않고 천천히 숙독하면 오히려 가모프가 말해주고자 하는 과학의 세계에 푹 빠져들고 말 것이다.

 

그리고 조금만 더 이해를 증진시키면 물리학의 개념들이 인문,사회학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는 용어들의 전(前)개념으로서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즐거움도 맛볼 수 있다. 일례로 어떤 주의나 이념의 충돌과 소멸의 현상을 말하는 ‘쌍형성 과정’이 반대 전하(電荷)를 가진 두 전자의 소멸 과정이라는 것을 통해 모호했던 이해가 분명해지기도 하고, ‘핵변환 과정’이나 ‘열해리’와 같은 분자간의 충돌 현상에서 사회적 변환에 대한 어떤 상상적 은유와 통찰의 빛을 발견할 수 도 있다.

 

온도란 분자 운동의 정도에 불과하다는‘브라운 운동’으로부터 섭씨 6000도의 태양 표면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되고, 나아가 태양내부의 엄청난 온도로 인해 모든 전자껍질이 벗겨져 원자조차도 존재하지 못하는 벌거벗은 핵과 자유전자들의 혼합물을 상상하는데 어려움 없이 도달하게도 된다. 그리고 그 무질서의 상태, 불규칙 운동에서 조차 확산이라고 부르는 거리를 측정할 수 있음을 보고는 인간의 그 상상의 지적 능력, ‘생각’의 능력, 생각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아마 이 책이 주는 최고의 미덕일 것이다. 미처 우리네 학교교육이 가르쳐주지 않는 과학적 탐구, 무언가를 알고자 할 때 어떻게 생각해야 했는지를 규명하기 위해 창안해낸 도구들의 원리와 상상적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노력의 실체들을 접하게 해주는 것이다.

 

70만 Km의 반지름을 가진 태양의 중심에서 빛이 표면 밖으로 나오는데 30만Km 의 속도를 지닌 빛이 2초여 만에 나오지 못하는 이유, 소금과 같은 결정체의 성장이 왜 생명현상으로 간주되지 않는 것인지, 순전히 물리적 화학적 과정인 분자의 이성변화와 생물학적 현상인 돌연변이가 얼마나 동등한 물질적 현상인지, 다양한 화학원소의 결합인 전기 인력이 행성계의 결합인 중력과 얼마나 유사한지,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발견케 한다. 또한 태양계를 포함한 은하계에서 태양계는 수억 개의 별들로 구성된 원반의 가장자리에 놓인 작은 행성계라는 사실, 나아가 이러한 은하계가 수없이 우주에 존재한다는 사실, 그 우주의 휘어진 모양에 이르기까지가 물질의 최소 단위인 핵자와 중성미자, 전자의 운동을 통해 유려하게 설명되고 있다. 단지 과학의 걸출한 고전적 입문서의 지위를 넘어 우리가 우주자연의 존재를 이해하는데 더할 나위없는 지적 소양을 지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나는 분명 이 책에서 내가 부렸던 우주적 영감에 대한 욕심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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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2-05-24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재미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필리아님의 리뷰를 읽어보니 문득 '과학의 형식'이 지니는 본질적인 한계(?)를 지적한 어느 철학자의 글 내용이 떠오릅니다. 다소 길지만 재미삼아 한번 읽어 보셔요~

* * *

과학이라는 것

세상에서 흔히 과학이라는 것은 철저하고 확실한 전제에서 나온 옳은 추리에 의거한 것이다. 그러므로 무조건 참된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순수하게 논리적인 추리의 연쇄로 얻어지는 것은 아무리 그 전제가 참되다고 해도, 그 전제 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의 명료화나 상세한 풀이 이상은 아니다. 따라서 함축적으로 이해된 것을 설명해 내보이는 것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것으로 칭찬받는 학문은 수학적인 것, 특히 천문학이다. ······

그러나 천문학에서 가장 근본적인 진리의 근원은 사실 귀납이다. 즉, 많은 직관 속에 주어진 것을 정리하여 직접 기초한 옳은 판단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 판단에서 후에 가설이 만들어지며, 가설이 경험에 의해 완전성으로 다가가는 귀납으로서 확정되면, 최초의 판단이 증명된다. 가령 여러 유성이 운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경험으로 알고 있다. 이 유성 궤도의 공간적 관련에 대해서 많은 가설이 있었지만, 결국 옳은 가설이 발견되었고 다음에는 그 운행을 지배하는 법칙(케플러의 법칙)이 발견되었으며, 마지막에는 그 운행의 원인(만유인력)도 발견되었다. 주어진 모든 사례가 가설과 일치하고, 또 그 가설에서 나온 결론, 즉 귀납과 일치한다는 것이 경험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이 가설들은 모두 확실성을 얻게 되었다. 가설을 발견하는 것은 주어진 사실을 올바르게 파악하고 그것을 적당히 표현하는 판단력의 작업이지만, 귀납, 즉 여러 가지 직관이 그 가설의 진리성을 확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우주를 자유로이 뛰어다닐 수 있고, 또 망원경과 같은 눈이 있다고 하면, 오직 하나의 경험적 직관에 의해 이 가설의 진리성이 직접 기반을 얻는 일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 추리는 인식의 본질적이고 유일한 원천이 아니고, 사실은 응급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

그 밖에도 과학적인 형식은 특수한 모든 것을 보편적인 것에 종속시키고, 그렇게 하여 점점 위로 올라가는 것이지만, 이러한 형식의 당연한 결과로서, 많은 명제의 진리는 논리적으로만 기초를 이룬다는 것, 즉 다른 명제에 의존함으로써 동시에 증명으로 나타나는 추리에 의해 기초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이 형식은 모두 인식을 쉽게 하는 수단이지 더 큰 확실성을 얻기 위한 수단은 아니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떤 동물의 성질을 그것이 속하는 종(種)에서 다시 올라가서 속(屬)과 과(科), 목(目)과 문(門)에서 인식하는 것은 그때그때 주어진 동물을 그것만 독립시켜 연구하는 것보다 쉽다. 그러나 추리로 이끌어 낸 모든 명제의 진리성은 언제나 진리가 아니고 직관을 기초로 하는 어떤 진리에 제약되며, 결국은 거기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러한 직관을 기초로 하는 진리가 추리에 의한 연역과 언제나 같은 것처럼 명백하다고 한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직관을 기초로 하는 진리를 택해야 할 것이다. ······

따라서 어떠한 경우에도 직관적인 명증성이 증명을 거친 진리보다 훨씬 훌륭하며, 증명을 거친 진리는 직접적인 명증성의 근원이 아주 먼 경우에만 용인되어야 하는 것이므로, 이것이 증명을 거친 진리와 같은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경우나 더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경우에는 한층 더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 ······

우리의 신념은 직관이 모든 명증의 제1 원천이며, 여기에 직접 또는 간접으로 관계를 갖는 것이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이다. 또 개념에 의한 매개에는 많은 착각이 따라다니기 때문에, 이 절대적인 진리에 가장 가까운 길이 언제나 가장 확실한 길이다. 그런데 확신을 갖고 되풀이하여 말하지만, 유클리드에 의해 과학으로 확립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남아 있는 '수학'을 보면, 수학이 걸어가고 있는 길이 이상한 것이고 전도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들이 원하는 것은 모든 논리적인 기초를 직접적인 기초로 환원하는 데에 있다. 그런데 수학은 도처에서 수학 특유의 직관적인 명증을 제마음대로 물리치고 여기에 논리적 명증을 대치시키고 있다. 이것은 지팡이에 의지하여 걷기 위해 스스로 다리를 절단하는 것과 같다. 또는 괴테의 《감상주의의 승리(Triumph der Empfindsamkeit)》에 나오는 왕자가 현실의 아름다운 자연을 외면하고는 자연을 모방한 무대 장치를 보고 기뻐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나는 논리적으로 주어지는 수학적 진리의 단순한 인식 근거와 공간 및 시간의 각 부분이 직관적으로만 인식될 수 있는 직접적인 연관인 존재의 근거 사이의 차이를 새삼 설명하지 않고, 여기 언급한 소견을 앞에서 말한 것과 결부시키는데, 이 연관을 통찰해야만 참된 만족과 근본적인 지식이 얻어진다. 그런데 단순한 인식 근거는 언제나 표면에 머물고 그것이 '그렇다'는 지식은 줄 수 있지만 '어째서 그런가'라는 지식은 줄 수 없다. · · · · · ·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분석론 후편(Analyt. post)》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물이 그렇게 있다는 것과 왜 그렇게 있는가 하는 것을 동시에 가르치는 지식은 이것을 따로 가르치는 지식보다 더 정밀하며 우수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물리학에서 어떤 것이 그렇게 있다고 하는 인식이 '왜' 그렇게 있는가 하는 인식과 하나가 된 경우에만 만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中에서


필리아 2012-05-26 16:17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읽은 글입니다. 적절한 인용이네요. 고맙습니다. 가모프의 이 책이 만족스러운 것도 바로 왜 그런가와, 어떻게 그런가를 이해시키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여전히 이유를 설명할 수 없을 때 그것은 불확실한 가설로 남겨두고 있어요. 또한 미래의 지식에 기대하고 있기도 하구요. 제겐 그런 그가 믿음직스러운 과학자인 거죠...
 
세상 모든 행복
레오 보만스 엮음, 노지양 옮김, 서은국 감수 / 흐름출판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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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의 표제처럼 경제, 정치적 위상에서 차이를 가지고 있으며, 서로 다른 문화와 풍토의 지구촌 곳곳에 사는 사람들이‘행복’을 말한다. 또한 심리학, 사회학, 경제학, 경영학 등 다채로운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이다 보니 ‘행복(happiness)’이란 하나의 관념에 대해서 실로 다양한 정의와 사유를 담아내고 있다. 생태환경에서, 정치적 민주주의와 사회적 가치로서 말하는가 하면, 개인적 가치로서만 접근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으며, 물질의 소비와 쾌락은 결코 행복을 말해주지 않는다는 사람에서부터 오히려 행복은 시간, 돈,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이라는 사람도 있다.

 

또한 행복에 접근하는 황금 열쇠란 없으니 개인의 내면을 풍부하게 하는 노력을 하라고 주문하기도 하고, 반면에 행복의 요소라고 줄줄이 나열하며 접근로를 말하는 이도 있다. 게다가 행복은 유전적 기질에 좌우되는 것이라는 결정론적 관점을 보이는 사람도 있으며, 유전적 성향이 기반이 되지만 결국은 개인의 가치지향에 따라 다른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이처럼 행복은 이 책에 즐비하게 정의되는 것처럼 단순하고 획일적인 정의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란 얘기일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이 느끼는 행복에 대한 보편적인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순간적 쾌락이기도 하고, 성취를 향한 과정일수도 있으며, 내면적 평온, 정신적 해방감으로 표현되기도 하는, 그런가하면 내면 깊숙한 곳의 어떤 고유한 생명력을 느끼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대체 행복이란 것이 무엇이기에 그토록 그것에 접근하려 하는 것일까? 이 책의 많고 많은 행복의 편린들에서 자신의 내면에 공명하는 행복을 찾아내는 것이 답이 될 것이다. 그렇게 선택지가 많은 행복론들이 여기 있다.

 

나는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에 살고 있다. 이 도시는 작은 땅위에 엄청난 밀도의 사람들이 한정된 자원을 두고 극한의 경쟁을 벌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회적 재원과 물질, 서비스가 집중된다. 이 도시는 물질과 소비를 권장하고, 각종 미디어는 수입차와 고가의 브랜드 패션을 칭송하며 물질경제의 성장을 미덕이라고 부추긴다. 끊임없이 사양을 추가한 제품이 출시되어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를 구분하여 소비 욕구를 자극하고, 이 물질 소유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곧 인생의 성공이고 행복이라고 주입한다. 이제 미덕이 되고 선이 된 물질, 성공의 척도이자 권력의 상징이 된 물질에서 나는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하게 되고, 이 경쟁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서 물질이 집중되어 있는 이 도시를 떠날 엄두를 내지 못한다. 혹여 뒤처질까봐. 내 고향이기에. 물질만이 삶을 행복하게 해주리라는 믿음에서?

 

그러나 이 도시에 사는 대다수 사람들의 얼굴에서 나는 행복을 쉬이 발견하지 못한다. 왜 그럴까? 명품가방을 들고, 유명 패션으로 치장하고, 테이크아웃 커피를 손에 들고 있는데도 삶의 만족이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다. 복합상영관에서 영화를 보고, 수입차에 몸을 싣고 근교의 레스토랑에서 음악을 들으며 식사를 해도 행복은 찾아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신이 행복하다고 하지 않는다. 사실 이유는 너무도 뻔하지 않은가? 삶의 목적, 그 지향점이 물질의 획득에 있는 한, 자신들의 한정된 돈, 부족한 돈, 없는 돈,... 없는 데 쫓는 것처럼 인간을 비참하게 하는 것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항상 물질이 자신의 재원을 앞지른다. 그 도달할 수 없는 욕구 충족의 미완(未完)이 행복을 앗아가고 고통으로 불행하게 한다. 그래서 삶이 불만족스럽기만 하다.

 

책에는“돈과 소비가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하는 뉴질랜드의 어느 교수도 있지만, 아마 그는 상당한 부를 소유한 자이거나, 소비의 절제를 깨우쳐서 적절한 소비에서 즐거움을 찾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우리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은 이 사람처럼 막대한 돈도 없을 뿐 아니라, 물신주의를 완전히 떨쳐내지도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행복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물질을 통해 얻는 행복감, 그것은 대체 짧은 순간의 희열로 끝나기 마련이고, 곧 이 상태에 적응해서 그 순간의 쾌락은 부질없이 축소되고 사라진다. 소위 경제학에서 말하는 한계수확체감의 법칙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만일 무진장한 돈을 가진 거부(巨富)가 되어 최고의 물질들만 소유하고 있다면 행복해질까? 이러한 물음은 이미 수 없이 있어왔고 또한 답을 얻기 위한 수많은 실험과 연구가 있어왔다. 또 뻔한 대답이 나올 것을 우린 알고 있다. 행복이 늘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처럼 우린 물질이 우리의 삶을 결코 행복하게 해주는 수단이 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행복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이 책의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행복을 찾아야 할 곳에 대한 진지한 사색들이 도처에 숨어서 빛을 발하고 있다. 그렇다고 모든 글들이 이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의 발견은 순전히 독자의 몫이다. 삶의 만족스러움과 삶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 자기 노력, 자기 발견, 자기 사유 없이 얻어 지는 것이 아니듯이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자신을 사로잡는 행복의 빛을 찾을 만큼 다양하고 풍부한 진실의 얘기들이 빼곡하기 때문이다. 혹자는 말한다. “자율성, 사랑, 대인관계”만큼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없다고 한다. 즉, 가족, 친구, 연인, 이웃과의 관계성이 삶의 의미를 풍부하게 해준다는 말이다. 이것은 유대감, 사회적 연대감이 우리 인간들의 삶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를 확인케 한다.

 

그러나 이렇게 거창하고 추상적인 관념적 이해만을 보게 되는 것이 아니다. 행복 자체를 추구해서는 행복이 오지 않는다는 의미심장한 얘기들도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일상적 슬픔, 아니 고난이 몰고 오는 슬픔까지도 행복에 이르는 통로임을 느낄 수 있다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 그러나 내 마음에 유독 깊이 닿은 몇 개의 문장이 있다. “진짜 행복은 소소한 일상 속에 있다.”는 말이다. 먹고사는 일의 사사로운 구체적 만족이 사실 전체 인생의 만족을 이루는 것 아니던가? 내가 무어 그리 대단한 것에서 행복을 느꼈던가? 그런데 이 소소한 것, 먹고 사는 일이 그리 녹록치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 먹고 산다는 것의 기준이 무얼까? 노쇠하여 결국은 흙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굶지 않고, 헐벗지 않으며, 내 몸 하나 누워 비바람 막을 곳이 있으면, 이 정도를 걱정하지 않을 정도면 족한 것일 게다. 그러하면 사사로운 구체적 만족의 최저 기준은 충족된 셈이다. 여기에 내 가족과 서로 사랑하고 보호해주며, 공고한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으면, 그들이 서로 믿음을 주며, 그 믿음에 기댈 수 있으면 더 할 나위없는 풍요로운 삶이 될 것이다. 그러나 왠지 밋밋하다. 일상의 단조로움을 상쇄할 무엇인가가 있어야 할 터이다. 그렇다. ‘내 캔버스에 아직은 빈 공간’이 무지하게 많다. 이렇게 욕망에서 자유로워진 나는 내 인생에 투자할 시간이 많아지고, 그것을 내가 즐거이 관심을 가진 것에 보내게 될 것이다. 아마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짜릿한 전율을 일으키는 쾌락과는 다른,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에우라이모니아’! 쾌락도 욕구만족도 아닌 내면 깊숙한 곳에서 자라던 고유 능력이 생명을 얻는 지속가능한 평온함의 행복을 알게 되지 않을까.

 

“인생은 상대 평가다.” 그 상대 평가의 끊임없는 비교의 잣대를 내게서 떨쳐 버리는 순간, 내게서 벗과, 이웃과 사랑과 관계를 격리시키는 물질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욕망을 떨어버리는 순간, 행복은 성큼 다가오지 않을까? 순응과, 경쟁을 가르치는 교육밖에 모르고 성장한 내게 이 만큼의 행복을 말 할 수 있게 해준 이 책은 분명 행복의 길을 발견하게 해준다. 학교 교육은 ‘회복 탄력성’을 가르쳐 주는 곳이어야 한다는 오스트레일리아 학자의 말에서 인간이 진정 배우고 알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기 삶의 만족을 위해 자신을 책임질 줄 아는 인간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행복은 왜 개인적 문제이면서 사회적 문제인지, 국민총생산처럼(GNP)처럼 시장경제의 모호하기 그지없는 지표가 우리의 행복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해주지 않음을 깨달은 작은 산악의 나라, 부탄의 국민총행복(GNH)의 불명확한 지표가 오히려 더욱 가슴에 와 닿는 이유를 알게 되기도 한다. 설혹 슬픔과 고통이 내 삶을 침범할지언정 정말의 행복, 삶의 풍만함을 잃지 않는 길을 발켠케 해준다. 내 가족이 돌아가며 읽어보고, 친구들에게 한 권씩 선물해야 할 터이다....

 

“사람이 없다면, 결코 천국도 갈 곳이 못된다.” - 레바논 속담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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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말 중에서 ‘생각’이란 말처럼 폭 넓게 쓰이는 단어도 드물 것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생각에는 그야말로 다양한 뜻이 포함되어 있다. ‘오랜 생각 끝에 대답했다.’ 라고 했을 때에는 자신의 머리를 써서 깊이 헤아리고 판단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가하면 ‘그녀 생각이 간절했다.’라는 말에서는 어떤 기억이나 일을 간절히 하고 싶어 하거나 관심을 가졌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한 상상했다는 의미로서 ‘생각보다 사람이 많이 왔네.’라고 쓰이기도 한다.

 

생각의 의미는 이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나는 왠지 쓸쓸한 생각에 잠겼어.’처럼 어떤 일에 대한 느낌이나 의견을 지칭하기도 하고, ‘그는 생각이 깊다.’와 같이 사리에 대한 분별력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처럼 생각이란 단어는 특정 의미로만 규정지을 수 없게 한다. 판단, 분별, 사려, 상상, 기억, 느낌, 혹은 ‘내 입장을 생각 좀 해주게.’에서와 같이 성의나 배려의 의미로까지 광범위하다. 그런데 이렇게 풍부한 의미를 담고 있는 생각이 오늘의 우리에게서 실종되고 있는 듯하다. 생각이 없는 말만 난무하여 생각을 할 여지가 없는 말이 공허하게 세상을 채운다.

 

생각은 진지한 헤아림과 판단의 작용이며, 간절한 염원이기도 하고, 사리분별과 배려, 그리고 누적된 지식의 산물인 상상력이다. 생각이 없다는 말은 그래서 헤아림도 간절함도, 배려도 지식도 없다는 다른 표현이 된다. 이런 말들의 무성함에서 우리가 어떤 진실과 진리를 캐낼 수 있을까? 천박하고 표피적이며 정성이라곤 하나도 없는, 게다가 아무런 지식도 없는 말이니 이러한 말들이 사회를 지배할 때 사람들은 허탈하고 소외되어 좌절과 분노에 내 몰릴 것이다. 생각을 하려면 소음에서 한 걸음 떨어져 천천히 그리고 여유로운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극한적인 경쟁에 매몰된 사람들에게 이러한 주문은 현실적 감각을 갖지 못한 비상식적 얘기로만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생각이란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시간과 지식을 바탕으로 한다. 올바른 사려, 판단, 분별을 위해서 시간이 필요하고, 또한 지식과 지혜가 필요하다. 지식과 지혜는 거저 생기는 것이 아니다. 책을 통해서, 타인의 말을 경청하고 행동을 관찰함으로서, 그리고 우주자연의 현상들을 체험함으로서 축적되는 것이다. 이 경험에 대한 겸허한 학습과 이에 대한 시간을 배려하지 못하고서는 어떠한 행위도 진실의 공감을 획득하지 못한다. 서로 공감하지 못하니 교감하지 못하고, 곧 소통이 단절된다. 신뢰에 금이 가고 불신과 의심이 세상을 가득 채워 거짓이 난무하고 갈등과 적대로 분열된다. 우리 사회의 모습이 꼭 이러하다. ‘생각’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조금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살아야 한다. 자신을 위해 생각하는 시간을 내 주어야 한다. 한국사회에 어느 때보다 절실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생각 없는 무수한 말들이 또 생각 없는 무수한 말들과 부딪히고 진리와는 한참이나 멀어진 어처구니없는 결과로 상처만을 입은 사람들이 씨근덕거린다.

 

생각은 얄팍한 테크닉으로 길러지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무슨 방법술이나 되는 것인 마냥 생각기술, 생각방법과 같은 상업주의에 편승한 자기계발류 따위의 책들이 서점가를 채우는 것을 보면 쓴 입맛을 다시게 한다. 그것들은 생각이 아니다. 상상력을 빼앗고, 자기학습의 진지함을 놓치게 하며, 세상의 사물과 현상에 대한 진중한 판단력을 결코 제공하지 못한다. 정말의 생각은 이러한 것이 아니다. 자기체험과 간절함과 성의를 기초로 해서만이 가능한 것이다. 말하기 전에 생각을 하자. 생각하는 시간을 자신들에게 주자. 그래야 우리들의 사회는 소통이 증진되고 분열이 봉합되어, 서로 인정하고 이해하는 화합으로 유쾌한 상식의 사회가 될 것이다.

 

* 권하고 싶은‘생각’에 관한 좋은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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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씨의 거세에 관한 잡스러운 기록지
강병융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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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구성을 하고 있는 소설이다. 60여 꼭지의 신문기사와 편지, 책 추천사, 참고문헌 등이 배치되어 한 편의 소설을 이룬다. 물론 신문기사 등 모두가 허구의 산물이다. 그런데 이 단편적인 글들이 일관된 서사를 향하여 긴밀하게 조응하고 있어, 그 재구축의 재주에 미소를 짓게 만든다. 그리고 한없이 빠져든다. 모 작가의 설레발처럼 “몰입도가 가히 폭력적”수준이란 말에 동의하는 수밖에 없게 된다.

 

우린 신문이나 뜨내기 잡지 등에서 현재의 사건, 사고를 비롯한 잡다한 기사들을 읽는다. 어디서 구립문화센터가 건립되었고, 아동성범죄가 발생했으며, 따돌림을 비롯한 학교폭력사건이 있었다는 토막을 본다. 그리고 지역 특산물축제 소개와 새 책 안내, 유명 화가의 미술 개인전 소식을 접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아이돌 그룹의 음반 발표 소식과 그네들의 패션, 개인사 등이 가십이 되어 잡다하게 기사화되어 무료한 시민들의 입담거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우리에게 분명 일관된 무슨 메시지를 말하고 있을 것이다. 아이돌의 음반발표 소식이 왕따와 어떤 관계가 있으며, 더구나 아동성범죄와 미술전시회가 관련을 맺고 있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 모두가 우리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으며, 더욱이 동시대에 일어나는 일이니 연결하여 생각지 않았던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소설을 나는 작가의 예민한 사회적 감수성, 아니 통찰력이 창안해낸 기발한 시스템적 창작품이라 하고 싶다.

 

소설은 <환경과 산모 신문> 0000년 9월 8일자, 둥근산부인과에서 기형아 탄생을 알리는 기사로 시작하여, <헤럴드 뮤직>, <사랑과 인권신문>, <구로구청 신문>, <범죄동향신문>, <주간소설소식>, <주간입시동정>, <화학과 범죄>, <월간 지움>, <법의학 저널>, <국어만세신문> 등 절묘한 이름을 한 서로 다른 분야의 신문, 잡지 기사가 0051년 10월 16일자로 끝난다. 독립된 기사들이 하나의 일관된 사회의 정체성, 주류의 의식을 지향하고 있으며, 그곳에 경계 밖으로 밀려나는 약자와 소외된 자들의 외침이 있음을 들려주는 것이다. 주류와 다른 것은 배제되어야 한다는 편협과 이기심의 몽매를.

 

최초의 기사는 문경에서‘Y’라는 코 없는 기형아의 탄생을 알린다. 바로 ‘다르게’생긴 아이의 존재와 그 아이의 삶을 쫓는다는 얘기다. 여기에 늦게나마 자신의 동성애자로서의 성정체성을 깨달은 Y의 아버지는 아내와 이혼하고 남자 파트너와 함께 Y를 양육한다. 안면장애를 지닌 Y, 동성애자 아버지는 이미 포용하지 못할 우리 사회를 예견케 한다.

이것은 Y의 코 없이 두 개의 구멍만 뻥 뚫린 밋밋한 얼굴을 사포로 문질러대는 아이들의 가학적 학교 폭력 기사로, 작가인 Y의 아버지 작품에 대한 세간의 편견에 사로잡힌 자들의 비난과 소송 기사가 되어 자신들과‘다름’을 낯섦의 폭력으로 대할 줄 밖에 모르는 우리의 초상을 드러낸다.

 

‘다르다’는 의미에 대해 인색하고 두려움조차 갖게 되는 것은 곧잘‘틀리다’는 표현으로 혼동하여 말하는 버릇과 어떤 관련이 있는 듯하다. 자신과 생각과 의견이 다르면 곧 적대시하는 이 사회의 편협성과 불관용성에는 자신감의 취약성과 소심함, 비겁함, 얕은 지식에 대한 가장을 은폐하려는 자기 보호의 무의식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돼지꼬리가 달리면 어떻고, 손가락 하나 없으면, 다리가 셋이면 인간이 낳은 개체가 인간이 아닐 수 있다는 말인가? 물질과 소비의 광기를 지적하면 빨갱이가 되고, 옹호하면 수구꼴통이 되는 극단밖에 알지 못하는 다름에 대한 이해의 결여는 혹여라도 자기의 기득권적 영역으로의 침범에 겁을 먹었기 때문일 것이다. 잃을 것이 그리 많지 않은 대중들의 이런 편협성은 사실 기이하게 생각되기만 한다.

 

나로서는 이 소설만이 지니는 미덕으로 생각되는 것이 있다. 굳이 구별될 이유가 없는 보편적인 주체에는 익명을 부여하고, 풍자의 대상에게는 누구나 알 수 있는 유사기호로 이해의 친밀도를 높인 것이다. 소설을 구성하는 모든 기사에 인용되는 전문가, 담당자들의 이름이 한결같이 '오OO'으로 무차별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그렇다. 한편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삶을 대변하는 유명 아이돌스타의 이름이 ‘불나비스타일쏘세지글러브’(쿠바의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을 패러디)라거나, 소설『변신』의 작가 ‘프란츠 카프카’를‘츠란프 프카프’의 ‘변심’으로 사용하는 것을 비롯해 그 해학과 풍자를 통한 조롱이 깊이 밴 즐비한 기관 명칭의 약어들이 그러하다. 이것은 읽는 재미와 더불어 그 의성(擬聲)의 유사가 지닌 강렬한 의미의 환기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준다.

 

어쨌든 다름의 희생물로서 Y는 유년시절 자신의 뱃속에 나비가 날아다니는 것만 같은 사랑에 빠졌던 소녀에 대한 환상과 그 실현 불가능의 트라우마는 아동성범죄자가 되게 하고, 또 다시 신문의 지면을 장식한다. 성범죄의 재발 방지를 위한 사회 각층의 방안이 기사화되고, Y는 재발방지 수단인 화학적 거세에 자발적으로 참여한다. 그러나 모범수가 되어 가석방된 Y는 성적 욕구를 통제하지 못하고 연쇄적인 범죄를 지속하다 마침내 자신의 성기를 물리적으로 거세하기에 이른다.

                  

이때 세간의 주목을 받는 유명 화가의 개인전이 문화단신으로 소개되는데, 그 장소도 또한 걸작이다. 삼선 미술관‘지움’이다. 어느 갤러리를 말하는지 독자는 피식하고 바람 빠진 미소를 지을 것이고, 주목 작품명이 <소시지, 피 그리고 눈물>이란 것에서 예술의 사회적 반영을 목격하게 된다.

 

이 그림에 대한 허영으로 가득한 왜곡과 아전인수의 평단의 해설에 배꼽을 잡게 한다. 거대한 소시지가 잘린 상태로 바닥에 떨어져 있으며, 그 주변에 피와 눈물이 흐른 흔적이 있는 그림은 평단의 말처럼 환경오염의 경고도, 작가의 희생도 아니라는 것쯤은 독자들은 안다. 그녀의 아들 Y에 대한 어머니로서의 연민과 슬픔이라는 것을. 이렇듯 어쭙잖은 평단이란 지식인입네 하는 자들의 무지와 위선, 기만은 돼지꼬리 달린 아이가 등장하는『백 년 동안의 고독』의 작가‘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연상시키는 ‘후안 마누엘 마르케스’라는 권투선수가 쓴 책의 추천사를 번역문과 영어원문을 동시에 수록하여 번역의 세태에 조소를 보내는 것과 상통한다.

 

사실 Y라는 소외된 자의 삶을 단편적 기사들의 집합으로 기막히게 완벽한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로 엮어낸 구축술은 차치하고라도 이 사회를 지배하는 가식과 기만의 형상들, 배척과 배제의 불관용의 아집들이 매 꼭지의 기사마다 완벽하게 자기의 주제와 음성을 가진 자기완결성이 있었음을 뒤늦게 알아차리는 것은 독자 자체로서의 내면적 반전의 놀라움이기도 하다. 소설은 스스로 자기 해설과 평론조차 한 꼭지의 기사에 담아 아예 어설픈 평론 따위를 차단하는가 하면, 아버지와 어머니의 합성어로서 동성애 커플의 한 편을‘아마’란 신조어로 등장시킴으로서 다름을 수용하는 결말은 경계를 폐지하고 모두가 연대하는 공동체적 삶의 희망을 기대케 한다. 이 소설책은 두 배의 값을 치러도 아깝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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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
옌롄커 지음, 문현선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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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렌커의 작품은 전체주의 중국의 획일화된 언어와 서구 자본주의의 물신에 경도된 권력자들의 탐욕정치 하에서 사활을 건 글쓰기임을 보여준다. 그의 소설이 모두 판금(販禁)되었고, 이젠 중국내에서 새로운 작품의 발표는 아예 가능치도 않은 상황이어서 이 작품 『사서(四書)』는 오직 외국에서만 출간되고 있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작가는 한국어판이 가장 먼저 출간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중국정부로부터 혹독한 처벌을 두려워 한 중국내 출판사들이 모두 출간을 거절한 탓이다.

 

국내에 소개된 그의 첫 작품인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마오쩌뚱의 혁명적 금언을 조롱함으로써 사회주의의 미명하에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참담하게 억압하는 혁명의 비정함과 모순성을 관능적 언어로 지펴냈는가 하면, 『딩씨 마을의 꿈』에서는 물신에 영혼을 상실한 부패한 정부 관리, 권력의 부도덕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함께, 인간의 생명, 즉 죽음을 담보로 하는 물질주의의 망령에 대해 맹공을 가하며 인민들의 처절한 절망과 고통을 함께한다.

 

『사서(四書)』는 이렇듯 엔렌커의 무너져가는 인민의 삶과 체제의 부패와 자기모순에 대한 비판의 연장선에 있다. 이 소설의 배경은 학자, 종교인, 교수, 음악예술가, 작가, 의사, 과학자 등 지식인들의 정신을 개조한다는 명분하에 황허 유역의 거대한 불모지를 구획한 벽지의 수용소다. 아무리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일종의 광대한 집단농장 중 가장 깊숙이 위치한 99구 라는 구역의 참담한 기록의 형식을 하고 있다. 제목은 바로 이 기록이 4개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인데, 그것은 작중 인물인 ‘작가’가 쓴 「옛길」,「죄인록」, 그리고 ‘학자’가 쓴 미완성의 원고「시시포스의 신화」, 그리고 누군가의 구술을 받아썼다는 「하늘의 아이」이다.

 

그렇다. 소설의 인물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그저 직업적 신분을 부르는 작가, 종교, 학자일 뿐이고, 체제의 상부에 의해 죄인이 된 이들의 노동과 일상을 지도하고 명령하는 99구의 감독자 역시 그저 ‘아이’일 뿐이다. 일종의 집단농장에 끌려온 이들에게 제시되는 10계명의 문장들이 모두‘일률적’이라는 관형사로 수식되듯이 전체주의 하에서 개인의 존재란 의미는 불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 개체의 존엄성이 박탈된 체제에 대한 조롱과 분노와 비난을 엔렌커 식으로 표현한 것일 게다. 개인의 신념과 양심, 사상이 인정되지 않는 획일화된 사회, 이 일률성에서 이탈하려는 자는 반동이 되고, 죄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개체 고유를 분별하는 이름이 없다. 그렇게 된 것이다.

 

1. 위신구 99구의 에피소드들

 

죄인들에게는 밀농사를 위한 불모의 토지가 분담되고, 달성 불가능한 수확량이 할당된다. ‘아이’는 어떠한 폭력도 행사하지 않는다. 그러나 도망이 불가능한 99구에서 살아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제시할 뿐이다. 붉은색 종이꽃 125송이를 모으면 어떠한 제약도 없이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 갈 수 있다. 단지 꽃 모양으로 오려진 색종이에 불과하지만 엄청난 권한을 내재하고 있다. 붉은 색종이가 물신(物神)화 된 것이다. 물신주의에 강한 저주를 보내는 체제가 온갖 물신들, 우상들로 그득하다는 것은 이미 자기 모순을 암시한다. 물신화된 꽃송이는 곧 자유와 해방이라는 강렬한 의미와 동격이다. 그래서 죄인들은 쟁기를 끌고 씨앗을 뿌리며 열성적으로 할당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스스로 중노동에 자신들을 몰아넣는다.

 

목표량은 아이가 숭배하는 상부(上部;위계에 의한 권력기관의 단계)의 진출을 위한 염원과 함께 늘어나고, 아이의 명령에 적극적으로 헌신하고 순응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꽃송이는 한 때 지식인이었던 죄인들을 경쟁의 지대, 탐욕의 영역으로 이끈다. 꽃송이를 얻기 위해서는 어떠한 연대감도 연민도 존재하지 않는다. 「옛길」과「죄인록」를 쓰고 있는‘작가’는 동료 죄인들의 언행을 내밀하게 기록하여 아이에게 제출하고, 그 고발의 대가로 꽃송이를 받는다. 존경받는 유명 작가였던 이가 어떤 번민이나 고뇌도 없이 염탐꾼이 되어 동료를 팔아 자기욕구에 몰두하는 것이다. 남녀 간에 애정전선의 기미만 포착되어도 불륜의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열을 올리고, 그를 통해 귀향의 티켓이 될 수 있는 꽃송이를 위해 고발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린다. 이러한 행동에 있어 여타 모든 죄인들은 한 치의 차이도 없다.

 

이처럼 소설은 아이와 죄인들이 꽃송이라는 물신을 두고 벌이는 긴장관계인 것이다. 125송이의 붉은 종이꽃, 혹은 다섯 장의 붉은 별을 획득하기 위한 에피소드이다. 여기에 아이의 명령기관인 상부, 즉 체제의 지배 권력이 발하는 기만과 위선, 부조리의 면모들이 더해져 그야말로 오늘의 전체주의 중국의 일그러진 자가당착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영미(英美) 등 서구문명을 폄하하고 무시해야 할 대상이라고 말하는 체제의 열등감이 인민의 삶을 한없는 곤궁함과 절망의 세계로 밀어 넣고 있는 현실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꽃송이를 모으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던‘연구원’이란 남성이 급기야 125송이를 받아 99구를 유유히 떠나는 것인데, 바로 획득 배경이 그것이다.

 

자석으로 황허유역 모래밭에 있는 흙철을 모아 철을 생산한다는 발상인데, 곧 이 아이디어는 중국 전체로 확산되어 철 생산을 독려하기에 이른다. 귀향의 혜택과 상부기관의 진출이라는 포상을 위해 99구의 아이와 죄인들은 황허의 강변 모래밭에 가마를 만들고, 자석으로 흙철을 모으기 위해 중노동을 하며, 철을 녹일 연료를 위해 나무를 남벌한다. 늘어나기만 하는 생산 압력은 얼마 남지 않은 농기구마저 녹여야 하게 되고, 급기야는 흠 없는 강철의 생산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흙철로는 생산이 불가능한 강철을. 이 기만을 꿰뚫어 본 99구의 죄인과 아이는 아이가 보관하던 강철로 만든 작두를 녹이고, 이웃한 98구, 97구...역시 똑 같은 짓을 할 것을 예견한다. 동일한 강철이라면 상부에, 체제의 지배권력을 만족시킬 수 있는 차별화만이 살 길이 된다. 그래서 오각별로 만든 강철에 붉은색을 칠하여 참가하지만‘충(忠)’자를 새겨 넣은 강철에 1등을 내주고 만다. 권력에 충성하는 것이 체제의 상징을 누른 것이다. 주와 객이 전도된 오늘의 중국에 대한 신랄한 풍자이다. 부패한 권력, 위계화된 계급주의의 변질된 체제, 무지와 무능함으로 점철된 실종된 체제정신에 대한 비판인 것이다.

 

아마 소설 속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라 할 수 있을 것인데, 아이의 허락을 받아 옥수수알, 아니 땅콩만한 밀알을 생산하기위해 자신의 피를 받아 밀밭에 뿌려대는 것이다. 밀의 성장에 따라 점점 많은 양의 피가 필요하고 과다한 출혈로 건강을 급격하게 잃어가는 과정은 울음과 비웃음이 섞여 나오는 기이한 희극이 아닐 수 없다. 99구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작가의 몸부림이자, 상부, 아니 최고의 상부기관이 있는 베이징에 발을 딛기 위한 아이의 염원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피의 향연이다. 흩뿌려진 비릿한 피로 붉게 물든 대지와 피를 먹고 자란 옥수수처럼 웃자란 밀대는 지속 가능한 것이 아니다. 자유와 영예를 위해서 인민은 피를 뿌려야 하는 체제란 것이다. 참담함과 절망감이 이렇게 소설 전체를 흐른다.

 

2. 십자가를 진 ‘하늘의 아이’

 

땔감으로 남획된 무분별함은 대홍수를 부르고, 기근을 낳는다. 식량은 더 이상 배급되지 않고, 죄인들은 풀뿌리와 풀씨로 연명하고, 죽어 나가기 시작한다. 성모의 그림을 숨겨두고 있던 ‘종교’는 아이를 찾아가 몇 알의 볶은 콩을 위해 성모의 그림을 바닥에 놓고 짓밟아 상부가 원하는 인간으로 변하였음을 시위한다. 그리고 불륜으로 낙인이 찍혀 잔혹한 고문을 받고 돌아온‘음악’은 파트너인 ‘학자’를 위해 이웃 구의 상부에 몸을 주고 약간의 콩과 만두를 얻어오는 일을 반복한다.

 

작가는 음악의 이러한 매춘 행위를 미행하고 매춘의 상대자인 이웃구의 상부를 협박하려하다 도리어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 작가의 행위는 여전히 자신의 안위에만 머물러 있다. 동료들의 밀고록인 「죄인록」과 달리 그가 쓴 또 하나의 기록인「옛길」은 99구에서 풀려났을 때 출판할 야심찬 기획으로 준비되는 것이다. 부패한 권력과 상부를 향해 진실을 외칠 줄 모르는 중국의 문단, 중국 작가들의 초상이다. 고통 받는 인민의 삶에 대해 아무런 감각도 지니지 못한 지식인이란 허울만 뒤집어 쓴 몽매한 이들의 표상에 다름 아니다.

 

이와 대비되어 아이, 곧 상부인 체제의 기만성과 부당성에 저항하는‘학자’란 인물이 있다. 인간에 대한 연민과 신념을 저버리지 않음으로서 꽃송이라는 당근의 획득으로부터 불이익을 감수한다. 그러나 죽음이 짙게 내려앉은 99구로부터 사랑하는 연인‘음악’의 해방을 위해 옥수수처럼 거대하게 자란 밀을 경작하곤, 마침내 아이에게 곱게 포장한 거대한 밀을 안긴다. 아이의 꿈인 베이징으로의 통로를 위해 협력한 것이다. 모든 진실과 정의는 사랑에 기초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아이의 꿈이 실현되고 죄인들의 해방에 대한 염원을 체제가 수용할까? 결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권력이 원하는 것은 그네들의 부패한 권력에 충성하는 것이지, 지식도 인민의 삶도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아이와 작가, 학자, 그리고 여타 죄인들이 알게 된 것은 무엇일까? 볶은 콩을 입에 가득 넣은 채 흉측하게 질식사한 음악을 발견한 작가의 자기반성과 번민은 자신의 살을 잘라내 고깃국을 끓여 굶주린 학자를 대접하고, 음악의 시신 앞에 바치는 속죄의식으로 이어진다. 또한 자신을 십자에 못 박고 자유의 징표인 강철별을 죄인들에게 나누어주는 아이의 순교행위로 나타난다. 너희들의 죄를 내가 짊어지고 가겠다! 그러나 엔렌커는 아이의 죽음의 대가로 자신들의 집으로 향하는 죄인들 앞에 99구로 향하는 일찍이 자유를 찾아 갔던 연구원의 회귀를 마주하는 아이러니를 두고 있다. 밀을 경작하며 편히 먹고살던 99구의 옛 시절을 생각한 회귀이다. 전체 인민의 삶 모두가 이미 피폐해져 있음을 암시하는 것일 게다. 혹은 동료였던 지식인들에 대한 소통의 기대 때문이었는지도.

 

이 아이러니는 학자가 쓴 「시시포스의 신화」의 수정된 우화에 가 닿는다. 반복된 노동의 고통, 그러나 “징벌이 주는 고통이나 변화, 무료함, 죽음 등에 일단 협력하게 되거나 적응하게 되면 징벌은 의미를 잃는다. (중략) 적응은 무기력함과 부득이함에서 아름다움과 의미를 도출해내게 된다.” 이것이 우리 인간이 발전시킨 체념과 타성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곤 한편으론 “타성의 체념 역시 의미있는 저항과 능력을 갖”으며, “타성은 순응을 낳고 적응은 힘을 갖는다.” 무슨 의도를 지닌 말일까? 획일화하여 억압하고, 격리하여 복종시키려 한들 인간은 곧 적응하고 고유의 능력, 새로운 힘을 발견하고 체화한다는 말이다. 갇힌 체제, 권력에 순응하지 않는 인민을 핍박한다고 해서 저항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의 순응과 조화를 신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학자가 탄생시킨‘동양의 시시포스’를 보면 체제의 상부는 아마 화들짝 놀라지 않을까 싶다. 전체주의 신들은 결코 엔렌커의 붓을 꺾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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