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해 여름
에릭 오르세나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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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자들과 언어, 그리고 소중한 섬에 바치는 경의”라는 산뜻한 소개의 말 이상은 외려 이 작품을 누추하게 표현할 것 만 같다. 그럼에도 여기에 감히 덧붙인다면 우아함 넘치는 쾌활함과 코끝을 스치는 봄바람에 실려 오는 아득한 추억의 향수를 가득 품고 있다고 할까? 얼마간의 거드름조차 순수와 고움이 묻어나는 프랑스 서부 브르타뉴의 작은 섬사람들의 가슴 따뜻한 시선과 건강성이 유쾌하게 지면을 꽉 채운다.

 

섬이라는 고독과 고립에 자유를 입히고 대양의 드넓은 상상력을 품고 있는 토속적 투박함이 물씬한 B섬에, 죽었기에 더 이상은 간섭할 수 없는 이들의 작품만을 느릿느릿 번역하는 번역 작가 '질'은 어렵사리 둥지를 튼다. 우연히 마주한 사제의 초대에 응하고, 본당 신부와의 대화를 통해 영어를 불어로 번역하는 자신을 빗댄 사나포선(私拿捕船)선장이란 소문은 마을 사람들에 퍼지고 그렇게 그는 섬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다.

 

섬 자연의 풍광에 매료되어 “애쓰거나 권태를 느낄 새도 없이 시간이 미끄럼을 타며 가뭇없이 달아”나는 시간을 보내던 질에게 출판사에서 계약안과 계약의 현실성을 입증하는 거액의 수표, 그리고 살아있는 작가인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작품이 동봉된 번역의뢰 편지가 날아든다. 번역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지 않는 죽은 작가의 작품만을 작업하던 질에게 살아있는 그것도 번역에 까다롭기로 유명한 나보코프의 작품이 “저는 곧 부당한 명성을 누리는 졸렬한 번역가들을 상대로 한바탕의 전쟁을 벌일 생각입니다. 운운”하는 자부심과 교만에 찬 편지들과 함께 도착한 것이다.

 

 

비가 줄줄 새는 집수리와 바닥이 보이는 생활고에 질은 나보코프의 작품 번역을 수락하지만, 이내 “어려서부터 포충망을 들고 나비를 쫓아다닌 탓에 노벨문학상 후보라는 이 성격 장애자의 문체에는 나비의 교태가 배어있었다.” 번역가는 나비의 그 가벼움과 자유로움과 변덕을 옮겨야 하는 끔찍한 장애에 부딪친다. 한 문장도 손을 대지 못한 채 우울한 날을 보내던 그에게 극(極)지대를 탐험하는 남편과 떨어져 지내며 화단을 가꾸던‘생텍쥐베리’여사의 친절이 다가온다. 여름이면 박사논문을 쓰고, 무언가를 연구하기에 더없이 매혹적인 섬의 환경 탓에 몰려든 학자, 교직자들, 하물며 아이들 돌보미로 고용된 영국인 처녀들까지 “가족사이자 근친상간의 연대기인”나보코프의 소설 『에이다』의 번역에 돌입한다.

 

출판사가 있는 파리에 적개심을 가득품고, 번역가 질을 압박하는 무례에 저항하기라도 하는 듯 마을 사람들은 각기 나누어진 몫에 매달려 열성을 쏟는다. 그러나 그것엔 무언가 향긋한 관능이 맴돈다.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모녀가 나란히 우리 원고를 들여다보고 있을 때면, 우리는 되도록 조심스럽게 두 여자의 비누 냄새를 맡곤 했다.”

“<She had been prevailed upon to clothe her honey-brown body.> 정말 옮기기가 쉽지 않군요.”

 

섬의 본당 신부가 이러한 섬의 기운을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다. 성당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 그 부도덕성을 질책하고 손에 쥐고 있던 『롤리타』를 집어던지며, 신성모독자인 나보코프에 매달리지 말아야 함을 역설한다. 이것은 작품의 면면에 감도는 친화력과 유쾌함, 그리고 관능과 엘레지(élégie)풍의 서정성을 더욱 부추기는 기발한 에피소드로 마음에 들어찬다. 여기에 아르헨티나를 떠나 섬의 고독에 잠겨있는 ‘호세 마리아 페르난데스’의 감각을 통해 이 야릇한 섬을 가득 채우던 기운이 더해진다. “섬의 어디에나 색정의 기운이 감돌고 있음을 느낌으로 알고 있었다. (中略) 향긋한 냄새로 미루어 근처 어디에선가 교접이 한바탕 벌어지고 있으려니 짐작하고 있었다.” 『에이다』가 발산하는 번역의 열기로 채워진 섬의 분위기가 이보다 잘 묘사될 수 있겠는가?

 

이윽고 호세의 무선통신기 TS801, 즉 전리층, 하늘까지 공모자로 활용하는 아마추어 번역가들은 전 세계의 불어권 사람들을 향하여 난해한 문장의 도움을 받는다. 일상의 언어를 풍부하고 아름답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번역가들의 고뇌의 한 단면이리라.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의 전환, 아마 ‘노스탤지어’를 그저 ‘향수(鄕愁)’라고만 번역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하듯이, 또한 자칫“생동감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데다, 너무나 밍밍하고 시르죽은”것이 되고 말기에 까다롭기 이를데없는 번역가의 고충이 이렇듯 상징적으로 그려진다.

 

독촉에 시달리는 번역가, 다행스럽게도 나보코프는 매해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되지 못하고 의뢰 받은지 3년이 넘어서고, 드디어 수상자 선정이 임박했을 때 출판사 편집위원이 섬에 최후의 통첩을 위해 찾아든다. 이 파리로부터의 인물에 막연한 적대감을 지닌 섬사람들은 질을 위해 이 사자(使者인 동시에 死者)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그리곤 노벨상 선정 발표일에 맞추어 출판될 수 있는 더 이상 변명을 꾸며댈 수 없는 이유있는 구체적인 최후의 날자가 통보된다. 낱말, 고양이, B섬의 사람들..., 자유와 오만불손한 독립성이 닮아 있는, 그러나 상상력과 사랑이 풍성한 그것이 『에이다』의 번역 완성본이 되어 폭풍우가 몰아치는 해안에서 섬을 떠난다. 마치 본당 신부의 저주에 답을 보내듯이, 아니 번역의 고통스런 시련을 지워버리려는 듯이. 자연과 언어가 주는 행복의 장면들이 우아함과 경쾌함, 그리고 익살맞은 웃음에 실려 한바탕 소동의 즐거움, 막연한 옛 추억에 묻히는 시간이 된다. 자신들의 토착어를 지키는 사람들, 돛배로 항해하는 법과 떠나는 법을 아는 사람들, 고독과 사랑이 풍성한 섬 ‘브레아’에 대한 작가의 경의에 독자의 경의를 보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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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율성, 문명의 편견 마이크로 인문학 4
이근세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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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동서(東西)문명의 ‘효율성’에 대한 세계관의 차이를 통해 양자의 전략적 장단점을 규명하고 이의 조화를 위한 종합적 성찰이자 제언이라 하겠다. 100쪽 남짓한 팸플릿이지만 문명 상호의 편견을 이루는 관념과 행동 양식을 비교적 풍부한 근거를 통해 제시하고 있으며, 특히 서구식 사고에 익숙한 오늘의 우리들에게 동양(중국)의 전통사상에 대한 가치를 새롭게 인식케 하는 미덕을 지니고 있다.

 

(1)서구의 효율성 인식

 

서구는 어떤 과제를 수행하기 이해서는 우선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수립한다. 그리고 이 계획을 수행한다. 즉, “실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관념적으로 먼저 구상하고, 그 후에 의지와 행동을 통해 관념적 구상을 현실 속에 구체화 하는”, ‘모델화’의 정식을 따른다. 그러나 이 관념적 구상은 이상적이고 완벽성에 가깝지만 이를 100% 실천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한계를 내재하고 있다. 그래서 이론과 실제를 매개할 수 있는 것으로서 사려깊음, 또는 신중함이라는 의미의 프로네시스(phronesis)를 상정하여 완전성을 지향한다.

 

그런데 모델화는 이처럼 이론과 실제의 괴리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전쟁과 같은 동태적 영역, 다시 말해서 수많은 부수적, 우연적 사건이 연속하는 경우에는 그야말로 계획은 부질없는 짓이 되고 만다. 결국 부딪친 난관과 같이 고착화된 구상을 실현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서구인은 영웅적인 행동주체의 출현을 기대한다. 아마 서구의 무수한 영웅의 출현은 이러한 배경을 설명하는 하나의 사례로 보아도 무난할 것이다. 사실 효율성(效率性: efficiency)이란 단어가 이미 서구적 표현일 것이다. 완전성인 모델에 도달한 실행 결과의 비율이란 의미이니 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서구인은 완전성의 추구를 향한 지속적인 목표에의 도전이 가능했던 것은 아닐는지.

 

(2)동양(중국)적 효율성

 

서구의 영웅주의, 모델화가 지닌 한계, 즉 모델화에서 실재가 이탈할 때, ‘주체’의 임기웅변, 탁월한 대처능력이 요구된다. 영웅, 천재에 의존해야만 하는 서구적 합리성의 내적 문제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바로 이것이 전략의 중심축이 된다. 바로 상황의 흐름을 감지해내고 그 흐름을 이용하는 능력에 동양은 관심을 기울인다. 그래서 계획이니 모델이니 하는 서구의 복잡한 구상이 필요치 않다. 형세(形勢)라는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힘의 관계를 살피며, 그 상황 속에 함축되어 있는 잠재력을 점검하고 평가한다.

 

즉, 작동중인 역학관계를 총체적으로 점검하고 그것이 곧 형세의 귀결이라는 생각이다. 따라서 서구처럼 동태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계획을 이탈한 요인을 해결하기 위한 주체의 개입이 존재치 않는다. 마찰도, 운도, 천재성도 필요 없다! 결과는 단지 매순간 일어나는 함축된 힘의 관계에서 생겨난 필연적 귀결일 뿐이다. 객관적 조건이 유리하게 전개되는 상황을 만들거나 기다리면 된다. 쉽다. 아마 “실재는 운행이다. 천지는 말없이 행할 뿐이다.”라는 중국식 사고야말로 이를 잘 대변하는 말일 것이다. 일례로 중국 외교 전략에서 이러한 형세에 대한 특징을 살펴 볼 수 있다. “타인에 나의 지배력은 주체의 인위적 개입이나 운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미 진행 중인 상황을 활용하는 것”, 귀곡자가 말한 ‘세를 세워서 장악(立勢而制事)’한다는 그것이다. 굳이 효율성을 비교하고 따질 이유가 없다. 동양에서는 이처럼 효율성은 근원적인 것이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3)동서의 조화를 위해서

 

이렇게 보면 서구의 모델화, 영웅주의, 계획과 실천이라는 이원적 구조가 동양(중국)의 형세라는 근원적 효율성의 개념에 비해 열등한 것처럼 비친다. 그러나 형세의 개념에는 내밀함, 폐쇄성, 비가시성이 있다. 즉 객관적 조건의 조성에 참여하지 않은 구성원은 그것의 결과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서구의 모델화가 지닌 입장정리와 반대의 제기와 같은 토론의 과정이 없다. 바로 형세에는 이 공론화라는 과정이 부재(不在)하다는 점이다. 책은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된 중국의 오늘로부터 이러한 형세의 이용을 발견한다. 값싼 노동력을 이용한 세계의 공장이 됨으로써 상대적으로 쉬운 성장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수동성의 전략인 상황과 세의 효율성 추구만으로 1등이 될 수 있겠는가에 의문을 제기한다. 논쟁이 조직과 공론화와 같은 민주주의적 상호 인정과 타협이 없이 자신의 효율성만을 계속 추구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그리곤 “의미의 문제는 분명 중국을 뒤흔들 것이다”라는 이익이 아닌 이념의 추구, 즉 새로운 모델의 제시가 요구된다고 제안하고 있다. 세계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와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모델화는 당위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저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이념의 추구’라는 유일한 노선만 있는 것일까? 20세기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오히려 이념은 폭력의 온상이고 처참한 잔악성이란 상처만 남기지 않았던가? 민족주의, 군국주의, 공산주의의 전체화 등등, 그리고 사적 권력의 존속을 위해 조잡하게 만들어진 무수한 이념들은 인류에게 분열과 고통만을 주었던 것이 사실이지 않은가? 동서의 조화, 인류의 평화와 번영이란 이상을 구실로 다시금 이념(Ideology)을 만들어내는 것은 이젠 인류를 패망의 나락으로 밀어 넣는 일일지도 모른다. 외려 상황, 형세의 철학과 같이 자연을 객관화 혹은 대상화시키지 않으면서 협의와 참여가 가능한 어떤 자연적 실천의 길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 같이 책은 서구의 모델화와 동양의 전통 사상에 대한 종합적 성찰의 과제를 충분한 논거를 통해 제시하고 있다. 어느 것이 좋고 나쁜가가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는 토대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서로가 서로를 바깥에서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서로의 편견이 드러나고 그때야 대화가 가능해진다.”는 몰이해의 제방을 터뜨리는 시작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겠다. “철학의 가능성은 타성의 파괴”라는 아포리즘이 있듯이 우리의 인식을 옥죄고 있는 그 습관적 사고를 파괴하고 보다 넓고 멀리 바라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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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콜하스(Michael Kohlhaas) - 법과 정의의 실재에 대한 물음

 

1805년에 집필되었던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소설 『미하엘 콜하스』가 200여년이 훌쩍 넘어 영화화되었다는 것은 여전히 소설 속에서 말하고 있는 문제의 근원에 있어서 거듭 환기되어야 할 충분한 것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화되자 한국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은 공지영의 소설 『도가니』의 주제의식을 떠올리게 된다. 기득권 계층의 공고한 연결망인 부당한 사회시스템을 어떻게 정의로운 시스템으로 전환시킬 수 있을까? 하는 그것, 말(馬)장수인 ‘미하엘 콜하스’는 선량한 시민의 삶을 파괴하는 악행인 이 불의의 힘에 대항하여 정의를 지키는 것, 그리고 존재하지만 작동하지 않는 법의 존재론적 정당성에 대한 의문이자 또한 정당화에 대한 의지의 화신(化身)이다.

 

개봉되는 영화가 오늘의 우리에게 어떻게 이해될지 자못 궁금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법이 일반적 시민의 호소에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에 대해, 나아가 과연 법의 힘은 최초에 누가 부여한 것이며, 그 법이 항상 정의로운가 하는 것에 대한 의문 말이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소송』에 첨삭된 그가 쓴 유명한 우화인 「법 앞에서」에 등장하는 법의 문 앞에서 들어가지 못하는 시골사람의 그 불가능성처럼 열려있지만 이미 법안에 있는 인간이기에 여는 것이 가능치 않은 그 법의 폐쇄성까지는 아닐지라도 일반 시민에게 그 법의 도달은 요원하기만 한 것이 사실이 아니겠는가?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말을 거래하기 위한 긴 여정에서 미하엘은 영주인 융커로부터 예기치 않은 통행세의 요구를 받는다. 이 새로운 통행권리에 대한 이해가 없던 미하엘은 융커 일원이 탐내던 그의 말과 하인을 담보로 하고 여정의 목적인 말 거래를 무사히 마친다. 그리고 융커가 요구했던 통행증에 대한 제도의 존재여부를 해당관청에 문의하지만 그런 제도는 실재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즉 부당한 횡포이며 약탈인 것임을. 돌아오는 길에 자신의 말과 하인을 찾지만 뼈만 앙상하게 남은 말과 융커 일원의 무례와 위협만을 마주하게 된다.

 

귀가한 미하엘은 변호사의 선임과 자신의 권리를 되찾기 위한 소송을 제기하지만 이미 권력망의 요지에 산재한 융커가문은 중간에서 소장을 파기하고 미하엘의 요구를 묵살한다. 자신의 소장이 최고 권력자인 선제후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인지한 미하엘은 직접 전달하려 하지만 여성의 유연성을 내세운 아내가 전달하기 위해 떠나고 이내 수많은 상처의 반죽음 상태로 마차에 실려 돌아온 채, 회복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지배계급의 파렴치와 탐욕, 그 전횡이 구조화되어 그네들의 부당, 불의, 부정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세계라는 인식에 도달한다.

 

미하엘은 이렇게 구조화된 불의에 맞서기 위해 일군의 피압박민들의 무리를 규합하여 얼마 전 한국의 대통령이 지적한바 있는 ‘구조적 난맥상’이라는 것, 더러운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파렴치한들의 네트워크인 학연, 지연, 혈연으로 뭉쳐진 부정한 사회 시스템에 저항한다. 융커를 보호하는 도시를 방화하고 그를 비호하는 세력을 살해한다. 미하엘의 세력이 점점 불어나자 지배계층인 귀족들의 불안감은 점증된다. 이때 미하엘의 처사를 비난하는 루터의 포고문이 나돌자 미하엘은 루터를 방문하여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역설한다.

 

아마 주제를 가장 명료하게 드러내는 미하엘과 루터의 질의와 응답으로 이루어진 대화는 이 소설이 이후 많은 사람들에게 사회의 시스템과 법의 궁극에 대한 사유의 기틀을 제공한 명문(明文)일 것이다.

누가 “불과 칼로서 침범할 권리를 주었느냐?”라는 루터의 물음에 미하엘은 “아무도 없습니다.”라고 답변한다. 그에게 어느 누가 폭력의 권리를 줄 수 있는가? 이것은 누가 법 제정의 권리를 부여하였는가 하는 질문과 다름없다. 루소 같으면 ‘일반의지’라고 말하겠지만, 사실 그 존재를 규명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다. 이어서 “누가 이 국가 사회로부터 너를 추방했는가?”라는 질문에 미하엘은 자기만의 목소리로 답변한다. “추방당한 자란,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자를 말합니다.”라는 정의로 대신한다. 즉 누가 종용한 것이 아니라 작동하지 않는 법, 법이 무용한, 의미 없는 지대가 존재하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루터의 중재안에 의해 미하엘 집단의 방화와 살인 등 반란행위의 사면과 안전한 귀가를 조건으로 저항집단을 해산하지만, 융커 가를 비롯한 이해집단은 미하엘의 소송을 무효화하고 오히려 국기문란과 재산 파괴 행위 등을 이유로 처형을 모의하고 실행하려 한다. 여기서 다시금 법과 정의의 실효적 발현을 위한 멋진 대화가 등장 한다. “나라가 제일 먼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은 융커를 악형에 처하라고 고소하는 것이고, 비로소 나라는 말 장수 미하엘 콜하스를 처형할 권한을 갖는 것”이라는 선언이다. 법의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미하엘은 기꺼이 자신의 죽음을 담보하는 것이다.

 

사실 상대적 약자인 일반 시민이 자신에게 가해지는 부당한 힘에 항변하고 자신의 기본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수월치 않은 것이 현실이다. 사법부, 변호인, 교육청 등 사회적 네트워크를 이용하여 자신의 사악한 행위에 대한 제도적 처벌을 회피하는 『도가니』에서 보여주는 권력의 구조적인 난맥상은 법의 의미 없음과 법의 문(門)을 열고 들어 갈 수 있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회의를 야기한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법과 법 집행의 이러한 자의성은 정의에 대한 어려운 과제를 던진다. 불의에 대한 약자들의 연대와 저항의 실행이란 힘겨움의 요구, 결국 자기희생을 담보하여야만 기능하는 정의의 실현이란 왠지 불분명해 보인다. 정의가 절로 작동하는 구조의 사회를 염원하기에 인간의 본성이란 무능력하기만 한 것일까? 21세기에 제작된 영화는 과연 이러한 의문에 대해 어떠한 시선을 더하고 있을지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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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 외 김지원 소설 선집 1
김지원 지음 / 작가정신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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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사랑? 이 둘이 끈끈한 관계를 맺어야 할 것 같지만 우리네 삶은 그 관계의 유지가 그리 녹록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지 않은가? 「폭설」과 「잠과 꿈」, 두 중편으로 구성된 이 작품들에서 공히 일어나는 감상이다. 소설이 써진 시기가 1970년대 중반이다 보니 시대적 반영에서 오는 진부함이 있지만 여전히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도 이 고통을 수반하는 물음은 여전히 과제이다. 설렘, 기대, 열정, 갈망..., 이들 감정이 퇴색하기 시작할 때 결혼이란 제도로 결합되어있는 두 남녀는 갈등하기 시작한다. 반복, 그리고 습관화 된 것의 색 바랜 남루함, 권태와 싫증으로부터의 탈출.

 

수록된 두 작품은 따로 떼어낼 수 없을 만큼 동일한 배경과 닮은꼴의 인물들이 열연한다. 뉴욕 그리니치빌리지, 사랑과 자유를 찾아 부유하는 여자와 남자, 그리고 어느 가을날 살갗을 스치는 스산한 바람의 애수(哀愁). 「폭설」의 히로인(heroine) ‘진주’는 짧은 결혼과 이혼, 그리고 마치 자기 반영이듯 제도적 구속을 거부하는 자유로운 영혼의 남성에 대한 매혹으로 갈등하는 여자이고, 「잠과 꿈」에서는 전통적 자기구속과 헌신이란 결혼의 굴레로부터 자기를 비로소 발견해 나가는‘혜기’라는 여성이 있다. 그런데 이 여성들의 자기 삶, 억압된 내적 욕망의 분출이 독립된, 주체적 각성이라기보다는 남성을 통해서야 달성되는 수동적 해방이라는 한계를 가진 듯 보인다.

 

이것은 이 작품을 시대극, 70년대의 안방용 드라마에 머물게 하는 요소가 아닐까하는 회의가 고개를 쳐들게 한다. 그러나 인간적 진실, 그 체험적 본성의 목소리를 기만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자문에 이 회의는 주춤거리게 된다. 두 작품의 히로인들은 제도적 속박, 윤리로서의 보편적 시선을 거부하고 개별적 존재자로서의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남성에 도취되어간다. 즉 다분히 문란함과 불륜에 대한 긴장의 매혹이다. 낯선 새로운 것에 대한 긴장, 흥분, 모처럼 느끼는 에너지의 과잉으로 야기되는 강직의 쾌락일 것이다. 결혼의 습관성과 반복성의 탈색과 사랑은 이처럼 충돌한다.

 

진주와 혜기를 해방으로 이끄는 남자들, 기와 홍의 성적 자유, 욕망의 얽매임 없는 발산을 점진적으로 자기 내면화함으로써 독립된 주체가 되어간다. 그런데 거창하게 제도적 속박을 거부하고 자유를 선언하고 자기 쾌락에 전념하는 그녀들의 남자는 이타심을 본질로 하는 사랑을 하는 이들이 아닐 것이다. 여성은 고작 자기애와 고독의 보완재일 뿐 인듯하다. 소위 요즘말로 ‘나쁜 남자’에 대한 여성들의 취약점을 체득한 교활함이지 않을까? 결국 이웃집 총기 오발사고로 하찮은 죽음을 하게 되는 진주를 길들이는 기의 이기심이나, 결혼의 진부함에 몸을 떨고, 페미니스트처럼 여성의 자유를 말하지만 자신의 경제적 무능을 의존하기 위해 남성적 매력을 이용하는 혜기의 남자 홍의 실체는 정말 보잘 것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두 여자에게 자기만의 고유한 삶의 가치와 속박의 틀을 깨는데 일조한 것만은 확실하다.

 

두 소설의 히로인에 대한 이 같은 여성의 성적 자유와 전통적 결혼관의 해체에 못지않게 흥미로운 것은 무게감을 지니고 등장하는 조연들의 이야기다. 「폭설」에서 진주와 마침내 재혼까지 하게 되는 기의 정부(情婦)중 하나랄 수 폐미니스트의 지도자격인 아이린이라는 여성의 성적 자유, 즉 일종의 기호(嗜好)로서의 성을 결혼이라는 가족제도보다 우위에 두는 사적자유에 대한 신념은 신랄하게 붕괴하는데, 남편의 이혼선언, 기의 죽음으로 자기 욕망의 대상들을 모두 상실하게 된다. 반면에 「잠과 꿈」의 히로인인 혜기의 남편 순구의 외도, 그 외도의 상대인 경옥이하는 사랑의 집요함은 결국 결혼의 제도 속으로 유부남인 순구를 자신의 둥지에 사로잡는데 성공한다. 소설에서 결혼은 아주 상반되는 두 가지의 관념을 보여준다. 경옥에게 결혼은 제도로서 금기의 설정, 즉 외도의 방지이자 두 사람간의 충실성의 다짐, 구속의 명징성이다. 그러나 혜기에게 결혼은 금기의 위반이다. 금기인 타자와의 성행위가 합법적으로 금기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금기위반의 욕망은 이내 식어버린다. 이 이중성에서 여전히 사람들은 갈등한다. 금기의 태생적 매혹, 그리고 두려움 사이의 불안감....

 

소설이 써진지 40년 남짓 된 오늘, 소설적 상황은 역전되어 사랑을 기반으로 한 여성의 결혼관에 상충하는, 혹은 적응치 못한 남성들의 성적 자유의 토대는 혼란과 붕괴의 경계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영원히 충족되지 못할 불가능의 유혹이여! 사랑과 결혼의 장점만 취하기를 바라는 이율배반이여! 쓸쓸함과 자유의 갈망이 뒤섞인 작가의 독특한 바람이 내 가슴에도 일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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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 제안들 2
조르주 바타유 지음, 성귀수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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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생산적 소비의 열정에서 자연이라는 인간세계의 보편성을 통찰한 일반경제 이론으로부터 에로티시즘과 죽음, 그리고 그 도달 불가능의 신성이 곧 삶의 진실임을 설득하고자 한, 작가의 신념을 소설로, 또한 시로 만나게 되는 반가움이 있는 책이다. 두 편의 단편과 일종의 시론이라 할 수 있는 독특한 구성의 시편(詩編)을 만날 수 있는 이 책은 증오에서 이의 몰이해를 해소하기 위한 ‘불가능’으로 제목을 바꾸었던 작가의 아득한 아쉬움, 끝없는 열정의 헤맴의 정체를 발견하게 된다.

 

아마 인류가 인간의 형상을 한 이래 시달리는 고통의 본질을 규명하고, 마침내 그것을 극복하려는 행위 - 제도, 규범, 제의(祭儀), 종교 - 들에 내재된 진실의 발견을 향한 여정일 것이다. ‘조르주 바타이유’의 잘 알려진 저술 『에로티즘』의 전제인‘존재의 연속’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 추구의 실체를 상기할 수 있다. 불연속 존재인 개체의 연속적 존재로의 갈망은 내재적 본질이라는 것이다. 에로티시즘은 바로 이 본질적 현상일 뿐이다. 그러나 불연속 존재의 연속적 존재로의 이행과정인 이것이 고통이고 폭력을 수반하며, 존재 전체의 위기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비망록 1>과 <비망록 2>로 구성된 단편인 「쥐 이야기」, 일명 ‘디아누스의 일기’에서 연인 ‘E'의 알몸과 결합에 대한 갈망으로 고통스러워하는 화자(話者)의 이야기는 바로 연속성에 대한 희구인 에로티시즘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더구나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그의 주검에서 연속성의 가능성에 대한 쾌락적 탐닉을 암시하는 것에서 에로티시즘과 죽음의 유사성을 감지하게 된다. 두 번째 단편인 「디아누스(몬시뇰 알파의 비망록에서 발췌한 메모들)」는 화자의 고통의 실재에 대한 돋보기로 들여다보기라 해야 할까? 바로 존재의 연속 또는 죽음은 결국 동일한 것에 대한 다른 표현의 확인이라 할 것이다. 결국 삶이란 이‘불가능’의 추구일 뿐이다. 다시금 반복되는 얘기지만 인간은 이 존재의 연속성에 대한 내적 희구, 그 불가능성에 도달하기 위해 에로티시즘을 뒤좇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존재의 가능한 연속성을 향한 단세포의 미세한 존재들로부터 시작되는 그 내적 열망과 동요!

 

그리고 소설 전반에 흐르는 음란함이다. “음란은 동요(動搖)다!”라는 바타이유의 선언에 대한 실재를 확인 하게 된다. 알몸의 여체, 그것은 자아에 대한 소유권의 상실을 암시한다. 연속성, 결합을 향한, 그 불가능성에 도달하기 위한 열망이다. 위험을 무릅쓴, 또한 서로 떨어져 나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오는 고통, 더구나 이행과정의 폭력성을 포함하는 열정. 여기서 음란 자체는 고통의 한 형태에 지나지 않음을 목격하게 된다. 그런데 왜 인간은 고통인 음란을 좇는 것일까?

 

『에로티즘』에서 그는 “그 분출이 워낙 ‘경쾌하게’ 연결되다보니, 온갖 고통 중에서 가장 풍요롭고, 가장 광적이면서, 가장 탐낼 만한 유형이 된 것이다.”라고 답변한다. 결국 삶의 진실은 관능의 쾌락과 죽음이란 고통의 상극이 유리될 수 없는 것이며, 죽음과 그로인한 삶의 무한한 재생을 구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케 한다.

 

일종의 시론(詩論)이랄 수 있는 세 번째 수록된 「오레스테이아」에 이르면 시(詩)자체를 부정함으로써 시에 도달하려했던‘말라르메’를 연상케 하는 혹독한 고뇌를 접하게 된다. 그래서 시는“도달할 수 없는 가능성들에 대한 언어적 환기일 뿐”이며, “시에 다가갈수록 시는 내게 결핍 대상이다”라고 탄식을 쏟아낸다. 이것은 다시 회귀한다. 거부 할 수 없는 죽음의 불쾌함, 그 고통이 존재의 연속성을 드러냄을 알게 될 때, 또한 에로티시즘의 폭력성과 고통, 그리고 풍요로운 쾌락의 동일성을 확인하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그 불가능의 실체, 그 고뇌에서 살짝 풀려날 수 있음을. 아니 사랑에 빠진 ‘디아누스’(작가 혹은 화자)의 연인‘E’만이 실재의 진리라는 것을. E를 통해서만 삶의 복잡성에서 벗어나 존재의 단순성, 존재의 근본을 발견할 수 있기에.

이제 ‘사드’의 다음 구절로 이 책의 감상을 대신해야 할 것 같다. "죽음과 친숙해지려면 죽음과 방탕을 결합시키는 일보다 낳은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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