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 외 김지원 소설 선집 1
김지원 지음 / 작가정신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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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사랑? 이 둘이 끈끈한 관계를 맺어야 할 것 같지만 우리네 삶은 그 관계의 유지가 그리 녹록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지 않은가? 「폭설」과 「잠과 꿈」, 두 중편으로 구성된 이 작품들에서 공히 일어나는 감상이다. 소설이 써진 시기가 1970년대 중반이다 보니 시대적 반영에서 오는 진부함이 있지만 여전히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도 이 고통을 수반하는 물음은 여전히 과제이다. 설렘, 기대, 열정, 갈망..., 이들 감정이 퇴색하기 시작할 때 결혼이란 제도로 결합되어있는 두 남녀는 갈등하기 시작한다. 반복, 그리고 습관화 된 것의 색 바랜 남루함, 권태와 싫증으로부터의 탈출.

 

수록된 두 작품은 따로 떼어낼 수 없을 만큼 동일한 배경과 닮은꼴의 인물들이 열연한다. 뉴욕 그리니치빌리지, 사랑과 자유를 찾아 부유하는 여자와 남자, 그리고 어느 가을날 살갗을 스치는 스산한 바람의 애수(哀愁). 「폭설」의 히로인(heroine) ‘진주’는 짧은 결혼과 이혼, 그리고 마치 자기 반영이듯 제도적 구속을 거부하는 자유로운 영혼의 남성에 대한 매혹으로 갈등하는 여자이고, 「잠과 꿈」에서는 전통적 자기구속과 헌신이란 결혼의 굴레로부터 자기를 비로소 발견해 나가는‘혜기’라는 여성이 있다. 그런데 이 여성들의 자기 삶, 억압된 내적 욕망의 분출이 독립된, 주체적 각성이라기보다는 남성을 통해서야 달성되는 수동적 해방이라는 한계를 가진 듯 보인다.

 

이것은 이 작품을 시대극, 70년대의 안방용 드라마에 머물게 하는 요소가 아닐까하는 회의가 고개를 쳐들게 한다. 그러나 인간적 진실, 그 체험적 본성의 목소리를 기만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자문에 이 회의는 주춤거리게 된다. 두 작품의 히로인들은 제도적 속박, 윤리로서의 보편적 시선을 거부하고 개별적 존재자로서의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남성에 도취되어간다. 즉 다분히 문란함과 불륜에 대한 긴장의 매혹이다. 낯선 새로운 것에 대한 긴장, 흥분, 모처럼 느끼는 에너지의 과잉으로 야기되는 강직의 쾌락일 것이다. 결혼의 습관성과 반복성의 탈색과 사랑은 이처럼 충돌한다.

 

진주와 혜기를 해방으로 이끄는 남자들, 기와 홍의 성적 자유, 욕망의 얽매임 없는 발산을 점진적으로 자기 내면화함으로써 독립된 주체가 되어간다. 그런데 거창하게 제도적 속박을 거부하고 자유를 선언하고 자기 쾌락에 전념하는 그녀들의 남자는 이타심을 본질로 하는 사랑을 하는 이들이 아닐 것이다. 여성은 고작 자기애와 고독의 보완재일 뿐 인듯하다. 소위 요즘말로 ‘나쁜 남자’에 대한 여성들의 취약점을 체득한 교활함이지 않을까? 결국 이웃집 총기 오발사고로 하찮은 죽음을 하게 되는 진주를 길들이는 기의 이기심이나, 결혼의 진부함에 몸을 떨고, 페미니스트처럼 여성의 자유를 말하지만 자신의 경제적 무능을 의존하기 위해 남성적 매력을 이용하는 혜기의 남자 홍의 실체는 정말 보잘 것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두 여자에게 자기만의 고유한 삶의 가치와 속박의 틀을 깨는데 일조한 것만은 확실하다.

 

두 소설의 히로인에 대한 이 같은 여성의 성적 자유와 전통적 결혼관의 해체에 못지않게 흥미로운 것은 무게감을 지니고 등장하는 조연들의 이야기다. 「폭설」에서 진주와 마침내 재혼까지 하게 되는 기의 정부(情婦)중 하나랄 수 폐미니스트의 지도자격인 아이린이라는 여성의 성적 자유, 즉 일종의 기호(嗜好)로서의 성을 결혼이라는 가족제도보다 우위에 두는 사적자유에 대한 신념은 신랄하게 붕괴하는데, 남편의 이혼선언, 기의 죽음으로 자기 욕망의 대상들을 모두 상실하게 된다. 반면에 「잠과 꿈」의 히로인인 혜기의 남편 순구의 외도, 그 외도의 상대인 경옥이하는 사랑의 집요함은 결국 결혼의 제도 속으로 유부남인 순구를 자신의 둥지에 사로잡는데 성공한다. 소설에서 결혼은 아주 상반되는 두 가지의 관념을 보여준다. 경옥에게 결혼은 제도로서 금기의 설정, 즉 외도의 방지이자 두 사람간의 충실성의 다짐, 구속의 명징성이다. 그러나 혜기에게 결혼은 금기의 위반이다. 금기인 타자와의 성행위가 합법적으로 금기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금기위반의 욕망은 이내 식어버린다. 이 이중성에서 여전히 사람들은 갈등한다. 금기의 태생적 매혹, 그리고 두려움 사이의 불안감....

 

소설이 써진지 40년 남짓 된 오늘, 소설적 상황은 역전되어 사랑을 기반으로 한 여성의 결혼관에 상충하는, 혹은 적응치 못한 남성들의 성적 자유의 토대는 혼란과 붕괴의 경계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영원히 충족되지 못할 불가능의 유혹이여! 사랑과 결혼의 장점만 취하기를 바라는 이율배반이여! 쓸쓸함과 자유의 갈망이 뒤섞인 작가의 독특한 바람이 내 가슴에도 일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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