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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씨의 거세에 관한 잡스러운 기록지
강병융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평점 :
독특한 구성을 하고 있는 소설이다. 60여 꼭지의 신문기사와 편지, 책 추천사, 참고문헌 등이 배치되어 한 편의 소설을 이룬다. 물론 신문기사 등 모두가 허구의 산물이다. 그런데 이 단편적인 글들이 일관된 서사를 향하여 긴밀하게 조응하고 있어, 그 재구축의 재주에 미소를 짓게 만든다. 그리고 한없이 빠져든다. 모 작가의 설레발처럼 “몰입도가 가히 폭력적”수준이란 말에 동의하는 수밖에 없게 된다.
우린 신문이나 뜨내기 잡지 등에서 현재의 사건, 사고를 비롯한 잡다한 기사들을 읽는다. 어디서 구립문화센터가 건립되었고, 아동성범죄가 발생했으며, 따돌림을 비롯한 학교폭력사건이 있었다는 토막을 본다. 그리고 지역 특산물축제 소개와 새 책 안내, 유명 화가의 미술 개인전 소식을 접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아이돌 그룹의 음반 발표 소식과 그네들의 패션, 개인사 등이 가십이 되어 잡다하게 기사화되어 무료한 시민들의 입담거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우리에게 분명 일관된 무슨 메시지를 말하고 있을 것이다. 아이돌의 음반발표 소식이 왕따와 어떤 관계가 있으며, 더구나 아동성범죄와 미술전시회가 관련을 맺고 있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 모두가 우리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으며, 더욱이 동시대에 일어나는 일이니 연결하여 생각지 않았던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소설을 나는 작가의 예민한 사회적 감수성, 아니 통찰력이 창안해낸 기발한 시스템적 창작품이라 하고 싶다.
소설은 <환경과 산모 신문> 0000년 9월 8일자, 둥근산부인과에서 기형아 탄생을 알리는 기사로 시작하여, <헤럴드 뮤직>, <사랑과 인권신문>, <구로구청 신문>, <범죄동향신문>, <주간소설소식>, <주간입시동정>, <화학과 범죄>, <월간 지움>, <법의학 저널>, <국어만세신문> 등 절묘한 이름을 한 서로 다른 분야의 신문, 잡지 기사가 0051년 10월 16일자로 끝난다. 독립된 기사들이 하나의 일관된 사회의 정체성, 주류의 의식을 지향하고 있으며, 그곳에 경계 밖으로 밀려나는 약자와 소외된 자들의 외침이 있음을 들려주는 것이다. 주류와 다른 것은 배제되어야 한다는 편협과 이기심의 몽매를.
최초의 기사는 문경에서‘Y’라는 코 없는 기형아의 탄생을 알린다. 바로 ‘다르게’생긴 아이의 존재와 그 아이의 삶을 쫓는다는 얘기다. 여기에 늦게나마 자신의 동성애자로서의 성정체성을 깨달은 Y의 아버지는 아내와 이혼하고 남자 파트너와 함께 Y를 양육한다. 안면장애를 지닌 Y, 동성애자 아버지는 이미 포용하지 못할 우리 사회를 예견케 한다.
이것은 Y의 코 없이 두 개의 구멍만 뻥 뚫린 밋밋한 얼굴을 사포로 문질러대는 아이들의 가학적 학교 폭력 기사로, 작가인 Y의 아버지 작품에 대한 세간의 편견에 사로잡힌 자들의 비난과 소송 기사가 되어 자신들과‘다름’을 낯섦의 폭력으로 대할 줄 밖에 모르는 우리의 초상을 드러낸다.
이‘다르다’는 의미에 대해 인색하고 두려움조차 갖게 되는 것은 곧잘‘틀리다’는 표현으로 혼동하여 말하는 버릇과 어떤 관련이 있는 듯하다. 자신과 생각과 의견이 다르면 곧 적대시하는 이 사회의 편협성과 불관용성에는 자신감의 취약성과 소심함, 비겁함, 얕은 지식에 대한 가장을 은폐하려는 자기 보호의 무의식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돼지꼬리가 달리면 어떻고, 손가락 하나 없으면, 다리가 셋이면 인간이 낳은 개체가 인간이 아닐 수 있다는 말인가? 물질과 소비의 광기를 지적하면 빨갱이가 되고, 옹호하면 수구꼴통이 되는 극단밖에 알지 못하는 다름에 대한 이해의 결여는 혹여라도 자기의 기득권적 영역으로의 침범에 겁을 먹었기 때문일 것이다. 잃을 것이 그리 많지 않은 대중들의 이런 편협성은 사실 기이하게 생각되기만 한다.
나로서는 이 소설만이 지니는 미덕으로 생각되는 것이 있다. 굳이 구별될 이유가 없는 보편적인 주체에는 익명을 부여하고, 풍자의 대상에게는 누구나 알 수 있는 유사기호로 이해의 친밀도를 높인 것이다. 소설을 구성하는 모든 기사에 인용되는 전문가, 담당자들의 이름이 한결같이 '오OO'으로 무차별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그렇다. 한편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삶을 대변하는 유명 아이돌스타의 이름이 ‘불나비스타일쏘세지글러브’(쿠바의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을 패러디)라거나, 소설『변신』의 작가 ‘프란츠 카프카’를‘츠란프 프카프’의 ‘변심’으로 사용하는 것을 비롯해 그 해학과 풍자를 통한 조롱이 깊이 밴 즐비한 기관 명칭의 약어들이 그러하다. 이것은 읽는 재미와 더불어 그 의성(擬聲)의 유사가 지닌 강렬한 의미의 환기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준다.
어쨌든 다름의 희생물로서 Y는 유년시절 자신의 뱃속에 나비가 날아다니는 것만 같은 사랑에 빠졌던 소녀에 대한 환상과 그 실현 불가능의 트라우마는 아동성범죄자가 되게 하고, 또 다시 신문의 지면을 장식한다. 성범죄의 재발 방지를 위한 사회 각층의 방안이 기사화되고, Y는 재발방지 수단인 화학적 거세에 자발적으로 참여한다. 그러나 모범수가 되어 가석방된 Y는 성적 욕구를 통제하지 못하고 연쇄적인 범죄를 지속하다 마침내 자신의 성기를 물리적으로 거세하기에 이른다.
이때 세간의 주목을 받는 유명 화가의 개인전이 문화단신으로 소개되는데, 그 장소도 또한 걸작이다. 삼선 미술관‘지움’이다. 어느 갤러리를 말하는지 독자는 피식하고 바람 빠진 미소를 지을 것이고, 주목 작품명이 <소시지, 피 그리고 눈물>이란 것에서 예술의 사회적 반영을 목격하게 된다.
이 그림에 대한 허영으로 가득한 왜곡과 아전인수의 평단의 해설에 배꼽을 잡게 한다. 거대한 소시지가 잘린 상태로 바닥에 떨어져 있으며, 그 주변에 피와 눈물이 흐른 흔적이 있는 그림은 평단의 말처럼 환경오염의 경고도, 작가의 희생도 아니라는 것쯤은 독자들은 안다. 그녀의 아들 Y에 대한 어머니로서의 연민과 슬픔이라는 것을. 이렇듯 어쭙잖은 평단이란 지식인입네 하는 자들의 무지와 위선, 기만은 돼지꼬리 달린 아이가 등장하는『백 년 동안의 고독』의 작가‘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연상시키는 ‘후안 마누엘 마르케스’라는 권투선수가 쓴 책의 추천사를 번역문과 영어원문을 동시에 수록하여 번역의 세태에 조소를 보내는 것과 상통한다.
사실 Y라는 소외된 자의 삶을 단편적 기사들의 집합으로 기막히게 완벽한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로 엮어낸 구축술은 차치하고라도 이 사회를 지배하는 가식과 기만의 형상들, 배척과 배제의 불관용의 아집들이 매 꼭지의 기사마다 완벽하게 자기의 주제와 음성을 가진 자기완결성이 있었음을 뒤늦게 알아차리는 것은 독자 자체로서의 내면적 반전의 놀라움이기도 하다. 소설은 스스로 자기 해설과 평론조차 한 꼭지의 기사에 담아 아예 어설픈 평론 따위를 차단하는가 하면, 아버지와 어머니의 합성어로서 동성애 커플의 한 편을‘아마’란 신조어로 등장시킴으로서 다름을 수용하는 결말은 경계를 폐지하고 모두가 연대하는 공동체적 삶의 희망을 기대케 한다. 이 소설책은 두 배의 값을 치러도 아깝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